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ymbiotic Relationship Between the Rabbit and the Black Panther RAW novel - Chapter (48)
토끼와 흑표범의 공생관계 7화(48/75)
최근 바람이 서늘했던 것에 비해 유독 따스한 날이었다.
배를 뜨끈하게 달구는 햇살로 인해 잠이 깬 나는 몸을 꼬물거렸다. 찌뿌둥한 느낌을 조금 더 만끽하고 싶었다.
왜 이렇게 오래 잔 기분이지. 누운 곳은 솜을 푹신하게 뭉쳐 둔 쿠션이었다.
딱, 딱, 눈을 비비던 나는 이상한 소리가 들리자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면 그레이스저일 거라더니.
‘저택이긴 저택인데….’
정확히는 연무장 주변에 비치된 의자 위였다.
훈련 시간인지, 소속 기사들이 목검을 부딪치는 소음이 귀를 두드렸다.
진검이 아니라 상상보다는 덜 무섭기도 하고. 일부러 훈련 시간은 피해 다녔기에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기침하셨습니까.”
어리둥절하게 살피는 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메이미였다.
“연무장입니다.”
그러니까 왜 연무장에서 자고 있는 거냐고. 뻐끔뻐끔 입을 여닫자, 그녀는 따뜻한 천으로 내 얼굴을 닦으며 설명했다.
“꼬박 하루를 주무셨습니다.”
그래서 일어나길 기다리다 지친 아힌이 나를 아예 쿠션째로 들고 다녔다고. 현재는 그의 일정에 따라 집무실을 거쳐 연무장에서 잠을 청하던 것이었다.
만세 자세로 앞발을 닦던 내가 질린 낯을 했다.
‘진짜 미쳤어…!’
사람이었더라도 똑같이 행동했을 듯한 불길한 생각이 드는데, 괜한 걱정일까.
“…애쉬는 바라를 데려오기 위해 경계의 숲으로 갔습니다. 토끼님이 처분을 내리셔야겠죠.”
바라와 처분이란 두 단어가 털을 쭈뼛 서게 만들었다. 바라는 저보다 강한 자에게 굴종한다는 메이미의 설명을 듣던 나는 목검 소리가 멎은 것을 깨달았다.
‘끝났나?’
연무장 중앙으로 시선을 옮기자, 이쪽을 바라보던 기사들이 어정쩡하게 목검을 딱딱 맞댔다. 정규 기사들이라기엔 어린애들 장난 같은 수준의 훈련이었다.
‘이상한데.’
잠자리인 쿠션을 정리하고 있으니 또다시 목검 소리가 멈췄다.
이렇게 나오신다 이거지. 쿠션의 먼지를 터는 척하던 나는 휙, 예고 없이 번개처럼 돌아봤다. 아니나 다를까 이쪽을 보다가 흠칫 놀란 기사들이 한 박자 늦게 목검을 휘둘렀다.
“-억!”
박자를 놓친 탓에, 동료의 목검에 맞은 기사 하나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분명히 나를 지켜보고 있어. 수상쩍은 그들을 관찰한 내가 메이미를 향해 으쓱였다.
‘왜 저러는 거야?’
무릎을 굽힌 그녀는 묵묵히 출처가 토끼 영토인 신문을 펼쳤다. 정규 절차를 거친 신문이 아닌, 시가지의 길거리에나 뿌려질 법한 가십지였다.
“…신문을 보시는군.”
“신문을 보신다고?”
“신문을 보신다는군…!”
줄줄이 말을 전달하는 기사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딴에 속삭인답시고 귀에서 귀로 전달했지만, 토끼의 청각 앞에선 전혀 의미 없는 행위였다.
‘시, 신문이 왜?’
불안해진 내가 다급히 신문을 펼쳤다.
「토끼와 흑표범, 그리고 사자」
기사를 읽어 내린 나는 답답한 마음에 가슴을 텅텅 쳤다. 토끼 영토에서 둘러댄 무용수란 핑계가 화려한 염문으로 재탄생되어 있었다.
‘이게 다 뭐야!’
기가 차서 씩씩대는 나를 달랜 메이미가 입을 뗐다.
“다들 염문 속 주인공이 토끼님일 거라 추측하고 있습니다. 저번에 아힌 님이 들고 다닌 마구간지기와 동일인이라고도 여기는 중이고요.”
아힌의 측근으로서 고용인들에게 많이 시달렸는지, 그녀의 낯빛에 피로가 떠올랐다.
“토끼님의 인간화에 대해선 모르지만, 거의 수인이라 확신한 상태입니다. 그래도 아힌 님과 룬 님의 신분상 좋은 가십만 쓰여 있으니 다행입니다.”
다행이고 자시고 너무 터무니없는 내용이었다. 아힌이 나한테 저택을 사다 바쳤다니. 또 외모를 님프의 환생이라 저술해 두면 내가 무슨 염치로 사람이 돼.
‘…님프라니!’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아름다움에 두 눈이 멀어 버린다는 그 요정?
수치스러워진 나는 앞발로 힘껏 신문을 찢어발겼다.
한창 혈투를 벌이는데, 뒤편으로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일어났어?”
훈련을 지도하고 온 아힌의 음성이었다.
그제야 깨어나기 전의 일을 상기한 나는 우뚝 멈췄다.
독단도 정도껏이어야지, 이번만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두려워도 맞서야 하지 않겠나. 제대로 대화를 나눌 때까진 냉정하게 구는 거야. 차가운 토끼로 탄생한 나는 날 선 눈으로 고개를 틀었다. 그리고 숨이 멎었다.
“…비비?”
아힌은 주로 갑옷 안에 입는 얄팍한 의복을 입고 있었다.
땀을 잘 흡수하는 재질이라 기사들이 훈련 시 입곤 하는 옷이었는데, 몸의 굴곡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게 문제였다.
더욱이 땀에 젖은 은발을 뒤로 넘긴 모습은 정말 눈 뜨고는 못 봐 줄 지경이었다.
틀어진 우리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이런 차림으로 나타난 걸까.
얼음 상태로 바라보던 나는 얼굴에 피가 몰리는 것을 느꼈다. 스윽, 앞발로 코를 훔치자 다행히 피가 묻어 나오진 않았다.
일련의 과정을 무표정으로 지켜보던 아힌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님프의 취향이 이래도 돼?”
제발 그 단어 좀 말하지 마. 귀를 세운 내가 고개를 저었다.
반응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그는 전속 시종이 내민 수건을 거절했다.
“-님프 토끼가 곧 코피를 흘릴 테니 그걸로 닦아 줘.”
“예…?”
“저 변태 같은 얼굴을 봐.”
또다시 목검 소리가 뚝 멎었다.
기사들은 이번엔 눈길을 감출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도대체 변태 같은 얼굴이 무엇인지 관찰하는 눈초리였다.
‘변태 아니야, 님프도 아니고!’
수십 쌍의 붉은 눈동자가 짙은 확신으로 물들었다.
* * *
메이미의 일정표에 따라, 애쉬와 산책을 나온 내가 총총 잔디를 뛰었다.
지난 며칠, 아힌은 의식적으로 토끼 영토에서의 일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내가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밤마다 이불 속을 구르며 악몽을 꾼다고.
그는 당장은 토끼 영토의 모든 사안에 신경 끄라며 딱 잘라 말했다.
실상 마음을 전부 정리하지 못한 나도 그저 수긍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이 딱딱한 응어리도 물러지겠지.
‘바라…!’
생각에 잠긴 채 잔디를 누비던 내가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목줄에 메인 채 기사에게 끌려가는 중인 바라와 마주친 탓이었다.
경계의 숲에서 나를 덮쳐 오던 발톱이 떠오르자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어디를…?’
경계의 숲으로 아주 돌아가는 건가. 그럴 거면 굳이 저택에 불러들일 필요가 없었을 텐데.
추측하던 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앞서 나를 해치려 한 바라를 처벌하려던 아힌의 무감한 눈이 뇌리를 스쳤다.
슬그머니 접근해서 기사를 올려다보자, 그가 노골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말해 봐. 눈을 홉뜨고 나서야 기사가 어렵사리 입을 달싹였다.
“…사살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 * *
최근 아힌은 기분이 하늘로 뛰어오르다가도 바닥을 쳤다.
원인은 오로지 덩어리 같은 님프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비비는 언제든 그레이스저를 떠날 수 있게끔 행동해 왔다.
우선 낯을 가리는 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고용인들에게 정을 붙이지 않았다. 맹수계 수인이라 두려운 탓도 있겠지만.
때때로 초식계 영토의 안전성에 관한 서적을 챙겨 읽기도 했다.
또한 아힌이나 이브린, 발렌스가 선물한 장식물은 돈이 됨을 알기에 꼬박꼬박 제 보물 창고에 숨겼다.
보물창고는 토끼만이 기어들어 갈 수 있는 소파 아래 틈새였다.
아힌이 시험 삼아 보석 하나를 슬쩍 숨기자, 비비는 아리송하게 소파를 신경 쓰는 모습을 보였다. 숨긴 보석의 개수까지 파악하는 치밀함이었다.
이 모든 준비가 불안에서 기인한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레이스가(家)는 제 처지와 맞지 않은 곳이란 불안과, 언젠가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불안. 초식계 수인의 원초적인 본능에서 오는 불안.
이십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얻은 경험에서 비롯된 불안이었다.
그랬기에 비비는 늘 인간화에만 매달리며, 외줄 타기라도 하는 듯한 위태로움을 보였다.
그런 비비가.
요즘은 조금이나마 여유를 찾은 듯한 변화를 보였다.
그 원인에는 래비안가(家)와 얽혔던 발목의 족쇄를 던진 게 가장 컸고, 자의로 흑표범 영토에 넘어온 선택도 한몫했다.
덕분에 비비는 요즘 그레이스가(家)에 대한 소속감을 갖는 것에 시간을 할애했다.
변화는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흑표범 영토에서 발행되는 신문을 찾아 읽고, 기사들과도 알음알음 인사를 주고받는 관계로 발전했다.
무엇보다 달가운 것은, 아힌에 대한 감정 표현이 약간이나마 잦아졌다는 사실이었다.
어제는 산책을 나섰다가 발견한 제 몸만 한 꽃 한 송이를 내미는데, 아힌은 순간 입속에 집어넣어 굴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토끼는 용의주도하고 엉큼한 걸 넘어 낭만주의자이기까지 했다.
여기까지는 딱 좋았다.
문제는 비비가 내외를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주머니에 들어오려 하지 않는다든가, 침대에서 제가 먼저 선을 그어 놓고 잔다든가.
물론 토끼 영토에서 아힌이 행한 독단에 대한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내외의 가장 큰 원인은, 아힌과 에이븐의 대화 중에 나온 발언을 들은 것에 있었다.
‘마음 가는 여자의 부모라 대화를 나누면 망설여질 줄 알았는데, 죄책감 없이 죽여도 되겠군.’
제아무리 아힌이라도 비비의 부모인 에이븐을 앞에 두고 태연할 순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오는 대로 말한 것을 들어 버리다니.
‘왜 하필.’
사람이었으면 금세 존재를 눈치챘을 텐데.
토끼의 기척은 읽기도 어려운 데다, 하물며 비비를 닮은 일곱 마리의 토끼가 아힌의 경계를 흩어놓은 결과였다.
집무 책상에 앉은 그는 깍지 낀 손에 이마를 묻었다. 당장 새끼 토끼를 잡고 감정을 늘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님프 때문에 힘들어.”
난데없는 중얼거림에, 서류를 처리하던 이브린의 미간이 퍽퍽하게 굳었다.
“저는 무조건 님프 님 편입니다. 험담을 하시려거든 퀸 님을 찾으십시오.”
“넌 도대체 주인이 누구야?”
“권력은 움직이는 거니까요. 최근 그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헛소리를 무시한 아힌이 한 박자 늦게 물었다.
“페레니움은.”
오늘만 세 번째 하는 질문이었다. 질린 낯을 한 이브린이 집무 책상 앞에 섰다.
설명에 따르면 페레니움이 있어야 비비는 고통 없이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다고 한다.
지배계 페로몬을 깊이 흘려 넣으면 되는 부분이긴 하나, 새끼 토끼의 몸에 이를 박을 수도, 호흡기를 통하기도 애매한 부분이었다.
“한두 푼 하는 보석인가요. 경매장도 다녀와야 하고, 앞으로 이 주 동안 아직 세공되지도 않았다는 답변을 드릴 예정입니다.”
입 닫고 당장 구해 오라는 일침이 날아올 법도 한데, 아힌은 고요히 손에 이마를 묻은 상태였다. 한 마디 더해도 되겠다 싶었던 이브린이 운을 뗐다.
“그러니 이 주 동안은 질문하지 말아 주십시오.”
“생각해 보니까 토끼 영토에서 비비를 놓친 건에 대해 벌하는 걸 잊었군.”
한 마디의 무게는 무거웠다. 혼자 죽기는 싫은 이브린이 책장에 앉은 매를 가리켰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퀸 님이 토끼님께 단검을 겨눈 바람에, 말리느라 방심하고 말았으니까요.”
“퀸이?”
“예. 토끼님이 살려 달라 싹싹 빌었는데도 무자비하게 검을 휘둘렀습니다.”
일순 아힌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비비를 싹싹 빌게 만들었다고?”
그저 검을 빼 들었을 뿐인 것을, 모함당한 매가 대번에 정색했다. 꽥, 도주하려던 매는 아힌의 페로몬에 맞아 카펫으로 추락했다.
다음 차례는 자신임을 예감한 이브린이 침착히 부언했다.
“아무래도 토끼님이 치유계 페로몬을 조준하는 방법을 배운 모양입니다. 그런 걸 저희가 어떻게 당합니까.”
“어머니가 가르치셨나?”
“거기까지는 모르겠습니다. 급박한 상황에 나온 요행이었을지도 모릅니다만, 원리를 깨우친 건 분명합니다.”
이브린의 엄벌을 보류한 아힌이 입술을 쓸었다.
최근 비비는 무심결에 페로몬을 흘리는 횟수가 확연히 줄었다. 능력을 사용할 때도 수면과 마취, 치유를 구분하기 시작한 듯하고.
보통의 수인이 인간화 이후 천천히 페로몬을 깨우치는 데 비해 배움이 빠른 편이었다.
“…왜 지금껏 가정교사를 붙일 생각을 못 했지.”
“괜찮습니다, 저도 방금 깨우쳤으니까요. 보통 새끼 토끼를 보고 그런 생각은 못 하죠.”
아힌은 그레이스가(家) 전속 가정교사들을 떠올렸다.
“윈슬럿 부인은 어때.”
“좋은 분이지만, 토끼님이 낯선 흑표범 수인과 얼굴을 맞대고 하는 수업이 가능할까요?”
수업과 송곳니에 대한 공포 사이에서 갈등하느라 반은 날려 먹지 않을까. 같은 생각을 한 아힌과 이브린이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초식계 쪽 가정교사를 알아봐야겠군.”
“가주님께서 그쪽 방면으론 능통하시니, 부탁드려 보는 게 어떻습니까.”
“그편이 좋겠어. 아, 래비안가(家) 쪽은 어떻게 됐지?”
“수장 측의 엄밀한 조사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아마 몰락 귀족도 힘들 겁니다.”
아힌은 그들을 두 눈 뜨고 멀쩡히 살려 둬야 한다는 게 못내 아쉬웠다.
하나 당사자인 비비가 이쯤으로 만족하는 눈치였기에 이 이상 손을 뻗칠 수도 없었다.
더욱이 그는 토끼의 감시 아래, 래비안가(家)에 관심을 끊겠으며, 앞으로 비비에 관한 일을 독단적으로 행하지 않겠노라는 각서에 지장까지 찍었다.
그러지 않으면 비비는 당분간 발렌스나 메이미의 방으로 가출이라도 할 심산인 듯했으니. 아힌은 이제 잠들 때 비비가 침대에 없으면 안 되는 처지였다.
서랍에 고이 보관해 둔 발자국 찍힌 각서를 떠올린 아힌은 한숨을 폭 내쉬었다.
“래비안가(家)의 동향은 계속 추적해 둬. …차후에, 혹시라도 비비한테 접근하려는 낌새를 보이면 처리하고.”
“예. 그리고 바라의 처분에 대한 건인데,”
“어쩔 수 없지, 이번엔 너무 지나쳤어.”
“아뇨, 그게 좀. 아힌 님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
도움의 의미를 파악 못 한 아힌이 눈을 깜박였다.
“직접 보셔야 합니다.”
말을 아낀 이브린은 그를 연무장이 보이는 창가 쪽으로 안내했다.
창가로 다가선 아힌의 시야로 연무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평평한 연무장 중앙, 바라와 비비가 마주 선 채 대치를 이뤘다. 마침 몰아친 싸한 바람이 두 동물을 긴장으로 이끌었다.
뒤로는 언제든지 단검을 날릴 수 있게 준비한 메이미와, 걱정으로 어슬렁거리는 애쉬. 그리고 여러 명의 경비 기사가 곳곳에 숨어 주시하고 있었다.
“뭐 하는 거지?”
덤덤히 내려다보던 아힌이 물었다.
“토끼님과 바라의 대련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저딴 걸 시켰냐고.”
“토끼님이 원하셨답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음모가 있는 게 아니고서야 천하의 겁쟁이인 비비가 흑표범을 상대할 리 없었다.
“바라가 강자에게 굴종한다는 사실을 접한 모양입니다. 페로몬을 사용할 심산이신 듯한데, 보는 눈이 많은데 괜찮겠습니까?”
“…수면에 관련된 페로몬만 사용할 계획이겠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비비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머리를 쓸어 넘긴 아힌은 어느새 하늘로 날아오른 퀸을 확인했다. 그의 명령이면 비비를 낚아채어 데려오는 건 한순간이었다.
“…….”
드물게 망설인 아힌은 두 발로 굳건히 선 토끼를 내려다봤다. 맹수의 ‘맹’만 들어도 죽어라 피하던 비비가 제 발로.
“제지하면 비비가 화낼까?”
“좋아하진 않으시겠죠.”
숨을 한 번 작게 쉰 아힌은 창틀에 팔을 걸쳐 기대었다. 기실 퀸과 이브린을 쓰러뜨릴 솜씨라면 흑표범 한 마리 정도야 일도 아니었다.
“내 도움이 필요하단 말은, 여차할 때는 바라에게 페로몬을 사용하란 소리였군.”
“예. 토끼님이 질 것 같진 않지만요. 이미 고용인들도 토끼님을 퀸 님 같은 수인이라 여기는 듯하니, 이참에 이런 식으로 알려도 괜찮겠죠.”
“입지를 굳히란 소리로 들리는데.”
“사실 맞습니다. 누차 말씀드리지만 토끼님은,”
“-장군감?”
“예.”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대련의 막이 올랐다.
시작은 탐색전이었다.
거리를 둔 바라와 비비는 서로를 노려보며 연무장을 돌았다. 크르릉- 위협적인 바라의 울음에 지지 않은 비비가 콧잔등을 움찔거렸다.
의외로 치열한 신경전이 펼쳐지자, 숨어서 지켜보던 기사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내가 미쳤었나 봐….’
한편, 비비는 후회의 늪에서 헤엄쳤다.
바라는 기골이 장대한 건 물론이요, 불거진 근육과 매끈한 발톱을 자랑하는 맹수 중의 맹수였다.
거기에 스스로를 이긴 자만 따른다는 흑표범 계의 마초가 아닌가.
실제로 비비는 경계의 숲에서 이미 한 번 바라를 쓰러뜨렸지만, 바라는 그때의 공격이 룬의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저 맹수를 살려보자고 이런 짓을 펼치다니. 그러나 후회해 봤자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애쉬가 끌려가는 바라를 따라가며 털을 눈물로 적시지만 않았어도. 거기서 바라가 애쉬의 눈물을 다정하게 핥아 주지만 않았어도···!
비비는 이를 악물었다. 저 마초를 쓰러뜨려서 굴종시키면 일단은 아힌도 한 수 접어 주지 않을까.
그냥 부탁해 볼까 생각도 했지만, 그녀도 내심 제게 투기를 불태우는 바라가 아니꼬웠다.
이참에 비비 님의 매운맛을 보여 줘서, 종자로 부려 주겠···,
“컹!”
‘아앗!’
입을 쩍 벌린 바라가 일직선으로 달려들었다. 데굴데굴 굴러 입질을 피해 낸 비비는 곧장 바라의 뒤편으로 돌아 몸을 피신했다.
긴장한 아힌은 손끝에 페로몬을 집중시킨 채 움직임을 살폈다. 혹시라도 비비가 다칠 만한 상황이 오면 곧장 바라를 절명시킬 심산이었다.
오른쪽, 왼쪽. 시선을 옮기던 그는 옆에서 사각거리는 펜촉 소리에 인상 썼다.
“이브린, 뭘 쓰는 건데?”
선제공격을 간단히 피해 낸 순발력. 거기다 뒤로 돌아감으로써 상대의 시야를 교란시키는 작전. 이브린은 한 장면도 놓치지 않으며 빠르게 기록했다.
“가주님께서 부탁한 보고서입니다. 출타 때문에 못 보아 아쉽다고요.”
“…….”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토끼님의 페로몬에 당해 본 자로서…, 지금 토끼님이 기술을 시도합니다!”
바라가 순식간에 사라진 사냥감을 찾는 사이, 비비는 바라의 상처 입은 옆얼굴로 우회했다.
유일한 사각지대. 비비는 바라의 몸을 박차고 뛰어올라 상처 부근을 강하게 차버렸다. 캥- 의외의 파괴력에 놀란 바라가 뒤편으로 물러났다.
“흑표범이 유리한 악력과 신체 조건을 가진 대신, 토끼는 냉철한 이성과 두뇌로서 대련에 임했다.”
“이브린, 입.”
착, 바닥에 착지한 비비는 제자리에 두 발로 섰다. 두 차례의 공격이 오가는 동안 끌어 올린 페로몬이 앞발에 모였다.
이제 바라의 방심도 끝났다. 몸을 낮춘 바라에게선 빈틈을 찾아볼 수 없었다.
타닥!
바라는 위에서부터 덮칠 요량으로 높이 도약했다.
더 이상 인내할 수 없었던 아힌이 페로몬을 쏘아붙이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동시에 비비가 짝! 장렬하게 앞발을 맞췄다.
도약한 바라의 몸이 공중에서 뚝 멈추며 찰나의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힘없이 기운 흑표범이 바닥에 쿵 곤두박질쳤다.
여전히 두 발로 선 상태인 비비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혹시 바라가 일어날 것을 대비한 자세였다.
일 분가량이 지나도 바라는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대신 드르렁거리는 콧소리가 연무장에 울려 퍼졌다.
‘바라?’
이내 조심스럽게 접근한 비비는 앞발로 바라의 몸을 두드렸다. 어찌나 깊이 잠들었는지 코에서 나온 물방울이 톡 터졌다.
‘이겼다…!’
왈칵 눈물이 날 뻔한 비비가 입을 틀어막았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흑표범을 쓰러뜨렸어. 승리의 기쁨에 도취된 그녀가 바라의 몸을 타고 기어 올라갔다.
‘메이미!’
사냥에 성공한 검은 짐승 위에 올라선 비비는 메이미와 애쉬를 향해 앞발을 번쩍 들어 보였다.
“···토끼님.”
숨도 쉬지 않고 대련을 지켜본 메이미는 지난 나날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처음 애쉬를 봤을 때만 해도 안아달라며 옷자락을 당기는 연약한 새끼 토끼였는데. 몇 달 동안의 변화가 대견하고 자랑스러운 메이미가 박수로 칭찬을 대신했다.
그녀가 보인 격렬한 반응에, 숨어서 지켜보던 기사들도 반사적으로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 정도면 바라에게 자비를 베푸셔도 괜찮을… 아힌 님?”
아래에서 펼쳐진 감동의 물결까지 기록한 이브린이 의아하게 돌아봤다. 슬슬 아힌이 농담을 던질 법도 한데, 지나치게 조용한 탓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페로몬을 사용하려 뻗은 손을 거두지도 못한 아힌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그냥.”
그는 벌어지려는 입을 느릿하게 가렸다. 저런 모습이 조금 더 보고 싶은 걸 보면, 자신은 비비의 말대로 보통 또라이가 아닌 모양이었다.
* * *
그레이스저가 고요에 잠겼다. 사각사각, 모두가 잠든 새벽을 채우는 펜촉 소리가 간지러우면서도 기분 좋았다.
쿠션에 엎드려 턱을 묻고 있던 나는 아힌의 집무실을 둘러봤다. 보좌관들은 전부 퇴근한 상태라, 집무실엔 나와 아힌 둘뿐이었다.
아힌은 토끼 영토에 다녀온 이후부터 내내 서류의 산에 시달렸다.
고로 야근, 야근에 야근인데. 쓸쓸할 거라며 나를 쿠션째로 집무 책상에 데리고 온 실정이었다. 애쉬와 기다리면 되는데 말이지.
‘저가 쓸쓸한 거면서.’
한 번 쿠션째로 들고 다닌 이후엔 두 번은 쉬운 모양이었다.
딱히 나쁘진 않았다. 밤이 되면 아힌이 또 페로몬 발작을 일으킬까 걱정되기도 하니까. 쭉 기지개를 켠 나는 몸을 뒤척이며 오늘 하루를 곱씹었다.
깨어난 바라의 태도는 손바닥 뒤집듯 바뀌지는 않았다. 대신 은연중의 행동에서 내 서열을 위로 인정한 게 드러났다.
누군가 허가 없이 내게 접근하면 앞을 막아선다든가, 뭔가를 할 때는 자연스레 나를 앞 순서로 보냈다.
애쉬가 내가 좋아 어쩔 줄 몰라 할 때는 눈초리가 사나워지긴 했지만. 이전처럼 발등으로 친다든가 미는 행위는 일체 사라졌다.
축약하면 바라는 정말로 맹수를 거느리는 기분을 느끼게끔 만들어 줬다.
대련을 전해 들은 아힌은 다행히 바라의 처분을 보류했다.
이제는 완전히 비비의 권속이니 앞으로는 일절 간섭하지 않겠다는데. 유난히 속 시커메 보이는 웃음이라 찝찝함이 남았다.
그래도 성과에 만족하며 웃은 나는 몸을 굴려 비스듬히 누웠다. 곧바로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아힌의 옆얼굴이 보였다.
‘독서나 할까.’
뒹굴던 나는 그냥 아힌의 옆모습을 구경했다. 요즘은 통 그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으니.
마음 가는 여자의 의미는 뭘까. 내가 생각하는 그 의미가 맞겠지. 설마하니 마음 가는 토끼를 잘못 말한 건 아닐 거 아니야.
혼자만의 생각을 거듭할수록 아힌을 마주하지 못하는 횟수가 늘어났다. 털이 빨갛게 물들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의 부끄러움이 밀려들어서.
뒹굴, 괜히 한 바퀴 구른 나는 그의 매끄러운 옆얼굴을 응시했다. 보는 눈이 없기에 은발은 약간 헝클어진 상태였다.
서류를 보느라 아래로 처진 긴 속눈썹이 그의 얼굴에 음영을 만들었다.
사람이 저렇게 예뻐도 되나. 콧대를 지나, 체리 같은 입술에 시선이 머문 나는 또다시 얼굴이 화르르 불타올랐다.
슥, 몰래 코를 문질렀지만 피는 묻어나지 않았다.
계속해서 옮겨진 눈길은 펜촉을 쥔 뼈대 굵은 손으로 내려갔다.
실은 예전부터 아힌의 손이 가장 좋았다. 핏줄이 툭 불거진 손등도, 손등과 반대로 까칠한 손바닥도.
우리의 관계는 늘 손에서부터 시작되니까. 이제는 절대 덜미를 집어 들지 않는, 손바닥을 내밀어 주는 그 작은 변화가 간지러웠다.
멍하니 바라보던 손이 점점 내게로 다가왔다. 아힌의 검지가 내 뺨을 가볍게 쓸고 지나갔다.
“안 자?”
너 같으면 집무 책상에서 잠이 오겠냐고. 고개를 저으려던 나는 문득 몸을 일으켰다. 슬그머니 양 앞발로 엑스를 만들자, 아힌은 펜 끝으로 내 뺨을 쿡 찔렀다.
“그래도 자.”
그는 잠이 오지 않는단 의미로 해석한 모양이지만, 실은 하트를 표현한 것이었다.
나만 알면 됐지 뭐. 낯간지러워진 내가 입을 막고 버둥버둥 발을 굴렀다.
막상 하고 나니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면서도 내 크기라면 충분히 숨을 수 있을 거라 가늠하는 현실이 조금 착잡했다.
시간이 흘러도 부끄러움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정말!’
괜히 휘리릭 구르던 나는 그만 잉크병을 탁 밀고 말았다.
충격에 튀어나온 검은 잉크가 방울방울 날아오는 순간 직감했다. 소중한 내 털은 체스판처럼 흰색과 검은색이 뒤섞였으리란 것을.
아힌은 막을 새도 없이 일어난 일을 멀거니 바라봤다.
“…점박이 토끼가 되고 싶었어?”
그럴 리가 없잖아…. 지은 죄가 있었던 나는 잉크병에 부딪힌 자세 그대로 죽은 시늉을 했다.
“잘못한 줄은 아나 봐?”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똑똑, 책상을 약하게 두드린 아힌이 속삭였다.
“살아 있다면 뒷발을 들어 주세요.”
뒷발을 살짝 든 내가 실눈을 떴다.
‘제발 지워 줘….’
“시체라도 깨끗이 해야겠군.”
잉크를 지워 준다는 말마저 저답게 하는 맹수였다.
멀리 팔을 뻗어 종을 집어 들던 그가 우뚝 멈췄다. 집무실 입구와 종을 번갈아 본 아힌은 시종을 부르지 않은 채 대뜸 몸을 일으켰다.
“잠깐 기다려.”
걸음을 옮긴 그는 집무실에 딸린 욕실로 들어갔다. 쪼르륵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젖은 손수건을 들고나왔다.
“내가 닦아 줄게.”
‘……!’
그건 아닌 거 같아…!
파바박, 도주를 시도했지만 집무 책상은 터무니없이 높기만 했다. 아랑곳하지 않은 그가 모서리에 매달린 나를 주르륵 당겼다.
“싫어?”
‘당연히 싫지.’
책상을 탁탁 내리치던 앞발이 허공에서 멈췄다. 아힌의 처연한 눈망울을 발견한 나는 숨을 삼켰다.
“당장 밖에는 유안밖에 없는데. 지금 외간 맹수한테 비비의 털을 맡기라는 소리야?”
이게 다 무슨 소리야. 앞뒤 어느 하나 정상적이지 않은 설득임에도 아힌은 몹시 당당했다.
“자고 있을 메이미를 불러오는 건 싫잖아.”
처량한 적안은 다 가식이요, 맹수의 계략이라 뇌까려도 심장이 요란하게 들썩였다. 아힌은 어르듯 살살 내 뒷다리를 끌어당겼다.
“나도 잘할 수 있어.”
‘거짓말.’
위독한 환자를 앞둔 의관이나 말할 법한 진중함이었다.
반쯤 체념한 나는 당기는 대로 얌전히 끌려갔다. 만족스러운지 그는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아힌은 가장 귀중한 앞발부터 닦아 주기 시작했다. 커다란 손이 앞발을 조물조물 문지르는 광경이 퍽 어색했다.
정교한 유리 장식을 만지는 듯한 손길이라, 민망해진 내가 헛기침을 했다.
“오늘,”
고요 속에 아힌의 나른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육식동물을 길들이는 방법이 서술된 책을 읽었던데.”
조심스러운 손길에 몸을 맡기던 나는 낭패 어린 낯을 했다. 읽은 책을 스스로 정리하는 게 불가능한 토끼는 묘권을 전혀 보장받지 못했다.
“노력은 좋지만, 바라 때문이라면 그 서적은 버리는 편이 좋아.”
‘왜?’
아힌은 손수건으로 느릿하게 내 뺨을 문질렀다. 눈살이 밀려 올라가게 만드는 서툴기 그지없는 솜씨였다.
“반항하면 꼬리를 잡으란 저술부터 잘못됐던데. 함부로 그랬다간 저승으로 갈걸.”
그런 엉터리가 다 있나. 속은 기분이 된 내가 콧수염을 파르르 떨었다.
“저술자가 염소 수인인 건 확인했어?”
얼굴을 전부 닦아 낸 아힌의 손길이 등허리로 이동했다.
아힌이야 그저 토끼의 털을 닦는 거였지만, 온몸이 매만져지는 중인 나는 머릿속이 폭발할 지경이었다. 뻣뻣하게 굳어 있는 와중, 아힌이 퍽 궁금한 듯 중얼거렸다.
“토끼에게는 반항의 기준이 뭘까?”
‘반항의 기준이라니….’
이것만은 똑똑히 답할 수 있는 내가 아힌을 가리켰다. 아힌의 존재와 삶, 그 자체가 반항이었다. 제게 뻗어진 앞발을 마주한 그가 눈을 깜박였다.
“반항의 기준이 나라고?”
딱히 답을 바라진 않은 되물음이었다. 조용해진 아힌은 목덜미를 닦는 행위에 집중했다. 목을 쓰는 손길이 유독 부드럽고 집요했다.
곧 시중을 마친 그가 거뭇하게 변한 손수건을 옆으로 치웠다.
다 지워진 건가. 몸을 휙휙 돌렸으나, 아무래도 거울을 보아야 얼룩을 확인할 수 있을듯했다.
“괜찮아, 깨끗해졌어.”
후- 아힌은 집무 책상을 환히 밝힌 램프를 껐다. 은은한 어둠이 찾아왔다. 조금 졸린 눈을 한 그는 책상 위로 팔을 모아 엎드렸다.
“나도 맹수인데.”
‘새, 새삼.’
굳이 강조할 필요가 있나. 입술 사이의 송곳니는 매번 아힌이 흑표범 일족임을 톡톡히 각인시켰다.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제자리에 앉은 나는 가느스름한 눈으로 아힌을 노려봤다. 그런 반응이 답답한 듯 아힌이 내 코를 쿡 눌렀다.
“나도 맹수야.”
‘매… 맹수인 게 도대체 뭐?’
“잘 길들여질 테니까, 사자랑 밀회 같은 거 갖지 마.”
예상 못 한 말에 나는 몸을 움찔 떨고 말았다.
역시 알고 있었구나. 퀸이 곱게 입을 다물고 있을 리가 없었다.
눈치를 살피던 내가 얼른 시선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아힌은 룬을 입에 올릴 때마다 눈에 정제되지 않은 감정을 비치곤 했다.
그가 내 비밀을 대부분 알아챘다는 사실을 설명할 때도 이런 얼굴이었지. 차게 식은 눈동자는 이따금씩 내게 미약한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뭐….’
애초에 가까운 관계도 아니었을뿐더러…. 룬이 내게 가진 감정이 호감인 이상 다시 만나기도 껄끄러웠다.
‘안 만날게.’
이게 뭐라고 눈치가 보인담. 날이 갈수록 도통 아힌을 자연스럽게 대하는 게 어려웠다.
슬금슬금 아힌의 얼굴로 다가간 나는 조심스레 뺨에 뺨을 맞대었다. 안 그러겠다는 우회적인 답변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내 숨이 멈춘 건지, 아힌이 멈춘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이내 아힌은 예고 없이 팽하니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 엎드렸다. 한순간에 기댈 공간이 사라진 내가 비틀거렸다.
‘방금 얼마나 용기를 낸 건데···!’
심통도 정도껏 부려야지. 씩씩 털을 걷어붙인 내가 반대편으로 달려갔다.
곧바로 얼굴을 확인한 나는 뒷발로 차 주겠다는 결심을 이행할 수 없었다.
귀가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아힌은 악의라곤 없는 청아한 웃음을 짓고 있었기에.
털이 간질간질하다 못해 쭈뼛 섰다.
맹세컨대, 이 요망한 흑표범은 절대 길들일 수 없었다. 그전에 내가 심장마비로 꼴딱 넘어가지 않을까.
* * *
바람이 제법 매서워졌다. 고로 지붕이 뚫린 토끼 전용 저택은 발렌스 님의 집무실로 옮겨졌다.
저택 내부, 따끈하게 데운 컵에 들어간 나는 열기에 함락된 채 천장을 바라봤다.
혹시 발렌스 님은 발명가가 아닐까. 목욕이 불가능한 날 위한 데운 컵이라니. 편지가 엇갈려서 미안하다며 전한 그녀의 선물이었다.
‘…편지라니, 무슨 편지지?’
내가 아힌을 따라간 사실을 알리는 전서가 엇갈린 걸까.
이미 지난 일, 아무렴 좋다고 생각한 나는 그저 뜨뜻한 컵에 몸을 맡겼다.
“아가.”
뚫린 지붕으로 발렌스 님의 아름다운 얼굴이 드리워졌다.
“그러고 보니 없던 반점이 생겼구나.”
내 몸에 얼룩덜룩 남은 잉크 자국을 가리킨 것이었다.
또다시 이도 저도 아닌 얼룩을 상기한 내가 분노에 휩싸였다. 그때 갑자기 램프를 끄는 게 이상하다 싶더라니. 깨끗하게 지웠다고 주장한 아힌의 솜씨는 엉망진창이었다.
메이미가 지운다고 지웠지만, 며칠은 더 지나야 사라질 거라고.
“꼬질꼬질한 것이 아주 귀여워.”
욕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을 읊조린 발렌스 님이 잉크 자국을 문질렀다. 이내 그녀는 컵의 손잡이를 잡아 나를 들어 올렸다.
“네게 제안하고 싶은 게 있는데.”
나붓이 미소 지은 발렌스 님이 곧은 자세로 소파에 착석했다.
“앞으로를 위해서라도 가정교사를 붙이는 건 어떨까 싶구나.”
‘가정교사?’
“페로몬을 조절하는 법이나 기본 소양도 익히고. 지난번처럼 불시에 사람이 되어 버리면 곤란하잖니. 뭐, 마구간지기도 좋았다만.”
컵을 짚고 일어선 나는 입을 살짝 벌렸다.
아힌보다 강하다는 발렌스 님이 내가 수인인 사실을 모를 거라 생각진 않았다.
그래도 사람으로 마주칠 땐 보다 좋은 모습으로 마주치고 싶었는데. 릴의 헐렁한 옷을 빌려 입은 모습을 어디선가 목격한 모양이었다.
‘아….’
부드러운 강함을 가진 발렌스 님은 언젠가부터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런 분한테 산발인 머리와 장화 신은 차림이 첫인상이라 생각하니 이루 말할 수 없이 속상해졌다. 복잡한 심정이 축 늘어진 귀로 표출됐다.
“이런, 내 말의 어디가 너를 슬프게 만들었니?”
난감한 표정을 지은 그녀는 얼른 나를 컵에서 꺼내 들었다.
“가정교사가 어렵다면 내 취소하마. 제안일 뿐이니 싫으면 억지로 하지 않아도 좋아.”
다정다감한 음성이 바로 가까이서 들렸다. 그저 바람이 깨져서 실망했을 뿐, 빠르게 기세를 회복한 내가 고개를 저었다.
“원, 알 수가 없군. 토끼의 언어를 해석해 주는 자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함부로 아뢰어서 송구하나, 가주님께 좋은 모습만 보여 드리고 싶으셨던 모양입니다.”
입구에서 대기하던 메이미가 조심스레 첨언했다. 휙, 발렌스 님과 내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메이미의 말이 사실이더냐.”
‘한 치의 틀림도 없어요.’
놀라움을 금치 못한 내가 앞발을 짝 마주쳤다.
초반에 몇 번 내 몸짓을 알아듣지 못한 것을 신경 쓰더니, 이제는 척 하면 착인 수준이 아닌가. 새삼 아힌이 내게 얼마나 유능한 시녀를 붙였는지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이런, 그런 것을 신경 썼니? 난 네가 어떠한 모습이라도 상관없느니라.”
머리 위에서 부드러운 숨결이 느껴졌다.
“계절이 몇 번이나 바뀌는 시간 동안, 내 적적한 티타임을 채워 준 친우잖니.”
기특한 듯 한참이나 내 턱을 간질여 준 그녀가 본론을 꺼냈다.
“가정교사는 네가 원하는 사람으로 채택하마. 개인적으로 추천하고 싶은 자는 기린 수인인 레일라 부인인데, 다만…. 흠.”
다시 컵 속에 나를 넣어 준 발렌스 님이 말꼬리를 늘였다.
“소식을 접한 릴리언 님께서, 저택에 머무는 동안은 네 수업을 진행하고 싶다는 말씀을 주셨지.”
‘…할아버님께서요?’
곧장 매서운 눈매와 긴 수염을 떠올린 내가 동공을 떨었다.
“일단은 아카데미 학장을 맡고 계신 분이라 많은 귀감이 되겠지만, 네게는 어려운 분일 거라 생각한단다. 그래서 보류해 두긴 했는데, 네 의견은 어떠니?”
실상 그레이스저에서 가장 어려운 사람이 아닌가. 컵에 턱을 걸친 나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아마 손주 놈은 매 순간 네가 필요할 게다.’
‘릴리언 그 영감탱이한테 가서 물어보시오. 아마 이 노인네보단 좋은 대답을 해 줄 거요.’
선택지는 많이 없었다. 두려운 건 사실이었으나, 어쩌면 가장 원하는 진실을 알려 줄지도 모르는 분이 아닐까. 결정하기까지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