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spicious little prince is a world's top ten masters RAW novel - Chapter (328)
◈ 328화. 하나 만들어봐?
순간 임교영과 지여령의 눈동자가 화등잔만 해진다.
살랑이는 눈송이가 차분히 내려앉는 가운데 임교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요.”
이미 체념하고 있었다.
그가 돌아올 거란 기대를 버렸음에도 질긴 목숨 이어가는 것은 모두 배 속의 아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진무립의 입에서 그를 만나러 간다는 말이 나오니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진무립이 말했다.
“아직 할 일이 있어서 당장 출발할 수는 없습니다. 이틀 뒤, 나는 운화결을 찾으러 갈 겁니다. 함께 가시겠습니까?”
그에 떨리던 임교영의 눈동자가 차분히 가라앉는다.
“상공이 정말 살아있다는 말씀이신가요?”
“나는 그렇다고 봅니다.”
“아아.”
순간 맥이 풀린 임교영이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소저!”
단려화가 순식간에 창문을 뛰어넘어 그녀를 부축했다.
“조심해야지요. 임소저는 혼자가 아니잖아요.”
간발의 차이로 도착한 지여령이 가슴을 쓸어내리는 가운데 임교영이 고마운 눈빛을 보냈다.
“고마워요.”
진무립이 지여령에게 말했다.
“당장은 할 일이 있으니 이틀 뒤에 출발할 것이오. 그때까지 잘 모시고 계시오.”
이제 막 깨어난 진무립이었기에 떠나기 전에 할 일이 많았다.
“예. 공자.”
돌아서는 진무립을 향해 임교영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한 번 놓아버렸던 기대의 끈을 다시 잡는 이 기분은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소매로 임교영의 눈물을 닦아준 단려화가 빙그레 웃으며 밖으로 나왔다.
“이틀 뒤에 다시 올게요.”
손을 흔들어 인사한 단려화가 진무립을 따라 대문을 나섰다.
소복이 쌓인 눈길 위.
수하들의 예를 받으며 장원을 나선 진무립의 곁으로 단려화가 바짝 붙었다.
“무립.”
“그래.”
“정말 무사할까요?”
“살아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당우에게 흑조를 보냈으니 지금쯤 수색에 나섰을 거야.”
고개 든 단려화의 눈동자에, 먹먹한 하늘 사이로 빼꼼히 고개 내민 햇살이 담긴다.
“임소저의 웃는 얼굴이 보고 싶어졌어요.”
고요한 정적 속, 밟히는 눈길에서 기분 좋은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힌다.
진무립은 빙그레 웃었다.
“그렇게 될 거다.”
* * *
진무립이 후원을 벗어났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맹의 고수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인사를 하러 찾아왔다.
소문이 얼마나 빠르게 퍼졌는지 맹에 출입할 수 없는 사람들조차 무림맹 정문 앞에 몰려들 지경이었다.
구천영웅 광룡 진무립.
당금 무림에서 진무립이 차지하는 위상은 하늘을 찌를 만큼 높아진 상태였다.
떠들썩한 정문 밖과는 달리 고즈넉한 후원의 심처로 분주한 무인의 발걸음이 찾아간다.
고드름으로 가득한 처마 밑에 멈춰선 무인이 닫힌 문을 향해 공손히 예를 갖췄다.
“단주님. 초평천 대협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밖에서 위사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남은 차를 입에 털어 넣은 판천라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군.”
진무립이 미안한 듯 말했다.
“오래 기다리게 한 내 잘못이 아니겠나.”
진무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판천라마가 옅은 미소로 뭔가를 내밀었다.
“자네 덕분에 서장의 시간은 이제부터 다시 흐르게 되었네. 받아주게.”
판천라마가 내민 황금색 신패에는 은(恩)이라는 한 글자가 쓰여 있었다.
“이게 뭔가?”
“서장에서 이걸 내민다면 나를 보듯 자네를 대할 것이네.”
혈교에게 한 번 빼앗겼던, 그것도 모자라 자칫 마교의 손에 완전히 무너질 뻔한 서장이다.
진무립은 빼앗긴 서장을 되찾아주었을뿐더러 마교의 위협까지 완전히 뿌리 뽑아주었다.
천 년에 달하는 포달랍궁의 역사상 이보다 더 큰 은인은 없을 것이다.
진무립을 향한 판천라마의 눈빛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신뢰가 깃들어 있었다.
진무립은 사양하지 않고 신패를 받았다.
“고맙군.”
“언제 한 번 꼭 찾아오게. 기다리고 있겠네.”
“먼 길 조심해서 가게.”
다음을 기약한 판천라마가 진무립의 배웅 속에 후원을 떠났다.
잠시 후, 그가 나간 문으로 초평천이 들어왔다.
“몸은 좀 괜찮더냐?”
그 따스한 눈빛과 마주한 순간 왠지 울컥하는 감정이 물밀 듯이 밀려든다.
‘이게 혈육이라는 것인가.’
다른 이들이 걱정해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진무립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안으로 드십시오.”
초평천을 안으로 안내한 진무립이 손수 차를 우려내며 말했다.
“지내시기에 불편함은 없으십니까?”
초평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늘 그렇듯 잘 지내고 있단다. 그보다 이게 무엇이냐?”
단출한 방을 둘러본 초평천이 짐짓 성을 내듯 말했다.
“천하를 구한 영웅을 고작 이런 골방에 처박아둔다는 말이냐? 내 당장 맹주에게 가서 따져야겠다.”
진무립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이게 골방이면 천하에 골방이 아닌 방은 얼마 되지 않을 겁니다.”
반갑게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초평천의 걱정이 차분히 녹아내린다.
아픈 것을 숨기고 있지는 않을까, 또다시 홀로 모든 것을 감당하려 부상을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던 것이다.
초평천의 따스한 눈길이 마주 앉은 손자에게 닿았다.
진무립이 물었다.
“제가 잠시 자는 동안 어떻게 지내고 계셨습니까?”
“일은 전부 무강이 그 녀석이 하고 있으니 시간이 제법 남더구나. 하여 개봉에 종종 다녀온단다.”
“재미있는 일이 있었습니까?”
“온 세상이 네 이름으로 진동하더구나. 한 걸음을 내디디면 네 이름이 들려오고 두 걸음을 내디딜 땐 소화산의 무용담이 흘러나왔다. 그것이야말로 내게 가장 재미있는 일이지.”
말을 하는 초평천의 눈빛이 시시각각 달라졌다.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미안함과 혼자서도 이렇게 훌륭하게 자라준 것에 대한 고마움.
그에 이어 고독한 길을 걸어온 것에 대한 안쓰러움과 그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우뚝 선 대견함이 초평천의 마음에 교차하듯 지나가는 것이다.
고개 숙인 초평천은 뜨거운 찻잔을 매만지며 읊조리듯 말했다.
“네가 걸어온 길은 누구도 가보지 않은 험난한 가시밭길이었다. 너는 너를 따르는 자들을 위해 길 위의 가시덤불을 모두 걷어냈을뿐더러 탄탄한 대로로 만들어냈구나.”
무거운 짐을 홀로 등에 진 채.
진무립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들을 향한 세상의 인식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이런 손자가 대견하지 않을 리 없다.
고개 든 초평천의 따스한 눈길이 진무립에게 와 닿았다.
“정말 수고했구나.”
그 말에 비로소 진무립은 세상이 달라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평범한 삶을 포기하고 가시밭길을 택한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단단한 벽을 부수고 타 넘으며 무수한 역경을 헤쳐온 끝에 결국은 해냈다.
먹먹한 감정이 가슴에 스며든다.
입술을 지그시 깨문 진무립이 옅은 미소로 답했다.
“고맙습니다.”
모처럼 손자와 밀린 이야기를 나눈 초평천은 해 질 무렵이 되어서야 후원을 나섰다.
처소로 돌아온 초평천은 불이 켜진 초무강의 방문을 열었다.
탁자 앞에 앉아 지도를 보던 초무강이 다소 지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립이는 좀 어떻습니까?”
“괜찮아 보이더구나.”
초무강이 안도하며 웃었다.
“참으로 다행입니다.”
“그 정도에 쓰러질 아이가 아니지.”
“그야 당연하지요. 무탈하다고 하니 저도 내일 아침 찾아봐야겠습니다.”
탁자 앞에 앉은 초평천이 지도를 보며 물었다.
“아직 장소를 정하지 못한 것이냐?”
초무강이 쓴웃음을 지었다.
“함께 논의한 후보지가 몇 군데 있으나 하나가 마음에 들면 하나가 걸리더군요.”
진무립은 상천의 천주이기도 하면서 자신들이 점찍은 마도림의 후계자다.
마도림과 상천의 통합.
초무강이 초췌한 얼굴로 지도 앞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수문화와 함께 새로운 거점을 물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가 아직 건강하니 그리 급하게 생각할 것 없다. 이제 그 아이가 깨어났으니 천천히 이야기를 진전시켜도 될 것이야.”
“그래야지요. 일간 후보를 좁혀 의사를 물어볼 생각입니다. 그보다 그 말은 전해주셨습니까?”
“그 말?”
“아내와 유림이가 곧 개봉에 도착한다는 소식 말입니다. 서신으로 자기가 올 때까지 꼼짝 말고 기다리라며 엄포를 놓지 않았습니까?”
초평천은 그제야 생각이 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그랬었지.”
“잊고 계셨던 모양이로군요.”
잠시 턱수염을 매만지던 초평천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뭐 며칠 사이에 사라지기라도 하겠느냐?”
* * *
천무대전(天武大戰)의 쾌승.
천하를 강타한 소문은 좀처럼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승전의 기쁨에 진무립이 쾌차했다는 소식까지 알려지자 정월의 축제가 뒤늦게 무림에 찾아왔다.
오색 연등이 곳곳을 밝게 비추는 가운데, 북적이는 개봉의 거리에 한 무리의 무인들이 들어섰다.
“오호. 여기가 개봉이란 말이지?”
신기한 듯 사방을 둘러보며 선두로 나서는 여자아이는 바로 초유림이었다.
모친 정인령이 앞서 나가는 딸의 어깨를 붙잡았다.
“걸음이 너무 빠르구나. 사람이 많으니 조심해서 걸어야 한다.”
초유림이 두 볼을 잔뜩 부풀리며 말했다.
“소녀가 빠른 게 아니라 어머니가 너무 느린 거라구요.”
“천하의 영웅들로 가득한 무림맹이다. 흠 잡힐 만한 행동은 삼가야 할 것이며 언제 어디서든 겸손을 마음에 담아야 할 것이야.”
초유림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소녀야 언제 어디서나 겸손하지요.”
“행여 광룡의 종매라며 사람들 앞에서 거들먹거리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초유림이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
“저는 그런 적이 없는데요?”
정인령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그 어울리지도 않는 장포는 벗거라.”
마치 진무립을 흉내 내듯, 시꺼먼 장포에 새하얀 수실로 얼기설기 써 붙인 글자는 다음과 같았다.
「광룡 진무립의 종매, 초유림.」
모친을 향한 초유림의 눈빛이 단호했다.
“이것만큼은 절대 안 돼요.”
“…….”
그때 멀리서 이들 모녀를 발견한 마도림의 무인이 한달음에 달려와 예를 갖췄다.
“대부인을 뵙습니다.”
정인령이 창피한 듯 초유림의 등판을 가리며 말했다.
“여기까지 나오실 필요는 없었는데요. 괜한 걸음을 하게 한 모양입니다.”
“아닙니다. 맹까지 속하가 모시겠습니다.”
잠시 멈췄던 걸음이 재개되자 초유림이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어서 가요. 오라버니가 저를 애타게 기다리고 계실 테니까.”
그 말에 무인이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순간 초유림의 눈동자에 날카로운 빛이 스치듯 사라졌다.
“왜 갑자기 머리를 긁는 거죠? 불안하게.”
“소공자께서는 오늘 새벽 다녀올 곳이 있다며 외유를 나가셨습니다.”
“……뭣이 어째요?”
초유림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질 때.
무림맹의 정문에서 그와 똑같은 표정을 한 인물이 있었다.
“어딜 갔다고?”
기괴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무림맹 위사를 쳐다보는 이는 흑랑 장우기였다.
위사가 곤란한 듯 말했다.
“오늘 새벽 출타하셨습니다.”
“아니 왜 하필 내가 오는 오늘이지?”
그런 걸 위사에게 따져봐야 돌아올 말이 없다.
그때 안에서 초평천을 따라 이곳에 머물던 지랑 현진학이 나타났다.
“뭘 그렇게 서 있는 거야? 들어와라.”
검랑 서천휘가 반갑게 웃었다.
“지랑. 그간 잘 지냈습니까?”
현진학이 동료들을 한 명씩 살피며 말했다.
“다들 무사한 모양이군. 수고 많았다.”
위사의 어깨를 툭 친 현진학이 동료들을 데리고 무림맹에 들어섰다.
도랑 도운수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표정들이 밝군.”
“생각 이상으로 피해를 줄인 기적 같은 승리였으니 나쁠 것 없지.”
장우기가 시무룩한 얼굴로 물었다.
“진무립은 어딜 건 거야?”
“상천의 총사 말로는 강남에 다녀온다고 한 것 같았다.”
장우기가 분한 듯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한판 붙어보려고 했는데.”
현진학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서라. 아직은 네 상대가 아니다.”
장우기의 재능은 전대 흑랑과 비교해도 절대 뒤처지지 않는다.
그러나 진무립은 고금의 절대자들과 비교해도 그만한 재능을 찾기 힘들 만큼 뛰어났다.
현실적으로 장우기가 지금 당장 그를 뛰어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뭐야?”
장우기의 눈에 불똥이 튀자 서천휘가 웃으며 그의 어깨를 잡았다.
“‘아직은’이라는 말입니다. 흑랑은 아직 젊습니다. 절치부심하다 보면 언젠가 기회가 올 것입니다.”
“역시 그렇지?”
히죽 웃던 장우기의 고개가 휙 돌아간다.
“잠깐. 그놈도 젊은데?”
현진학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놈보다 더 오래 살면 네가 이기는 거다.”
“…….”
현진학이 물었다.
“오는 길엔 별일 없었나?”
장우기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어딜 가나 그놈 얘기가 안 나오는 곳이 없더군. 정말 대단하긴 한 모양이야. 그래서 꼭 붙어보고 싶었는데…….”
흑사칠랑은 그를 나무라지 않았다.
이러한 호승심이 발전의 원천이라는 것을 아는 까닭이다.
무림맹의 내부에 들어섰지만 이들을 알아보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도랑 도운수가 아쉬운 듯 말했다.
“천하십대고수. 그때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우리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더군.”
자신은 몰라도 서천휘라면 능히 그 안에 들고도 남을 만한 실력이 있다.
하지만 천하대전이 끝났을 때도, 이번에도 자신들 중 그 누구도 십대고수나 칠경, 혹은 칠군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으니 아쉬운 것이다.
비랑 비사령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낭인이란 게 그런 거지 뭐. 공명심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잖아?”
그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던 장우기가 처소를 눈앞에 두고 중얼거렸다.
“낭인. 이제 때려치울까?”
은랑 장청이 헛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그럼 뭐 하게?”
잠시 생각하던 장우기가 씩 웃었다.
“돈이야 차고 넘칠 만큼 많이 벌었잖아. 그냥 낭인 때려치우고 광룡 그놈처럼 하나 만들어봐?”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헛웃음을 흘렸다.
먼 훗날, 자신들의 후예가 그 말을 실행에 옮기리라는 것을 이때는 알지 못한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