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ymbiotic Relationship Between the Rabbit and the Black Panther RAW novel - Chapter (30)
토끼와 흑표범의 공생관계 2화(30/75)
그레이스가(家)로 돌아갈 채비를 마치고 돌아온 아힌은 펼쳐진 장관을 응시했다.
오두막 입구에 기절해 있는 의관과 이브린, 비비에게 붙여 뒀던 전령 매. 한가운데 앉아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릴.
결정적으로, 미묘하게 머물러 있는 룬 마니언츠의 페로몬까지.
이 모든 게 그가 이틀을 통틀어, 단 한 시간 자리를 비운 사이 일어난 참상이었다. 이브린마저 기절시킨 걸 미뤄 봤을 때, 작정하고 노렸다고밖에 볼 수 없는 상황.
두 사람이 직접 부딪히는 건 영토 분쟁으로 번질 우려가 있으니, 룬은 다른 방편을 고른 게 틀림없었다.
아힌이 사자로 변한 룬을 골린 것처럼, 문제 삼기는 애매하지만 그가 가장 배알이 꼴릴 만한 종류로.
그리고 그 방법은 정답의 과녁을 쏘았다.
“사자가 남겨 둔 전언이 있을 텐데.”
가라앉은 눈으로 둘러본 아힌이 웃음을 흘렸다.
“그….”
기절했다가 일어난 릴의 얼굴 위로도 커다란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눈물 젖은 고릴라를 마주한 아힌은 차분히 대답을 기다렸다.
“새끼 토끼를 데려가려 했는데….”
“그래서.”
“없어서… 대, 대신 큰 토끼를 데려간다고….”
흥, 세차게 코를 푼 릴이 떠듬떠듬 말을 이어 갔다.
“그게 끝인가.”
“여,”
“여?”
“엿 먹으라고….”
* * *
엔델루스의 낮은 홍등이 늘어진 밤과 달리 쾌활한 분위기였다.
복작복작한 시가지를 지나, 의상실 로비에 앉은 나는 연신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왜 그렇게 두리번거려요? 의상실에 처음 와 본 사람처럼.”
나태한 자세로 맞은편 소파에 늘어진 룬이 물었다.
‘처음이니까 그렇지.’
입어 본 옷이라곤 하얀 털과 입고 있는 네글리제뿐. 사실상 제대로 된 의복 한 번 걸쳐 본 적 없는 처지였다.
“의상실은 왜···?”
“네글리제를 입고 돌아다닐 순 없잖아요.”
이게 다 누구로 인해 비롯된 건데. 흙투성이로 변한 네글리제를 붙든 나는 눈을 세모나게 떴다.
‘감히 애쉬를….’
“너무 노려보진 마세요. 흑표범은 어쩔 수 없었다니까. 그런 짐승한테 물리면 아무리 저라도 팔이 뜯겨 나가요.”
치열한 난투극 끝에, 결국 룬은 애쉬마저 기절시킨 뒤 발버둥 치는 나를 들쳐 업었다.
새끼 토끼가 없으니 큰 토끼라도 데려가야 되겠다며. 폐건물에서 아힌이 저지른 만행에 대한 보복이 틀림없었다.
아니, 애초에 왜 맹수들 싸움에 토끼 등을 터뜨려? 곱씹을수록 억울해진 내가 룬과 똑같이 한껏 불량한 자세를 취했다.
턱, 의연한 척 소파에 팔을 걸친 나는 의상실 입구를 슬쩍 돌아봤다.
똑바로 걷질 못하니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동하는 동안 길을 외우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 길을 안전히 되돌아갈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조마조마하게 옮겨진 시선이 쥐어뜯긴 룬의 머리카락에 머물렀다. 뒤늦게 그의 신분을 상기한 나는 다시 공손하게 자세를 바로 했다.
“나를 의관의 오두막으로 돌려보내.”
“…….”
“…주세요.”
“날이 저물면 안전히 데려다줄게요.”
그레이스가 화병이 나서 돌아가실 때쯤, 덧붙인 룬이 악동처럼 웃었다.
“아힌은 날 찾지 않을 거예요.”
“글쎄, 과연 그럴까.”
팽하니 고개를 돌린 나는 한가로운 룬을 곁눈질했다.
그의 겉으로 보이는 눈매나 어투는 아힌보다 사나운 반면, 그만큼 나쁜 성정은 아닌 듯했다.
무도회에서 처음 사람으로 변했을 때, 몸을 숨기려 하니 자연스레 팔을 펼쳐 감춰 준 걸 비롯해, 사자로 변한 그에게서 달아났을 때도 끝까지 쫓아와 주고.
이곳까지 오는 동안에도 들쳐 업은 내가 불편할까 편한 자세로 안아 든 걸 보아, 은근히 무른 구석이 있었다.
아힌이 룬의 이러한 성정을 알고 있다면. 무릎을 만지작거린 나는 담담히 입술을 뗐다.
“…아마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걸요.”
“하긴, 그놈이라면 그럴 가능성이 크죠.”
이번에는 룬도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도 배알은 꼴리겠죠. 그쪽도 결국 수인인 사실을 들킨 것 같고, 그레이스 덕분에 제법 고생하는 듯한데….”
말꼬리를 늘인 그의 시선이 목 언저리의 잇자국에 머물렀다. 예민하게 반응한 나는 머리카락을 당겨 상처를 가렸다.
“…엿 먹이는 것도 괜찮지 않아요?”
물론 아힌이 골탕 먹었으면 하는 바람은 어느 정도 일치하나, 초조함은 커져만 갔다.
함께인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에 대한 룬의 의구심이 커져만 갔으니. 그는 묘하게 어설픈 내 행동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이미 똑바로 걷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다리가 불편하냐 물어 오기도 했고. 더 이상 아무 대답 없이 시치미를 떼기도 무리였다.
“머리는 일부러 그렇게 기른 거예요?”
이것 봐. 능청스레 묻지만, 저 동태눈 너머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미지수였다.
애가 단 나는 손톱을 잘근잘근 뜯었다.
아직 인간의 모습인 것 자체도 불안한데, 만일 아힌도 없는 곳에서 페로몬 발작을 일으키거나 토끼로 돌아가 버리면.
‘지나가는 들개라도 만나면…!’
안 돼. 파리하게 질린 나는 한순간에 배를 움켜쥐었다.
혹시 아픈 시늉이라도 하면 돌려보내 주지 않을까. 으윽,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처럼 신음한 내가 소파 위로 몸을 무너뜨렸다.
“실눈 뜬 거 다 보여요.”
“…….”
“그리고 그런 평온한 표정으로 쓰러지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연기 진짜 못 한다.”
“…짜증 나는 맹수.”
“다 들려요.”
입을 합 다문 나는 머쓱하게 몸을 일으켰다. 다른 무엇보다, 표정 관리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낀 순간이었다.
* * *
의상실을 나선 룬은 나를 안아 든 채 호화로운 식당가로 들어섰다.
엉덩이를 대기조차 황송한 의자에 앉은 나는 심호흡을 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이게 뭐야.’
연회복에 가까운 옷차림의 수인들과, 상다리가 부러질 법한 음식들. 난생처음인 것들을 한꺼번에 경험하려니 호흡곤란이 올 것만 같았다.
더욱이 얄팍한 새틴 블라우스와 밑위가 배꼽까지 오는 경장 바지, 흑색 단화 속의 하얀 양말까지.
의복을 갖춰 입은 게 처음인 나는 어색하게 목 언저리의 리본과 머리 위 베레모를 만지작거렸다.
“룬 님, 머리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파르르, 반대편에 착석한 레스틴의 입가가 경련했다.
“요즘 유행하는 머리 모양이라더라.”
“태풍이라도 맞은 듯한 머리가요?”
흠씬 뜯긴 탓에, 안 그래도 곱슬머리인 룬의 머리카락은 산발이 된 상태였다. 자세히 보니, 사자일 때 굴려진 탓인지 입가도 피떡 진 안쓰러운 몰골이었다.
“이분이 그 식빵 냄새가 나는 토끼입니까?”
‘식빵 냄새는 또 뭔데.’
바들바들 떨리는 레스틴의 금안이 룬에서 내게로 옮겨졌다.
“버터래도.”
“…아힌 님의 페로몬 향밖에 나지 않는데요.”
“그새 그레이스가 묻혀 놓았겠지.”
“그런가 보네요.”
일순 적막이 내려앉았다. 이윽고 힉, 소스라친 레스틴이 잔뜩 질린 낯을 했다.
“수… 수인이었습니까?”
뻗어진 그의 손가락이 내게 고정되었다.
“아니, 수인이었습니까? 그냥 토끼가 아니라?”
“레스틴, 한 번만 말해. 그리고 너무 늦게 물었어.”
“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본모습으로 활동하는 수인이라니요! 게다가 분명 성수(成獸)가 아닌 새끼 토끼였잖습니까!”
룬의 보좌마저 알게 되다니, 갈수록 태산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군다나 아까부터 사람을 앞에 두고 지나치게 무례한 태도를 보이질 않나. 속이 상한 나는 슬그머니 레스틴의 손가락을 밀어냈다.
“마, 만지지 마십시오!”
그의 비명에 화들짝 놀란 내가 손을 떼어 냈다.
내가 뭘 했다고…. 레스틴은 처음부터 한결같이 나쁜 인상만을 심어 줬다.
“무시해요, 겁이 워낙 많아서. 식사나 들죠.”
룬은 종업원이 내온 음식을 내 앞으로 나열했다. 스튜와 각종 고기류 및 샐러드까지.
아직 사람으로서 음식을 접해 본 적이 없는 탓에 조금 거북하게 느껴졌다. 하물며 눈으로 배우긴 했지만, 분명 식사 예절도 서툴 테고.
어설프게 시도했다가 또 다른 의심을 살지도 모를 일이었다.
“안 먹어요?”
“…….”
“약물을 삼켰던 것 때문에 그런 거라면, 그 정도 소량은 음식을 가릴 필요까진 없어요.”
그런 게 아니야. 고개를 저은 나는 커다란 유리창을 돌아봤다.
어느덧 날이 저물어,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오두막으로 돌아갔을 때 거짓말처럼 아무도 없으면 어떡하지. 그런 불안으로 인해 의연하게 마음을 다잡아도 자꾸만 눈꼬리가 아래로 내려갔다.
‘…돌아가고 싶어.’
입술을 꾹 다문 나는 흑색 단화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지금은 누군가의 손길 없이도 문을 열 수 있고, 걸음을 옮기는 것도 가능했다. 원하는 곳으로 자유롭게 갈 수 있는 양팔과 양다리가 있으니까.
오두막에서부터 의상실을 거쳐, 식당가로 오는 길도 두 눈으로 똑똑히 봐 뒀잖아.
벌떡 몸을 일으킨 나는 룬을 돌아봤다.
“룬, 저 돌아갈래요.”
“무엄하게, 존함을 함부로…!”
실낱같은 용기를 끌어 올린 내가 쿵, 식탁을 내려쳤다. 동시에 기함하던 레스틴이 흠칫 움츠러들었다. 그런 동요를 눈치챈 나는 작게 읊조렸다.
“…새가슴.”
“뭐, 뭐, 뭐라고요?”
혹시 따라올 후환이 두려워, 재빨리 몸을 돌린 나는 출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마치 갓 태어난 송아지처럼 걸음걸이가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살펴 가십시오.”
종업원은 뒤뚱뒤뚱 걷는 나를 의아하게 살피며 문을 개방했다.
식당을 나서니, 다시금 홍등이 늘어진 거리가 드러났다. 뺨을 두드려 마음을 다잡은 내가 발을 내디뎠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꺾어서….’
열심히 걸음을 옮기는데, 갑작스레 몸이 엄청난 힘으로 인해 붕 떠올랐다. 공중에서 다리가 대롱대롱 흔들렸다.
“데려다줄게요.”
나를 들어 올린 룬은 평소와 같은 무료한 낯빛이었다.
“화 많이 났어요?”
그러나 금색 눈동자 위로, 미세하게 예의 그 무른 빛이 떠올라 있었다.
“마음대로 데려와서 미안해요.”
사과라도 안 했으면 머리채를 한 번 더 뜯었을 거야. 차마 응징할 용기는 없는 내가 뱁새눈을 했다.
“근데 진짜 왜 오리처럼 걸어요? 다리에 문제가 있어 보이진 않는데.”
얕게 인상 쓴 그가 물었으나, 아무런 대답도 돌려줄 수 없었다.
첫 번째는 무심결에 페로몬을 흘려 버린 탓이었고, 두 번째는 룬의 입가에 자리한 상처가 점차 사라져 가고 있었기에.
파도가 모래를 쓸어 가듯, 터진 상처가 아물며 이윽고 완전히 흔적을 감췄다.
“…기운이 이상한데, 설마 페로몬 사용했어요?”
그 기운이 제 상처를 지운 사실까지는 인지하지 못한 룬이 재차 채근했다.
“갑자기 왜 말이 없,”
나도 모르게 엄지를 룬의 입가로 가져가자, 그의 목소리가 뚝 멎었다. 언뜻 금안이 진해진 듯도 했지만 손을 물릴 수가 없었다.
‘맹수들은 소유욕이 강하대, 그게 무엇이든.’
‘가끔 그 욕구가 지나치면 망가뜨려 버린다더라.’
내 엄지 끝이 사라진 상처 부근을 천천히 지나쳤다.
핏자국은 여전히 남아 있는 반면, 손끝으로 상처의 굴곡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두근, 두근, 넋 놓고 응시하던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치유계 페로몬.
손끝이 아스라이 떨렸다. 실감 나진 않지만, 정말 내 능력이 치유계라면 지금까지 아힌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었다.
내 능력이 그에게 썩 유용할지도 모르니까. 여러 지식을 알려 주던 기행 또한 나를 조금 더 쓸모 있는 방향으로 만들려 했던 것일 수도 있다.
‘…나를,’
인간이길 바라지 않은 건 내가 스스로 무언가를 결정할 수 없는, 수동적인 존재이기를 바란 거겠지.
‘이용하려 했던 거구나.’
늘 제 향을 묻혀 내 페로몬을 감춘 것도, 나보고 수인임을 숨기라 한 것도. 다른 사람들이 내 능력을 눈치채지 못하게끔 하려던 속셈이 아닐까.
참으로 맹수다운 탐욕이었다.
삐이-
위협적인 울음소리에 기민하게 반응한 내가 위를 올려다봤다.
전체적으로 흰 깃털에, 군데군데 검은빛이 도는 매. 낮에 본, 룬이 기절시킨 아힌의 매가 하늘을 돌고 있었다.
“결국 찾아냈군.”
함께 하늘을 올려다본 룬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중얼거렸다.
“제 말이 맞았네요. 그레이스가 얌전히 기다리지만은 않은 것 같으니.”
탁, 한순간에 발버둥 친 나는 룬을 밀치며 바닥으로 발을 디뎠다.
뒤이어 쏜살같이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 현실은 느림보 거북이와 다름없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룬은 휘적휘적 가볍게 걸어 따라붙었다.
“어디 가요?”
“따라오지 마세요.”
“곧 아힌 그레이스가 올 텐데?”
“그러니까 따라오지 말래도!”
막무가내로 주먹을 휘두르자, 그가 황당한 얼굴로 멈춰 섰다.
뒤따라오면 가만두지 않겠단 의사까지 비친 나는 다시금 레스토랑 건물로 들어섰다.
엉금엉금, 힘차게 계단을 오른 내가 3층 옥상에 다다랐다.
시간이 없었다. 무심결에 룬의 상처를 치료해 버린 이상, 토끼로 돌아갈 가능성이 컸으니까.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미뤄, 강한 페로몬을 접하면 사람으로 변했고, 반대로 내가 페로몬을 사용했을 시엔 토끼로 돌아가곤 했으니.
새삼스러운 위기감을 느낀 나는 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여기!”
살다 살다 매를 피해 도망치는 게 아닌, 나한테 다가오길 바라는 날이 올 줄이야.
드디어 시선이 마주친 내가 까치발을 들었다.
“매야, 여기!”
그러나 조금 가까워진 매는 무례하게도 코웃음을 치며 더 이상 가까워지지 않았다.
‘…뭐야, 쟤.’
주인을 닮은 걸까. 어이가 없어진 내가 하늘을 보며 입을 뻐끔거렸다. 동시에 아래쪽에서 익히 아는 음성이 들렸다.
“비비.”
쿵, 심장이 내려앉은 나는 조심스레 난간으로 다가섰다. 아래에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말끔한 차림새를 한 아힌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베레모, 잘 어울리네.”
입매는 매끄럽게 올라가 있으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은, 척박한 표정이 그의 저조한 기분을 드러냈다.
“나는 엿을 먹으면서 하루 종일 비비를 찾아다녔는데.”
그가 뛰어다녔음을 증명하듯, 결 좋은 은발이 얼기설기 흐트러져 있었다. 룬의 엿 먹이기 작전이 어느 정도 통하긴 한 모양이었다.
꾹, 난간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군청색 재킷 위, 은색 견장이 장식된 의복을 입은 그는 오늘따라 한층 더 먼 존재처럼 느껴졌다.
“사자랑 세 번째 도피는 즐거웠어?”
그걸 횟수까지 세다니, 무서운 맹수 같으니라고.
이를 부득 가는데, 새삼 저 괴상한 화법이 놀랍지도 않을 만큼 그와 함께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장난이었으면 좋았을걸.’
입안이 썼다. 차라리 지나온 시간이 이용이란 목적이 아닌, 심심풀이나 변덕 정도였다면 좋았을 텐데.
눈꼬리를 조금 늘어뜨린 내가 난간을 만지작거렸다.
막상 아힌을 보면 밉고 화가 치밀 줄 알았건만. 안도감 따위가 밀려드는 스스로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찾아다녔는데?”
의도치 않은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돌아올 걸 예상하고 있었잖아.”
너도 알고 있잖아, 내가 돌아갈 자리는 거기밖에 없다는 걸. 이런 상황에서조차 갈 곳 없이 너한테 의지할 수밖에 없는 내 처지를.
아힌의 붉은 눈이 조금 커다래졌다 제자리를 찾았다. 잠깐 침묵을 지킨 그가 곧 나긋나긋한 어투로 말했다.
“비비가 무서워하고 있을 것 같아서.”
“…….”
“틀렸나?”
“…너랑 몇 시간 떨어진 정도로 무서워할 만큼 겁쟁이는 아니야.”
“아닐 텐데. 본인만 모르나 봐.”
반박할 말이 없어진 내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사실 레스틴에게 새가슴이라 면박을 줄 때도 조금 양심에 찔리긴 했으니. 일순 레스틴의 충격받은 눈빛이 뇌리를 스쳤다.
“돌아가자.”
내가 손바닥에 썼던 것과 동일한 말을 흘린 아힌이 양팔을 뻗었다. 왠지 눈물이 날 듯한 감정을 삼킨 나는 입을 달싹였다.
“…어디로?”
“집에.”
홍등이 비친 그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뛰어, 받아 줄게.”
“있잖아, 아힌.”
“왜?”
조금 지나면 토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면, 아힌은 또 저 좋은 머리를 굴려 내 비밀을 파헤치겠지.
“…아니, 아무것도 아냐.”
내가 인간화를 바라는 만큼 그는 나의 인간화를 바라지 않을 테니까. 망설이며 시선을 피하자, 아힌의 입가에 자리한 미소가 짙어졌다.
“뛰는 게 무서워서 그런가 보군.”
“누가!”
진짜 누굴 천하의 겁보로 아나. 호기롭게 소리친 나는 곧장 난간으로 한쪽 다리를 들어 올렸다.
‘으음….’
생각보다 높네. 막상 뛰기 위해 두 다리를 걸치니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발끝으로 싸한 한기가 들었다.
“이제 뛴다?”
“만세 하면서 뛰어 봐.”
“…왜?”
“웃길 거 같아서.”
저 맹수한테 웃음을 줄 바에 계단으로 내려가는 게 낫겠어. 어차피 옛날부터 계단을 좋아하기도 했고.
결심을 번복한 내가 도로 난간을 넘으려는데, 몸이 기우뚱거리며 뒤로 넘어갔다.
“아!”
순간 눈 부신 빛이 일며 시야가 뒤바뀌었다. 팔을 뻗는 아힌의 모습이 점점 가까워졌다.
폭, 그의 양손으로 안착한 나는 어지럼증에 고개를 뒤흔들었다.
전신을 덮고 있던 베레모가 치워지며, 해사한 아힌의 얼굴이 드리워졌다.
“말했을 텐데, 예고 좀 해 달라고.”
안녕. 짧게 인사한 그가 손바닥을 내밀었다.
조금 전까지와 달리, 한없이 커 보이는 손바닥을 마주한 내가 앞발을 맞췄다.
* * *
그레이스가(家)
집무실 소파에 앉은 발렌스는 씁쓸한 맛이 나는 홍차를 음미했다.
고작 일주일 남짓이건만,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새끼 토끼가 없으니 괜히 허전했다.
나름 예를 차린답시고, 아침마다 찾아와 곱게 부복하는 것을 보는 즐거움도 있었는데.
몇 달 내내 저택을 누비고 다녀서 그런가. 시중을 들던 메이미도 허한 건 매한가지인지, 빈 시간에는 책 읽는 토끼의 초상화를 가만히 바라보곤 했다.
“아힌 고놈은 어디 간 게냐? 할아비가 오셨는데 맨발로 달려 나오진 못할망정!”
탁, 접객 소파에 자리한 아힌의 조부, 릴리언이 짜증스레 찻잔을 내려뒀다.
“엔델루스로 출타를 나섰지요.”
빙그레 웃은 발렌스는 창틀을 짚고 선 매를 가리켰다.
“조금 전에 귀환 전서를 보내왔으니, 늦어도 내일 아침에는 돌아올 겁니다. 그러는 아버님도 전서 한 통 없이 오셨으면서.”
“에잉, 쯧. 오는 길에 만난 사자 쪽 꼬맹이가 먼저 인사하더군.”
“룬 말씀이신가요?”
“그래. 아힌 녀석과 앵앵거리며 주먹다짐을 한 게 어제 같은데, 많이도 컸더구나. 키가 이만했나.”
보통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룬을 떠올린 릴리언이 허공에 손짓을 하며 가늠했다.
성인식을 치른 지도 훌쩍 지났는데, 릴리언은 아직도 아힌과 룬이 한낱 코흘리개로만 보였다.
“여전히 게을러 보이긴 하더군. 아무튼 내 당분간은 그레이스가(家)에 머물 셈이다.”
“이미 아버님의 침실을 마련해 둔 상태랍니다. 아힌의 탄생일 즈음이면 매번 저택에 오셨고, 또 아카데미 중간 방학 기간이기도 하니까요.”
즐겨 드시는 토끼 영토산 사과도 미리 주문해 뒀죠, 입매를 말아 올린 발렌스가 첨언했다. 덩달아 릴리언의 까칠한 얼굴 위로도 웃음꽃이 만개했다.
“난 예부터 자네가 참 마음에 들어. 어쩌다 내 아들 같은 놈을 거둬 가지곤.”
“후후, 그래 봬도 그이가 안사람 일은 완벽했는데요. 아힌에게 너무 무른 아버지여서 문제였을 뿐이죠.”
“구태여 감싸지 말거라. 그런 방만한 놈팡이가 수장의 부군이라니, 수신(獸神)께서 노할 게다.”
그러고도 릴리언의 아들 험담은 십여 분 동안 지속되었다.
은은한 미소를 건 발렌스는 그리운 얼굴이 담긴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 비록 머리는 하얗게 세었지만, 그녀의 반려였던 남자의 얼굴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아카데미 운영이 힘들진 않으신지요.”
“새파란 것들이 하루가 멀다 하니 사고를 쳐서 죽을 맛이야. 이참에 학장 자리도 물러날까 싶구나.”
한탄한 릴리언이 신경질적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한참 아카데미 및 대륙 정세에 관한 담화를 나눈 그는 찻잔을 들어 입을 축였다.
“아가. 그, 말이다.”
“어머, 아버님께서 웬일로 말씀을 망설이신대요.”
“…아힌은, 아직이더냐.”
“아….”
분위기가 확연히 가라앉은 발렌스는 식은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가느다란 속눈썹이 붉은 눈동자 아래로 그늘을 만들었다.
“다행히 한 번도 발작을 일으킨 적은 없지요. 제 딴에도 주의를 기울이고 있을 테니.”
“그런 주제에 밖을 쏘다니고. 그놈의 태평한 성격은 당최 누굴 닮은 게냐?”
“많은 친인척들이 저를 빼닮았다고 말씀하시곤 했죠.”
“…….”
당황스럽게 동공을 떤 릴리언이 헛기침을 했다.
“태, 태평한 게 다 골머리 썩을 일이 없단 뜻 아니겠더냐. 아무튼 홀로 남은 자네를 생각하면, 손주의 후사를 보고자 하는 것도 못 할 짓이군.”
“뭐, 혼담 요청서만 쌓여 가네요.”
“하필 닮아도 아들놈의 페로몬을 물려받아선. 내가 죄인이지, 죄인이야.”
이어진 한탄에 발렌스는 그저 흐린 눈웃음으로 답했다.
“…발작을 막을 만한 방안은 찾지 못한 게냐.”
“아직은-.”
말끝을 늘인 발렌스가 툭, 툭, 검지로 팔걸이를 두드렸다. 일순 신묘한 페로몬을 가진 새끼 토끼가 머릿속을 스쳤다. 자세히는 몰라도, 토끼의 페로몬은 인체를 나른하게 풀어지게끔 만드는 종류.
“그건 그렇고, 도대체 그 소문은 무엇이냐?”
릴리언의 뜬금없는 질문이 발렌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무슨 소문을 말씀하시는지?”
“아힌 고놈이 무도회에서 토끼랑 왈츠를 췄다는 터무니없는 소문이 돌더구나.”
가문의 위세를 폄하하려는 노력도 가지가지군, 부언한 릴리언이 코웃음을 쳤다.
아무리 아힌이 정상이 아니라지만, 설마하니 그런 걸 가십이랍시고 떠들고 다니는 치들도 기가 찰 노릇이었다.
전혀 믿지 않는 릴리언을 마주한 발렌스 또한 후후, 가늘게 웃었다.
“그뿐인가요. 최근 저희 전속 의상가가 꽤 바쁘지요. 토끼의 의상을 맞춤 제작하느라.”
“……?”
“어머, 그러고 보니 벌써 건초를 주문할 시기가 되었군요.”
깜짝 놀라 입가를 가린 발렌스가 분주히 종을 흔들었다. 전속 시녀를 호출한 발렌스는 말 영토와 사슴 영토산 건초를 비교하며 우아하게 토론했다.
정원에 쉼터를 설치하여 토끼의 복지를 높이잔 주제가 화두에 올랐을 때, 쨍그랑, 릴리언은 그만 찻잔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 * *
밤하늘을 집어삼킬 듯한 만월이 떠올랐다. 침실 앞, 잠깐 경비 기사를 물린 아힌이 창틀에 걸터앉았다.
그의 눈앞에서 반투명한 봉투가 흔들렸다. 엔델루스에서부터 함께한 릴에게 전해 받은-정확히는 강탈한- 잿빛 가루.
그레이스가(家) 소속 주치의의 의견도 엔델루스의 의원과 다를 바 없었다. 비비에게서 약물 반응은 검출되지 않았으며, 내성의 가능성까지.
“의료 부서로 가져가서 분석하도록. 입단속 똑바로 하고.”
아힌은 주치의에게 가루가 든 봉투를 넘겼다.
“명 받들겠습니다.”
고개를 조아린 주치의가 속히 멀어졌다. 얼핏 안경 아래 눈에서 연구자 특유의 학구열이 스쳐 지나갔다.
“아힌 님.”
층계참을 지난 이브린이 아힌의 곁으로 다가섰다.
“말씀하신 대로 시종장에게 고릴라 님을,”
“잠시.”
이브린을 저지한 아힌은 한순간에 입가로 검지를 가져갔다. 수상쩍은 기척이 아힌의 등허리를 스산하게 만들었다.
검에 손을 가져가는 이브린을 뒤로한 그가 살그머니 침실 문에 귀를 가져갔다.
문을 사이에 두고 아힌과 비비가 귀를 맞댄 상태가 되었다.
갑자기 복도가 조용해지자 인상을 찌푸린 비비는 더욱 청각을 곤두세웠다.
그때였다. 아힌이 입구를 통통 두드린 것은.
“계속 엿들을 셈이라면 당근을 내밀어 주세요.”
난데없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침실 안쪽에서 애쉬의 기겁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문에 귀를 대고 엿듣던 비비가 바닥에 고꾸라진 탓이었다.
“영악하긴.”
입구를 서성이던 기척이 멀어졌음을 확인한 아힌이 입꼬리를 올렸다. 조막만 한 주제에 한시도 방심할 틈을 주지 않았다.
“주군께서 하실 말씀은 아니라 사료됩니다.”
“이브린, 넌 누구 편이지?”
“아힌 님의 충성스러운,”
“충견?”
“개에 비유하지 말아 주십시오.”
드물게 울컥한 이브린은 감정을 다스린 후, 한층 진지하게 말문을 뗐다.
“아힌 님, 이제는 알려 주십시오. 오두막 안에는 발도 들이지 못하게 하신 이유와, 그때의 여성분은 누구인지도.”
비비가 잠들어 있던 이틀 동안, 이브린은 오두막 바깥에서 릴과 정다운 나날을 보냈다. 팔자에도 없던 장작을 패고, 전령 매를 이용하여 업무를 처리하며.
은근슬쩍 오두막에 잠입해 보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호위 기사인 애쉬의 꼬리에 얻어맞아 쫓겨나고 말았다.
“달리 알려 줄 건 없지 않나.”
“…무슨.”
“너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잖아. 지난 며칠 동안 토끼님이 어디 있는지 한 번도 안 물은 걸 보면.”
태연자약한 아힌과 달리, 이브린은 그만 서류를 바닥에 와르르 떨어뜨리고 말았다.
“호들갑 떨지 말고 주워.”
“예.”
언제 그랬냐는 듯, 담담하게 서류를 주워 든 이브린이 약간의 상념에 잠겼다. 얼핏 보긴 했으나 하필 그런 얼굴이라니.
아무 데나 던져 놔도 톡 튈 듯한 외양이나 미려함은 둘째 치더라도. 맹수들의 섭식 욕구를 자극할 법한, 너무나도 초식계 수인다운 생김새가 문제였다.
그리고 그 토끼에게 유난히 집착하는 게 아힌이라는 미치광이-이브린의 시선-인 것이 두 번째 문제였고. 무미건조한 얼굴 위로 없던 측은지심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럼 토끼님이 드디어 인간화를 치른 겁니까?”
“글쎄.”
이브린의 불경한 생각은 꿈에도 모르는 아힌이 아랫입술을 쓸었다.
“확인했는데 열꽃 흉터가 없었으니, 아마 일시적인 현상일걸.”
열꽃 흉터는 인간화를 치른 모든 수인이 동일하게 가지는, 작은 꽃 모양의 상흔. 그러나 아힌이 확인했을 때, 비비의 목덜미는 아무것도 자리하지 않은 깨끗한 상태였다.
“도대체…. 이십 년 가까이 인간화를 치르지 못하다가 왜 이제야…. 신전에 가서 자문이라도 구하는 편이 낫지 않습니까?”
“그건 안 돼.”
단호한 거절을 접한 이브린은 곧 비비가 신전에서 달아났던 사건을 떠올렸다.
“그렇군요, 토끼님은 무신론자셨죠. 아니, 그보다는 어찌할 예정이신지요.”
“뭐를?”
“더 이상 비상식량이 아니니까요. 혹여 고용인들이 알게 되면 토끼님을 어떻게 설명하실 겁니까?”
고장 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맞는 것처럼, 이브린이 드물게 멀쩡한 질문을 던졌다. 다시금 창틀에 걸터앉아 밤을 올려다본 아힌이 심드렁하게 답했다.
“별거 있어? 토끼가 가끔은 덩치도 불어나고 하는 거지.”
“불어나도 너무 불어났습니다. 그런 변명이 통할… 통하긴 하겠지만요. 아무리 그래도 너무 터무니없는 주장은… 모두가 수긍하긴 하겠군요.”
아힌의 위치상, 설령 그가 토끼를 오리라 주장하더라도 고용인들은 수용할 따름이었다.
다만 약혼자 하나 없는 실정 속에서, 대뜸 아힌이 정체 모를 여성과 함께 다닌다면. 소문도 소문이고, 가문 소속 장로들까지 간섭해 올지도 몰랐다.
벌써부터 머리에 쥐가 나는 이브린에 비해 창밖을 바라보는 아힌의 표정은 너무도 잔잔했다.
언제 제 주인이 말을 들어 먹은 적이나 있었나, 근심을 덜어 낸 이브린은 덤덤히 품에 들고 있던 서류를 건넸다.
“탄생일 관련 서류입니다. 아, 그리고 룬 님이 큰 토끼님을 데려간 사건을 문제 삼지 않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별일도 아니었는데 뭐.”
“영토 간의 마찰을 염두에 두신 모양이군요, 감사합니다.”
서류를 받아 든 아힌이 대수롭지 않게 끄덕였다. 의외로 관대하게 넘어가는 그를 응시한 이브린이 첨언했다.
“그런데 어젯밤, 룬 님이 암살자들의 습격을 받으셨다더군요. 다행히 상처는 없으시답니다.”
“그거 끔찍한 일이군.”
“암살 길드에 의뢰하셨습니까?”
팔락팔락, 조용한 복도로 서류 넘기는 소리만이 퍼져 나갔다. 아힌의 침묵은 긍정이란 의미. 뒷짐 진 이브린은 사직서를 제출하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