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pporting characters in horror novels want to live as human beings RAW novel - Chapter 56
(55)
집무실에서 터벅터벅 나올 때는 이미 저녁이었다.
입 안에 뭔가 집어넣고 싶은 게, 몸을 원상 복귀시키는 데에 생각보다 막대한 열량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부엌으로 내려가던 차에 계단에서 레안드로스를 마주쳤다.
“…….”
“……뭐야? 할 말 있으면 지금 해.”
“옆에 그건 뭡니까?”
“그거라니. 엄연히 살아있는 말한테 왜 그래.”
내 옆에는 말 한 필이 서 있었다.
반쪽짜리 호각으로 불러낸 슬레이는 다행스럽게 평범한 흑마의 형상을 갖추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해봤는데 눈 한 번 깜박이고 나니까 집무실 안에 서 있더라.
“언제 집무실까지 말을……. 아니, 아닙니다.”
“그렇게 됐어.”
레안드로스의 등 뒤에서 흐린 색의 서술이 마구 출력되었다.
[무슨 미친 소린가. 아니, 이건 공작에게 하는 생각으로는 다소 무엄했다. 레안드로스는 공작이 기이하게 느껴졌다.]내가 봐도 이건 좀 수상했다.
하지만 반대로 ‘아무려면 어떠냐.’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애초에 이런 거 하나씩 신경 쓰면서 거짓말하다가는 업보로 돌아올 게 뻔하다고.
레안드로스는 어쩐지 부글부글 끓는 걸 꾹 참는 듯이 말했다.
“제발 자중하십시오. 아른트가 공작님께 가지는 경계심이 상당합니다.”
“아른트가?”
“옛날에 일어난 마녀사냥에 대해서는 이미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아른트의 가족에 대한 것도 말입니다.”
[아른트는 비일상적인 현상에 대해 다소의 공포심을 가지고 있던 것을 기억했다. 레안드로스가 할 수 있는 것은 공작에게 당부하는 것뿐이었다.]뭔가 연관이 있나 보군.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자 레안드로스는 등을 돌려 내려갔다.
그 뒤를 따라가며 나와 슬레이는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지하에 도착할 무렵엔 슬레이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마 밖으로 풀을 뜯으러 간 것 같은데, 잘은 모르겠다.
아른트는 막 솥에 뭔가를 집어넣다가 내가 주방으로 들어서자 눈을 마주치고는 어색한 표정으로 멈춰 섰다.
“식사 준비가 거의 끝났습니다.”
“기다릴게.”
“주방이 워낙 덥고 더러우니 식당에 계시는 게 어떨까요.”
“무슨 소리야? 원래 여기서 식사했었잖아.”
거의 동시에 아른트 뒤에서 뜬 문장이 조각조각 흩어져 있었다.
[아른트는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공작을 보기 거북한 속내를 들킨 것만 같았다. 혼자만의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필요했고. 공작을 꺼리게 된 것일까?]나는 그걸 못 본 체하며 자리에 앉았다.
아른트는 나를 내쫓으려고 한 게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다가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식사 시간 내내 말이 오가지 않았다.
아른트도 레안드로스도 조용히 달그락거릴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식욕이 있는 것과는 별개로 체할 것 같았다.
밥 먹을 때 이렇게 되는 게 가장 싫은데.
“음, 그러고 보니 내가 자리 비웠을 때 온 편지는 없었어?”
“고, 공작님의 침실에 옮겨두었습니다.”
“고마워.”
아른트가 서먹하게 다시 입을 다물자 레안드로스가 물었다.
“아놀드 남작 영애 말고도 연락을 취할 곳이 있으셨습니까?”
“동부 사업 건으로 논의할 게 있어서 에이슬링 상단에 연통을 넣었는데. 받은 서신중에 답장이 있는지는 봐야 할 것 같아.”
성을 떠나기 전, 일을 가능한 빨리 처리하고 싶어서 여기저기 다 서신을 넣어 뒀다.
죽었다 회복하느라 약간 딜레이는 있었지만, 지금부터라도 늦지는 않았겠지.
내가 고기를 우물거리면서 하는 말에 아른트는 눈이 동그래졌다.
“혹시 동부 사업에 저희도 참가하게 됩니까?”
“그런 건 아니고, 확정되면 말해줄게. 그것보다 에이슬링이 여기를 방문하게 될지도 모르겠어.”
“예? 누가요?”
“누구긴? 지금 상단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건 차기 후계자인 아이든 에이슬링밖에 없잖아.”
아른트의 입이 쩍 벌어졌다.
“아, 하, 하지만, 성은 엉망인데, 아직 귀빈을 모실 준비가 되지 않, 아니, 정말입니까?”
“지금 이대로 맞이하면 안 돼?”
“안 됩니다! 하르트만의 위신을 걸고 절대로!”
“여기서 뭘 더 해야 하는데?”
“고용인을 더 뽑아야죠! 가구도 더 화려한 것으로 들이고, 장식품도 더 격조 있는 것으로 구입해야 합니다! 지금 이것보다 열 배는 더 깨끗해야 한다고요!”
“그렇게까지 열심히 해야 해……?“
“공작님께서는 아직 못 느끼시겠지만 그런 것 하나하나에 하르트만의 품격이 달라지는 법입니다! 앗, 그러면 예산을 다시 조정해야 하는데!”
“예산이 부족해?”
“1년 재정으로 생각해서 알뜰하게 분배해두었습니다. 하지만 손님맞이는 역시 돈이 들어가니까요.”
“응? 그럼 레안드로스를 도박판으로 다시 보내면 되는 문제 아냐?”
“아. 그런 방법이!”
레안드로스는 수프를 떠먹다가 단호하게 말했다.
“제게도 체면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 것치고는 컵 안에서 움직이는 주사위의 궤도를 계산하는 폼이 예사롭지 않았는데.
결국 입을 비죽거리는 아른트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온 신경이 새로운 손님에 쏠려서 다행이었다.
“레안드로스, 농담이니 기분 풀어. 아른트도 너무 걱정하지는 마. 이번에 에이슬링이 오는 이유는 우리에게 돈을 주기 위해서거든.”
“그렇게 큰 상단이 저희에게요?”
“그럼. 손님맞이만 잘 준비해줘.”
아이든이 싸들고 올 돈은 어마어마하거든.
아른트의 뒤에서 서술이 기쁨의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신난다!]* * *
서술은 점차 보이지 않게 되었다.
서술은 내가 죽은 직후가 가장 선명했고, 그 후로는 점차 흐려지다가 안 보이는 식이었다.
그걸 보면 시스템 오류가 떠올랐다.
원래 보이지 않아야 하고, 그렇게 설정되어있는 것이 내게만 잠시 보이는 기분이었다.
나라는 버그에게만 보이는 이 세상의 시스템 오류.
서술이 다 사라지기까지는 약 이틀.
이틀 내내 내가 서술을 훔쳐본 결과, 두 사람이 나에 대한 경계심이 제법 누그러졌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아른트는 손님맞이 준비로 바빴고, 레안드로스는 나를 볼 때마다 전 공작부인을 애틋하게 떠올리고 있었다.
그렇게 보름하고도 며칠이 지난 날.
하르트만 성에 모처럼의 손님이 찾아왔다.
“안녕하십니까, 공작님. 서둘러 오는 길이라 간소하게 준비하였으나 부디 가납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그대의 성의에 흠을 잡는 사람이 있겠는가? 물론 기쁘게 받겠네.”
성의 응접실.
한때 다 부서지고 무너졌다는 티도 나지 않을 만큼 수리와 보수, 내부 장식이 완벽했다.
모처럼 만난 아이든은 예의 발랐지만 어쩐지 딱딱했다.
몰락했다고는 하나 하르트만은 여전한 일국의 공작.
상인이 공작을 독대하게 되는 경우는 잘 없을 테니까.
“아른트.”
“네, 공작님.”
내가 낮게 말하자 아른트는 다른 사람을 부려 아이든이 가져온 산더미 같은 선물을 옮기도록 지시했다.
정말 귀족 대접이었다.
기다란 고급 소파와 화려한 테이블.
달콤한 다과와 향긋한 차.
벽에는 고풍스러운 그림이 걸려 있었고, 내 뒤로는 시종들이 예의 바르고 다소곳하게 손을 모으고 서 있었다.
그걸 본 아이든은 웃는 낯으로 말했다.
“공작님께서 무사히 승계를 마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지난 일인걸. 앞으로가 더 중요하지 않겠나?”
“현명하십니다. 세간에서는 여러 말이 많지만, 하르트만 성은 여전히 훌륭하고 아름답습니다.”
물론 이 모든 건 아른트 덕분이었다.
보름이 넘도록 성의 관리부터 청소, 고용인 모집과 채용, 예절 교육까지 아른트가 도맡았으니까.
하루에 두 시간도 못 잤다고 하던데.
“겉치레는 그만두게. 저녁 만찬에서 나눌 이야기가 없어질 테니.”
아른트를 제외한 모든 고용인들을 내보내자 응접실은 한층 한산해졌다.
절제된 손길로 차를 따르는 아른트를 두고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여독이 쌓였겠지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세. 편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편지는 잘 읽었습니다. 하지만, 당장 저로서는 드릴 수 있는 대답이 없을 것 같습니다.”
대답이 없다?
이전 회차와는 또 다른 대답이었다.
“이유는?”
“동부 사업은 손을 떼기에 지나치게 커졌습니다. 현재 왕국에 있는 내로라하는 상단들은 전부 연루되어 있으며, 무엇보다…….”
“섣불리 발을 빼기보다 왕성에 더 걸고 싶은 거겠지. 지금은 말이야.”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상인의 업이란 그런 것이니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지난 회차에서는 아이든에게 이 정보를 전달해주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그 사이에 아이든은 아이든 나름의 근거를 찾았을 것이다.
우리가 전달해준 정보는 ‘확신’의 역할이었겠고.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한참 빠르다.
아이든은 본인의 근거를 아직 찾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때가 되면 늦는다.
“게다가 왕성에서는 증거를 제시했겠지. 정말 길들인 마수 개체를 선보인다던가.”
“……그걸 어떻게?”
“물론 그것 외에도 여러 복합적인 사유가 있었겠지. 그런 것까지 전부 캐낼 생각은 없네. 나는 지금 자네에게 기회를 주는 중이거든.”
한 발짝만 늦어도 아이든은 죽는다.
침울해하던 아른트의 얼굴이 아직까지 떠오른다.
아이든은 혼란스러워하는 내색을 숨기며 물었다.
“동부 사업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그게 망할 거라는 정도만? 구덩이 안에서 이상한 징조가 터질 텐데, 그때면 늦어. 애초에 왕성에서 마수를 길들여서 뭘 하려고 이런 사업을 하겠나?”
“마수를 육성하면 저희는…….”
“수요가 있는 물건이니 잘 팔리기야 하겠지. 하지만 실생활에서 마수의 부산물을 쓰는 건 한계가 있어. 한, 100년이 지나면 마수의 뼈로 집을 쌓아 올리고 가죽으로 신발을 만들어 신겠다만.”
“공작님의 심안을 저로서는 짐작하지 못하겠습니다.”
“마수의 부산물은 무기에 최적화되어 있지. 현재까지 발달 되어 있는 가공 기술도 그렇고. 마수도 역시 가축은 아니니 쓸모가 한정되어 있어.”
아이든은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었다.
그는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말했다.
“추측이 과하십니다, 공작님. 다만 왕성의 계획은.”
“그러니까 일반 왕국 시민이 다룰만한 경지에 이르려면 100년은 더 걸린다니까. 아, 아니면 혹시 걱정하는 게 있나? 가령 몰락했다가 겨우 돌아온 하르트만이 왕성에 반기를 들었고 에이슬링 상단이 두 세력 싸움의 장기말로 놀아날 가능성 같은 것?”
사람의 의심은 번거롭고 귀찮았다.
그리고 내가 여기 온 이유인 구원에는 더더욱 걸리적거리는 감정이다.
가려운 곳을 대신 긁어주자, 아이든은 찡그려야 할지 아니면 화를 내야 할지 모르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위험한 말씀이십니다.”
“위험하고 말고 간에 나는 왕성과 알력 다툼을 할 생각은 없다는 걸 분명히 해두지.”
“그렇다면 공작님께서 염두에 두고 계신 것은 무엇입니까?”
“글쎄. 돈?”
“돈……이라고 하셨습니까?”
“먹일 입이 많아서.”
아이든이 황당한 표정으로 응접실을 빙 둘러봤다.
물론 여기에 가난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지만, 나는 의외로 진심이었다.
생각해봐라.
자고로 큰일을 도모하려면 일단 자금이 필요하지 않은가.
배곯으면서 무슨 큰일을 할 수 있다고!
내가 안 먹어도 된다고 해서 남들도 안 먹어도 되는 건 아니란 말이야!
“다른 이유가 있으시겠습니다만, 일단은 그렇다고 한다면 제게 이 정보를 알려주신 이유도?”
“돈이지. 아, 아니다. 돈도 돈이지만 다른 제안을 하고 싶어서.”
“그게 무엇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대, 동부 사업에서 지금 발을 뺀다면 위약금은 내가 절반을 부담하지.”
“예?!”
아이든은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아른트도 왕눈이 상태로 나를 보고 있었다.
“어, 어째서 그런 제안을?”
“대신 나와 사업 하나 하지 그래? 동부에서 쓰던 인력이나 물자는 전부 마수에 맞춰져 있는 게 아닌가?”
“맞습니다만. ……설마?”
“그거 하르트만 산맥에서 해. 디켄터 산맥 있잖아.”
왕국에 마수들의 둥지는 넘쳐났다.
그중 하나가 바로 디켄터 산맥.
멀리 위치한 공작령은 아직 반환 중이거나 뺏겨서 건드릴 수 없지만, 디켄터 산맥의 일부는 영 쓸모없는 곳이라 복권과 함께 되돌려받았다.
그러니까 삶아 먹든 구워 먹든 내 맘이지.
“하지만 평지와 다른 산에서는 일이 수월치 않을 듯합니다.”
“그건 걱정 마. 내가 좋은 자리를 하나 점지해주지.”
공작부인의 종이 묶음을 떠올리며 답하자, 아이든은 상당히 고심하며 자리에 도로 앉았다.
안 그래도 찜찜하던 차에 위약금 절반이나 대주고,
사업을 그대로 다른 곳으로 이전할 기회까지.
완전 꿩 먹고 알 먹고 둥지 뜯어 불 때고 아니냐.
이 기회를 안 잡으면 멍청이 중의 멍청이가 되는 거다.
그러면 구원도 더 이상 못 해주겠지.
번뇌에 빠진 그를 두고 미지근해진 차를 마셨다.
내가 찻잔을 다 비우고 나서야 아이든은 심각하게 말했다.
“이익 분배는 어떻게 하실 예정이십니까?”
“이제부터 천천히 이야기해보세.”
나는 찻잔을 내려두고 빙긋 웃었다.
오케이.
너는 내가 꽉 잡고 살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