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ymbiotic Relationship Between the Rabbit and the Black Panther RAW novel - Chapter (39)
토끼와 흑표범의 공생관계 11화(39/75)
빛이 드리워졌다 어둠이 내리는 것을 반복했다. 감은 눈꺼풀 위로 누군가 손을 흔드는 느낌 같기도 했다.
반짝, 눈을 뜨자마자 네 쌍의 눈동자가 보였다.
눈앞에는 네 사람이 머리를 맞댄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다섯 살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 볼살 통통한 어린아이들이었다.
“저, 정신이 드나요?”
“이베나 영식은 바보예요? 눈을 떴으니까 정신이 든 거겠죠.”
“다들 조용히 좀 해 봐요.”
발음이 부정확한 대화 소리를 듣고 있자니 솜털이 쭈뼛 섰다.
그도 그럴 게 어린아이들의 손길은 악의는 없지만 내게는 너무도 억세니까. 새끼 토끼가 귀엽답시고 이리저리 조물거리면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벌떡 몸을 일으키자 몸을 덮고 있던 상아색 천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아…!”
황급히 천을 붙드는 동시에 길어진 팔다리가 보였다.
‘여, 역시….’
사람이 되어 버렸구나. 허둥지둥 천을 끌어오던 나는 찰랑, 손목에 매달린 회중시계를 발견했다.
어떻게 된 거더라. 페레니움을 꺼내기 위해 애쉬의 배낭을 당기고, 그리고…. 막 깨어나서 정신이 없었던 내가 이마를 짚었다.
“토끼 수인 맞네, 맞아. 제가 생김새가 토끼… 다고 했… 잖아요.”
“왜… 있는 …까요? 이베… 영식, 가서 여쭤보도록 해요.”
“저, 저한테 왜 그래요….”
우측에서 끊임없이 들리는 아이들의 속삭임으로 인해 생각이 자꾸 분산됐다. 그때 타닥타닥, 묘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검은 털 뭉치가 내게 폭삭 안겨들었다.
“애쉬!”
오랜만에 보는 사람의 모습이 기쁜지 애쉬는 연신 뺨을 핥아 올렸다.
뺨에 닿는 송곳니가 조금 무섭지만 참아 볼게. 눈을 꾹 감고 애정을 나누던 나는 뒤늦게 주위를 둘러봤다.
어느새 날이 밝은 데다, 누워 있던 곳은 비슷한 구조긴 해도 룬의 손님방이 아니었다. 액자나 연식 있는 가구, 항아리 등 골동품을 보아 사용하지 않는 공간인 모양이었다.
이어서 페로몬을 점검한 나는 손에 잡히는 회중시계를 만지작거렸다.
별다른 육체적 고통이 느껴지지 않고, 페로몬도 안정적인 걸 보아 무의식중에 페레니움을 사용했을 확률이 높았다. 새삼 지배계 페로몬의 필요성이 여실히 실감 났다.
‘…앞으로 남은 횟수는 두 번.’
걱정 어린 숨을 내쉰 나는 구석에 몰린 네 명의 아이들과 시선이 마주쳤다.
흠칫 어깨를 떨자 덩달아 아이들도 폴짝 뛰었다.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긴 한데, 벌린 손가락 사이로 나를 빤히 관찰하는 모양새였다.
수십 초 동안의 대치 후, 그들 중 가장 체구가 작고 수줍게 생긴 소년이 쭈뼛쭈뼛 다가왔다.
“저기이.”
어느덧 가까이 다가온 소년이 양손을 동그랗게 모아 귓속말했다. 절로 경계가 허물어질 만큼의 깜찍함이라, 어색하게 웃은 내가 끄덕였다.
“네에-….”
“아리아 영애가요, 왜 천둥벌거숭이처럼 있는지 궁금하대요.”
어린아이의 입에서 튀어나온 기상천외한 단어에 입을 뻐끔거린 내 시선이 천천히 내려갔다.
무릎까지 오는 백발과 상앗빛 천이 엉망으로 엉킨 상태. 일단 옷부터 입을 필요가 있었다.
* * *
긴박하고 아찔한 순간이었다. 전방은 까마득한 낭떠러지에, 뒤편으로 키메라가 바짝 추격해 오는 상황.
머리가 세 개인 키메라와 허공에서 시선이 얽혔다. 더 이상의 후퇴는 없다고 판단한 내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스릉, 날이 마찰하는 소리와 동시에 나는 높이 뛰어올랐다.
“그래서, 그래서요?”
옹기종기 모여 앉은 네 명의 아이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동그란 동공이 파르르 떨렸다.
“격전 끝에 갑옷도 다 망가지고, 최측근의 도움을 받아 이곳에 쓰러져 있었던 거예요.”
“최측근이라면 저 흑표범을 말씀하시나요?”
“그럼요.”
흘끔, 여러 쌍의 눈동자가 애쉬에게 닿았다 떨어졌다.
“용사님, 그럼 키메라를 무찌른 건가요?”
용사님이래. 살면서 영원히 들어볼 일이 없는 호칭을 접한 내가 양손으로 입을 막았다. 흐흥, 광대가 볼록 솟아올랐다.
“아, 아무튼. 키메라는 마지막 순간 이 회중시계를 토해 냈죠. 모든 용사들이 얻으려 한 진귀한 보물이랍니다.”
아힌을 삼두 괴물에 비유해서 죄책감이 들긴 하다만…. 무너진 음성을 가다듬은 나는 손목에 팔찌처럼 걸어 둔 회중시계를 흔들었다.
“제아무리 키메라라도 제 공격이면 끽,”
“죽어요?”
“바로 그거죠.”
팔뚝을 든 내가 없는 근육을 뽐냈다.
“진짜 진짜 멋지다!”
“키메라 전설은 사실이었나 봐요. 히야- 정말 용사님이신가 봐.”
“아이참, 제가 아까부터 그림책에 있던 용사님이라고 했잖아요. 비슷한 색깔의 머리카락에 흑표범을 부리고 있었다니까요!”
곧이곧대로 믿은 아이들 사이로 술렁임이 거세졌다.
그림책에서 보았다는 영웅은 발렌스 님의 인상착의 같기도 하고. 거짓부렁이 지나쳤음을 느꼈지만 정정할 처지도 아니었다.
“쉬잇, 일단은 토끼 영토의 비밀 임무를 수행 중이니까.”
입가로 검지를 가져가자, 입을 텁 가로막은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흑표범의 공도 컸죠, 키메라의 측방을 도맡았거든요. 애쉬, 인사.”
룬의 마차에서 연습한 덕분에 착, 애쉬는 곧장 거수경례를 취했다. 삽시간에 애쉬에게 몰려든 아이들은 웅성웅성 토론을 이어 갔다. 고사리 같은 손이 귀찮은 애쉬가 휙휙 꼬리를 흔들어 쳐 냈다.
‘미안, 애쉬.’
겨우 시선을 돌리는 것에 성공한 나는 한숨 돌리며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메이미가 애쉬의 배낭에 챙겨 준 연보라색 블라우스와 흰 경장 바지. 아직 착장에 서툰 내 사정을 고려해, 도움의 손길 없이도 쉽게 입을 수 있는 종류를 준비해 준 것이었다.
‘메이미….’
왈칵 감격한 내가 주먹을 깨물었다. 때아닌 감동을 미뤄 둔 나는 상황을 차근차근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내 상태가 이상함을 눈치챈 애쉬가 이곳으로 옮겼고, 그 후 사람으로 변한 모양인데. 그리고 숨바꼭질을 하던 아이들에게 발견된 것 같았다.
아이들은 맹수계 수인은 아니었지만, 눈동자 색이 제각각인 걸 보아 저택에 초대된 타 영토 귀족의 자제들로 보였다.
몸을 일으킨 내가 창가로 다가섰다. 마침 저 멀리, 익히 아는 화려한 마차가 들어섰다.
‘아힌.’
결코 마부 같지 않은 우람한 골격의 마부와, 값비싼 보석을 걸친 흑마, 제인만 보아도 그레이스가(家)의 마차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갔다가 돌아온 건가?’
어디를 다녀온 걸까. 작은 의문을 느끼고 있자니, 창틀을 짚은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가뜩이나 핏기 없는 손등이 하얗게 질렸다.
오히려 사람으로 변한 건 이득일지도 몰랐다. 새끼 토끼면 부모님을 마주쳤을 때 나를 쉽게 알아보기야 하겠지만, 아힌과 함께 있어야만 하니까. 완전한 의사 전달이 불가능한 건 덤이었다.
정차한 마차에서 가벼운 경장을 걸친 아힌과 이브린이 내려서는 게 보였다. 표정이 보이지 않는, 머리 색으로 구분할 수밖에 없는 거리였다.
‘뭐야….’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고작 하루 조금 넘게 떨어졌는데 왜 오랜만인 기분이 드는 건지.
주책이라 생각하던 나는 황급히 벽에 등을 밀착시켜 주저앉았다. 아힌의 시선이 위를 향한 탓이었다.
저놈의 맹수는 정수리에도 눈이 달렸나. 실없는 험담을 중얼거린 내가 입술을 꾹 사리물었다.
‘아힌과 함께 있으면….’
만일, 래비안가(家) 일원을 만나게 되면 어떤 취급을 받을지도 모르는데. 그러한 면면을 아힌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어쩐다.’
연회는 바로 오늘 저녁이었다. 래비안 저택과 이곳은 그리 먼 거리는 아니니, 혹여 부모님이 참석하더라도 저녁이 다 되어서겠지.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바닥에 떨구었던 시선을 들었다. 네 명의 어린아이 중 지금껏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조그마한 소년이 다가왔기에.
‘카피바라 일족인가?’
까만 눈동자에 남색 머리카락을 가진, 어딘지 멍한 분위기의 아이였다.
“상처.”
앙증맞은 음성을 낸 소년이 내 손등을 가리켰다. 언제 부딪혔는지 긁힌 자국이 자리했다. 탁, 대답할 겨를도 없이 손목이 붙들렸다.
“가자.”
“네?”
반사적으로 일어난 나는 얼떨떨하게 아이를 내려다봤다.
“세상에, 키메라랑 싸우다가 입은 상처 아니에요? 어서 가요.”
“러셀 영식의 어머님은 뛰어난 의술사시거든요.”
“아래층에 계시니까 금방이에요!”
그새 따라붙은 아이들이 힘을 모아 내 엉덩이를 밀어 댔다. 하다못해 손등의 상처를 발견한 애쉬마저.
엉거주춤 밀려난 내가 당황스럽게 뒤돌아보자, 눈에 힘준 그들이 차렷 자세로 거수경례를 취했다. 난감하기 이를 데 없는 순간이었다.
* * *
토끼가 사라졌다. 지난 새벽, 방심하고 잠든 것을 뼈저리게 후회한 룬이 저택을 쉼 없이 뛰어다녔다.
‘젠장.’
주먹만 한 토끼라지만, 눈에 띄는 흑표범과 함께 사라졌기에 금세 찾으리라 생각했는데. 이상하리만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보라색 카펫이 깔린 복도를 달리던 룬이 멈춰 섰다. 맞은편에서 썩 달가우면서도 달갑지 않은 두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황금색 눈동자가 빠르게 아힌을 훑었다. 경장 주머니는 비어 있었고, 토끼 몰래 룬을 거슬려 하던 흑표범도 보이지 않았다.
마음이 급한 룬은 저도 모르게 아힌과 이브린의 주변을 빙글 돌았다. 재킷 주머니, 바지 뒷주머니를 낱낱이 살피며.
세 바퀴째 돌았을 때, 가만히 시선만 따라 옮기던 아힌이 검을 뽑았다.
힉, 지나가던 고용인들이 기겁하며 벽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런 그들을 손짓으로 진정시킨 이브린이 조언했다.
“아힌 님, 타 영토에서는 부디 자중해 주십시오.”
“가뜩이나 주머니가 쓸쓸해서 짜증 나는데.”
“그게 검을 뽑는 것과 무슨 상관관계가 있으신지.”
“저딴 더러운 눈빛으로 주머니를 훑잖아.”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것도 모자라 지긋한 눈길로 주변을 뱅글뱅글 돌아 대니. 뒤늦게 자신의 희한한 행동을 자각한 룬이 손을 내저었다.
“그게 아니라-,”
데려온 토끼가 사라졌다고 주장하려던 룬의 목소리가 뚝 멎었다. 아힌은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의문을 느낀 룬이 아힌의 눈길을 따라 우측 복도로 고개를 틀었다.
휙, 기둥 뒤로 나란히 튀어나와 있던 머리 세 개가 사라졌다. 어림잡아 다섯 살 정도의, 초식계 귀족의 어린 자제들.
이윽고 신중한 토론이 개최됐다.
“어-엄청 새빨갛다. 흑표범인가 봐요. 저는 맹수계 수인은 정말 처음 봐요!”
“그러게요, 눈동자를 보면 흑표범이랑 사자 수인이 틀림없어요.”
“어…. 그런데 소 수인들도 금색 눈동자 아닌가요…?”
정적 후에 다시금 기둥 뒤로 세 쌍의 눈동자가 솟아 나왔다. 눈을 깜박이고 선 아힌과 이브린, 룬을 번갈아 본 아이들은 황급히 머리를 맞댔다.
“송곳니가 있네요. 흑표범이랑 사자 일족이 맞아요.”
“하지만 용사님이… 용사님이 흑표범들은 하나같이 방정맞다고 한걸요. 근데 저분들은 왠지….”
소년이 어리둥절하게 볼을 긁었다. 비비의 험담과 달리, 실제로 본 흑표범 일족은 차분하고 아름다운 외양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자는 게으르다고 한 말씀은 맞는 것 같아요. 저 사자의 눈이 무지무지 수상하군요.”
용사님? 발음이 또렷하진 않지만, 의미는 충분히 알아들은 아힌과 이브린, 룬의 눈썹이 애매하게 일그러졌다.
덕분에 안절부절못한 고용인들이 말리지도 못한 채 발만 동동 굴렀다. 도대체 어느 나라 용사님이 타 일족을 저런 식으로 비방하고 다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검을 갈무리한 아힌은 비식 웃으며 룬을 손가락질했다.
“눈이 무지무지 수상하시네.”
삐딱하게 선 룬이 귀를 후볐다.
“어디서 방정맞은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요.”
두 사람의 대화 소리를 들은 아이들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햐… 덩치 좀 봐요. 하늘을 뚫을 것 같지 않아요?”
“이베나 영식, 아무리 그래도 하늘은 못 뚫어요.”
“어어- 입을 닫으니까 송곳니는 안 보이네요. 아쉬워라.”
맹수계 수인에 대한 경탄과 기대로 가득 찬 눈빛이었다. 수그려 앉은 아힌은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윗입술을 들췄다.
“어흥.”
“도망쳐요!”
“아아아!”
까르륵 웃은 아이들이 복도 끝으로 달음박질쳤다.
“이래서야 어린 자제분들이 진정 흑표범을 방정맞다고 여기겠습니다.”
이브린은 덤덤히 아힌을 내려다봤다. 정보 길드에 다녀온 이후, 내내 저기압이던 그가 오늘 처음으로 즐거워하고 있기에 말리기도 애매했다.
“비비는 이러면 죽은 시늉부터 하고 보던데.”
“방심을 유도해서 발차기를 날릴 기회를 엿보는 겁니다. 토끼님의 습관성 전술이죠.”
토끼를 주제로 한 담소를 듣던 룬은 대뜸 홱 소리 나게 고개를 돌렸다. 아이들이 달아난 방향이었다.
설마. 혹시나 싶었던 룬이 황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빠르게 사라지는 그를 응시한 아힌은 눈을 가늘게 떴다.
“수상하군.”
“룬 님의 눈 말씀이십니까?”
“아니, 행동이. 너무 부지런하잖아.”
“그러게요, 저럴 분이 아닌데. 아까 주변을 돌 때도 아힌 님의 주머니를 보시더니, 혹 토끼님을 찾으신 걸까요.”
머리칼을 쓸어 넘긴 아힌이 창문을 돌아봤다. 분명히 비비는 그레이스저에서 발렌스와 다과를 즐기고 있을 텐데.
“…비비의 답장은?”
“가주님의 부엉이가 부지런히 날았다고 치면… 저녁쯤에 토끼님의 답신이 오겠죠.”
“늦어. 고릴라를 불러와.”
우려한 일은 언제나 현실이 되곤 하는 것처럼. 묘하게 감이 좋지 않았다.
* * *
막무가내인 소년과 애쉬에게 질질 끌려가다시피 한 내가 경계하며 복도를 걸었다. 짧은 거리라 마주치는 사람이 없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룬이 찾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어제, 룬은 내가 꽤 긴 시간 동안 새끼 토끼의 상태로 있었던 것에 대한 이유를 묻지 않았다. 경계심을 심어 주지 않기 위해 일부러 묻지 않았다 치더라도, 마주치는 횟수를 되도록 줄이는 편이 좋았다.
‘역시 아힌에게 가는 편이 좋지 않을까.’
손등의 상처 역시 치료받을 만큼 큰 상처는 아니었다.
이런저런 고민을 거듭하는 와중, 들어선 손님방에서는 약초 내음이 났다. 탁자에 앉은 귀부인은 문을 등진 채 무언가를 뒤적이고 있었다.
“지난나 교수.”
뒷모습이 낯익다고 생각하기 무섭게 소년이 그녀를 향해 돌진했다. 각각 손목과 꼬리를 붙들린 나와 애쉬는 얼결에 함께 딸려갔다.
탁자에 다다르고 나서야 손목을 놓아 준 소년은 귀부인의 등을 콕 찔렀다.
“지난나 교수.”
“러셀, 어머니라 부르면 입에 가시가 돋니? 그리고 아무리 안전한 곳이라지만 멋대로 외출을….”
“여기 힘든 사람이 있어.”
“뭐? 그게 무슨 말이,”
뒤돌던 귀부인이 화들짝 몸을 일으켰다.
“이게 누구야, 환자분!”
“의관님?”
의술사라던 소년의 어머니는 엔델루스에서 만난 의관이었다. 현재는 의관이 아닌 단아한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으로서 앉아 있었지만.
당시에도 묘하게 귀족적인 면이 있어 어리둥절했는데….
의외로 크게 놀란 기색은 아닌 그녀는 담담히 고용인들을 물렸다. 외려 고용인들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도망치듯 손님방을 벗어났다.
‘왜지?’
“우선 상처부터 보죠.”
눈으로 그들을 좇던 나는 의관의 손에 이끌려 소파에 착석했다.
“가벼운 타박상이네요. 어디 단단한 곳에라도 부딪혔나요?”
의료 상자를 가져온 그녀가 내 손등을 세밀히 살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다친 거라.”
“정말, 똘똘한 외양을 하시고선 여기저기 많이도 다쳐 오시네. 러셀과는 어쩌다 함께 오신 건가요?”
의관의 질문으로 인해 자연스레 시선이 발치로 떨어졌다. 애쉬와 나란히 쪼그려 앉아 있던 소년이 “쉿.” 신호를 보냈다.
입을 달싹인 나는 복도에서 마주쳤다며 대강 둘러댔다.
“그나저나 이 정도 우연이면 인연인데요?”
의관은 손등을 치료하면서 스스로를 소개했다. 카피바라 영토의 하급 귀족이자, 벨헬름 아카데미의 교수직을 일임하고 있다고.
벨헬름은 유일하게 초식계 수인과 맹수계 수인이 섞여 있는 아카데미가 아닌가. 규모가 어마어마한 정도만 아는 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벨헬름이요?”
“왜 그렇게 놀라요. 하긴, 제가 교수나 귀부인으로 보이지 않긴 하지요.”
“그,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알죠, 알죠. 벨헬름 아카데미가 오죽 큰 규모여야지.”
호탕하게 웃은 그녀가 내 팔을 찰싹 때렸다.
욱신거리는 팔을 문지른 나는 카피바라 일족의 특징을 떠올렸다. 일족 자체가 친화력이 높아, 과장하면 신분을 불문하고 영토민끼리 알음알음할 정도라는.
치료를 끝내고도 의관의 수다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타 영토의 높으신 분들이나 토끼 영토 귀족들만 참석하는 연회지만, 저는 아몬 수장과 따로 친분이 있어서요. 환자분은,”
재잘재잘 떠들던 그녀가 짐짓 턱을 매만졌다.
“아하. 어제 그레이스가의 마차를 봤는데, 아힌 그레이스 님과 함께 오셨나 보군요.”
‘아힌의 정체를 알고 있었어?’
엔델루스에서는 분명 서로 초면이었는데? 말 한마디 함부로 할 수 없었던 나는 입을 붕어처럼 뻐끔거렸다. 어안이 벙벙해진 나를 살핀 의관이 설명을 덧붙였다.
“모르셨구나. 그때 엔델루스를 떠나기 직전이었나? 그레이스 님께서 저를 알아보시고 두둑이 챙겨 주셨거든요.”
그녀는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모아 금화를 표현했다.
“연구비로 유용하게 썼죠.”
“알아보다니, 그와 안면이 있었어요?”
“제가 근무하는 아카데미의 학장님이 그레이스 님의 조부이시니까요.”
아힌의 조부라면….
“그 꼬장꼬장한 분이 학장… 합!”
눈을 큼지막하게 뜬 내가 입을 틀어막았다. 토끼일 때처럼 입을 뻐끔거린 것이 목소리가 되어 튀어나와 버렸으니.
“말씀드렸듯 고양이과는 진상이 많죠.”
입매를 씰룩인 의관은 나지막이 공감했다.
“아무튼. 그래서 그레이스 님이 아주 어렸을 때 한 번 뵌 게 다인데, 눈썰미가 좋으시더라고요.”
하여간 그 맹수는 약물 건도 그렇고, 혼자만 알고 제대로 말해 주는 게 없지. 때아닌 분노가 화르르 타올랐다. 덕분에 지금 내가 정보 하나 없이 몸으로 뛰는 처지가 아닌가.
“그러고 보니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지난나가(家)의 안주인인 벤시 지난나예요. 지난나 부인이나 교수라고들 부르니 대충 편히 불러 줘요. 환자분을 데려온 아이는 제 아들, 러셀 지난나죠.”
내 시선이 소파 아래에 머물렀다. 애쉬의 꼬리를 만지작거리는 소년은 아이치곤 놀라울 만큼 말수가 적었다.
“체구는 또래보다 작지만 어엿한 여섯 살이랍니다. 환자분은요?”
“아, 저는 비비예요. 가문은,”
가문은. 저도 모르게 말끝을 흐린 나는 마침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감정이 보이지 않는 까만 눈동자로 올려다보던 소년이 작게 읊조렸다.
“용사님이야.”
“러셀, 갑자기 무슨 소리니?”
“바위도 두 쪽 내는 용사님.”
혀 짧은 발음을 낸 소년은 이내 달랑달랑 흔들리는 애쉬의 꼬리에 집중했다.
“바위를… 부숴…?”
되뇐 의관이 미심쩍은 눈으로 내 손등을 바라봤다. 설마 손등의 상처가 바위를 때려서라고 의심하는 건가. 허풍을 떨어 댄 과오를 반성한 내가 고개만 도리도리 저었다.
“뭐… 희한하네요, 러셀은 모르는 사람 앞에선 한 마디도 안 할 만큼 낯을 가리는데. 환자분은 기가 맑으신가 봐요.”
“기가 맑다니요?”
“쉽게 말하면 감이 좋아요. 생물이 가진 기운을 대충이나마 구분하는 페로몬을 가졌거든요.”
결국 좋은 사람으로 평가했다는 의미였다. 러셀, 너어-…! 검지와 중지를 내밀어 악수를 청하자, 소년이 멍하니 맞잡았다.
“카피바라 수인의 몸으론 다루기 힘든 페로몬이죠. 얼마 전에야 겨우 수인열을 떼고 인간화를 치렀으니.”
“네?”
“그래서인지 아직 언행이 서툴러요. 흠, 나이가 어린 탓도 있지만.”
태연스러운 어투였으나 허투루 넘길 수 없는 종류였다.
“러셀이 인간화를… 늦게 치렀다고요?”
눈에 띄게 굳은 내가 러셀과 의관을 번갈아 봤다. 엷은 미소를 띤 그녀는 어깨를 으쓱였다.
“네, 비비 님처럼.”
“아…?”
어떻게 내가 인간화를 늦게 치렀다고 확신하는 걸까. 아힌이 알렸다고 보기에도 힘들지 않나.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기분이 된 내가 되물었다.
“…무슨?”
“비비 님처럼요.”
폭풍 전야와 같은 정적이 휘몰아쳤다. 벌떡 일어난 나는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뭐예요, 당신.”
급변한 분위기를 감지한 애쉬가 보호하듯 꼬리로 나를 에워쌌다. 으르릉- 낮은 울림이 귀를 때렸다.
아이고, 순식간에 러셀을 안고 달아난 의관이 커튼 뒤로 피신했다.
“사실 아까부터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개인적으로 맹수는 조금…. 설명해 드릴 테니 멀리 떨어뜨려 주시면 안 될까요?”
“지난나 교수, 나는 괜찮아.”
“장하구나, 러셀. 과연 외향적인 카피바라 일족의 후예다워. 하지만 내가 괜찮지 않단다.”
의관의 반응에 새삼 충격받은 내가 숙여 앉았다.
“애쉬, 쉬이-”
진정하란 뜻으로 애쉬를 부드럽게 쓸자, 경계 어린 숨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랬지, 참.’
그랬지, 그랬어. 그레이스 저택 사람들은 워낙 아무렇지 않아 했기에, 초식계 영토에선 애쉬가 이질적인 존재란 사실을 미처 잊고 말았다.
‘어떻게 그걸 잊을 수가 있을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고용인들의 낯빛이 하얬던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애쉬, 나도 맹수가 다 되었나 봐. 심경이 복잡해진 내가 애쉬의 등을 살살 긁었다.
앞발에 비해 커다란 손길이 기분 좋았는지, 애쉬가 다치지 않은 쪽 손을 텁 물었다. 손 전체가 빨려 들어가는 건 한순간이었다.
“……?”
이건 또 신선한 경험인데. 마침 시선이 마주친 의관은 턱이 빠져라 입을 벌리고 있었다.
“괜찮아요, 장난… 장난치는 거랍니다.”
하나도 안 무서워. 떠는 그녀를 안심시킨 나는 의연하게 웃으며 눈물을 훔쳤다.
입속에 들어간 손이 축축했다. 물컹, 혓바닥의 돌기를 느낌과 동시에 이마를 짚은 내가 비틀거렸다.
“비비 님!”
지난번에 애쉬가 죽은 쥐를 덜렁 물어다 줬을 때와 비슷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