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ymbiotic Relationship Between the Rabbit and the Black Panther RAW novel - Chapter (49)
토끼와 흑표범의 공생관계 8화(49/75)
비비와 릴리언의 첫 번째 수업이 진행될 장소는 서재였다. 붉은 보석이 세공된 문 앞에 선 릴리언은 양쪽의 기사들을 돌아봤다.
“릴리언 님을 뵙습니다.”
거수경례를 취한 그들은 이미 서재에 배움을 원하는 학도가 도착해 있음을 알렸다.
“…오랜만이군.”
마주하게 된 비비는 여전히 예사 토끼가 아니었다.
눈처럼 하얀 털은 어디 잿더미에서 구르다 왔는지 얼룩덜룩했고, 와중에도 예를 차린답시고 메이미가 준비한 보타이를 착용한 상태였다.
직사각형의 책상 위에 앉아 있던 비비가 공손히 부복했다.
수인인 사실을 모를 때의 꺼림칙함과 달리, 저도 모르게 제법 예의 바르다고 생각한 릴리언이 이마를 탁 쳤다.
‘말려선 안 된다.’
들어오기 전부터 토끼의 수상쩍음에 말리지 않기로 다짐했지 않나. 그러나 이미 토끼를 가르친다는 시점에서부터 릴리언의 상식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소개가 늦었군. 발렌스 수장의 부군, 이디스 그레이스의 아비이자 아힌의 조부인 릴리언 페이언트다. 또한 벨헬름 아카데미의 학장을 맡고 있지.”
그가 자리에 착석하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기실, 사람인 릴리언이 입을 떼지 않는 한 영원히 정적인 수업이었다.
흠흠- 그는 헛기침을 하며 말문을 뗐다.
“여전히 너를 수상히 여기지 않는 건 아니다.”
‘알아요.’
비비로서도 편한 관계로 거듭날 거라 기대하진 않았다. 다만 아힌이라는 교차점으로 인해 이해관계가 일치했을 뿐. 기죽지 않으려 노력한 비비가 단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릴리언 님, 다시 말씀드리지만 토끼님은 기백만으로도 흑표범을 쓰러뜨린 분입니다. 대련에 관한 소문도 들으셨지 않습니까.’
‘이놈이, 더럽게 왜 자꾸 귓가에서 떠들어!’
자꾸만 이브린의 세뇌가 떠오른 릴리언이 고개를 훅훅 저었다. 그새 홀리기라도 한 건지, 주먹만 한 토끼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백이 보통이 아니란 생각이 밀려들었다.
“수업 전에, 내 너에게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릴리언은 회백색 로브에서 문제의 가십지를 꺼내 들었다.
“기사에 나온 토끼 수인은 너인 게냐.”
꼴 보기도 싫은 가십지를 대면한 비비가 동공을 떨었다.
‘님프 님, 이번에 릴리언 님을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수업을 위한 배낭을 준비하도록 하죠.’
‘이브린, 너무 그러지 마. 님프가 싫어하잖아.’
저 가십지를 말미암아 아힌과 이브린이 얼마나 놀리고 들었는지. 까르르까르르 난리도 아니었다.
비비는 곧장 아힌에게 선물 받은 가벼운 펜촉을 집어 들었다. 토끼가 두 발로 서서 사용할 수 있게끔 특별 제작한 펜이었다.
비비가 무언가 시도하려 하자, 숨죽인 릴리언이 움직임을 주시했다.
가십지 위, 본인의 기사로 이동한 비비는 좍좍, 님프라는 단어에 비장하게 가위표를 그렸다.
“토끼 수인은 네가 맞지만, 님프는 네가 아니다. 이 말이더냐.”
펜촉을 내려둔 비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목은 애초에 믿지도 않았느니라.”
비비는 누군가 저렇게 말해 주길 간절히 바랐지만, 막상 릴리언이 말하니 찜찜해졌다.
“자세한 사정은 모른다만, 손주 놈에게 대강이나마 전해 들은바 페레니움이 있어야 사람이 될 수 있다지. 그 점을 미루면 이 대목은 사실이군.”
펜촉을 빌린 그는 아힌 그레이스가 무용수에게 저택을 하사했다는 대목에 밑줄을 그었다.
“페레니움의 시가가 중급 귀족의 저택 한 채 가격을 훨씬 웃도니.”
믿을 수 없는 진실을 접한 비비의 까만 눈동자가 진동했다.
털썩, 주저앉은 비비는 입술이 달달 떨렸다. 비싼 정도야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일 거라곤. 만일 아힌이 요금이라도 청구하면 빚 대신 조용히 샐러드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왜 그러느냐, 어디 아프기라도 한 게냐?”
별생각 없이 말한 릴리언은 상상 이상의 반응이 돌아오자 당황했다.
‘아니, 아니에요.’
간신히 마음을 추스른 비비는 이브린에게 선물 받은 배낭을 가져왔다. 필기를 할 만한 종이를 소분해 둔 배낭이었다.
수업을 진행하자는 의미임을 눈치챈 릴리언이 진지하게 끄덕였다.
“우선 네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부터 알고 싶군. 듣기로는 독서에 시간 할애를 많이 하는 편이라던데. 주로 어떤 서적을 읽었는지부터 확인하자꾸나.”
릴리언은 외에 궁금한 사안이 제법 있었지만 일단은 미루기로 결정했다.
이런 식일 바에야 페레니움이 제작된 후, 사람으로 돌아왔을 때 묻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었다.
생각이 일치한 비비가 릴리언의 손바닥 위로 올라갔다. 책상에서 내려달란 의미였다.
덜덜 손을 떤 그는 이내 침착함을 되찾은 후 바닥에 비비를 내려줬다.
저벅저벅, 비비와 릴리언은 넓은 서재를 나란히 가로질렀다. 창가로 스민 햇살 내음이 두 사람의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녹녹하게 만들었다.
릴리언은 비비가 가리키는 책장 위로 올려 줬다 내려 주는 행위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솜뭉치의 감촉이 견고한 마음에 빈틈을 만들었다.
여러 번의 반복 끝에, 책상에는 두꺼운 서적이 탑처럼 쌓였다.
「대륙 역사의 심화」, 「수인의 진화에 대한 고찰」, 「초식계 수인의 진화론」….
한 권 한 권 확인한 릴리언의 붉은 눈에 풍파가 휘몰아쳤다.
“이걸 정말 네가 다 읽었단 말이더냐?”
다시금 책상에 자리한 비비가 머쓱하게 관자놀이를 긁었다.
새끼 토끼가 쑥스러워하는 모습에 그는 마른세수를 했다. 이쯤이면 제가 서 있는 곳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어디 한번 보자꾸나.”
착석한 릴리언은 비비가 가져온 작은 종이에 0부터 9까지의 아라비안 기호를 새겼다. 총 열 장의 종이를 순서대로 나열한 릴리언은 나지막이 읊조렸다.
“에링턴 전쟁.”
그의 의도를 눈치챈 비비의 눈에 섬광이 일었다.
착, 착, 착, 비비는 전쟁이 일어난 연도의 숫자를 앞발로 정확히 짚어냈다.
“…제법이군.”
처음은 요행일 가능성을 고려한 그는 한층 더 문제를 심화했다.
“그라고르 시대에 사슴 일족의 난이 발발한 시기.”
이번에도 앞발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완벽한 숫자를 뽑았다. 주르륵, 릴리언의 관자놀이에서 한 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유스턴 박사가 처음 수인의 진화론을 제창한 연도.”
착,
“대륙 중립 위원회의 초대 위원장이 엄선된 시일!”
착, 착.
질문을 던지고 답을 고르는 속도가 점차 빨라졌다.
한 시간가량이 지났을까. 쉼 없이 달린 릴리언과 비비가 헉헉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한 치의 물러섬도 없구나.”
‘할아버님도 마찬가지세요.’
모든 열정을 쏟아 부은 비비는 보타이마저 벗어 던진 지 오래였다.
“수고했다. 전부… 완벽한 정답이다.”
릴리언은 학장으로서 차마 감출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이런 수준이면 벨헬름 아카데미에서도 충분히 상위권을 차지하고, 나아가 조기 졸업도 가능한 인재가 아닌가.
수상한 토끼에 대해 알아보겠다는 그의 야심 찬 목적이 새하얗게 희석됐다. 제대로 된 발판만 있으면 날개를 달고 날아오를 인재였다.
“이제 본 수업을 시작하자꾸나.”
쿵, 서적을 가득 쌓아 올린 릴리언이 때아닌 인재 개발에 불타올랐다.
* * *
할아버님과의 관계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지만, 수업 때만은 거리감이 확연히 좁혀졌다.
그는 뛰어난 교육자였다. 단기간 만에 토끼의 신체 조건을 고려한 수업 방식을 찾아냈으니.
할아버님은 따로 표현은 안 했지만, 서적을 통해 얻은 내 지식 수준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누군가 바꿔 줄 때까지는 한 서적만 반복해 읽은 덕분이기도 하고, 원래 밖을 나가지 못할수록 과거에 대한 지식이 쌓이는 법. 그래서인지 그와 함께 알아 가는 현재와 미래는 꽤나 흥미로웠다.
‘너는 유독 맹수계 수인에 관한 지식이 부족하군. 이유가 뭐지?’
차마 할아버님의 의문에 답할 수는 없었다. 첨부된 그림이나 묘사가 무서워서 책을 피했다곤 죽어도 말 못 하지.
오늘은 그의 부재로 인해 수업은 교양 과제로 대체된 날이었다.
과제를 마친 후, 배낭을 멘 채 복도를 걷던 나는 흘끔 뒤를 확인했다. 메이미 대신 두 마리의 흑표범만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 평소에 자리를 비우지 않는 메이미가 유달리 바쁜 탓이었다.
“토끼님, 어디 가십니까?”
‘침실!’
인사를 건네는 기사에게 답변한 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따로 행사라도 있나?’
그러나 딱히 불어난 인원도 없고, 저택 분위기도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아힌도 아침까지 별말 없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아리송해진 나는 침실 입구에 도착하고 나서야 그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평소 그레이스저의 고용인들이 입는 근무복은 전부 검은색이었다.
그리고 정예 기사나 경비 기사는 그레이스가(家)의 문양을 아로새긴 은빛 갑옷을 입는다.
그러나 오늘만은 아까 인사를 건넨 기사도, 입구를 지키는 경비 기사들도 검은 정복을 입은 상태였다.
‘뭐지?’
떠올려 보면 아힌이나 이브린도 까만 정복에 행커치프는 생략한 차림이지 않았나.
침실 입구에 멍하니 선 나는 점점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어젯밤, 늘 이불에 푹 파묻혀 자는 아힌은 유독 잠을 설쳤다. 혹시 페로몬 발작인가 싶어 살폈으나 그건 아니었다.
얼른 잠들라 이마를 톡톡 두드리니, 무방비한 미소를 걸어서 토끼의 강심장을 박살 냈지.
‘애쉬, 바라.’
착, 앞발을 펼치자 두 마리의 흑표범이 신경을 기울였다.
‘연행해.’
앞발의 끝은 침실 입구를 지키는 두 명의 경비 기사를 향했다. 애쉬와 바라는 각각 경비 기사에게 접근하여 의복을 물어 당겼다.
“송구하나 자리를 비워선 안 됩니다.”
기사들의 저항은 완강했다.
흉악한 얼굴에 잠시 주춤했지만, 그들은 내가 사람으로 변한 것을 목격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들의 사각 안에서 슬금슬금 이동한 나는 대뜸 픽 쓰러졌다. 다른 고용인들이 지나지 않는 외진 곳이었다.
“토끼님…. 예전에 아힌 님께서 토끼님의 잔꾀에 넘어가지 말라 이르셨습니다. 바닥이 차가우니 부디 일어나시길 바랍니다.”
고도의 심리전이자 인내심이 필요한 싸움이었다. 배가 오르락내리락할까, 숨도 최대한 작게 몰아쉰 나는 꿋꿋이 버텼다.
그러나 변수가 생겼다.
정말 내가 죽은 거라 착각한 애쉬가 기겁하며 핥아 올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어찌나 강하게 핥는지 몸 전체가 흔들렸다.
‘애쉬….’
끙끙거리는 울음이 짙어졌다. 놀란 애쉬에게 내적 사과를 건넨 나는 굳건히 죽음을 유지했다.
“토끼님···?”
슬슬 불안한지 부르는 기사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토끼님!”
이내 급히 다가오는 두 개의 발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기사회생한 나는 두 기사의 구두코를 밀어 벽으로 몰아붙였다.
“이,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러면 안 되는 겁니다!”
‘이러려고 부른 거야.’
들어가!
우람한 두 기사가 복도 모퉁이로 구겨지듯 들어갔다. 앞을 가로막은 나는 기사 하나의 바지 자락을 쥐고 흔들었다.
‘이 의복, 뭐야?’
“아, 이 차림은….”
용케 단박에 의사를 알아들은 기사가 동료 기사의 눈치를 살폈다. 역시 그냥 정복을 차려입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토끼님, 이따 날이 저문 후에 아힌 님께서 오시면 자연스레 알게 됩니다. 조금만 기다리시지요.”
기사 하나가 난감하게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자네, 어차피 숨길 일도 아니지 않나. 타 영토민도 다 아는 것을. 토끼님께서 이리 부탁하시는데.”
“그럼 자네가 말씀드리게.”
“토끼님께 바지 자락을 붙들린 건 자네잖나?”
“어허, 이 사람이. 자네의 구두코를 짚고 계시기도 하지.”
“자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자네의 향연이었다.
자네들, 나는 지금 알고 싶어. 앞발을 모은 나는 애쉬도 껌벅 죽는 애절한 눈빛을 보냈다. 필살기에 말려든 기사들의 눈망울이 현저하게 흔들렸다.
“…이디스 님의 기일입니다.”
‘이디스?’
“가주님의 부군이시자 차기 가주님의 아버님이시죠.”
* * *
침실로 들어온 나는 가장 먼저 테라스를 확인했다. 대체로 아힌은 저택을 비우는 날엔 퀸을 붙여 두곤 하니까.
유리 너머, 예상대로 난간에 앉은 퀸이 눈을 삐죽이고 있었다.
룬과의 만남을 아힌에게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친 난봉꾼.
‘치졸하긴.’
탕, 위협적으로 유리에 이마를 박자 퀸이 코웃음을 쳤다.
‘유리 때문에 무사한 줄 알아.’
뒷발을 구른 나는 애쉬의 품에 기대어 파고들었다. 애쉬는 몸을 둥글게 말아 체온을 데워 줬다.
아침부터 출타로 분주하던 아힌의 목적지는 아버님의 묘비가 있는 장소겠지.
이제야 발렌스 님이 티타임을 미루고, 할아버님도 부재중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기일에는 고용인들도 모두 검은 정복을 입는구나. 래비안가(家)에서는 보지 못한 광경이었기에 제법 생소한 장면이었다.
‘아버님의… 기일이라.’
그의 부재는 그레이스저에 왔을 때부터 어렴풋이 예상했기에 크게 놀랍진 않았다. 오히려 기사들의 간략한 설명이 더 마음에 걸릴 따름이었다.
‘이디스 님은 차기 수장님께서 몹시 어릴 적, 젊은 나이에 이승을 등지셨죠.’
지병으로 인한 사망이라는데. 그들은 정확한 사유는 그레이스 가문의 일원만이 안다고 전했다.
까만 털에 뺨을 비빈 내가 몸을 뒤척였다.
기사들의 말대로, 수장의 부군이 사망한 건 타 영토민들도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알 만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왜 아힌은 어제 잠을 설칠 때부터 오늘 아침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을까.
꼭 내게 말할 필요는 없으나, 굳이 말하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알려 줄 기회는 충분히 많았는데. 내가 신경 쓸까 말하지 않은 게 이유가 될 순 있지만, 다소 부실한 핑계인 감이 있었다.
아힌. 아버님의 지병. 할아버님. 기일.
연결 고리가 없는 단어들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이상하게 가시지 않는 불안감이 발끝을 휘어 감았다.
연신 뒤척이던 나는 문득 최악의 가설을 떠올렸다.
‘설마 아버님의 지병이… 아힌의 페로몬 발작과 관련된 건 아니겠지….’
에이, 너무 나갔지.
앞발을 저으면서도 한 번 놀란 가슴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일어난 내가 드레스 룸으로 걸어갔다. 자연스레 애쉬와 바라가 뒤따른 탓에, 앞발로 막은 나는 엄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따라오지 마.’
안타깝게도 애쉬는 이런 종류의 위협은 일 할도 통하지 않았다.
대신 바라에게 의사를 전하자, 곱지 않은 눈초리를 보낸 바라가 애쉬를 막아섰다.
감히 네가 나를 막아서? 이런 흉악한 얼굴이 된 애쉬가 바라와 다투기 시작했다.
‘바라, 힘내. 그리고 고마워.’
짝사랑의 역사가 깊은 바라는 오늘도 애쉬에게 반격조차 못 했다.
몸을 던진 희생에서 등 돌린 내가 드레스 룸으로 들어섰다.
아힌의 의복 중에서도 고가의 물품이 나열되고, 거대한 전신 거울을 비롯하여 귀중품을 보관하는 서랍장이 비치된 장소였다.
그리고 침실에서 유일하게 퀸을 피할 수 있는 사각지대이기도 했다.
퀸이 인간으로 돌아가서 온다고 치더라도 꽤나 시간을 벌 수 있지 않을까.
전신거울을 짚고 선 나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지금까지 사람으로 변할 땐 맹수계 수인의 강한 페로몬을 접해야만 했다.
거기에 반응한 내 페로몬이 들썩이며, 그것이 고통으로 이어져 폭발하는 순간 인간의 모습이 되었다.
‘그렇다면….’
스스로 페로몬을 그 수준까지만 끌어 올려도 같은 반응이 나타나지 않을까. 물론 고통을 동반하는 데다, 페로몬 발작을 일으킬 확률도 존재했다.
고통의 강도를 이미 몇 번이나 겪은 탓에 빠듯한 공포감이 배를 조여 왔다.
한참을 서성인 나는 뺨을 착착 때렸다.
어차피 지금 시도하지 않으면 페레니움이 세공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제작 기간이 꽤 오래 걸린다고 했으니, 초조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낼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간절히 사람이 되고 싶은 순간이지 않나.
천천히 페로몬을 끌어 올리자, 먼젓번 느꼈던 묘한 고양감이 몸을 사로잡았다. 이질적으로만 다가오던 힘이 이제는 그렇게 낯설지 않았다.
흘끔, 곁눈질한 전신거울 속에 얼룩덜룩한 새끼 토끼가 비쳤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감각을 가늠한 나는 평소 사용하는 페로몬보다 강도를 높였다.
조금 더, 조금만 더. 낮은 계단을 오르듯 단계를 올렸다.
어느덧 페로몬 운용은 바라를 쓰러뜨릴 때 사용한 강도를 훨씬 넘어서고 있었다.
‘더, 더 이상은 안 되겠…,’
쿵.
익히 알고 있는 극통이 우레처럼 온몸을 내려찍었다.
* * *
몸을 불사른 도박은 성공적이었다. 흘러내린 하얀 머리칼을 귀 뒤로 꽂은 내가 이를 악물었다.
‘이깟 거 하, 하나도 안 아파···.’
이제 이 비비 님께 있어 발가벗고 깨어나는 일은 놀랄 일도 아니었다. 이러려고 드레스 룸을 선택한 거기도 하니까.
고통을 이겨 내고 일어선 나는 차르륵, 커튼 걷듯 옷걸이를 밀어붙였다.
‘이건…!’
미간에 부득 힘이 들어갔다.
솔직히 고하면 사람이 되는 걸 시도하는 것만큼이나 아힌의 의복이 무서웠다.
어떤 게 가장 저렴한 천일까. 그러나 침실 드레스 룸에 보관할 정도면 가성비를 고려할 수준은 이미 훨씬 넘어섰다.
아무거나 고른 게 페레니움처럼 눈물 날 정도로 고가면 어쩌지. 입게 되면 이리저리 접어 올려야 할 텐데.
바들바들 떨던 나는 문득 메이미의 조언을 떠올렸다.
‘토끼님, 위급할 때는 이쪽으로 가십시오. 아힌 님께서도 용인하신 부분입니다.’
당시에 한창 퀸과 기 싸움에 임할 때라 대충 흘려들었는데.
쾅, 쏜살같이 달려간 나는 드레스 룸 안에 딸린 작은 문을 열어젖혔다. 곧장 벽장이라고 표현하기에는 큰 여유 공간이 드러났다.
그곳에 들어선 나는 울컥하는 마음에 입술을 안으로 말아 넣었다.
얼핏 봐도 내 체구에 맞춘 의복이 나열되어 있었다. 한 벌도 아닌 수십 벌이.
서툰 움직임을 고려한 의상들만 봐도 주인이 누군지 추측이 가능했다.
메이미한테만 전할 게 아니라 한 번 더 말이라도 해주지. 아힌은 저 예쁜 건 철저히 아는 것에 비해 생색내는 것에 있어선 인색했다.
둥글둥글 허물어지는 마음을 다잡은 내가 손에 잡히는 의복을 꺼내 들었다. 눈동자 색깔과 비슷한, 발목 위로 오는 원피스였다.
됐어. 곧바로 뛰어나가려던 내가 도로 뒷걸음질 쳤다.
‘크, 큰일 날 뻔했네.’
몸만 가릴 게 다가 아니라 신발도 챙겨야지. 자칫 맨발로 돌아다닐 뻔한 크나큰 실수였다.
단화에 망토까지 챙겨 입은 나는 전신 거울 앞에 섰다.
님프는커녕 오늘내일 쓰러질 것 같은 토끼 수인이지 않나.
의복을 입는 데 힘쓰느라 붉게 달아오른 뺨과 헉헉거리는 숨은 고아한 님프와는 영 거리가 멀었다.
내일쯤이면 소문 속 토끼님은 님프가 아니라, 그저 지나가는 토끼 수인이었다고 정정되어 있지 않을까.
‘…딱히 신경 안 쓰여.’
사실 엄청 신경 쓰였다. 하다못해 가면이라도 쓰고픈 충동을 삼킨 내가 드레스 룸에서 뛰어나갔다.
퀸은 사라진 나를 찾는 듯, 유리창을 부리로 콕콕 쪼아 대고 있었다.
“퀸!”
다가갈수록 매는 날카로운 눈을 크게 떴다. 드르륵, 유리창을 젖히자마자 퀸을 잡아챈 나는 음산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야.”
부리를 쓰지도, 페로몬으로 공격하지도 못한 퀸이 삑삑 버둥거렸다.
지체 없이 침실에 있는 장식용 새장으로 집어넣은 내가 찰칵 고리를 잠갔다. 쾅, 퀸은 깃털이 휘날릴 만큼 날뛰기 시작했다.
“토끼 수인을 얕보면 이렇게 되는 거야.”
위풍당당한 목소리를 들은 퀸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인간으로 돌아가면 새장을 부수고 나올 수 있겠지만, 그 또한 사람으로서는 수모가 아닐까.
“고자질만 빨라선. 아힌을 만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잠시만 그렇게 있어. 자.”
뒤늦게 어르고 든 나는 과일 바구니에 든 딸기 몇 알을 굴려 넣었다. 날뛰다가도 딸기가 짜부라질까 얌전해진 퀸이 씩씩거렸다.
모르긴 몰라도 새장에서 나오는 동시에 나를 부리로 쪼아 버리지 않을까.
“돌아와서 꺼내 줄게.”
탁상 위에 새장을 내려 둔 나는 달려든 애쉬와 포옹을 나눴다. 영특하게도 퀸을 잡을 때까지 기다린 모양이었다.
애쉬와의 애정행각을 지켜보던 바라는 인사는커녕 흥 콧방귀를 뀌었다. 덩달아 흥 고개를 돌린 나는 대리석 문을 응시했다.
‘나가면 기사들이 따라붙으려나.’
아무래도 그렇겠지. 얼굴을 아는 이상 위협하진 않겠지만, 아힌이 돌아올 때까지 붙들어 두지 않을까.
어느덧 날이 저물어 가니, 이미 저택이거나 곧 돌아올 시간이긴 했다. 그러나 내 목적은 먼저 할아버님을 만나는 것에 있었다.
문을 보며 망설이고 있자, 어슬렁거리며 다가온 바라가 몸을 낮췄다.
‘…무슨 의미지?’
단단한 등 근육을 심오하게 내려다보던 나는 휙 뒤로 물러났다.
“설마, 올라타라는 의미야?”
말도 아닌 흑표범을 타고 이동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 더욱이 애쉬의 등을 경험해 본 자로서, 바닥에 떨어지기라도 하면 다칠 가능성이 컸다.
요요히 엎드린 상태인 바라는 흘끔 고개를 틀었다. 한쪽만 드러난 샛노란 눈동자는 결코 놀림이나 배반 따위가 아니었다.
‘세상에….’
어떻게, 침실에서 나서는 것까지만 도움을 받는 방법도 괜찮지 않을까.
고용인들이 요란은 떨어도, 가십지로 한바탕 난리가 난 이상 저택에 나타난 토끼 수인을 함부로 잡으려 들진 않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마친 내가 몸을 굽혔다.
엉거주춤하게 업히자마자 바라가 번쩍 몸을 일으켰다. 날렵하고 매끄러워 보이던 몸은 생각 이상으로 두터웠다.
끼이익, 문을 열자 경비 기사들의 시선이 위를 배회했다.
“무슨…?”
어리둥절한 그들의 눈길이 아래를 향한 순간,
“아악!”
“토, 토끼님!”
애쉬와 바라가 합심이라도 한 듯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조, 조금만 천천히-!”
삼키지 못한 비명이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졌다. 바라가 가는 방향은 정확히 할아버님이 즐겨 찾는 실내 온실 쪽이었다.
“애쉬?!”
“꺄아아악!”
흑표범 두 마리의 질주에 놀란 고용인들이 모세의 기적처럼 갈라졌다. 멈추라 말할 여유도 없는 내가 팔이 하얗게 질릴 만큼 바라의 목을 붙들었다.
살려 줘. 생리적인 눈물이 가로로 방울방울 흩날렸다.
애쉬와 바라의 조합은 고용인들의 접근을 손쉽게 막아 냈다. 덕분에 걷는 것보다 훨씬 빨리 실내 온실 입구에 도착한 나는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사실 옷매무새보다는 물기로 범벅된 얼굴 정리가 더 문제였다.
‘두 번은 못 타, 절대.’
바라의 목에 둘렀던 팔은 후들거리지, 머리카락은 사연 있는 사람인 양 용솟음친 상태였다.
단시간에 후줄근해진 나는 머리를 쓸어내리며 입구로 다가갔다.
“…….”
검은 정복을 입은 경비 기사들이 허리를 곧추세웠다. 실내 온실을 드나들며 안면을 익힌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애쉬와 바라, 나 그리고 서로를 번갈아 보며 연신 입을 여닫았다. 덩달아 도르르 눈치를 살핀 내가 고개를 숙였다.
“실례합니다….”
배꼽 인사를 마친 나는 구렁이 담 넘듯 자연스레 입구를 통과하려 했다. 아쉽게도, 정신을 차린 기사들이 황급히 앞을 막아섰다.
“그, 저,”
문장이 되지 못한 말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애쉬와 바라, 그리고 내 외견을 미뤄 정체를 짐작은 했으나, 여전히 긴가민가한 눈치였다.
‘…그만 비켜 주면 좋겠는데.’
다가선 나는 앞을 가로막은 기사들을 양옆으로 밀어서 길을 텄다. 기사들의 붉은 눈에 해일과도 같은 파동이 일었다.
“펠튼.”
“예! 아니, 어떻게…?”
“나는 당근을 먹으면 아프니까, 자꾸 몰래 주는 건 곤란해.”
펠튼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나쁜 의도가 없었던 건 알아, 늘 먹기 좋게 채 썰어 가져왔으니까. 그리고 밀레온. 예전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밀레온은 “토, 토,”를 연신 남발하고 있었다.
“토토 님이란 애칭은 바꿨으면 좋겠어.”
“어, 어째서….”
“말도 못 하게 구리다는 펠튼의 의견이 맞아.”
이마를 짚은 밀레온이 중심을 못 잡고 비틀거렸다. 정신적 충격을 받은 그들은 더 이상 앞을 가로막지 못했다.
입구를 지나친 내가 푸른 색감으로 가득 찬 실내 온실로 들어섰다. 따듯한 공기가 몸을 포근하게 감쌌다.
망토를 벗은 나는 잔디 깔린 길을 사박사박 걸었다. 양옆으로 애쉬와 바라가 얌전히 따라붙었다.
수업에 임하며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할아버님은 이 시간이면 늘 실내 온실에 있다는 것이었다.
한 번쯤 티타임을 같이 했을 때, 그는 이곳에서만은 평소와 다른 눈을 하고 있었다.
추억이 담긴 장소라면 아마 오늘도 여기에 계시지 않을까.
늘어진 잎사귀를 걷어 내자, 티 테이블에 홀로 앉아 계신 할아버님이 보였다. 항상 로브나 망토를 둘러 위엄을 드러내던 그도 오늘은 간소한 검은색 정복 차림이었다.
섣불리 다가서지 못한 나는 연보라색 원피스 자락을 매만졌다. 집히는 대로 입었는데, 그제야 검은 경장 바지나 원피스를 입을걸 싶은 생각이 들었다.
“흑표범을 끌고 다니니 마치 네가 흑표범 수인 같군.”
걸걸한 음성이 들리자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던 내가 고개를 들었다. 단번에 나를 알아보신 모양이었다.
“확실히 님프는 아니구나. 세상에 어떤 님프가 머리를 산발을 하고 다닐까.”
“아, 이건….”
엉킨 백발이 손가락 사이에서 풀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머리카락과 씨름하는 나를 보던 그가 조용히 말했다.
“이리 와서 앉아 보아라.”
토끼일 때와 다를 게 없는 태연한 태도였다. 할아버님의 손짓에 따라 주춤주춤 이동한 나는 옆자리에 착석했다. 반대로 몸을 일으킨 그가 내 뒤편에 섰다.
“원하는 머리 모양이 있느냐?”
설마 머리를 만져 줄 생각이신가. 할아버님은 고위 귀족이라셨으니, 평생 제 머리조차 스스로 만질 일이 없지 않나.
여러 상념이 내포된 눈빛을 읽은 그가 비식 웃었다.
“처음 보았을 때 네가 내 머리를 만져주지 않았더냐. 양 갈래머리에 대한 보답을 할 생각이다. 이래 봬도 내 머리는 늘 내가 땋아.”
만행을 들킨 내가 기계적으로 전방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래도 그때는 할아버님이 너무하셨지, 어떻게 바구니를 들고 올 수가 있어. 입 밖으로 불평을 꺼내진 못한 나는 대신 어려운 과제를 던졌다.
“…님프처럼 부탁드릴게요.”
“도전 정신이 몹시 마음에 드는구나. 그러고 보니 과제는 제대로 하고 온 게냐? 페로몬을 옮기는 이전설을 주장한 학자가 누구지?”
“필립스 아이리스 박사요.”
분명히 발렌스 님은 기본 소양을 배울 거라 일렀는데. 할아버님은 기본 소양은 고사하고 아카데미 학도들이나 배울 법한 내용을 가르치고 있었다.
“마지막 장의 구절인데, 앉은 자리에서 끝을 본 모양이군.”
거친 손에 비해 머리카락을 쓸어 가는 손길은 부드러웠다.
에잉, 쯧, 할아버님은 뭘 하면 머리가 이렇게 엉키냐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바라를 타고 왔다 할 수도 없고. 방싯 웃음으로 때운 나는 그저 머리카락을 만지는 손길에 집중했다.
“어디서 그리 띨띨하게 웃는 게냐. 걸음걸이도 보아하니 교양 수업을 늘려야겠어.”
‘띨띨?’
띨띠일? 역시 난 할아버님을 좋아하려야 좋아할 수가 없어. 정색한 나는 몰래 눈을 치켜떴다.
“처음 봤을 때는 저주라도 받은 토끼인 줄 알았건만,”
옆머리를 뒤로 끌어가던 그는 느지막이 말문을 뗐다.
“이리 무구하게 생겨서야. 어찌 아힌 같은 녀석이랑 함께 지내고 있는 게냐?”
“…….”
“정 힘들 때는 말하거라. 내 한 번 정도는 도와주마.”
첫 만남에 대한 할아버님 나름의 사과가 아닐까. 이게 뭐라고 쌓인 응어리가 조금이나마 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걸 보면 나도 너무 물렁해. 입꼬리가 올라간 나는 고개를 꺾어 할아버님을 마주했다.
“그거 대신에 과제를 조금만 줄여 주세요.”
“띨띨하게 웃는 것이 맹랑한 요구를 다 하는구나. 내일은 과제를 두 배로 내도록 하지.”
나쁜 사람. 또다시 정색한 나는 삐죽이며 전방을 바라봤다.
“할…, 릴리언 님.”
“그냥 할아버님이라 부르거라. 손주랍시고 있는 놈은 싹수 노랗게 영감이라고나 불러 대니.”
시야로 보이는 푸른 잎사귀가 점차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천장이 유리로 된 실내 온실에 저녁노을이 내리고 있었다.
“할아버님.”
“그래.”
“실은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어요.”
머리카락 한 줌을 땋고 있던 그의 손이 멈칫했다.
“할아버님께서도 제게 궁금한 점이 있어서 수업을 자처하셨겠죠.”
“…재미있구나. 그래, 맞느니라. 내 먼저 물어도 되겠느냐?”
“그건 안 돼요.”
“무슨…?”
“제 답변만 홀랑 들은 후에 모른 척하시면 어떡해요.”
“별, 도대체 어떤 놈이 그런 화법을 쓰더냐? 보나 마나 아힌 그놈이군, 똥강아지 같은 녀석.”
고양잇과인 아힌이 들었다면 눈이 뒤집힐 수준의 험담이었다. 작게 웃고 있자니, 쯧쯧 혀를 찬 할아버님이 먼저 말문을 텄다.
“그레이스저에 왔을 당시, 나는 팔목 쪽에 진물이 흐르는 화상을 입은 상태였다. 여린 살이라 치료를 받아도 꽤 오래가더구나.”
다 정돈한 머리카락을 놓아준 할아버님은 소매를 걷어 올려 팔목을 드러냈다.
“그런데 너와 서재에서 대치한 이후에 깔끔히 나아 있더군. 지금은 이렇게 흔적만 남았느니라.”
나는 화상을 입었다고는 보기 어려운 미세한 흔적을 내려다봤다.
“처음 접하는 페로몬이라, 덕분에 오랜만에 서재를 들락거리며 조사했다. 능력의 정체는 치유계 페로몬이겠지.”
그의 담담한 목소리를 듣던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진귀한 페로몬이니, 스스로도 제어를 못 하고 있을 테고. 추측이지만 네 수상한 점들은 모두 그것에서 비롯된 거라 보는데. 틀렸느냐?”
“…아니요, 전부 사실이에요.”
“그게 내가 스승을 자처한 이유다. 페로몬을 수월히 다루는 방법을 가르칠 생각이었지.”
그러기엔 너무 학문에만 치우친 느낌인데. 가느다란 눈초리로 쳐다보자, 헛기침을 한 할아버님이 덧붙였다.
“-차차 가르칠 예정이다.”
“네에.”
“발렌스 수장이나 손주 놈이 똑바로 가르칠 리가 없으니. 알다시피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페로몬을 다루는 괴물들이라, 페로몬을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는 자체부터 이해하지 못할 게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발렌스 님이 처음 페로몬을 제어하는 방법을 가르쳐 줄 때 어떠했는가. 숨을 멈추고 혈관을 누르라던 설명은 그냥 죽으라는 말과 다름없었다.
“그리고,”
뜸 들인 할아버님은 크게 숨을 한 번 머금었다.
“네가 페로몬을 제어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하는 건 호의에서 비롯된 게 아니니라.”
“…알고 있어요. 제가 묻고 싶은 것도 그 부분에 관한 거였으니까요.”
자리를 털고 일어난 내가 할아버님과 마주 섰다.
“아힌에게 매 순간 제가 필요할 거라는 말씀의 의미와도 관련이 있겠죠.”
치유계 페로몬이 아힌의 페로몬 발작을 진정시켰던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짧은 정적이 머물렀다.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할아버님이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손주 놈과는 무슨 관계더냐.”
“……!”
너무 갑작스러운 질문이잖아요.
공식적으론 포식자와 먹이지만, 속에 엉큼한 마음을 품은 나는 먼 곳을 응시했다.
“답할 필요 없다. 아까부터 생각했다만, 표정으로 말하는 재주를 가졌군. 최소한 벌어진 입이라도 다물어야 할 게 아니더냐.”
사람이 되어서도 나의 인권은 없었다.
“아힌이 지배계 페로몬을 가진 건 알고 있겠지. 어차피 알려질 대로 알려진 비밀이니. 오늘이 무슨 날인지는 아느냐?”
“아힌의 아버님… 이디스 님의 기일이잖아요.”
“그래, 내 아들놈이기도 하고. 우리 페이언트가(家)가 고위 귀족이긴 하나, 이디스 그놈은 수장의 부군이 되기엔 턱없이 부족한 녀석이었어. 용케 반반한 얼굴 하나로 발렌스 수장의 연인 노릇을 하더니, 엉겁결에 부군까지 되어 버렸지.”
반반한 얼굴 하나로 수장과 연인이 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불신 어린 내 눈빛을 읽은 할아버님이 덧붙였다.
“손주 놈보다 잘난 얼굴이었지 아마. 일단은 흑표범 일족에서 잘 찾아볼 수 없는 금발도 가졌고, 저 예쁜 걸 잘 아는 영악한 녀석이었다. 어차피 발렌스 수장으로서도 세력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적당한 반려를 고른 거겠지만.”
아힌보다 잘난 얼굴이라니. 납득할 수밖에 없었던 내가 입을 틀어막았다.
“이디스는 유약한 놈이었어. 제 주제에 맞지 않는 페로몬을 가져서 툭하면 드러눕기도 하고.”
“설마….”
“그래, 아힌 녀석과 똑같은 지배계 페로몬이었느니라. 치유계 페로몬만큼 희귀한 능력이지.”
“…….”
“아힌이 발렌스 수장의 혈통을 진하게 받은 게 참으로 다행이 아닐 수 없어. 안 그랬으면 녀석도 심심찮게 드러누웠을 거다.”
불안이 고개를 든 나는 양손을 모아 그러쥐었다. 겹친 손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이디스가 처음부터 비실비실한 건 아니었다. 발렌스 수장의 부군이 되고 난 직후에, 페로몬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했을 무렵부터가 문제였지. 열여덟 즈음이었나···.”
옅은 한숨을 내쉰 할아버님이 천장을 올려다봤다.
채 몇 초도 안 되는 정적이었으나 기나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천장에서 시선을 내린 할아버님이 쓰게 웃었다.
“선례가 거의 없다시피 하니, 간신히 버텨 오던 몸이 무너진 거라고 추측은 하고 있다.”
“선례가 왜….”
“그런 페로몬은 수장의 가문에서나 나타날 수준이니 철저히 비밀에 부친 거겠지. 원, 다시 생각해도 우습구나. 우리 페이언트가(家)에 그런 말도 안 되는 페로몬이라니.”
땅거미가 그의 미소를 어둡게 물들였다.
“그리고 그 불효막심한 아들놈은 아힌이 여섯 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떴어. 세간에는 지병이라 알려졌지만, 실상은 지배계 페로몬과 관련한 발작 때문이었다.”
온몸의 피가 쭉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사색이 된 나를 살핀 할아버님이 어깨를 두드렸다.
“너무 걱정은 말거라. 아힌 그 녀석은 발렌스 수장의 우월한 혈통을 받은 만큼 멀쩡하니. …그러나 살아가는 동안 발작이 나타나지 않으리라 확신할 순 없겠지.”
왜 항상 불길한 예감은 적중할까. 주저앉고 싶은 충동을 버틴 내가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손톱이 여린 살을 파고들었다.
‘할아버님은… 아직 모르시는 건가.’
땀에 젖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던 아힌의 모습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