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ymbiotic Relationship Between the Rabbit and the Black Panther RAW novel - Chapter (28)
토끼와 흑표범의 공생관계 28화(28/75)
아힌과 룬을 이끈 수인 무리는 점점 시가지 중심부와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다.
지도상 계속 걸어가면 나오는 곳은, 현재는 매각 중인 상인 길드(guild) 건물이었다.
그들과 멀리 거리를 벌린 채 따라붙던 레스틴은 이브린을 돌아봤다.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푸른 눈이 점차 붉은빛을 찾아가고 있었다.
레스틴의 시선을 느낀 이브린이 평온한 낯으로 눈가를 짚었다.
“너구리 수인들이 만든 약을 먹었습니다. 어울립니까?”
“안 어울립니다. 그보다···.”
새삼 금안이 호기심으로 물들었다. 망설인 레스틴은 밀려든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뗐다.
“저, 이브린 경. 그 토끼는,”
“토끼님이라 지칭해 주십시오.”
“무슨…! 아니, 후, 아닙니다. 그… 토끼님은 도대체 뭡니까?”
일개 동물인지, 타 종족인지. 넘실거리는 의문을 마주한 이브린은 묵묵히 전방을 바라봤다.
분명히 아힌은 무언가 알고 있지만 입을 꾹 다무니. 그로서도 제대로 아는 건 수인이란 사실 하나뿐이었다.
그 외라면 토끼가 어느 정도의 격식을 알고 있다는 것. 아침마다 저택의 가장 윗사람인 발렌스 가주에게 문안 인사를 올리러 가고, 시중을 드는 메이미를 어색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브린 경?”
침묵을 고수하는 이브린으로 인해 레스틴의 표정이 의구심으로 물들었다. 혹여 비비에 관해 집요하게 물을까 싶어, 이브린은 손을 저으며 대충 둘러댔다.
“죄송합니다. 왠지 독특한 냄새가 느껴져서.”
“그러고 보니… 조금 전부터 묘한 냄새가 나는군요.”
“예? 정말입니까?”
“네?”
“아닙니다.”
실로 레스틴의 주장은 허언이 아니었다.
후각을 곤두세운 이브린과 레스틴, 호위 기사들은 어디선가 풍겨 오는 비린 향에 미간을 좁혔다.
거리를 채운 향료 냄새와는 또 다른, 부패한 사체에서나 풍길 법한 냄새였다.
흔적을 쫓아 골목을 돈 그들은 바닥에 쓰러진 수인 한 명을 발견했다. 선뜻 다가선 호위 기사, 미오가 살피더니 고개를 저었다.
“이미 사망했습니다. 다만 피부색이 좀 이상하네요. 하이에나 수인은 아닌 듯한데…. 피부가 드문드문 잿빛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약물 중독. 좋지 않은 가설을 세운 이브린이 눈을 가늘게 떴다. 레스틴의 등을 살짝 떠민 그가 한층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레스틴 경, 사체의 손목을 짚어 페로몬을 확인해 주십시오.”
본디 진중한 표정이긴 하지만 눈빛이 꽤나 형형했다.
반사적으로 무릎을 굽힌 레스틴은 손목을 잡은 후 페로몬 기운에 집중했다. 과연, 미처 잠재워지지 못한 페로몬이 얼기설기 흐트러진 상태였다.
“흠, 페로몬이 상당히 뒤엉켜 있군요.”
“약물 중독자일 겁니다. 복용한 수인은 사망에 이르기도 한다는 보고가 있었으니까요.”
사체에서 몸을 돌린 이브린은 난감한 낯으로 길드 방향을 응시했다.
아힌이나 룬이야 염두에 둘 필요도 없지만, 초식계 수인인 비비가 제법 걱정이었다. 비록 토끼의 외형이나, 약물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곤 확단할 수 없었다.
서둘러야겠다고 생각한 이브린이 사체를 조사 중인 레스틴을 만류했다.
“출발합시다. 자칫 레스틴 경의 페로몬도 어지럽혀질 수 있으니, 이제 그만 손을 물리십시오.”
“어억!”
기겁하며 사체에서 손을 뗀 레스틴이 눈을 사납게 떴다. 필시 이브린은 자신의 안위를 염려하여, 그에게 대신 사체를 만지게끔 지시한 게 틀림없었다.
‘저 치졸한 자식이…!’
목구멍까지 치민 욕설을 삼킨 레스틴의 주먹이 바르르 떨렸다.
“이브린 경, 정말 나날이 간사해지시는군요.”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아웅다웅 앞서가는 두 사람을 바라보던 호위 기사, 미오는 때아닌 상념에 잠겼다. 미오 또한 여타 고용인들처럼 토끼를 신비한 동물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분명 판잣집 문을 열었을 때, 아힌의 품에 안겨 있던 사람. 그녀를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수인이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출처 모를 농도 짙은 페로몬과, 토끼가 그 자리에서 인간으로 변한 거라면 흐트러진 차림도 설명이 됐다.
심지어 그녀의 목덜미에는 아힌이 만든 듯한 잇자국이 자리했다.
맹수계 수인이 목을 무는 건 먹이 표시나 다름없건만. 달리는 일종의 소유욕이 묻어나는 행위에 포함되기도 한다.
“미오 경?”
“…이런, 죄송합니다!”
이브린의 채근에, 넋을 놓고 있던 미오는 속히 따라붙으며 입술을 축였다.
대체 차기 가주는 무슨 생각인 건지. 오지랖 넓게도, 정체 모를 토끼의 앞날이 걱정되는 미오였다.
* * *
룬마저 사자로 변모시킨 약물을 삼키다니, 등허리가 오싹하게 곤두섰다.
룬의 밧줄을 풀던 아힌은 기침을 반복하는 나를 의아하게 바라봤다. 팟, 순간적으로 그의 시선이 우락부락한 사내가 두고 간 당근에 머물렀다.
‘그거 먹어서 사레들린 거 아니야!’
당근이 아니라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은 내가 구슬피 바닥을 두드렸다. 의사를 전할 수 없는 사실이 이다지도 답답할 수 없었다.
‘신호를 정해 두는 편이 좋겠어. 비비의 의사를 알아들을 수 있게.’
콜록거리던 나는 번개처럼 그와 정한 신호를 떠올렸다. 오른쪽 앞발은 아힌을 부를 때, 왼쪽 앞발은,
“비비?”
…위급할 때.
망설임 없이 왼쪽 앞발을 치켜들자, 아힌은 곧장 룬을 내팽개치고 다가왔다. 무릎을 굽혀 땅을 짚던 그가 입매를 아연히 굳혔다. 바닥에 흩뿌려진 소량의 잿빛 가루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약물, 삼켰어?”
삽시간에 나를 들어 올린 아힌이 강제로 입을 벌렸다.
“아픈 곳은?”
뺨을 잡아 이리저리 돌린 그가 물었다. 겨우 기침을 멈춘 나는 입이 벌려진 채 눈을 끔벅였다.
어느새 붉은색으로 돌아온 그의 눈동자 속, 솜뭉치 같은 내 모습이 비쳤다.
“비비.”
대답을 재촉하는 음성엔 미처 정제되지 않은 감정이 스며 있었다. 살벌한 표정을 마주한 내가 몸을 움찔 떨었다.
‘…그러고 보니 아프지가 않네?’
기침도 멎었고, 생각보다 멀쩡한 것 같아. 몸짓으로 의사를 표현하려던 나는 웩, 헛구역질을 했다. 급작스레 몸속 페로몬이 들썩인 탓이었다.
이상했다. 고통스럽진 않지만, 이질적이면서도 언젠가 겪어 본 듯 익숙한 느낌마저 들었다. 더더욱 표정을 굳힌 아힌이 낮게 속삭였다.
“페로몬 상태가 이상한데, 너 설마….”
허공에서 마주친 서로의 동공이 잘게 떨렸다.
만약 약물이 내 페로몬에 어떠한 영향을 끼친 거라면. 행여 이곳에서 사람의 모습으로 변해 버린다거나.
‘그건 안 돼!’
안 돼! 귀를 뾰족하게 세운 내가 앞발을 엑스로 만들었다. 알몸은 고사하고, 무엇보다 적진 한가운데인 사실이 가장 문제였다.
“마니언츠 경.”
바로 선 아힌은 창고에 아무렇게나 널려진 천을 집어 들었다.
“작전이 바뀌었어. 약물 건은 일단 보류.”
일방적인 통보에 당황한 룬이 펄펄 뛰었다.
“우리는 지금부터 탈출할 거니까, 그쪽은 알아서 살아남… 아니, 부디 죽도록 해.”
반발 따위 허용치 않은 아힌이 사자의 얼굴 정중앙에 발자국을 남겼다. 방심한 채 걷어차인 룬은 불쌍한 자세로 데굴데굴 굴렀다.
‘아, 아프겠다….’
취급이 하찮아도 너무 하찮았다. 룬이 사람으로 돌아온 후에는 어떻게 감당할 셈인지.
염려 섞인 눈으로 응시하던 나는 곧 남을 동정할 처지가 아님을 깨달았다.
쾅!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아힌이 창고 입구를 부숴 버렸기 때문에.
‘저 두터운 문을 맨몸으로….’
박살 난 문의 잔해를 망연히 바라보기 무섭게, 입구를 지키던 수인들의 비명이 뒤섞였다.
“아악!”
“뭐야 이 미친 새끼!”
그들이 반격할 새도 없이 발로만 때려눕힌 아힌은 복도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아힌의 손에서 고개가 흔들리던 나는 앞발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룬을 걱정하기에 앞서, 불투명한 내 미래부터가 큰일이었다.
* * *
갇혀 있던 건물은 크기는 장대하나 폐건물에 가까웠다.
복도를 달리는 중인 아힌은 오늘따라 전투를 최대한 기피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에 대해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었던 나는 힘겹게 숨을 헐떡였다. 타인의 페로몬을 접했을 때처럼 아픈 건 아니지만, 이상하리만치 몸속 페로몬이 제어가 되질 않았다.
쿵.
다시금 페로몬이 강하게 들썩였다. 순간 뜀박질을 멈춘 아힌이 인적 없는 방으로 들어섰다.
좁은 벽장 안으로 숨어든 그가 벽에 기대어 앉았다. 아힌 정도의 신장은 몸을 구겨야 할 만큼 협소한 공간이었다.
습한 나무 냄새가 났다. 벽장문에 난 빗금 사이로 야트막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시간차가 어느 정돈데.”
미처 어둠에 적응하기도 전에 아힌이 나를 들어 마주했다.
‘시간차라니?’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내가 앞발을 으쓱였다.
“페로몬에 자극받으면 사람으로 변하는 거 아니었어? 그 시간차를 묻는 거야. 너, 지금만 해도 페로몬이 날뛰고 있잖아.”
질문을 듣는 동시에, 불현듯 아힌이 전투를 꺼린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페로몬을 접하면 사람으로 변하는 내 상태를 고려한 것임을.
역시 그는 대부분의 사실을 눈치채고 있음이 분명했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경계 어린 숨을 삼키자, 아힌은 내 코를 툭 건드렸다.
“빨리 답해. 언제까지고 여기에 숨어 있을 순 없으니까.”
‘답이라고 해 봐야….’
불편한 자세로 앉은 아힌을 내려다본 내가 고심에 잠겼다.
시간차는 늘 제멋대로였고, 지금은 페로몬을 접한 것도 아닌, 소량의 약물을 삼킨 것뿐이라 사람으로 변할지도 미지수였다.
페로몬을 제어하기 힘든 것치곤 아직 몸도 멀쩡하고. 이를 설명하기 위해 양발을 허우적거렸으나, 아힌의 표정은 일그러져만 갔다.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는데.”
독심술이라도 가능하면 얼마나 좋을까. 휴, 묵직한 한숨을 내쉬는데, 아힌이 대뜸 입가로 검지를 가져갔다.
“쉿.”
쾅, 곧장 거친 소음과 함께 방문이 열렸다.
“뭐? 사자까지 달아났다고?”
“미치겠네, 길드장께서 아시면 경을 치시겠구만.”
복도 쪽에서 우리를 찾는 수인들의 목소리가 선명히 들려왔다.
대화를 미뤄 보아 룬은 무사히 탈출한 모양이지만, 안심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누군가 방으로 들어섰으니까.
‘어떡해.’
잽싸게 아힌의 손으로 파고든 내가 기척에 주의를 기울였다.
뚜벅뚜벅, 주인 모를 구두 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긴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아힌은 양 주먹 사이로 얼굴만 내민 나를 보며 실없는 웃음을 흘려 댔다.
‘웃을 때가 아니야!’
발소리가 썩 가까워졌다고 느낄 즈음, 화한 빛이 쏟아지며 그림자가 졌다.
심장이 쿵 내려앉은 나는 벽장을 연 인물을 확인했다.
그곳엔 나를 옮겨 온 뒤 당근을 내밀었던, 고릴라를 닮은 남자가 난감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함께 올려다본 아힌은 재차 입가로 검지를 가져갔다.
“고릴라, 쉿.”
이미 고릴라라고 부른 시점부터 망했어. 당장 고함이나 지르지 않으면 다행이지. 두 사람을 번갈아 본 나는 앞발을 모아 애원의 눈길을 보냈다.
‘제발.’
눈에 띄게 동공을 떨던 남자는, 복도에서 들린 “그냥 찾자마자 죄다 사살시켜 버리자고”라는 발언으로 인해 낯빛을 까맣게 물들였다.
끼이익, 도로 벽장문이 닫히며 단숨에 어둠이 드리워졌다.
“릴, 그쪽은?”
“…아무것도. 아래층은 수색을 마쳤나?”
“아직. 자네는 뒤뜰 쪽을 맡게.”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멀어졌다. 참았던 숨을 터뜨리며 호흡을 고르고 있자니, 아힌이 나지막하게 속닥거렸다.
“고릴라가 토끼에게 우호적이었던가? 전혀 안 어울리는데.”
그런 이야기는 속설로도 들어 보지 못했어. 애당초 저 고마운 수인은 생김새가 고릴라를 닮았을 뿐, 고릴라 수인이라고 확신하기도 어려웠다.
“그렇군. 고릴라가 토끼를….”
호의에 감사하진 못할망정, 그는 혼자만의 세상에 빠져들었다.
‘고릴라가 아닐지도 모른대도.’
하물며 남들 눈엔 토끼와 함께 다니는 흑표범이 더 이상해 보일걸.
‘그보다 어서 이 무서운 곳에서 벗어나자.’
아힌의 손가락을 툭 치며 타박한 내가 앞발로 바깥을 가리켰다. 한쪽 입매를 끌어 올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가자… 비비?”
탈출에 의욕을 드러내던 나는 일순 몸을 웅크렸다. 스멀스멀 몸속을 기던 페로몬이 마치 팽창이라도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순간이지만 시야가 점멸하듯 어둡고 밝아짐을 반복했다.
어깨에 걸치고 있던 천 자락을 당기는 아힌의 모습이 흐릿하게 아른거렸다.
“흐….”
작게 신음성을 내뱉은 나는 쾅쾅 울리는 골을 매만졌다. 자칫 혼절에 이를 것 같은 어지럼증이었다.
간헐적으로 숨을 몰아쉬던 내가 목을 움켜잡았다.
‘모, 목소리가 나왔어?’
부지불식간의 일이라 제대로 된 상황을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아래로 시선을 내리자, 나를 빤히 올려다보는 아힌과 눈이 마주쳤다.
멍하니 눈을 끔벅이고 있으니, 뒤늦게 깨닫지 못한 감각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높아진 시야와 뺨을 간질이는 머리카락, 온몸에 닿은 체온까지.
‘…어째서?’
설마설마했는데, 페로몬을 자극하는 약물에 대한 반동으로 인간이 되어 버린 걸까.
두근, 두근, 옮겨진 시선이 벽장 내부를 오갔다.
이렇게 타인이 보는 앞에서 인간으로 변한 건 처음이라 당황을 감출 길이 없었다. 심지어 다른 누구도 아닌 아힌의 앞이라니.
언제 둘러 준 건지, 천으로 칭칭 감싸인 나는 거의 그의 위에 올라타다시피 한 상태. 몸의 굴곡이 고스란히 느껴질 만큼의 거리감이었다.
눈치를 살핀 나는 살그머니 아힌의 양어깨를 짚고 몸을 일으켰다. 그래 봤자 협소한 공간 탓에 밀착된 거리는 변함이 없었다.
수십 분처럼 느껴지는 수 초가 흘렀다. 뭐라 말이라도 좀 해 주면 좋으련만, 아힌은 나를 말끄러미 올려다보며 침묵을 고수했다.
음영이 드리워진 붉은 눈이 유독 짙게 느껴졌다. 왠지 굶주린 맹수의 그것처럼 선득하여, 절로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어둠에 반쯤 가린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음이 답답했다. 어떡하지, 일단 웃고 봐야 하나. 마른 입술을 축인 나는 배시시 어색한 미소를 띠었다.
“…안녕.”
벽장 특유의 습기 어린 공기가 피부에 쩍쩍 달라붙었다. 맞닿은 살갗이 온기는커녕 서늘한 위기감을 가져왔다.
‘조금 전만 해도 잘 떠들더니, 왜 말을 안 한대?’
시간이 지날수록 숨결마저 섞이는 거리가 신경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언제는 할 말이 많지 않냐고 했으면서, 한 마디 따끔하게 쏘아붙일까.
“아힌.”
눈을 치켜뜨는데, 붉은 눈동자를 마주하자마자 금세 용기가 대륙 저편으로 사라졌다.
“나랑 얘기 안 할 거야?”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벽장을 울렸다. 따끔한 일침은 다음에 날려도 되는 거니까. 스스로 합리화하고 있자니, 한참 동안 닫혀 있던 아힌의 입술이 열렸다.
“내가 뭐 잘못했어?”
툭, 벽으로 머리를 기댄 그가 짓궂게 웃었다.
“눈을 왜 뾰족하게 떠.”
아차. 아직 표정 관리가 서투른 나는 몸에 둘둘 말린 천을 얼굴까지 끌어당겼다.
“…원래 이렇게 생긴 거야.”
“본인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긴 하고?”
반박할 말이 없어진 내가 가자미눈을 했다. 제대로 거울을 본 건 무도회장 주변에서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고, 당시에도 정신이 없었기에 생김새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보다….”
“응?”
“앞으로 변할 때는 예고라도 좀 해 주면 좋겠는데. 사람으로 변할 듯한 느낌이 오면 춤을 춘다든가.”
그걸 어떻게 예고하는데. 남의 얘기라고 아주 쉽게 말하고 있었다. 기가 찬 마음에 입을 열려는데, 아힌이 먼저 선수를 쳤다.
“생각해 봐. 애쉬가 갑자기 사람으로 변하면 어떨 것 같아?”
눈을 굴린 나는 애쉬를 떠올렸다. 애쉬는 흑표범 중에서도 골격이 유난히 도드라진 편이고, 인상 또한 흉흉했다. 그런 애쉬가 사람으로 변한다면….
“…놀라겠지.”
“그리고?”
“당황스러울 거야.”
“지금 내가 그래.”
내 하얀 머리카락을 한 움큼 가져간 아힌이 문지르듯 매만졌다.
“흉포한 토끼가 사람이 되어 버렸거든.”
난 흉포하지 않아. 입에 머문 말을 삼킨 나는 고심에 잠겼다.
확실히, 그의 주장대로 신호를 정해 두면 훨씬 수월히 의사를 전달하는 게 가능했다.
“알았어. 그럼 다음부터는 춤을….”
추긴 무슨…! 다른 신호도 차고 넘치는데. 한순간이지만 맹수의 요망한 언변에 휘말릴 뻔한 내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콩, 동시에 정수리로 무언가가 닿았다. 천장에 부딪히지 않게끔 내 머리를 감싼 아힌의 손이었다.
뒤늦게 비좁은 벽장 안임을 상기한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아힌의 가슴팍을 짚은 양손으로 단단한 몸이 그대로 느껴졌다.
‘너무 가깝잖아.’
꼴깍, 가슴에서 올라간 눈길이 크라바트와 턱선을 지나 단정한 이목구비에 머물렀다.
평소와 다름없는 금욕적인 얼굴이 이상하리만치 탁해 보여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흔들리는 시선이 도톰한 입술에 머문 순간,
“비비, 방금 날 음흉한 눈길로 봤어.”
“…그런 적 없어.”
“거짓말.”
“거짓말 아니야!”
“…….”
“…요.”
말끝을 늘인 내가 연신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그러나 아힌의 낯빛은 불신으로 물들어만 갔다.
“진짜?”
“그러엄.”
열성적으로 변명하던 나는 어디선가 들려온 발소리로 인해 귀를 쫑긋 곤두세웠다.
주저 없이 아힌의 입을 틀어막은 내가 바깥 기척에 주의를 기울였다. 붉은 눈이 커다래지는 동시에 복도 쪽에서 걸걸한 음성이 울렸다.
“이 판국에 침입자라고?!”
‘침입자?’
“나도 자세히는 모르네, 일단 입구 쪽으로 가 보세!”
탁탁, 발소리가 빠르게 멀어졌다.
침입자라니, 뒤따라 붙은 이브린인 걸까. 막연히 추측하던 내가 고개를 돌려 아힌을 내려다봤다.
입을 틀어 막힌 그는 의외로 얌전히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묘한 정적이 지나갔다.
“……!”
그제야 손바닥의 말캉한 감촉을 깨달은 나는 황급히 손을 떼어 냈다.
‘세상에!’
맹수의 입을 만져 버렸어. 입을 벌리면 자칫 송곳니에 물어 뜯길지도 모르는데. 양손을 번갈아 본 내가 오들오들 떨었다.
“머릿수는?”
“네 사람, 그리고 미친 사자 한 마리가 날뛰고 있다는군.”
“뭐?”
침입자가 나타난 게 사실인지, 계속해서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초조하게 벽장문을 곁눈질한 내가 아힌의 손을 당겼다.
[우리,]슥, 슥, 그의 손바닥 위로 여러 개의 선이 그어졌다.
[돌아가자.]여기 싫어. 묘하게 축축한 공기도, 홍등이 늘어진 어둑한 풍경도, 적의를 드러내는 수인들까지. 어느 하나 안전한 요소가 없었다.
소리 없이 웃은 아힌이 반대로 내 손을 당겼다. 곧 간지러운 감촉이 전해졌다.
[어디로?]어이가 없어진 내가 다시금 그의 손을 끌어왔다.
‘어디긴 어디야, 집,’
…이지.
멈칫, 글자를 쓰려던 손가락이 뻣뻣하게 얼어붙었다.
과연 내가 그레이스가(家)를 집이라 표현해도 될까. 눈꼬리를 늘어뜨린 나는 조심스레 아힌의 눈치를 살폈다.
‘나는 비비가 토끼라서 좋아.’
내가 더 이상 토끼가 아니게 되면, 너는 어떻게 할 거야? 내내 감춰 둔 의문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인간이면 오히려 곤란해.’
미동 없이 손만 붙들고 있자, 고개를 기울인 아힌이 나를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봤다.
“왜 그래.”
이상하게도, 말하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입술이 떨어지질 않았다.
만약, 필요가 없어지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럼 또다시 버려지게 되는 걸까? 자꾸만 모난 생각이 밀려들었다.
“…비비?”
이럴 겨를이 없는데. 이곳을 벗어나는 게 우선임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어쩐지 복받치는 감정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향이 너무 짙은데.”
미간을 찌푸린 아힌이 급히 내 뺨을 두드렸다.
“비,”
인지할 새도 없이 쿵, 몸속에서 일렁이던 페로몬이 파도처럼 들썩였다. 동시에 손발이 달달 떨리며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욱, 입을 틀어막은 내가 헛구역질을 했다.
“비비!”
코가 알싸하게 시렸다. 판잣집에서 페로몬을 제어할 수 없었을 때와 동일한 현상.
그가 무어라 외치는 듯했지만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밑바닥에서부터 피어난 짙은 설움이 차차 마음을 갉아먹었다.
* * *
넘실대는 램프 불이 밤을 밝혔다.
인간으로 돌아가면 아힌 그레이스를 부숴 버리고 말리라. 그렇게 다짐한 룬은 크헝, 우렁찬 포효를 지르며 애먼 곳에 화풀이했다.
“이 사자가 미쳤나!”
“끄아악, 내 부츠!”
수풀 무성한 건물 입구, 횃불과 램프를 든 수인들이 우왕좌왕 요란을 떨었다.
페로몬도 안 먹히지, 신들린 발놀림으로 무기도 피해 버리지, 이런 룬에게 쫓기는 중인 그들은 딱 죽을 맛이었다.
그사이, 아힌을 쫓아 길드 건물에 당도한 이브린의 일행은 아연한 얼굴을 했다.
“으아!”
“비켜, 비키라고!”
잠복할 필요조차 없었다. 사자와 수인들이 술래잡기라도 하는 듯한 광경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심지어 일개 사자가 아닌, 한 영토 수장의 자제라는 사실이 이들의 심경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미친 듯이 동공을 떨던 레스틴은 “룬 님, 어디 계시는지요-!”라며 반대편을 향해 달려갔다. 주인의 체통을 지키기 위한 수하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멀어지는 사자와 레스틴을 뒤로한 이브린이 호위 기사들에게 지시했다.
“저 두 분을 따라가서 약물을 수거해 오도록.”
“존명.”
달려드는 수인들을 피하던 이브린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무언가를 발견한 붉은 눈이 가늘어졌다.
건물 3층 창가, 거대한 천 뭉치를 안아 든 아힌이 창틀로 올라섰다.
‘봇짐…?’
천 뭉치의 정체를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뒷짐 진 그는 함께 위를 올려다보는 중인 애쉬에게 물었다.
“애쉬 님, 저게 뭘까요.”
의문을 해결할 새도 없이, 아힌은 발돋움 한 번으로 창틀을 넘었다. 그를 보던 이브린은 잠깐 날랜 도둑놈 같다는 생각을 했다.
탁, 가볍게 착지한 아힌이 몸을 일으키며 짐 더미를 고쳐 안았다.
“아힌 님.”
다가서던 이브린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짐 더미의 정체는 봇짐도, 이불도 아닌, 천 자락에 둘둘 말린 여자였다. 더구나 금방이라도 감길 듯한 눈꺼풀을 비롯해, 색색 몰아쉬는 숨이 영 위태로워 보였다.
“…누굽니까?”
아힌은 제 품에 있는 비비를 잠깐 돌아봤다. 어깨에 기댄 비비에게서 흘러나온 숨이 목 언저리를 간질였다. 안 그래도 하얀 피부가 파리하게 질린 데다, 무게감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조사에 따르면 소량의 약물은 고작 감정을 고조시키는 정도에 불과한데. 비비는 그마저도 생명이 위태로울 만큼 약한 몸을 지니고 있었다.
지난번처럼 페로몬 발작 증상 같기도 하지만, 섣불리 건드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브린, 말이나 마차는?”
질문하는 아힌은 웃음기 하나 없는 잔잔한 표정이었다.
“송구하나 대동해 오지 않았습니다.”
이브린은 지금까지 중 가장 공손한 자세와 어투로 대답했다. 오랜 경력에 따르면, 현재 꿇으라면 꿇고 죽으라면 죽어야 할 정도로 상관의 기분이 저조한 상태였다.
아힌은 건물 입구를 크게 둘러봤다. 자신들이 창고를 탈출한 데다, 때마침 들이닥친 이브린의 일행으로 인해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배회하던 붉은 눈이 뒤뜰에서 달려 나온 한 남자에게 머물렀다.
비비에게 조건 없는 호의를 베풀던 수인.
거침없이 다가간 아힌이 릴의 앞을 가로막았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의원으로 안내해.”
“당신은….”
헐떡이는 비비를 발견한 릴의 고동색 눈동자가 아연히 떨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함께 있던 조막만 한 새끼 토끼는 사라지고, 대신 자리한 여자. 천 사이로 흘러내린 하얀 머리카락이 릴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릴, 뭐 하나, 처리하지 않… 컥!”
그새 도약한 애쉬가 달려든 수인 하나를 물어뜯었다. 한 걸음 더 다가선 아힌은 릴을 지목하여 미약하게나마 페로몬을 흘려 넣었다.
“시간 없어.”
“허억….”
전신을 짓누르는 듯한 페로몬이 릴의 발끝을 타고 올랐다.
스스로의 페로몬으로 방어해 보려 했지만 무참히 짓밟혔다. 헤어나올 수 없는 깊은 늪에 빠진 듯, 망막한 두려움이 치솟았다.
시야가 까마득해진 릴은 문득 눈앞의 남자에게 무릎을 꿇고픈 충동이 일었다. 아니더라도 요구를 거부하면 죽임을 당할 거란, 선득한 예감이 들었다.
칼칼한 목구멍을 침으로 축인 릴이 몸속 페로몬을 운용했다. 그의 몸이 빛을 발하며 이윽고 흰 빛깔의 상마(-馬)로 변했다.
다박다박, 걸어온 말은 저항 의사 없이 몸체를 낮췄다.
“이브린, 알아서 따라붙어.”
비비를 한 팔로 고쳐 안은 아힌이 망설임 없이 올라탔다. 히히힝, 우렁차게 운 말이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건물 입구를 벗어났다.
요 몇 분간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말이 일으킨 먼지를 그대로 뒤집어쓴 이브린이 중얼거렸다.
“애쉬 님, 달립시다.”
애쉬가 있던 곳은 텅 빈 상태. 당황한 그가 고개를 돌리자, 애쉬는 이미 말의 뒤꽁무니를 우다다다 쫓아가고 있었다.
“…인간의 다리로 말을 어떻게 쫓으란 말씀인지.”
다리에 바퀴라도 달지 않는 이상 무리가 아닐까. 나지막이 한숨 쉰 이브린은 근 몇 년 만에 본모습으로 돌아갔다.
화한 빛과 함께 나타난 흑표범이 제자리를 어슬렁거렸다.
바닥에 떨어진 옷가지를 꼼꼼히 물어 든 그가 곧장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다.
* * *
어둑한 골목에서 걸어 나온 룬이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시간이 흘러 자연스레 사람으로 돌아온 건 다행이지만, 수치심과 분노가 온몸을 휘감았다.
야외에서 나신이 된 것도 모자라 드로즈를 입는 경험까지 해 보고. 때맞춰 나타난 레스틴이 의복을 가져다주지 않았다면 세기의 변태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제길, 그 버러지 같은 고양이가….”
아힌 그레이스. 얄미운 낯짝을 떠올린 그가 짓씹듯 읊조렸다.
마지막 발길질에 감정을 톡톡히 실어 준 덕분에, 터진 입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났다.
“룬 님, 도대체 어쩌다가 본모습으로 돌아가신 겁니까?”
투지를 불태우는 룬의 곁으로 레스틴이 한 발짝 다가섰다. 귀찮은 듯 크라바트를 주머니에 구겨 넣은 룬이 중얼거렸다.
“그 약물, 페로몬을 강제로 활성화시키는 종류야. 그래서 내 페로몬이 약물을 밀어내기 위해 방어 작용을 일으킨 거고.”
“그런…!”
“약물도 약물인데, 그 토끼….”
“아힌 님의 반려동물 말씀이신가요?”
“어, 간간이 이상한 냄새가 나더라.”
수인을 끌어들이는 단내라고 해야 하나. 특히 약물을 삼킨 뒤, 순간적이지만 그 향이 확 강해졌었다.
“토끼는 그루밍을 하는 동물이라, 잡내가 거의 없는 걸로 아는데요.”
“아니, 그런 의미의 냄새가 아니라… 굳이 꼽자면 버터 냄새?”
콕 집어서 설명을 못 한 룬이 혀로 입술을 쓸었다. 확실한 부분은, 아힌 그레이스는 토끼의 페로몬을 감추기 위해 제 향을 묻힌 거란 정도.
“갓 구운 빵 냄새 같기도 하고.”
레스틴의 표정이 짐짓 심각해졌다.
“실례합니다.”
대뜸 손을 뻗은 그가 룬의 이마를 짚었다.
“…열은 없으신데. 왜 이브린 경처럼 괴상한 말씀을 하십니까?”
“이브린이라니, 말이 심하지 않아?”
싸늘해진 룬이 레스틴의 어깨를 밀쳤다. 반동으로 밀려난 레스틴이 노파심에 충고했다.
“잊으신 것 같은데, 현재 저희는 그레이스가(家)에 머무르는 입장입니다. 자칫 아힌 님과 마찰을 일으켜 동맹이 허사로 돌아가면….”
룬의 누이. 즉 마니언츠가(家)의 성난 황소 같은 차기 가주를 떠올린 레스틴이 침음했다.
흑표범 영토로 사절단을 파견한 장본인이 그녀건만, 터무니없는 이유로 동맹이 파기된다면…. 울상이 된 레스틴이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저는 그분이 너무너무 두렵습니다. 분명 뺨부터 때리고 이유를 물으실 거라고요.”
“그래서. 누이가 무서워서 아힌 그레이스한테 뺨을 맞고도 그냥 넘어가자고? 그 새끼가 힘도 못 쓰는 연약한 사자를 어떻게 다뤘는지 알아?”
“룬 님께서 연약하셨으면 건물이 저 지경이 되진 않았겠지요.”
레스틴의 손끝에 있는 폐건물은 거의 넝마에 가까운 형태가 되어 있었다. 할 말이 없어진 룬이 티 나게 화제를 전환했다.
“아무튼. 내 가설이긴 한데, 그 토끼는 독특한 능력을 가졌을지도 몰라.”
“당연히 그렇겠죠, 말도 알아들으니. 토끼들의 왕이랍니다.”
“…그건 또 뭔데?”
“글쎄요. 토끼들의 우두머리 격이겠죠.”
두 사람의 머릿속으로 잠깐 새끼 토끼와 그 뒤를 따르는 토끼들이 스쳤다.
“누가 그런 미친 소리를 했어?”
“이브린 경이요.”
“그 작자가 하는 소리는 대충 넘겨. 입만 열면 허풍이니까.”
퉤, 입에 고인 피를 뱉은 룬이 건물과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아니, 룬 님. 어디 가십니까? 약물을 수거해야지요.”
“아까 따라오던 기사들이 알아서 하겠지. 난 바빠, 고양이 새끼 죽이러 갈 거거든.”
되물을 새도 없이 룬은 어딘가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고양이가 누구기에 저리 증오를….
“안 됩니다, 룬 님! 제발!”
몇 초 후, 아힌 그레이스란 정답에 다다른 레스틴의 가냘픈 비명이 엔델루스의 밤을 물들였다.
* * *
다그닥거리는 말의 움직임에 따라 몸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아파···.
정상적인 사고를 하기 어려울 정도의, 온몸이 찢기는 고통. 의식의 끈을 붙들기조차 급급했다.
목숨이 위태로움을 인지한 나는 어쩐지 잔뜩 억울해졌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새끼 토끼의 몸으로, 내가 어떻게 버텨 왔는데.
래비안가(家)에서의 하루하루는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도 같았다.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숨기 일쑤였고, 봐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없는 존재처럼 웅크려 있는 게 점점 익숙해졌다.
아주 간혹, 고용인들이 식사를 잊을 때면 꼬박 굶기도 했다.
밖으로 나설 땐 하늘을 지나는 매와 독수리를 주의해야 했고, 고용인이 찻잔을 엎거나 물건을 떨구는 실수는 내게 있어선 목숨의 위협과도 다름없었다.
결국 바구니에 버려지고, 맹수의 땅으로 넘어와서도 오로지 살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러다 겨우 사람으로 변했더니 금세 토끼로 돌아가질 않나, 현재는 죽을 만큼 고통스럽질 않나.
어쩌면 정말 신의 미움을 사서 저주를 받은 걸지도 몰라. 절망의 끝자락에 서니 눈물도 나지 않았다.
숨을 할딱이던 나는 뿌연 시야로 보이는 아힌의 옆모습을 올려다봤다. 밤바람을 맞은 은발이 물결치듯 흩날렸다.
아힌은 나와 정반대인 사람이었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날 때부터 다르다는 말이 맞겠다.
문조차 열 수 없는 나에 비해 밀폐된 공간에서도 쉽게 탈출하는 무력을 가졌고, 가문에서 버려진 나와 달리 흑표범 영토에서 없어선 안 되는 존재였다.
만일 내가 인간화를 치러, 래비안가(家)의 어엿한 일원이었더라도 범접할 수 없는 사람이었을 테지. 일생을 살며 만날 일 한번 없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현실감 없는 외모가 거리감을 느끼는 데 한몫하긴 해.
힘겹게 손을 뻗은 나는 아힌의 뺨을 꾹 잡아당겼다. 덕분에 여유가 사라진 그의 얼굴이 작은 쾌감을 불러일으켰다.
“…있잖아, 아힌.”
누군가의 위에 군림하는 게 당연했고, 그 당연함에서 나오는 여유로움이 부러웠다.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위치한 이 자는 평생 이런 감정을 모르고 살겠지.
“왜 나를 주워 왔어?”
버석하게 갈라진 음성이 튀어나왔다. 꼬집은 손에 힘이 풀리는 동시에, 아힌은 나를 조금 더 당겨 안았다. 이어서 내 머리 위로 턱을 묻은 그가 툭 말했다.
“잡아먹으려고.”
그래, 고약한 맹수한테 무슨 정상적인 대답을 바라겠어. 분노 때문인지, 숨이 막혀서인지 얼굴로 홧홧하니 열기가 올랐다.
“농담 아닌데.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어.”
그가 입을 움직일 때마다 머리로 작은 울림이 전해졌다.
“안 주웠으면 아마 애쉬의 무리에게 잡아먹혔을걸.”
날카로운 진실이 부메랑처럼 날아와 꽂혔다.
흑표범은 무리 생활을 거의 하지 않지만, 경계의 숲에는 통제가 되지 않는 흑표범 무리가 돌아다닌다 들었는데.
그게 애쉬의 무리였구나. 더구나 생각에 변함이 없다는 건 또 무슨 말인지. 괜히 말문을 뗐다가 알고 싶지 않은 진실을 접하고 말았다.
말이 달리는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가물거리는 의식을 붙들기 위해 힘쓰는데, 평소에 비해 유달리 낮아진 음성이 들렸다.
“의식 놓지 마, 위험하니까.”
나도 그러고 싶은데, 마음대로 잘 안 돼. 이를 사리문 나는 느리게 눈꺼풀을 여닫았다. 정신을 놓으려는 찰나, 쿡, 머리 위로 무언가 쪼뼛한 게 닿았다.
“기절하는 순간 깨물 거야.”
날카로운 무언가의 정체는 다름 아닌 아힌의 윗니, 즉 송곳니였다.
아니, 지금 어딜 물고 있는 거냐고. 파리하게 질린 채 도리질 쳤으나, 송곳니가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진짜 미쳤나 봐….’
비명도 못 지른 나는 핏발 선 눈을 부릅떴다. 그렇게 기절하지 않기 위한 자신과의 싸움이 시작됐다.
* * *
말이 멈춰 선 장소는 한적한 길가에 위치한 작은 오두막이었다.
쾅쾅쾅, 아힌이 문을 두드리자 “오밤중에 예의 없긴!” 호통치며 나오던 의관이 목석처럼 굳었다.
“흐, 흑표….”
주춤거리던 그녀는 발치의 애쉬를 발견하곤 식은땀까지 뻘뻘 흘리더니,
“어서, 어서 들어오시지요.”
오두막 문은 물론 마음의 문까지 활짝 개방했다. 맹수를 대하는 일련의 행동에서 묘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오두막 내부, 장작을 지피고 램프를 밝히자 시야가 환해졌다.
침대에 누운 나는 쉼 없이 몸을 뒤틀었다. 몸을 옥죄는 극통이 가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약물을 들이켰다고 하셨죠?”
내 몸에 둘러진 천을 들추던 의관의 손이 멈칫했다. 까만 눈동자 위로 당혹이 스쳤다.
“일행분은 뒤를 좀 돌아 주시겠어요? 천을 벗겨야 돼서요.”
아힌은 군말 없이 돌아섰다. 그가 벽을 보고 설 때까지 기다린 의관은 애쉬가 가까이 오자 이를 딱딱 부딪쳤다.
“쉭, 쉭!”
애쉬를 문가로 쫓아낸 그녀가 부산스레 의료 도구를 챙겼다.
“약물 복용 시각은 어떻게 되나요? 아, 이쪽은 보지 말고 답해 주시길.”
“두 시간 전.”
스르륵, 천을 내린 의관이 진료에 임했다. 맨살을 스치는 의료 도구의 감촉이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오한으로 인해 발끝이 부르르 곱아들었다.
“이상한데…. 약물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데요. 혹 이전에도 약물을 접한 경험이 있나요? 내성의 경우도 고려해야 돼서요.”
‘내성?’
그럴 리가. 건초만 먹고 살아온 토끼가 마약을 복용할 일이 어디 있겠어. 의관의 옷자락을 붙든 내가 간신히 고개를 저었다.
“흠. 엔델루스에서 만연 중인 약물을 복용할 시, 감정이 고조되거나 심하면 피부가 잿빛으로 물드는 증상이 대부분이죠. 하지만 환자분은 비슷한 증상은커녕 약물 반응조차 나타나지 않네요.”
반대편 손으로 약초를 갈던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워낙 소량이라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 거라든가. 페로몬이 불안정한데, 아무래도 약물보다는 본인의 페로몬과 관련된 문제인듯하군요.”
밑도 끝도 없는 설명을 듣고 있자니 눈앞이 까마득해졌다. 맥을 짚은 의관이 천을 끌어 올려 내 몸을 덮었다.
“일행분, 이제 돌아보셔도 괜찮습니다.”
벽을 마주하고 있던 아힌이 침대로 걸터앉았다. 그의 검지가 내 이마에 맺힌 땀을 옅게 쓸고 지나갔다.
“약물 문제가 아니면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해독제가 아닌, 페로몬 안정제를 투여해야 하죠.”
달그락, 찬장을 연 의관이 작은 병을 꺼내 들었다.
“간혹….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페로몬을 갖고 있을 시 발작이 일어나곤 하죠.”
뚜껑을 돌린 그녀는 다소 굳은 얼굴로 나와 아힌을 돌아봤다.
“제 소견으로는 약물의 자극으로 인해 환자분의 페로몬이 활성화되었는데, 몸이 본인의 페로몬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페로몬 안정제는 장기적으로 보면 딱히 좋은 방법은 아닙니다. 저절로 안정될 때까지 경과를 지켜보다가, 정 위험할 시 투여하는 쪽으로 권유하고 싶네요.”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계속 이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니, 싫어.
몸을 뒤척인 나는 의관이 들고 있는 약병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탁, 손목을 붙든 아힌으로 인해 손끝이 허공을 맴돌았다.
‘얼마나 아픈지도 모르면서.’
정신없는 와중, 그의 안개와도 같은 흐린 표정이 퍽 서럽고 또 미웠다. 엉엉 울며 아프다고 소리라도 치고 싶은데, 그조차 힘들어서 가쁜 숨만 흘러나왔다.
‘이번만….’
이번만 복용하게 해 줘, 다음부터는 내가 페로몬을 잘 조절해 볼게. 더 이상 혈관이 부풀어 터질 듯한 괴로움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나, 좀….”
뚝뚝 끊기는 목소리를 억지로 이어 간 내가 애원하듯 아힌의 소맷자락을 붙들었다. 미동 없이 내려다보던 그는 목까지 감싼 내 천을 살짝 끌어당겼다.
“약물과 상관이 없다면,”
아직 아물지 않은 목의 상처로 서늘한 공기가 닿았다.
“페로몬을 누르기만 하면 진정되는 거겠지.”
“네? 어, 그렇긴 한데-….”
의관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말끝을 뭉뚱그렸다. 아힌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따로 설명을 부언하지 않은 그는 대뜸 내 쪽을 향해 몸을 굽혔다.
“뭐 하시는…. 여, 여 봐요! 미쳤어요?!”
기겁한 의관이 그의 어깨를 붙들며 만류했다.
“다른 페로몬으로 눌러 볼 오만한 짓일랑 그만둬요!”
“충분히 가능하니까 놔.”
“어지간한 페로몬으론 어림도 없어요, 자칫 환자를 죽음으로 몰수도 있다고요!”
“내 페로몬,”
탁, 아힌은 어깨에 걸쳐진 그녀의 손을 쳐 냈다.
“지배 계열이야.”
“허….”
경악을 금치 못한 그녀가 머리카락을 마구잡이로 헝클어뜨렸다. 아랑곳하지 않은 아힌이 손을 뻗어 내 목덜미를 받쳤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나를 일으킨 찰나,
“자, 잠깐만요, 잠깐.”
다시금 의관이 손을 여러 번 내저으며 끼어들었다. 느릿하게 눈길을 옮긴 그가 씹어뱉듯 말했다.
“이 이상 시간을 끌면 당신에게도 좋지 않아.”
명백한 경고와도 다름없었다. 의미를 이해한 그녀는 소리 나게 목울대를 울렁였다.
“무, 물론 페로몬을 밖에서가 아닌, 안으로 흘려 넣는 편이 확실하고 안전하긴 하지만….”
흘끔, 의관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진료 중에 목 부근의 잇자국… 을 발견했는데, 그런 식의 방법은 허용치 못합니다. 초식계 수인의 몸을 맹수계와 같이 보시면 안 돼요.”
까만 눈동자는 확고한 의지를 표방하고 있었다.
아힌의 어깨 너머로 그녀를 바라보던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차라리, 그때처럼 목을 물리더라도 지금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빛바랜 아힌의 붉은 눈이 내 목에 머물렀다. 무감각한 얼굴과 목덜미에 닿은 손의 온기가 묘한 간극을 가져왔다.
허공에서 시선이 오갔다.
쿵.
다시 한번 몸속 페로몬이 요동친 순간, 아힌이 나를 당겼다. 얼굴이 가까워지는 동시에 입술로 낯선 감촉이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