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pporting characters in horror novels want to live as human beings RAW novel - Chapter 48
(47)
“어인이다.”
레안드로스는 거대한 천 뭉치를 바닥에 던졌다.
쉴 새 없이 꿈틀거리는 천뭉치는 바닷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몇 겹이나 되는 천으로 칭칭 두르고, 거기다가 밧줄로 꽉꽉 묶어둬서 탈출할 염려는 없었다.
유일하게 드러나 있는 부분은 꼬리와 얼굴 정도가 전부였다.
생포한 어인을 본 에리히는 입을 떡 벌렸다.
주춤거리며 인어에게 가까이 가던 에리히는 아른트에게 가로막혔다.
“왜, 왜 그러는가! 관찰 좀 하겠다는데!”
“사람 송장 칠 일 있어요? 눈이 있으면 얼굴 좀 보시죠!”
아른트의 판단이 옳았다.
어인은 상당히 포악해져 있었고, 인간을 꼬여내기 위한 미형의 상태에서 벗어나 있었다.
척 봐도 귀까지 입이 벌어져서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데 뭘 보고 다가간단 말인가.
[돌려보내줘! 풀어!]“그건 안 돼.”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너도 전생에서 나 안 돌려보내줬잖아.
귀 따갑게 외치는 어인에게 무심코 대답하며 축축해진 망토를 벗었다.
포획할 때 바닷물을 장난 아니게 맞아서 쌀쌀할 지경이었다.
내가 망토 끝에서 방울지는 물을 쥐어짜내고 있을 때, 문득 사방이 조용하다는 걸 깨달았다.
주변을 보니 에리히와 아른트, 그리고 레안드로스까지 나를 보고 있었다.
“……왜 그래? 나 뭐 잘못한 거 있어?”
“어인에게 말을 거십니까?”
“그러면 안 되나?
레안드로스의 질문에 어리둥절해진 건 내쪽이었다.
마수종과 말을 섞으면 안 된다는 규칙이라도 있었나.
하지만 아른트가 다급하게 말했다.
“그게 아닙니다. 어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십니까, 공작님?”
“다 들리잖아?”
어인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풀어달라고 노래하고 있었다.
이게 안 들리면 귀에 이상이 있는 게 아닌가.
에리히는 멍하니 나를 보다가 침을 꿀꺽 삼켰다.
“나, 나는 어인의 말을 배웠지만 그들의 신호를 전부 이해하는 건 아니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어인들은 우리와 달라. 그들의 언어는 선율과 음이지. 각자의 의사소통 체계는 인간과 개, 고양이의 언어만큼이나 다르단 말일세!”
나는 꿈틀거리는 어인을 내려다봤다.
어인은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이게 안 들린다고?”
“제 귀에는 높은음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공작님.”
내가 중얼거린 말에 아른트가 답했다.
혼란스러워져서 레안드로스를 쳐다보자, 레안드로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암초 위에서 공작님께서 하신 말씀은 단순한 혼잣말이 아니셨군요.”
“그게 어떻게 혼잣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
“말을 할 수 없는 동물에게 말을 거는 사람이 특이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어이가 없다.
착잡한 심정으로 인어를 노려보자 에리히가 허겁지겁 나섰다.
“오, 오히려 지금은 기회일세! 어인과 뜻이 통한다면 남부에 있던 일을 상세히 들을 수 있지 않겠나.”
“어인과 이야기를 하는 게 갑자기 꺼려지기 시작하는데요.”
“그런 말 말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건 자네뿐일세. 어서 해보게, 어서!”
에리히의 극성에 나는 주춤거리면서 인어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레안드로스는 만일을 위해 내 옆에 서서 인어를 감시했다.
하지만 막상 말을 걸려니 뭔가 막막했다.
그도 그럴게 전생에서 인어가 말해줬던 내용을 굳이 물어볼 필요는 없었으니까.
다른 정보를 캐볼까.
“너도 해구를 지키고 있나?”
[풀어! 풀어, 미소생물만도 못한 인간!]“해구에 뭐가 있는지 알고 싶은데.”
[저주할 테다! 너희 전부를 저주해버릴테다!]……이래서야 대화가 성립이 되지 않잖아.
내가 레안드로스를 보자 그는 눈치 빠르게 물었다.
“잘 되지 않으십니까?”
“반항하는데. 이럴 때 좋은 조언이 필요해.”
“로타어를 심문한 것처럼 하길 바라신다면 기꺼이.”
“아니, 그 정도는 아니고.”
심문이 끝나고 내가 로타어의 금화를 갈취할 때 로타어를 끌고 방을 나서던 레안드로스가 떠올랐다.
레안드로스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조언을 건넸다.
“협상을 해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협상?”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상대가 바라는 걸 하나 내줘야 하는 법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인에게 뭘 줄 수 있지?”
레안드로스는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어인의 목숨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협상은 내가 어떻게든 잘 해볼게.”
이 세계관, 쉽지 않다!
목숨과 정보가 등가교환되는 광기투성이 세계관이었다는 걸 잊고 있었어!
나는 거의 천을 물어뜯는 어인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금발에 빨간 눈을 한 인간을 알아? 너희가 지키는 해구에 대해서 궁금해 하던데.”
인어의 움직임이 순간 멈췄다.
맹렬하게 증오하는 시선이 내 얼굴 위에서 머물렀다.
[그 인간? 그 인간이 보냈나?]“그렇다고 하면?”
[그놈에게 가서 전해라, 해저에 잠든 분은 우리 종족 모두를 바쳐도 절대 깨어나시지 않을 거라고!]“그게 무슨.”
해저에 잠든 분.
종족 모두를 바친다고?
-쫓겨났거든. 바다 밑에서 쫓겨나서, 혼자 죽기는 외로워서.
-죽기 싫다고 했어. 그래서 벌을 받은 거지.
-그럼. 아주 옛날부터 그렇게 되어 있었어.
어인들은 전생에도, 지금도 해저의 존재를 깨우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종족 전체를 바쳐도 깨울 수 없는 존재.
어인들은 죽기 싫다고 한 동족을 쫓아냈다.
동족을 제물로 바치는 어인들이라면, 그만큼의 숭배와 제물을 필요로 하는 어떤 존재가 해저에 잠들어 있다면.
“공작님?”
레안드로스가 불렀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머릿속의 조각이 하나씩 맞춰졌다.
유릭은 동부의 구덩이에 있던 별걸음쟁이를 가리키며 ‘원래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에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유릭이 동부에서 하려던 일의 실패 여부에만 온 관심이 쏠려 있었지.
남부의 해구.
동부의 구덩이.
남부의 바다에 있는 어인들.
동부의 사업을 위해 모인 사람들.
남부의 어인들을 바친 희생제.
동부 구덩이 안으로 뛰어내리던 이들.
남부에는 올바른 존재가, 동부에는 틀린 존재가.
레안드로스의 직감이 맞았다.
남부에서 일어날 일은 내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수준의 대재앙이었다.
남부에서 끝날까?
아니, 그럴 것 같지 않았다.
동부와 남부에 이어서 북부와 서부까지 이 일이 퍼진다면.
유릭의 목적은 뭐지?
알 수 없는 존재를 깨워서 뭘 하려는 거지?
갑작스럽게 다가온 거대한 멸망의 징조.
그 멸망은 분명 이 소설의 엔딩일 것이다.
주인공조차도 생존 여부를 짐작할 수 없다.
엑스트라는 전부 사라질 게 분명한, 너무나도 확고하게 예정된 결말.
내가 노력한다고 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주인공 옆에 붙어 있다고 해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고.
빌런과 히어로.
그 사이에서 엑스트라는 형편없이 찢기고, 갈려나가서, 결국에는 사라진다.
아멜리아처럼.
아이든처럼.
내가 이름을 모르는 엑스트라들처럼.
의지를 가졌지만 그 의지는 본인에게서 비롯한 게 아니다.
이 세상이 부여한 거짓된 의지일 뿐.
만일 나도 그렇다면?
내가 움직이고 상상하는 게 내 의지가 아니라면?
유릭에게 죽는 게 내 역할이자 정해진 엔딩이라면,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면,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공작님!”
누가 내 어깨를 콱 쥐었다.
바로 앞에 심연같이 새까만 눈이 있었다.
그제서야 스스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턱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인어는 여전히 저주의 말을 내뱉고 있었고, 아른트는 내 등을 받치고 있었다.
“공작님, 괜찮으세요? 인어가 이상한 사술을 쓸 수도 있느냐고 아까 물었잖아, 이 돌팔이야!”
“아, 아니, 하지만 인어는 연구가 아직 부족해서 아무리 나라도 모르는 게.”
“조용히 해, 돌팔이!”
아른트는 에리히를 윽박질렀다.
레안드로스는 내 눈이 제대로 초점을 맺고 있는지 확인한 후 어깨를 놓았다.
“일시적인 증상으로 보입니다. 숨을 깊게 쉬십시오. 의식적으로 내뱉으시면서 눈앞에 있는 것에 집중하시는 게 좋습니다.”
“당장 돌아가죠, 공작님. 남부 일에 신경 쓰지 마세요. 왕세자가 저를 두고 공작님을 협박했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공작님께서 이러실 바에야 그냥 옛날처럼 평생 떠도는 게 마음 편해요!”
“그게 지금 공작님 앞에서 할 소린가?”
“그럼 어떡해요, 저한테는 제 목숨보다도 공작님이 최우선이라고요. 경은 아니세요!?”
“누가 아니랬나! 목소리 좀 낮추지 그래.”
땀을 닦아주며 두려움과 걱정으로 가느다랗게 떨리는 손길.
그런데도 허세를 부리며 내가 우선이라 말하는 이들.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리하겠다 하는 말에 불현듯 현실감이 찾아 들었다.
그들은 한낱 텍스트가 아니었다.
그들은 살아 있고, 내 앞에서 숨을 쉬고 있었다.
그들을 묘사한 텍스트는 차가울지언정 두 사람의 체온은 뜨거웠다.
이들에게도 피가 흐르고, 심장이 뛰고 있다.
사람을 걱정하고, 웃고, 분노하고, 슬퍼한다.
여기가 가상의 세상이라고 해도 지금 느끼는 감각과 감정은 진짜였다.
나는 나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주인공을 빌런의 대항마로 생각했다.
아른트가 아이든에게 빚진 마음을 쉽게 위로했다.
아멜리아의 죽음을 어쩔 수 없는 장치로 여겼다.
나의 오만이 부메랑처럼 되돌아오고 있었다.
내 고통과 슬픔만이 진짜일 리가 없는데.
나는 대체 뭘 하고 있던 걸까.
한 번 죽으려고 했던 주제에 뭐가 무서웠던 거지.
이런 사람들을 두고 고작 유릭 따위에게.
“괜찮아. 이제 괜찮아졌어.”
“정말 괜찮으세요, 공작님?”
“진짜 괜찮아.”
어느새 바닥에 주저앉았나 보다.
몸을 제대로 일으키자 아른트가 조심스럽게 등을 다독여주었다.
내가 다시 쓰러질까봐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아른트를 보다가 그의 허벅지를 철썩 때렸다.
“아야! 왜 그러세요, 공작님?”
“벌레 있어서.”
“히익. 고, 고맙습니다.”
별 거 아닌 반응인데도 조금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웃으니 아른트와 에리히가 나를 이상한 눈으로 봤다.
방금전까지 식은땀 흘리면서 호흡 곤란으로 쓰러졌던 사람이 갑자기 웃으니 이상한가 보지.
나는 레안드로스가 내민 손을 잡고 일어났다.
“갑자기 웃어서 미안해, 방금전에는 피곤했나봐. 여러 가지 일이 많다 보니까. 그런 것보다 인어는…….”
어인은 이제 씨근거리면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예쁜 얼굴이 그렇게 있으니 무섭지도 않았다.
나는 그를 보다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너희가 바라는 일을 이루려면 얼마나 큰 대가를 지불해야하지?”
[하! 감히! 너희 같은 피라미들이 천 마리가 모여도 불가능할 일을 입에 담다니!]어인의 눈길이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넌 좋은 냄새가 나니 너를 그 분께 바친다면 혹시 모르지. 당장이라도 깨어나실지.]“내……. 다른 것과 뭔가 다른 점이 있는 건가?”
[피라미 속에 숨어있어도 그 태는 눈에 띌걸. 언젠간 들킬 것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뼈도 남기지 않고 씹어 먹힐 것이다!]좋은 냄새라.
이전의 삶에서 반쯤 뜯어 먹힌 이유가 그래서였나.
환한 달이 반쯤 이지러지고 있었다.
나는 그걸 보다가 레안드로스에게 물었다.
“왕의 길을 사용하면 수도에서 여기까지 며칠이 걸리겠어?”
“밤낮 내내 달린다면 열흘 안에도 주파할 수 있습니다.”
열흘이라.
머릿속으로 얼추 셈을 마친 나는 어인을 둘러싼 끈을 풀기 시작했다.
주변이 동요했지만 나는 계속해서 천을 파헤치며 말했다.
“거래를 하자. 그가 내게 시킨 건 네가 바라는 것과 같아. 열흘만 있으면 그가 올 거야.”
어인이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어인에게도 유릭이 온다는 이야기는 반가운 소식이 아닌 모양이지.
축축한 천 위에서 나를 올려다보는 어인은 의심의 눈길로 날 보고 있었다.
[뭘 원하지?]“바라는 것 하나를 주지. 전부는 안 돼. 내가 바라는 건 그것이 깨어나는 시기를 앞당기는 거야.”
[무슨 속셈이냐?]“아무것도. 너희는 바칠 게 필요하잖아. 그러니 내게서 원하는 걸 하나 가져가.”
어인은 나를 한 번 더 훑었다.
한참 계산하던 요사스러운 눈이 나와 마주쳤다.
눈을 뚫어져라 보던 어인은 결국 웃었다.
[좋아. 거래한 거야. 우리의 지느러미에 걸고 맹세해.]그 갈퀴 같은 손이 뻗어올 때 나는 눈을 뜨고 있었다.
곧 여러 사람의 비명이 밤의 해안가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