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ymbiotic Relationship Between the Rabbit and the Black Panther RAW novel - Chapter (36)
토끼와 흑표범의 공생관계 8화(36/75)
모퉁이 너머로 텅 빈 복도가 길게 이어졌다. 검에서 손을 뗀 아힌은 찬찬히 주변을 훑었다.
“기우인가.”
지하 삼 층인 이곳에서, 증발하듯 사라지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좌우를 살핀 이브린이 부언했다.
“죄수의 기척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걸음을 옮긴 두 사람은 복도 중앙의 감옥 앞에 섰다. 철창 속 죄수는 최근 잡아들인,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살인마였다.
멍하니 허공에 머물러 있던 사시 눈이 아힌에게 고정됐다. 남자는 입매를 기괴하리만치 히죽 끌어 올렸다.
“궁금한 게 있어 보이시구만. 내가 알려 줄까?”
“그냥 입 닫아, 냄새나니까.”
삐딱하게 선 아힌이 방긋 웃었다. 휘어지는 눈매를 따라 남자도 홍소를 터뜨렸다.
“내가 많이 죽여 봐서 아는데, 반반하게 생긴 네놈은 딱 단명할 상이야. 그러고 보니 네놈의 아비도 단명했지 않나?”
발렌스 그레이스의 부군, 덧붙인 남자가 다리를 건들거렸다. 아힌은 일말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기대와 다른, 흔들림 없는 미소를 마주한 남자는 재미없다는 듯 혀를 찼다.
“나도 많이 죽여 봐서 아는데,”
천천히 다가선 아힌이 검지로 철창을 쓸었다. 손끝에 묵은 먼지가 묻어났다.
“네놈은 가벼운 주둥이 덕분에 사형이 당겨질 상이군.”
딱, 그가 검지와 엄지를 마찰하는 동시에 남자의 몸으로 지배계 페로몬이 스며들었다.
“꽤 오랫동안 고통스러울걸.”
남자는 전신을 덮치는 극통에 전율했다. 혈관 마디마디가 끊어지는 듯한, 차라리 고문이 나을 법한 형벌이었다.
흐그극- 기이한 비명을 토하는 그를 등진 아힌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새삼스러운 감각이었다.
강한 육체를 가진 죄수도 손쉽게 무너뜨리는 페로몬이건만, 비비의 페로몬을 누르기 위해선 혈관이나 호흡기를 통해야 했으니.
그것은 그만큼 비비의 페로몬이 월등하다는 반증과도 같았다.
“시간이 늦었으니, 바로 침실로 가시겠습니까?”
지하 감옥을 나선 이브린이 회중시계를 꺼내 들었다. 어느덧 시계 침이 자정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말끝을 흐린 아힌은 문뜩 코로 손목을 가져갔다. 감옥 특유의 눅눅한 냄새와 혈향이 느껴졌다.
이어서 그는 견장이 장식된 제복을 만지작거렸다. 피 냄새가 밴 재킷을 확인하자, 이따금 꽁무니가 빠져라 자신을 피하는 비비가 떠올랐다.
오늘도 피하려나. 기겁한 솜뭉치가 필사적으로 굴러다니는 모양이 아른거렸다.
“아힌 님, 안 가십니까?”
의문 섞인 물음에, 아힌은 불쑥 손목을 내밀었다.
“피 냄새가 너무 심한 듯해서.”
“매번 있는 일입니다만.”
이브린이 사무적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침실 방향을 잠깐 돌아본 아힌은 재킷을 벗고, 크라바트와 커프스 소매까지 풀어헤쳤다. 달빛 아래 흐트러진 차림새가 퍽 색정적이었다.
대뜸 탈의를 해 대는 그에게서 한 걸음 물러난 이브린이 입을 뗐다.
“…갑자기 옷은 왜 벗으시는지.”
“이브린, 네 침실로 가지.”
앞뒤가 생략된 말을 들은 이브린은 와르르, 그만 품 안의 서류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제 몸을 양팔로 감싼 그가 차분히 고개를 저었다.
“싫습니다.”
단정한 얼굴 위로 결연한 의지가 스몄다. 습관처럼 아첨하는 평소에 비해 이례적인 반응이었다.
“왜?”
“침실은 싫습니다.”
때마침 첨탑에 오른 경비 기사가 자정을 알리는 종을 울렸다.
댕- 댕- 청명한 종소리를 등진 두 사람 사이로 핑크빛 기류가 넘실거렸다.
뒤늦게 자신의 설명이 부족했음을 인지한 아힌은 진저리 치며 재킷을 입었다.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거지 같은 분위기였다.
* * *
결국 아힌은 다른 침실에서 목욕을 마친 후 의복도 갈아입는 수고를 거쳤다.
셔츠 차림으로 침실 앞에 멈춰 선 그는 두 명의 경비 기사를 빤히 응시했다.
거수경례를 마친 두 기사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정면만 주시했다. 간신히 무표정을 유지하는 것엔 성공했으나, 갑옷에 감춰진 등으론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힌 님의 시선이….’
‘설마, 설마, 설마.’
머릿속에서 온갖 절규가 메아리쳤다.
얼마 전, 웬 마구간지기를 데려온 아힌은 기사들을 향해 입에 지퍼를 채우란 신호를 보냈다.
마구간지기의 보라색 눈동자를 미뤄, 토끼와 동일인임을 어렴풋이 짐작한 그들은 아힌을 마주칠 때마다 눈에 띄게 긴장하곤 했다.
알아선 안 될 것을 알아 버린 걸지도 모르니. 무릇 예부터 윗사람의 기밀을 알게 된 자들의 목은 안전하지 못했다.
“거기.”
“예!”
대뜸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답해 버린 기사가 낭패 어린 낯을 했다. 딱히 신경 쓰지 않은 아힌이 손목을 들이댔다.
“어때.”
느슨한 움직임을 따라 경비 기사의 시선이 움직였다.
“예, …예?”
“무슨 냄새가 나지?”
“예?”
여전히 손목을 내민 상태인 아힌이 미간을 구겼다.
“‘예’밖에 말할 줄 몰라?”
“소, 송구합니다.”
냄새라니. 눈치를 본 경비 기사가 코를 킁킁거렸다.
“감히 말씀드리자면, 향료 냄새가….”
“그럼 됐어.”
그제야 만족한 아힌의 눈매가 둥글게 반달을 그렸다.
느긋하게 침실로 들어서던 그는 쾅, 돌연 빠른 속도로 문을 닫았다. 비비의 페로몬이 내부를 가득 채운 상태였기에. 감정이 지나치게 고조되었을 때나 흘러나올 법한 수준이었다.
“…비비?”
몸으로 스며드는 페로몬에 저항한 그가 텅 빈 침실을 둘러봤다. 쿠션에 있어야 할 비비가 보이지 않았다.
테라스로 나서자, 비비의 페로몬에 취해 대자로 뻗은 퀸이 시야로 들어왔다.
“어디 있어?”
곧잘 숨곤 하던 테라스 커튼 뒤에도 비비는 없었다.
책상 아래를 살핀 아힌은 비비가 한 번쯤 숨었던 장소를 토대로 수색을 시작했다.
욕실도 비었고. 드레스 룸으로 들어선 그는 차르륵, 옷걸이를 한쪽으로 밀었다. 옷걸이를 모두 밀어도, 탁상 밑에도, 책장 맨 아래 칸에서도 비비를 찾을 수 없었다.
‘밖으로 나간 건가.’
일순 사고가 마비된 아힌은 문고리를 돌리려다 멈춰 섰다.
페로몬이 분산되지 않은 채 계속 넘실거리는 걸 보아 침실에 없을 리가 없는데. 너른 침실을 돌아본 그는 단 한 곳, 비비가 한 번도 숨지 않은 장소로 걸어갔다.
바닥에 귀가 닿을 만큼 엎드린 아힌이 침대 아래를 들여다봤다. 기운 고개를 따라 은발이 살짝 흐트러졌다.
“-찾았다.”
붉은 눈이 밤하늘처럼 곱게 휘었다.
“이번 숨바꼭질은 조금 어려웠어, 기척을 죽일 줄도 알고.”
웅크려 있던 비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물기로 범벅된 얼굴을 마주한 아힌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울어?”
황급히 얼굴을 감춘 비비는 연신 눈을 비볐다. 하나 닭똥처럼 퐁퐁 샘솟는 눈물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와 봐.”
좁은 틈새로 뻗은 아힌의 팔은 비비에게까지 닿지 못했다. 되레 움츠린 비비가 몸을 물려 그의 손끝에서부터 멀어졌다. 어색한 거리감이 생겨났다.
“왜 그래.”
침대 아래를 들여다보던 아힌은 짐짓 눈썹을 들었다. 비비의 감정이 요동칠 때마다 페로몬이 소용돌이처럼 퍼져 나가고 있었기에.
자칫 서로의 페로몬이 충돌할지도 몰랐다.
아힌이 스스로의 페로몬을 단전 깊숙이 가두는 즉시, 비비의 페로몬이 먹이를 노리는 하이에나처럼 몸을 덮쳐 왔다.
무방비한 상태가 된 그는 나지막이 입술을 뗐다.
“비비-.”
어르듯 조곤조곤 이름을 부른 아힌이 다시금 침대 아래로 팔을 집어넣었다. 그러나 흠칫 떤 비비는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더 숨어들었다.
침대를 뒤집고픈 충동을 삼킨 아힌은 마른세수를 했다.
비비가 눈물을 보임으로써 흘러나온 페로몬을 접하면 기분이 붕 뜨곤 했건만. 지금은 손끝에서 멀어지는 비비의 모습이 묘하게 신경을 거슬렀다.
작은 앞발로 눈가를 찍어 가며 울음을 참는 꼴이 이상하게 심장을 옥죄었다.
본래라면 울다가도 송곳니를 보자마자 달려 나와서 차렷 자세를 취했을 텐데. 생소한 비비의 반응이 평소와 감정의 무게가 다름을 증명했다.
“…무슨 일인데.”
물론 비비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아힌은 그런 비비의 감정도, 생각도, 하물며 표정조차 읽을 수 없는 게 걷잡을 수 없이 답답했다.
애가 닳은 그가 여전히 침대 아래로 뻗은 상태인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나와 주면 안 돼?”
무심코 튀어 나간 애원조로 인해 비비의 몸이 엷게 진동했다.
앞발로 눈을 가린 비비는 도무지 눈물이 멎질 않자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엉망인 얼굴과 복받친 감정을 숨기기 위해 외려 더 깊숙이 들어갔다.
‘무리인가.’
작은 몸짓 하나도 놓치지 않고 바라보던 아힌은 야트막한 숨을 머금었다.
억지로라도 나오게 하는 편이 맞을까, 아니면 저대로 두는 편이 나을까.
이성은 전자가 맞다 주장하지만, 뚝 굳어 버린 손은 이성의 명령을 거부했다. 답지 않게 망설임을 이어 간 그가 눈을 깜박였다.
‘토끼는 널 의지하되 믿지는 않을 거야.’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비비가 침대 아래에 숨은 이유는, 나약한 면모를 아힌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임을.
생각해 보면 비비는 후 불면 굴러갈 것 같은 몸뚱이를 가진 주제에, 늘 약점을 보이지 않으려 애썼다.
응석을 받아 주는 사람 하나 없이 홀로 일어서야 하는 환경에서 자라왔기 때문이겠지. 어딘지 자신과 닮은 면모를 발견한 아힌은 기분이 묘해졌다.
조막만 한 새끼 토끼의 몸으로 버티는 뒷모습이, 마냥 약해 보이면서도 약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말없이 응시하던 그는 팔을 베개 삼아 비스듬히 드러누웠다. 이어서 자유로운 팔을 침대 밑으로 집어넣은 아힌이 손바닥을 펼쳤다.
톡톡, 손등으로 바닥을 두어 번 두드리는 소음이 울렸다.
“나오고 싶어지면 여기로 올라와.”
나직한 제안을 들은 비비의 귀가 까딱거리며 공중을 오갔다.
“기다릴게.”
중얼거린 아힌은 눈꺼풀이 무거움을 느꼈다. 스스로의 페로몬을 억누른 탓에, 비비의 페로몬에 속절없이 젖어 든 실정이었다.
타인의, 하물며 토끼의 페로몬에 두 번이나 취한 사실이 어이가 없으면서도 신선했다. 실없이 웃은 그가 눈을 나른하게 떴다.
“바닥에 눕는 것도 생각보다 나쁘진 않네.”
밀려드는 수마에 저항한 아힌의 눈으로 엷게 핏대가 섰다.
고요한 새벽이 찾아왔다. 잠들지 않으려 버티고 있으니, 복받친 감정이 진정되었는지 비비의 페로몬이 조금씩 옅어지기 시작했다.
한참을 어둠 속에 숨어 있던 비비가 쭈뼛쭈뼛 고개를 들었다. 모른 척한 아힌은 슬쩍 눈을 감았다.
사부작거리며 움직이는 기척이 그의 신경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이윽고 아힌의 검지 끝으로 말랑한 앞발의 감촉이 닿았다. 하찮을 만큼 작고 둥근 솜뭉치였다.
일어날 타이밍을 놓친 아힌은 손끝에 닿은 온기에 집중했다. 얼마나 울었는지 앞발마저 축축이 젖어 있었다.
순간 그는 얹힌 것처럼 명치가 아렸으나 그저 잠든 척을 지속했다.
왜 울었을까. 말 못 하는 처지에 억울한 일이라도 당했을까. 아니면 악몽이라도 꿨나. 머릿속에서 오만 질문이 엉켰다.
견딜 수 없는 의문에, 벌떡 일어나고픈 충동을 참은 아힌이 숨을 골랐다.
손끝을 문지르는 앞발의 감촉이 그의 인내심을 부추겼다. 겨우 나왔는데 다시 멀리 달아날까, 혀끝을 맴돈 질문이 목구멍 너머로 사라졌다.
생각하면 언제나 그랬지 않나. 몸뚱이가 부스러기만큼 작아서, 정말 부스러질까 매번 아무런 추궁도 못 한 채 적당히 넘어간 게.
맞닿은 온기를 느끼고 있자니, 아힌은 그제야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벌써 몇 번이나 반복된 상황이었다. 자꾸만 사라지는 비비를 성가시다 생각하면서도 찾아 나서는 것이.
수상한 시계 토끼를 쫓아간 소녀가 되돌아갈 수 없는 굴에 뛰어드는 어떤 동화처럼. 정신 차려 보면 아힌의 발은 토끼의 자취를 따라가고 있었다.
이곳은 약한 자는 죽는 장소란 소리나 지껄인 주제에. 실정은 토끼가 침대 아래에 숨은 사실 하나로 노심초사하는 꼴이었다.
아힌의 이성이 점점 미어졌다. 비비의 페로몬을 어느 정도 몰아내긴 했으나, 여전히 머리가 열에 들뜬 듯 묵직했다.
이내 그의 얼굴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심란한 마음을 진정시킨 비비가 앞발로 아힌의 미간을 꾹 눌렀다.
‘자나?’
깊이 잠들었는지, 나른하게 뒤척인 아힌은 머리를 받친 팔에 뺨을 비볐다.
흐트러진 은발을 바라보던 비비는 이상하게 가슴 한편이 묵직해졌다.
버림받기 직전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을 찾아 준 사람이 없는데. 왜 너는 항상 아무렇지도 않게 내가 있는 곳을 찾아내는지.
‘…왜.’
그럼 자꾸 의지하고 싶어지잖아. 욱여넣은 눈물이 다시금 터지려 하자, 그녀는 메인 목을 억지로 삼켰다.
어느덧 흐린 하늘에서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습기 섞인 공기가 비비를 상념 속으로 이끌었다.
‘비비의 부모는 생각 이상으로 나쁜 놈들일지도 모르겠어.’
고개를 저어 잡념을 날린 비비는 테라스를 돌아봤다.
후드득, 빗소리가 거세졌다.
자는 시늉을 이어 가던 아힌은 비비가 어딘가로 움직이자 실눈을 떴다.
빠르게 뛰어 테라스로 이동한 비비는 곯아떨어진 퀸을 찰싹 때렸다. 단잠에 취한 퀸은 입맛을 다시며 몸을 뒤척였다.
‘퀸, 일어나!’
비 맞으면 감기 걸려. 엄하게 호령한 비비가 재차 퀸을 후려쳤다. 난데없이 날벼락을 맞은 퀸이 부스스하게 몸을 일으켰다.
‘밉살맞긴 하지만….’
퀸이 아니었다면 그런 진실을 마주하지도, 감쪽같이 감옥을 벗어날 수도 없었으리라 생각한 비비가 지긋한 시선을 보냈다.
정신을 차린 퀸은 평소와 같은 오만한 눈빛으로 화답했다.
전우이자 숙적을 마주하듯, 오묘한 유대감을 비치는 새끼 토끼와 매를 바라보던 아힌이 급히 눈을 감았다. 테라스에서 나온 비비가 부지런히 이동한 탓이었다.
두 번째로 도착한 곳은 소파에 걸쳐진 담요 앞이었다. 망연히 올려다본 비비는 곧 담요를 집어 안간힘을 다해 당기기 시작했다.
끙, 콧수염이 파들거리며 떨렸다. 담요를 끌어 내리긴커녕 사탕 껍질처럼 칭칭 휘감기는 모습에, 웃음을 터뜨릴 뻔한 아힌이 이를 콱 깨물었다.
씨름은 한참이나 지속되었다. 결국 담요를 가져오는 것에 실패한 비비가 다시금 아힌의 앞에 가서 섰다.
‘추울 텐데.’
이걸 깨워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자신의 페로몬으로 인한 것이니 깨우려면 퀸처럼 막무가내로 때려야 할 텐데, 그러자니 후환이 두려웠다. 조각 같은 얼굴에 흠집을 내는 건 죄악에 가깝기도 하고.
어슬렁거리며 주변을 돌던 비비는 문득 조심스레 아힌의 입술을 앞발로 벌렸다. 송곳니를 보자마자 입술을 닫은 그녀가 짐짓 이마를 짚었다.
‘다시.’
심호흡을 한 뒤, 눈을 부릅뜬 비비는 재차 그의 입술을 벌렸다.
영문 모를 기행이 이어지는 한편, 아힌은 입술을 간질이는 감촉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다.
‘비비…. 제발….’
살다 살다 토끼에게 이 검진을 다 받아 보고. 그의 미간 위로 야트막한 주름이 패었다.
이러한 속사정은 꿈에도 모른 비비가 눈앞의 송곳니를 뚫어져라 주시했다.
잠깐 기절하고 싶긴 하지만, 역시 예전만큼 두렵진 않았다.
지하 감옥에서 본 잔인한 모습과, 이렇게 바닥에 누워 기다려 주는 느슨한 모습 중 어떤 게 그의 진짜 면모일지.
입술을 가지런히 닫아 준 비비는 목깃 사이로 훤히 드러난 아힌의 목에 몸을 걸쳤다.
시간이 지날수록 공기가 노곤하게 가라앉았다.
목이 따듯해야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지. 끔벅끔벅 졸던 비비는 조금 더 몸을 활짝 펼쳐 아힌의 목을 보호했다.
늘 두렵고, 어렵고, 의뭉스럽지만….
자신이 사라지면 찾아 주는 사람은 아힌뿐이란, 고작 그 사실 하나가 견고한 겁쟁이의 벽을 무너뜨렸다.
두려움 위로 낯선 감정이 덧대어졌다. 유리처럼 얄팍하면서 깨지기 쉬운 종류. 본능적으로 득은 아닐 거라 생각한 비비는 억지로 감정의 싹을 내리눌렀다.
유독 감정의 무게가 버거운 새벽이었다.
* * *
침대 아래에 숨은 이후, 며칠 동안은 거의 환자에 가까운 취급을 당했다.
그날 운 일을 해명하긴 불가능했기로서니…. 주치의가 수시로 드나들었으며, 아힌은 이따금 나를 지그시 노려보기도 했다.
왜 그러냐 앞발을 으쓱이면 아무것도 아니라며 앵무새처럼 답하고.
하여간 알 수가 없어. 투덜거린 나는 아침부터 분주한 침실을 돌아봤다. 넓어서 비어 보이기까지 하던 침실이 시중을 드는 고용인들로 가득했다.
오늘이 토끼 영토로 출타를 나서는 날임을 짐작한 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나한테는 숨기겠다 이거지.’
내게는 가문의 업무라 둘러댄 걸 보아, 나를 토끼 영토에 데려가지 않을 심산이 분명했다.
‘어쩐다….’
타 영토에 방문하는 일정에 새끼 토끼를 데려가긴 애매하긴 하지. 그러나 굳이 숨기려 드는 아힌의 태도도 심히 수상쩍었다.
턱을 매만지는 그때, 바라의 애정 공세를 무시한 애쉬가 내 곁으로 다가와 몸을 치대었다.
외양만 흉악한 순둥이를 쓰다듬어 준 나는 애쉬가 등에 멘 다갈색 배낭을 확인했다. 속에 든 페레니움과 맹수 퇴치제, 혹시 모를 여분의 옷가지까지.
내 등에도 메이미가 메어 준 비슷한 배낭이 자리했다. 내용물은 고작해야 비상 건초였지만.
필수품을 꼼꼼히 되살핀 나는 간이 행거 앞으로 다가섰다. 옷걸이에는 아힌이 입을 예정인 프록코트가 걸려 있었다.
‘메이미, 부탁해.’
메이미의 손길을 빌린 내가 이제는 안락하기까지 한 주머니 속에 자리를 잡았다.
편히 몸을 뉜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지난 열흘은 외면과 직면, 원망의 반복이었다.
지하 감옥에서 엿들은 아힌의 가설을 외면했다가, 곰곰이 되짚었다가. 그러다가 아무것도 하기 싫어져 널브러지기도 하고. 그럴 때면 주치의가 달려와 몸을 뒤집어 진찰하곤 했다.
수없는 고민도 거쳤다. 가문에선 내가 죽었으리라 여기고 있을 테니, 그저 이렇게 묻어 가는 게 마음 편하지 않을까 하는….
하릴없이 고민만 하다 내린 결론은, 진실을 모르면 인간화든 뭐든 어느 하나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나 아버지를 만나서….’
확인하는 거야. 제대로 된 진실을 마주하고, 할 수 있는 것부터 해 나가기로.
이대로 아힌이 주는 향락과 사치에 찌들면 배부른 짐승이 될 뿐이었다.
고로, 토끼 영토 수장의 탄생 연회란 일정은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아힌이란 방패를 차고 래비안가의 일원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는, 두 번은 오지 않을 기회.
어차피 아힌이 내 가문이 래비안가(家)라는 사실을 알아내는 건 시간문제였고,
‘이미 가문을 알고 있을지도 몰라.’
나를 두고 가려는 듯한 태도를 보아, 어떤 시커먼 속셈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번만은 내가 흑표범을 이용해 주리라 결심한 나는 배낭을 단단히 동여맸다. 갑자기 닥쳐 온 일이라 세밀한 계획 따위는 없었기에, 긴장으로 심장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얘, 주머니 부분이 이상하게 불룩하지 않아…?”
“그러네? 행커치프를 미리 넣어 두셨나.”
마침 가까이서 고용인들의 숙덕이는 소음이 들렸다.
“왜 그래?”
“아, 아힌 님.”
자박자박, 아힌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어떻게든 따라붙기로 결심한 나는 주머니에서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나도 데려가 줘.’
등의 배낭을 보여 준 내가 여정 준비도 끝마쳤음을 표명했다. 빤히 마주하던 아힌은 말없이 나를 주머니에서 꺼내어 내려 뒀다.
‘데려가 달라니까.’
평소에는 제멋대로 잘만 데려갔으면서. 바짓단을 붙들었지만, 그는 모른 척 발을 살짝 흔들어 나를 떨궈 냈다.
“곧 출발하지.”
꿋꿋이 무시하는 태도를 미뤄 절대 데려가지 않을 셈인 모양이었다. 덩달아 고용인들마저 흘끔거리며 외면을 일삼았다.
‘이거 봐.’
이목을 끌기 위해 물구나무도 서 보고,
‘어흑.’
죽은 시늉을 하며 쓰러지고,
‘비켜!’
가방에라도 들어가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한 시녀가 쿠션으로 막은 덕분에 외려 튕겨 나갔다.
그렇게 모두가 공기만도 못한 취급을 했다.
조급해진 내가 최후의 보루인 이브린에게 달려갔다.
‘이브린, 아힌 좀 설득해 봐.’
신발 앞코에 올라탄 나는 간절히 신호를 보냈다. 난처한 기색을 띤 이브린이 입 모양으로 의사를 전했다.
“토끼님, 나중에 제 주머니 속에 몰래,”
“이브린.”
읊조린 아힌은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시선을 보냈다.
“질척거리셔도 소용없습니다, 토끼님. 이것 놓으십시오.”
단박에 굴종한 이브린이 언제 그랬냐는 듯 나를 도외시했다.
‘다들 너무하잖아…!’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항의했으나, 누구 하나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너른 침실이 고요 속에 잠겼다.
“이만 가지.”
이윽고 아힌의 낮은 음성이 정적을 깨뜨렸다.
더 이상의 기회는 없음을 예감한 나는 서둘러 침실 입구를 가로막았다. 우뚝 멈춰 선 아힌은 요요히 경고했다.
“비켜.”
양발을 펼친 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몸을 굽혀 앉은 아힌이 손가락으로 나를 싸늘하게 밀어냈다.
“비키라니까.”
‘싫어.’
이번만은 굴하지 않은 나도 굳건히 제자리를 지켰다.
기 싸움에 가까운 신경전이 극으로 치달았다. 꼴깍, 뒤편에 선 고용인들 사이로 침 삼키는 소음이 울렸다.
혹시 발에 차이는 건 아닐까. 눈치를 살핀 나는 아힌의 손바닥 위로 슬그머니 엉덩이부터 걸쳤다.
‘아힌, 우리….’
곧 손바닥에 완전히 자리 잡은 내가 절절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같이 가자.’
그러나 결코 눈을 맞추지 않은 아힌이 자비 없이 나를 밀어냈다. 퉁, 손가락질 한 번에 내쳐진 나는 일부러 과장스럽게 바닥을 굴렀다.
“문 열어.”
매정하게도, 관심조차 주지 않은 그가 시종 두 사람에게 눈짓했다.
‘잠깐!’
충격을 딛고 일어난 내가 문을 열지 못하게끔 반대편으로 밀었다. 문을 열면 튕겨 나갈 위험까지 불사한 몸부림이었다.
“토끼님, 그게, 비켜 주셔야···.”
문고리를 붙든 시종들은 이도 저도 못 한 채 동공만 떨었다. 두려움을 삼키며 묵묵히 버티는데,
“아, 진짜-….”
등 뒤로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심스레 고개를 틀자, 일순 어쩔 줄 모르겠단 표정을 비춘 아힌이 손으로 눈가를 덮었다.
“적당히 해.”
짜증스러운 어투와 달리 낮은 목소리가 답지 않게 유순했다.
제가 낸 음성이 스스로도 당황스러운 듯, 휙, 아힌은 등 돌려 표정을 감춰 버렸다. 일순 침실이 싸한 정적 속에 잠겼다.
‘…아힌?’
경악과 기함 사이, 덩달아 당황한 나는 아힌의 얼굴이 보이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하나 아힌은 그마저도 허용치 않으며 반대편으로 몸을 틀었다.
따라가면 돌고, 또 돌고. 물레방아처럼 돌고 돌았다.
끈질기게 추격한 나는 결국 아힌을 벽으로 밀어붙이는 것에 성공했다. 궁지에 몰린 그는 끝끝내 등을 보이며 벽에 이마를 묻었다.
‘나 좀 봐.’
슬그머니 다리 사이로 들어간 내가 고개를 길게 뺐다.
딱- 마침 아래를 내려다보는 중인 아힌과 시선이 정통으로 마주쳤다. 늘 날 서 있던 눈동자가 허술하게 느껴진다면 착각일까.
‘어쩌면….’
튼튼한 군함도 풍랑엔 흔들릴 수밖에 없는 법. 어찌 되었든 아힌의 견고함이 조금이나마 흔들렸음을 눈치챈 내가 번쩍 두 발로 섰다.
‘자!’
이 비비 님을 모셔갈 기회를 주지.
곧 아연히 내려다보던 아힌에게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마른세수를 한 그는 양손으로 조심스레 나를 집어 들었다.
“왜 이렇게 달라붙어.”
허술한 기색은 어느덧 가면 같은 미소에 가려 사라진 후였다.
“여태껏 내 출타에는 관심도 없었으면서.”
그럴 리가, 예전부터 내 취미는 너랑 외출하는 거였는데. 나는 진정성을 담아 힘 있게 앞발을 그러쥐었다.
흐응, 퍽 수상쩍은 콧소리를 흘린 아힌이 나를 높이 들어 올렸다.
“추궁을 할 수도 없고.”
대답을 하지도, 할 수도 없는 내가 배낭을 동여매며 의지를 표명했다. 부담스러워질 때까지 빤히 올려다보던 그는 눈가를 반달로 접었다.
“비비.”
어르듯 나른한 부름이 귀를 들쑤셨다.
“나 가지 말까?”
쿵, 곤두박질친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누가 가지 말랬나, 같이 가잔 의미였지…. 한순간에 지금까지의 담대함은 사라지고, 낯가림만 남은 나는 발을 꼼지락거렸다.
“내가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괜히 시선을 굴리던 내가 하는 수 없이 아힌이 원하는 듯한 긍정의 대답을 보였다. 앞발로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그와 동시에 아힌의 입가로 더없이 무해한 웃음이 걸렸다. 긴 속눈썹이 눈살에 접힐 만큼 화한 미소였다.
“이브린, 붙들고 있어.”
그리고 나는 인지할 겨를도 없이 이브린의 품으로 옮겨졌다. 양팔로 나를 감싸 안은 이브린이 눈으로 아힌을 좇았다.
“아니, 아힌 님. 마차로 가시는 거면 보좌하겠습,”
문을 연 아힌은 여태껏 본 모습 중 가장 빠르게 침실을 나섰다. 쾅, 쫓아가지 못하도록 도로 문을 닫는 것을 잊지 않은 채. 치밀한 몸놀림이었다.
‘무슨….’
굳건히 닫힌 문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같이 가는 거 아니었어?’
데려가 줄 것처럼 웃어 놓고선 이렇게 도망친다고?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내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잠시 후, 헛기침을 한 이브린이 차분히 설명했다.
“안타깝지만, 애당초 아힌 님께선 토끼님을 데려갈 생각이 없으셨습니다. 토끼님이 엊저녁에 배낭을 싸기 시작했을 때부터요.”
뭐야, 정말…. 나를 꼭 떼어 놓고 가야 하는 이유는 또 뭔데. 배신감과 실망으로 인해 콧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