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pporting characters in horror novels want to live as human beings RAW novel - Chapter 52
(51)
연극에서 막이 내리면 모든 등장인물들은 무대에서 내려간다.
다음 극이 시작될 때까지 무대가 비는 것이다.
하지만, 만일 두꺼운 커튼 뒤에 남아있는 등장인물이 있다면?
그 등장인물은 무엇을 보게 될까?
무엇을 보든 적어도 이렇게 황량한 풍경은 아니리라.
퍼석퍼석한 땅.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부서진 석재 건물들.
밤인지 낮인지 가늠할 수 없는 회색 하늘.
공기 중에는 부연 바람이 감돌고 있고,
머리 위로는 낯선 성단이 그려졌다.
여긴 어딜까.
나는 정처 없이 걷기 시작했다.
따뜻하지도 춥지도 않고,
아프지도 간지럽지도 않은 채로.
부유하는 망령이나 유령같이 느리게.
도움을 요청할 곳을 찾아 헤매는 건지, 아니면 그저 이 공간에 있는 존재를 확인하고 싶었던 건지.
걷기만 하던 내 앞으로 작은 언덕이 비죽 솟아 있었다.
고철을 쌓아둔 것 같은 그 위에 누군가가 앉아있었다.
멀리서 봐도 눈에 띄는 노란 망토.
망토는 언덕의 대부분을 덮을 정도로 길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그 사람은 언덕 위에 웅크린 채로 거대한 책에 뭔가를 쉴 새 없이 쓰고 있었다.
“저기요.”
그는 얼굴을 들지 않았다.
하지만 뭔가 낯이 익었다.
체구나 움직이는 동작이 무척 오랫동안 봐온 것 같았다.
나는 천천히 언덕을 기어올랐다.
두 손과 두 팔을 써서 간신히 산에 오르고 나서야 그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눈도 한 번 깜박이지 않고, 계속해서 종이를 빼곡하게 채워나가는 그는.
“-■■■.”
낯선 발음이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가 쥐고 있던 펜이 멈추더니 고개를 들었다.
“형.”
“너…… 네가 왜 여기 있어.”
네가 왜.
이 빌어먹을 세상에 있는 거야.
여긴 소설 속이 아니었어?
아니면 내가 죽어서 지금 천국이나 지옥에 온 거야?
우리는 지금 어디 있는 거야?
나 진짜, 이번에야말로 죽은 거야?
무수한 의문이 떠올랐다.
■■■은 제가 있던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사람처럼 주변을 둘러봤다가 다시 책을 끌어안고 웅크렸다.
나는 그 앙상한 어깨를 잡았다.
“■■■. 나 봐봐. ■■■. 여기서 뭐 해.”
“형.”
“네가 여기서 뭘 하고있는 거냐고!!”
윽박질러도 동생은 어딘가 넋이 나가 있었다.
텅 빈 눈으로 책과 펜을 꽉 안고 뭔가를 중얼거릴 뿐이었다.
“■■■!”
“나갈 수가 없어.”
“뭐라고?”
“나갈 수가 없어.”
“지금 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몇 번이나 썼는데, 전부 고쳐서 다시 썼는데, 계속해서 썼는데, 계속 나갈 수가 없어…….”
반복해서 ‘나갈 수 없다’는 말만 되뇌이는 동생.
나갈 수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고.
이 이야기를 쓴 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잖아.
나는 동생에게서 거대한 책을 뺏어서 펼쳤다.
되는대로 휘갈겨 쓴 이야기. 그 위를 펜으로 죽죽 그은 흔적도, 뜯어버린 페이지도 보였다.
이 책은 이 세상의 이야기.
첫 페이지로 돌아간 나는 낯익은 최초의 문장을 봤다.
[세 사람이 하르트만 성으로 돌아왔을 때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아른트, 레안드로스, 그리고 아렌하이트.
모든 이야기의 시작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전개를 거쳐 엔딩으로 향한다.
[……레안드로스는 최후의 일격을 내지르고 유릭과 함께……] [……그렇지 않다면, 유릭을 해치우고 사랑하는 사람과 일평생을……] [그것도 아니라면 유릭에게 복수를 마친 그는 대륙을 영원토록 방랑하며 눈을 감을 때까지……]누군가는 살아남거나, 혹은 죽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제3의 선택을 하거나.
이게 바로 이 이야기의 끝이었다.
아니, 잠시만.
‘이상해.’
이 이야기의 엔딩은 몇 개인 거지?
좋든 싫든 하나의 이야기에는 하나의 엔딩이 존재한다.
멀티버스적 엔딩 같은 건 어디까지나 독자들이 상상하는 영역일 텐데.
고개를 들어 동생을 보자, 이제 그는 자신의 무릎을 꼭 안고 몸을 앞뒤로 흔들고 있었다.
“■■■.”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이럴 줄 알았으면 여기 오지 않았을 텐데. 이럴 줄 알았더라면 절대로 그 사람과 그런 약속 안 했을 텐데. 나,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여기서 나갈 수가 없어. 아무도 나갈 수 없어. 절대 나갈 수 없어.”
“무슨 약속을 한 거야? 누구랑?”
“이야기, 희극을 바쳐야 하는데, 그가 만족할 만한 희극을, 하지만 내게 힘이 없으니 직접 주겠다고. 나에게 노란 망토를 주고, 노란 왕관을 씌워주고, 내 이야기를 가져가서.”
“네게 뭘 줬다고.”
공허한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노력했는데, 아무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잖아. 그래서 노력했어. 이야기는 수정할 수 있으니까, 몇 번이고 계속해서 새로 썼어. 몇 번씩이나 돌아가고, 다시 쓰고, 또 돌아갔는데. 그런데도 실패했어.”
“돌아가다니, 그게 무슨 말…….”
그 순간 딛고 있던 발이 미끄러지며 뭔가를 아래로 걷어찼다.
휘청거리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거기에는 익숙한 물건이 있었다.
검은 돌 목걸이.
목걸이는 누군가의 손에 걸려 있었다.
그 손은 이 작은 동산에서부터 솟아 나온 것이었다.
천천히 시선을 내리자, 나는 여러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아른트.
전 공작부인.
전 공작.
아멜리아.
로타어.
그리고 레안드로스까지.
한 명이 아니었다. 무수한 아른트, 무수한 아멜리아, 무수한 레안드로스가 있었다.
그들은 마치 폐기당한 인형처럼 늘어져서 쌓였고, 이 작은 산을 이루고 있었다.
그걸 보자마자 바로 깨달았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뜯어고친 이야기.
인지하지 못한 채로 몇 번이나 회귀한 이들.
수 없이 많이 죽고, 수 없이 많이 살아난 사람들.
그리고 누군가가 ‘만족할 만한’ 이야기를 쓸 수 없었기 때문에, 세상이 끝날 때까지 영겁 동안 시체들 위에 앉아 있었을 내 동생.
현실에서는 이미 죽었는데도, 안식조차 찾지 못한 채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치밀었다.
분노, 절망, 그런 것들이 한데 섞였다.
그 끝에 나온 말은 단 한 마디였다.
“나갈 수 있어.”
“나갈 수 없어, 나갈 수가…….”
“나갈 수 있어! 허튼소리 하지 마. 나갈 수 있으니까!”
내가 들고 있는 거대한 책에는 아직 빈 페이지가 많이 남아있었다.
책을 꽉 쥐자 쓰다만 페이지가 와작 구겨졌다.
여기에 그놈인지 뭔지가 만족할 희극을 하나 써주면 된다는 거 아니야.
“할 수 있어. 내가 할 수 있어! 그러니까 그런 소리 하지 마. 너는 여기서 나갈 거고, 나도 나갈 수 있어. 이 개 같은 이야기의 엔딩을 보여주면 되잖아!”
무료연재 사이트에서 쏟아졌던 비평을 기억하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나다.
재미가 없다, 설정이 오락가락한다, 설명이 길다, 읽기 힘들다.
그래, 이 세계관은 엉망이야.
뭣만 하면 죽어 나가고 한 번 꽂힌 플래그는 뽑히지도 않아.
툭하면 죽어 나가는 세상이라고!
그렇다면 그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엔딩을 보여주면.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면.
그렇게 되면, 이렇게 알 수 없는 장소에서 혼자 절망하고 울부짖던 너도.
“……내가 쓸게. 너는 그냥,”
이제는 편하게 잘 수 있었으면 해.
우리는 힘들지 않았던 순간이 없었으니까.
나는 동생을 뒤로하고 책을 가진 채로 시체들의 동산을 미끄러져 내려왔다.
누군가의 손에 걸려 있던 호각도 빼내는 데 성공했다.
검은 호각은 내가 지난 회차에서 가지고 있던 것과 달리 길쭉했다.
유릭이 두 개의 돌 조각을 하나로 합치던 장면이 기억났다.
이게 원래 상태의 호각인 걸까.
-휘이이익!
호각을 불자, 찢어지는 바람 소리와 닮은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폐허가 된 도시 구석구석까지 퍼진 소리.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어느새 소리도 없이 얼마간 떨어진 곳에 정박한 생명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흉측한 괴조怪鳥.
눈과 코와 입이 없는 대신 온갖 세밀한 솜털과 더듬이가 돋아난 머리.
살갗이 없고 그 아래로 드러난 굵은 핏줄이 온통 쿵쿵 맥박치는 것 같은 몸.
그 뒤로 길게 이어지는 꼬리.
앞발이 없는 대신 박쥐 같은 피막의 날개가 붙어 있었고, 날개를 지지하는 뼈의 일부를 앞발처럼 쓰는 것 같았다.
보기만 해도 흉측하고 끔찍한 괴수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놀라서 몸이 얼어붙었다.
하지만 그것은 섣불리 내게 다가오거나 괴성을 지르지 않았다.
다만 차분히 그 자리에서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마치 명령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 괴수에게 다가갔다.
내 키보다 두 배는 더 큰 괴조는 내가 팔을 뻗자 머리를 숙였다.
끈적끈적한 촉감, 기분 나쁜 감각.
그런데도 손을 뗄 수가 없어서 쓰다듬다 보니 괴조가 내게 자신의 주둥이를 들이밀었다.
길쭉한 주둥이를 만지고 있자니 뭔가 익숙한데.
그러니까, 지금 이 행동은.
“내 말.”
두 번째 삶에서 샀던 검은 색의 말.
콧잔등을 쓸어주면 고분고분해지던 그 말.
이게 그 말이라고?
혼란스러움 속에서도 충실하게 손을 움직이며 속삭였다.
“너는……. 아, 아직 이름도 안 붙여줬지. 미안하다. 원래 이름이 어떻게 돼?”
-키르르륵.
“그런 거 없다는 뜻이야? 그렇게 들리는 것 같은데. 지금 우리가 말이 통한 건가?”
괴조의 눈이 있을 법한 장소가 내 쪽을 향했다.
나는 끈적한 피부를 문질러주다가 문득 좋은 생각이 나서 물었다.
“너만 좋다면 이름을 주고 싶은데. 우리는 다음 생에서도 만날 테니까. 계속 말의 형태를 유지할지는 모르겠지만.”
-키륵.
“다음에 또 만난다면 슬레이프니르……. 슬레이는 어때?”
북유럽 신화에서 등장하는 말.
지혜의 신이자 신들의 왕, 오딘의 애마이자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 수 있다는 존재.
괴조는 마음에 든 건지 별 대꾸가 없었다.
나는 이제 슬레이가 된 괴조를 만지며 주변을 둘러봤다.
“이제 여기서 어떻게 돌아가지.”
슬슬 회귀를 해야할 것 같은데.
회귀라는 게 워낙 제멋대로 되다 보니까 어떻게 하는지 방법도 모르고 있던 차다.
내가 고민하자 슬레이는 내 옆으로 불쑥 긴 입을 내밀었다.
“깜짝이야! ……타라고? 왜? 갑자기?”
몸을 한껏 낮추고 나를 보던 슬레이는 세 갈래로 찢어지는 입을 벌렸다.
우호의 표시겠지. 우호의 표시일 거야.
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조심조심 올라탔다.
말을 타던 것과는 또 달라서, 잡을 곳이 없어 우툴투둘하게 솟은 뼈를 잡아야 했다.
자리를 잡자마자 슬레이는 내가 들을 수 없는 음으로 길게 울었다.
거대한 날개를 양쪽에서 펼쳐지는 것과 동시에 나는 정신을 잃었다.
* * *
“허억.”
식은땀에 젖어 눈을 뜨자, 아른트와 레안드로스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낯익은 천장, 익숙한 얼굴과 흙먼지 냄새.
내가 정신이 든 것을 보자마자 아른트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공작님, 정신이 드십니까? 성으로 오시는 마차 안에서 쓰러지셨습니다! 그간 열이 내내 떨어지지 않으셔서 얼마나 무서웠는데요. 정말 다행입니다, 정말,”
“나, 는 괜찮아.”
돌아왔다.
다시 이야기의 시작으로.
부축을 받아 앉자 머리가 핑그르 돌았다.
어쩐지 회귀를 하면 할수록 상태가 더 안 좋아지는 것 같은데.
저린 손을 쥐었다 피며 두 사람을 확인했다.
여전히 초라하고 낡은 옷차림에다가 핼쑥하고 피로한 낯이었다.
이번에는 이것부터 어떻게 하자.
“아른트.”
“네, 공작님. 하문하세요.”
“지금 우리가 가진 소지금은 얼마나 되지? 아니, 아니다. 폐쇄된 연회장을 열어봐.”
“네?”
“거기서 뜯어낼 게 있어. 게다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지만 다 함께 서부에 가야겠어. 준비 좀 해줘.”
“네?”
아른트와 레안드로스가 서로를 바라봤다.
폐쇄된 연회장에서 금박을 뜯은 우리는 여비를 제하고 얼마간의 쌈짓돈을 남겼다.
그리고 도착한 서부, 도박꾼들이 득시글거리는 기도원.
레안드로스를 끌고 도박판 사이를 돌아다닌 결과,
우리가 가진 동화 세 닢이 하룻밤 사이에 금화 삼백 닢으로 불어나며,
기도원 측은 눈물의 임시 폐장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