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ymbiotic Relationship Between the Rabbit and the Black Panther RAW novel - Chapter (44)
토끼와 흑표범의 공생관계 3화(44/75)
회의 내용은 극비에 부친다고 했지만, 염문과 관련된 소문은 말의 다리보다 빠르기 마련이었다.
덕분에 아힌의 전속 시종, 유안은 아침부터 토끼 영토 고용인들의 은근한 질문 공세에 시달리고 있었다. 당장 그부터가 기겁할 노릇인데.
매 아침 파이팅을 주고받던 토끼님이 수인이었던 것도 모자라, 이곳 저택 고용인들 사이에서 토끼님은 빼어난 미색의 무용수가 되어 있었다.
님프가 호수 위를 거니는 듯한 춤 선이 심금을 울리며, 흑표범 영토의 차기 수장과 사자 영토 수장의 자제가 송곳니고 발톱이고 전부 내어 줄 기세라고.
유안이 아는 토끼님은 앞발로 흑표범을 평정하는 무맹한 토끼였다. 춤 선은커녕 이 단 돌려차기가 일품인 분이었다.
여러 사실을 받아들이기조차 힘든 와중, 트레이를 끌고 들어선 아힌의 손님방. 심상찮은 분위기를 직면한 유안의 앳된 얼굴이 덩달아 어두워졌다.
먼저 시야에 들어온 비비는 소파에 부복하는 자세로 엎드린 채 미동이 없었다.
곧잘 그녀의 행동을 따라 하곤 하는 애쉬 또한 바닥에 납작 고개를 박은 상태였다.
맞은편 소파에 늘어진 아힌은 대륙 신문을 읽는 상황. 머리를 굴려도 도저히 무슨 상황인지 유추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누군가, 베테랑 선배들을 제치고 차기 수장의 전속 시종으로 배정받은 인재였다. 능숙하게 표정을 관리한 유안이 트레이를 끌었다.
“토끼 영토산 루이보스의 잎을 우린 차입니다.”
신문 위로 눈만 내민 아힌은 대충 턱짓했다.
“탁상에 둬.”
유안의 기척에도 불구하고 비비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차를 따르는 그의 손끝이 떨리는 걸 발견한 아힌이 신문을 넘기며 말했다.
“다퉜을 뿐이니까 내버려 둬도 괜찮아. 비비, 계속 그러고 있을 거면 망토라도 두르든지. 아니면 벽난로 앞에서 해.”
침묵시위 중인 비비는 의견 표명 대신 엎드린 채 발을 퉁 굴렀다. 관심 끄라는 의미였다. 일순 사람이 토끼로 보이는 착시를 경험한 유안이 눈을 비볐다.
“유안, 주방을 다녀오는 게 좋겠어.”
“식간이 필요하신가요?”
“아니, 이 방에 삶의 의욕을 잃은 토끼가 있다고 전해.”
아힌의 신호를 읽은 유안이 억지로 맞장구쳤다.
“시, 식재료군요….”
그제야 튕기듯 일어난 비비는 착실히 벽난로 쪽으로 이동했다. 아힌이 잡아먹지 않을 거라는 확신과 원초적인 본능은 별개였다. 덩달아 뛰어간 애쉬도 비비처럼 등을 둥글게 말고 앉았다.
순간이지만 비비의 매서운 눈길로 인해 유안의 눈썹이 침울하게 내려갔다. 괜히 다툼에 끼어들게 만들어선….
“유안.”
이제 나도 이브린 님처럼 토끼님의 멸시를 받겠구나. 아침마다 주고받는 파이팅을 못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유안의 뺨이 수심으로 붉어졌다.
“유안, 넘치고 있는데.”
상념에 잠겨 있느라 차를 한가득 부어 버린 유안이 허둥지둥 수습했다.
“소, 송구합니다. 이런 실수를….”
“됐어.”
느른하게 다리를 꼰 아힌은 신문 너머로 비비를 살폈다. 간사한 토끼였다. 눈물보다 제 뒷모습이 그에게 먹히는 걸 안 이후로는 의견을 관철시킬 때마다 저러고 있으니.
“어제 흑표범 영토에 돌아가기로 얘기를 끝냈잖아. 싫은 이유가 뭐야?”
아힌은 조금 풀어진 목소리를 냈다.
“그야….”
활활 타오르는 화롯불만 바라보던 비비가 고개를 돌렸다. 불을 쬔 탓에 날 선 얼굴이 발그레 달아올라 있었다.
“오늘 오후 출발인 걸 이제 말하면 어떡해? 심지어 아힌은 남는다며.”
“처리할 일이 남았다니까. 또 굳이 이곳에 오래 머물 이유는 없을 텐데.”
“…지난나 교수님과 러셀이랑 제대로 인사도 못 나눴잖아. 적어도 하루 정도는 더 시간을 줘도 되지 않아?”
“어정쩡한 신분으로 타 영토에 남아 있어 봤자 좋을 거 없어.”
굳이 따지자면 비비의 터전은 토끼 영토지만, 아힌은 각인시키듯 타 영토를 강조하여 말했다.
결국 화로 앞에서 몸을 일으킨 비비는 모자가 달린 망토를 둘렀다.
이런저런 불만을 토로해 봤자 출발을 미룰 순 없겠지. 이내 문 앞에 선 그녀가 담담히 통보했다.
“잠깐 다녀올게, 애쉬 좀 부탁해.”
“어디 가?”
“지난나 교수님이랑 작별 인사는 해야지. 많이 도와주셨는데.”
비비의 거동 하나하나가 괜히 불안한 아힌이 프록코트를 집어 들었다.
“차라리 여기로 부르거나 같이,”
“오지 마, 초식계 수인들끼리만 나눌 말이 있으니까.”
“그럼 데려다줄게.”
“어차피 손님방도 바로 아래층이고, 누구든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할 거라며. 복도마다 기사들도 배치되어 있으니까 괜찮아.”
쾅, 단호하게 닫힌 문은 따라오지 말란 의미를 내포했다.
소외당한 아힌은 프록코트를 입지도 벗지도 못한 자세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비비는 토끼로 지낸 세월 때문인지, 보고 들은 것을 기억하는 능력이 꽤나 좋았다.
“유안.”
유능한 유안은 이름을 불린 것 하나로 아힌의 의도를 파악했다.
“흑표범은 눈 감고 봐도 맹-”
“…….”
“수계지요…. 초식계 수인의 모임엔 참석할 수 없을 겁니다….”
지긋한 시선을 피한 유안이 자신의 의견을 관철했다. 차마 종족을 부정할 순 없었다.
“송곳니를 죄다 뽑기라도 해야 하나.”
“…착장을 돕겠습니다.”
아힌의 혼잣말을 외면한 유안이 제 역할에 충실하기로 다짐하는 순간 달칵, 다시금 문이 열렸다. 문틈 사이로 망토 자락이 슬금슬금 삐져 들어왔다.
“비비?”
“저.”
몸의 반쪽만 들어온 비비가 작게 읊조렸다. 쉽게 말문을 떼지 못하고 입술만 깨무는 모습에, 아힌은 천년의 인내심을 발휘하며 기다렸다.
“심술부려서 미안해. …실은 아힌이랑 같이 돌아가고 싶어서. 올 때도 따로 왔잖아.”
소박한 실토를 끝으로 붙잡을 새도 없이 발소리가 멀어졌다.
아힌은 문이 닫히는 소음과 함께 속 안의 무언가가 뚝 끊기는 소리를 들었다.
굳은 아힌과 닫힌 문을 번갈아 본 유안은 왠지 비비가 실수한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을 지울 수 없었다.
* * *
곰곰이 곱씹으면 나도 아힌에게 숨기는 게 아예 없다고 할 순 없었다. 물론 속 시커먼 그와 달리 기본적인 생존을 고려하여 말하지 않았던 거지만.
지난 새벽,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겠다고 판단 내린 나는 결연한 얼굴로 아힌을 불렀다. 이 이상 그가 내게 해를 끼칠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기에.
그 비장함에 지레 겁먹은 그는 침대 중앙에 베개를 설치했다. 나날이 음흉해지는 토끼를 막기 위한 조치라는데.
억울하지만 반박할 말도 없었기에, 대화는 그렇게 갈라진 상태로 이어졌다.
아힌은 웬일로 모난 말을 하지 않고 도란도란 대화에 응해 줬다. 페로몬과 관련된 몸 상태와 이번에 이곳까지 따라온 이유, 후원에서 있었던 일 등.
지배계 페로몬을 활용하면 페로몬을 사용해도 토끼로 돌아가지 않고, 또한 토끼에서 사람이 될 때도 그리 큰 고통을 동반하지 않는 것 같다는 가설까지도.
완전히 털어놓은 건 아니었으나 대부분의 사실을 알리고 나니 오히려 속은 후련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그는 가장 궁금한 연회장의 화재와 페로몬 발작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해 주지 않았다.
처리할 일이 남았답시고 나를 한시 빨리 돌려보내려는 태도도 수상하고. 이대로 돌아가기엔 찝찝한 구석이 많았다.
‘페로몬 발작도….’
그렇게 아파했으면서.
도중에 아힌의 숨이 멎었을까 확인까지 했을 정도였다. 하나 그의 위치상 함부로 발설하거나 물어보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할아버님도 무언가 알고 계신 눈치였지.’
그레이스 저택의 서재를 엎어서라도 알아내겠다고 생각한 내가 복도를 가로질렀다. 걸음걸음마다 많은 시선이 꽂히는 게 느껴졌다.
현재의 스스로의 신분이 무용수임을 상기한 나는 사뿐사뿐 걷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리고 바닥에 고꾸라졌다.
‘그럼 그렇지.’
안 하던 짓을 하면 이렇게 발이 엉키는 법.
무용수들이 즐길 법한 원피스도 모자라, 날이 쌀쌀해진 탓에 걸친 망토가 불편함을 더했다.
의복을 턴 후에 지난나 교수의 손님방으로 향하던 내가 멈칫했다. 두 개의 발소리가 묘하게 같은 박자로 맞물리는 느낌이었다. 다시 걸음을 옮기고 멈추어도 똑같았다.
‘누군가 쫓아오고… 있나?’
휙, 뒤돌았지만 곳곳에 선 경비 기사와 고용인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창가로 들어온 볕이 상앗빛 복도를 환하게 밝혔다.
‘착각일까.’
착각이든 뭐든, 평화로움 속의 위험을 경계해서 나쁠 건 없었다. 무엇보다 나는 겁쟁이의 뛰어난 감을 믿었다.
멈춰 선 내가 발목을 돌리며 근육을 풀었다. 모퉁이만 돌면 지난나 교수의 방이 코앞이고, 인적이 없는 것도 아닌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뛰는 거야.’
땅을 박찬 나는 모퉁이를 돌자마자 누군가의 팔에 의해 몸이 당겨졌다. 세차게 흔들린 시야는 곧 눈에 익은 장소로 바뀌었다.
사람으로 변했을 때 애쉬가 옮겨 둔 창고 방. 숨 쉬는 법도 잊은 내가 반사적으로 앞발 휘두르듯 손을 내질렀다. 손아귀에 복슬복슬한 실오라기가 틀어 잡혔다.
“아야, 머리, 그거 머리예요.”
“…룬 마니언츠?”
곧바로 손을 떼어 냈지만 이미 손가락 사이에 분홍색 머리카락 여러 가닥이 엉켜 있었다.
딱히 정돈할 필요 없는 곱슬머리를 정성스레 매만진 룬이 중얼거렸다.
“너무해요. 어떻게 된 사람이 볼 때마다 머리카락을 잡아 뜯어?”
“그야 당신이,”
“쉿.”
갑자기 기척을 죽인 룬으로 인해, 빛보다 빠르게 입을 막은 내가 몸을 쭈그렸다. 도망자들이나 취할 법한 자세였다.
숨죽인 나를 어이없이 내려다보던 룬이 무릎을 굽혀 앉았다.
“…뭔지는 알고 숨어요?”
댁이 쉿 하라며…. 입술을 앙다문 내가 머쓱하게 고개를 저었다.
“뒤로 호위가 하나 붙었던데.”
“호위?”
그제야 동이 튼 후, 잠결에 들었던 아힌의 말이 생각났다. 당장은 메이미가 없으니 급한 대로 호위를 붙여 두겠다고. 아는 사람이기도 하고, 유용하게 써먹어 보라 귀띔해 주는 동시에 잠이 들어서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난 아는 사람이… 없잖아.’
고작 해 봐야 눈앞의 룬이 아닌가. 손에 꼽을 수준의 인맥이었다. 릴은 호위 기사를 하기엔 너무나 여리고.
‘아니면 엔델루스에서 나를 봤던 호위 기사인가?’
이름이 미오였나. 머리를 굴렸지만, 딱히 그녀 말고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뭐, 호위 기사가 찾고 있겠지만 잠깐 시간 좀 줘요. 오늘 흑표범 영토로 돌아가잖아요.”
갖은 생각에 잠겨 있던 내가 흠칫 움츠렸다.
“그쪽이 그걸,”
“룬.”
“…룬이 그걸 어떻게 아는데요?”
“이브린이 마차를 대기시키고 있었으니까, 아힌 그레이스의 성질머리를 생각하면 뻔하죠, 뭐.”
마주 본 채 수그려 앉아 있던 룬이 턱을 괬다.
우리는 왜 편한 자세를 두고 불편하게 있는 걸까. 고찰하던 나는 그를 만나면 따져 물으려 한 말을 떠올리곤 눈을 홉떴다.
“그보다, 왜 하필 무용수예요?”
“아니었어요? 갑자기 덩실거린 건 토끼님이면서.”
아닌 것을 뻔히 아는 주제에 놀리는 투로 말하고 있었다.
“토끼 영토의 전통 춤도 추던데, 이렇게였나.”
룬은 멍한 제 얼굴 옆으로 손을 까딱까딱 흔들었다.
“흥이 많은 편인가?”
‘더 이상 말하지 마.’
사라지고 싶어진 나는 손바닥을 펼쳐 의사를 대신했다.
사람이 수치심이 극도에 다다르면 죽고 싶어질 수도 있구나. 귓가가 뜨거워진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를 노려보는 것밖에 없었다.
향을 묻힌 사안에 대해서도 따져 물으려 했으나, 이래서야 괜히 화두에 올렸다가 도리어 휘말리지 않을까.
“아무튼, 다시 그레이스가(家)로 가면 또 오래 못 보잖아요. 그럼 서운할 것 같아서.”
“…그쪽이 왜 서운해요.”
룬은 돌발 질문에 곧장 답하지 못한 채 입을 여닫았다. 나태하게 풀어져 있던 얼굴 위로 난감한 감정이 스쳤다. 이어서 육안으로 보일 만큼 목부터 뺨까지 발갛게 달아올랐다.
‘아.’
세 단계 변화를 지켜본 나는 그가 내게 가졌던 호기심이 호감, 또는 그 비슷한 감정으로 발전한 게 아닐까 추측했다.
‘왜 내게?’
모를 수가 없는 적나라한 반응이었다. 이 사자는 왜 이렇게 반응이 솔직해 가지곤. 표정도 별로 없던 남자가 붉어진 얼굴로 절절매니 외려 내 기분이 더 이상해졌다.
이래서야 순진한 사자를 놀려 먹는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잖아. 눈앞이 아득해진 나는 그저 바닥만 내려다봤다. 썩 불편한 정적이 흘렀다.
“처음에,”
잔잔한 목소리가 귓가를 자극했다. 시선을 들어 확인한 룬의 얼굴은 아직 붉은 기가 남은 상태였다.
“아힌 그레이스가 새끼 토끼를 데리고 다니는 걸 봤을 땐 드디어 미친 줄 알았어요. 어렸을 때부터 오락가락하는 놈이었거든요.”
무감하게 말한 그는 관자놀이 주변에서 검지를 빙글 돌렸다. 긍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내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아힌의 어릴 적이 조금 궁금한 걸 보면 나도 중증인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의심스러웠는데, 마침 무도회장 주변에서 사람이 된 그쪽을 마주쳤죠. 그때가 처음 인간으로 변했을 때죠?”
잊을 수 없는 순간을 상기한 내가 무릎에 얹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맞아요.”
“묻고 싶었는데, 탁자 밑에는 왜 들어가 있었어요?”
그야 놀라면 좁은 곳에 들어가는 게 습관이니까. 대답하지 않았으나 룬은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어쨌든 이상하더라고요. 머리카락도 바닥에 끌리는 데다 옷이라곤 테이블보가 전부고. 말을 못 하는 건 아닌데 어딘지 모르게 어설펐죠.”
타인의 시선으로 본 당시의 자신은 걷잡을 수 없이 수상한 사람이었다.
“이상한 것투성이라, 갈수록 궁금하더라고요. 엔델루스의 의상실에선 목에 메는 리본을 머리에 다는 실수나 하고.”
“…그렇게 커다란 리본을 누가 목에 달아요?”
“하긴, 거기 디자이너의 취향이 독특했던 거니까 그건 인정.”
룬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머리카락 한 줌을 집어 문질렀다.
“간간이 맛있는 냄새도 나고.”
“…버터?”
“응, 그거.”
“군고구마라던데.”
“아니, 버터예요.”
이게 누구더러 버터래. 버터 바른 토끼 구이를 상상한 나는 그의 손에서 갈라지는 백발을 슬그머니 당겼다. 힘없이 딸려 온 머리카락이 사르륵 흘러내리며 제자리로 돌아왔다.
어느 하나 정상적인 부분이 없는 대화였지만 미묘한 기류가 흐름을 모르지 않았다.
애초에 룬의 문제가 반절 이상이었다. 발그레한 뺨을 한 채 열심히 말하는 거 하며, 그에 걸맞은 수려한 외모 하며. 살짝 찢어진 눈매와 근육질 체격은 마냥 예쁘기만 한 것도 아닌 게 문제였다.
토끼님은 바람기가 다분하고, 미인만 추구한다는 이브린의 주장이 귓가에 메아리쳤다.
“그러다 보니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 이상 시간을 할애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과 동시에 룬이 말갛게 미소 지었다.
“토끼님, 아니, …비비가 사자 영토에 있었으면 나도 주울 수 있었을 텐데.”
* * *
큼지막한 보라색 눈동자가 여러 번 깜박거렸다. 멍하니 룬을 바라보던 비비는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모호한 얼굴이 되었다.
어떻게 보면 바구니에 갇힌 자신을 꺼내 줄 사람이,
‘…세상에 두 명이나 있었네.’
그때 바구니를 긁느라 앞발이 다 헐었는데, 뚜껑이 열릴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 볼 걸 그랬나.
실없는 생각을 이어 간 비비는 옷을 탈탈 털며 몸을 일으켰다. 스스로의 사정만으로도 벅찬 그녀에게 룬의 속내는 무거운 짐이었다.
달칵, 눈치를 살핀 그녀가 티 나게 회중시계를 확인했다.
“…슬슬 가 봐야겠군.”
“대체 저번부터 연기가 왜 그 지경이야? 일부러 그러는 거죠?”
열과 성을 다한 연기를 폄하당한 비비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눈을 부라린 그녀는 더 볼 것도 없이 몸을 돌렸다. 따라서 일어난 룬은 망토에 달린 모자를 가볍게 붙들었다.
“잠깐만요, 아직 결론을 말하지 못했어요.”
“대, 대화에 결론이 어디 있어?”
이거 놔. 발을 내디뎠지만 한 걸음도 나서지 못한 비비가 제자리걸음을 반복했다.
기어코 망토의 리본을 풀어서 벗어난 비비는 그를 마주 보며 신속히 물러났다. 맹수에게 등을 보여선 안 된다는 철칙을 준수한 움직임이었다.
한순간에 버려진 망토를 들고 있는 꼴이 된 룬은 허탈하게 웃었다.
인간화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한 데다, 언제 새끼 토끼로 돌아갈지 모르는데도 저토록 삶에 열정적일 수 있는 게 신기했다.
그였다면 아마 한참 전에 삶을 포기하지 않았을까. 성격을 고려하면 그러려니 새끼 사자로 살아간다든가.
“도와줄게요.”
인간화든 뭐든.
“뭐를요?”
“뭐든. 제가 도와줄 테니까, 사자 영토로 안 갈래요?”
“…….”
“흑표범 영토를 벗어난 지금이 아니면 어려울 거예요.”
그의 호의가 제가 가진 여러 문제를 뜻하고 있음을 깨달은 비비가 눈을 크게 떴다. 공허하던 황금색 눈동자 위로 나타난 건 또렷한 진심이었다. 일순 제 페로몬을 탐낸 게 아닐까 의심한 게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모르지 않잖아요, 아힌 그레이스가 좋은 놈은 아니라는 거.”
그 자신도 썩 괜찮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룬은 세상에 대고 아힌보다는 선하다고 외칠 수 있었다.
“결코 좋은 의도로 그쪽- 비비를 거두진 않았을 거예요.”
서적에서나 볼 법한 치유계 페로몬만 보아도. 룬은 굳이 뒷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비비는 토끼의 좁은 시야로 살아온 것에 비해 영민하니, 그의 제안이 이득임을 모를 리 없었다. 아힌과 비비 사이에 거래나 이익이 오갔다든지, 이성을 흐릴 만한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단 전제하에서.
“잘 생각해요.”
룬은 아힌이 비친 날것의 소유욕을 결코 좋게 볼 수 없었다. 빤한 금안이 혼란에 빠진 비비에게 머물렀다. 같은 맹수계 수인을 향한 감정이라도 위험할 판에, 눈앞의 토끼는….
‘말할 것도 없네.’
생존 가능성부터가 바닥을 기었다. 송곳니만 봐도 속눈썹을 파르르 떠는 간덩이 하며, 앞발처럼 휘두르던 주먹은 제 손의 반만 한 크기였다.
무엇보다 던지는 족족 폭풍우처럼 돌아오는 표정과 반응이 가장 문제였다. 변태 머저리 같은 흑표범 일족에게 있어선 더할 나위 없는 먹잇감이었다.
차라리 예민하거나 나태한 성정이 대부분인 사자 일족이 낫지 않을까. 물론 이런 자잘한 판단에 룬의 사심이 섞이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래도 진실로써 설득하기로 결정한 그가 입술을 뗐다.
“아힌 그레이스는 돌았어요.”
“음.”
눈썹을 부득 모은 비비가 끄덕였다.
“극악무도한 놈이죠.”
“으음.”
몹시 위험한 맹수지. 공감한 그녀는 손날을 목에서 달랑달랑 흔들었다.
“비비 앞에서는 한 수 접었을 확률이 높고.”
“흠?”
그 고약한 맹수가 그럴 리가 없는데, 콧소리로 부정을 표하던 비비는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아힌은 초반에는 혈향을 묻히고도 아무렇지 않게 침실로 들어서곤 했는데, 그 잔혹한 냄새를 맡은 게 언제가 마지막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차기 수장의 자리는 항상 위태로워요, 특히 권세를 누리는 맹수계 영토일수록. 제 누이도 그렇듯 언제나 사건 사고의 중심일 수밖에 없고, 암살 시도쯤이야 흔한 일이죠.”
“…….”
“그때 그레이스저에 잠입한 늑대가 왜 비비를 습격했겠어요?”
“…제가 아힌의 새끼 토끼라서. 붙든 후에 미끼나 다른 용도로 써먹기 위해서였겠죠.”
“잘 아네요. 그레이스가 당신 주변에 온갖 것을 붙여 놓는다고 하더라도, 자력으로 살아남아야 할 순간은 언제든지 생기겠죠.”
그 사실은 비비도 인지한 부분이었다.
늑대의 습격. 판잣집에서 애쉬가 죽을 뻔했을 때. 엔델루스에서의 추격전. 안전할 거라 여긴 서재에서 할아버님을 만난 것.
흑표범 영토에서의 일상은 평화로우면서도 매 순간이 고비와 다름없었다.
“혹시 그레이스가 억지로 붙들어 둔 거라든가, …갈 곳이 없는 거라면 제가 빼내 줄 수 있어요.”
룬이 마니언츠가(家)의 자제인 이상, 제아무리 아힌이라도 토끼 하나로 인해 덤벼들진 못할 것이었다.
그의 유일한 고삐는 발렌스 그레이스의 하나뿐인 핏줄이란 사실이니까. 나사 풀린 짓을 벌이더라도 해결 가능한 범위 내에서, 그리고 아힌은 그 경계선을 의외로 잘 지키는 자였다.
‘…이번에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옮겨진 금안이 망토를 벗음으로써 드러난 비비의 목에 머물렀다. 얄팍한 레이스로 간신히 가린 목덜미의 흉터가 꽤나 거슬렸다.
“흑표범 영토에는 그레이스와 함께 돌아가요?”
“아뇨, 저 먼저요.”
“왜 혼자 돌아가요?”
“제가 이곳에 오래 남아서 딱히 좋을 게 없으니까,”
“…아닐걸요.”
“-라는 게 표면상의 이유였어요. 분명히 뭔가 숨기고 있겠죠, 저를 먼저 보내야만 하는 이유를.”
잔잔한 음성으로 답한 비비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늘 싫고 지금도 여전히 싫은, 비밀 많고 두루뭉술한 아힌의 태도는 그만의 생존 방식이었다.
생각해 보면 아힌의 밤은 언제나 온전하지 못했다. 침입자에 대비해야 했기에 새벽 내내 램프를 밝혀야 했고, 침대 옆에는 항상 검이 세워져 있었다.
비비의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꼬리를 당기며 자는 것도, 여차할 땐 곧바로 보호할 수 있기 위한 장치가 아닐까.
그녀가 살아온 방식과 묘하게 비슷한 건 부정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아힌의 태도를 전부 이해하고 싶진 않지만.
“제안은 고마워요.”
옅게 한숨 쉰 비비는 조용히 답했다.
“그래도 당신… 아니, 룬을 따라가지는 않을래요.”
조금 일찍 말해 줬으면 냉큼 따라갔을지도 모르지만.
“이유를 물어도 돼요?”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룬은 들고 있던 망토를 비비에게 둘러 줬다. 예상치 못한 답은 아니었으나 생각보다 속이 쓰린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흑표범이 없었으면 저는 아마 경계의 숲에서 죽었겠죠. 그렇게 목숨을 구하고 나서도 늘 아힌이 간절했어요. 문 여는 것 하나조차 스스로 할 수 없었거든요. 그런데….”
“그런데?”
뜸 들인 비비는 입술을 조개처럼 여물었다. 눈앞에 페로몬 발작을 감내하던 아힌이 아롱거렸다.
최근에 나타난 증상은 아닐 것이었다. 아마 오래전부터 겪어온 현상이겠지. 그리고 비비의 치유계 페로몬은 서툴지만 발작을 어느 정도 진정시키는 게 가능했다.
간교하고 교활한 흑표범이 이 사실을 몰랐을 리는 없었다. 그녀의 페로몬이 치유계임을 눈치챘을 때부터. 어쩌면 처음 경계의 숲에서 만났을 때 이미 어렴풋이 느꼈을 수도 있었다.
백번 양보해 몰랐다 치더라도, 비비와 함께 자는 것을 고집하는 걸 보면 무의식중에 의존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런데도 나한테 치유계 페로몬을 강요하지 않는 건….’
‘더 이상 멋대로 사라지지 마.’
페로몬 발작을 일으켰을 때 본모습으로 돌아가지 않은 건, 기겁한 제가 달아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아픈 와중에 쫓아올 수도 없는 노릇이니.
비비는 비스듬히 세워진 액자를 쓸었다. 손끝에 묵은 먼지가 묻어났다. 액자는 푸른 들판이 아름다운 토끼 영토를 담아내고 있었다.
“룬의 말대로 아힌과 함께하는 건 힘들어요. 아힌 자체라기보다는 벌어진 상황들이 막연히 무섭고, 어렵고, 불안하고.”
냉정하게 판단하면, 인간화에 대한 비밀도 점점 풀리는 와중, 차라리 토끼 영토로 돌아와 바닥부터 시작해도 흑표범 영토보다는 안전할 터였다.
“심지어 그와 있으면 만나게 되는 사람도 전부 어려운 사람들이니까. 룬처럼요. 완전한 인간화를 치른 후에는 더더욱 곤란하겠죠.”
비비는 서툰 손놀림으로 리본을 묶어 망토를 고정했다. 두꺼운 끈은 리본이 아닌 천 뭉치처럼 우그러졌다.
“그래도 지금 아힌에겐 제가 필요할 거예요. 아마 제가 아힌을 필요로 하는 것보다 더. …어차피 흑표범이나 사자나 똑같이 흉악하기도 하고.”
무섭다고 말하는 비비는 예전만큼 두려움에 떨지 않았다. 나풀거리지만 스러지지 않는 갈대처럼, 달달 떨리면서도 단단한 보라색 눈동자를 직면한 룬이 낮게 웃었다. 살면서 한 번도 부러운 적 없었던 아힌이 처음으로 부러웠다.
“토끼의 보은 같은 건가?”
“그럴지도 모르죠. 그런데 지금은 토끼가 아닌 사람이에요.”
“완전한 사람이 되면 리본 묶는 방법부터 배워야겠네요.”
그는 손을 뻗어 뭉텅이 같은 비비의 리본을 고쳐줬다. 사람이 리본 좀 못 묶을 수도 있지, 위풍당당한 비비의 표정에 룬은 또다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렸을 때부터 포기하는 방법만 배워서, 쉬울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생각만큼 쉽진 않네요.”
“…무슨.”
“사자 영토도 한번 놀러 와요. 무식한 흑표범들처럼 숲에 사자를 풀어 두진 않거든. 아, 초원 쪽으로 가면 야생 사자들이 있긴 하네.”
그게 그거잖아. 파리하게 질린 낯을 한 비비가 입을 뻐끔뻐끔 여닫았다.
“그리고 이왕이면 그 페로몬은 잘 숨기고 살아요. 저 같은 한량이 아니고서야 다들 눈독 들일 법한 능력이….”
쾅!
일순 문을 박살 낼 기세로 열어젖힌 남자가 방으로 들어섰다.
시원하게 죽 찢어진 물빛 눈동자가 마주 선 두 사람을 향했다. 비비의 얼굴 한 번, 룬의 얼굴 한 번, 그리고 리본을 묶는 룬의 손을 번갈아 본 남자가 노골적으로 인상 썼다.
벌어진 골격에 날카로운 이목구비. 눈 감고 봐도 맹수계라 판단한 비비는 우선 침착하게 골동품 뒤로 몸을 숨겼다.
“아까 뒤따르던 호위 기사네요.”
손가락질하던 룬은 바람처럼 사라진 비비로 인해 당황스레 주변을 살폈다. 제 몸만 한 액자 뒤로 완벽히 피신한 그녀가 낯선 남자를 주시했다.
‘호위 기사?’
필시 아힌이 아는 사람이라며 언질을 줬는데. 아스라이 떨리는 비비의 보라색 눈동자가 남자에게 머물렀다.
뚫어져라 살필수록 비비의 미간은 일그러져만 갔다. 물빛 눈동자와 같은 색 장발을 반 묶음 한 남자는 아예 초면인 낯이었다.
‘저 눈동자 색깔이….’
어느 일족이었더라. 비비는 남자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머릿속이 텅 비고 말았다. 임시 호위 기사란 직책에 걸맞듯, 부리부리한 눈과 떡 벌어진 어깨는 걸출한 기사를 연상시켰다.
“모르겠어요?”
룬은 아예 이마에 ‘누구세요.’라고 적혀 있는 비비를 흘긋 돌아봤다.
“저는 알 것 같은데.”
“…….”
남자를 따라 눈을 뾰족하게 뜬 비비가 고개를 붕붕 저었다. 한참 침묵을 고수하던 그의 입술이 느지막이 열렸다.
“…저 망할 토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