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ymbiotic Relationship Between the Rabbit and the Black Panther RAW novel - Chapter (19)
토끼와 흑표범의 공생관계 19화(19/75)
답답해진 내가 아힌의 주머니에서 고개를 쏙 내밀었다. 이제 주머니에 담겨 옮겨지는 게 익숙해질 지경이었다.
오늘따라 한층 더 해사한 미모를 올려보던 나는 뒤편으로 따라붙은 이브린을 쏘아봤다. 아직도 조금 전의 분노가 가시질 않았다.
“아힌 님, 토끼님이 저를 날 선 눈으로 노려보십니다.”
“비비, 나도 노려봐 줘.”
이 콤비는 그냥 입을 좀 다물어 주면 좋겠건만. 짜증이 치민 나는 전방으로 시선을 돌려 버렸다. 가만히 심호흡을 하자 그제야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무도회장이 따로 있구나.’
나름 정원 산책 동안 곳곳을 돌아보았다고 생각했는데, 현재 걷고 있는 길은 또 낯선 곳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황당하긴 하나 무도회는 난생처음이기에 내심 궁금하기도 했다.
‘아힌이 나와 함께 가면 발렌스 님의 파트너는?’
멍하니 생각에 잠겼던 나는 문득 발렌스 님의 여부가 궁금해졌다. 가주라서 파트너는 필요치 않은 건가.
그러고 보면 아힌의 아버지는 이곳에 온 이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그리 좋지 않은 결론에 다다른 내가 짠한 얼굴로 아힌의 재킷을 짚었다.
“비비?”
맹수의 영토는 언제 누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니까. 남모를 아픔을 함부로 생각한 것 같아 괜스레 미안해졌다.
당연히 이런 의사가 전해지지 못한 탓에 아힌의 고개가 모로 기울었다.
“왜 이래?”
“걸음을 재촉하는 게 아닐까요.”
이브린, 넌 좀 조용히 해. 앞발에 질타를 담아서 가리키니, 그가 수긍하듯 턱을 매만졌다.
“어느새 호령하는 법도 깨우치시다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아. 이 이상 상대했다간 스트레스로 인해 골이 당길 것만 같았다. 앞발을 집어넣은 내가 얌전해지자 흘끗거린 이브린이 말문을 뗐다.
“아힌 님, 토끼님을 파트너로 선택하신 연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웬일로 저 입에서 정상적인 질문이 다 나오고. 내심 이유가 궁금했던 나도 귀를 기울였다.
죄다 인간화를 치른 수인 사이에서 굳이 토끼를 파트너로 지정하다니. 그 부분은 제아무리 이브린이라도 이해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파트너가 있으면 춤을 추지 않아도 무관하잖아.”
명쾌한 답이긴 하나, 결국 토끼를 핑계로 농땡이를 부리겠다는 주장과 다름없었다.
그를 동시에 깨우친 나와 이브린이 기가 찬 눈길을 보냈다. 거의 처음으로 마음이 맞은 순간이었다.
* * *
이윽고 다다른 곳은 묘사하기 힘들 만큼 웅장한 철문 앞이었다. 붉은 벨벳으로 덮인 문은 과연 수인의 힘으로 열릴지조차 의문일 정도였다.
농작물이 풍요로운 토끼 영토와 달리 흑표범 영토는 부와 재물로 가득한 곳이라더니, 이 문을 보자마자 새삼 실감이 났다.
“차기 가주를 뵙습니다.”
아힌을 확인한 기사들은 신분 확인 절차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문을 개방했다.
내부가 드러남과 동시에 화려한 샹들리에와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수인들이 보였다.
멀거니 그 장면을 바라보던 나는 순간 희미한 향이 코를 스치자 몸을 굳혔다.
‘얘, 그거 알아? 이번에 글레타 가문의 영식이 우리 넷째 아가씨와 눈이 맞았다지 뭐야.’
‘뭐? 어디서?’
‘어디긴 어디겠어. 지난달에 열린 가주님의 탄생 기념 연회지.’
무도회 다음이면 늘 이어진 시녀들의 대화로 미뤄, 이곳은 사교의 장과 동시에 짝을 찾는 자리와도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화려한 치장은 물론 은근한 페로몬까지 흘리는 모양이었다. 페로몬은 일종의 성적 매혹이 가능하니까.
고로 지금의 향은 수인들이 미세하게 흘린 페로몬의 집합체와 다름없었다. 그 사실을 깨닫기 무섭게 지난번처럼 심장 부근이 옥죄어 오기 시작했다.
“차기 수장의 주머니에….”
“인형일까요?”
“아뇨, 살아 있는 토끼… 같습니다만.”
아힌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술렁임이 짙어졌다. 무도회장 내부, 살아온 시간을 통틀어 가장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힌의 신분이 신분인 탓에 노골적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눈길이 주머니 속의 나를 향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실상 문지기가 아힌 그레이스 님과 토끼님의 입장이라 일렀을 때부터 사태는 단단히 꼬인 상태였다. 도대체 왜. 아힌의 이름만 외치면 될 것을 굳-이.
안 봐도 아힌이 시켰겠지. 한숨만 푹푹 쉬는 나에 비해 그는 해맑게 “비비, 호랑이 일족은 처음이지?”라며, 마치 맹수 관광이라도 시켜 주듯 느긋하게 걸었다.
‘이 화상이….’
쓴소리를 삼킨 나는 주머니 속에서 눈과 귀만 슬쩍 내밀었다. 무도회장 내에는 누가 보아도 맹수인 수인들만 가득이었다.
더 큰 문제는, 이곳에 들어서면서부터 기묘하리만치 속이 울렁거리는 것이었다. 또 그렇다고 못 견딜 만큼 메슥거리는 건 아니고.
다들 페로몬에 별반 반응을 보이지 않는데, 나만 이상한 걸까.
“아가.”
이런저런 상념에 잠긴 와중, 나른하면서도 퍽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발렌스 님.’
푸른 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겹겹이 쌓인 인파를 가로질렀다. 조심스레 주변을 살폈으나 역시 아힌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수인은 보이지 않았다.
은발을 틀어 올린 발렌스 님을 마주한 나는 문득 그녀와 아힌을 번갈아 봤다. 함께 있는 것을 보는 건 처음인데, 막상 비교하니 분위기가 은근히 다른 듯하기도.
“큰일을 당할 뻔했다고 들었는데. 출타했다가 오늘 오전에 돌아온 탓에 이제야 보는구나.”
‘염려해 주셔서 감사해요.’
답이 불가능한 나는 화답의 의미로 주머니에서 앞발을 꺼내 들었다. 그러자 느릿하게 다가선 그녀가 손가락을 맞췄다.
“어머니, 너무 가깝습니다.”
거리가 썩 가까워지자 위쪽에서 낮은 음성이 울렸다.
“나도 아힌 너와 닿는 건 달갑지 않아. 어찌 늑대가 자결을 하게 내버려 둔 거니? 일 처리가 좋지 못하군.”
“그 늑대의 침입을 허용한 장소 또한 어머니의 저택입니다.”
타인이 보기에야 방긋방긋 웃고 있지만, 두 수인 사이로 속살거리며 오간 대화는 다정함과 거리가 멀었다. 심지어 보이지 않는 전기마저 튀는 느낌이었다.
‘사이가… 별로 좋지 않나?’
휙휙 번갈아 보던 나는 이제 그들의 심중을 이해하는 행위 자체를 포기했다.
애초에 발렌스 님은 아힌이 무도회장에 나를 데리고 온 것부터 나무라지 않는 눈치인데. 아니면 아힌의 성정 때문에 이 정도 기행은 익숙하다거나. 아무래도 후자에 가까워 보였다.
“아가.”
무시를 택했는지, 아힌의 어깨를 부채로 툭 밀어 버린 발렌스 님이 눈가를 휘었다. 왠지 아힌이 늘 짓는 미소와 겹쳐 보였다.
“너를 쫓았던 늑대의 머리는 내 친히 정문 앞에 걸어 두었느니라. 경고 정도는 되겠지.”
‘네?’
나긋한 표정과 달리 내용은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노골적으로 음성을 높인 그녀로 인해 주변 수인들이 술렁였다.
곧 “철창에 걸려 있던 게… 늑대 일족의 머리였군요.”라는 중얼거림마저 들려와 사실임을 증명했다.
‘정문에…. 정문에 늑대의 머리를?’
그런 걸 귀족가 저택 입구에 걸어 뒀다고? 잘린 머리가 매달린 모양을 상상하자 절로 안색이 새파래졌다.
더욱이 나를 쫓은 늑대라 표현한 덕분에 수인들의 눈길이 내 쪽으로 집중되었다. 어찌 보면 이 토끼를 건들면 재미없을 거란, 일종의 경고 같기도 했다.
묘하게 소란이 짙어졌다. 경악 어린 시선의 중심에 선 나는 감사함과 두려움 사이에서 한없이 갈등했다.
* * *
연회의 밤이 무르익었다. 이후로도 많은 시선이 머물렀지만, 귀족들은 감히 아힌 쪽으로 접근하지 못했다.
정말 나와 왈츠라도 추듯 선율에 맞춰 빙글빙글 돌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연회용 접시에 건초를 잔뜩 쌓아 올렸기 때문일까.
두 가지만 보아도 귀족들이 일부러 멀리하는 것임을 예측할 수 있었다. 나 같아도 엮여서 좋을 게 없음을 느끼며 최대한 멀리했을 터.
‘얘는 진짜배기야.’
귀족들, 심지어 보는 눈이 가득한 무도회에서마저 이런 기행을 펼치다니. 빙글빙글 도는 건 춤이 아니라 아힌의 머릿속일지도 모르겠다.
주머니 자락에 턱을 걸친 내가 가느다란 숨을 머금었다. 아힌의 행태도 문제이긴 하나, 아까부터 발끝에서 묘한 불안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때처럼 속이 메슥거리지만, 또 그만큼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은 아닌데. 그래도 몸 상태가 좋지 않으니 침실로 돌아가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었다.
‘왼쪽 앞발은 위급할 때.’
‘오른쪽은 아힌이 좋겠네.’
복잡해진 머릿속으로 아힌과 신호를 정한 사실이 떠올랐다. 역시 이곳을 벗어나는 게 좋겠지.
그를 부르기 위해 앞발을 꼼지락거리는 순간 높낮이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호랑이 일족은 대부분 벽안을 지니고 있어. 하이에나 일족은 검은 눈동자. 권력 구조를 파악해 봐.”
위를 올려다보자 아힌은 평소와 다름없는 의례용 미소를 건 상태였다. 그가 턱을 까딱여 가리킨 곳에는 두 수인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푸른 눈동자와 검은 눈동자. 자세히 살피니 하이에나 수인이 꽤나 저자세를 취하는 느낌이었다.
“호랑이 영토는 무기가 성행하는 곳이야. 반면 지척에 있는 하이에나 영토는 광물과 제련술이 한참 떨어지니, 자연스레 영토끼리 상하 관계가 형성된 거지.”
처음 접하는 사실이기에 고개를 내민 내가 그들을 주시했다. 토끼 영토와 거리가 멀수록 상대적으로 정보가 빈약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하이에나 수인은 외적으로 구분이 쉬워. 대체로 거뭇한 피부를 가졌거든.”
실제로 하이에나 수인들은 까만 눈동자와 피부로, 연회장 내 수인 중 가장 쉽게 일족 여부를 파악할 수 있었다.
변두리에 자리 잡은 그는 이외에도 몇몇 일족의 특징을 알려 줬다. 설명에 따라 시선을 옮기며 관찰하던 나는 굳이 이러한 사실을 집어 주는 게 의아해졌다.
‘왜?’
눌러 오던 완연한 의심이 고개를 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힌은 나를 새끼 토끼 그 이상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왜 내게?’
나한테 이러한 정보를 가르쳐 봤자 하등 도움 되는 부분이 없을 텐데. 숨죽인 채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자, 회장 내부를 느리게 배회하던 붉은 눈동자가 내게 닿았다.
청아한 미소가 지워진 아힌은 때때로 감흥 없는 낯이 되곤 했다. 웃을 때보다 더욱 속내를 읽기 힘든 표정.
그 탁한 얼굴을 마주하고 있자니 마치 날카로운 칼날이 목에 겨눠진 듯한 긴장이 밀려왔다.
“비비.”
정적을 깨며 흘러나온 목소리로 인해 몸이 흠칫 떨렸다. 동시에 숨 막힐 정도의 긴장이 와해되었다. 어느새 무감각한 표정을 지운 아힌이 내 코를 톡 눌렀다.
“무거워서 주머니가 찢어지면 어떡하지?”
‘…물어 버릴 거야.’
이 괘씸한 흑표범, 반드시 물어뜯어 버리겠어. 새로운 다짐을 한 내가 입을 벌리기 무섭게 기척이 일었다.
“그레이스 경, 오랜만이군요.”
전방에는 주홍빛 눈동자와 같은 빛깔의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아름다운 수인이 자리했다. 아힌을 기피하는 묘한 분위기 속에서도 말을 건넨 무척 용감한 영애였다. 같은 생각인지 멀찍이 선 귀족들의 동공이 흔들렸다.
“파트너로 애완동물을 데려오시다니, 여전히 매력적인 분이시네요.”
붉은 입술이 열림과 동시에 송곳니가 반짝였다.
본능적으로 움츠린 나는 주머니에서 눈만 내밀어 그녀를 주시했다. 매력이 아니라 나사 빠진 행동이 아닐까 싶은데, 역시 말은 포장하기 나름이었다.
“저희 여우 영토에도 한 번쯤 방문해 주시면 좋을 텐데요. 매번 거절하시니 속이 씁니다.”
“가면 여우의 먹잇감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
“제 것이 되어 주시면 더욱 좋겠지요.”
은근한 어투로 말한 그녀가 미끄러진 시선으로 아힌을 훑었다.
“사양하지.”
초식계 수인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말이 오갔다. 더욱이 대화가 지속될수록 그녀에게서 짙은 페로몬이 흘러나왔다.
성적 의미를 담은 농밀한 종류. 그를 무심코 들이마시자 일순 머리가 깨질 듯 지끈거렸다. 숨을 삼킨 나는 얼른 앞발로 코를 틀어막았다.
“다음을 기약하지요.”
대화는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인사를 마친 그녀가 멀어지자 아힌이 느릿하게 설명했다.
“방금은 여우 일족. 일처다부제가 보편적인 영토라, 그녀에겐 이미 다섯 명의 부군이 존재하지.”
‘다, 다섯 명?’
남편이 다섯이라니, 대단해. 경악한 내가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길이길이 응시했다.
인파에 묻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있자니, 다시금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심지어 이번은 몸이 절로 굽혀질 만큼의 고통이었다. 몸부림친 나는 절박한 심정으로 오른쪽 앞발을 치켜들었다.
“왜 그래?”
신호를 마주한 아힌은 주머니에서 나를 꺼내 들며 물었다. 그의 손바닥 위에서 버둥거리던 내가 다급하게 바닥을 가리켰다. 나 좀 내려 줘, 제발.
“…비비?”
생각 외로 의사를 빨리 눈치챈 아힌은 몸을 굽혀 아래로 내려 줬다. 드디어 네발이 땅에 닿았다. 딱딱한 감촉이 발에 닿자마자 나는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비비!”
뒤편으로 아힌의 외침이 들렸다.
“어머나!”
“무슨 일입니까?”
깜짝 놀란 귀족들이 우왕좌왕 발을 들었으나 돌아볼 겨를 따위는 없었다. 순식간에 회장을 가로지른 내가 바로 보이는 열린 문으로 내달렸다.
다행히 연결된 복도에 램프 불이 켜진 상태여서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다. 토기가 치미는 속을 억지로 내리누른 나는 쉼 없이 복도를 질주했다.
‘설마….’
설마, 설마. 자꾸만 불가능한 가설이 온 정신을 지배했다.
털썩, 겨우 열려 있는 아무 문으로 들어선 내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때처럼 페로몬이 온몸을 두드리듯 날뛰고 있었다.
연회 시작 때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여우 수인이 고의로 흘린 페로몬을 접한 이후가 틀림없었다.
도저히 감내하기 힘든 극통을 견디지 못한 나는 이리저리 구르며 몸부림쳤다. 지난번보다 고통의 강도가 더욱 심해졌다.
‘아윽.’
눈물이 그렁그렁 고일 지경이었다. 웅크린 채 숨을 몰아쉬던 나는 시야마저 흐릿해지자 여러 번 눈을 깜박였다. 깜박, 깜박, 갈라진 시야로 새하얀 머리카락이 드리워졌다.
온몸의 진이 다 빠진 나는 모로 누운 채 그저 눈을 깜박였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로 하얀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흐트러졌다. 그것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으니 점차 고통이 가시는 느낌이 들었다.
‘하얀색….’
어머니와 카이리도 저런 빛깔의 머리칼을 지녔는데. 단정히 빗거나 곱게 땋았을 때는 못내 부럽기도 했다.
램프 불에도 유난히 빛나듯 선명하여, 그를 바라보던 나는 무심코 앞발을 뻗었다. 그러자 또다시 누구의 것인지 모를 손이 시야를 채웠다.
심지어 앞발에 닿은 머리카락의 부드러운 촉감이 지나치리만치 생생했다. 그 사실을 깨닫는 동시에 모든 사고 회로가 정지했다.
‘손…? 감촉…?’
왜 저 주인 모를 손이 내 것처럼 여겨지는 걸까. 어째서.
수 초간 얼어 있던 내가 벌떡 몸을 일으켜 하얀 머리카락을 붙들었다. 그러자 아래로 절대 있어선 안 되는, 인간 특유의 팔다리와 몸통이 보였다.
더듬더듬, 몸을 매만질수록 전해지는 굴곡과 촉감으로 인해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아니야, 안 돼. 정신 차리자.’
인간의 몸이라니, 진짜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 하마터면 혼절할 뻔한 나는 연신 고개를 저으며 방을 둘러봤다.
램프는 켜져 있지만 사용하지 않는 곳인지 가구가 몇 가지 없었다. 이리저리 배회하던 눈길이 구석에 세워진 거울로 머물렀다.
급하게 일어서던 나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며 풀썩 넘어지고 말았다. 굽은 뼈로 알싸한 고통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다리를 매만지던 내가 떨리는 동공으로 손을 내려다봤다.
‘소, 손!’
손가락이 자그마치 다섯 개. 꿈에서도 그리지 못한 광경이었다.
결국 나는 엉금엉금 기어 방을 가로질렀다. 당장 두 다리로 걸을 만한 여건이 되지 않았다. 평생을 네발로 뛰어다녔는데.
만신의 힘을 다해 겨우 다다른 거울 속에는 난생처음 보는 여자가 자리했다. 딱 열여덟의, 아힌 또래로 보이는 외양이었다.
얼떨떨하게 바라보던 나는 슬그머니 거울 쪽으로 앞발을 뻗어 보았다. 그러자 거울 속 여자도 움직임에 따라 팔을 뻗었다. 동일한 행동으로 인해 순간 섬찟한 기분이 밀려들었다.
‘악!’
반사적으로 거울을 탁 때려 버리자 여자 또한 겁먹은 얼굴로 눈을 커다랗게 떴다. 딱딱한 표면을 때린 탓에 앞발이 욱신거렸다.
‘…인간이,’
동그란 콧방울 아래로 자리한 입술이 달달 떨렸다. 주저앉은 채 응시하던 나는 이내 믿기 어려운 현실을 직시했다.
‘인간이 되었어.’
거울 속 여자의 보랏빛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