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ymbiotic Relationship Between the Rabbit and the Black Panther RAW novel - Chapter (26)
토끼와 흑표범의 공생관계 26화(26/75)
판잣집과 거리를 벌린 채 기다리던 이브린이 미간을 좁혔다. 주변을 둘러싼 혈향과 출처를 알 수 없는 묘한 페로몬이 계속해서 신경을 거슬렀다.
아힌이야 태연자약한 음성으로 대기하라고 명했지만, 판잣집 내부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염려가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아힌은 제 주인이라도 오롯이 믿을 거리가 못 되니. 작은 새끼 토끼의 무사 여부를 두 눈으로 확인해야 한숨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더욱이 우측에 자리한 호위 기사 중 한 명, 미오의 안절부절못하는 반응이 이브린의 불안을 가중시켰다.
바깥에서 대기하는 이들의 걱정이 짙어지기 시작할 즈음, 끼익- 나무 문이 바닥과 마찰하는 소음이 울렸다.
“아힌 님.”
“아힌 님!”
반색하며 다가서던 이브린과 호위 기사들이 흠칫 걸음을 물렸다.
나타난 아힌은 한쪽 어깨에는 애쉬를, 반대편 손에는 축 늘어진 새끼 토끼를 든 상태. 심지어 재킷은 어디로 벗어 던졌는지 셔츠가 새빨간 선혈로 물들어 있었다.
당황스러운 모습으로 인해 잠깐 공기가 괴괴해졌다. 개중 먼저 정신을 차린 이브린이 급히 달려갔다.
“아힌 님, 이게 어떻게 된….”
“잠들었을 뿐이니까, 호들갑 떨지 말고 이거나 받아.”
대수롭지 않게 설명한 아힌은 어깨에 걸친 애쉬를 턱짓했다. 그르렁~ 푸쉬쉬~, 코 고는 소리가 허탈함과 함께 긴장을 와해시켰다.
“이, 이쪽으로 주십시오.”
뒤늦게 다가온 호위 기사 두 사람이 애쉬를 받아 들었다. 깊이 잠든 흑표범은 이곳저곳 옮겨짐에도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꽤 무게가 나가는 애쉬의 하체를 받친 미오는 조심스레 아힌의 눈치를 살폈다.
‘도대체….’
분명 차기 가주의 품에 있었던 묘령의 여성이 증발하듯 사라졌다. 갑자기 나타난 그녀는 누구였으며, 어디로 간 것일까.
자연스레 미오의 눈길이 늘어진 새끼 토끼에게 머물렀다.
여성은 맹수계 수인이라기엔 뼈대 자체가 여렸고, 이목구비 또한 오목조목했다. 심지어 재킷으로 꽁꽁 싸맨 이상한 옷차림을 비롯해, 햇볕을 받은 적이 없는 듯한 투명한 피부까지.
‘보라색 눈동자….’
더욱이 그녀가 지니고 있던 보라색 눈동자는 토끼 일족과 양 일족 특유의 눈동자 색깔이었다.
에이, 설마. 말도 안 되는 가설에 다다른 미오의 동공이 거세게 떨렸다.
그런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아힌이 입가를 툭툭 가리켰다. 함구하란 의미.
옅게 고개를 끄덕이는 미오를 뒤로한 아힌은 그새 다가와 추근거리는 이브린을 밀쳤다.
“거치적거리니까 비켜, 이브린.”
“토끼님!”
“자게 내버려 둬. 늑대 수인과 마주쳐서 꽤 놀랐을 테니까.”
깜짝 놀란 이브린의 눈이 토끼처럼 커다래졌다.
“늑…!”
“상처는 없어. …내가 처리했거든.”
정확히는 비비와 애쉬의 솜씨겠지만. 두루뭉술하게 얼버무린 아힌이 손에 들고 있던 비비를 팔로 받쳐 안았다.
반쯤 뜨인 적안이 새하얀 토끼를 훑었다. 가만히 내려다본 그는 조금 전의 상황을 상기했다.
생사의 기로에 있던 애쉬의 상처를 단번에 고쳐 버리는 페로몬. 비비가 가진 치유계 능력은 아힌의 예상을 훨씬 능가하고 있었다.
엔델루스 지역에서 비비의 페로몬을 확인해 볼 참이었으나, 그럴 수고를 덜었다고 해야 할지.
또한 어렴풋이 짐작하긴 했지만, 비비가 인간의 모습으로 변모한 것도 난감한 사안이었다. 토끼 상태라면 몰라도, 완전한 인간이 되어 버리면 곁에 두는 게 여러모로 성가시니까.
무심코 창백하게 질린 여자를 떠올린 아힌은 헛웃음을 삼켰다.
제 작은 행동 하나에도 뚜렷한 경계를 드러낸 눈동자. 누가 봐도 비비스러운, 따로 페로몬을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비비다운 외양이었다.
게다가 잠드는 동시에 새끼 토끼로 변한 장면은 기가 찰 노릇이었다. 조절을 제대로 못 하는 걸 보아, 완전한 인간화를 치른 건 아닌 듯했다.
“아힌 님?”
멍하니 토끼를 바라보다가, 급기야 실실 웃는 아힌으로 인해 이브린은 질린 낯을 했다. 여러 해를 모셔도 저 능구렁이의 속은 한 치의 예측조차 할 수 없었다.
“외람되지만, 너무 음침합니다.”
“뭐가?”
“주군의 미소 말입니다.”
“넌 존재 자체가 음침해.”
“예?”
이브린은 못 들은 척 노골적으로 먼 곳을 응시했다. 입매를 올린 아힌은 그의 발을 가볍게 지르밟았다.
“상황 보고나 하지.”
발을 누르는 압력이 점점 거세졌다. 꽤나 아팠던 이브린이 슬그머니 뒤로 두 발자국 물러났다.
“…늑대 수인의 처리는 끝났고, 다만 그 과정 중 타고 온 마차가 전복되어 버렸습니다. 저택으로 돌아가기보다는… 산맥만 넘으면 되는 엔델루스 지역으로 들어가는 편이 나을 듯합니다.”
어느덧 해가 기우는 시간대. 노을로 물들기 시작한 하늘을 올려다본 아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편이 낫겠네. 도착하는 즉시 그레이스가(家)에 지원 요청하고.”
“알겠습니다. 또한 늑대 수인들의 사체를 수색했으나, 엔델루스 지역에서 성황 중인 약물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제법 많은 수의 늑대 수인을 상기한 이브린이 혀를 찼다.
수인들은 서로의 영토를 드나드는 것에 큰 제한을 두지 않는 대신, 타 영토에서 일어나는 일에 한하여 불간섭하는 게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고로 늑대 수인들의 습격에 대해, 늑대 영토 측에 책임을 묻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덧붙여 몇 가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아니, 안 돼.”
왜 마차 창을 막으라고 한 건지, 애쉬와 비비는 마차에서 내린 후 어떻게 된 건지.
궁금한 점이 산더미였으나 질문마저 가로막힌 이브린의 얼굴이 퉁퉁 부었다. 그 낯을 외면하며 걸음을 옮기던 아힌이 문득 멈춰 섰다.
“이브린, 무도회 이후에 따로 접근해 온 토끼 영토 측 인물은 없어? 우회적으로라도.”
“전혀 없습니다.”
그래? 짧게 답한 아힌은 다시금 비비를 주시했다. 체력 소모가 심했는지, 미동도 없이 오르락내리락 숨만 내쉬는 상태였다. 조그마한 코를 툭 짚은 그가 이브린을 돌아봤다.
“혹시 토끼 영토의 귀족 중에 백,”
말문을 떼던 아힌이 입을 다물었다.
비비는 제 털처럼 새하얀 머리칼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백색 머리카락은 드물진 않지만 그렇다고 흔하지도 않은 빛깔이었다. 토끼 영토에서 백발을 지닌 귀족이나 상인을 추리면 가문을 알아낼 가능성이 컸다.
정적이 길어지자, 이브린이 조심스레 되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별거 아니야. 출발하지.”
다음에 직접 물어보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르니까. 말끝을 흐린 아힌은 눈매를 동그랗게 휘었다.
* * *
엔델루스 지역.
흑표범 및 사자, 늑대 영토와 경계를 둔 중립 구역으로, 세 영토의 수인 외에도 다양한 수인이 더불어 살아가는 곳이라고 한다. 무역의 거점으로 불리기도 하며, 시가지 전체가 독특한 향료 냄새로 가득한 지역.
내가 눈을 뜬 곳은 바로 엔델루스의 여관이었다. 그것도 인간이 아닌 새끼 토끼 모습으로. 잠들면서 어렴풋이 시야가 바뀌는 것을 느꼈기에 크게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호위 기사들의 설명에 따르면 꼬박 하루를 잠들어 있었다는데. 그래서인지 유난히 페로몬이 깨끗하고 안정된 느낌이었다.
아힌과 이브린은 잠깐 외출한 상태라, 당장 아힌을 마주하지 않아도 되는 부분은 다행이긴 했다. 애쉬의 기사회생부터 개인적인 사정까지 이래저래 생각할 부분이 많았으니까.
초조함에 입안이 바싹 메말랐다.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들킨 이상, 아힌이 어떻게 나올지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현재는 그가 필요할 만큼의 문제가 발생한 상황이었다.
‘애쉬, 너무 기대지는 마.’
자칫 깔릴 거 같으니까. 벌러덩 드러누운 애쉬의 배를 긁어 주던 내가 곁눈질을 했다.
붉은 벽과 고풍스러운 가구가 어우러진 낯선 침실. 이곳의 접객용 의자에는 황금색 눈동자를 지닌 사자 두 마리가 자리한 상태였다.
하나는 왕왕 마주쳤던 룬 마니언츠였고, 나머지 한 명은 처음 보는 수인이었다.
금발을 한쪽으로 느슨하게 묶어 내리고, 왼쪽 눈에 외알 안경을 착용한 젊은 신사. 각 잡힌 자세와 조금 날카로운 눈매가 남자의 성격을 대변했다.
무엇보다 룬을 부르는 호칭을 미뤄 보아 그의 보좌관임이 틀림없었다.
분명 그레이스가(家)에 지원 요청을 했다고 들었는데, 왜 가문의 일원이 아닌 저 두 사자가 온 건지. 막상 문을 열어 준 호위 기사들도 당황스러운 눈치였다.
무엇보다 신경 쓰이는 점은, 들어설 때부터 나를 향해 못 볼 걸 본 듯한 보좌관의 눈빛이었다.
‘그만 좀 쳐다봐.’
얼굴이 뚫리겠어. 차마 호통은 치지 못한 내가 몰래 뒷발을 내밀었다.
나름 위협을 시도했지만, 보좌관의 눈썹이 움찔거리자 나는 속히 애쉬의 애교를 받아 주는 일에 몰두했다.
‘으이구, 그렇게 좋아?’
몸을 뒤집은 애쉬는 생사를 오갔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건강한 모습이었다.
다행이야. 눈꼬리를 늘어뜨린 나는 애쉬의 배를 통통 두드렸다. 무거운 내 마음은 아는지 모르는지, 애쉬는 아까부터 계속 배를 문질러 달란 일종의 애정 표현을 하고 있었다.
벌써 열댓 번째 반복되는 행위. 목숨을 빚진 나로선 그를 거절 못 한 채 앞발로 살살 배를 긁어 줬다.
힘들어서 쉬려 하면 꼬리로 침대를 탁탁 두드려 대니. 얼굴로 열이 오를 만큼 배를 긁어 주던 중, 한참 만에 보좌관의 입술이 열렸다.
“수인이 굳이 저런 모습으로 있을 리는 없고…. 도대체 저게 뭐랍니까?”
의자에 권태롭게 늘어져 있던 룬이 나를 돌아봤다.
“어….”
말을 고르던 그가 엄지와 검지를 마찰시켜 딱 소리를 냈다.
“그레이스 경의 비상식량? 아니, 비상 간식.”
“상식적인 선에서 설명해 주십시오.”
“…이라고 이브린이 귀띔해 주더라.”
이브린. 그 작자는 정말 하등 도움 되는 구석이 없었다. 굳이 먹이라고 지칭하다니, 괘씸함에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그분은 상식을 한참 벗어난 사람이잖습니까.”
‘맞아, 맞아.’
너무도 옳은 소리였기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런 나를 본 보좌관의 낯빛이 더욱 하얗게 질렸다. 어디 미지의 생물이라도 본 듯한 눈길이었다.
“보십시오. 세상에 어느 토끼가 흑표범을 종처럼 부린답니까?”
정확히는 종처럼 부린 게 아니라 애교에 응해 준 거지. 애쉬의 배를 팔이 빠져라 긁어 주고 있는 나로선 억울할 만한 오해였다.
“심지어 말까지 알아듣고요.”
오들오들 떠는 보좌관을 보고 있자니, 보통 나를 봤을 때 나와야 하는 정상적인 반응이 아닐까 싶었다.
그러고 보면 수인은 인간화를 치른 후엔 본모습이 성수(成獸)로 변한다는데. 나는 인간으로 바뀌었음에도 여전히 새끼 토끼의 형태였다.
완전한 인간화를 치르지 못해서일까. 페로몬을 비롯해 이 또한 풀어야 할 의문점이었다.
“레스틴, 면전에서 그런 태도는 실례야.”
“하, 하지만….”
“미안해요, 제 보좌관이 다소 편협한 시야를 가져서. 대신 사과하죠.”
대신 사과하는 사람이라기엔 자세나 표정이 꼭 잠들기 직전의 한량 같았다.
그리고 그쪽도 나와 마주쳤을 때마다 썩 좋은 태도는 아니었지 않나. 불신 어린 눈으로 쳐다보자, 룬은 보좌관의 등을 떠밀었다.
“가서 통성명이라도 해 둬, 초면이잖아.”
“아니, 잠깐만요. 새끼 토끼랑 무슨 인사를 나누라는 거죠?”
“레스틴.”
짐짓 엄한 목소리를 내는 룬으로 인해 보좌관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곧 그는 반강제로 나와 애쉬가 자리한 침대 앞에 당도했다.
나도 굳이 맹수랑 인사치레를 하고 싶진 않아. 발걸음을 돌려 줬으면 하는 바람과 달리, 보좌관은 망설이며 가슴 언저리에 손을 얹었다.
“인사가 늦어… 죄송합니다. 룬 마니언츠 님의 수족이자, 레스틴가(家)의 삼남인 헤링턴 레스틴입니다.”
그의 정중한 인사를 접하니, 새삼 끝자락에 묻어 둔 래비안이란 성이 떠올랐다. 이제 그 성을 이름 뒤에 붙일 일은 없겠지.
‘비비예요.’
잠시간 상념에 빠졌던 나는 레스틴의 인사에 답하기 위해 앞발을 쭉 내밀었다. 지금의 모습으로썬 최선의 화답이었다.
그러자 그가 “힉.” 작게 기겁하며 한 걸음 물러났다. 심지어 뒤로 물러나다가, 탁상에 정강이를 박은 탓에 껑충껑충 뛰며 난리도 아니었다.
‘무슨 저런 겁보가 다 있대.’
보기 드문 대단한 겁쟁이였다.
앞발을 거둔 나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묘한 소리에 시선을 틀었다. 뒤편에 앉아 있던 룬이 테이블에 엎드린 채 끅끅거리고 있었으니. 우는 건 아닐 테고, 이 상황을 즐기는 게 틀림없었다.
진짜 싫다. 기가 찬 내가 인상 쓰며 애쉬를 툭 건드렸다.
‘애쉬, 맹수는 다 저렇게 성격이 비틀렸어?’
푸르르, 마치 자신은 아니라 주장하는 듯한 애쉬의 콧방귀 소리가 침실을 울렸다.
* * *
탁, 닫힌 중문이 테라스와 침실을 단절시켰다.
유리창 너머로 인간화한 나와 마주쳤던 호위 기사, 미오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나는 괜찮단 의미로 앞발을 흔들어 줬다.
그리고 여태 질겁한 낯빛인 레스틴을 향해서는 허공으로 뒷발차기를 날려 보냈다. 찰랑이는 금발이 사자 갈기로 보일 만큼 얄미웠다.
“자, 방해꾼들도 사라졌고. 대화를 좀 나눠 볼까요.”
커튼을 쳐서 시선을 차단한 룬이 주의를 환기시켰다.
“원래는 조금 더 빨리 만나고 싶었는데, 적응이 필요하더라고.”
‘…적응? 무슨 적응?’
떨떠름하게 입맛을 다신 나는 애쉬 옆에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어찌 되었든 그는 최초로 인간이 된 광경을 목격한 자였으니, 마냥 추궁을 피하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뭐, 지금의 모습으로 대화를 나누는 건 불가능한데… 인간으로 돌아오는 건 어때요?”
그게 자유로웠으면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이유도 없지.
혹시나 그가 강요할까, 나는 얼른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자 수그려 앉아 눈높이를 맞춘 룬이 턱을 괬다.
“왜, 수인인 사실을 숨기는 중이라서?”
처음엔 숨긴 게 맞지만, 아힌에게 죄다 들킨 마당에 비밀이라 할 수가 있나. 장황한 설명이 불가능했던 난 그저 침묵을 행했다.
“그때 내 입을 발로 차면서까지 인간인 사실을 감추고 싶어 했잖아요. 보아하니 아힌 그레이스는 당신이 수인인 걸 모르는 듯한데.”
그러니까 어제부로 다 들켰대도.
구시렁거리던 나는 룬의 입술 사이로 보인 송곳니 탓에 애쉬에게 몸을 밀착시켰다. 하루가 지났음에도 아힌에게 물린 목 부근이 따끔따끔 아렸다.
“예를 들면 당신이 소정의 목적을 갖고, 의도적으로 아힌 그레이스에게 접근했다든가.”
의도적인 접근은 고사하고, 선택지도 없이 흑표범의 저택으로 잡혀 온 신세인데. 내 능력을 높이 평가해 준 룬에게 고마워해야 할지 참으로 애매했다.
“수인임을 숨기고 기밀을 빼낸다거나. 근데 그런 콩알만 한 몸뚱이로 뭘 어떻게 하려고요?”
‘콩알이란 표현은 실례잖아!’
칭찬이든 욕이든 하나만 해. 분개한 내가 앞발로 바닥을 탕탕 두드렸다.
“그러고 보니….”
격한 반응은 안중에도 두지 않은 룬이 기지개를 쭉 켰다.
“무도회에선 왜 그런 차림으로 있었던 건데요? 생각할수록 수상하네. 지금만 해도 그쪽한테서 흑표범의 냄새가 진동을 하는데. 둘 다 도대체 뭘 감추고 있는 거죠?”
중얼중얼 홀로 추측을 이어 가던 그는, 유리창에 비친 제 모습을 보더니 짐짓 정색했다. 영락없이 애쉬와 나, 즉 동물 두 마리에게 혼잣말을 하는 사람으로 보이긴 했다.
덩달아 유리창을 돌아보던 나는 문득 아힌의 행동이 파노라마처럼 스쳤다. 굳이 내게 자신의 페로몬을 묻혀 가며 수인인 사실과 페로몬을 감추라 이르곤 했지 않나. 혹시 아힌은 내 페로몬이 타인에게 드러나는 것을 꺼리는 걸까.
‘왜?’
게다가 인간화를 딱히 반기지 않는 듯한 언행을 보이기도 했지. 생각에 잠긴 나는 차근차근 곱씹었다.
돌이켜 보면 페로몬 향을 묻힌 정도로는 인간으로 변하지도 않는 것 같고. 여우 수인이나 늑대를 만났을 때처럼 일정 농도 이상의 페로몬을 접해야 하나 본데.
본 모양을 알 수 없는 퍼즐이 잔뜩 흐트러진 느낌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지려는 찰나, 갑자기 몸을 낮춘 룬은 “쉿.” 검지를 입으로 가져갔다. 무료해 보이던 금안이 꽤나 진지해져 있었다.
‘여기서 당신만 조용히 하면 되는데.’
굳이 집어 주면 그가 민망할 듯하여, 소리를 낮추는 척 입을 틀어막았다.
기척을 숨긴 룬은 조심스럽게 테라스 난간으로 몸을 움직였다. 따라서 난간 틈새로 고개를 살짝 내민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뭐 하는 거지?’
언제 나타났는지도 모를 종업원 두 사람이 무언가를 은밀히 교환하고 있었다. 고작 2층 높이임에도 대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으니, 의도적으로 기척을 감춘 게 분명했다.
‘엔델루스 지역을 중심으로 퍼진 약물은 민간인도 만연하게 복용하는 추세죠. 페로몬과 관련된 약물임은 분명합니다. 증세가 다양한 것을 보아, 실험용이나 마약일 확률도 높습니다.’
마차에서 아힌과 이브린이 나눈 대화를 떠올리는 순간 룬이 쯧 혀를 찼다.
테라스 아래는 여관의 변두리로, 접선하기엔 더없이 좋은 장소였다. 아무래도 같은 결론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앗!’
입을 뻐끔거리던 내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난간에서 고개를 내민 게 못마땅했는지, 애쉬가 덜미를 물어 든 탓이었다. 혹여 소음을 낼까 룬은 애쉬에게서 나를 가볍게 낚아챘다.
‘그만둬, 이 맹수들아!’
이리저리 옮겨지며 시야가 여러 번 바뀌었다. 어지럼증을 느끼던 나는 일순 위로 고개를 든 종업원과 시선이 마주쳤다.
멍하니 위를 올려다보던 종업원 두 사람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더없이 의심스러운 행동이었다. 동시에 룬은 뛰어내릴 기세로 테라스 난간에 한쪽 다리를 걸쳤다.
“얼핏 봐도 수상하니까 일단 잡죠.”
‘그걸 왜 내 허가를 구하듯이 말하는데!’
버둥거릴 새도 없이 그가 순식간에 도약했다. 반사적으로 눈을 꽉 감았던 나는 안정적으로 착지한 느낌이 들자 실눈을 떴다.
바로 앞에는, 낯빛을 파랗게 물들인 종업원 두 사람이 무언가를 움켜쥔 상태였다.
가까이서 본 그들은 피부가 까만, 언젠가 아힌이 설명해 준 하이에나 수인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어쩐다….”
“…….”
“우선 기절시킬까요?”
‘너 알아서 해!’
일일이 의사를 물을 시간에 내 몸이나 좀 놓아줬으면. 진저리 친 나는 양껏 룬을 노려봤다.
이런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졸린 눈이라니, 맹수들은 하나같이 상식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혹시나 이곳에서 누군가 페로몬을 사용하기라도 하면 정말 큰일인데.
까맣게 타는 속도 모른 채, 룬은 검을 뽑으려는 듯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붕, 그의 손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아, 검.”
그제야 우리 둘은 그가 침실에 검을 세워 둔 사실을 떠올렸다. 헛손질을 한 룬이 인상 쓰자, 종업원들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뭐, 뭡니까?”
“어….”
룬의 금안이 잠깐 나와 애쉬를 향했다.
“정의로운 동물 친구들?”
“…뭐?”
“어쨌든 손에 든 거나 내놔 봐요.”
종업원은 외려 주먹에 핏줄이 불거질 만큼 힘을 줬다. 방황하던 그의 시선이 룬의 한쪽 손에 들린 내게 머물렀다.
“지금 내가 토끼나 기르는 괴상한 취미가 있는 놈이라고 생각했죠?”
“무, 무슨…!”
“시선이 딱 그런데. 하기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긴 하겠다. 안 그래요?”
홀로 수긍한 룬이 나를 제 눈앞에서 흔들었다. 반면 사색이 된 나는 뒷발로 그의 미간을 꾹꾹 밀었다.
‘지금 나랑 눈 맞출 때가 아니야!’
옆을 봐, 옆!
그새 종업원이 달려들며 공격을 시도하고 있었다.
수다를 떨 때와는 달리 룬의 분위기가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수월하게 주먹을 피해 낸 그는 곧장 몸을 틀어 목덜미를 내리쳤다.
“컥!”
비명을 토한 종업원의 몸이 바닥에 무너져 내렸다. 손을 가볍게 턴 룬이 남은 한 명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제기랄!”
종전의 가뿐한 공격으로, 실력 차를 체감한 종업원이 달아나려는 자세를 취했다.
“어딜 도망치려고. 켕기는 게 있나 봐?”
찰나에 뻗어진 룬의 손이 그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뿌리칠 거란 예상과 달리, 대뜸 뒤돈 종업원은 팔을 치켜드는 기묘한 행동을 보였다.
“위험하….”
채 말을 끝맺지 못한 룬이 나를 보호하기 위해 종업원을 등졌다.
촤악, 뭔가를 흩뿌리는 듯한 소음이 울렸다. 잔뜩 몸을 움츠린 내 앞으로 잿빛 가루가 흩날렸다.
‘가루?’
무어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시야가 바닥과 가까워졌다. 룬이 넘어지기라도 하려는 건지. 당황한 내가 양발을 뻗기 무섭게 세상이 온통 새까맣게 변했다.
퉁, 미세한 충격과 함께 푹신한 곳에 떨어진 나는 움직임을 방해하는 흑색 천을 밀어냈다.
이건 또 뭐야. 허우적거리며 겨우 탈출한 내가 몸을 휘감은 물체를 확인했다.
‘···의복이잖아?’
그것도 제법 익숙한. 필시 룬이 걸치고 있던 검은 재킷이었다.
‘옷이 왜….’
불길한 예감이 듦과 동시에 옆으로 거대한 기척이 일었다. 의복을 붙든 채 고개를 돌린 곳에는 룬이 아닌, 찬란한 갈기를 지닌 수사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말 날것 그대로의 산만 한 짐승. 과장하여 앞발이 내 몸보다 커다랬다.
‘오….’
미친 듯이 떨리는 동공이 예리한 발톱을 지나, 수사자의 상징인 갈기에 머물렀다. 널브러진 옷가지와 사라진 룬, 그리고 나타난 사자.
‘음….’
정황상 이 맹수가 룬일 텐데, 왜 난데없이 인간화를 풀고 본모습으로 변한 건지.
심심했던 걸까? 누가 대답 좀 해 줘. 심장이 쿵쿵 뛰며 갖은 비명이 메아리쳤다.
천천히 옮겨진 시선이 섬광을 발하는 눈과 송곳니에 머문 순간,
‘엄마야!’
다리가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로지 피식자의 본능만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