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ymbiotic Relationship Between the Rabbit and the Black Panther RAW novel - Chapter (12)
토끼와 흑표범의 공생관계 12화(12/75)
‘여기는···?’
눈을 뜨니 창밖은 깜깜한 어둠이 내린 상태였다. 결국 돌아오는 마차에서 잠이 들었나. 하얀 침구에서 몸을 뒤척인 내가 눈을 비볐다.
신전 바닥에 주저앉은 채 하도 울어서 그런지 눈꺼풀이 무겁고 침침했다.
‘푹 잔 것 같은데도 피곤하네.’
신전의 차디찬 공기와 다른, 아늑한 침실을 둘러보던 나는 잽싸게 자는 척을 했다.
고요한 밤이었으나 한 가지 문제가 생겼으니. 바로 가운 차림으로 턱을 괸 채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는 아힌 때문이었다.
‘설마….’
얼핏 본 표정이 굳어 있는 게, 아무래도 신전에서 달아난 일을 책망할 요량이 틀림없었다. 덜컥 겁이 나자 감은 눈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더구나 밤마다 마주하긴 하지만, 가운 사이로 드러난 탄탄한 상체는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미려한 얼굴을 마주하기부터 난관인데, 저런 흐트러진 모습에 적응하는 건 아직 무리가 있었다.
이래 봬도 성인식을 치른 건장한 성인인데. 저 무방비한 흑표범은 이 비비 님의 위험성을 전혀 모르는 듯했다.
“야.”
신경이 거슬리는 부름이 들려왔지만, 지그시 감은 눈을 뜰 생각은 없었다. 그 정도 도발에 걸려들 거라 생각한다면 큰 오산,
“울보.”
아 씨. 짜증이 치민 나는 날쌔게 몸을 일으켜 아힌의 손등에 앞발 펀치를 날렸다.
회심의 일격을 간단히 막아 낸 그는 대뜸 내 고개를 꾹꾹 밀었다. 잘못하다간 목이 꺾이겠어. 그만둬, 이 막무가내 맹수야.
‘아차!’
눈을 부라리던 와중, 흑표범 특유의 붉은 눈과 마주친 나는 황급히 자는 시늉을 했다. 어이가 없는지 바람 새는 소리가 들려왔다.
“있잖아.”
잠깐의 정적 후, 등허리에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아힌의 손가락이 등을 느릿하게 쓰다듬은 탓이었다. 아무런 위협도 담기지 않은 손짓이었으나 왠지 모를 오한이 들었다.
“그거 알아?”
세이렌의 노래처럼 수인을 홀릴 법한 음성이었다. 몰라, 뭔지는 모르지만 영원히 모르고 싶어. 그런 생각을 이어 가는 내 등으로 재차 서늘한 손길이 닿았다.
“맹수들은 소유욕이 강하대, 그게 무엇이든.”
스르륵, 손가락이 등허리를 스치는 게 반복되었다. 느릿하면서도 일정한 속도였다. 왕왕 이런 식으로 등을 쓰다듬어 주긴 했으나, 오늘따라 유독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가끔 그 욕구가 지나치면 망가뜨려 버린다더라.”
저도 맹수이면서,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는 듯 태연스러운 말씨였다.
반면 나는 몸을 벌떡 일으키고 싶을 만큼 소름이 밀려왔다. 현재 아힌이 이어 가는 말은 절대 남의 이야기 따위가 아니었다.
‘맙소사.’
혹시 또 입으로 집어넣으려는 시늉을 하는 건 아니겠지. 염려와 달리 다행히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은 내가 청각을 바짝 곤두세웠다.
“넌 내가 주워왔잖아. 그래서 살 수 있었던 거고.”
수 초간의 침묵 후, 다시금 높낮이 없는 음성이 들렸다.
“그러니까 내 소유인 거지. 그렇지?”
확인받듯 이어진 질문을 들은 나는 입이 바싹 말라 왔다.
이는 도망치게 둘 바에야 망가뜨릴지도 모른단, 그런 은근한 경고였다. 어쩐지 하루빨리 이 저택에서 달아나야 좋을 듯한 예감이 드는데, 착각일까.
* * *
아힌의 어머니, 그러니까 발렌스 님과 나 사이엔 최근 암묵적인 유대 관계가 형성되었다.
늘 비슷한 시간에 개최되는 장미 정원의 티타임. 그곳에선 메이미가 물러나고 나면 비밀스러운 일이 행해진다. 그건 바로 페로몬을 조절하는 연습이었다.
‘매일 점심 이후쯤에 장미 정원으로 오너라.’
발렌스 님은 내게 날이 갈수록 특유의 페로몬이 나타나니, 갈무리하는 법을 배울 것을 제안했다.
그렇다. 일전에 몸속에서 느낀 묘한 기운은 바로 페로몬이었다. 이론적으론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어쩌면 인간화를 향한 첫걸음일지도 몰랐다.
투지를 불태운 나는 매일같이 이 시간만을 기다렸고, 발렌스 님의 의견에 따르면 빠른 습득을 보이며 일취월장 중이라 하였다.
물론 칭찬의 진위 여부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내게 묘할 만큼 호의를 보이고 있으니까.
“아가, 호흡을 천천히 가다듬거라. 침착하게, 옳지.”
테이블 위에 앉은 나는 지시에 따라 일정하게 호흡하며 몸속 기운에 집중했다. 전신에 퍼진 기운이 어제의 연습보다 안정된 느낌이었다.
“그쯤에서 다시 페로몬을 감춘다는 느낌으로 단전 쪽에 모아 보련.”
어려워…. 감추라는 의미를 전혀 모르겠다. 아리송한 설명이라 눈치를 보자, 밀크티를 마시던 그녀가 나지막이 말했다.
“서두르지 말렴. 천천히 시간을 둬도 상관없단다.”
끄덕인 나는 일러 준 대로 기운을 모으는 행위에 집중했다.
십여 분 후, 연습이 지속될수록 여지없이 피로가 밀려들었다. 페로몬을 다루는 일은 꽤나 체력을 요하기에 낮잠 시간까지 필요할 지경이었다.
“수고했다. 오늘은 이쯤 하자꾸나.”
숨을 몰아쉬는 내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어 준 발렌스 님은 품에 들고 있던 서적을 내밀었다. 어리둥절하게 바라보자 그녀의 입매가 나긋하게 말려 올라갔다.
“토끼인 네게 우스운 질문일지도 모르겠다만, 혹시 글을 알고 있니?”
그 미소를 홀린 듯 응시하던 내가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대륙어를 써 본 적은 없지만, 다행히 읽는 것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어머니는 내가 열 살이 지나고 나서도 희망을 놓지 않고 수인으로서의 지식을 눈과 귀로 익히게 했으니.
“이 서적은 메이미에게 따로 맡겨 둘 테니 시간 날 때 읽어 보려무나. 네게는 제법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군.”
발렌스 님은 페로몬을 인지한 순간부터 나를 평범한 토끼로 대하지 않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 같긴 하지만. 그럼에도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음이 다행이기도 했다.
애당초 가주 자리에 오른 분이 내게 시간을 소모하는 것부터 이해하기 어려웠다.
「페로몬 이론」
나는 묘한 기분을 느끼며 서적과 그녀를 번갈아 봤다.
티타임 후, 침실로 돌아온 나는 곧장 메이미의 도움으로 두터운 서적을 고정시켰다. 그녀는 책 양 끝에 무거운 대리석을 놓아 책장이 넘어가는 것을 방지했다.
‘좋아.’
진중한 낯을 한 내가 앞발로 서적을 짚었다. 앞발로 페이지를 넘기는 일이 힘들긴 하나, 토끼의 모습으론 어쩔 수 없었다. 지금으로써는 페로몬에 대한 단서를 쫓는 게 유일한 희망이었다.
‘페로몬의 정의.’
페로몬은 수인만이 가지는 선천적인 향이자 기운으로, 특유의 이능 또는 공격 수단이나 우위 관계 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토끼 수인은 대체로 회피 등의 페로몬이 발달한다던데, 나도 그런 종류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스피드는 아닌 것 같은데.
상념과 함께 다음 챕터를 읽던 나는 괜히 아무도 없는 침실을 휙휙 둘러봤다.
‘페로몬과 성.’
이 또한 수인들이 어릴 때부터 주입받는 교육이나, 남과 함께 보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대륙의 수인에겐 두 번의 성인식이 존재한다. 바로 열다섯에 치르는 성적 의미의 성인식과, 열여덟에 치르는 규범에 따른 성인식.
인간과 달리 수인은 페로몬으로 매혹이 가능했기에, 어린 수인들은 본능에 휘말리기 십상. 그리하여 열다섯 이후부터 이성과의 관계에서 페로몬을 사용할 수 있게끔 규범으로 명시한 것이었다.
‘으음….’
인상을 찌푸린 나는 이 챕터를 훑어볼 필요도 없이 넘겼다. 따로 공부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는 사안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래비안 가문 고용인들은 나를 수인이 아닌, 그저 애완 토끼 정도로 여기기 시작했다. 이성적인 생각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표현할 수 없다는 이유 하나로.
그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건 열다섯의 성인식이 지날 때쯤이었던 것 같다. 큰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멸시받는 생활은 바뀌지 않았으니까.
다만 꺼림칙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나는 나름 가문의 자제로서 호화로운 침실을 제공받았는데, 토끼의 외형인 탓에 침대가 아닌 쿠션에서 생활을 했다.
그런데 가끔 고용인들이 그 점을 이용해 내 방을 정사를 나누는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고용인 전용 숙소에선 정사가 불가능하고, 마구간이나 여타의 곳에선 병균이 옮을 여지가 있으니.
‘덴 님, 아무래도 여기는 좀···.’
‘아무도 없는데 뭐 어떻소?’
밤이 되면 누구도 들르지 않는 내 방은 때때로 지분거리는 소음이 울렸다. 초반에야 말을 알아듣는 내 눈치를 보더니, 나중에는 아주 대놓고 다음 약조를 했었지.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혹여 내가 어떻게든 부당함을 표현하더라도 딱히 제재가 내려오지 않을 거란 사실을.
매번 그들 사이에서 흘러나온 페로몬 덕분에, 성에 관한 페로몬은 따로 공부할 필요조차 없었다. 래비안 가문에서의 일은 이런 식의 쓰라린 기억이 대부분이었다.
이내 여러 번 몸을 턴 나는 다시 서적에 앞발을 짚었다. 과거를 돌아보고 있을 겨를 따윈 없었다.
‘…응?’
한창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던 와중, 뒤편에서 사부작거리는 기척이 일었다. 고개를 틀자 언제 온 건지 모를 아힌과 이브린이 침실에 들어선 상태였다.
벌써 저녁이 늦었나. 테라스를 돌아본 나는 어딘지 기분 나쁜 소리가 들리자 다시 그들을 향해 시선을 틀었다.
“아….”
손으로 눈가를 가린 아힌이 주먹으로 벽을 쾅쾅 찍어 댔다. 그뿐이랴, 늘 무표정을 고수하던 이브린마저 노골적으로 입가를 씰룩거렸다.
‘왜 저래?’
영문을 모르는 내가 멍하니 바라봤으나 아힌은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조소 비슷한 종류는 몰라도 저렇게 폭소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토끼님과 함께하니 살면서 가장 진귀한 광경을 다 보는군요.”
간신히 표정을 바로잡는 것에 성공한 이브린이 말문을 뗐다.
“독서를 하는 새끼 토끼라니…! 이 장면을 초상화에 담아 두고 싶을 지경입니다.”
그제야 그들의 반응을 이해한 나는 서적을 내려다봤다. 스스로의 모습을 볼 순 없지만, 진지하게 서적 위로 앞발을 짚은 토끼를 상상하니 퍽 아이러니하긴 했다.
그러나 당사자의 입장으로선 마음껏 웃을 만한 거리가 아니었기에 내 눈은 절로 도끼눈이 되었다.
“미칠 것 같아….”
“아힌 님, 진정하십시오. 너무 웃으시면 토끼님이 상심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말하는 이브린의 입가 또한 부들부들 경련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웃음을 참는 듯 얼굴이 찌그러졌으니. 그 표정을 보고 만 아힌이 재차 벽을 두드리는 소음이 이어졌다.
후, 나지막한 숨을 내쉰 나는 우수에 젖은 눈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역시 난 저 방정맞은 흑표범들이 너무 싫어. 정말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