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ymbiotic Relationship Between the Rabbit and the Black Panther RAW novel - Chapter (27)
토끼와 흑표범의 공생관계 27화(27/75)
여관 입구로 들어선 아힌이 눌러쓴 실크해트를 벗었다. 다소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리한 그가 석양으로 물든 하늘을 올려다봤다.
엔델루스 지역에 자리한 상인 길드(guild) 몇 곳을 방문했지만, 약물을 취급하지는 않았다. 모르쇠를 한 건지, 아니면 따로 운반책이 존재하는 건지.
정보가 부족했으나 여관을 오래 비워 둘 순 없었기에, 날이 저물기 전에 돌아온 참이었다.
“아힌 님.”
홍등이 늘어진 정원을 가로지르던 그는 이브린의 부름에 고개를 틀었다. 이브린은 사뭇 뜸 들이며 입을 여닫았다.
“…토끼님과 계속 함께할 생각이십니까?”
“갑자기 그건 왜?”
“일단은 수인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성 없는 애완동물이 아닙니다.”
몸을 완전히 돌린 아힌은 잔잔한 얼굴의 이브린을 마주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무표정이었지만, 어투에 미세한 염려가 스며 있었다.
이브린은 딱히 타인에게 정을 내주는 성정은 아니었다. 하나 이번만은 새끼 토끼라는 외양이 경계를 느슨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어쩐지 자체적으로 생략하곤 하던 저녁 안부까지 꼬박꼬박 찾아와 비비를 놀려 먹더니. 눈매를 휜 아힌은 이브린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눈치챘다.
이번 일은 비비에게 있어선 생사를 오가는 사건이었다.
뿐만 아니라 저택에서 늑대에게 쫓긴 건까지 더하여, 흑표범 영토에서 토끼의 몸으로 살아갈 만한 안전한 장소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만 더더욱 확인시켰다.
고로 애완동물이 아니라면 비교적 알력 및 무력 싸움이 덜한, 본래 살던 영토로 돌려보내는 편이 낫지 않냐- 그런 의미가 내포된 말이었다.
“이곳은 원래 약한 자는 죽는 곳이야. 잊었어?”
말문을 뗀 아힌이 입꼬리를 올렸다. 붉은 등불이 반사된 낯이 선하면서도 위험한, 이중적인 느낌을 자아냈다.
“그리고 유용한 건 최대한 써먹으라 조언했던 사람은 너야.”
아리송하게 설명한 아힌은 들고 있던 실크해트를 이브린의 머리에 푹 눌러 씌웠다.
덕분에 시야가 가린 이브린은 실크해트를 치우며 미간을 찌푸렸다. 결국 토끼가 아힌에게 유용하단 의미인데, 어느 방향으로 유용한지 제대로 좀 알려 주든가.
그런 바람을 뻔히 알면서도 무시한 아힌은 불만스레 턱을 매만졌다.
“이브린. 나름 비비랑 몇 달 내내 붙어 지냈는데….”
“예.”
“나를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것 같아.”
토끼가 버둥거릴 땐 그저 우스웠는데, 인간의 모습으로 기가 질린 표정을 하니 제법 기분이 묘했다.
“토끼님은 주군을….”
이브린은 아련한 지난날을 회상했다.
토끼를 식탁 위 접시에 올리는 아힌. 토끼를 주방장에게 건네는 아힌. 토끼를 애쉬 위에 태워 보는 아힌 등등.
“정확히는 싫어한다고 봅니다만.”
“아.”
정답에 다다른 아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비비의 그 얼굴은 혐오하는 표정이었나.’
아힌이 짓고 있던 희미한 미소가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쉽게도 수긍한다 생각한 이브린은 담담하게 덧붙였다.
“아힌 님께서 워낙 짓궂으시니, 외려 그분은 저를 많이 의지하시죠.”
“그거 착각이야.”
“그럴 리가요.”
“착각이래도.”
묘한 신경전이 벌어진 와중, 가쁜 숨을 내뱉은 종업원 차림의 남자가 그들을 지나쳤다.
분주하게 달리는 남자를 뒤로한 이브린이 가슴에 손을 얹었다.
“토끼님은 종종 눈으로 말씀하십니다. 이 이브린을 아끼는 강렬한 애정을요. 불타오르는 눈빛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강렬하게 없애 버리고 싶은 거겠지.”
와다다다, 이번에는 기이한 발소리가 들렸다. 확인할 새도 없이 조막만 한 동물이 그들의 뒤를 지나쳤다. 뒤이어 커다란 수사자가 바람처럼 달려갔고, 그 뒤를 웬 흑표범이 바짝 추격했다.
우르르 멀어지는 동물들의 뒷모습을 응시한 아힌이 중얼거렸다.
“…방금 좀 이상한 걸 본 거 같은데.”
“달려가는 새끼 토끼 한 마리와 뒤를 쫓는 사자, 그리고 사자를 쫓는 흑표범을 목격하셨습니다.”
“그 토끼가 비비를 닮았어.”
“흑표범은 애쉬와 비슷하군요.”
“그럼 사자는?”
“글쎄요….”
인근에서 동물 농장이라도 운영하나 봅니다, 이브린은 점처럼 보일 만큼 멀어진 동물 무리를 바라보며 너스레를 떨었다.
여유로운 말과 달리 경직된 그를 마주한 아힌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나쁜 예감이 발끝부터 피어올랐다.
“저쪽 방향입니다!”
“이런, 서두르게! 자칫하다간 놓치겠어!”
이어서 고함이 들리더니 호위 기사들과 레스틴마저 여관 입구를 지나쳤다. 묵직한 정적이 아힌과 이브린을 에워쌌다.
무언의 시선을 주고받은 두 수인이 맞추기라도 한 듯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
* * *
공포에 휩싸였던 의식이 차차 돌아왔다. 쉼 없이 달리던 나는 곧 한참 떨어진 종업원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룬이 사자로 변한 사이에 달아난 자였다.
‘분명….’
저자가 잿빛 가루를 뿌리는 순간 룬이 사자의 외형으로 탈바꿈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그가 전투 중 굳이 인간화를 풀었을 리가 없고. 페로몬과 관련되어 있다던 약물이 머릿속을 스쳤다.
‘인간화를 강제로 푸는 게 가능하다고?’
룬은 사자 영토 수장의 핏줄을 이었으니, 분명 페로몬도 보통의 수인들을 훨씬 능가하는 종류일 것이었다. 그런 이에게 쉽게 영향을 미칠 수는 없을 텐데.
혼자 관여할 일이 아니라 결론지은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리다가,
‘악!’
기계적으로 전방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어느새 따라붙은 수사자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으니.
오, 맙소사. 사자는 룬이라며 제아무리 되새겨도 기절할 만큼 끔찍했다. 머리통이 아주 한 바가지였다.
더욱이 그 뒤를 따른 애쉬마저 수라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맹수들은 달릴 때 얼굴이 제일 무서운가 봐.
풍경이 휙휙 빠르게 바뀌었다. 붉은 건물 사이사이로 달리는 종업원의 뒷모습이 아지랑이처럼 흐트러졌다.
숨이 가빠지며 발바닥이 아려 왔다. 멈추지 않는 다리를 원망하며 달리던 나는, 래비안가(家)에서와는 다른 의미로 위태로운 나날을 통감했다.
언제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송곳니와, 한 번 휘두르면 단숨에 몸이 찢길 법한 발톱까지. 여러 번 마주한 피가 낭자한 현장과 비린 혈향, 목이 날아간 사체.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홀로 끝없는 어둠 속을 달리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 막막한 길이 유리처럼 부수어져 내릴 것만 같았다.
* * *
아힌과 이브린이 앞서가던 호위 기사들과 레스틴을 따라잡는 데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들의 자초지종에 따르면, 비비와 룬, 애쉬가 테라스에서 대화를 나누던 중 갑자기 영문 모를 소란이 일더란다. 속히 확인하니 룬은 사자로 변한 상태였고, 웬 종업원을 비비가 용맹하게 쫓아갔다고.
‘그보다는 사자가 무서워서겠지.’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은 아힌이 실소를 흘렸다. 그 겁쟁이 토끼가 사자를 보고 얌전히 있을 리 만무했다.
“레스틴, 분명 우리는 그레이스가(家)에 지원을 요청했을 텐데.”
왜 가문의 일원이 아닌 당신들이 여기 있는지, 아힌의 나지막한 일침을 들은 레스틴이 어깨를 잘게 떨었다.
레스틴이라고 오고 싶어서 온 건 아니었다.
동맹 회의에서 지원 요청 전서가 화두에 오르자 대뜸 룬이 손을 들었으니. 보통 때면 태만하게 잠만 청했을 룬의 기행에, 외려 당황한 건 보좌인 레스틴이었다.
엔델루스의 약물 건은 사자 일족에서도 관여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을 반발할 자는 없었다.
고로 반강제로 룬을 따라 이곳에 온 참이었다.
아힌도 그렇고, 높으신 분들이 아랫사람을 시키지 않고 친히 조사를 다니는 이유나 좀 알자. 상급 맹수답게 탱커처럼 들이박고 보는 건지.
울화통이 치민 속내를 감춘 그가 아힌의 눈치를 살폈다.
“약물 건은 서로 협력해야 할 사안이기에···.”
“그래서, 굳이 마니언츠 경께서 행차하셨다고?”
“예….”
“그 마니언츠 경이?”
“예에….”
저도 그 게으름뱅이가 왜 그러는지 궁금합니다. 뒷말은 덧붙이지 않은 레스틴이 울분을 삼켰다.
막상 엔델루스에 도착한 룬은 약물은 고사하고, 웬 희한한 토끼에게 관심을 보였는데. 하필 아힌 그레이스의 애완 토끼란 사실이 레스틴의 불안을 가중시켰다.
“그나저나 룬 님께선 왜 인간화를 푸신 겁니까? 종업원은 뭐 하는 자죠?”
뒤이은 이브린의 질문에 달리던 호위 기사들과 레스틴이 시선을 맞췄다. 알면 답답하지라도 않지, 그들도 일단 쫓고 보는 중이었다.
“애쉬.”
골목 인근에서 두리번거리는 애쉬를 발견한 아힌이 멈춰 섰다. 아무래도 비비와 룬을 놓친 모양이었다.
그가 후각을 곤두세웠지만, 엔델루스 특유의 향료 냄새 때문에 흔적을 쫓기가 쉽지 않았다.
입구를 지나쳐 다급히 사라진 종업원 차림의 남자와, 뜬금없이 사자의 모습이 된 룬.
일련의 정보를 조합한 아힌은 머리를 쓸며 중얼거렸다.
“마니언츠 경이 심심하지 않은 이상 본모습으로 변한 이유가 있겠지. 가령 페로몬과 관련된 약물을 접했다든가.”
“마약 말씀이십니까?”
“…심심했을 수도 있고.”
“그 정도로 심심하신 분은… 아뇨, 가능성은 충분하군요.”
숨을 고른 레스틴은 굳이 룬을 변호하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은 마니언츠가(家)의 차기 가주가 아니니, 대충대충 살자며 늘어진 그의 꼴만 떠올려도 부아가 치밀었다.
표정이 시시각각 바뀌는 레스틴을 뒤로한 아힌이 짧게 지시했다. 호위 기사들과 애쉬는 우측, 이브린은 좌측, 레스틴은 그 반대편 골목.
“아힌 님께선 어디로,”
대답도 마저 듣지 않은 아힌이 곧장 전방으로 발을 내디뎠다.
조급한 뒷모습을 응시한 레스틴은 입을 뻐끔거렸다. 늘 여유롭던 그가 오늘따라 유달리 초조해 보였다.
* * *
지나친 거리는 그레이스가(家)가 위치한 시가지와 썩 다른 풍경이었다.
굴곡진 건물마다 홍색 등이 걸려 있었고, 여관에서 맡았던 알싸한 향료 냄새로 가득했다.
발이 돌부리에 치여도 무작정 달리던 중, 인적 드문 골목으로 들어선 것을 인지하고 나서야 깜박 정신이 들었다.
급제동을 건 내가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어느덧 뒤를 바짝 쫓던 종업원도 사라진 상태. 숨을 몰아쉰 나는 자괴감과 함께 아찔한 후회가 밀려들었다.
공포를 이기지 못해 어딘지도 모르는 곳까지 달려오다니.
당장 아힌이 아니면 목숨 하나 부지하기 힘든 스스로의 처지를 익히 알고 있었다.
어떻게든 여관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다짐한 나는 으르렁, 뒤편에서 들린 맹수의 울림에 등허리를 굳혔다.
‘…침착하자.’
내가 누군가. 그간 애쉬와 여러 번 눈싸움에 임하며, 맹수에 대한 면역을 길러 온 당찬 토끼였다.
‘저건 룬이야.’
오히려 여기까지 쫓아와 줬으니 다행인 거지. 자기 세뇌를 한 내가 눈을 부릅뜨며 휙 소리 나게 몸을 돌렸다.
곧바로 보인 사자는 석양을 등진 탓에, 갈기가 타오르는 듯한 착시마저 불러일으켰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느껴지는 위용에 나는 그만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렇게 한 줌의 용기는 재가 되어 사라졌다.
납작 엎드려 항복에 가까운 자세를 취하자, 룬은 느린 속도로 가까이 왔다.
뒤이어 똑같이 바닥에 엎드린 그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따라오느라 고생한 자신의 노고를 치하하란 의미로 느껴졌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거만한 맹수 같으니라고. 이를 악물던 나는 룬의 뒤편으로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눈을 크게 떴다.
‘아힌!’
언제 쫓아온 건지 모를 아힌이 옅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은발이 아무렇게나 솟구친 그는 짜증스럽게 크라바트를 풀었다.
멀거니 그 모습을 올려다보던 나는 어쩐지 가슴 언저리가 지끈거렸다.
신전, 무도회, 늑대 수인의 습격을 받았을 때. 그리고 지금.
뒤돌면 있는 아힌의 존재가 미우면서도 형용할 수 없는 안도감을 줬다.
“겨우 잡았네.”
바닥에 늘어진 나를 집어 들던 아힌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어리둥절해할 새도 없이 몸이 공중에서 뒤집혔다. 따끔, 뻗어진 그의 손이 앞발을 건드리는 순간 알싸한 고통이 일었다.
“다쳤잖아.”
핏물 든 발을 보고 나서야 뒤늦게 돌부리에 쓸린 사실이 떠올랐다. 심지어 양쪽 앞발이 죄다 쓸린 상태였다.
내 생명과도 같은 앞발이….
참담한 심정으로 번갈아 보던 나는 슬그머니 아힌의 표정을 살폈다. 곧잘 웃곤 하던 얼굴이 무서울 만큼 굳어 있었다.
“왜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뛴 건데.”
책망하는 아힌을 흘끗거린 나는 문득 애쉬의 상처가 한순간에 사라진 장면을 떠올렸다.
그건 아힌의 능력이 아니었을까. 조금 망설인 내가 상처 난 앞발을 쭉 내밀었다.
‘치료해 줘.’
그때처럼. 뻔뻔하게 기다리자, 아힌은 의미를 파악하려는 듯 눈을 깜박였다. 잠시간 말이 없던 그는 이내 표정을 풀며 눈을 반달로 접었다.
“돌아가서 치료해 줄게. 그리고,”
‘그리고?’
“자꾸 이런 식이면 평생 주머니에 가둬 버린다.”
갑자기 그런 대사는 왜 던지는 건데. 농담조였지만 등허리가 스산해졌다.
“본모습으로 보는 건 처음이네, 마니언츠 경.”
부르르 떠는 나를 한쪽 손에 올린 아힌은 무릎을 굽혀 대뜸 룬의 갈기를 잡아챘다.
“토끼랑 술래잡기하는 취미가 있을 줄은 몰랐어.”
담담한 어조에 비해 목소리는 퍽 싸늘했다.
그러자 룬은 억울한 눈빛을 보였다. 본인의 의지가 아닌, 잿빛 가루를 맞은 후 인간화가 풀린 거였으니.
그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인지 룬이 필사적으로 앞발을 흔들었다. 기묘한 움직임을 보던 아힌은 눈을 반쯤 내리깐 채 읊조렸다.
“결국 미친 건가.”
미치광이 취급을 받은 룬이 으르렁 울며 바닥을 굴렀다. 답답한 듯 앞발로 가슴을 치는데, 요란 떠는 사자가 두려우면서도 짠한 동정이 일었다.
‘저 기분 잘 알지….’
동정보단 동질감일까. 안타깝게 응시하던 나는 일순 이유 모를 위화감이 들었다.
황급히 사자에게서 시선을 돌려 아힌을 확인한 내가 얼빠진 표정을 했다.
그의 눈동자가 붉은색이 아닌, 짙은 푸른색을 띠고 있었다. 해가 진 탓에 거리가 어두워졌지만, 구분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힌의 눈이?’
혹시 내 시력이 잘못되었나. 기겁할 새도 없이 아힌은 갑작스럽게 나를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숨이 막힌 탓에 버둥거린 내가 고개를 바깥으로 내밀었다.
되찾은 시야에는, 무기를 든 수인 여럿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적어도 열댓 명은 되어 보이는 숫자. 그들의 손에 들린 날붙이로 인해 스르륵, 다시 고개를 숙여 눈만 드러냈다.
어디서 나타난 자들일까. 눈알을 굴리던 나는 그들 사이에 자리한 종업원 차림의 남자를 발견했다.
‘저…!’
소스라친 나와 룬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필시 저 남자가 일행을 불러온 게 틀림없었다.
눈치를 살핀 종업원은 옆의 우람한 남자에게 소곤거리며 귓속말을 했다.
몸을 숙여 귀를 기울이던 남자의 눈에 의아함이 번졌다.
“…들이마신 것만으로 인간화가 풀렸다고?”
덩달아 다른 수인들의 시선이 사자에게 집중되었다. 마치 룬의 경우가 이례적인 듯한 술렁임이었다.
“이봐.”
아힌의 목으로 누군가의 잘 벼린 검이 겨누어졌다.
“같이 좀 가 줘야 되겠군.”
하필 먼저 나서서 미친 흑표범을 위협하다니. 이어질 살생을 예감한 내가 불안한 눈으로 아힌을 살폈다.
속 모를 표정의 그를 바라보던 나는 아차 싶은 마음이 들었다.
만일 이곳에서 전투가 일어나 페로몬을 접하기라도 하면.
‘재킷 주머니가 터져 버릴 거야.’
꿀꺽, 입속이 모래처럼 거칠어졌다. 반응 없는 아힌에게 검을 조금 더 가까이한 남자가 눈을 치떴다.
“눈동자를 보아 너구리나 고양이 쪽인데, 서툰 반항은 안 하는 편이 좋아.”
무력이 강한 수인은 아니라 판단한 남자의 표정이 한층 의기양양해졌다. 그도 그럴 게, 주변을 둘러싼 수인들은 하나같이 맹수로 보였으니. 수적으로도 한참 우세였다.
잠깐의 정적 후, 검지로 눈가를 훔친 아힌이 양손을 들어 올렸다. 마치 항복이라도 한 듯한 모양새였다.
“살려 주세요.”
“…….”
“제발.”
전혀, 일 할도 간절해 보이지 않는 목석같은 대사였다. 그러나 눈매만은 기가 막히게 처량한 빛을 띠고 있었다.
“일단….”
미심쩍은 눈길로 아힌을 훑은 남자가 밧줄로 손목을 포박했다.
“길드(guild)로 돌아간다. 사자도 붙들도록.”
룬 또한 밧줄로 포박하는 수인들에게 순순히 투항했다.
기묘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살핀 나는 곧 두 사람의 뜻을 눈치챘다.
엔델루스에 온 건 약물을 조사하기 위함이었고, 이들은 그 실마리와 관련되었을 확률이 높았다. 그러니 이 자들을 따라가면 본거지에 다다를 수 있는 절호의 기회.
‘비비, 코너를 돌아서 조금 더 가면 이브린이 대기하고 있을 거야.’
주머니 깊숙이 자리 잡은 내 귀로 아힌의 속삭임이 들렸다.
‘이런 상황에선 제일 먼저 안전한 곳에 숨거든.’
과연 그럴싸한 발언이었다.
그때 밧줄에 묶인 룬이 으르렁대며 과장된 몸짓으로 반항을 시도했다. 순간적으로 모든 이가 시선을 빼앗긴 사이, 아힌은 포박된 손으로 날 꺼내어 바닥에 내려 줬다.
엉덩이를 발끝으로 살짝 미는 그를 올려다본 나는 비장한 눈빛을 했다. 앞발로 응원을 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건투를 빌어.’
굳이 따라가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진 않아.
이브린의 말을 빌려 콱, 쉭, 퍽이면 전투를 끝낸다는 아힌에, 룬까지 함께이니 크게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작게 웃음을 터뜨리는 아힌을 뒤로한 내가 곧장 발에 반동을 가했다.
양발을 휘젓던 나는 찝찝한 기분에 인상을 찌푸렸다.
이렇게 열심히 달리고 있건만, 왜 앞으로 나아가질 못하는 걸까. 그러고 보니 누군가 덜미를 잡은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고개를 들자, 고릴라보다 험상궂게 생긴 남자가 나를 집어 든 상태였다.
“토끼도 데려간다.”
아.
기겁한 나는 순간적 기지를 발휘하여 남자의 손가락을 세게 차 버렸다.
꽤 아팠던지 그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안타깝게도 덜미를 붙든 손을 놓진 않았지만.
“…예사 토끼가 아니군. 릴, 토끼도 묶어 버려.”
지켜보던 남자의 동료가 혀를 찼다.
“아니, 내가 알아서 데려가겠네.”
다행히 몸통을 밧줄로 칭칭 휘감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나를 붙들고 이동 중인 남자는 의외로 섬세한 내면을 지니고 있었다. 솥뚜껑 같은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거나, 남들이 보지 않을 땐 수줍게 얼굴을 붉혔으며, 핏물 든 앞발을 제가 더 안타까워했다.
소중히 다뤄 주는 건 다행이지만 참으로 애매한 기분이었다. 겉모습으로만 따지면 고릴라 수인이라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으니.
남자를 외면하던 나는 우리를 예의주시하는 아힌과 시선이 마주쳤다. 납치되는 자로서의 연기를 잊었는지, 그는 무언가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입가가 경련하는 것 같기도 하고. 결국 아힌은 남자가 혀 짧은 소리로,
“아가야, 여길 보련.”
속삭이는 순간 고개를 휙 돌려 버리고 말았다.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는 걸 보아 웃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저럴 줄 알았어.’
아주 내가 괴로워할 때 제일 우습지. 계속해서 실실 웃는 아힌을 붙들고 가던 수인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게 나사라도 빠졌나 싶었겠지. 나도 쟤가 언제까지 미쳐 있을 예정인지 궁금하긴 해. 그들의 심정에 십분 공감하던 나는 곧 남자의 손에 의해 시야가 가려졌다.
이들은 제법 용의주도하게 아힌과 룬, 심지어 나까지 눈을 가린 채 어딘지 모를 건물로 들어섰다.
“길드장께서는?”
“자리를 비우셨다는군. 일단 가둬 두게.”
“저 사자는… 사자 일족인 만큼 제법 악력이 강할 텐데.”
“약물 한 번에 저런 꼴이 되었다지 않나. 사자라고 다 강한 건 아니지.”
약체 취급을 받은 룬의 콧김이 거세졌다. 잠깐 대화를 나눈 그들은 퀴퀴한 냄새가 풍기는 장소로 우리를 밀어 넣었다.
낡은 바닥에 나를 내려 준 남자는 연신 뜸을 들였다.
“이거라도 먹고 있거라.”
몸을 숙인 그가 커다란 당근 하나를 통째로 내밀었다. 그러자 남자의 동료가 짜증 서린 목소리로 채근했다.
“나 참, 여전히 작은 동물한텐 맥을 못 추는구먼. 릴, 어서 문이나 닫게.”
결국 근심 어린 한숨을 내쉰 그는 돌아서서 문고리를 잡았다. 닫히는 문틈 사이로 보인 눈망울이 가련하게 일렁였다.
* * *
쾅, 문이 닫히자 바깥 소음이 완전히 차단되었다. 허름한 내부에 비해 문은 철로 이뤄진 단단한 종류였다. 창고 같기도 하고.
‘…아직 이런 건 못 먹는데.’
남자가 건네고 간 주홍색 당근이 시선을 앗아 갔다. 콩, 무심코 그것을 굴리던 나는 일순 중심을 잃으며 엎어졌다.
동시에 창고 구석에서 바람 새는 소리가 울렸다. 사지가 결박당한 아힌과 룬이 킥킥 비웃는 소리였다.
머쓱하게 몸을 일으킨 나는 창고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상자 뒤에서 몸의 반만 드러낸 채 두 수인을 주시했다.
룬은 인간의 모습일 땐 동태눈마저 사연 있는 눈으로 변모시킬 만큼 청초했는데. 본모습은 정말이지 흉악하기 짝이 없었다. 머리통이 한 바가지란 표현으로도 부족했다.
‘쟤랑도 친해지긴 글렀어.’
경계하는 나를 보며 비식 웃던 아힌의 눈길이 곧 룬을 향했다. 램프 불에 시야를 의존한 푸른 눈이 묘한 색으로 물들었다.
“마니언츠 경, 인간으론 못 돌아와?”
밧줄에 네 발 모두 결박된 룬이 고개만 끄덕였다. 아무래도 잿빛 가루로 인해 인간화를 조절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하여간 쓸모없는 새끼.”
나지막한 읊조림을 듣고 만 룬은 컹, 울며 온 힘을 다해 몸을 비틀었다.
“멍청한 사자.”
이때다 싶어 갖은 욕을 던진 아힌이 짓궂은 미소를 걸었다. 양다리가 결박된 탓에 룬은 바득바득 이만 갈며 몸부림쳤다.
나름 사자 일족 수장의 자제인데 저런 취급을 받다니. 새삼 흐트러진 사자 갈기가 안쓰러워 보였다.
양껏 조소한 아힌은 묶인 손목을 이리저리 돌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손목의 밧줄을 풀어낸 그가 발목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이렇게 허술해서야.”
움직임을 방해하는 모든 밧줄을 풀어내자 룬이 흥, 흥 콧김을 뿜었다. 저도 풀어 달라는 의사를 무시한 아힌은 내 쪽으로 다가와 덜미를 집어 들었다.
상처 난 앞발을 확인하려는 듯 얼굴이 가까워졌다. 건조한 표정에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읽을 수가 없었다.
유려한 낯이 너무 가까운 터라, 시선을 피하던 나는 다시금 홱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했다. 때때로 날카로워 보이던 적안과 달리, 푸른 눈의 아힌은 한층 차분한 분위기였다.
도대체 이 눈동자 색은 어떻게 된 거람. 빤히 쳐다보자, 짙은 의문을 눈치챈 아힌이 눈가를 톡톡 두드렸다.
“너구리 일족에서 만들어 준 약. 몇 시간이면 돌아올걸.”
「페로몬 이론」에서 읽은 구절에 의하면, 너구리 일족은 주로 외양을 변모시키는 페로몬을 가진다고 하였다. 그를 이용해 독특한 도구나 신약을 개발한다고.
워낙 희귀하여 금화 몇 개로는 구할 수도 없다는데, 설마하니 눈동자 색을 바꾼 것을 직접 보게 될 줄이야. 어안이 벙벙해진 내 턱을 살살 긁어 준 아힌이 덧붙였다.
“페로몬이 강한 흑표범 일족은 많이들 경계하거든.”
여러 일족이 섞인 엔델루스를 조사하기 위해 눈속임을 한 모양이었다.
짧게 설명한 아힌은 계속해서 앞발의 상처 부근을 매만졌다. 괜히 어색해진 내가 슬그머니 그의 손에서 앞발을 뺐다.
도대체 저 무해한 낯 너머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내가 인간으로 변한 장면을 보았음에도 아힌의 태도는 별반 변함이 없었다.
사건의 연속으로 인해 당시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도 못했는데. 떨떠름해하는 내 태도를 인지한 그의 눈동자가 일순 진해졌다.
“비.”
입술이 열리는 찰나, 룬이 귀가 쩌렁쩌렁할 만큼 울부짖었다. 밧줄을 풀어 달란 요구를 포기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성가시긴.”
결국 나를 바닥에 내려 둔 아힌이 룬에게 다가가 뺨을 툭툭 건드렸다. 으르렁, 손을 물어뜯으려는 입질을 피한 그가 밧줄을 풀어 주기 시작했다.
갑자기 마주하게 된 사자의 송곳니 때문에, 바짝 엎드렸던 나는 콧등이 따가움을 느꼈다. 꺼림칙한 기분에 앞발을 뒤집자 바닥에서 잿빛 가루가 묻어났다.
분명 종업원이 지니고 있던 것과 같은 색의 가루. 그를 인지하기 무섭게 코가 간질거렸다.
“비비. 이브린 측에서 따라붙었을 테니, 위험해지기 전에 합류,”
에취, 재채기 소리에 말을 뚝 멈춘 아힌이 나를 돌아봤다. 얼른 앞발에서 코를 멀리했지만 계속해서 기침이 흘러나왔다.
‘머, 멈추질 않아.’
페로몬과 관련된 약물이면 내게도 썩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확률이 높았다. 룬마저 한순간에 본모습으로 되돌렸는데. 오싹한 이물감이 전신을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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