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ymbiotic Relationship Between the Rabbit and the Black Panther RAW novel - Chapter (41)
토끼와 흑표범의 공생관계 13화(41/75)
정체 모를 폭발음이 일자, 교목에서 뛰어내린 룬은 망설임 없이 후원 쪽으로 직행했다. 레스틴을 떨쳐낸 애쉬가 달음박질친 방향 또한 후원이었다.
“금세 진압이 가능한 불길이니, 본관으로 피신하십시오!”
대피하는 이들과 거슬러 달리는 중인 아힌은 속이 비틀리는 것을 느꼈다. 원인은 그의 옆에서 부지런히 달리는 룬이었다. 조급함마저 묻어난 옆모습을 확인한 아힌의 눈이 요요히 잠겨 들었다.
“마니언츠 경, 이쪽으로 가면 뭐가 나오는데?”
애쉬의 존재도 들킨 이상, 아힌이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한 룬이 짜증스레 답했다.
“몰라서 물어요? 토끼가 있을 거 아니야.”
“그러니까 토끼가 있는 곳에 당신이 왜 가는데.”
“그야 당연히 걱정되니까, 윽!”
방심한 상태로 옆구리를 차인 룬은 풍덩, 하필 연못으로 나자빠졌다.
“…미친놈 아냐, 이거?”
기가 찬 룬이 축 늘어진 곱슬머리를 이마 뒤로 넘겼다. 아랑곳하지 않은 아힌은 반신이 물에 잠긴 그를 깔아 봤다.
“거기서 머리나 식혀.”
“뭐? 이런 상황에서 무슨 개소,”
“네가 걱정할 대상이 아니니까.”
장난기가 빠진 음성을 흘린 아힌이 연못을 지나쳤다. 갈라진 은발 사이로 드러난 눈빛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종류였다.
애초에 룬은 저런 식으로 감정을 선연히 드러낸 아힌은 본 기억이 없었다. 적어도 그의 아버지가 죽은 이후에는.
멍하니 연못에 주저앉아 있던 룬이 곧 헛웃음을 쳤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넘어선 안 될 선을 넘은 모양이었다.
* * *
후원은 불길을 진압하는 인력 외에는 인적이 전무하다시피 했다. 두리번거리며 달리는 아힌의 시야로 대치 중인 몇몇의 사람이 들어왔다.
멈춰선 그가 주먹을 쥐었다 폄을 반복했다. 에이븐 래비안과 호위 기사, 그리고,
‘비비.’
불길에 데워진 텁텁한 바람이 불어왔다.
은빛 드레스에서 시선을 올린 그가 흩날리는 백발을 바라봤다. 얼핏 귀족 영애라 착각하고 지나칠 만한 차림새였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드레스는 어디서 얻고, 머리카락은 언제 정리한 건지. 어이가 없었지만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달 아래 선 가느다란 몸이 금세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분명 매일을 함께하는데. 비비는 아힌이 없는 순간마다 쫓아갈 수 없을 속도로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다.
“뭐 하나!”
에이븐은 망설이는 호위 기사를 향해 빽 소리 질렀다. 그가 검을 겨누자, 비비는 금방이라도 페로몬을 사용할 기세로 손을 치켜올렸다.
홀린 듯 걸음을 옮긴 아힌의 발에 점점 가속이 붙었다.
아힌이 본모습으로 변한 날, 그에게 페로몬을 사용한 비비는 다시 토끼로 돌아갔다. 오로지 그 생각만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페로몬을 한 손에 집중시키던 비비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갑작스레 뒤편에서 나타난 커다란 손이 그녀의 손등을 감싼 탓이었다.
모아둔 페로몬이 한순간에 증발하듯 흩어졌다.
“하지 마.”
등 뒤로 비비만 들릴 만한 목소리가 들렸다.
“쓰지 마, 페로몬.”
무방비한 비비의 등으로 재킷에 장식된 견장과 단추의 차가운 감촉이 맞닿았다. 귀를 의심한 그녀가 홱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힌…?”
내내 뛰어다닌 아힌의 뺨은 불그스름하게 상기된 상태였다.
“여긴 어떻게 찾아왔어?”
그는 어리둥절하게 눈망울을 깜박이는 비비를 내려다봤다. 소리 없는 몸짓이 아닌, 이름을 불러 주는 목소리가 단숨에 공허한 속을 채웠다.
비비의 손등을 덮은 아힌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눈 위로 드러난 선연한 충족감을 감추지 않은 그가 중얼거렸다.
“나는 아무래도 네가 사람이길 바라는 것 같아.”
언제는 토끼인 편이 좋다고 노래를 불렀으면서. 튀어나오려는 반박을 억지로 삼킨 비비가 입술을 말아 넣었다.
예상은 했지만, 화가 많이 난 얼굴인 아힌이 내심 두려웠다. 입을 뻐끔거린 비비는 그저 묵묵히 정면을 응시했다.
당장 몸에 닿은 감촉을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쳤다. 머리 위로는 숨결이 느껴지지, 등이 파인 드레스로 인해 맨살에 닿은 의복이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손등을 감싼 아힌의 까칠한 손은 곧 비비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얽어 왔다.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른 비비는 애꿎은 호위 기사만 죽어라 노려봤다.
한편, 짙은 안도가 담긴 한숨을 내쉬던 아힌은 의아해졌다. 어딘지 조용한 비비는 숨이라도 참은 듯 미동이 없었다.
그를 보는 순간 얼굴이 햄스터처럼 찌그러지더니, 계속 말 한마디 없이 전방만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를 따라 시선을 돌린 아힌은 우뚝 선 호위 기사를 훑었다. 그리고 뒤편의 에이븐 래비안. 대강의 상황을 유추한 그가 비뚜름한 조소를 띠었다.
‘데려가려 했군.’
앞으로 나선 아힌은 두 사람의 시야에서 비비를 차단했다. 커다란 골격 뒤로 비비가 완전히 가렸다.
“검, 넣어 두는 편이 좋을걸.”
손이 잘리기 전에. 입 모양을 해석한 에이븐과 호위 기사의 낯이 창백하게 질렸다.
“거기, 누구십니까?”
마침 연회장 건물을 돌아 나온 고용인이 소리쳤다. 콜록, 매캐한 연기 때문에 손을 내저은 그가 재차 외쳤다.
“아직 불길이 진압된 건 아니니, 본관으로 피하셔야, 힉!”
뒤늦게 애쉬를 발견한 경비 기사가 부리나케 물러났다.
더 이상의 대치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에이븐이 가느다란 눈으로 아힌을 흘겼다.
‘무슨 관계이기에.’
아힌의 태도는 일개 새끼 토끼를 보호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알 수 있는 거라곤, 아힌이 연회장에서 에이븐에게 드러낸 적대감은 비비로 인해 불거졌다는 정도였다.
“비비.”
흠칫, 에이븐의 부름에 고개를 내밀던 비비가 아힌의 등에 코를 꿍 박았다. 나오지 못하게끔 몸을 비튼 아힌 때문이었다.
‘아흑.’
코뼈가 부러지는 듯한 고통을 느낀 비비가 아힌의 등을 주먹으로 밀쳤다. 비비는 이번엔 주먹이 부서지는 고통을 느꼈다.
“이 어미에게 남은 건 너뿐이란 걸 알아 두거라.”
의미심장한 말을 전한 에이븐이 본관 쪽으로 몸을 틀었다. 검을 거둔 호위 기사가 충실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게 무슨….”
“지금은 아니야.”
무심결에 발을 내딛던 비비의 몸이 아힌의 팔에 가로막혔다. 그들도 슬슬 본관으로 피해야 할 때였다.
쿠르릉, 불길에 동상이 무너지며 자욱한 연기가 퍼져 나갔다.
* * *
아힌은 후원을 벗어나, 본관으로 오는 동안 단 한마디도 내뱉지 않았다. 이례적인 모습이었다.
손님방 입구에서 대기하던 이브린은 짧게 묵례했다. 이어서 불길이 크지 않아 금방 진압되었다는 것과, 수장의 호출이 있었다는 사실을 전했다. 일 처리 빠른 보좌관의 표본이었다.
정상적인 그를 맞닥뜨린 나는 오히려 파리해졌다.
이브린이 이죽거리지 않는 건 세상에서 가장 불길한 신호와도 다름없었다. 아힌의 심기가 그만큼 불편하단 의미였으니까.
“비비,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아힌은 그러고도 불안했는지 입구에 기사들을 겹겹이 배치해 두고 갔다.
손님방에 애쉬, 퀸과 함께 남겨진 나는 덩그러니 창밖을 바라봤다.
‘그래, 내가 사제를 미리 포섭해 둔 건 사실이다.’
‘용서해다오, 누구나 그릇된 선택을 할 때가 있잖니.’
조금 전의 일이었지만 며칠이나 지난 일처럼 느껴졌다. 의문을 해결한 것에 대한 만족감이라곤 없는 심란한 밤이었다.
머릿속이 정리되지도 않았고, 이쯤 되니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었다.
부연 바깥을 바라보던 나는 쓰러지듯 원탁 책상 앞에 앉았다. 다리에 힘이 없었다.
“우린 어쩌면 좋을까.”
자연스레 애쉬와 퀸도 자리 잡음으로써 소박한 대책 회의가 개최됐다.
어쨌든 나와 애쉬는 아힌의 말을 어기고 소란을 일으킨 입장이었고, 퀸은 나를 감시하란 명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을 떠안고 있었다.
회의는 참담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지난 며칠간 저지른 일을 떠올릴수록 걱정이 태산이었기에.
그릉, 의견을 내려는지 애쉬가 입을 움찔거렸다.
애쉬의 총명함에 기댄 내가 발언권을 줬다. 그러한 희망을 저버린 애쉬는 입이 찢어져라 하품했다.
“그래, 피곤할 거야.”
전혀 쉴 겨를이 없었으니 졸음이 몰려올 만도 했다. 쩍 벌어진 입속을 외면한 나는 퀸을 돌아봤다.
“퀸, 네 의견은….”
칵- 묵비권을 행사한 퀸은 원탁 위의 과일 바구니를 사납게 쪼아댔다. 여전히 비협조적이었다.
“으응. 말 안 시킬게.”
불안함에 괜히 종알종알 떠들던 내가 입을 다물었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라도 모색해야 하는데. 동조자들이 죄다 동물이라 그저 우울하게 모여 앉아 있을 뿐이었다.
* * *
밤이 깊었다.
원탁 책상에 엎드려 있던 나는 바깥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조심스레 문에 귀를 대자, 어렴풋이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아힌과 이브린이었다.
아힌은 이브린에게 애쉬를 데려가고, 퀸을 통해 그레이스저에 서신을 보내라 명령했다. 서신은 아마 나와 애쉬를 만났다는 내용이지 않을까.
이브린이 내 여부에 대해 물으니, 아힌이 이번에는 그냥 넘어갈 수 없다고 일렀다. 대답하는 음성은 얼핏 들어도 날 선 상태였다.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니….’
기척이 가까워질수록 덩달아 내 움직임도 바빠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 어느덧 내 몸은 욕실로 이어지는 투명 유리 너머에 숨어 있었다. 애쉬와 퀸의 멍한 눈길이 느껴졌다.
아힌의 말대로 나는 정말 간이 콩알만 한가 봐. 짙은 자괴감을 느낀 내가 유리에 이마를 묻었다.
곧 문이 열리며 이브린이 애쉬와 퀸을 인도해 갔다.
“비비?”
텅 빈 방을 한 번 둘러본 아힌의 시선이 한곳에 머물렀다. 유리 너머로 시선이 마주치자, 일순 어이없는 기색을 비친 그가 직진해 왔다.
우리는 얄팍한 유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선 상태가 되었다.
“나와. 얘기 좀 하지.”
“알았어….”
그래, 나가야지. 이성적이기 위해 노력하던 나는 속이 쓰라릴 정도의 긴장이 밀려들었다.
껄끄럽게 여기던 그의 무감각한 표정이 향한 대상은 바로 나였으니까. 어스름한 램프 빛에 비친 적안이 까맣게 보일 만큼 섬뜩했다.
찰칵, 순간 뇌의 명령을 거스른 손이 착실히 문고리를 잠갔다.
형용할 수 없는 정적이 휘몰아쳤다.
“뭐 하는 짓이야.”
박자 느린 음성을 낸 아힌이 문고리를 돌렸다.
철컥철컥, 열리지 않는 문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가 마른세수를 했다.
“무슨….”
이내 나지막한 한숨을 흘린 아힌은 유리문에 기대며 주저앉았다.
“그럼 그냥 거기서 말해. 어차피 나도 표정 관리가 안 될 것 같으니까.”
드레스 자락을 꾹 말아 쥔 나는 넓은 등을 바라봤다. 아힌 역시 내가 지금의 그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왜 이렇게 어려울까.
바라나 어머니, 호위 기사를 대할 때는 두려워도 두 다리로 버티고 서 있을 수 있었는데. 이상하게 아힌만 예외였다.
두려움뿐만이 아닌, 다른 많은 감정이 섞였기 때문이라 생각한 내가 엉거주춤하게 드레스를 모았다. 유리창에 등을 기대어 앉자 차가운 감촉이 몸을 으스스하게 만들었다.
“손은 왜 그래.”
뒤편에서 다소 가라앉은 음성이 울렸다. 한쪽 손에 감긴 붕대를 언급한 것이었다.
“…사람으로 변하다가 어디 부딪힌 것 같아.”
이 또한 아힌이 어려운 이유 중 하나였다.
날이 갈수록 자꾸만 기대하게끔 만드는 태도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유독 조심스러워진 손길도.
입술을 조개처럼 여문 나는 무릎 위에 올린 손을 꼼지락거렸다.
대화가 불가능한 토끼일 때와는 썩 다른 느낌의 적막이 내려앉았다.
“비비.”
조심스레 돌아보던 나는 아힌이 말문을 떼려는 기색을 보이자 황급히 고개를 바로 했다.
“응.”
“너를 저택에 떨어뜨려 놓고 온 건, 이 정도로 무모한 짓은 벌이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인데.”
여느 때보다 냉랭한 음성이었다.
“스스로가 가장 잘 알지 않나. 저택을 벗어난 네게 안전한 장소 따위는 없다는 거.”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원래의 나라면 안전을 최고로 추구할 테니까.
“난,”
위험을 감수하고 따라나선 행태도 모자라, 이곳에 온 이후로도 독단적으로 행동했으니 아힌이 걱정하고 화내는 것도 당연했다.
“나는….”
무릎을 붙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그 상황이 다시 오더라도 똑같이 행동할 거야.”
“무슨 뜻이지?”
“너는 내게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으니까.”
정확히는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는 게 맞았다. 모든 것을.
“…한 번도 알려 준 적 없었잖아. 치유계 페로몬에 대해서도, 내가 약물로 인해 그런 페로몬을 가지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것까지.”
이를 세게 악문 탓에 입안에서 비릿한 피맛이 느껴졌다. 그래도 내내 화두에 올리고 싶었던 주제였기에 오히려 속은 후련했다.
“네가 약물에 대한 걸 어떻게···,”
“이곳까지 와서 아힌 네게 알리지도 않고 행동한 이유가 뭐일 것 같아?”
이야기하듯 잔잔한 목소리였지만, 손에 쥔 드레스는 마구잡이로 구겨져만 갔다.
“너한테만은 바닥까지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어. 저주든, 약물이든, 가문이든.”
똑똑, 등을 기대고 있는 유리가 진동했다.
“문 열어.”
돌아보지 않은 내가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수도꼭지 같던 눈물샘은 오늘따라 잘 잠겨 있었다.
“이번에도 이미 다 알고 있었겠지. 후원에서만 해도 그래. 내가 낯선 사람들과 있었는데도 의문을 느끼지 않았잖아.”
숨을 고른 나는 태연하기 위해 노력했다. 여기서 복받치면 스스로가 너무 비참할 것 같아서.
“내 가문이 래비안가(家)란 걸 알고 있었을 테니까. 어쩌면 그분이 내 어머니란 사실까지도.”
비단 그동안 쌓인 서운함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아힌만은 몰랐으면 했던 사실들을, 이미 그는 전부 알고 있었다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비비, 일단 문 열고 말해.”
아힌은 답답한 듯 재차 유리문을 두드렸다.
“그냥 이렇게 얘기할래….”
막상 얼굴을 보면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또 지금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스스로도 모르겠으니까.
“또 있어. 넌 내가 치유계 페로몬을 가진 것도 일부러 말하지 않았었잖아. 이용 가치가 있었겠지. 죽음을 코앞에 둔 애쉬의 상처도 치료해 낸 페로몬이.”
쌓인 감정은 말이 되어 봇물 터지듯 흘러나왔다.
“처음엔 속상했는데, 생각할수록 차라리 그편이 나은 것 같아. 언제 버려질지 몰라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저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정도로만 대해 줬어도, 내게 뭔가를 숨기거나 말하지 않는 게 이다지도 답답하고 서럽진 않을 텐데.
어쩌면 지나온 시간만큼 감정이 커다래진 나의 욕심일지도 모르겠다.
“그냥 말이라도 해 주지. 치유계 페로몬이 필요하면 필요하다고, 내 가문을 알면 알고 있다고.”
“아니.”
묵묵히 듣고 있던 아힌이 툭 내뱉었다.
“앞으로도 너한테 말할 생각은 없어.”
“…왜?”
특유의 저음을 끝으로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더 모진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 오히려 안심한 나는 유리문에 머리를 기대었다.
시야로 언제 떨어졌는지 모를 머리 장식이 보였다. 그것을 집어 든 내가 조물거리며 손장난을 쳤다.
굳이 아힌이 내게 무언가를 말할 의무는 없었다. 차기 수장으로서든, 개인으로서든 속내는 입 밖으로 내지 않는 편이 좋으니까.
하지만 나는 너의 그런 점 때문에 매일매일이 조마조마해. 그 말은 전해지지 못한 채 목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 * *
발목에 걸어 둔 회중시계의 시침은 어느덧 새벽 세 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가만히 앉아 있으니 상념도 얼추 정리가 되는 느낌이었다. 그나마 저주를 받은 건 아닌 게 어딘가 싶었다.
무릎에 턱을 묻고 있던 나는 감정이 가라앉자 후회가 밀려들었다.
아힌에게 너무 쏟아부은 건 아닐까. 걱정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다고 한 마디 정도는 할걸.
‘아니, 걱정을 하긴 하셨대?’
새초롬한 눈초리로 고개를 돌리던 내가 눈을 크게 떴다. 아힌도 아직 등을 맞댄 그대로 앉아 있었기에.
“아힌?”
똑똑, 유리문을 두드렸지만 응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설마 저 자세로 잠들었다거나. 행실에 맥락이 없는 아힌으로선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있을 순 없는 노릇인 나는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찰칵, 문고리를 연 내가 신중한 손길로 유리문을 당겼다. 안쪽으로 열리는 문을 따라 아힌의 몸이 천천히 바닥으로 늘어졌다.
“……?”
멍하니 내려다보던 내 동공이 사시나무 떨듯 흔들렸다. 자는 사람이 이런 식으로 식은땀을 흘릴 리가 없었다.
“-아힌!”
다급히 무릎을 꿇은 나는 아힌의 상체를 안아 들었다. 머리카락이 이마에 눌어붙을 정도로 땀이 흥건했다.
열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손등으로 뺨을 짚어 보던 내가 도로 아힌을 내려 뒀다.
‘지난나 교수님.’
분명히 이 방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의관의 손님방이 있었다. 지체 없이 몸을 일으키던 나는 휘청거리며 아힌의 위로 쓰러졌다. 그가 팔을 잡아당긴 탓이었다.
“소란 떨지 마.”
“무슨,”
스르륵, 손목을 놓아준 아힌은 색색이는 숨을 몰아쉬며 다시 바닥에 몸을 뉘었다.
“조금 지나면 알아서 괜찮아져.”
육안으로만 봐도 조금 지나면 괜찮아질 수준이 아니었다. 걱정스레 살피던 나는 문득 아힌이 본모습으로 돌아간 그날을 떠올렸다.
“너 저번에도 이런 적 있었잖아. 어떻게 된 거야? 주치의는 왜 찾지 않고?”
철문도 부수는 아힌이 지병을 갖고 있진 않을 텐데. 지난 몇 달 동안 감기 한 번 걸린 적 없던 그였다. 입술을 깨문 내가 안절부절 엉덩이를 들썩였다.
“하다못해 이브린이라도….”
“아무도, 안 돼.”
완강히 답한 그가 반쯤 뜬 눈꺼풀을 여닫았다.
그때도 그렇고, 타인에게 들켜선 안 되는 건가. 도대체 뭐기에 이렇게 아픈 걸 의관에게 보이려고 하지도 않는 건데.
속상한 마음에 인상 쓰던 나는 유리문을 완전히 열어젖혔다. 우선 이 차디찬 타일 바닥에서 옮길 필요가 있었다.
방황하던 시선이 그나마 가장 가까운 소파에 닿았다. 현재 새끼 토끼가 아님에 감사한 내가 아힌의 뺨을 약하게 두드렸다.
“아힌, 움직일 수 있겠어?”
기절하듯 눈을 감은 그는 숨만 몰아쉴 뿐이었다.
‘…안 되겠어.’
분주히 일어선 나는 커다란 벨벳 소파를 향해 달려갔다.
흐읍. 온 힘을 다해 소파를 욕실 방향으로 밀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프레임이 쓸데없을 만큼 두텁고 무거운 소파였다.
욕실 입구로 돌아간 내가 장신인 아힌을 망연히 내려다봤다. 하여간 이 맹수도 몸뚱이가 쓸데없이 크고 길었다.
바스락거리는 드레스를 무릎까지 묶은 나는 그의 양 발목을 잡아 들었다. 안아 드는 것 따위는 진즉에 포기한 지 오래였다.
수레를 끌 듯 힘차게 당기자, 다행히 약간씩이나마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이 악물며 끌어당기는 와중 쿵! 뒤편에서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쿵?’
제발 아니길 바란 내가 목석처럼 고개를 돌렸다. 역시나. 가구 다리에 머리를 박고 만 아힌이 보였다.
‘어, 어떡해.’
차마 말도 못 꺼낸 내가 부딪친 부위를 문질러 줬다. 노골적으로 인상 쓴 아힌이 갈라진 음성을 냈다.
“…아파.”
칭얼거리는 걸 보니 죽을병은 아닌 모양이었다.
“스스로 갈게.”
상체를 일으킨 그가 땀에 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말끔한 이마가 드러나며 핏기 가신 얼굴이 한층 더 부각됐다.
“왜 네가 더 울상이야.”
“도와줄게.”
혹여 쓰러질까, 무릎을 반쯤 굽힌 내가 등을 내어 줬다.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어깨에 묵직한 팔이 둘렸다. 고작 상체를 짊어진 수준이었음에도 바위를 인 기분이었다.
“발맞춰 걸을까.”
“지금 농담이 나와?”
성질낸 내가 한 발 한 발 발맞춰 걸었다. 업지도, 안 업지도 않은 엉거주춤한 자세였으나 비교적 수월히 소파에 다다를 수 있었다.
완전히 눕히는 것까지 마친 나는 관자놀이에 배인 땀을 손등으로 훔쳤다.
“아힌, 필요한 거라도 있으면 말해 봐.”
“나 미워하는 거 아니었어?”
아힌은 간헐적인 숨을 몰아쉬면서도 또박또박 대답했다.
“…내가 너를 왜 미워해.”
“빌어먹을 맹수라며.”
귀도 밝지. 욕실에서 조용히 읊조린 혼잣말까지 다 들은 모양이었다.
아닌 척 시치미를 뗀 나는 창가로 달려가서 문고리를 잠그고 커튼을 단단히 쳤다. 이중창을 비롯해 두터운 암막 커튼이라 바람 한 점 새어 들지 않았다.
푹신한 담요를 챙겨 소파로 돌아가자, 아힌은 식은땀을 비 오듯이 흘리고 있었다.
가지런한 눈썹이 엉망으로 일그러진 상태. 그의 눈썹에 따라 내 눈썹도 함께 아래로 축 처졌다.
괜찮은 척하더니 전혀 괜찮지 않은 모습이었다.
‘감기는 아닌 것 같은데.’
의관이라도 부르면 좀 좋아. 밀려드는 걱정으로 인해 위가 쿡쿡 쑤셨다. 내 손이 그다지 차갑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아힌의 체온은 지나치게 높았다.
베개를 받쳐 준 후, 발길을 돌린 나는 손님방을 뒤져 물수건으로 쓸 만한 천을 가져왔다. 알고 있는 민간요법이라곤 이게 고작이었다.
소파 맡에 앉아 물수건으로 식은땀을 닦아 주던 중, 시선이 썩 불편해 보이는 연미복에 닿았다.
순간이나마 몹쓸 생각을 해 버린 나는 눈가를 짚으며 고찰했다.
‘짐승 토끼.’
조롱하던 아힌의 목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쳤다.
몇 달 내내 가운 차림인 아힌이랑 동침을 했는데, 고작 재킷 벗기는 게 뭐 대수라고.
코웃음 친 내가 달달 떨리는 손으로 재킷 버클을 풀었다. 의도치 않게 자꾸만 손이 미끄러졌다.
안쪽에 입은 베스트의 단추도 푼 후, 크라바트와 씨름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도와줄까.”
“바쁘니까 말 시키지… 네?”
소스라친 내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자세만 바르면 뭐 해, 눈이 엉큼한데.”
“아니야!”
차라리 말이나 못 하도록 입이 아팠으면 좋았을 텐데. 입 밖으로 말하진 못한 내가 눈을 사납게 떴다.
소파를 짚고 일어난 아힌은 간신히 재킷과 베스트를 벗고 쓰러지듯 다시 누웠다. 두 마디 정도 더 모난 말을 할 법도 한데, 안 하는 걸 보면 예사 아픈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는 반쯤 뜬 눈을 깜박이며 크라바트를 풀고, 반대편 손가락을 물어 새틴 장갑을 벗어 던졌다.
열심히 씨름하던 게 한순간에 끝나 버리니 허망하기도 하고. 땀에 젖은 셔츠 위로 드러난 몸의 굴곡이 부담스러웠던 내가 애꿎은 수건을 물에 적셨다.
“비비, 그냥 자. 시간 지나면 나아지니까.”
뚝뚝 끊기는, 나아질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 게 문제였다. 아힌의 말을 꿋꿋이 무시한 나는 물수건으로 이마와 목을 닦아 줬다.
속으로는 치유계 페로몬을 사용할지에 대해 수없는 고민을 거치는 중이었다. 상처도 아닌 병에 치유계 페로몬이 들지, 혹시 나쁜 방향으로 작용하지 않을지가 미지수였다.
불규칙적인 숨을 몰아쉬던 아힌이 느릿하게 팔을 뻗었다. 굳은살 박인 거친 손가락이 내 눈가를 훔쳤다.
“왜 울어?”
눈물이 묻어난 손가락을 입술로 가져간 그가 엷게 핥았다. 붉은 혀가 미끄러지듯 손가락을 지나쳤다.
이 맹수는 지금 제가 얼마나 외설스러운지는 알까. 물수건을 펼쳐서 얼굴에 덮어 두고 싶은 충동을 느낀 내가 파르르 떨었다.
“이것 봐. 우는 게 취미인데 가문 이야기를 꺼내서 무슨 꼴을 보려고.”
아힌은 이제야 욕실에서 말한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다.
후드득, 떨어진 눈물이 그의 새틴 셔츠를 진하게 물들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까만 해도 잘 참은 눈물이 왜 별것 아닌 한 마디에 터지는 건지. 방울방울 떨어진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사실은 너무도 걱정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아힌의 아픈 모습도, 어째서 의관은 고사하고 이브린에게마저 알리지 않는지, 감기도 아닌데 발작이라도 하는 듯한 이 증상은 뭔지.
구구절절 말하기도 뭐했던 나는 입술을 꼭 말아 물었다. 흐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아힌은 입매가 말려 올라가는 웃음을 지었다.
“이러는데 내가 너를 어떻게 버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