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ymbiotic Relationship Between the Rabbit and the Black Panther RAW novel - Chapter (38)
토끼와 흑표범의 공생관계 10화(38/75)
깊이 잠든 바라는 경계의 숲에 서식하는 흑표범들에 의해 옮겨졌다.
돌아와서 호되게 응징하겠노라. 후일을 기약한 나와 애쉬는 어쩔 도리 없이 마니언츠가(家)의 마차에 신세를 지게 되었다.
덜컹덜컹, 경계를 넘은 마차는 어느덧 토끼 영토 수도를 지나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아힌의 마차는 나타나질 않으니. 의도치 않게 술래잡기의 술래가 되어 버린 험난한 여정이었다.
마차 쿠션에 얌전히 앉은 나는 몰래 창밖을 흘끔거렸다.
토끼 영토 특유의 편평한 지붕. 밖을 제대로 볼 순 없지만, 드문드문 다홍색 지붕이 줄을 이루는 풍경이 보였다.
“바깥, 볼래요?”
창을 통해 행상인의 육포를 구입하던 룬이 대뜸 물었다. 다급히 시선을 내린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오는 내내 황금색 눈동자가 내게 따라붙고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자요.”
순식간에 커다란 손이 나를 창틀 주변으로 들어 올렸다. 본의 아니게 손바닥에 안착한 나는 무심결에 창밖을 돌아봤다.
그곳엔 토끼 영토의 전경이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토끼 수인들도, 늘어진 청과물 상점도. 거의 흑백 그림으로만 봐 온 장면 위로 색채가 덧대어졌다.
“토끼 수인은 당근 요리를 즐긴다는 게 진짜예요?”
밖을 응시하던 내가 기가 찬 눈빛을 했다. 사자 수인이라고 고기만 뜯지는 않잖아?
“고기, 꽤 좋아하는데.”
용케 의사를 알아들은 그가 즉답을 내뱉었다. 괜히 물었다. 애써 룬의 입술 사이에 자리한 육포를 외면한 나는 창틀에 턱을 걸쳤다.
“초식계 영토가 평화롭긴 하네요. 원래 이곳에 살았던 거 아니에요? 발렌스 수장님의 말로는 그레이스가 그쪽을 주워 왔다던데.”
하암- 길게 하품한 그의 졸음 섞인 음성이 이어졌다.
“납치당한 건 아니죠?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니, 혹시 입막음을 당한 거면 꼬리를 흔들어 봐요.”
‘조금쯤은 정성을 담아서 묻는 건 어때.’
나는 허한 마음으로 룬을 곁눈질했다.
웃긴 남자였다. 요 몇 시간 내내 무기력하다가, 육포를 구입할 때만 빛나는 눈을 하고. 궁금한 건 재깍재깍 묻는 언변도 여전했다.
만사 귀찮은 듯한 자와 함께 있으니 긴장한 내가 바보 같을 지경이었다.
“룬 니임…. 혼잣말만 하지 마시고 이쪽 좀 봐주십시오.”
나란히 바깥을 구경하는 와중, 뒤에서 레스틴의 울먹이는 음성이 울렸다.
“어떻게 꾸며도 도저히 애완용으로는 보이지 않는데요.”
“알아서 좀 하지, 뭐가 문제야?”
“아니이- 이 흑표범의 생김새를 좀 보십시오. 누가 봐도 야생의 포식자 아니냐고요. 절대 저택 통과 못 합니다, 이건 글렀어요.”
룬처럼 왼뺨이 부풀어 오른 레스틴이 항변했다.
도대체 룬의 누이는 어떤 분이기에 둘의 뺨을 저 지경으로 만들었을까.
고뇌한 나는 자연스레 레스틴과의 씨름이 한창인 애쉬를 내려다봤다.
머리에 빨간 보자기를 두른 애쉬는 확실히 반려동물보단 피를 뒤집어쓴 야생 짐승… 에 가깝긴 했다.
해맑게 고개를 갸웃거리는 애쉬를 다독여 준 내가 이를 갈았다.
‘아무리 그래도 애한테 글렀다니.’
조금 빈정이 상했으나, 일단은 신세를 지는 입장이기에 화를 꾹 내리눌렀다.
레스틴은 바늘에 찔려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것 같은 인상에 비해, 한껏 예민한 새끼 고라니처럼 굴고 있었다.
“자다 말고 마차에서 튀어 나가시더니, 지금은 산만 한 흑표범을 새끼 고양이처럼 보이게 만들라지를 않나. 왜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하는 수 없잖아, 수장의 저택에 들어가려면 애완용이라 우기는 수밖에.”
청각이 좋은 탓에 레스틴의 카랑카랑한 따짐이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귀를 반으로 접자, 육포를 입에 문 룬은 내 귀를 다른 육포로 덮어 줬다.
물론 소음 차단은 전혀 되지 않은 채, 나와 애쉬를 어떻게 수장의 저택에 들일지에 대한 토론이 지속됐다.
“지난번에 레이먼 가주도 육식동물을 데려오지 않았나?”
“육식동물이 맞긴 하지만 그건 귀여운 족제비였죠. 그냥 길가에 내버려 둡시다. 저런 들짐승을 데리고 가면 다른 초청객들이 기겁을 할 거라고요.”
레스틴의 언사가 점점 격해지자, 부르르 떠는 내 눈치를 살핀 룬이 주장했다.
“…이 흑표범도 가끔은 귀엽던데.”
“흑표범이라면 치를 떨 땐 언제고, 눈이 삐셨습니까? 저 골격을 보고도 그런 말씀이 나와요?”
저 사자는 진짜 안 되겠다. 애쉬, 네 골격 맛 좀 보여 줘.
지시에 따라 보자기를 벗어던진 애쉬는 곧장 꼬리로 레스틴을 후려쳤다. 마차 밖으로 새된 비명이 메아리쳤다.
* * *
일렁이는 촛불이 아힌이 머무는 손님방을 밝혔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밤하늘이었다. 사각사각, 서류 위를 배회하던 아힌의 펜대가 뚝 멈췄다.
간이 책상에서 일하던 이브린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전령 새라도 기다리십니까? 따로 전달받을 서신은 없는 걸로 압니다만.”
질문에 대한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뒤늦게 정답을 찾아낸 이브린이 고개를 들었다.
“아, 저택을 나서기 전에 토끼님께 서신을 쓰라고 말씀하셨었죠. 그걸 기다리시나 보군요.”
“-딱히.”
그런 사람이 일 분에 한 번씩 창가를 살핍니까. 새침 떠는 아힌을 마주한 이브린의 무표정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비비, 하루에 한 번은 서신을 쓰도록 해.’
마차에 오르기 직전, 아힌이 비비에게 고지하긴 했지만…. 비비는 어디 백 년 묵은 달관한 토끼처럼 한 귀로 흘려들었으니. 결코 서신을 받아 볼 수 없을 거라 결론지은 이브린이 첨언했다.
“서신은 제가 대신 받아 둘 테니, 슬슬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혼자 자기 싫은데.”
“옛날처럼 자장가라도 불러드릴까요?”
어린 날의 이브린은 열정 가득한 새싹 보좌관이었다. 일정의 마무리랍시고, 머리맡에서 감미로운 자장가를 들려주던 나날을 떠올린 아힌이 신경질적으로 턱을 괬다.
“너 음치잖아.”
“간혹 잘 불러질 때가 있습니다.”
“그럼 다음에 비비한테나 들려줘.”
귀를 반으로 접을걸, 비뚤게 웃은 아힌이 펜대로 손장난을 쳤다. 모로 기울인 고개를 따라 은발이 피부 위로 미끄러졌다.
비비와 하루도 빠짐없이 잠을 청한 지도 벌써 반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다.
비비가 없다는 것은, 지난 몇 달 동안 아힌의 밤을 채워 준 미미한 치유계 페로몬도 없다는 의미. 억눌러 둔 방대한 페로몬이 뱀 기어가듯 아힌의 몸을 유영했다.
욱신거리기 시작한 가슴께의 고통을 누른 그는 감흥 없이 펜을 굴렸다.
퍽 무료해 보이는 아힌을 응시하던 이브린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렴풋이 밤하늘에 새의 형체가 떠올랐다.
“아무래도 토끼님은 아힌 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모양입니다.”
튕기듯 몸을 일으킨 아힌이 창문을 열어젖혔다. 푸드덕, 날아든 전령 새가 창틀에 안착했다.
‘힐라?’
아힌의 눈에 작은 의혹이 스몄다. 다리에 서신 주머니를 묶고 있긴 하지만, 퀸이 아닌 발렌스의 수리부엉이였다.
“퀸은?”
샛노란 눈을 깜박인 수리부엉이가 고개를 기울였다.
‘어머니가 대신 서신을 부쳐 준 건가.’
어차피 비비는 발렌스와 밤낮을 함께할 테니 딱히 이상할 건 없었다.
작은 의문을 미뤄 둔 아힌은 한 통의 서신을 꺼내 들었다. 일정 간격으로 꾹꾹 찍힌 정갈한 발자국을 보아, 비비 외에는 아무도 작성할 수 없는 발 글씨였다.
“…….”
서신을 펼친 그는 못 박힌 듯 한참을 응시했다.
호기심에 어깨너머로 내용을 확인한 이브린이 숨을 삼켰다. 짧은 단어 속에 그간 비비의 억누른 속마음이 담겨 있었기에.
[또라이]잔잔한 눈동자 위로 파문이 일었다. 그 누구도 감히 아힌의 면전에 대고 말하지 못한 속어였다.
느리게 눈을 깜박인 아힌은 여러 번 서신을 뇌까렸다.
“…잡아먹어 달라는 간접적인 표현인가?”
이브린은 경련하는 입꼬리를 조심스레 가렸다. 은근한 기대가 산산조각 난 주인이 내심 통쾌하면서도 안쓰러웠다.
“기다린 보람이 있군요.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게끔 만드는 유익한 서신입니다.”
“입.”
“예.”
종이를 도로 접어 속주머니에 넣은 아힌이 책상에 자리를 잡았다. 답신을 작성하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푸드덕, 답신을 받아든 수리부엉이가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그럼 기대에 부응해 드려야지.”
재회하면 또라이다운 면모를 속속들이 보여 주리라. 다짐한 아힌은 멀어지는 수리부엉이를 배웅했다.
같은 시각, 룬의 마차.
이러한 정황은 꿈에도 모르는 비비가 퍼뜩 두 발로 섰다. 동물적 감이 위험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갑자기 몸은 왜 떨어요. 추워요?”
룬은 연신 두리번거리는 비비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날이 쌀쌀해져서 그런가. 손수건에 파고든 비비는 웅크린 채 불안에 떨었다.
‘불길해.’
이상하리만치 오한이 밀려드는 저녁이었다.
* * *
밤바람에 역행하여 달리던 마차가 점차 속도를 줄였다.
토끼 영토 수장의 저택. 곧 바깥에서 경비병들의 정중한 음성이 들려왔다.
“마니언츠가(家)의 귀인을 뵙습니다.”
애쉬의 품에 기댄 룬은 속히 나를 안주머니 속에 숨겼다.
“실례지만 신분 패와 초청장을 부탁드립니다.”
달칵, 문이 열리는 소음 이후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기사들이 할 말을 잃은 모양이었다.
룬은 나름 동물 애호가를 연출할 심산이었겠지만, 아마 저들에겐 나사 빠진 맹수계 귀족으로 보이지 않을까.
‘입에 문 육포부터 빼지.’
애당초 나란히 왼뺨이 부푼 룬과 레스틴의 행색부터 문제라면 문제였다.
안주머니가 숨 막혔던 나는 몸을 살짝 꿈틀거렸다. 아흑, 간지러움에 몸을 비튼 룬이 내가 고개를 뺄 수 있도록 도왔다. 기사들에겐 보이지 않는 사각이었다.
실실거리는 룬을 떨떠름하게 훑은 기사는 다시금 마차에 새겨진 가문의 문양을 확인했다.
룬, 문양, 신분 패. 미친 듯이 번갈아 확인한 기사가 쩔쩔매며 고개를 조아렸다.
“루, 룬 마니언츠 님을 뵙습니다. 몹시 송구하나, 그, 흑표범은 어떤….”
“이해해 주면 좋겠군. 자식과 같은 아이라, 오래 떨어져 있을 수가 없어서 말이지.”
기사들의 시선은 오로지 빨간 보자기를 두른 애쉬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일단은 그들도 토끼 수인인 만큼 육식동물이 꺼림칙한 모양이었다.
‘그만 좀 꼼지락거려요, 간지러워.’
속삭인 룬이 몸을 비틀었다.
“룬 님께서 긴 여정으로 인해 피로해 하십니다.”
혹여 기사들이 반려의 의사를 뱉을세라, 선수 친 레스틴이 각본대로 애쉬에게 눈짓했다.
“자, 경례.”
착, 애쉬는 앞발을 이마 부근으로 가져갔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각 맞춘 거수경례였다. 기사들은 반사적으로 손날을 어정쩡하게 치켜들었다.
“보시다시피 순하고 영리한 아이죠.”
“부, 부디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송구하나, 육식동물의 동행은 우선 상부에 보고를….”
“저택에 들어가면 철제 목줄을 걸어 두죠. 그리고 초청장에 초청객 이외의 동행이 세 명까지 가능하다고 명시되어 있으니, 이견이 있으시면 말씀 주십시오.”
정색한 레스틴의 금안이 매섭게 빛났다.
기사들은 어찌할 도리 없이 입만 뻐끔거렸다. 동행인에 동물은 포함되지 않는다며 말하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럼 이견은 없으신 것 같으니, 이만.”
레스틴은 문이 닫힐 때까지도 뚫릴 듯한 눈길을 보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방도가 떠올랐다더니 권력으로 진상을 부리는 거였나 보다.
덜커덩, 다시금 움직인 마차는 별다른 장해물 없이 저택 초입을 통과했다.
‘드디어….’
앞발로 창틀을 짚은 내가 고개를 내밀었다. 우거진 나무와 일정 간격으로 세워진 동상을 지나자 돔형의 저택이 드러났다.
아힌이 있고, 진실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곳. 입안이 모래알 굴러가듯 바싹 메말랐다.
* * *
레스틴은 우리 때문에 위가 아프다 중얼거리면서도 훌륭한 뒤치다꺼리 경력을 선보였다.
덕분에 룬의 침대에 누운 애쉬는 배부르고 등 따듯하게 숙면을 청했다. 제 딴에는 중요한 임무라 여겼는지, 고집스럽게 배낭을 풀지 않은 상태였다.
편히 자도 괜찮을 텐데. 동산만 한 배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광경을 보던 나는 앞발을 내려다봤다.
‘페로몬을 조준하는 방법.’
바라에게야 얼떨결에 성공한 거지만, 잘만 익히면 웬만한 위험에서 벗어나는 게 가능했다.
‘이거였나?’
두 발로 선 나는 앞발을 사선으로 휘둘렀다. 높이 치켜올려도 보고, 잽을 날리듯 뻗어도 보고. 다행히 앞발에서 페로몬이 쏘아지는 듯한 감각만은 선명했다.
“달밤에 체조라도 하는 거예요?”
이게 그렇게밖에 안 보여? 가자미눈을 한 내가 소파에 드러누운 룬을 노려봤다.
“너무 노려보진 마요. 어차피 시간도 늦었고, 내일 아침은 그레이스에게 보내 드릴 테니 오늘은 저랑 놀죠.”
우리에게 침대를 양보한 그는 배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다리를 흔들어 댔다. 팔걸이에 걸친 긴 다리가 달랑달랑 흔들렸다.
‘차라리 우리가 소파를 쓰는 게 나을 텐데.’
폭 한숨을 내쉰 나는 침대 모서리로 걸어가 그와 마주 앉았다.
아까부터 사람으로서 대해 주는 룬의 배려가 꽤나 기분이 묘했다. 처음부터 나를 수인이라 의심하고 있었으니 그럴 만하기도 하고.
“그래도 오는 동안 그레이스의 냄새가 좀 날아가서 살 만하네요. 코가 썩을 것 같았는데.”
‘…코가 썩다니.’
앞발에 코를 가져가 봤자 군내밖에 나지 않았다. 킁킁거리던 나는 퍼뜩 무언가를 깨닫고 경직됐다. 아힌의 향이 희미해졌다는 건 내 페로몬 향이 튀어나올지도 모른다는 의미였다.
‘…왜?’
적어도 며칠은 가던데. 황급히 털을 문지르던 나는 문득 구불거리는 분홍색 머리카락에 눈길이 닿았다.
천천히 눈길을 옮긴 순간 룬과 시선이 엮였다. 램프를 밝힌 방 속에서 황금색 눈동자만이 선명히 빛났다.
신비로운 외양이었다. 수장의 자제치고 지나치게 자유분방해서 크게 와닿지 않았지만, 이럴 때는 룬도 영락없는 상급 맹수였다.
“조금은 편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경계하네요.”
어쩔 수 없는 위험한 존재니까. 속내를 들킨 내가 슬슬 엉덩이를 뒤로 물렸다.
“저거 봐, 또 저런 사나운 눈을 하고. 서운해서 이제 아무것도 하기 싫다.”
진정성이라곤 없는 대사였다.
“토끼님 때문에 삶의 의욕을 잃었어요.”
‘원래부터 아무것도 하기 싫었겠지.’
얼굴에 삶의 의욕이 없다고 적힌 자한테 저런 말을 듣고 싶진 않았다.
다행히 더 이상 아힌의 향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은 룬이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이어 갔다.
하나 있는 누이의 포악함에 대한 험담과, 그때 엔델루스에서 나를 끝까지 뒤따라오지 못한 것에 대한 숨겨진 이야기도.
그는 나와 헤어진 직후, 납치범이라 신고해 둔 아힌 덕택에 경관들에게 둘러싸여 끌려갔더란다.
‘네 이놈, 바른대로 말해라!’
초점 없는 눈이 수상하다며 심문한 경관으로 인해, 난생처음으로 제 눈이 그렇다는 걸 깨달은 사실까지도.
그 부분은 이야기 도중 괜히 말했다며 볼을 붉히기도 했다.
수치심은 저 멀리 날려 버린 태도를 취하는 아힌과 이브린을 상대하다, 미묘하게 상식적인 선에 머무른 룬의 태도가 제법 신선했다.
또한 내 경계를 사지 않기 위해선지는 몰라도 곤란한 질문을 하지 않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이상하게 잠이 쏟아지네. 저만 그래요?”
새벽이 깊어질수록 황금색 눈동자 위로 졸음이 드리워졌다.
당신 원래 하루가 멀다 하니 졸려 하잖아. 몰래 도주 계획을 세우던 나는 그만 자라며 앞발을 모아 뺨에 가져가는 제스처를 취했다.
“미쳤다, 진짜. …이거 뭐예요.”
뒤척거린 룬이 엎드리며 팔에 얼굴을 묻었다. 의미심장한 중얼거림을 들은 나는 문득 불길해졌다.
“그레이스가 제 냄새를 풀풀 묻혀 둔 이유가 있었네요.”
아, 역시 아힌의 향이 사라져서인가 봐. 웅얼거리는 룬의 목소리가 노곤노곤 녹아들었다.
“아까 외눈 흑표범이 잠든 것도 그렇고…. 수면 페로몬인가?”
가설은 사실이 되고 말았다.
최소 며칠은 가는 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경계의 숲에서 페로몬을 운용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하물며 룬은 보통 수인이 아니니, 코를 자극하는 냄새만으로도 취한 모양이었다.
‘어떡해.’
지나치게 동요하니 단전에 모아 둔 페로몬마저 요동치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아힌에게 가야 할 것 같은데.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던 내가 코를 찡긋거렸다.
늘어진 룬에게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오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페로몬.
침범하는 내 페로몬을 밀어내기 위해 그가 제 페로몬을 발산한 게 분명했다.
‘이거 설마.’
미약한 페로몬은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사자 영토 수장의 혈통을 이은 룬이라면….
‘아니, 아니야. 그거 아니야.’
게으른 맹수야, 정신 좀 차려 봐! 눈앞이 아득해질 만큼 당황한 내가 제자리를 돌았다.
“마취제라도 맞은 기분인데요.”
부스럭거리며 고개를 튼 룬이 나를 바라봤다. 가뜩이나 잠을 좋아할 것 같더니, 녹진한 표정이 퍽 행복해 보였다. 오죽하면 일부러 페로몬에 당한 건가 싶은 의심마저 일었다.
“…이런 페로몬이면 일개 영토민은 아닐 텐데. 가문이 어디예요? 아니면 본업이라든가.”
‘아니,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고. 이어질 고통을 예감한 나는 극도의 두려움에 뺨을 짚었다.
페로몬을 맡으면 인간으로 변하는 조건 따위 룬이 알 리가 없었으니. 이성의 끈이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사람으로 변할 듯한 느낌이 오면 춤을 춘다든가.’
‘제발 알아들어 줘.’
이판사판으로 몸을 일으킨 내가 덩실덩실 엉덩이를 흔들었다. 서적에서 본 토끼 일족의 전통춤을 비롯해 휘리릭, 공중 2회전에 이어 우아한 착지까지.
“엄청 잘 추네···.”
몽롱하게 응시하던 룬은 젤리처럼 말랑말랑한 음성을 냈다.
“아, 본업이 발레리나였구나.”
어쩐지, 예술 계열이어서 머리카락을 그렇게 기른 건가…. 제멋대로 해석한 룬이 눈을 감으며 수마에 함락됐다.
“아이몬드의 관을 받을지도…. ”
뭐라는 거야. 아이몬드의 관은 대륙적 무용수에게나 주어지는 권위 높은 상이었다.
‘헛소리할 때가 아니야!’
일어나! 왈츠까지 추며 관심을 끌던 나는 뒤늦게 흩어진 이성을 되찾았다. 안타깝게도 아힌과 맞춘 신호를 룬이 알아볼 리가 없었다.
툭, 룬의 고개가 완전히 기울었다. 꿈나라에 몸을 던진 그에게서 색색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침대에서 뛰어내릴 수도 없고. 허둥지둥 제자리를 오가던 내 시선이 애쉬의 배낭에 꽂혔다.
‘…페레니움.’
아힌이 눈앞에서 흔들어 보인 회중시계가 뇌리를 강타했다. 앞뒤 볼 것 없이 발을 박찬 내가 배낭에 뛰어들었다.
* * *
동이 텄다. 로브를 전신에 덮어쓴 아힌과 이브린은 슬럼 끝에 위치한 건물로 들어섰다.
겉보기엔 평범한 민가였지만, 토끼 영토 수도에서 가장 많은 정보를 취급하는 정보 길드였다.
내부는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컴컴했다. 비치된 의자에 앉은 아힌이 품에서 금화가 든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찰랑, 찰랑, 한 손으로 던졌다가 받는 행동을 반복한 그가 맞은편의 불투명한 유리를 응시했다. 토끼 영토의 정보 길드가 아니면 얻을 수 없는 정보가 필요했다.
“타 일족분이시군요.”
유리 건너편에서 정보 상인의 음성이 울렸다.
“안쪽에서만 보이는 구조군. 상당히 치사하네.”
“고객께서도 로브로 얼굴을 전부 가리셨지 않습니까. 송곳니를 보고 판단했을 뿐입니다.”
이윽고 아힌은 손이 들어갈 만한 작은 칸으로 묵직한 주머니를 밀어 넣었다. 금화와 소분한 잿빛 가루가 든 주머니였다.
“안에 든 잿빛 가루에 대해서는 알고 있겠지.”
“알다마다요. 블럼 나무의 수액에서 채취한 성분으로 만드는 마약이죠. 오랜만이군요, 토끼 영토에서는 거의 보기가 힘든데.”
두둑한 금화가 제법 만족스러웠던 상인이 정보를 술술 흘렸다.
“십 년도 전에 초식계 영토에서 반짝 성행했는데, 이제는 맹수계 영토를 거점으로 나돌아다닙죠. 그래서 저희 토끼 영토에는 정보가 많은 편은 아니지요. 혹 어떤 방향의 정보를 필요로 하시는,”
“지금까지 이걸 취급한 기록이 있는 토끼 영토 귀족의 목록.”
“…….”
귀족이 엮이자 유리 너머의 음성이 뚝 끊겼다. 로브 아래로 드러난 아힌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상급까진 됐고 하급에서 중급 가문 정도면 돼. 백발을 소유한 일족이 있으면 더 좋고.”
툭, 품에서 나온 한층 더 묵직한 주머니가 유리를 통과했다. 액수를 세는 듯 금화가 마찰하는 소음이 울렸다.
“…개개인의 풀네임을 발설하는 건 불가능하고, 가문 목록만 구두로 알려 드릴 수 있습니다. 문서 발급도 불가하고요.”
“좀생이처럼 굴지 말고 입 좀 더 털지 그래.”
“저희도 목숨은 챙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귀족의 정보를 발설한 즉시 거점도 옮겨야 할 정도니, 너그러이 이해해 주십쇼.”
앓는 소리를 낸 정보 상인은 수북이 쌓인 금화를 쓸어 담았다.
“일단 상단 쪽은 없습죠. 토끼 영토 수장이 마약 쪽으로는 워낙 엄격한지라, 귀족도 아닌데 괜히 마약을 다루다 걸리면 죄질이 무겁거든요. 직접 취급한 건 하급 귀족이나 갱단이 대부분이죠.”
돋보기를 낀 정보 상인이 수북한 종이 더미를 뒤졌다.
“뭐, 다들 월등한 페로몬을 얻어 파벌 싸움에서 이기거나 신분 상승을 기대하는 듯한데··· 페로몬의 각성 효과를 얻은 기록은 없습니다. 워낙 오래된 일이기도 하고.”
정보 상인은 문서를 넘기며 약물을 취급한 몇 가문을 나열했다.
“그중에 백발을 가진 일족이 속한 가문은.”
툭, 금화 주머니를 더 건넨 아힌이 엷게 미소했다. 종잇장 넘기는 소음이 빨라졌다.
“에- 잠시만요. 그러니까··· 위깅스가(家)와 벤젤가(家)···.”
“그리고.”
“래비안가(家) 정도겠군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