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ymbiotic Relationship Between the Rabbit and the Black Panther RAW novel - Chapter (21)
토끼와 흑표범의 공생관계 21화(21/75)
‘천은 탁상에서 떨어진 것이며, 자신은 그 토끼를 우. 연. 히. 발견하여 회장에 데려다주려 했을 뿐이다.’를 수십 번 변명한 룬은 한 시간이 지나서야 발렌스의 추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전부 제정신이 아니야.”
하루 새 안색이 나빠진 그가 어둑어둑한 정원을 가로질렀다. 초점 흐린 눈동자 위로 억울한 기색까지 떠올랐다.
고작 토끼 하나 엮인 일에 가주까지 나설 줄은 몰랐다.
물론 분위기는 담소를 나누듯 너그러웠지만, 드문드문 섞인 발렌스의 언행에는 토끼를 기껍게 여기는 게 느껴졌다.
잠깐 걸음을 멈춘 룬은 아직까지도 아릿한 입술을 매만졌다. 새끼 토끼 주제에 발힘이 엄청났다.
‘잘못하면 입술이 터졌겠어.’
고개를 살짝 숙이자 귓가에 머문 곱슬머리가 흐트러졌다. 조금 전의 사건을 곱씹던 그는 코를 들쑤셨던 흑표범 냄새를 떠올렸다.
토끼에게 마치 소유욕이라도 드러내듯 페로몬 향을 잔뜩 묻혀 놓았다. 처음에는 오만한 흑표범이 사랑에라도 빠졌나, 싶었지만 막상 토끼에 대한 태도는 애완동물 그 이상이 아니었다.
더욱이 인간의 외형과 본모습을 오가던 토끼는, 행태를 보아 그 사실을 숨기고 싶었던 듯하고.
‘설마… 그레이스는 토끼가 수인인 것을 모르는 건가.’
그 영악한 흑표범이?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됐다. 수인인 사실을 모른다 치더라도 왜 토끼에게 페로몬을 묻힌 건데.
더욱이 인간화를 치른 수인은 본모습으로 오래 있어 봤자 반나절이 한계.
고로 인간의 모습이 가능한 토끼가 오랜 시간 동물의 외형으로 있는 것도 기이한 부분이었다. 차라리 수상하지 않은 부분을 찾는 편이 빠르지 않을까.
‘무얼 숨기고 있는 거지.’
늑대 일족의 활동이 거세지기 시작하고, 사자 일족과 동맹이 오가던 와중 토끼가 나타난 시기까지. 모든 게 의문투성이였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룬이 아랫입술을 가벼이 핥았다.
* * *
작은 소동이 있었지만, 무도회는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안정을 찾지 못한 나는 무거운 공기 속에서 마른침을 삼켰다.
아힌은 침실에 돌아오자마자 연미복도 갈아입지 않은 채 소파 위로 엎드려 버렸다. 마치 흐느끼는 듯한 모양새였다.
그도 모자라 따라 들어온 이브린마저 내게 질타 섞인 눈길을 보내고 있으니.
나도 지금 제정신을 유지하기 힘든 처지이건만, 도대체 이건 뭐 하자는 건지. 이 흑표범들의 행동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한참 미심쩍은 눈길을 보내고 있자, 아힌이 칭얼거리듯 말했다.
“이브린, 비비한테 말 좀 전해 줘.”
“기꺼이.”
굳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다 들려. 새삼 룬에게 직접 대답한 당시를 떠올린 내가 입을 오물거렸다. 물론 그때처럼 낯선 목소리는 튀어나오지 않았다.
“실망이야, 비비.”
‘저건 또 무슨 소리래.’
콧등을 씰룩이던 나는 그제야 무도회장에서 미친 듯이 달린 사실이 기억났다. 아힌의 입장에서는 곱게 요구를 들어줬더니 도주를 시도한 것과 다름없었다. 양심에 찔리긴 하나, 지금 생각하면 무도회장을 벗어난 행동은 최고의 선택이 아니었을까.
“실망이라고 전해 줘.”
“토끼님, 아힌 님께서 토끼님을 증오하신답니다.”
지시를 이행한 이브린의 진중한 음성이 울렸다. 이브린, 말을 전할 거면 똑바로 전해.
“어떻게 파트너를 두고 사자 따위랑 도피를 시도할 수가 있어?”
“흑표범보다 사자 쪽이 취향이었습니까?”
말을 일 할도 제대로 전하지 않고 있었다. 부스스 소파에서 고개를 든 아힌이 이브린을 응시했다.
“똑바로 말해.”
“토끼님, 똑바로 말하십시오. 사자입니까, 흑표범입니까.”
“이브린, 너한테 말한 거야.”
“죄송합니다.”
전혀 죄송한 표정을 짓지 않은 이브린이 한 걸음 물러났다. 물론 자세만은 아주 공손했다. 새삼 저런 이가 어떻게 아힌의 밑에서 목이 붙어 있는 건지 궁금하기도 하고.
“나가.”
결국 아힌이 소파 옆의 칼집을 매만지자, 이브린은 순간 이동이라도 하듯 빠르게 사라졌다.
소리 없이 달아나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내가 몸을 굳혔다.
밤마다 함께하긴 하나 이상하리만치 아힌과 둘만 남으면 긴장이 밀려왔다. 더욱이 오늘은 그에게 새로운 비밀을 만든 참이었다.
‘인간….’
의문 가득한 상황에서, 딱 한 가지 짐작되는 거라면 페로몬이었다.
아힌 때도 그렇고, 여우 수인도 그렇고. 바로 가까이서 타인의 페로몬을 들이마시자마자 뚜렷한 고통과 함께 모습이 변했다.
“비비.”
부름에 고개를 들자 소파에 비스듬히 누운 아힌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왕관 장식은 어디 갔어? 아까는 달고 있더니.”
뒤늦게 머리 위 무게감이 사라졌음을 깨달은 내가 낭패 어린 낯을 했다. 인간으로 변하는 사달이 일어났는데 왕관이 멀쩡하게 달려 있을 리가. 연신 박수를 보내던 울페스와 메이미의 얼굴이 아련하게 스쳤다.
“뭐, 상관없나.”
선연한 웃음을 지은 그가 소파에서 손을 내려 나를 집어 들었다. 최근 전처럼 무례하게 뒷덜미를 잡는 행동이 줄었긴 하나, 여전히 경계하게끔 만드는 손길이었다.
더욱이 누운 채 양손으로 들어 올린 탓에 내려다본 시야로 아힌이 가득 찼다. 흐트러진 은발과 느슨한 크라바트가 묘하게 아찔해 보여, 괜히 시선을 피했다.
“사자가 호기심을 갖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내가 페로몬 향을 묻혀 놓았으니까.”
움찔, 몸을 떤 내가 다시금 아힌을 내려다봤다. 붉은 눈동자에 새하얀 토끼가 비쳤다.
‘그쪽한테서 그 흑표범의 페로몬이 진동을 하는데?’
룬의 주장과 동일한 말이었다.
‘하지만 언제?’
언제 페로몬을 묻혀 놓은 거지? 가설대로라면 나는 페로몬을 가까이서 마시는 순간 인간이 될지도 모르는데.
그러나 지금까지 아힌에게 목을 물렸던 때 외에는 별다른 향을 느낀 적이 없었다. 일반적인 향을 묻히는 행위 말고, 조금 더 노골적인 페로몬이어야 하는 걸까.
자세한 설명을 원한 내가 오른쪽 앞발을 휘두르며 재촉했다.
“너는 수인이다 보니 가끔 페로몬을 흘릴 때가 있거든. 그래서 내 페로몬으로 친절하게 감춰 준 거지.”
친히 설명해 준 아힌이 나를 공중에서 좌우로 가벼이 흔들었다. 그렇지, 지금만 해도 몸속 페로몬이 느껴지는 어엿한 수인이지. 흔들리며 긍정하던 나는 일순 경악 어린 얼굴로 입을 틀어막았다.
‘바, 방금 뭐라고?’
수인인 사실을 알고 있었어? 왈칵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연신 입만 뻐끔거리는 나를 올려다본 아힌의 입매가 말갛게 올라갔다.
“인간화를 치르지 못한 것도 알아.”
* * *
불어온 산들바람에 하얀 털과 함께 근심이 흩날렸다. 유난히 높은 하늘을 올려다본 나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토끼 수인들이 네 생존 여부를 조사하기 위해서 경계를 넘었거든. 아, 근데 죽여 버려서 그 이상은 듣지 못했어.’
어젯밤의 일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어떻게 그런 선한 얼굴로 위와 같은 섬뜩한 말을 뱉는 건지.
‘토끼는 다 비비 같을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수염이 많더라고.’
당최 어떤 자의 얼굴을 설명하는지 예상조차 어려웠다. 어쨌든 그의 성정을 미뤄, 더 이상 듣지 못했단 주장을 곧이곧대로 믿기도 힘들었다. 일단 수인인 사실과 인간화를 치르지 못한 건 확실하게 아는 듯하고.
‘가문에 대한 이야기도 들은 걸까.’
대체로 귀족은 슬하에 많은 자제를 두기에, 치부가 되는 자식은 쉬이 버려지곤 한다. 외동인 아힌이 특이한 경우였다.
‘경계를 넘었다는 토끼 수인들은… 부모님이 보낸 자들이겠지.’
흑표범 영토에서 아힌에게 죽임을 당한 이들이 돌아오지 않으니, 생존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수하를 보냈을지도 모르겠다.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조금 씁쓸해졌다. 만일 내가 버려지게 된 세세한 경로까지 알게 되면 아힌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나는 비비가 토끼라서 좋아.’
그다음 흘러나온 말은 순간적이지만 가슴 언저리를 지끈거리게 만들었다. 반쪽짜리 수인이라 멸시받던 내게 토끼라서 괜찮다는 말은 참 낯선 표현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접어 두고, 웃음기를 지운 아힌의 중얼거림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인간이면 오히려 곤란해.’
깜짝 놀라 올려다보니 아힌은 곧 별말 아니라는 양 천사 같은 미소를 걸었었지.
평소라면 흑표범의 헛소리라 여겼겠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달랐다. 바로 어제 인간으로 변했다가 돌아왔으니.
혹시 내가 인간이면 곤란한 이유가 있다든가, 아니면 토끼한테 애착을 가지는 거라든가. 이유가 뭐든 참으로 난감한 발언이었다.
‘내가 인간이 되는 건 반기지 않는 걸까···.’
할 수만 있다면 아힌의 머릿속에 잠깐이라도 들어갔다 나오고 싶었다. 더욱이 인간인 상태에서 마주친 룬 마니언츠 또한 불안 요소 중 하나였다.
“아가.”
암울하게 땅굴을 파는 내 귀로 발렌스 님의 나지막한 부름이 들렸다.
“페로몬이 많이 흐트러졌단다.”
후후 웃은 그녀가 홍차를 머금었다. 그제야 깜박 정신이 든 내가 급히 몸속을 점검했다.
상념에 잠겨 있느라 나도 모르게 페로몬을 해이하게 갈무리한 모양이었다. 얼른 재정비하자 발렌스 님이 기특하단 듯 머리를 가만가만 쓸었다.
“네 향을 맡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는군.”
‘향?’
그녀의 말을 미뤄, 자주 이런 티타임을 갖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무슨 향이기에?’
앞발로 코를 가져가 봤자 안타깝게도 스스로의 페로몬을 맡는 건 불가능했다.
“아주 좋은 페로몬을 가지고 있구나.”
과연 좋은 페로몬일까, 연신 앞발을 킁킁거리던 나는 일순 움직임을 멈췄다.
페로몬. 근래 내게 일어난 모든 일과 연관된 단어였다.
* * *
“토끼님, 돌부리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뒤따르는 메이미의 염려 섞인 외침이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그녀와 상당히 거리가 벌어진 상태였다.
‘빨리, 빨리!’
어서, 메이미! 얼른 따라오라는 의미로 발짓을 한 내가 다시금 몸을 틀어 내달렸다.
메이미는 제 나름의 철칙이 있었다. 산책은 화원이 있는 곳, 독서는 서재, 운동은 연무장 등의.
고로 현재 연무장으로 달음박질치는 내 발에 가속이 붙었다.
‘네 향을 맡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는군.’
발렌스 님의 말을 허투루 넘길 순 없었다. 그녀는 흑표범 영토의 수장인 만큼 상상도 못 할 경지에 이르렀을 테니까.
‘아힌 님, 요즘 수면 시간이 늘어나셨습니다.’
‘비비랑 있으니 왠지 일어나기가 싫어서.’
‘유독 아침 업무가 방대한 날만 늦잠을 주무시지 않습니까.’
‘그랬던가?’
나름 아힌과 이브린의 대화도 귀담아들었다. 생각해 보면 아힌은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자는 것에 묘한 집착을 보였는데. 그게 페로몬과 관련되어 있는 걸지도 몰랐다.
‘일부에서는 내재된 페로몬의 능력이 너무 강력할 시 인간화가 늦어진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페로몬 이론」에서 읽었던 구절. 만일, 혹여,
‘내가 그 사례에 해당된다면.’
바로 어제 허상으로 여기곤 하던 인간이 되었으니, 아주 불가능한 가설은 아니었다.
곧 티타임 장소에서 가장 가까운 연무장이 드러났다. 끼이익, 멈춰 선 나는 메이미를 향해 뒷발을 찼다.
‘메이미, 거기서 기다려.’
행여 그녀가 내 페로몬을 눈치채면 곤란해질 가능성이 크니까. 발을 구른 나는 메이미가 작아 보일 만큼 거리를 벌렸다.
마침 하늘에는 나를 위협할 만한 매도 없었고, 주변을 지나는 인기척도 없었다. 그럼에도 경계를 풀지 않은 메이미는 앞치마에서 단검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드, 든든하네.’
흉흉한 기세를 내뿜는 그녀를 뒤로한 내가 정신을 집중했다.
페로몬은 향을 지니는 것 외에도 고유의 능력이 존재한다. 다만 모든 수인에게 해당되는 건 아니었다.
혈통에 따라 능력도 두드러지게 차이가 나며, 아예 능력이 없는 수인도 다수. 따라서 혈통 좋은 수인들이 권좌를 차지하여, 피라미드 구조가 형성된 게 지금의 대륙이었다.
결론적으로, 나름 래비안 귀족가의 혈통을 이은 나도 어떠한 능력을 지녔을 확률이 높았다.
‘…그것만 찾아내면.’
들쑥날쑥한 인간이 아닌, 온전하게 인간화를 치른 수인으로 거듭날 수 있을지도. 걱정이야 많지만 제대로 된 인간화를 치르고 나서 해도 늦지 않았다.
떠올려 보면 아힌과 여우 수인의 페로몬을 마셨을 당시, 고통을 느끼기에 앞서 온몸의 페로몬이 주체가 안 될 만큼 날뛰곤 했다.
반쯤 몸을 일으킨 나는 허공으로 양쪽 앞발을 뻗었다. 갈무리해 둔 페로몬을 슬며시 풀어, 그 기운을 앞발로 모으는 느낌으로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흑표범 영토에 오기 직전까지만 해도 느낄 수 없었던, 거대한 페로몬이 움직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