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pporting characters in horror novels want to live as human beings RAW novel - Chapter 79
(78)
아무도 오지 않는 황량한 변경백의 성 주변을 빙글빙글 도는 그림자가 있었다.
그중 하나는 안타까운 듯이 벽을 만지다가 소리를 질렀다.
“아, 안에 들어가야 해! 좀 도와줘요!”
“그건 공작의 운명이 아닐까요? 한낱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는 겁니다.”
“운명이고 자시고 간에 아, 아른트가 공작님을 잘 돌보라고 기껏 부탁까지 해줬는데!”
아멜리아가 거의 울부짖으며 외쳤다.
하지만 그런다고 없던 문이 뿅 하고 생겨날 리가 없었다.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공작을 본 장소는 성이었다.
돌이 잔뜩 쌓여 있는 홀에서 갑자기 괴물이 나타났고, 온통 아수라장인 상황에서 그들 둘만이 탈출할 수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탈출을 정말로 할 수 있었던 사람은 세 명이었다.
그러나 레안드로스는 공작이 미처 넘어오지 못하고 성에 갇히자 거리낌 없이 무너진 입구를 뚫고 돌아갔다.
결국 그렇게 두 사람만 성 밖에 남게 되었다.
“이, 이제 어떡하냐고요!”
“이 모든 시련은 신의 뜻.”
안에 괴물이 있으니 선뜻 들어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버리고 갈 수도 없는 상황.
아멜리아는 발을 동동 굴렀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온통 ‘공작을 데리고 귀환해야 한다’라는 생각뿐이었다.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바로 아른트가 그걸 바랐기 때문에.
공작인 아렌하이트를 보좌하는 게 자신의 의무이기는 했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건 아른트의 기쁨이었다.
그가 기뻐했으면 좋겠고, 또 그게 자기 때문이면 좋겠다.
그를 만난 이후로 이따금씩 그런 생각을 해왔지만, 이토록 강렬한 감정을 느끼게 된 건 그때부터였다.
아렌하이트와 함께 본 거대한 별 한 쌍.
전신이 통째로 뒤집히는 듯한 충격과 공포.
그녀는 죽거나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었다.
도망쳐? 어디로?
그녀가 갈 수 있는 곳은 단 한 곳뿐.
아른트가 있는 하르트만 공작저.
거기로 갈 수만 있다면, 그래서 그녀만의 작고 소중한 사랑을 다시 볼 수 있다면.
그녀는 무엇이든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런 각오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다.
“신이니 뭐니, 속 좋은 소리만 떠들지 말고 해결책 좀 내, 내놓아보시라고요!”
“하지만 위대한 신의 섭리를 한낱 인간이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전혀 도움 안 되는 놈 같으니라고.
아멜리아는 차디찬 성벽을 짚으며 입술을 잘근거렸다.
공작과 자신은 운명공동체다.
공작이 이 안에 있다면, 자신도 공작저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공작을 꺼내야만 하겠는데.
그 괴물을 어떻게 하면 죽여버릴 수 있지.
그녀는 높다란 벽을 올려다봤다.
다른 곳에서라면 기습할 수 있을까?
이 벽을 올라갈 수 있다면, 저기 보이는 탑의 꼭대기에라도 닿을 수 있다면.
“아.”
아멜리아는 문득 누군가를 떠올렸다.
그녀가 뒤를 돌아봤을 때, 경건하게 무릎을 꿇은 루셀과 함께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 * *
“이용이라고 하셨습니까?”
“표준적인 의미에서의 이용이 맞아. 그러니까 외국어를 들은 것처럼 굴지 않아도 돼.”
레안드로스를 안심시키고 있었지만, 솔직히 나도 누가 ‘유릭을 이용하자’라고 하면 ‘좋은 생각이다’라고 해 주진 못할 것 같았다.
유릭을 이용하는 건 토치로 담뱃불을 붙이려고 노력하는 것과 비슷했다.
불을 붙이는 건 가능하지.
토치는 화력이 강한 불이잖아.
하지만 원치 않는 파이어 쇼를 절찬리에 선보이게 될 위험성도 함께 있는 거지.
토치와 유릭의 차이점이라면 토치는 고작해야 앞머리만 태워 먹겠지만 유릭은 내 전신을 태워버릴 수 있다는 점이랄까.
“정확히 어떻게 이용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애초에 이런 곳이 이용할 가치가 있을지 판단이 어렵습니다.”
“왜? 미스릴 광맥이 있잖아. 그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거고.”
“공작님께서 아시다시피 그건 북부에서 독점하고 있는 광물 자원입니다. 저희가 손을 댔다가는 분쟁을 면치 못할 겁니다.”
“그건 나도 알아. 그 귀한 독점 광물에 대한 권리를 쥐고 있는 사람이 누구지?”
“그야 변경백…….”
레안드로스는 대답을 멈췄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변경백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공표된다면 북부의 광산은 왕실에 귀속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이제까지는 아무도 북부에 가지 못했고, 또 돌아온 적도 없으니까 그런 사실이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야. 오직 유릭만이 알고 있지.”
변경백뿐만 아니라 북부 자체가 제 손안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언제든 필요할 때 바로 사용할 수 있으니까 잠시 내버려 두고 있는 것이리라.
유릭 외에는 사용할 수도 없고, 누구도 엄두를 내지 못하는 혹한의 땅.
하지만 거기에 내가 참전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죽어도 다시 돌아오는 회귀자와 주인공의 조합이라니.
듣기만 해도 승률이 높은 것 같지 않아?
“그러니 방심한 틈을 노려야지.”
“공작님께서는 마땅한 방책이 있으십니까?”
“어어, 일단 좀 더 생각하긴 해야 하는데 대충은.”
레안드로스는 내게 진통 효과가 있다는 마른 잎을 물리며 답했다.
“주인 없는 북부를 하르트만이 흡수한다고 하면 다른 귀족들의 후폭풍이 크지 않겠습니까?”
“그럴 확률도 있지. 아직까지 신흥 귀족 세력은 안정화되지 않았고, 공작가의 움직임에 대해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테니까.”
“그렇다면 역시 이번 일은 좀 더 고려해보심이.”
“하지만 걱정하지 마.”
씁쓸하고 거북한 향이 나는 잎을 씹으며 답했다.
“내가 전면에 나서는 일은 없을 거야. 이번에는.”
“그렇다면 누구에게 맡기시겠습니까? 아른트입니까?”
“아른트는 너무 바쁘지. 공작저도 운영해야 하니까. 더 이상 부담을 줄 수는 없어. 이번 같은 일은 다른 적임자가 있잖아.”
“설마.”
레안드로스의 말끝에 희미한 불안감이 서렸다.
그가 뭔가를 더 말하려 하는 순간이었다.
길고 우렁찬, 동시에 듣는 이의 모골이 송연하게 하는 말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히히히힝!
검은 말은 마치 그림자를 찢고 나온 것처럼 허공에서 달려 나와 바닥을 디뎠다.
그 등 위에는 버둥거리는 사람들이 쌓여있었다.
“비, 비키세요! 그 몸으로 사람 하나 아, 압사시킬 셈인가요!”
“애초에 당신이 고집을 부리지 않았더라면 이 말을 탈 일도 없었잖아요! 게다가 이 말은 우리 말이라곤 하나도 안 듣는다고요!”
“말 다, 다 했어요!? 시, 신묘한 말이라고요! 이 말이 우릴 공작님께 데려다줄지 안 줄지 어떻게 알아요!”
만나자마자 시끄러운 두 사람이네.
슬레이프니르는 우아하게 머리와 몸을 후드득 털어내 두 사람을 떨어뜨렸다.
짧게 악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나뒹군 두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아멜리아의 얼굴이 환해졌다.
“어, 언제 여기까지……. 고, 공작님! 무사하시군요!”
지금 이 꼴이 무사해 보이는 건가.
하지만 굳이 그걸 짚지는 않았다.
살아있으니 된 거지 뭐.
아직도 친밀하게 뒤엉켜 있는 두 사람을 보자니 앞으로의 일을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너희도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진짜 그게 맞네. 마침 시킬 일이 있었는데 잘 됐어.”
“네?”
“무슨 일이시길래?”
두 사람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레안드로스가 옆에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벌써부터 잘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만.”
“에이, 그럴 리가.”
앞길이 막막한 표정을 짓고 있는 레안드로스를 대신해 두 사람에게 친절하게 말을 건넸다.
“혹시 바지사장이 꿈이었던 사람?”
“바지사장이 뭐, 뭔가요?”
“얼굴마담 비슷한 거지. 북부의 얼굴마담이 필요해.”
“하지만 부, 북부라니.”
“공작님께서는 아까 북부를 활보하던 거대한 신의 피조물을 보지 못하셨단 말씀이십니까? 북부는 신성한 땅입니다! 신과 가까운 땅이란 말입니다! 북부는 더 이상 인간의 이치가 닿지 않습니다. 신의 뜻대로 그저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어야 합니다!”
“하지만 북부에는 더 이상 사람이 없는데.”
“그것 역시 섭리입니다. 신실한 믿음과 기도를 올린 자들만이 살아남는 거죠.”
“북부에는 그런 사람이 없었다는 투로 말하네…….”
“북부에 더 이상 아무도 살지 않더라도 더 이상 손을 댈 순 없습니다. 그것은 신의 뜻에 반하는 짓입니다.”
아니, 이 세상은 내 동생이 만들었다니까?
신의 뜻이고 뭐고 간에 내 동생은 엔딩을 보고 싶어 한다니까?
내가 신 형이야 임마!
말이 안 통해서 열불이 뻗쳤지만 나는 겨우 진정했다.
아니다, 잘 생각을 해보자.
이걸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어떻게 야부리를 털어야 유사 미치광이가 솔깃하게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을까!
“루셀, 사실 네게 말하지 않았던 사실이 있어.”
“네?”
“우리가 여기에 있을 때 성을 돌아봤거든. 그때 알아낸 정보에 의하면 북부는 신앙심이 없어서 무너진 게 맞아.”
“당연히 그럴 줄 알았습니다. 천벌입니다.”
“여기에는 신전도 없고, 유랑하는 신성기사단도 들르지 않았지. 하지만 유일하게 신을 믿는 사람은 북부의 변경백 하나뿐이었어…….”
“네?”
루셀의 불신자에 대한 경멸 어린 눈이 커다래졌다.
“변경백이……말입니까?”
“하지만 네 말대로 불신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결국 신전을 세워 널리 전도하려는 계획은 실패했다고 하더라. 그리고 그다음에는 네가 봤던 것처럼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고 말았어.”
“그런. 그런 일이.”
“나는 변경백의 눈물 어린 수기를 읽고 결심했지. 괴물이 된 변경백을 위해서라도 그의 유지를 지켜주기로.”
“공작님……!”
생판 남인데다가 일면식도 없고 괴물이 되자마자 내 내장을 터뜨릴뻔한 모브라 레안드로스에게 퇴장당한 덕분에 앞으로 영영 보지도 못할 사람이지만.
눈에 힘을 주고 타박상을 입은 허벅지를 꼬집자 눈물이 절로 핑 돌았다.
“고인이 된 신실한 변경백을 위해서라도 한 번만 도와주면 안 될까.”
“그, 그런.”
“그 사람은 죽는 순간까지 단 한 명이라도 구원하려고 애썼을지도 모를 일이잖아. 신성기사단으로서 책임감을 느끼지도 않는 거야?”
“물론 훌륭하신 분이라는 걸 알겠지만, 아니, 그래도.”
감정선 좋고.
당황하는 저 얼굴 좋고.
졸지에 과거를 날조 당한 변경백이 하늘 위에서 펄펄 뛰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알 바인가.
원래 죽은 자는 말이 없는 것을.
루셀은 본인의 ‘신앙’에 대한 집착에서 상반된 결론이 나오자 우왕좌왕했다.
그걸 보다가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물론 너한테만 부담을 지우려는 건 아냐. 나도 노력해야지. 예를 들어서 북부 관할령의 중심이 되는 대신전을 세우는 데 도움을 준다던가.”
“대신전!”
루셀이 짧게 소리를 질렀다.
그의 얼굴은 일순 황홀해졌다.
굳이 말하자면 하늘의 구름이 개고 빛줄기가 내려온 걸 본 광신도의 표정이었지.
그리고 며칠 후.
루셀은 슬레이프니르를 타고 혼자서 북부령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