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ymbiotic Relationship Between the Rabbit and the Black Panther RAW novel - Chapter (47)
토끼와 흑표범의 공생관계 6화(47/75)
에이븐은 조심스럽고 신중한 사람이었다. 아힌이 일부러 토끼의 존재를 알리고 다녔음에도, 반년 이상 래비안이란 성을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그런 자를 확실하게 끌어낼 수 있는 건 사냥감을 던져 놓는 수밖에 없었다. 아힌이라는 울타리 없이 비비를 먼저 마차에 실어 보내는 방법.
그리고 납치 외에 다른 방도를 찾을 수 없게끔, 목적지를 흑표범 영토로 설정하는 것.
아니나 다를까 에이븐은 정보를 접한 즉시 행동을 개시했다.
길드(guild)에 돈을 뿌려 인력을 고용하고, 직접 비비를 인도받기 위해 경계의 숲으로 들어갈 준비까지 채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경계의 숲은 인적도 드물고, 영토 경계선 외에는 경비가 허술하기에 일을 벌이기 가장 적합한 장소였다.
와중에도 그녀는 용의주도했다. 아힌의 행보를 실시간으로 보고하는 세작을 붙일 정도로.
‘흐, 살려…, 살려 주십시오.’
아힌에게 덜미를 잡힌 세작은 에이븐에게 그가 여전히 저택에 머문다는 거짓 정보를 고했다.
그 길로 그녀는 경계의 숲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랐다. 평소라면 한 번쯤 더 의심했겠지만, 거짓임을 알았더라도 당장 시간과 방도가 없었다.
에이븐의 행적을 확인한 아힌은 우선 말을 틀어 비비의 마차를 뒤따랐다. 퀸과 이브린, 세 명의 기사로도 충분히 에이븐의 술수를 막아 내겠지만, 다소 충동적인 선택이었다.
마침 아힌이 따라붙은 동시에 습격이 불거졌다. 가로막는 자를 페로몬으로 절명시키던 그는 마차 내부가 지나치게 조용하다고 생각했다.
의아해진 아힌이 창가로 다가가자, 소곤거리는 비비와 이브린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무리 일개 도적이라 해도… 위험하지 않아?] [토끼님은 이 실크해트 속으로 피신하시면 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요.] [아, 알겠,]곧 비비가 씩씩거리며 의자를 퉁 내려치는 소음이 일었다.
[…말이 되는 소릴 해!]지레 겁먹었을 때 나오는 반응과 목소리였다.
그건 마차에서 내릴 확률이 지극히 낮다는 의미. 확신하면서도 안심 못 한 아힌이 조심스럽게 창문의 갈고리를 잠갔다. 만에 하나 창문을 열어볼 확률까지 없앤 것이었다.
비비는 가끔씩 정말 장군감처럼 행동할 때가 있으니까. 듣다 보면 이브린의 허풍이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아힌은 검을 일절 사용하지 않은 채 토끼 수인들을 처리했다. 비비가 퀸과 이브린을 무력으로 때려눕힌 후, 마차에서 내리는 말도 안 되는 경우를 대비한 행동이었다.
“가능한 핏자국은 남기지 마.”
“피, 피를 보이지 말라는 말씀이십니까?”
이게 말이야, 똥이야. 전투에 가담하던 기사들은 못 들을 것을 들은 양 눈빛이 흔들렸다.
“못 하겠어?”
“…존명.”
그렇게 그들은 전투 중에도 피가 솟지 않도록 하는, 사서 고생하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회상을 마친 아힌은 찝찝한 마음에 입술을 핥았다. 토끼 수인을 전부 처리하지 못한 채 에이븐을 쫓아온 것이 내심 마음에 걸렸다.
그가 말을 하다 말고 생각에 잠겨 있자, 에이븐이 노기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푸다닥, 노성에 놀란 하얀 토끼가 멀리 달아나 버렸다.
왠지 모를 아쉬움을 느낀 아힌은 회중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비비가 흑표범 영토에 도착했는지 한시라도 빨리 확인해야 이 껄끄러운 불안감이 사라질 것 같았다.
“빨리 처리하고 끝내지. 나도 바쁘거든.”
* * *
토끼 수인. 어머니. 화재. 아힌.
연결 고리가 없는 여러 단어가 머릿속에 혼재됐다.
사박사박, 아힌의 흔적을 따라 부지런히 수풀 사이를 걷던 나는 팔을 사선으로 뻗었다.
“애쉬, 잠깐만.”
멀리 나무뿌리 쪽에 하얀 토끼 무리가 보였기에.
애쉬는 결코 사냥 본능이 죽은 게 아니었다.
나를 주인으로 여겨서 공격하지 않을 뿐, 전방의 토끼 무리를 덮쳐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다만….’
사냥하는 모습을 보아선 안 될 것 같았다. 이제야 겨우 얼굴을 마주하는 게 가능해졌는데, 다시 애쉬를 무서워하고 싶지 않았다.
“애쉬, 기다릴 수 있습니까?”
기사처럼 각을 잡아 거수경례를 취하자, 애쉬는 뜻도 모르면서 경례로 화답했다. 기특함에 엉덩이를 두드려준 나는 토끼들을 내쫓기 위해 달려갔다.
탕, 발을 구르자 잔디가 흩날렸다. 우렁찬 등장에 토끼 무리는 우르르 흩어지긴 했지만 멀리 달아나진 않았다.
‘얘들이 왜 이래?’
큰 나무뿌리 뒤에 숨은 토끼들을 어리둥절하게 살피던 나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발치에 달아나지 못한 한 마리가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여린 뒷다리를 나뭇가지에 관통당한 상태였다. 다 자란 토끼도 아니었기에, 나뭇가지가 한층 더 흉흉하고 날카로운 무기처럼 느껴졌다.
아까 애쉬를 본 후에 부리나케 달아난 토끼 같기도 하고. 아픔을 표현도 못 한 토끼는 끙끙 앓으며 숨을 토해 냈다.
옷을 찢으려던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나뭇가지를 뽑아야 할 것 같은데, 과다 출혈을 고려하면 함부로 뽑을 수도 없었다.
“아···.”
이대로라면 죽겠지. 용케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토끼가 다리를 절어서야 금세 생존경쟁에서 도태될 것이었다.
흥건한 선혈을 보며 안절부절못하던 나는 손목에 감긴 페레니움을 내려다봤다.
찰랑, 회중시계가 유난히 존재감을 과시했다.
이용 횟수가 한 번밖에 남지 않았는데. 알량하고 얄팍한 이기심이 고개를 디밀었다.
만약 이 토끼에게 사용한 후에, 당장 페로몬을 사용해야 할 일이 생기면 어떡하나.
그럼 또다시 토끼로 돌아가 버릴 테고, 전방에서 아힌을 찾을 수 있을 거란 확신도 없었다.
이런 귀한 보석을 또 언제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아니,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겠구나.
‘나더러, 나더러 어떡하라고···.’
고개를 돌리자, 친구인지 가족인지 모를 토끼들은 여전히 나무뿌리 뒤에서 기웃거리고 있었다. 멀리 애쉬가 있음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쉽사리 자리를 뜨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헐렁한 눈물샘이 고장 난 나는 토끼를 내려다봤다.
이대로 안아서 아힌을 찾아간 후에 지배계 페로몬을 빌리는 거야. 그리고,
‘그리고….’
전부 핑계였다. 가물거리는 토끼의 눈에서 생명이 꺼져 가는 게 다 보이는데, 아힌을 찾을 때까지 버틸 수 있을 리가.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섭리였다. 맹수의 새끼로 태어나더라도 다친 새끼는 버려지듯이. 인간이 되지 못하여 가문에서 버림받듯이.
합리화와 망설임, 핑계와 결정을 수없이 반복한 내가 바닥에 엎드렸다.
‘…하얀 토끼만 아니었어도.’
눈 딱 감고 지나쳤을지도 모르는데. 너는 왜 아프다고 말을 못 해선. 왜 하필 기다려 주는 가족이 있어선.
“조금만 참아.”
왜 나랑 비슷하게 생겨 가지고는. 이를 사리문 나는 토끼의 다리를 관통한 나뭇가지에 손을 가져갔다.
끼이익!
나뭇가지를 뽑자마자 토끼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그 몸부림만으로도 괴로워진 내가 얼른 페레니움과 페로몬을 강하게 운용했다.
피가 묻은 손끝에서 점차 상처가 사라지는 게 보였다. 오랜만에 봐도 여전히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상처 대신에 이질적인 피부가 자리 잡았음을 확인한 나는 관자놀이의 땀을 훔쳤다. 사실 치료가 될지 안 될지도 몰랐기에, 거의 도박에 가까운 시도였다.
‘다행이야.’
초조한 남의 속도 모른 채, 토끼는 어리벙벙한 얼굴로 뒷다리를 까딱거렸다.
“이제 안 아프지?”
이 비비 님의 솜씨인데 말이야. 질문을 알아들을 리 없는 토끼는 발딱 일어나 뒷다리로 머리를 탈탈 털었다.
그러자 나무뿌리 뒤에 숨어 있던 토끼들이 하나둘 다가오기 시작했다. 여러 마리가 몰려든 모양이 마치 웅성웅성 떠드는 것 같아서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흐뭇하게 바라보던 나는 저문 하늘을 상기하곤 몸을 일으켰다. 페레니움의 수명도 끝난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애쉬, 어서 가자.’
아힌을 찾아야지. 손짓하던 나는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분명히 입 밖으로 말했는데 왜 아무런 울림도 일지 않을까.
푹. 그때 코앞으로 거대한 앞발이 드리워졌다.
‘아…?’
천천히 고개를 들자, 토끼들의 우람한 턱이 보였다. 갑자기 거구가 되어 버린 토끼 여러 마리가 주위를 둘러쌌다.
저리 가, 나 화나면 무서워. 일종의 위협으로 받아들인 나는 허둥지둥 손을 뻗었다.
그러나 눈앞으로 보이는 건 손이 아닌 손톱만 한 앞발이었다. 벌떡 두 발로 일어선 내가 온몸을 더듬었다.
‘왜 토끼로 변한 거야!’
분명 페레니움의 횟수가 한 번 남았을 텐데. 원인을 찾고 있는 와중, 등 뒤로 무시무시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애쉬!’
소스라친 토끼들은 나무뿌리를 뛰어넘고 엎어지고 난리도 아니었다.
자칫 애쉬가 공격하기라도 하면. 당황한 나는 앞발을 펼쳐 상황을 중재하기 위해 애썼다.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애쉬는 내 뺨을 부드럽게 핥았다.
혀의 돌기로 인해 털이 쭈뼛 섰지만, 반가움의 표시임을 아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도 토끼들을 공격할 의사는 없어 보였다.
‘일단 가야 돼.’
토끼가 된 원인은 아힌을 찾으면서 생각하고.
수풀을 가리킨 내가 회중시계의 체인을 이끌었다. 의복과 퀸의 단검은 하는 수 없이 두고 갈 수밖에 없었다.
봇짐을 짊어진 것처럼 끙끙거리자, 애쉬가 대신 회중시계를 물어 올렸다.
‘좋게 생각하면….’
기동성이 훨씬 좋아졌으니 빨리 아힌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아윽!’
발을 내딛자마자 하얀 솜에 부딪힌 내가 털썩 엎어졌다. 솜의 정체는 다리를 다쳤던, 나와 조금 닮은 구석이 있는 토끼였다.
뒷발로 땅을 박찬 토끼는 따라오라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가리킨 곳은 나와 애쉬가 향하던 방향이었다.
표정이 한순간 멋져 보였다면 시력이 잘못된 걸까. 눈을 비빈 나는 밑져야 본전이기에 토끼의 뒤를 따랐다.
‘첫 번째가 사람으로 변할 때였고, 두 번째는 오늘 사용한 게 확실한데.’
달리면서 페레니움의 사용 횟수를 헤아리던 나는 아차 싶은 마음이 들었다.
후원에서 어머니의 호위 기사랑 대치를 이룰 당시, 끌어 올린 페로몬이 흘러 들어가서 발동되었을지도.
직후 아힌이 나타나서 당황하는 바람에 놓친 걸지도 모르겠다.
‘아직 내 힘으로 사람의 모습을 유지하는 건 힘든가.’
예전만큼 페로몬을 다루는 것이 어렵지 않은 게 어디야.
일부러 희망찬 생각을 하며 달리던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흑표범 한 마리와 토끼 무리가 함께 질주하는, 다소 받아들이기 힘든 장면이었다.
동공을 떤 나는 애쉬를 흘끔 올려다봤다. 나로 인해 더 이상 토끼에겐 식욕이 돋지 않는 건가.
‘너는 이게 아무렇지도 않아?’
시선이 마주치자 뭐가 좋은지 꼬리를 바람개비처럼 흔들어 대는데. 맹수를 이렇게 길러도 되는 건지 혼란스러울 따름이었다.
‘어째….’
절대 이 장면을 아힌이나 이브린에게 들키면 안 될 것 같은데.
허한 숨을 머금는 동시에 앞서가던 다친 토끼가 급제동을 걸었다. 지지직, 멈춰 선 흙바닥 위로 회오리가 그려졌다.
수풀로 쏙 뛰어든 토끼는 이제 둥근 엉덩이밖에 보이지 않았다.
‘따라오라는 의미인가?’
뒤따라 고개를 빼니, 나무를 성기게 심은 너른 공간이 드러났다. 중앙의 평평한 땅에는 낡은 마차가 세워져 있었다.
찬찬히 둘러보던 나는 반가움에 뛰어나가려는 애쉬를 급히 제지시켰다.
아힌과 어머니였다.
* * *
어째서 두 사람이, 그것도 경계의 숲에 함께 있는 걸까.
비비는 머릿속이 휑해졌다. 막상 예상한 일이 현실로 나타나자, 누군가 귀에 왁 소리라도 지른 것처럼 정신이 얼얼했다.
뒤늦게 마음을 추스른 비비는 애쉬를 커다란 바위 뒤로 밀어 넣었다.
‘일단 숨어.’
토끼들은 여전히 수풀 밖으로 얼굴을 디밀고 있었다.
그들을 등지고 있던 아힌은 등 뒤로 꽂힌 멍청한 시선을 눈치챘다.
그가 움찔 돌아볼 기색을 비추자, 바위 뒤편의 비비와 애쉬가 납작 몸을 낮췄다.
“…친구를 몇 마리나 데려온 거야?”
수풀 사이로 얼굴만 내민 토끼 무리를 둘러본 아힌이 바람 빠진 웃음을 터뜨렸다. 거리가 꽤 있는 탓에 복사한 듯 똑같은 얼굴로 보였다.
대가족이라고 판단한 아힌은 토끼들을 보며 혼잣말했다.
“왜 하나같이 비비를 닮았어? 하찮게 생겨 가지고는.”
‘뭣이?’
비비의 눈초리가 대번에 사나워졌다. 애쉬는 허공에 삼단 발차기를 날리는 그녀를 간신히 뜯어말렸다.
“구경이라도 하러 왔나. 별로 보기 좋은 장면은 아닐 텐데.”
아힌은 현재의 상황보다 비비를 닮은 토끼 무리에 더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초조함에 애가 단 에이븐이 닦달했다.
“…조금 전에 언급한 멸문은 도대체 무슨 말씀이시죠?”
‘멸문이라니?’
상상도 못 한 단어에 놀란 비비가 고개를 내밀었다. 아힌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에이븐의 표정은 가히 좋지 못했다.
“내 질문부터. 불편함을 감수하고 여기까지 꾀어낸 거라.”
“그런 건 무도회에서 마주쳤을 때 충분히,”
“이런 얘기를? 나야 몰라도 당신한테 좋은 건 별로 없지 않나.”
말문이 막힌 에이븐이 입술을 달싹였다.
‘꾀어냈다고?’
드디어 사건의 전말을 파악한 비비가 마른 입술을 축였다. 자세한 사정이야 몰라도, 추측대로 마차 습격엔 아힌과 에이븐이 관련되었음을.
뛰어난 청각에 감사하던 비비는 몰래 아힌의 등을 노려봤다.
‘거짓말쟁이….’
처리할 일이 남았다는, 따지고 보면 거짓말은 한 적이 없는 게 더 미웠다.
“비비한테 약물을 몇 번이나 투여했지?”
달칵, 회중시계를 재차 확인한 아힌이 물었다.
“약물이라니, 무슨 말씀이신지요.”
“블럼 나무의 수액 성분이 섞인 거. 다 알고 왔으니 빼지 말고 똑바로 말해.”
“…….”
“제대로 답하면 나도 당신이 궁금한 걸 알려 줄게. 비비가 어떻게 인간이 됐는지 궁금하지 않아?”
나른한 음성은 마치 사탕발림처럼 에이븐의 심리를 자극했다.
애쉬는 아까부터 미동 없는 비비를 걱정스레 살폈다. 그녀는 애쉬의 앞발 위로 제 앞발을 겹쳤다.
‘괜찮아, 나도 궁금했던 거니까.’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는 알아야지. 둘은 앞발을 겹친 채 다시금 전방을 응시했다.
“그건 도대체 왜…,”
“머리 굴릴 생각 말고 답이나 해.”
에이븐은 경계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아힌은 단신으로 온 듯했지만, 만에 하나의 눈과 귀가 있을지도 몰랐다. 퍽 수상쩍은 토끼 무리를 아니꼽게 쏘아본 그녀가 작게 읊조렸다.
“…네 살 이전에, 세 번 정도.”
“심하게 앓았을 텐데. 그걸 보고도 또 투여했나 보군.”
“당시에 초식계 영토에서는 은연중에 성행하는 영약이었습니다.”
“신기하네, 할렘에서나 구하는 마약이 언제부터 영약이 됐어?”
아힌의 비꼼에 그녀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못했다는 표현이 맞았다. 마주한 적안은 자연스레 시선을 굴리게 만들 만큼 살벌했다.
‘세 번….’
비비는 어렸을 적, 극심한 감기 몸살에 앓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잊어버릴 법도 한데 몸이 비틀리는 아픔만은 여전히 생생했다. 그때는 쌀쌀맞던 시녀들도 수그려 앉아 몇 번이나 저를 살피지 않았나.
“후에 태어난 카이리 래비안에게도 투여했나?”
“…….”
에이븐의 눈이 탐색하듯 가늘어졌다. 카이리를 언급하는 걸 보아, 말마따나 모든 조사를 마치고 온 자의 태도였다. 그녀는 고개를 저음으로써 답을 대신했다.
“그런 거면 당신도 생각은 했겠지. 비비의 인간화가 늦는 건 약물의 부작용일지도 모른다는 거.”
“…투여했던 다른 귀족가 자제들은 모두 안전히 인간화를 치렀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겠지, 비비는 특수한 경우니까.”
비비는 대화에 집중하느라 대뜸 토끼들이 자신을 둘러싸는 것을 막지 못했다.
갑작스레 시야가 털로 가린 그녀가 토끼들 사이에서 짜부라졌다.
축 처진 비비에 대한 나름의 위로일까. 어쩌면 새끼 토끼에 대한 보호 본능일 수도.
안타깝게도 수인과 동물은 언어 체계가 달랐기에 알아듣는 건 불가능했다.
‘슬픈 건 아니니까 괜찮아.’
푹신한 솜뭉치들에게 양해를 구한 비비는 다시금 귀를 쫑긋 곤두세웠다.
“비비를 우리 영토에 버린 건 감사하고 있어. 그래서 가문이든 뭐든 내버려 둘까 싶었지.”
“…계속 그렇게 간섭하지 않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맞아, 약물만 아니었다면 죽이고 싶다는 생각까진 안 했을지도. 일단은 비비의 부모니까.”
에이븐은 웃음기 묻어난 아힌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진심임을 모르지 않았다. 의연한 척 모은 손바닥 아래는 이미 땀으로 흥건했다.
한편, 같은 생각을 한 비비의 등으로 오스스 소름이 돋아났다. 래비안 가문의 처리. 아힌이 그녀를 꿋꿋이 떼어 내고 토끼 영토로 가 버린 이유였다.
“나름 귀족이랍시고 저택에 꽁꽁 박히면 죽이기가 번거롭거든.”
안 하던 수작을 부리느라 피로해진 아힌이 뻐근한 목을 돌렸다. 토끼 영토는 흑표범 영토에 비해 죽음에 관한 법규나 규율이 까다로운 탓이었다.
“비비를 데려가려 하지만 않았더라도 여기서 나와 대면할 일은 없었을 텐데.”
아힌의 태도에서 묻어나는 묘한 집착을 눈치챈 에이븐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비비의 부모임을 이용하면 이 자리에서 무사히 벗어날 가능성이 존재했다.
“제 아이를 데려가려는 게 그리 잘못된 일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연기 속에서 흔들린 비비의 보랏빛 눈동자를 상기한 그녀가 조용히 덧붙였다.
“…비비도 싫은 눈치는 아니었지요.”
“뻔뻔하네.”
“무슨?”
“카이리 래비안이 죽지 않았더라면 거들떠도 안 봤을 거면서. 안 그래?”
카이리가…? 말을 잇지 못한 비비가 입을 가로막았다.
눈앞이 하얘진 그녀는 복잡한 심경을 삼켰다. 동생인 카이리의 비보가 놀라우면서도 마치 먼 나라 이야기처럼 다가왔다.
그다지 가깝지 않던 동생은 그녀를 조롱하며 손가락으로 툭툭 치던 게 마지막 모습이었는데.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에이븐이 비비를 놓지 않으려 한 건 결국 카이리의 부재에서 비롯된 간절함이었다.
인간의 모습이 되어서가 아닌, 필요에 의해서. 바닥에 엉덩이를 붙인 비비는 질척이던 감정이 옅어짐을 느꼈다.
“천박한….”
질타하는 에이븐의 음성이 가느다랗게 떨렸다.
“…자식의 죽음을 함부로 매도하지 마시오.”
“카이리 래비안의 죽음은 입에 올리는 것조차 매도고, 비비가 흑표범의 배 속에 들어가는 건 괜찮고?”
아힌의 발언은 순간적으로 비비와 애쉬를 어색하게 만들었다.
“이제 됐어.”
도돌이표처럼 원점으로 돌아가는 대화에 질린 아힌은 검을 뽑아 들었다.
“마음 가는 여자의 부모라 대화를 나누면 망설여질 줄 알았는데,”
그가 조소했다. 고고한 척 허리만 세우는, 하등 기대할 것도 없는 자였다.
“죄책감 없이 죽여도 되겠군.”
수인은 때때로 인간보다 선량해지기도 하며 짐승보다 잔인해지기도 한다.
아힌은 하필 비비가 그 잔인함 속에서 일생을 살아왔다고 생각하니 속이 메스꺼웠다.
어떤 취급을 받고, 얼마나 고립된 환경에 있었을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비비는 선하고 동정심이 많았다. 혹시 삿된 말로 그녀를 꼬여 동일한 환경으로 데려가게 만들 바에, 가능성조차 남겨 두지 않는 편이 나았다.
“억울해하진 마, 래비안 가주도 나란히 보내 줄 테니까.”
아힌의 태도에 다급해진 에이븐이 체통을 잊고 외쳤다.
“아, 아직 제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셨잖습니까. 멸문이란 말은 도대체…!”
흘끔, 여전히 관람 중인 토끼 무리를 돌아본 아힌은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후원에 불길이 일었을 때, 래비안 가주는 당신을 찾지 않고 뭘 했지?”
“무슨….”
“비비와 당신은 사람들이 전부 대피할 때까지 후원에 남아 있었는데, 그때 래비안 가주는 당신을 찾지 않고 뭘 했냐고. 명색이 안사람이자 파트너였을 텐데.”
혼란스러워진 비비는 숨는 것도 잊은 채 바위를 짚고 일어섰다. 화재와 래비안 가주가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 건지.
“그건….”
어떠한 답도 하지 못한 에이븐은 아힌의 말을 연신 곱씹었다.
래비안 가주는 원래 그런 인간이었다. 제 안위만 우선시한 후, 대피한 귀족들의 시선을 고려해야 할 때쯤에서야 에이븐을 찾았으니.
그러나 만약, 그의 공백이 화재와 관련된 것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에이븐은 제 발로 수장에게 인위적인 화재일 가능성을 고발하여, 가문을 조사해 달라 부탁한 것과도 다름없었다.
절박함에 쫓겨 허술한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달은 그녀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아힌은 벌써 어둠이 내리기 직전인 하늘을 올려다봤다.
“후원의 불길은 정확히는 문서고에서 일어난 폭발이었어.”
문서고는 토끼 영토에 존재하는 귀족가의 일 년 예산서나 수출입 기록서 등의 중요 문서를 보관하는 장소였다.
“문서고가 불탄 것치곤 아몬 수장 측에서 지나치게 조용하지 않아?”
에이븐은 화재에 대한 증언을 할 당시, 아몬 수장의 태연하다 못해 코코아만 찾느라 바쁜 태도를 떠올렸다.
원래 수더분한 사람이긴 했으나 겉모습으로 모든 걸 알 순 없는 노릇. 양손을 모은 에이븐의 손끝이 파리하게 질렸다.
그녀의 불안과는 상관없이 아힌의 말이 이어졌다.
“수장의 저택, 심지어 경비가 삼엄한 무도회에서 불을 지르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 성공하더라도 나가는 길목에 잡힐 테고.”
바닥을 향해 늘어뜨린 그의 검날이 에이븐의 불길함을 가중시켰다.
“아무리 후원이라도 경비가 너무 느슨했던 것 같지 않아? 당신의 호위 기사가 검을 들고 설칠 만큼.”
“…설마.”
“불을 지르든 말든 방관한 거겠지. 아마 중요한 문서는 다 따로 보관해 뒀을걸.”
아힌의 입가에 경계를 허물어뜨리게끔 만드는 선한 웃음이 걸렸다. 에이븐은 그 작위적인 미소가 지나치게 꺼림칙했다.
“그게… 래비안 가주가 저를 찾지 않은 것과 무슨 연관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아힌은 가늠했다.
에이븐이 전부 알면서 시치미를 떼는 건지, 아니면 정말 모르는 건지.
그리고 금방 가늠을 그만뒀다. 전자든 후자든 뭐가 되었든 상관없었다.
“나야 모르지.”
“뭐라고요?”
“그런데, 특히 래비안가(家)와 같은 상업 가문의 수출입 기록서가 있었던 쪽이 다 날아가 버렸다더라고.”
“고작 그런 걸로 래비안 가주를 의심하신다는 말씀인가요?”
“글쎄, 화재보다는 그다음이 문제지 않을까. 태우려던 수출입 기록서는 멀쩡하고, 아몬 수장은 불길을 핑계로 곧 상업 가문을 조사할 거고.”
아힌의 말이 사실이라면, 화재보다 정말 그다음이 문제인 에이븐이 입술을 깨물었다.
수출입 기록서는 상업 가문에서 사용하는 일 년 예산과 어느 정도 맞아떨어져야 한다.
그러나 래비안 가주는 음지의 일도 건드리고 있기에, 래비안가(家)의 일 년 예산은 수출입 기록서보다 훨씬 웃도는 수준이었다.
눈에 띄게 안색이 나빠진 에이븐을 마주한 아힌이 방긋 웃었다.
“상업 가문이야 많겠지만, 래비안 가주도 뒤가 꽤 구리지 않아? 하필 자제 중에 불을 다루는 자도 있다며.”
가주의 몰락은 곧 가문의 몰락. 이를 악문 그녀가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토끼 영토 귀족 중에 불을 다루는 페로몬을 가진 자는 흔합니다. 그것 하나로 래비안가(家)를 의심하시다니요, 말도 안 되는 억측입니다.”
“-그거야 아몬 수장이 판단하겠지. 억측도 애초에 래비안 가주한테 약물을 얻은 당신이 할 소린 아닌데.”
“…….”
“카이리 래비안이 운반하던 물품도 마약이었지 않나? 수입처가 엔델루스 지역이었고.”
에이븐은 무도회로 출발할 당시, 엔델루스 지역과 관련된 밀반입을 아몬 수장 측에서 눈치챈 모양이라며 성화를 떤 래비안 가주를 떠올렸다.
흔들리는 보라색 눈동자가 아힌을 향했다.
비록 증거는 없으나, 아몬 수장에게 정보를 제공한 게 눈앞의 남자일 거라는 확신이 일었다.
“비록 엔델루스가 중립 구역이긴 하지만,”
아힌이 한 걸음 다가섬에 따라 에이븐이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사자 영토 차기 수장의 주 관리지라, 한 번 들추기 시작하면 빠져나가기 쉽지 않을 거야. 그 인간도 정상은 아니거든.”
칼날 같은 저녁 바람이 에이븐의 몸을 관통했다.
“…그리고 엔델루스는 흑표범 영토의 치하 아래 있기도 하죠. 아몬 수장과 손을 잡았군요.”
“손까진 아니고. 정보를 주는 대신 당신과 래비안 가주를 받기로 했지.”
“바, 받는다 함은···.”
“목.”
그녀는 반사적으로 목을 더듬었다.
래비안가(家)가 제아무리 중급 귀족이기로서니, 아몬 수장도 모자라 타 영토의 거물들에게 물어뜯기면 승산이 없었다.
화재 건까지 추궁받으면 멸문. 아몬 수장이 자비를 베풀면 기껏해야 몰락 귀족으로 남을 터였다.
“…래비안가(家)의 멸문은 비비 또한 곤란해질지도 모릅니다.”
“웃기는군, 호적에도 올리지 않은 주제에.”
“그건 인간화를 치르지 못해서…!”
무작정 말하던 에이븐이 통하지 않는 변명임을 인지했다. 인간화를 치를 즈음 출생신고를 하는 건 관례일 뿐, 법이 아니었다.
“비비는 토끼 영토에서 없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래비안가(家)가 멸문을 하든 말든 아무런 관계가 없지.”
붉은 눈이 굶주린 짐승처럼 번득였다.
주춤주춤 물러나던 에이븐은 돌부리에 걸려 엉덩방아를 찧었다. 시야로 보이는 검날이 오금을 저리게 만들었다.
“사, 살려,”
온몸을 떨던 에이븐은 아힌의 눈길이 다른 곳을 향해 있음을 눈치챘다. 따라서 고개를 돌린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흑표범…?’
수풀 사이에서 검은 짐승이 어슬렁거리며 걸어 나왔다. 후원에서 비비의 주변으로 뛰어들었던 흑표범이었다.
‘설마.’
비비를 찾기 위해 방황하던 에이븐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흑표범의 옆으로 걸어 나온 것은 그녀가 찾던 여자가 아닌, 이십 년 가까이 보아 온 새끼 토끼였다.
“어, 어째서 다시 토끼로…?”
비단 놀란 것은 에이븐뿐만이 아니었다.
아힌의 동공 또한 드물게 확장됐다.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비비의 존재를 눈치챘지만, 설령 새끼 토끼로 돌아갔으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스르릉, 그는 비비가 다가오자 검을 집어넣었다.
고요한 발걸음으로 걸어온 그녀는 아힌의 발치에서 멈춰 섰다.
“언제 나오나 했어.”
시선이 오갔다. 또다시 아힌은 비비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억지로 나오라고 할 순 없어서.”
비비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새초롬한 눈빛이 언제부터 눈치챘냐는 질문임을 알아챈 아힌은 오랜만에 말문이 막혔다.
“중간쯤부터.”
정확히는 마음 가는 여자라는 말을 한 직후였다. 그때 비비의 감정이 크게 흔들린 탓에 튀어나온 페로몬의 흐름을 느꼈으니까.
아힌의 답을 들은 비비는 그저 담담히 수긍했다. 정적인 반응에 그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초조한 기색을 비쳤다.
아힌은 래비안가(家)를 흔드는 것에 손을 거들었다. 또한 에이븐 래비안과 래비안 가주를 처리하려 했고, 아직도 그 생각은 유효했다.
그러나 이 모든 건 비비에게 알리지 않은 채 진행한 일이었다. 또.
차라리 비비가 반응을 보이면 대처라도 하겠으나, 상황에 비해 이상하리만치 차분했다. 심지어 감정도 잘 다스렸는지, 흐트러졌던 페로몬도 제대로 갈무리한 상태였다.
가까이 있음에도 그녀가 멀게 느껴진 아힌이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들어 줄까.”
고개를 젓는 비비로 인해 그의 손이 허공에서 우뚝 멈췄다.
옆으로 비껴 선 비비는 뒤편에 주저앉은 에이븐을 바라봤다. 언제나 고고하던 그녀의 어머니는 겉모습도, 내면도 무너진 상태였다.
“…비비.”
에이븐은 토끼인 비비에게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간절한 시선을 보냈다.
비비가 나타나자마자 그토록 섬뜩하던 아힌 그레이스의 분위기가 한순간에 누그러들었다. 특유의 여유로움마저 조급함에 덮여 사라졌다.
에이븐의 야윈 손이 비비를 향해 뻗어졌다. 혹시라도 비비가 에이븐을 선택하면 지금보다는 긍정적인 방도를 생각할 수 있었다.
비비는 마지막일 에이븐의 얼굴을 묵묵히 눈에 담았다.
‘가자.’
이내 등 돌린 비비가 아힌의 바지 자락을 당겼다. 도저히 속을 읽을 수 없었던 아힌은 군말 없이 뒤를 따랐다.
비비가 보이는 일련의 행동이 지나치게 정적이었다. 수인이 아닌 진짜 토끼가 되어 버린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보폭을 맞춰 걷던 그는 깨달았다. 애정의 끈을 완전히 놓아 버렸을 때의 반응임을.
그 냉담함이 저를 향할까, 걷잡을 수 없이 불안해진 아힌이 앞서가는 비비를 불렀다.
“비비.”
부지런히 걷던 그녀가 고개를 틀었다.
“이대로도 만족해?”
망연히 주저앉은 에이븐에 대한 물음이었다.
멈춘 채 잠깐 뒤돌아본 비비는 곧 아힌을 향해 앞발을 펼쳤다.
‘이제 됐어.’
안아 달라는 의사를 물릴까, 빠르게 집어 든 그가 떨떠름하게 측방을 곁눈질했다.
조용히 따라오는 애쉬의 문제가 아니었다. 어디서 만난 건지 모를 토끼 군단이 우르르 따라오고 있었다. 얼핏 하얀 솜뭉치가 줄지어 이동하는 모양새였다.
순번을 붙여도 헷갈리겠다고 생각한 아힌은 제인을 세워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비비는 주머니에서 얼굴만 뺀 채 멍한 표정으로 전방을 바라봤다.
“꼭 중요한 순간에만 토끼로 돌아가지.”
아힌은 찬기를 뺀 조곤조곤한 음성을 냈다.
“화라도 내, 왜 또 멋대로 행동했냐고.”
“…….”
“변명 준비해 뒀는데.”
비비가 고개를 꺾어 올려다보자, 그는 일부러 그녀가 선호하는 예쁜 웃음을 걸었다.
“그러고 있으니까 진짜 발밑을 기어야 할 것 같잖아.”
흑표범이면서 여우같이 비위를 맞추는 맹수였다.
폭 한숨 쉰 비비는 집으로 돌아가서 혼쭐을 내겠다는 의미로 앞발을 저었다. 당장은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어느덧 숲은 저녁이 내려 전방이 푸르스름하면서도 까맣게 보였다. 밤눈이 밝은 애쉬가 앞장서 길을 인도했다.
“자 둬. 깨어나면 그레이스가(家)일 테니까.”
그 말은 심신이 지친 비비를 마법처럼 수마로 끌어당겼다. 숲길을 걷는 아힌과 애쉬, 토끼들의 머리 위로 달이 걸렸다.
몽롱하게 눈을 껌벅인 비비가 달을 올려다봤다.
래비안이란 성을 완전히 버린, 후련하면서도 서글픈 저녁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