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ymbiotic Relationship Between the Rabbit and the Black Panther RAW novel - Chapter (42)
토끼와 흑표범의 공생관계 3권 – 1화(42/75)
<3권>
창백한 얼굴 위에 걸린 미소를 보자마자 이성이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흑표범 일족의 눈은 홍옥처럼 아름답다고들 하죠. 그러나 맹수들이 왜 아름답게요. 요망한 눈에 홀려 접근하는 순간, 날카로운 이빨로 목을 콱…!’
어릴 적, 시녀가 들려준 괴담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탁한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자니, 눈 깜짝할 사이 아힌에게 목을 내어 줄 것만 같았다.
나는 반만 뜨인 아힌의 눈을 손바닥으로 덮어 버렸다. 그는 시원한 손의 감촉이 좋은지 딱히 저항하진 않았다.
깜박이는 속눈썹이 손바닥에 닿았다 떨어짐을 반복했다. 간지럽고 부드러웠다.
‘안 버린다는 거야, 아니면 못 버린다는 의미야?’
그 미묘한 고요 속에서 견디던 나는 문득 아힌에게서 미세한 페로몬을 느꼈다.
아힌은 내가 페로몬에 민감한 사실을 알게 된 후로, 제 페로몬을 철저히 갈무리하곤 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아힌도 고통 때문에 조금 풀어졌나. 의식의 흐름대로 추리하고 있자니, 솜털이 쭈뼛 곤두섰다.
‘설마.’
지금의 현상은 이전에 아힌이 흑표범으로 변한 것과 연관이 있을지도 몰랐다.
만일 본모습으로 돌아간 이유가 페로몬 조절을 용이하게 하려는 목적이었다면.
아힌 정도의 인물이 페로몬을 조절하기 힘든 경우는 내가 알기론 하나밖에 없었다.
페로몬 발작.
그 끔찍한 고통을 몸소 겪어 본 나는 아힌의 눈을 덮은 손을 치워냈다. 눈을 감은 그는 불규칙적인 숨을 몰아쉬며 인내하고 있었다.
“…페로몬 발작이었어?”
“…….”
“저번처럼 본모습으로 돌아가. 그편이 고통이 덜할 거 아니야.”
나와 달리 아힌은 본모습과 사람 모습을 오가는 게 자유로울 터였다.
일말의 대꾸도 없이 뒤척인 아힌은 나를 등지며 비스듬히 누웠다. 노골적인 무시를 담은 행위였다.
왜 이러는 거야. 고집스러운 너른 등을 노려본 나는 그의 어깨를 힘껏 당겼다.
의외로 아힌은 순순히 정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나 붉은 눈은 쉽게 굴종하지 않을 듯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아마 손주 놈은 매 순간 네가 필요할 게다.’
할아버님의 의미심장한 말씀은 페로몬 발작을 의미했던 걸까.
완전히 이해할 순 없었지만, 지금의 아힌에게 치유계 페로몬이 절실한 정도는 확신할 수 있었다. 더 이상 해 작용이 일어날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슬그머니 페로몬을 끌어 올리자, 아힌이 순식간에 내 팔을 잡아당겼다. 소파 끄트머리에 앉아 있던 나는 휘청거리며 그의 어깨를 짚었다.
밀착된 거리에서 아힌을 내려다보게 된 내가 당황스레 눈을 깜박였다.
“뭐 하는,”
“쓰지 마.”
“어째서? 내 페로몬이면 발작을 가라앉힐 수 있을지도 몰라.”
“페로몬을 쓰면 토끼로 돌아가잖아.”
쏘아붙이려던 내 입이 일자로 굳었다.
역시나. 눈치 빠른 아힌은 단 한 번, 그가 본모습으로 돌아갔을 때의 일만으로도 그 사실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나는 아무래도 네가 사람이길 바라는 것 같아.’
언제는 토끼인 게 좋다더니 이제는 사람인 편이 좋다 그러고. 그 변화가 못마땅하면서도 가슴이 뛰는, 모순적인 마음이었다.
“아힌, 지금 네가 그런 거 따질 때야?”
“따질 때야.”
“…….”
“노려봐도 소용없어.”
열이 올라서 그런지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고 있었다.
“대체…, 아힌!”
씨근거리던 나는 짚고 있는 아힌의 몸이 순간적으로 들썩이는 것을 느꼈다. 숨을 삼킨 그에게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겉보기에도 멀쩡하지 않은데, 속은 얼마나 뒤틀렸을지 감히 상상도 가지 않았다.
그런 주제에 아힌은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팔목을 붙잡아 둔 상태였다.
‘페로몬을 사용하려는 즉시 멈추게 만들려는 거겠지.’
무슨 이런 황소고집이 다 있담. 타협안을 찾던 나는 후원에서 호위 기사와 대치를 이뤘던 상황을 기억해 냈다.
“아힌, 들어 봐.”
당시 시도하려 한 방법이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내가 아힌을 설득했다.
“페로몬을 쓰면 토끼로 돌아가는 건 아마 일종의 방어기제일 거야. 아직 내가 페로몬을 잘 다루지 못하니까.”
고개가 축 늘어진 그의 관자놀이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러니까, 지배계 페로몬으로 내 페로몬을 제어하면서 사용하면 토끼로 돌아가지 않을지도 몰라.”
“…….”
“페레니움도 있지만, 네가 직접 조절하는 편이 정확하지 않을까 싶은데. 무슨 말인지 알겠어?”
반쯤 기절한 아힌은 대답조차 못 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런 주제에 내 한쪽 팔목은 놓지 않는 집념이 존경스러울 지경이었다.
“아힌?”
착착, 뺨을 두드려도 아무런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일순 간담이 서늘해진 내가 허둥지둥 바닥으로 내려갔다.
가슴팍에 귀를 가져가자, 미약하지만 심장박동이 옆얼굴로 전해졌다.
‘놀랐잖아….’
마른세수를 한 나는 미동 없는 아힌을 이리저리 살폈다.
‘제발.’
이미 치유계 페로몬을 사용하고 있었으나 상태는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페로몬을 쏘아 보내는 방법만 배웠지, 진득이 흘려 넣는 법을 알 리가 없었다.
‘내가 도와주면 훨씬 덜 고통스러울 텐데. 자칫하면 죽어.’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몸을 세운 내가 아힌을 내려다봤다. 배회하는 시야로 매끄러운 목선이 들어왔다.
‘물론 페로몬을 밖에서가 아닌, 안으로 흘려 넣는 편이 안전하긴 하지만….’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가능할지도 몰라.’
결심 끝에 고개를 숙인 나는 아힌의 목과 어깨선이 이어진 부근을 콱 물었다.
잘근잘근 깨물던 와중, 가장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살결을 단박에 뚫을 만한 송곳니가 없다는 것을.
“뭐 해.”
목 위에서 아힌의 뚝뚝 끊긴 음성이 들려왔다. 물어뜯는 걸 멈춘 내가 다급히 상체를 세웠다.
‘목에 구멍을 뚫을 수가 없어….’
속상한 표정으로 의사를 대신하니, 아힌의 눈이 일순 사나운 짐승의 그것처럼 짙어졌다. 억누른 탐욕 같기도 했다. 그는 무언가를 갈구하듯 붙들고 있던 손목을 그대로 당겼다.
“아!”
눈 깜짝한 사이 핏기가 가신 얼굴이 바로 코앞이었다. 더운 숨결이 섞일 만큼의 거리에서 시선이 얽혔다.
‘입술은….’
가능한 피하고 싶었는데. 엔델루스에서의 일을 상기하자 절로 발끝이 곱아들었다.
당겨질 때 아힌의 몸을 짚은 손으로 터무니없이 흐트러진 페로몬이 느껴졌다. 그를 인지한 나는 짧은 망설임 끝에 입술을 내렸다.
겹친 입술 사이로 조금은 익숙해진 아힌의 페로몬이 흘러들어 왔다. 속속들이 몸으로 퍼지는 감각을 느낀 내가 조금 더 강하게 치유계 페로몬을 끌어 올렸다.
혀를 섞는 짙은 입맞춤이 아닌, 오로지 서로의 페로몬을 전달하기 위한 맞물림이었다.
“…하.”
살짝 입술을 뗀 그에게서 단 숨이 흘러나왔다. 뒤이어 아힌은 해소되지 않는 갈증에 시달린 사람처럼 내 뒷머리를 눌러 왔다.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조용한 공기 속에서 숨결이 섞이는 소리가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아힌의 숨이 점차 규칙적인 박자를 찾아간 반면, 나는 입술 사이로 밭은 숨을 내뱉었다.
바닥을 딛고 선 무릎이 저려 올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이 이상은 버거운 내가 천천히 고개를 바로 했다. 오랜 시간 붙어 있던 말랑한 입술이 떨어지며 촉 소리가 났다.
시야로 나른하게 풀어진 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방대한 치유계 페로몬을 밀어 넣어서인지, 마취나 수면의 효과까지 함께 가져온 모양이었다.
스스로의 표정을 가늠할 수 없었던 나는 손등으로 뺨을 짚었다. 열기를 미뤄 불그스름하리라 예상한 내가 입을 달싹였다.
“…좀 괜찮아?”
무방비한 미소로 답한 아힌은 뒷머리를 누르고 있던 손을 내 뺨으로 옮겼다. 그의 엄지가 물기 어린 아랫입술을 가볍게 문지르고 지나갔다.
툭, 이윽고 팔을 소파에 떨어뜨린 그의 눈꺼풀이 느릿하게 감겼다.
아힌은 처음 보는 흐트러진 모습으로 수마에 빠져들었다. 손목을 붙든 손은 여전히 풀지 않은 채.
* * *
대부분 영토의 수장은 보편적으로 중년기가 지나면 차기 수장에게 권좌를 물려준다.
하나 토끼 영토는 보편성에서 조금은 벗어난 오랜 관습이 존재했다. 그는 수장이 생을 마감해야 차기 수장에게 권좌가 넘어가는 것.
토끼 영토의 수장, 헤버 아몬은 자식들에게 권력은 모두 물려주고, 명예만 남은 채 나름 풍요롭고 한가로운 노년을 보내는 중이었다. 단, 보좌관이 코코아를 마시는 것을 방해할 때만 빼고.
“수장님, 지금 한 잔을 드시니 오늘 분은 끝입니다.”
따뜻한 코코아에 각설탕을 타던 아몬 수장은 얄팍하게 째진 눈을 부릅떴다.
“어제 그레이스 경과 여러 잔을 즐길 때는 아무 말도 못 하더니.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자네가 한 수 접을 때도 있고. 새파랗게 어린 흑표범이 나보다 더 무섭다 이건가?”
오랜 세월의 내공으로 무시가 일상인 보좌관이 응접실 커튼을 쳤다.
“사용인들이 소란스럽군요.”
부산스러운 아침이었다. 간밤에 연회장 후원에 불길이 치솟은 탓에, 날이 밝아서도 저택 분위기가 여전히 뒤숭숭했다.
“이 노인네의 탄신일이랍시고 그리 성대한 촛불을 만들어 줬으니. 눈물이 다 나는구먼.”
“인명 피해가 없는 게 다행이죠.”
결국 아몬 수장의 탄생 연회는 일찍 파할 수밖에 없었다. 토끼 영토 귀족들은 간단한 절차만 거치고 저택을 나섰으며, 남은 이들은 타 영토 귀족뿐이었다.
“실례합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고용인의 기척으로 인해 끊겼다. 이른 아침부터 결례를 무릅쓰고 방문한 에이븐이 안내를 받아 응접실로 들어섰다. 상석에 앉은 아몬 수장과 대면한 그녀가 깊숙이 묵례했다.
“존귀하신 수장을 뵙습니다.”
“일단 앉으시오. 그래, 무슨 중한 용무가 있어 새벽같이 찾아왔을꼬.”
풍만한 배에 양손을 얹은 아몬 수장이 허허 사람 좋은 미소를 띠었다. 간단한 안부를 주고받은 에이븐이 곧장 본론을 꺼냈다.
“지난밤, 후원의 불길에 대한 조사는 마치셨는지요.”
“이 노인네야 허울로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니, 조사는 가문의 일원들이 하고 있소. 날이 건조하니 자연발화의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겠지.”
두 번째 코코아 잔에 각설탕을 태우던 아몬 수장이 흘끔 눈을 홉떴다.
멀리 대기 중인 보좌관이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안 된다는 의미였다.
신호를 무시한 아몬 수장은 당이 떨어지면 큰일이지, 큰일이야, 너스레를 떨며 코코아를 들이켰다.
“조금 더 달달하면 좋겠구먼.”
수더분한 노년의 여성을 마주한 에이븐은 내심 속이 쓰라렸다. 아몬 수장과 개인적인 대면은 처음이나, 옛 명성에 비해 그다지 믿음직스러운 인물로는 보이지 않았다. 보좌관의 눈치를 살피며 코코아를 입에 털어 넣는 모습이 에이븐의 불신을 한층 가중시켰다.
차라리 아몬 수장이 아닌 차기 수장을 찾았어야 했나. 그녀는 잠깐 후회가 밀려들었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저래 봬도 차기 수장이 설설 기는 대상이었고, 어차피 목적은 아힌 그레이스의 발을 묶어 시간을 버는 것뿐이기에 누굴 만나든 상관은 없었다.
정확히는 아힌 그레이스가 아닌 비비의 발을 묶어야만 했다. 흑표범 영토로 떠날 수 없도록.
“다름이 아니라 화재 건에 대해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당시 후원에 있던 사람으로서 증언을 드리고자 합니다.”
보좌관의 시각을 피해, 아몬 수장에게 본인 몫의 각설탕을 건넨 그녀가 나긋이 웃었다.
* * *
대화는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응접실을 나가는 에이븐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몬 수장이 세 번째 잔을 들었다. 에이븐 몫의 각설탕까지 넣은 코코아에서 달달한 향이 퍼져 나갔다.
“불청객이 연회장에 있었던 걸로 모자라, 누군가 인위적으로 폭발을 일으킨 느낌이었다라. 아몬가(家)의 위신이 말이 아니겠구먼.”
자연스레 코코아 잔을 뺏어서 내려 둔 보좌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래비안 부인의 증언대로 자연발화가 아니라면 문제가 커지겠군요. 흠, 화재 현장에 있었다는 토끼 수인이 불청객이란 사실을 래비안 부인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요.”
“그녀를 추궁하지 않는 조건으로 한 증언이었지 않나. 연회에 참석한 초청객들에게 사과의 선물을 보낼 게 아닌, 조사 협조를 구해야겠구먼.”
“남 일처럼 말씀하지 마시지요. 다른 사람도 아닌 아힌 그레이스 님이 거론되었는데.”
“웬일로 적극적으로 구는군. 자네는 유독 그레이스 경이 어려운가 봐?”
나름 산전수전을 다 겪은 보좌관은 웬만한 일에는 눈썹도 까딱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정확히는 껄끄러운 거죠. 애초에 이 화재의,”
“어허, 입조심하게. 혹시 아나? 쥐나 새로 변한 수인이 엿듣고 있을지.”
귀족가의 응접실은 소동물이 침입할 수 없는 구조로 만들어졌다. 그를 알면서도 괜히 한 번 두리번거린 보좌관은 인상을 팍 구겼다.
“어쨌든 저는 예전부터 그분이 껄끄럽습니다. 마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기분입니다.”
“자네 뜻은 잘 알겠으니 그만 강조하게. 아무튼 이 사안은 자네가 가문의 일원들에게 잘 전해 주게나. 노인네는 회의에 참석하지 못할 것 같구먼. 당이 떨어지니 손이 떨려.”
사안의 경중에 비해 발랄하게 말한 아몬 수장이 종종걸음으로 응접실을 가로질렀다.
봉긋 솟은 배를 문지르며 나서는 그녀를 지켜본 보좌관이 폭 한숨을 내쉬었다. 코코아가 들어 있던 찻잔 세 개는 텅 비어 있었다.
* * *
따가운 햇살이 얼굴을 간질였다.
“응-….”
절대 나오지 않던 앓는 소리가 나왔다. 잠결에 인상을 찌푸리며 볕을 피하던 내가 눈을 떴다.
사람의 모습이라도 고약한 잠버릇은 변하지 않는지, 대자로 누운 탓에 낯선 천장이 가장 먼저 보였다.
‘침대…?’
아힌에게 물수건을 얹어 주다가 소파에 기대어 잠들었던 것 같은데. 지난 새벽의 일을 곱씹던 나는 옆으로 팔을 베고 누웠다.
침대를 다 차지할 기세인 나에 비해, 정작 환자인 아힌은 비스듬히 누워 최소한의 자리만 차지한 상태였다.
도중에 일어나서 침대까지 옮긴 걸까.
조심스레 손을 뻗은 나는 아힌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열도 내렸고, 조금 살 만한지 피부도 혈색이 되돌아와 있었다.
똑같은 자세로 누워 바라보던 나는 무심코 도톰한 입술에 눈길이 닿았다.
다물린 그의 붉은 입술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내가 입술을 문질렀다. 가슴이 뛰기보단 아릿하게 욱신거렸다.
더 이상, 시간이 지날수록 기우는 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었기에 인정은 담담했다.
나름 마음속에 쌓아 둔 촘촘한 모래성은 파도처럼 밀려든 아힌으로 인해 스러지고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어쩌면 이름을 불러 준 그날부터 모래성은 조금씩 조금씩 깎이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염치없는 토끼가 되지 않으려 얼마나 노력했는데. 늘 내 처지를 잊지는 않았다.
일족이 다른 데다, 신분 격차는 덤에 먹이도 애완동물도 아닌 위치. 더욱이 가장 애매한 건 사람이 아니니까.
언제까지나 이런 형태로, 이런 관계로 아힌의 옆에 있을 순 없음을 매번 되뇌고 있었다.
동화 속의 개구리 왕자조차 온전한 사람이 되었을 때 비로소 사랑이 이뤄지는데. 하물며 동화도 아닌 현실의 벽은 지나치게 높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 비해 부쩍 아힌의 태도가 부드러워지긴 했지만…. 반려동물로서의 애정이 싹튼 건지, 능력을 포함한 평면적인 소유욕에서 비롯된 건지.
‘그렇다고 머릿속이 궁금하진 않은데.’
괜히 돌아 버린 머릿속을 들여다봤다간 정신이 피폐해지진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빤히 응시하고 있자니, 그제야 우리 둘 다 상태가 엉망임을 깨달았다.
드레스를 입고 후원을 구른 나야 말할 필요도 없었고, 아힌 또한 단추가 엉성하게 풀린 셔츠 차림이었다.
평소 경장을 입을 때는 크라바트에 행커치프까지 깔끔히 갖추는 주제에. 잘 때만은 이상하리만치 허술한 점이 문제였다.
대화도 가능하겠다, 오늘만은 이 비비 님의 위험성을 톡톡히 경고해 둘 필요가 있었다.
‘이불, 이불이….’
슬그머니 이불을 끌어 올리던 나는 셔츠 깃 사이로 드러난 아힌의 목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곧 그게 무엇인지 인지한 나는 경악에 사로잡혔다.
‘저, 저게 뭐야!’
새벽에 물어뜯은 부위에 잇자국이 다소 야살스러운 흔적으로 남아 버린 탓이었다.
내 목에 상흔으로 남은 아힌의 송곳니 자국과는 확연히 달랐다. 붉게 파인 잇자국을 주시하는 내 동공이 미친 듯이 떨렸다.
‘…치료해야 돼.’
반드시, 어떠한 경우에도. 설령 새끼 토끼로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저 흔적을 주치의나 타인이 보게 되면 쥐구멍에 숨어도 모자랄 것 같았다. 하물며 아힌이 거울로 확인하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었다.
‘차라리 먼저 발견한 게 다행이지.’
토끼였으면 조금 더 수월하겠다만서도, 은밀한 움직임쯤이야 도가 튼 나는 숨죽인 채 팔을 뻗었다.
툭, 아힌의 셔츠 깃에 닿은 손이 경련하듯 바르르 떨렸다. 차마 잇자국을 만지는 것까지는 무리였던 내가 조심스레 셔츠 깃을 끌어 내렸다.
달달 떨리는 손에 페로몬을 끌어 올린 순간, 언제 눈을 뜬 건지 모를 아힌과 시선이 마주쳤다.
한차례 심오한 정적이 지나갔다. 빤한 눈길이 상기된 내 얼굴과 뻗은 팔, 셔츠 깃을 당긴 손을 번갈아 오갔다. 붉은 눈이 차갑게 식었다.
“…잘 때는 실수로라도 건드리지 않기로, 지난번에 네 입으로 약속한 주제에.”
아힌의 낯빛이 경멸과 멸시로 물들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당황한 내가 볼살이 흔들릴 만큼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야. 그-…. 목의 상처를, 지워 주려고….”
“…….”
“새벽에 내가…. 물어 버려서….”
스스로가 들어도 무슨 말을 하고픈지 모르겠는 떠듬떠듬한 변명이었다. 눈가와 귓불이 화끈거렸다. 얼굴이 터질 듯이 달아올라, 수상한 짓을 하려다 들킨 사람으로 보일 게 분명했다.
“됐어.”
담담히 셔츠를 여민 아힌이 기어코 나를 등졌을 땐 하마터면 눈물샘이 터질 뻔했다. 너른 등은 단절을 표현하듯 찬바람이 몰아쳤다.
“아힌, 얘기 좀 들어 줘.”
다급히 침대를 내려온 나는 그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들여다본 아힌은 피가 몰려 붉어질 만큼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웃음을 참느라 눈가를 덮은 채.
주먹을 꾹 말아 쥔 나는 베개를 집어 들었다. 기우는 마음이고 나발이고, 그런 심리와 별개로 오늘도 아힌이 싫었다. 부숴 버리고 싶어.
* * *
전쟁 같은 아침을 치른 후, 나는 사용인의 도움을 받아 채비를 마무리했다.
보라색 눈동자의 시녀는 최근 귀족 영애들 사이에서 유행이라며, 반으로 묶은 머리에 붉은 리본을 고정시켜 줬다.
그사이 아힌은 손님방의 탁상에 조식을 대기시켰다. 간단히 떠먹을 수 있는 감자 스튜, 손으로 집는 샌드위치 등의 메뉴는 나를 고려한 종류임을 알 수 있었다.
막 아침을 들려는데, 허벅지로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크루아상에 크림을 바르려던 내가 시선을 내렸다.
이브린이 데려다 둔 애쉬가 머리를 얹은 채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크루아상을 바라보는 눈망울이 비 맞은 흑표범인 양 처량했다.
애쉬의 목에 차여진 빨간 목줄은 영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어제 소란을 피운 탓에 함부로 방치할 순 없다고는 해도…. 짠해진 나는 결국 손에 들린 크루아상을 슬그머니 내밀고 말았다. 애쉬는 그것을 한입에 날름 먹어 치웠다.
“애쉬는 이미 충분히 먹었을 테니 너부터 신경 써.”
맞은편에 앉은 아힌이 조언했다. 검은 경장을 차려입은 그는 아까부터 뭐가 그리 즐거운지 방긋방긋 웃어 댔다.
저러는 걸 보면 낫기는 다 나았나 보네. 아침의 사건으로 오늘은 냉랭할 예정인 나는 묵묵히 새로운 크루아상을 집어 들었다.
‘어쩐다.’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는 건 고사하고, 어제의 페로몬 발작은 한두 번 있던 일이 아닌 것 같은데.
곰곰이 머리를 굴리는 내 앞으로 각종 접시가 내밀어졌다. 아힌은 제 앞에는 코코아만 두고, 거의 모든 접시를 내 쪽으로 밀고 있었다.
“이상하네.”
아힌의 혼잣말에 크루아상을 베어 물던 내가 힐끔 시선을 줬다.
“토끼일 때 공처럼 잘 불려 놓았는데, 인간화를 하면 함께 적용되는 게 아니었던가?”
“누가 공,”
휘말릴 뻔한 나는 입을 합 다물었다.
“생각보다 먹을 부위가 없어.”
바삭, 쥐고 있던 폭신한 크루아상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언제 들어도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어려운 야만스러운 말이었다.
눈을 치켜뜬 나는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새벽 부로 격차를 깨달은 송곳니의 위험성이 공포를 더하는 데 한몫했다.
“비,”
“빌어먹을 맹수?”
“…….”
“어제도 생각했는데, 그 말 조금 설레는 것 같아.”
턱에 꽃받침을 한 아힌이 해사하게 웃었다.
“더 해 줘.”
얘는 틀려먹었어. 새벽 내내 생사를 오가더니, 혼은 빠져나가고 몸만 살아남은 모양이었다. 정상적인 반응을 포기한 나는 무시로 일관하며 식사를 지속했다.
한참 내가 먹는 모습을 구경하던 아힌이 말했다.
“여기까지 들어오게 된 경로는 알려 줘. 아몬 수장 측에서 애쉬가 소란을 일으킨 것에 대해 물어 올 테니.”
올 게 왔구나. 숟가락을 내려 둔 내가 말을 골랐다.
“별건 없는데, 룬….”
룬이란 단어에 아힌의 미간이 미세하게 반응했다. 나는 빛보다 빠르게 호칭을 수정했다.
“-사자한테 신세를 조금 졌어.”
“그렇겠지.”
퐁당, 코코아에 각설탕을 떨어뜨린 그가 휘적휘적 저었다.
룬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조심스레 말한 것에 비해, 아힌은 딱히 기분 나쁜 티를 내지 않았다. 거기에 용기를 얻은 내가 수월하게 말문을 뗐다.
“경계의 숲 남문에서부터 도움을 조금 받았거든. 저택을 통과할 때는….”
“먹으면서 말해.”
아힌은 친히 크림을 바른 크루아상을 내밀었다. 무언의 압박에 한 입 베어 문 내가 말을 이었다.
“애쉬는 룬, 아니, 사자의 애완동물로 들어왔고, 나는 따로 숨어 있었고.”
“어디에?”
“…속주머니에.”
제가 물어 놓고 아힌은 코코아에 설탕을 녹이는 데 여념이 없었다. 티스푼을 휘젓던 그가 한 박자 늦게 물었다.
“응, 그리고.”
“도착했을 땐 밤이 너무 늦어서, 하루만 신세를 지고 다음 날 아힌 네게 가려고 했던 거야.”
“사자의 침실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고 나니 어딘지 어미가 이상했다. 아힌의 빤한 눈길이 느껴졌다. 사뭇 민망해진 나는 빠르게 부언했다.
“그땐 토끼였어.”
“계속해.”
평소와 같은 저음으로 답한 그가 계속해서 코코아를 휘저었다.
“그러다가 사자의 페로몬을 맡았는데, 그가 사람으로 변할 것 같다는 몸짓을 못 알아듣고 잠들어 버려서….”
“몸짓?”
“그냥. …앞발을 흔들었지.”
당황스러운 마음에 춤을 췄다는 건 곧 죽어도 말할 수 없었다. 앞발을 흔들 듯 양손을 달랑달랑 흔든 내가 곧바로 말을 이었다.
“지금의 모습으로 변해서 깨어났을 땐, 애쉬가 옮겼는지 사용하지 않는 방에 있었어. 그러다가 지난나 교수님을 만났고.”
“지난나 교수면,”
“엔델루스의 의관. 토끼 영토의 수장과 인연이 있어서 왔다던데,”
잠깐 말을 멈춘 내가 톡 쏘듯이 물었다.
“아는 사이였다며?”
툭툭, 손가락으로 탁상을 두드린 아힌이 고개를 까딱였다.
“안면만.”
“…아무튼. 덕분에 지난나 교수님과 룬, 아니 사자의 도움으로 연회장 입구를 통과할 수 있었어. 애쉬는 연회장에 들어올 순 없으니까 잠깐 레스틴의 손님방에 맡겨 둔 거였고.”
“진짜 어디로 튈지 알 수가 없네.”
아힌의 말대로 생각 이상으로 저지른 일이 많았다. 별것 없다는 주장을 한 게 머쓱해진 내가 웅얼거렸다.
“다음부터는 아힌이 본 대로야.”
“더 없어?”
턱을 괸 아힌은 천진한 웃음을 걸었다.
“더라니···?”
퍽 의미심장한 미소였다. 어머니에 대한 자세한 사실을 요구하는 건가.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건지 확실히 유추하지 못한 내가 눈을 데굴 굴렸다.
“후원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지저분한 사자 냄새가 나던데.”
‘룬의 냄새?’
“아직도 조금 배어 있어.”
지금까지 보아 온 바, 향을 묻히는 건 접촉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마저도 잔뜩 경계하고 있었기에, 향을 묻히기 위한 페로몬을 흘렸으면 모를 리가 없는데.
‘잠깐만요.’
뻐끔뻐끔 입을 여닫던 나는 룬과 헤어지기 직전, 그가 손목을 잡았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구나.’
래비안 가문 사람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것 때문에 긴장했을 때. 생각해 보면 그 이후로 미묘하게 긴장이 가라앉은 느낌이긴 했다.
‘그의 페로몬과 관련이 있나?’
무심결에 손목을 내려다보던 나는 깨달았다. 새벽 내내 아힌이 집요하게 잡아 온 손목은, 룬이 붙들었던 부위였음을.
“…….”
분위기가 심상찮아진다고 생각할 즈음, 방문을 허가받은 이브린이 들어섰다.
“아힌 님, 아무래도 급히 회의에 참석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바빠, 네가 대타로 참석해.”
“높은 분들만이 참석하는 자리라 무리입니다.”
“그럼 불참하는 걸로. 당장 비비한테 따질 게 있어서.”
뭘 따져야 하는데. 불길한 예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비비, 한 번만 더 그런 냄새를 묻히고 오면 그때는….’
안 돼…! 몹쓸 기억력은 오랜만에 아힌의 경고를 상기시켰다.
“회의보다 중요한 사안이십니까?”
“…비비가 또 사자랑 바람났어.”
그새 젖은 눈을 한 아힌이 탁상에 엎드렸다. 이브린이란 제 편이 생겼다 이거였다.
“토끼님.”
이브린의 실망스러운 눈길이 나를 향했다. 창백하게 질린 내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브린, 오해야.”
“것 봐, 대사부터가 수상하잖아.”
엎드린 아힌에게서 물기 어린 음성이 흘러나왔다.
“확실히… 처진 눈꼬리는 바람기를 상징하죠.”
미친 거 아니야? 눈꼬리는 원래부터 이렇게 생겨 먹은 거였다. 화를 누른 나는 내려간 눈매를 조금이라도 올리기 위해 눈을 치켜떴다.
“또 노려보는군. 매번 저런 뻔뻔한 태도만 보이고.”
“원래 바람기가 심한 자들의 특징입니다. 아힌 님께서 당해 낼 수 있는 뻔뻔함이 아니니, 앞으로를 위해서라도 마음 단단히 하십시오.”
뻔뻔한 게 누군데, 마치 사실인 양 사람을 매도하고 있었다.
아힌은 고사하고, 이브린은 생각 이상으로 일관된 사람이었다.
사람으로 변하면 조금쯤은 동요하며 나를 어려워할지도 모른다고. 그러한 내 바람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동일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간과한 게 있지. 이 비비 님은 더 이상 아무 말 못 한 채 뒷발만 날리던 예전의 새끼 토끼가 아니었다.
오늘만은 참지 않겠다고 다짐한 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따끔한 맛을 보여 줄 시간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