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ymbiotic Relationship Between the Rabbit and the Black Panther RAW novel - Chapter (56)
토끼와 흑표범의 공생관계 3화(56/75)
룬의 직속 보좌관, 레스틴은 크나큰 시련에 빠지고 말았다. 근 두 시간 전부터 마니언츠가(家)의 대표인 룬이 보이지 않으니.
당장 연회를 앞둔 마당에, 가져온 연미복은 침실에 고스란히 걸려 있는 상태였다.
달리는 탓에 땋아 내린 금발이 엉망으로 흔들렸다.
더욱이 어젯밤, 생각보다 더 좋아하는 것 같다는, 또 더 이상 방법이 없다는 룬의 의미 모를 중얼거림이 레스틴의 불안을 가중시켰다.
‘룬 님, 제발….’
정녕 누이의 제안대로 토끼를 훔치기라도 하려는 건지. 심지어 룬의 외조부, 에즈란마저 토끼가 수상하다 노래를 부르며 레스틴을 쪼아대는 실정이었다.
어느덧 고용인들이 드나드는 연회장 뒤편, 룬이 드러누워 있을 법한 교목을 뒤지던 레스틴은 금안을 가늘게 떴다.
쥐색 연미복을 차려입은 이브린이 그의 시야로 들어왔다.
‘러드 이브린.’
연회장에서 새어 나온 불빛에 반사된 피부가 매끄럽게 반짝였다. 타고난 반반한 외모 덕분에, 뭣도 모르는 타 영토 고용인들이 그를 보며 얼굴을 붉혔다.
레스틴은 이브린의 진중한 얼굴 뒤에 숨겨진 치졸하고 썩어 문드러진 성격을 만인이 알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당장 그레이스가(家) 고용인들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 걸 생각하면 얼마나 위험한 인간인지 답이 나올 텐데.
몸서리치던 그는 외알 안경을 고쳐 쓰며 시각을 곤두세웠다. 이브린이 품 안을 뒤적이며 은밀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기에. 몹시 수상하다고 판단한 레스틴은 거리를 둔 채 조심스레 따라붙었다.
이윽고 이브린이 도착한 곳은 연회장에 들어갈 삼단 케이크 앞이었다.
그는 한 치의 표정 변화 없이 주변 고용인들을 물렸다.
‘설마….’
지나가는 고용인들 사이로 몸을 숨긴 레스틴이 마른침을 삼켰다.
귀족들이 맛볼지도 모르는 연회 케이크에 삿된 짓이라도 벌이려는 걸까. 음산하게 일렁이는 이브린의 붉은 눈동자가 레스틴의 가설에 한층 무게를 실었다.
곧 품에서 무언가를 꺼낸 이브린이 손수건으로 그것을 뽀독뽀독 닦았다. 이어서 까치발을 든 그는 가장 꼭대기 층에 멋대로 그 물건을 얹었다.
‘무엇을…?’
미심쩍게 살피던 레스틴은 기겁하며 입을 막았다. 새끼 토끼의 조형물이었다.
“이브린 경, 이게 도대체 뭐 하는 짓입니까?”
한순간이나마 이브린의 행동에 맥락이 있을 거라 판단한 스스로에게 분노가 치민 레스틴이 성큼성큼 다가갔다.
“오랜만입니다, 레스틴 경.”
“태연하게 인사나 주고받을 상황은 아니라고 보는데요. 연회장에 들어갈 케이크에 이 무슨 짓입니까?”
“토끼를 얹었습니다.”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한층 부아가 치민 레스틴이 조형물로 손을 뻗었다.
“그레이스가(家)의 위신이 우스워질 거라고요.”
“그럴 일은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발렌스 수장께서도 기뻐하실 테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이런 식이니까 레스틴 경의 뒤로 겁쟁이란 오명이 따라붙는 겁니다.”
“뭐, 뭐라고요?!”
강한 힘으로 그의 팔목을 잡아챈 이브린이 코앞으로 다가섰다. 반사적으로 움츠러든 레스틴은 뻗은 팔을 거두지도 못한 채 얼어붙었다.
“같은 보좌관으로서 조언 하나 드리자면,”
입을 여닫는 그를 마주한 이브린은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미 그레이스가(家)는 토끼님의 호령하에 있으니, 그분의 총애를 등에 업어야만 합니다.”
“무, 무슨 헛소리를…!”
“어제부로 토끼님의 시중을 드는 메이미란 시녀가 시녀장 바로 아래 지위로 고속 승진이 됐습니다. 발렌스 수장의 특별 지시 아래에.”
이번만은 반박하지 못한 레스틴이 눈을 크게 떴다. 시녀장 바로 아랫자리라면, 가주의 전속 시녀와 동일한 권력을 부릴 수 있었다.
“뿐만 아닌 아힌 님께서는 이미 토끼님의 발차기에 죽는시늉도 마다치 않는 상태이십니다.”
“…….”
“릴리언 님께선 아직 저항을 표하시지만, 제 판단으로는 토끼님의 심도 있는 앞발짓에 함락될 날도 머지않았습니다.”
바야흐로 앞발의 시대였다.
파르르 입술을 떠는 레스틴의 반응을 확인한 이브린이 악마처럼 속삭였다.
“이번 동맹 건에서 성과를 얻으면 레스틴 경도 1급 보좌관으로 올라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렇다면 새끼 토끼를 동맹 회의에 참석시켜야 하나. 고급 건초와 토끼가 앉을 크기의 의자와 서류를 준비하고….
치밀하게 계산하던 레스틴이 아차 정신을 차리며 이브린의 손을 쳐 냈다. 토끼 영업도 아니고 이게 뭔가. 더 이상 감언이설에 넘어갈 그가 아니었다.
“제발, 만날 때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십시오!”
“기회를 마다하시니 아쉽군요. 그러는 레스틴 경은 연회장 뒤편에는 무슨 일이십니까?”
“……!”
그제야 소정의 목적을 상기한 레스틴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럴 게 아니라, 혹시 룬 님을 못 보셨습니까?”
“저기 계십니다만.”
“예? 그럴 리가 없는…?”
황급히 고개를 돌린 그의 시야로 저벅저벅, 걸어가는 거대한 수사자가 보였다.
동공에 지진을 일으킨 레스틴은 기계적으로 고개를 바로 했다. 모른 척하고 싶었다.
“다, 당최 아까부터 룬 님이 보이질 않아서···.”
“룬 님,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이브린의 외침에 컹, 수사자가 앞발을 들어 화답했다.
설렁설렁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레스틴은 저 맛 간 사자를 어떻게 뜯어말리나 걱정부터 앞섰다.
룬이 본모습으로 돌아간 이유가 짐작이 가면서도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침통한 그의 심정과는 반대로, 연회장에서 아름다운 선율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 *
“과로입니다. 방어 본능에 따라 본모습으로 돌아갔을 뿐이니,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올 겁니다.”
여우의 진료를 마친 의관이 묵례 후에 자리를 비켰다.
쓰러질 수준의 과로가 아니면 본모습으로 돌아가지 않을 텐데. 그런 몸 상태로 연회에 참석하러 온 게 신기하다고 생각한 내가 입술을 축였다.
그사이 깨어난 여우는 마치 사람 같은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서적에서나 보던 티베트 여우 같기도 하고.
벽에 붙어 선 나는 차마 맞대응하지 못한 채 곁눈질로 흘끔거렸다. 여우는 설치류를 즐겨 먹기에 토끼에게 있어선 실질적인 천적과도 다름없었다.
청결을 위해 의무실 밖에서 기다려야만 하는 애쉬가 문을 긁는 소음이 들렸다.
자리를 피하는 게 최선이 아닐까. 뺨이 벽에 찰싹 붙을 때까지 눈길을 주고받던 내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무사하시니 다행이에요. 그럼 저희는 이만….”
슬그머니 메이미의 옷자락을 당기던 내가 멈칫 굳었다. 우아하게 자리를 털고 앉은 여우가 앞발을 살랑살랑 움직인 탓이었다.
왜 부르시는데요…. 울고 싶은 심정이 된 나는 이미 흘리고 있던 눈물을 검지로 훔쳤다.
여우는 고아한 발짓으로 의무실 침대를 두드렸다.
‘앉으라는 말인가?’
메이미가 말없이 신경만 잔뜩 곤두세우는 걸 보아, 여우 영토에서도 높은 귀족임이 분명했다.
주춤주춤 눈치를 살핀 내가 슬며시 침대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때였다. 여우의 몸이 화사한 빛을 발하며 사람의 형체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세상에…!’
안 돼! 기겁한 나는 의무실 이불을 끌어당겨 여우에게 덮어씌웠다.
빛이 점점 사그라지는 동시에 주홍색 머리카락이 나풀거리며 흩날렸다. 얼떨결에 여우를 덮치는 자세가 되어 버린 내가 눈을 깜박였다.
“-이렇게 필사적으로 가려 줄 필요는 없는데.”
얇은 이불로 인해 겨우 나신을 모면한 여우가 고혹적으로 눈매를 휘었다.
예상대로 여우는 내가 인간으로 변하는 것을 인지하는 계기가 된, 아힌에게 성적 페로몬을 흩뿌렸던 여우 수인이었다.
“도와줘서 고맙구나. 부군이 많다 보니 늘 피로가 쌓여서 가끔씩 겪는 일이거든.”
“……?”
한 번에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내가 아리송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아.’
곧 의미를 이해하고 얼굴을 붉게 물들이는 순간, 그녀가 이불 밖으로 가느다란 팔을 꺼냈다. 고운 손이 흘러내린 내 하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예뻐라. 혹 저번에 본 그레이스 경의 새끼 토끼인가. 이상하네, 다 자란 성인이 새끼 토끼일 수는 없을 텐데.”
귀를 녹일 듯한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겁먹은 얼굴이 꽤나 마음에 들어. 조금 더 펑펑 우는 모습을 보고 싶구나.”
내 존재에 대한 변명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여우의 입에서 기상천외한 말이 튀어나왔다.
‘이 맹수도 미쳤나 봐.’
맹수들은 남녀 불문하고 유혹에 특화되어 있는 걸까. 분명 동성임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착실히 홀려가고 있었다.
“이리 가까이서 초식계 수인은 처음 보는데, 하나 저택에 들여 볼까.”
정신이 몽롱해져 가던 나는 이내 그녀가 은근히 성적 페로몬을 흘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다행히 눈을 부릅뜸으로써 떨쳐 낼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위험해.’
설마 여우 일족은 성별을 가리지 않는다든가. 여전히 여우의 얼굴 옆으로 팔을 지탱한 상태인 내가 도르르 눈을 굴렸다.
조심스레 몸을 일으키려 하기 무섭게, 그녀의 손이 하얀 머리카락을 지나 망토 리본을 끌어 내렸다.
“안쓰러워라, 목을 다치기라도 한 거니?”
“아, 이건….”
드러난 목에 붙어 있을 반창고를 상기한 나는 얼굴을 발갛게 물들였다.
떠듬떠듬 변명을 생각하고 있자니 스르륵, 망토가 흘러내림과 동시에 차가운 손이 목덜미를 매만졌다. 등허리에 오싹 소름이 돋아난 내가 떨쳐 내려 할 때,
“하나 묻고 싶은데,”
여우는 나만이 들릴 만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열꽃 흉터가 있건만, 어떻게 성수(成獸)가 아닌 새끼 토끼의 모습이지?”
열꽃 흉터는 분명히 인간화를 거친 이들에게나 나타나는 현상인데. 몽롱하던 정신이 또렷해지다 못해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황급히 목뒤를 더듬자, 여태껏 느낄 수 없었던 묘한 굴곡이 느껴졌다.
“응, 왜 그럴까?”
여우의 감미로운 음성은 부연 안개 속을 걷는 듯한 막막함을 가져왔다.
간신히 그녀의 위에서 일어난 나는 의무실에 딸린 욕실로 들어섰다.
쾅, 문을 닫은 후 거울을 마주하자, 낯빛이 창백하게 질린 여자가 보였다. 더듬더듬 머리를 한쪽으로 넘긴 나는 몸을 비스듬히 틀며 목뒤를 살폈다.
‘진짜잖아.’
비록 뚜렷하진 않지만 희미한 꽃잎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난번에 앞발로 아힌의 목을 파헤쳤을 때, 그의 열꽃 흉터는 이것과 달리 뚜렷한 홈이 파여 있었는데.
떨리는 손으로 그 부위를 쓸던 나는 입술을 사리물었다.
아직 수인열을 치른 기억도 없으니, 혹시 인간화에 가까워졌다는 징조일까. 늘 상식을 벗어나는 몸이었기에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왜 인간으로 변하지 않는 게야.’
인간화.
평생을 바라 온 것이 이루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놀람보다는 얼떨떨함이 앞섰다.
‘인간화가 불가능한 수인이라니, 불쌍하기도 하지.’
쿵,
‘그럼 이성을 가진 짐승과 다름없단 말이 아닌가? 징그럽기 짝이 없군.’
쿵.
심장이 뜀박질이라도 한 양 세차게 박동했다. 토끼로 살아온 나날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토끼님.”
바깥에서 메이미의 걱정 어린 부름이 들렸다. 거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던 나는 그제야 먼 기억 속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황급히 머리카락을 정리하여 목뒤를 가린 내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나섰다.
“이만 가자, 메이미.”
여우랑 오래 시간을 끌어 봤자 좋을 게 없으니. 태연하려 노력했지만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렸다.
그새 침대에 걸터앉은 여우는 이불로 나신을 아슬아슬하게 가린 채 입매를 끌어 올렸다.
“이렇게 두고 가려는 거니?”
“네?”
“또 쓰러질지도 모르는 나를?”
저 요망하기 짝이 없는 맹수. 말 한 마디, 손짓 한 번이 뭇 토끼의 발목을 붙들고 있었다.
“부…!”
부담스러운 성적 페로몬 좀 집어넣으란, 따끔한 충고를 던지겠노라 결심한 내가 위협적으로 인상을 썼다.
“부디 몸조리 잘하세요….”
다짐과 달리 목소리는 한없이 기어들어 갔다. 그러자 여우의 입가에 자리한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어쩐다, 보내고 싶지 않은데. 그레이스 경보다 네가 더 탐나는구나, 맛있는 냄새도 나고.”
맹수들은 욕심이 그득하다더니. 부군이 다섯이나 있으면서도 욕심은 끝이 없었다.
나는 슬며시 메이미의 뒤에서 몸을 반만 내밀어 여우를 바라봤다. 일족 특유의 주홍빛 눈동자는 빨려 들어갈 만큼 고고했고, 굽이굽이 물결치는 머리칼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뒤늦게 계속 속을 불편하게 만들었던 모난 감정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저 아름다운 여우가 자꾸만 아힌을 탐내는 게 싫었다. 불안하고, 이유 없이 얄밉고, 불필요할 만큼 잘생긴 아힌의 얼굴이 원망스러웠다.
나도 모르게 메이미의 옷자락을 꽉 말아 쥔 내가 으르렁거렸다.
“…내 거야.”
“그레이스 경이?”
막상 입 밖으로 내뱉고 나니 한없이 부끄러워진 나는 메이미의 등에 이마를 푹 묻었다.
“귀여워라.”
여우가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여유로운 반응에 한 마디 더 강력하게 주장하려던 내가 휙 뒤를 돌아봤다. 크르릉- 의무실 밖에서 애쉬와 바라가 소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유도 없이 저럴 애들이 아닌데. 속히 문고리를 잡으려는 찰나, 끼이익, 두 발로 선 수사자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사자…?’
밀림의 왕께서 의무실에는 무슨 일로 방문하신 걸까.
혹시 꿈인가 싶어 눈을 비볐지만, 문고리를 붙든 사자는 여전히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쓰러진 여우를 목격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공포가 휘몰아친 내가 사자를 휙 밀쳤다.
“토끼님!”
그렇게 때아닌 추격전이 벌어졌다. 발바닥에 불이 날 속도로 달아나는 내 뒤로 메이미와 두 흑표범, 한 마리의 사자가 따라붙었다.
‘쫓아오지 마!’
나 좀 살려 줘…!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내가 눈으로 신호를 보냈지만, 우리의 저택 질주가 일상인 고용인들은 흐뭇하게 길을 비켜설 뿐이었다.
‘유안, 도와…,’
…줘. 스쳐 지나가면서 보게 된 유안의 파이팅이 꿈도 희망도 사라지게끔 만들었다.
* * *
비비는 남자로서 다가서는 룬을 어렵고 당황스럽게 여겼다.
연무장에서도, 응접실에서도 시선 한 번 제대로 맞추지 않으려 할 만큼.
그래서 룬은 동물이면 그보다는 편하게 대하지 않을까 싶어 얄팍한 수를 썼지만, 비비는 흑표범 영토에서 지낸 것이 무색하리만치 여전히 맹수를 두려워했다.
결과적으로 난데없이 술래잡기에 임하게 된 룬이 전방을 바라봤다. 비비의 하얀 원피스 자락이 너풀너풀 흩날렸다. 오리처럼 뒤뚱거릴 때와 달리, 그녀는 달리기가 주특기인 사람처럼 온 저택을 뛰어다녔다.
사자가 룬임을 아는 비비가 몇 번이나 멈추기 위해 노력했으나, 얼굴을 보자마자 한 바가지라는 영문 모를 소리만 읊조리며 달린 것이 벌써 몇 번째 반복되고 있었다.
룬이 사람으로 돌아가야 하나 고민할 즈음, 비비는 실내 온실로 쏙 들어가 버렸다.
온실 입구에 멈춰 선 메이미는 룬을 향해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의복을 가져다드릴 테니, 부디 사람으로 돌아와 주십시오.”
그녀는 온실을 지키는 경비 기사들에게 눈짓한 후에 속히 자리를 떴다.
미쳐버린 흑표범들처럼 놀리려 한 의도가 아니었는데. 룬은 겸연쩍게 앞발로 갈기를 긁었다.
하는 수 없이 자리를 지키게 된 그는 문득 기척을 느끼곤 옆을 돌아봤다.
온실 유리 너머, 수그려 앉은 비비가 룬을 빤히 주시하고 있었다. 미친 듯이 달린 탓에 머리는 헝클어졌고 뺨은 붉게 달아오른 모양새였다.
겨우 용기를 쥐어짜 낸 비비는 보라색 눈동자를 부릅떴다. 눈싸움이라도 하듯 눈꺼풀조차 깜박이지 않은 그녀가 뻐끔뻐끔 입을 움직였다.
‘왜 따라와요.’
그 필사적인 노력이 우스워진 룬이 비식 바람 새는 웃음을 흘렸다.
‘그냥요.’
그레이스가(家)가 아니면 볼 수 없으니까.
타박타박, 유리를 사이에 두고 비비를 마주하게 된 그가 앞발로 유리창을 짚었다. 바로 가까이에 있음에도 닿지 않았다.
아힌 그레이스가 부러우면서도 억울했다.
내가 다 처음일지도 모르는데. 처음 인간화 한 비비를 발견한 것도, 의상실에 간 것도.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본 것도, 빙글빙글 춤을 추는 장면을 본 것마저도.
그럼에도 이 유리창이 비비와 자신의 거리를 뜻하는 것 같아, 룬은 조금 눈물이 날 듯한 기분을 느꼈다. 저도 모르는 새 생각 이상으로 마음을 많이 준 모양이었다.
* * *
연회의 밤이 무르익었다. 저마다 모인 귀족들은 썩 보기 힘든 광경을 향해 연거푸 곁눈질했다.
딱히 살가운 관계는 아닌 발렌스와 아힌, 릴리언도 모자라 마니언츠가(家) 일족들이 함께 몰려 있다니. 처음 보는 신기한 조합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군다나 그들의 눈은 오로지 한곳에 머물러 있었다. 슥, 따라서 옮겨진 귀족들의 시선이 케이크에 안착한 토끼 조형물에 머물렀다.
한편, 그 독특한 무리의 중심에 선 아힌은 피곤에 전 상태였다. 지난밤에 단 한숨도 잘 수 없었기에.
대륙에서 가장 엉큼한 토끼는 매 순간 그를 시련에 들게 만들었다.
무언가를 하더라도 최소한 발작이라는 목숨의 위기에서 벗어난 후여야 하는데. 비비는 그런 아힌의 심정도 모른 채, 경계선으로 그어 둔 베개를 야수 같은 얼굴로 간단히 처리해 버렸다.
당장 목을 깨물 때도 위아래로 내려가고 싶은 충동을 웃음으로 때우며 얼마나 참았던가. 본인이 주인공인 연회에 전혀 집중할 수 없었던 아힌이 눈가를 짚었다.
“아힌 님, 케이크가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아힌을 살피던 이브린이 물었다. 그제야 아힌의 시선이 케이크 맨 위층에 자리한 토끼 조형물에 머물렀다.
“비비는 저렇게 온순하게 생기지 않았어.”
조금 더 눈초리가 사납고, 툭하면 앞발을 들이밀며 위협하는 한 마리의 짐승 같은 토끼였다.
박한 평가에 내심 침울해진 이브린은 희망을 버리지 않은 채 발렌스를 돌아봤다. 그녀 또한 썩 마뜩잖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너무 작아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군. 안 그런가요, 아버님?”
“…음.”
차마 맞장구까지는 못 친 릴리언이 침음성을 흘렸다.
룬의 외조부, 에즈란은 케이크를 못마땅해하는 아힌과 발렌스, 릴리언을 차례로 훑었다. 보는 눈이 많은 탓에 역정까지는 내지 못한 그가 레스틴에게 속삭였다.
“근래 그레이스가(家)에 전염병이라도 돈 게냐? 어찌 저리 하나같이 미쳐 버렸을꼬.”
제가 하고 싶은 말이 그 말입니다, 입을 꾹 다문 레스틴은 연신 고개만 끄덕이며 동조했다.
“룬은 또 어딜 간 게지? 아까부터 보이질 않구먼.”
“입장까지 함께 하셨는데, 인적이 드문 곳에서 쉬고 계시겠죠.”
“예끼, 쓸모없는 녀석.”
사실 입장은커녕 사자로 변한 룬을 찾지도 못했건만. 새파란 거짓말을 해버린 레스틴은 땀이 배어난 손을 옷자락에 비볐다. 담 작은 그로서는 역정 낼 에즈란을 고려하여 능청을 떨어야만 하는 일이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조형물이 토끼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해 몹시 아쉽구나. 안 그런가요, 아버님?”
“…음.”
그사이에도 그레이스 일족의 토론은 계속되고 있었다.
“아힌, 차라리 케이크 자체를 토끼 모양으로 했으면 좋았을 것을.”
“이건 제가 명령한 게 아닌데.”
“그럼 주방장이 자체적으로 제작한 거니?”
점점 여론이 불리해지는 것을 깨달은 이브린이 레스틴을 날카롭게 흘겼다.
“레스틴 경, 그러게 제가 조형물로는 부족할 거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의도치 않게 희생양이 된 레스틴이 어깨를 화들짝 떨었다.
“예? 아니, 예? 조형물은 이브린 경…,”
“덮어씌우지 마십시오. 레스틴 경이 품에서 꺼내어 제게 보여 줬던 조형물이 아닙니까.”
독박을 쓰게 된 레스틴은 아힌의 뒤편에 선 이브린을 향해 치를 떨었다. 곧 그는 그레이스 일족의 박한 시선이 제게 꽂힌 것을 느끼곤 주춤주춤 걸음을 물렸다.
“제, 제가 아니….”
연신 양손을 젓던 레스틴은 마침 도착한 아힌의 전속 시종, 유안으로 인해 구제됐다.
“실례합니다.”
곰 영토에 서신을 전달하러 떠난 퀸 대신, 토끼의 행적 보고를 맡은 유안이 이브린에게 속삭였다.
“토끼님께서 한 시간 전쯤, 여우 일족의 아일라 님이 쓰러진 것을 우연히 발견했다고 합니다. 직전까지 그분과 의무실에 계셨고요. 메이미 님의 전달로는 아일라 님이 토끼님을 마음에 들어 하신 눈치라고 합니다.”
뜻밖의 소식을 접한 이브린은 미세하게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그의 드문 표정 변화로 인해 함께 있던 이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호기심을 한 몸에 받은 이브린이 축약하여 전했다.
“토끼님이 여우와 바람이 났다고 합니다.”
“뭣이? 또?”
가장 먼저 역정을 낸 사람은 릴리언이었다.
뚝, 아힌의 손에 있던 회중시계가 두 동강 나는 것을 목격한 유안은 이게 아닌데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이브린이 아직 제 쪽으로 귀를 기울인 상태였기에, 역할을 다하기 위해 재차 속삭였다.
“현재는 사자로 변한 룬 님과 저택을 이곳저곳 뛰어다니고 계십니다. 이상입니다.”
“다시 돌아가서 주시하도록.”
“명… 받들겠습니다.”
눈치를 살핀 유안이 도망치듯 회장을 벗어났다.
꽁무니가 빠져라 사라지는 유안을 바라보던 이브린이 뒤돌았다.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그레이스 일족의 시선과, 이게 다 무슨 소리냐는 에즈란과 레스틴의 시선이 그에게 꽂혀 있었다.
타오르는 듯한 관심에 헛기침을 한 이브린은 황급히 축약했다.
“현재는 도피 중이라고 합니다.”
목을 조이는 타이를 느슨하게 푼 아힌이 물었다.
“여우랑?”
“아뇨, 도피는 사자입니다.”
뚝, 아힌의 손에 있던 회중시계가 아예 생명을 다했다.
아힌의 회중시계가 바스러지는 동시에 릴리언의 애착 지팡이가 두 동강이 났다.
이 영감이 회춘이라도 했나, 눈이 튀어나올 만큼 커진 에즈란이 지팡이와 릴리언을 번갈아 봤다.
“사자와 도피가 다 무슨 소린가. 설마 사자가 우리 룬은 아니겠지?”
“…토끼 일족은 일처다부제가 가능했던가?”
“갑자기 그런 건 왜 묻나?”
“답이나 하게.”
“일단은 일처다부제와 일부다처제 전부 허용이 되는 걸로 알고 있네만.”
간신히 관리하던 릴리언의 낯빛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어쩐지 회의실 앞에서도 망토로 꽃단장까지 하고선 시종과 노닥거리더니.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사실이었다.
지팡이를 홱 팽개친 그가 케이크의 토끼 조형물을 조심스레 집어 들었다.
“이 천하의 바람둥이 같으니라고!”
절망적인 그의 비명이 연회장 내로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물론 토끼 조형물에게선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