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ymbiotic Relationship Between the Rabbit and the Black Panther RAW novel - Chapter (40)
토끼와 흑표범의 공생관계 12화(40/75)
의관이 나의 인간화에 대한 것을 의심하기까진 그럴싸한 인과관계가 존재했다.
첫째는 초식계 수인이 페로몬 발작을 일으킬 만큼의 상급 페로몬을 가진 것이었고, 둘째는 엉거주춤한 행동이었다.
의심을 시작하고 보니 내 거동은 마치 타인의 움직임을 본떠 흉내 내는 느낌이었다고.
러셀의 늦은 인간화에 관해 조사 중이었던 그녀는 비슷한 케이스가 아닐까 생각했더란다. 인간화가 늦어지는 경우는 드물긴 해도 아주 없는 일은 아니기에.
그러나 기록은 전설 혹은 없다시피 하는데, 이런 사례는 주로 귀족가, 특히 수장급의 가문에서 나타나기에 대대로 쉬쉬했기 때문이었다. 하급 귀족의 혈통을 이은 러셀은 특수한 경우 중에서도 아주 특수한 경우였다고 전했다.
“차후에 그레이스 님께서 새끼 토끼를 기른다는 소문을 듣고 생각했죠. 혹시 비비 님이 아닐까··· 하고.”
찻잔을 내려 둔 의관은 시선을 내 머리카락에 뒀다.
“특히 그런 길이의 머리카락은, 일부러 기른 거라기보다는 오랫동안 자르지 못한 게 아닌가요?”
예리한 사람이었다. 이걸 뭐라고 답해야 하나. 탁상에 앉아 손을 꼼지락거리던 나는 테라스를 돌아봤다.
구경 나간-정확히는 쫓겨난- 애쉬와 러셀은 나름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애쉬의 코에 나비가 내려앉자 쪼그려 앉아 있던 러셀이 방싯 웃었다. 애쉬도 얌전한 러셀이 거슬리지는 않는지 손길을 곧잘 허락했다.
“엔델루스에서도 생각은 했지만 잘 길들인 맹수군요. 하나, 맹수는 언제 돌변할지 모르니 늘 주의해야죠.”
“…동의하는 바예요.”
맹수에게 물리는 순간 명을 달리할지도 모르는 게 사람이었다. 특히 초식계 수인은.
‘바라.’
이를 가장 잘 알고 있는 게 새끼 토끼로 살아온 내가 아닐까.
어쩌면 맹수를 완전히 이해하게 될 날은 오지 않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혹시라도 애쉬가 나를 무는 날이 온다면 기꺼이,
‘무, 물려 줘야….’
아흑, 아직 먹이가 될 마음가짐을 가지지는 못한 내가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동시에 팔목에 감아 둔 회중시계가 뺨을 때렸다.
그제야 시간이 제법 흘렀다는 사실을 인지한 나는 회중시계를 열었다. 무도회까지….
‘네 시간 정도밖에 안 남았어.’
해가 옮겨진 창밖을 돌아본 내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타 영토의 귀족은 이미 도착했을 것이고, 곧 있으면 무도회에 참석하는 토끼 영토 귀족들이 저택으로 오겠지.
오늘이 내 발로 부모님을 마주할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회중시계와 애쉬를 번갈아 본 나는 눈을 새초롬히 떴다.
차라리 토끼면 몰라, 이대로 밖을 나서기엔 무리가 있었다. 정리 안 된 치렁치렁한 머리를 하고, 맹수와 저택을 누비면 당장 창이 겨누어지지 않을까.
‘그렇다고 룬에게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인데.’
못 믿을 자는 아니었지만, 신분으로 보나 아힌과의 관계로 보나 완전히 믿기도 어려운 자였다.
모은 무릎을 만지작거리던 나는 힐끔 의관을 곁눈질했다. 눈이 마주친 그녀가 살포시 미소를 띠었다.
‘일단은 신분도 보장되고….’
엔델루스에서만 해도 흑표범 일족과 함께하는 내 일신을 걱정해 주고, 조언해 줬던 사람.
은근하게 테이블을 지난 내 손이 의관의 손등 위를 덮었다. 무언가를 부탁하려는 의도임을 눈치챘는지, 그녀는 귀신같은 속도로 손을 빼냈다.
지금까지 중에 제일 빠른 모습이었어. 당황스럽게 동공을 떤 내가 여전히 웃는 낯인 그녀를 마주했다.
“지난나 교,”
“말씀하지 마세요, 비비 님. 눈꼬리도 내리지 마시고요. 마음이 약해질 것 같거든요.”
“…눈매는 원래 처진 거예요.”
“방금 일 미리 더 내려갔답니다.”
찰나의 적막 속, 먹이를 노리는 흑표범처럼 눈을 빛낸 내가 손을 뻗었다.
‘에잇.’
휙, 탕, 휙, 탕. 손을 붙들려는 자와 피하려는 자의 경쾌한 엇박자가 울려 퍼졌다.
* * *
연회장으로 연결된 정원을 통과한 나는 거대한 돔형 건물을 올려다봤다.
‘세상에.’
무도회를 위한 저택을 따로 마련한 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연회광이라는 토끼 영토 수장의 별칭이 증명된 순간. 오죽하면 교류가 잦지 않은 맹수계 귀족들까지 불러들였겠나 싶었다.
‘이래서야 굳이 아힌을 피하지 않아도 될 정돈데.’
래비안가(家)에서 참석했을 확률이 높다 치더라도, 은밀히 움직여 부모님을 찾을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다.
입 벌린 채 건물을 응시하던 나는 발등을 덮은 드레스를 내려다봤다. 걸음마다 은색 빛이 물결치는 듯한 고가의 천이었다.
무도회 입장을 위한 드레스와 머리 장식. 의관에게 전부는 아닌, 대강의 사정 설명과 함께 뇌물을 바침으로써 얻은 것이었다.
‘맹수 퇴치제? 이거, 너구리 영토의 넬슨가(家)에서 특허 낸 연구물이잖아요. 웬만한 보석보다 구하기 힘든 건데!’
선물해 준 이브린에겐 미안하지만, 그가 내 생에 최초로 도움이 된 순간이었다.
탁탁, 드레스 자락을 정돈한 내가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가능한 눈에 띄지 않는 것을 원했으나,
‘너무 수수해도 오히려 눈에 띄죠.’
의관과 그녀의 시녀들이 칼같이 거절한 결과물이었다.
‘어색해….’
특히 허리께까지 자른 머리카락이. 현란한 가위질을 선보인 시녀가 걸작이라며 자화자찬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조심스레 걸음을 옮긴 나는 우측의 작은 연못을 들여다봤다. 수면 위로 달과 함께 내 모습이 일렁였다.
의복 한 벌 갖춰 입지 못하고, 과장하면 발에 닿을 수준의 머리카락을 가진 괴인은 연못에 없었다.
‘이 정도면 나도 조금쯤은 사람답나.’
반 묶음 한 머리카락에 장식도 꽂은, 꽤나 치장한 티가 나는 모양새였다. 창백한 피부도 옷으로 가리니 제법 생기가 돌아 보이고.
만족한 나는 인적이 드문 후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행인 점이라면 초식계 영토의 무도회에서는 맹수계 영토처럼 페로몬이 팽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또한, 후원을 통하면 눈 맞은 귀족들이 자리를 피할 수 있게끔 개방하는 측문이 존재한다고 들었다.
…룬에게서.
“언제까지 따라올 거예요?”
뒤편을 졸졸 따라오던 발걸음 소리가 멎었다. 룬은 딴청을 피우며 먼 곳을 응시했다. 의외로 의복은 늘 단정히 갖추는 아힌에 비해, 연미복임에도 불구하고 단추를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차림새였다.
“토끼님이 새벽처럼 또 사라질지도 몰라서.”
“그럴 일 없으니 따라오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아니, 따라오지 말아요.”
“뭐예요, 엔델루스에서도 따라오지 말라더니. 따라가면 안 돼요?”
당연히 안 되지. 발꿈치로 단호하게 땅을 치던 나는 급히 손을 내저었다. 토끼일 때의 습관은 무서운 법이었다.
“아, 이래서 착하게 살아 봤자 소용없다고 하는구나.”
“무슨,”
“말도 없이 사라져서 사람을 걱정시키질 않나. 애쉬란 흑표범도 레스틴이 맡아 주고, 여기에 들어올 수 있도록 신분을 증명해 줬더니 이제 필요 없다지를 않나.”
사자 일족은 따발 따발 따지는 게 특기인가. 그러나 룬의 주장은 지극히 사실이었다. 나는 기죽지 않으려 허리에 손을 얹고 반박했다.
“피, 필요 없다고까지 심한 말은 안 했는데….”
“그게 그거지 뭐예요.”
너랑 같이 부모님을 만날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심지어 초식계 수인으로 가득한 이곳에서 룬과 함께하면 이목이 지나치게 집중되니. 실제로 지나는 고용인이나 경비 기사들이 은근히 이쪽을 곁눈질하고 있었다.
“아무튼 따라오지 마요.”
“와. 목적을 이루니 버리는 패다 이거죠.”
“…….”
“진짜 못된 토끼네요.”
슬그머니 노려보자, 룬은 심술 맞은 얼굴로 보타이를 퉁 튕겼다.
‘어휴.’
다리에 감겨드는 드레스를 집은 내가 룬을 향해 다가섰다. 섭섭해할 땐 언제고, 정색한 룬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
늘 보이던 멍한 얼굴이 아닌, 낯선 표정이라 지레 겁먹은 나도 다시 뒤로 물러섰다. 세 걸음 정도의 적당한 거리감이 생겨났다.
선이 고운 룬의 얼굴을 마주한 내가 시선을 떨어뜨렸다. 왜 맹수들은 하나같이 쳐다보기도 힘들 만큼 예쁘게 생긴 걸까.
“…대신 뺨의 상처를 치료해 드렸잖아요.”
겨우 고개를 든 나는 스스로의 뺨을 가리켰다.
퉁퉁 부어 있던 룬의 왼쪽 뺨은 하루 만에 멀쩡해진 상태였다. 아마 내가 룬의 페로몬에 반응하여 페로몬을 흩트리면서 자연스레 붓기가 나았겠지.
이어서 입가를 짚은 내가 말을 이었다.
“그때, 아힌이 만든 상처도. 이제 모르지 않잖아요.”
두 번이나 상처가 치유되었는데 모를 리가 없었다. 이 맹수도 치유계 페로몬을 탐내려나. 여차하면 달아날 준비를 마친 나는 드레스 자락을 꽉 붙들었다.
“또 지난나 교수님과의 대화도 전부 엿들었으니까, 퉁 치는 걸로 해요.”
룬은 이마를 가린 머리카락을 가볍게 털었다. 잘 정돈되어 있던 곱슬머리가 다시 부슬거렸다.
“엿들은 것을 어떻게 확신하는데요?”
러셀에 대한 사안을 나누고, 아직 내가 완전한 인간화를 치른 건 아니라 의관에게 실토할 즈음. 묘하게 테라스가 소란스럽다 싶어 돌아보니, 룬이 애쉬에게 의복을 뜯기는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다.
“러셀이 귀띔해 줬거든요. 테라스에서 십 분이나 애쉬의 입을 틀어막으면서 씨름했다면서요.”
“아, 뭐야. 꼬마가 복병이었네. 그때는 비명 한 번 지르지 않더니.”
“…그리고 다 들었으니까 이곳에 올 때까지 저한테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겠죠.”
이제 알잖아,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유일하게 온전한 수인으로서 대해 주던 이에게 들켰다고 생각하니 입안이 조금 썼다.
댕-
마침 시계탑에 올라선 기사가 연회 시작을 알리는 종을 울렸다.
꾸벅 인사하고 앞서 나가던 내가 문득 뒤돌았다. 늘 초점 없던 룬의 눈동자는 오늘따라 선명한 빛을 띠고 있었다.
“왜요, 토끼님?”
“애쉬한테 반격하지 않은 건 감사하고 있어요.”
테라스에서 애쉬를 기절시키거나 입막음을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의복이 넝마가 될 때까지 손쓰지 않은 부분을 언급한 것이었다.
“아, 생각해 보니까 그때 다친 것 같기도 해요.”
아야야, 팔을 짚은 룬이 어색하게 비틀거렸다. 보나 마나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머리를요?”
“진짜 겁에 떨면서 할 말은 다 하네요.”
밤에 마주하는 댁의 송곳니가 얼마나 무서운지도 모르면서. 떨리는 손끝을 슬그머니 감춘 내가 입을 달싹였다.
“저기,”
“룬.”
“…고마웠어요. 사람처럼 대해 준 거.”
나에 대한 호기심인지, 아힌의 부아를 돋우기 위해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래저래 도와준 것들도. 뒷말을 삼킨 내가 얼른 몸을 돌렸다.
“잠깐만요.”
어느새 다가온 룬이 손목을 붙들었다. 옅은 분홍색 머리카락이 코앞에서 흩날렸다.
“…아니에요, 가요. 그레이스에게도 말할 수 없는 중요한 일이라면서요.”
금세 손목을 놓아 준 룬은 가볍게 등을 떠밀었다. 고난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낯선 차림도 모자라, 긴장으로 인해 그만 다리가 꼬인 나는 잔디밭에 풀썩 쓰러졌다.
“토끼님, 지금 저 웃기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죠?”
옆에 수그려 앉은 룬이 때 묻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웃지 마세요.”
“하하하하.”
“…무례한 맹수.”
“다 들린대도. 말실수도 일부러 하는 거죠?”
잔디를 똑 뽑은 그가 조롱하듯 귀를 간질였다. 세상 다 산 듯한 느린 행동에 괜히 더 부아가 치밀었다.
“이래서야 연회장에 도착은 언제 하려나. 내일일까?”
“귀도 간질지 마.”
애쉬조차 없는 외로운 싸움의 시작이었다.
* * *
‘제 일이에요.’
비비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제자리를 지킨 룬이 목덜미를 쓸었다. 위태로우면서도 매사 열심히인 꼴이 이상하게 시선을 떼기 어려웠다.
살아남기 위해서인지, 살아가기 위해서인지. 뭐가 되었든 맹수계 수인들에게는 찾아보기 힘든 면모였다.
‘고마웠어요. 사람처럼 대해 준 거.’
제 나름 선을 긋는 말이 유난히 룬의 귓가를 맴돌았다. 그것은 토끼가 굳이 선을 그을 만큼 제가 이유 없는 호의를 베풀었다는 의미였다.
아힌 그레이스의 화를 돋우기 위한 관심거리 정도였는데.
어쩌면 책상 아래, 겁에 질린 보라색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부터 적당한 관심에서 끝나는 건 어렵지 않았을까.
‘…설마하니 인간화를 제대로 치르지 못한 수인일 줄이야.’
사자가 풀을 뜯어 먹는 것만큼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그럼 주웠다는 것도 정말이겠군.’
토끼인 채 아힌 그레이스에게 주워지고, 이후에 수인인 사실을 들켰다 보는 게 아귀가 맞았다.
추측대로라면 무도회장 주변에서 발견되었을 때가 최초의 인간화였을 터. 그제야 당시의 불안한 시선 처리와 거동, 민망한 차림이 설명되었다.
룬은 원래 상태로 돌아온 뺨을 매만졌다.
‘치유계 페로몬….’
그리고 아힌 그레이스와의 상관관계라.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는 것에 면역이 없는 그가 대충 머리를 털었다.
“아, 몰라, 몰라.”
삐이-
새소리.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발길을 돌리던 룬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텅 빈 금안의 온도가 다소 낮아졌다.
‘그레이스의 매.’
사선으로 날갯짓한 퀸이 돔 위로 높이 날아올랐다.
* * *
샹들리에 아래로 점차 수많은 초청객들이 들어찼다. 조곤조곤한 대화 소리는 소음이 되어 넓은 홀을 울렸다.
에이븐은 유명 인사들과 친목을 다지느라 여념 없는 래비안 가주와 거리를 벌렸다.
창가 쪽에 자리 잡은 그녀가 천천히 보라색 카펫 위를 걸었다. 시선 끝에는 토끼 영토 수장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는 아힌이 있었다.
수장과 아힌이 걸음을 옮김에 따라 에이븐도 보폭을 맞춰 이동했다.
아힌 그레이스. 맹수계 수인답게 머리 하나는 우뚝 솟아 있었고, 곧은 생김새 하나로 시선을 당기는 자였다.
얼핏 냉한 분위기를 풍기지만 제정신이 아니란 악명이 따를 만한 외양은 아니었다. 외려 개미 한 마리 못 죽일 법한 인상에 가까웠다.
‘저런 자가 새끼 토끼를 끼고 다닌다… 라.’
아힌 그레이스는 무성한 소문처럼 몰상식한 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에이븐의 눈에는 지극히 귀족적인 사람으로 보였다. 까다롭고, 깔끔 떠는.
차라리 진짜 새끼 토끼가 아닌, 본모습화 한 수인을 끼고 다녔다는 편이 신빙성이 있었다. 그리고 시기로 보나 확률로 보나 그 토끼가 비비일 가능성은 틀림없이 존재했다.
그러나 보잘것없는 일개 동물과도 같을 터. 에이븐 스스로도 이러한 가설을 세운 것 자체가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오로지 만에 하나의 경우 때문이었다. 가문의 치부가, 그것도 타 영토의 수장 가문에서 설치고 있을 최악의 상황을 고려하여.
안타깝게도 자리가 자리인지라 아힌 그레이스는 토끼를 데려오지 않은 것으로 사료됐다. 카펫을 지나던 에이븐의 발걸음이 뚝 멎었다.
‘착각인가.’
수십 명의 사람을 사이에 두고도 시선이 마주쳤다는 위화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분명히 아힌은 그녀를 보고 있었다.
촘촘한 부채로 입가를 가린 에이븐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붉은 입술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작작 봐.] [지저분한 눈길 때문에 얼굴이 뚫리겠어.]순식간에 에이븐의 낯이 저녁놀처럼 확 붉어졌다.
‘경박한…!’
차기 수장이라는 자가 저런 저열한 언사를 사용하다니. 그녀가 미처 당황을 감추기도 전에 아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이목구비조차 또렷이 보이지 않을 만큼 먼 거리였으나, 코앞에 있는 듯한 중압감을 느낀 에이븐이 저도 모르게 물러섰다.
그가 전진할 때마다 무도회장의 인파가 반으로 갈라졌다. 가까워질수록 에이븐은 연회장의 소란스러운 소음조차 들리지 않았다.
어느 틈에 거리가 반이나 줄어들었을 즈음, 아힌에게 다가선 이브린이 시급한 사안을 귀띔했다. 눈짓을 주고받은 두 사람이 빠르게 회장 내를 벗어났다.
“…허억.”
눈길이 떨어지고 나서야 에이븐은 참았던 숨을 터뜨렸다. 치욕스러움에 손끝이 떨렸다.
경멸. 업신여김. …살의.
홍옥처럼 선명한 붉은 눈에서 적나라한 멸시가 묻어났다. 아른거리는 맹수의 눈동자를 애써 지운 그녀가 숨을 골랐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껏 그녀가 경계의 숲에 보낸 수하들은 잠적하거나 흑표범에게 당한 것이 아님을. 아힌 그레이스에 의해 처단당한 게 틀림없었다.
부채 손잡이는 이미 땀에 축축이 절어 있었다.
* * *
아힌이 입구로 나오자 밤공기를 가른 퀸이 팔에 올라섰다. 혹시나 싶어 그레이스저로 돌려보낸 릴이 보내온 급신이었다.
전말은 이러했다.
부엉이가 가져온 아힌의 답신을 받은 발렌스가 비비와 아힌이 엇갈렸음을 눈치챘을 즈음. 마침 도착한 릴이 자초지종을 전하자, 그레이스저가 완전히 뒤집혔다고. 바라는 경계의 숲에서 발견됐고, 비비와 애쉬는 아직 수색 중이란 내용이었다.
“바라와 함께 저택을 나선 거면 위험해.”
와그작, 서신이 아힌의 손에서 처참하게 구겨졌다.
“바라는 힘의 상하에 굴종하는 놈이지. 그리고 아직 비비를 제 위로 인정하지 않았을 거야.”
“예? 내내 고분고분하게 굴지 않았습니까.”
“속내는 몰라. 실질적으로 비비가 힘을 보인 적이 없으니.”
“그럼, 저택을 벗어나는 순간 토끼님을 위협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말씀이군요.”
이브린의 건조한 어조 위로 걱정이 묻어났다.
“영토로 돌아간다.”
연회장 입구에 선 아힌에게서 옅은 빛이 새어 나왔다. 본모습으로 돌아가기 직전의 순간이었다.
“아힌 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힌의 옷자락을 잡아채던 이브린은 다급히 만세 자세로 손을 뗐다. 현재 스멀거리는 그의 페로몬을 접했다간 까딱하면 혼절할지도 몰랐다.
바닥에 드러눕는 건 사양인 이브린이 침착히 부언했다.
“경계의 숲에서는 바라만 발견되었다지 않습니까. 심지어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았으니 다른 곳으로 빠진 거겠죠.”
“그럼 어디로 가야 하는데.”
“지금부터 찾아야죠. 일단은 애쉬도 함께일 테고, 토끼님도 보통 토끼는 아니니까 분명 무사하실 겁니다.”
“…토끼잖아.”
“예?”
격양된 감정을 감춘 아힌은 억눌린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
“보통이 아니라도 결국은 토끼라고.”
큼직한 손으로 눈가를 덮은 아힌이 짧은 숨을 머금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알고 있었다. 쉽게 부서질 만큼 약한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의 안일함에 조소한 아힌은 이전과 다른 초조함이 밀려들었다.
막상 비비의 무사를 바라는 입장이 되자, 이제야 그 나약함이 피부로 실감 났기에. 평소처럼 무사할 거라며 여유롭게 웃을 수 없었다.
비비는 날 때부터 맹수로서 자라 온 자신들과는 달랐다. 제아무리 뛰어난 페로몬을 가지고, 살아남는 법을 아는 눈치를 가졌더라도 결국은 새끼 토끼에 불과했다.
도움을 청하는 건 고사하고, 고작 애쉬에게 밟히는 것만으로도 크게 다칠지도 모르는 몸.
시종이 물건만 떨어뜨려도 필사적으로 달아나던 비비의 행동은 단순히 겁이 많아서만은 아니었다. 그저 그 모든 게 생존과 직결되어 있으니까.
아힌의 머릿속에 바쁘게 달리는 솜뭉치의 뒷모습이 그려졌다.
불안하고 불길했다. 만일 강한 맹수계 수인을 마주친다면. 또는 육식성 짐승의 사냥감이 된다거나. 비비가 위험할 만한 상황은 무수히 차고 넘쳤다.
“울어요?”
난데없는 질문에 아힌은 눈을 가린 손을 치웠다. 웬 소년이 발치에서 그를 멀뚱멀뚱 응시하고 있었다. 흑표범 일족은 방정맞다며 설전을 벌인 어린아이 중 한 명이었다.
“다행이다. 난 또 우는 줄 알았어요.”
입구의 문지기들은 어찌할 바 모르며 시선을 굴렸다. 비단 소년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계단 아래, 수풀 뒤에 숨은 러셀의 머리카락이 삐죽 솟아 있었다.
문지기들이 눈으로 보호자를 찾았으나, 부모로 유추되는 귀족들은 멀리 정원에서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다.
“영식, 그분은….”
“잠깐.”
주춤거리는 문지기들을 제지한 아힌은 몸을 숙여 눈높이를 맞췄다.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용사님이 흑표범들은 하나같이 방정맞다고 한걸요!’
소년은 움찔 떨었지만 도망가지는 않았다. 아힌은 소년의 어깨를 짚은 손을 통해 페로몬을 흘려보냈다.
“용사님이 누구지?”
“용사님…?”
숨 쉴 때 흘러나올 정도의 미약한 페로몬이었지만, 소년의 눈이 금세 몽롱하게 번졌다.
“흑표범….”
“흑표범?”
“응…. 흑표범을 부리는…. 토끼 수, 읍!”
삽시간에 소년의 입을 틀어막은 러셀이 뒤편으로 질질 끌어당겼다. 까만 눈동자는 그걸 말하면 어쩌냐는 질타가 담겨 있었다.
“…아?”
그제야 지배계 페로몬에서 깨어난 소년의 낯빛이 새파랗게 질렸다. 자신이 왜 용사님에 대해서 실토한 걸까. 어떡해….
“비밀 지킬게.”
부둥켜안은 소년과 러셀이 천사 같은 미소를 짓는 아힌을 올려다봤다. 두 아이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린 아힌은 곧바로 난간을 훌쩍 뛰어넘었다.
“아힌 님,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사자한테.”
사자? 뒤따르던 이브린이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저택에서 출발한 비비가 최단 거리로 직행하면 경계의 숲 남문이 나온다.
그때 북문으로 우회한 아힌과 엇갈린 거라면, 남문을 통과하는 마니언츠가(家)의 마차와 맞닥뜨릴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오늘 오전. 대뜸 나타나 흑표범들은 방정맞다며 설전을 벌인 아이들과, 그런 아이들을 따라간 룬.
탁탁, 아힌의 뒤로 달리던 이브린이 중얼거렸다.
“전후 사정은 몰라도 용사는 토끼님일 확률이 높군요.”
“꿈나무 정도겠지.”
성의 없이 답한 아힌은 연회장 주변에서 가장 높은 교목으로 다가섰다. 룬의 성격상 금세 연회장을 빠져나와 뒹굴고 있을 확률이 지대했다.
“토끼, 어디 있는지 불어.”
씹어뱉듯 낮게 깔린 음성이었다. 교목에 늘어져 있던 룬은 가지 밖으로 머리를 뺐다.
“이제 사석에서는 경어조차 안 쓸 생각이신가 봐?”
“질문에 대답이나 하지.”
“그쪽 토끼를 왜 나한테서 찾는지 모르겠군.”
딴청 피운 룬이 비스듬히 드러누웠다. 눈을 선득하게 빛낸 아힌이 무력을 사용하려는 찰나, 연회장 외벽 너머로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뭐, 뭐야! 짐승이 왜 여기!”
“당장 궁수를 불러와라!”
“자, 잠깐만요. 공격하면 안 됩니다. 진정시킬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
레스틴의 목소리였다. 뒤이어 컹- 토끼 영토에서는 들을 수 없을 법한 포효 소리가 공기를 뒤흔들었다.
순간이지만 룬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를 발견한 아힌은 곧바로 도약하여 벽을 짚고 올라섰다. 외벽 너머를 확인한 붉은 눈이 이채를 발했다.
“도대체가 테라스를 뛰어넘는 짐승이라니. 제발 연회가 끝날 때까지만 얌전히 있어 주렴, 그때가 되면 네 주인에게 보내 주마. 아니, 그보다 내가 왜 이러고 있어야!”
히익, 애쉬의 꼬리를 붙든 레스틴이 데굴데굴 바닥을 굴렀다. 주인을 닮아서인지 토끼처럼 날쌔어 통제하는 게 힘에 부쳤다.
“겨, 경!”
검을 겨눈 기사들이 포위하듯 거리를 좁혀 왔다. 진땀을 빼며 뒷다리에 매달린 레스틴은 사근사근히 말했다.
“저는 무사하니 무기를 거둬 주시죠. 자, 얘야, 방으로 돌아가… 악!”
삼엄한 경비 속에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은 애쉬가 동상 위로 뛰어올랐다. 커헝- 짐승의 포효가 일대를 완전히 뒤덮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