The supporting characters in horror novels want to live as human beings RAW novel - Chapter 43
(42)
“무슨 정리가 필요하다고 하시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잇새로 말이 으적으적 씹혀 나왔다.
하지만 유릭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손짓했다.
“그의 시종만 체포하면 되겠지? 우선 자리를 옮기세. 이렇게 다들 서 있는 것도 힘들텐데.”
태연하게 말하는 왕세자놈도 이젠 질린다.
울컥한 순간, 하얗게 질린 아른트가 눈에 들어왔다.
그걸 보자 유릭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몇 번이고 속으로 유릭을 찢어발겼다가 다시 붙여 놓으며 억지로 분을 삭였다.
“누추한데다 비도 새고, 쥐가 돌아다니는 폐성이라고는 해도 손님을 세워둘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안으로 맞이하겠습니다.”
“기꺼이 환대를 받아들이지.”
레안드로스는 안뜰에서 아른트와 함께 있으라고 한 후,
남작과 나와 유릭 왕세자만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응접실에는 의자도 테이블도 남아 있지 않아서 연회홀로 향했다.
성을 떠나기 전 문을 잠그지 않았는지 그대로 활짝 열렸다.
금박도 벗겨져 처참한 홀의 모습이 드러났다.
나는 개의치 않고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초라한 의자 세 개를 집어서 대충 자리를 만들었다.
“여기 앉으세요. 따로 내어 드릴 게 없어서 송구스럽습니다.”
“의자는 좀 바꾸지 그러나? 왕세자 시해 의심을 사고 싶지 않다면.”
“돈이 없어서요. 아니, 왕세자 전하께서는 거기 말고.”
나는 촛대 달린 기둥 앞에 옮겨둔 의자에다 유릭을 앉혔다.
“여기 앉으시지요.”
“?”
“기둥이 외풍을 막아줍니다.”
셋이 그렇게 자리를 잡자 긴장된 분위기가 흘렀다.
남작은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까 이야기를 이어나가자면…….”
“잠시 그 전에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왕세자 전하.”
나는 남작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까 남작의 기사들이 제 시종을 대하는 자세를 보아하니 이 말씀만은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제 시종이 범인이라고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리 겁박을 주시다니.”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공작님? 제 기사까지 욕보이시는 겁니까?”
유릭은 나를 응시하다가 남작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남작은 휘하의 병력을 정렬하고 오도록.”
“왕세자 전하, 저는.”
“지금은 그러도록 해. 공작의 말대로 시종이 의심스러운 것은 맞으나, 확실히 그렇다고 확정이 나진 않았으니. 여기는 공작의 성이고, 그대의 기사들이 저지르는 일에 대한 처분은 공작에게 있네.”
유릭의 말에 남작은 나를 죽일 듯이 보다가 연회홀을 나섰다.
홀의 문이 닫히자마자 나는 바로 참지 못하고 뱉었다.
“제 시종을 사용해서 오시다니, 머리도 좋으십니다. 보는 눈도 없으니 솔직해지시는 게 어떻습니까, 전하?”
“화가 났군, 공작.”
화가 났군?
유릭의 머리털을 다 쥐어뜯어서 가장 높은 꼭대기에서 떨구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아른트와 레안드로스를 떠올리며 숨을 천천히 골랐다.
진정해라, 유예성. 진정해라, 이 몸.
“함부로 간 보지 마시고 필요하신 걸 말씀하시지요. 남부 ‘사업’에 대한 계시? 아니면 동부의 구덩이 안에 있는 별걸음쟁이에 대해서? 뭐가 필요하신 겁니까?”
유릭의 눈이 답지 않게 동그래졌다.
그러다가 곧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누가 봤다면 감탄했겠지만 지금 내 눈에는 그런 게 들어올 리가 없었다.
유릭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공작은 말이 빨라서 좋아. 전대 공작부인과 이런 점도 닮았군. 하지만 우호적인 태도라 더욱 마음에 들어.”
“할 말만 하시죠.”
“그대의 말처럼 남부에 대한 일이 맞아. 하르트만의 계시가 필요해.”
결국 거긴가.
예상은 했지만.
유릭은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이번 동부의 구덩이가 폭주한 건 변수 밖의 일이었어. 원래대로라면 그 안에 있는 것도 별걸음쟁이 따위가 아니고. 하지만 새로 갈아치울 수 있는 동부 구덩이와 다르게 남부는 그러기가 어려워서 말이야.”
“남부에 동부 같은 구덩이는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해저에 있어서 보이지 않을 뿐이지. 오래 전에 아래로 가라앉았거든.”
해저의 구덩이.
유릭은 남부의 해구를 말하고 있었다.
그는 골몰히 생각하면서 쉴 새 없이 팔걸이를 두드렸다.
“동부에서 폭주가 일어난 것과 달리, 남부 구덩이는 침체 상황이라서. 그대가 가서 깨워줬으면 해.”
“제가 어떻게요?”
“그건 그대가 알아봐야 하지 않겠나? 듣기로는,”
그는 나를 바라봤다.
빨간 눈에 내가 작게 비치는 게 소름이 돋았다.
“하르트만은 이런 쪽에 일가견이 있잖아. 아니면 그 분께서 계시를 내려주길 기다려야하나?”
하르트만의 그 분.
몇 번이고 등장하는 이름에 나는 호기심 이상의 짜증을 느꼈다.
유릭이 그 분 그 분 거리니까 꼴 보기 싫었던 걸지도 모르지만.
“어인들에게 안 좋은 기억이 있어서 남부는 싫은데요.”
“왜? 물어뜯기기라도 했나? 앞으로는 친해져야 할 거야.”
유릭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비딱하게 유릭을 쳐다봤다.
“남부 해구에 구덩이를 지키는 병사라도 배치해두셨나요.”
“병사? 하하하. 그럴지도 모르지.”
뭐가 좋다고 웃어?
유릭은 자기 망토를 툭툭 털더니 문 쪽으로 향했다.
“어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서 좋아. 하지만 너무 걱정 말게, 나도 곧 남부로 갈테니까.”
“오지 마시고 왕성에만 계시죠.”
“그대는 참 재미있어. 아놀드 남작과는 내가 잘 이야기해 보지. 어차피 그대도 알고 있잖아.”
허름한 문을 열고 나가려던 그는 나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내가 한 짓이라는 거.”
그리고 문이 닫혔다.
나만 남은 고요한 연회홀에서 얼음장 같은 주먹을 꼭 쥐고 있었다.
동부, 남부, 그리고 죽음.
계시가 나를 이끌고 있었다.
* * *
그들이 떠나고 나서 성은 초상집 분위기였다.
유릭이 아놀드 남작을 뭐라 구슬린 건지는 모르지만, 아놀드 남작과 유릭은 함께 성을 떠났다.
아놀드 남작은 끝끝내 나를 보지 않았다.
유릭만이 ‘잘 부탁하네’라며 말했고.
그 때문에 아른트는 자기 때문에 내가 유릭에게 협박을 당한 줄 알고 있었다.
“저는 쓸모가 없어요.”
식탁 앞에서 아른트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다 같이 주방에서 저녁 식사를 하던 참이었다.
식당 대신 주방의 조리대를 그득 채운 맛있는 음식 앞에서 아른트는 빵만 북북 뜯고 있었다.
나는 급하게 말했다.
“너 아니면 누가 이렇게 맛있는 거 차려줬겠어.”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아까부터 안 드시고 계시잖습니까……!”
윽. 들켰다.
레안드로스는 나를 흘긋 보더니 묵묵히 수프를 퍼먹었다.
레안드로스조차 우울한 아른트를 상대하기는 버거운 모양이었다.
나는 아른트를 애써 위로했다.
“왕세자 전하와는 별 일 없었다니까.”
“하지만 공작님 얼굴을 보면 그런 것 같지 않은 데요.”
“기분 탓이야. 다들 아까 너무 놀라서 그런 거야. 아놀드 남작과 잘 이야기해 보시겠다고 하고 데려간 것도 왕세자 전하셔.”
내 입으로 유릭을 실드칠 날이 오다니.
하지만 아른트 앞에서 옳다구나 유릭을 욕할 순 없었다.
아른트가 이미 힘들어 하고 있는데 무슨 생각을 더 심어 주려고!
……이렇게 하니 왠지 부모가 된 기분이지만 그건 잠시 잊어버리자.
아른트는 축 쳐져서 나를 흘긋 봤다.
“정말인가요? 저는 범죄자가 아닙니까?”
“그럼. 내가 왜 널 범죄자로 만들겠어.”
“공작님께서도 괜찮으시고요?”
“당연하지.”
“……수프는 좀 입에 맞으세요? 더 드세요. 많아요.”
나는 바로 수프를 퍼먹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른트의 표정이 약간 돌아왔다.
그렇다고 해도 저조한 텐션은 되돌릴 수 없었지만.
나는 최선을 다해 입 안에 음식을 욱여 넣으면서 레안드로스를 눈짓했다.
식사를 하던 레안드로스는 말했다.
“식사 하시는 건 간만에 보는 것 같습니다.”
“응? 무, 무슨 소리야.”
“동부로 가실 때도 건량은 입에 하나도 대지 않으셨잖습니까. 물만 조금 드셨지요. 속이 좋지 않으시다며.”
내가 널 본 이유는 폭탄 발언을 하라고 한 게 아니란다.
아른트의 입이 쩍 벌어지는 걸 보자마자 조리대 밑으로 레안드로스의 다리를 걷어찼다.
레안드로스는 혼란스러워하며 나를 보다가 눈을 부릅뜬 내 얼굴을 확인하고 나서야 ‘아.’ 하는 소리를 냈다.
“……내 착각이었을지도 모르겠군.”
“아뇨, 방금 경께서 도련님이 입에 댄 거 없다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식사를 안 드신 거예요!”
“드신 것 같다.”
“맞아. 먹었어.”
“두 분 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아른트는 비명을 지르며 내 접시 위로 빵이니 닭고기니 하는 걸 그득그득 쌓아 줬다.
과장 약간 보태서 쌓인 음식이 내 얼굴을 가릴 지경이었다.
나는 내 접시를 채우는 아른트를 만류했다.
“성에 왔으니까 괜찮아! 그보다 사 온 걸 오늘 식사에 다 쓴 거 아냐, 아른트?”
그런 걱정이 들 정도로 저녁 식사는 호화스러웠다.
난로에서 잘 익힌 노릇노릇한 통닭, 커다란 빵. 감칠맛 나는 국물이 일품인 야채 수프. 커다란 치즈 덩어리를 얇게 자른 것. 양배추와 얇은 돼지고기를 겹쳐서 화덕에 구운 것. 으깬 콩과 달걀, 달콤한 맛이 나는 감자.
누린내가 나는 말린 짐승 고기나 곡물이 둥둥 떠 있는 물죽과는 사뭇 비교되는 식탁이었다.
아른트는 어깨를 쫙 피고 답했다.
“그간 두 분의 영양 상태에 너무 무관심했었죠. 이제는 맞춤으로 꼼꼼히 챙겨드릴게요.”
“맞춤이면 레안드로스와 내 식사가 다른 건가?”
“당연하죠, 공작님. 저희가 지금 이 모양이라 그렇지 원래대로라면 공작님과 저희는 겸상도 못 하는 법이랍니다.”
오, 따로 식사를 준다고.
나는 스푼을 입에 문 채로 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다 같이 먹는 게 맛있잖아. 당분간은 같이 먹자.”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어요. 맞춤으로 드릴 거예요.”
“나는 어떻게 줄 건데?”
“일단 하루에 다섯 끼니를 먹여서 건강을 회복시켜 드리려고요.”
“레안드로스는?”
“움직임이 많으시니 하루에 다섯 끼니를 드려서 힘을 보충시켜드리려고요.”
그냥 하루에 다섯 끼 먹게 생긴 하르트만 집안이잖아.
나는 아른트의 식생활 계획을 들으며 결국 접시를 다 비워냈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중정에 나가서 먹은 것을 전부 토해냈다.
음식물은 내가 씹은 대로 형체가 뒤틀렸을 뿐, 하나도 소화되어 있지 않았다.
심지어 빵쪼가리 하나조차.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나는 내 손을 몇 번 쥐었다 폈다.
-동부로 가실 때도 건량은 입에 하나도 대지 않으셨잖습니까. 물만 조금 드셨지요. 속이 좋지 않으시다며.
저녁식사에서 레안드로스가 지적한 바와 같았다.
음식물을 섭취한 지 며칠이나 지났지만 몸은 멀쩡했다.
물과 음식이 없어도 이 몸은 살아간다.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작동한다.
이유는 아무것도 모른다.
왜인지, 점점.
“인간이 아닌 것 같아…….”
무심코 튀어나온 말이 끝나자마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자, 바로 지척에 레안드로스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