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ymbiotic Relationship Between the Rabbit and the Black Panther RAW novel - Chapter (58)
토끼와 흑표범의 공생관계 5화(58/75)
주요 인물이 죄다 자리를 비운 그레이스가(家)의 연회가 막을 내렸다.
바람난 토끼의 실체를 알리는 임무를 마친 이브린은 애쉬와 바라를 인도받아 침실로 돌아왔다.
저벅저벅, 나이트가운을 걸친 그가 침실을 가로질렀다. 지나가면서 마주친 거울 속 이브린은 오늘도 완벽한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좋은 밤입니다, 바라.”
쿠션에 엎드린 바라는 토끼의 노예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이브린은 책상에 앉아 일과의 마무리 중 하나인 일기장을 펼쳤다. 탄생일을 기점으로 아힌이 토끼의 아래로 완전히 전락했다. 그런 은밀한 내용을 작성한 그는 테라스로 고개를 돌렸다.
시선 끝, 유난히 신경이 곤두선 애쉬가 닫힌 테라스 문을 긁어 대고 있었다.
“애쉬 님, 왜 그러십니까?”
정중한 물음을 들은 바라가 콧방귀를 뀌었다.
토끼의 신임을 얻은 애쉬에게는 꼬박꼬박 애쉬 님이란 존칭을 사용하는 꼴이라니. 약육강식의 원리에 철저히 순응하는 박쥐 같은 인간이었다.
이윽고 테라스 쪽으로 걸어간 바라는 고집을 부리는 애쉬를 이끌었다. 토끼에게 가기 위해 종종 벌이곤 하는 일이라 놀라울 건 없었다.
그러나 애쉬는 자리를 지키며 연신 테라스 문을 향해 앞발을 휘둘렀다.
“애쉬 님.”
일기장을 덮은 이브린이 애쉬의 곁에 수그려 앉았다.
“아직 저택에 남은 손님이 많아서 야간 산책은 안 됩니…, 윽!”
찰싹, 꼬리에 얼굴을 맞은 이브린이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애쉬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지, 당장 문을 열라는 듯 유리를 두드렸다.
“고집부리셔도 안 됩니다.”
이브린의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은 애쉬가 도리어 성질을 부렸다.
이상하게 불안했다.
오늘 토끼가 유난히 많은 맹수를 만나서일까. 그보다는 낮잠 중에 꾼 악몽 탓이 컸다.
원래 비비는 죽더라도 애쉬가 핥으면 금세 살아나서 왁 놀라게 만들곤 했다. 낮잠을 자다가도 몸을 치대면 부스스하게 일어나서 애쉬의 까만 털을 쓸어 줬다.
그런 비비가 꿈속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피를 철철 흘리는 새끼 토끼를 열심히 핥았지만, 미동조차 하지 않는 속상한 꿈이었다.
깔짝깔짝, 흠집이 날 만큼 유리를 긁는 애쉬를 바라보던 이브린이 인상을 찌푸렸다. 애쉬의 눈 밑 털이 물기로 젖어 든 탓이었다.
마침 눈물을 발견한 바라는 경악하며 이브린을 쾅 밀쳤다.
문을 열어 달라잖아. 성질낸 바라가 테라스 문을 부숴 버릴 기세로 들이박기 시작했다.
‘…이상하군.’
괜히 불길한 예감이 든 이브린이 가운을 털며 몸을 일으켰다.
동물은 수인보다 원초적인 본능이 훨씬 강하단 사실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천재지변을 예측하고 도망가는 새와 쥐처럼.
“기다려 주십시오, 의복을 갖춘 후에 함께 갑시다.”
그가 드레스 룸 쪽으로 뒤돌자, 도망간다고 여긴 애쉬와 바라가 크르릉- 가운을 물어 당겼다. 덕분에 쿵 넘어진 이브린이 가운을 여몄다.
“잠깐만요, 저는 벗겨지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건 제가 아끼는 가운이니 부디 놓아주십시오.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지만, 두 흑표범의 송곳니에 뜯긴 가운은 넝마에 가까워져만 갔다.
* * *
실내 온실에서 침실로 돌아온 나는 옆에 선 아힌을 곁눈질했다.
그는 망가진 꽃다발의 잔해라도 챙기겠다는 일념하에, 야무지게 귀에 꽃 두 송이를 꽂아 둔 상태였다.
톡톡히 미친 걸 보아 평소와 다름없다는 말인데…. 그럼에도 자꾸만 출처 모를 위화감이 밀려들었다.
실내 온실에서 갑자기 끊긴 오묘한 분위기에 대한 아쉬움 때문일까.
몰래 살피던 나는 민망함에 시선을 내렸다. 서너 개 풀린 단추 사이로 언뜻 드러난 아힌의 상체 때문이었다.
‘이…!’
사람으로 변한 나의 위험성을 간과해도 유분수지. 무방비함 하나로 나라를 뒤흔들 맹수였다.
얼굴에 오른 열을 겨우 삭인 나는 부르튼 입술을 매만졌다.
아힌이 도무지 입술을 가만 놔두지 않은 탓에, 열꽃 표식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아직 말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전하면 아힌의 저 여유로운 표정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계속 입이 근질거리는 탓에 절로 발꿈치가 들썩거렸다.
“비비, 어지러워.”
그제야 그의 주위를 기웃거리며 돌고 있었음을 깨우친 내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역시 빙빙 돌리며 간을 보는 건 내게 맞지 않았다. 비장하게 열꽃 표식에 대해 전하려는 찰나, 아힌이 한발 먼저 입술을 열었다.
“집무실에 좀 다녀올게, 챙겨 둘 게 있어서.”
“뭔데?”
“기밀 서류. 유안은 위치를 모르니까 직접 다녀와야 될 것 같아.”
은근슬쩍 내 머리 위의 화관을 벗겨서 탁상에 둔 그가 등을 돌렸다.
“먼저 자고 있어.”
자박자박, 침실 내로 두 개의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문 앞에서 멈춰 선 아힌은 뒤돌며 미간을 굳혔다.
“-왜 졸졸 따라와.”
“같이 다녀오자.”
“금방 돌아올 텐데?”
“이브린이랑 유안도 없는데, 복도를 걸을 때 심심할 거 아니야.”
“쓸데없이 밤에 돌아다니다가 감기 걸려.”
그렇다면야. 파박, 튕기듯 발을 박찬 나는 내 전용으로 변한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하얀 망토를 집은 후 아힌의 곁에 서기까진 삼십 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이거 입으면 감기 안 걸려.”
슬금슬금 접근한 내가 그의 옆으로 나란히 붙어 섰다.
품에 든 망토를 힐긋 확인한 아힌은 속이 훤히 보인다는 듯 삐딱한 웃음을 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버리고 가려는 양, 매정하게 망토를 뺏어 버렸다.
“그냥 침실에 있으라니까.”
“원래는 주머니에 넣어서 항상 데려갔잖아….”
떨어지기 싫어서 이러는 거 알면 모른 척 좀 해 주지. 도끼눈을 한 내가 뒤에서 아힌을 거칠게 끌어안았다.
“…안 놓으면 물어 버린다.”
아힌은 모질게 말하면서도 허리를 두른 팔을 떨쳐내진 못했다. 앞쪽에서 나지막한 한숨 소리가 들렸다.
‘같이 좀 가면 어디가 덧나?’
콧김을 뿜은 나는 널따란 등에 이마를 비볐다. 코를 박은 연미복에서 밤바람 냄새와 특유의 향료 냄새가 묻어났다.
아힌도 나만큼 긴장하고 있는 걸까. 쿵쿵 세차게 뛰는 그의 심장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비비.”
“…왜?”
“그냥.”
싱겁기는. 얼굴에 열이 오른 나는 더 이상 꼼지락거리지 않고 조심스레 등에 뺨을 묻었다.
째깍, 째깍, 시계 초침 소리가 적막을 채웠다.
오늘은 하루가 참 길었던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니 몸이 노곤하게 풀어졌다. 아힌도 마찬가지인지, 평소보다 나른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비.”
“왜?”
“아직도 흑표범이 무서워?”
“아니, 이제 안 무서워.”
“토끼의 간을 걸고?”
“…어응.”
긍정도 부정도 아닌 이상한 대답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약간의 자괴감을 느끼고 있을 즈음, 아힌은 저를 두른 내 손 위에 제 손을 겹쳤다.
“무섭지 않다면 저를 침대로 던져 주세요.”
‘뭐, 뭘 던져?’
적응하려야 적응할 수가 없는 맹수 같으니라고. 당황한 탓에 손이 사시나무 떨듯 달달 경련했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으론 이 커다란 덩치를 어떻게 침대에 던져야 할지에 대한 방안을 찾느라 바빴다.
내가 조용해지자, 음흉한 속도 모르고 바람 새는 웃음을 터뜨린 아힌이 천천히 말문을 뗐다.
“그날은, 늑대 일족의 습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경계의 숲으로 들어선 날이었어.”
“그렇구나. 습격한 후에 침대로… 아니, 아니, 갑자기 무슨 소리야?”
“침대 생각만 하고 있었나 봐?”
“하려던 말이나 계속해…!”
멋쩍어진 나는 괜히 이마로 아힌의 등을 쿵 박았다. 그리고 이마가 깨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이브린이 날 버린 후에 저 혼자 마차를 타고 달아났거든. 덕분에 경계의 숲에서 마차가 돌아올 때까지 얼쩡거려야 했던 처지였지.”
이브린은 어떻게 아직까지 목이 멀쩡할 수 있는 걸까. 그런 내 의문을 읽은 건지, 아힌은 “위급상황에서 주인을 내팽개치는 담대함이 마음에 들어.”라며 끼리끼리임을 제 스스로 증명했다.
“어쨌든 꽤나 심기가 불편했는데, 마침 바구니를 옮기던 토끼 수인들이 주변을 지나더라고.”
느릿한 음성과 익숙한 향이 신경을 자극했다.
“그냥 전부 호기심이었어. 바구니 속에서 울고 있던 새끼 토끼가 웃겼고, 살아 보겠다고 죽은 척을 하는 게 재밌었지. 묘하게 나쁘지 않아서 홧김에 주워 왔던 것 같아.”
딱히 별 내용 없는, 옛날이야기를 듣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메이는 목을 삼킨 내가 중얼거렸다.
“여전히 웃기다고 놀리면서.”
“그게 싫으면 비비가 웃기게 생기지 말았어야지.”
“…되바라진 맹수.”
“짜릿한데. 더 해 봐.”
토끼로 돌아가면 반드시 뒷발로 차 버리겠어. 속으로 저주를 퍼부은 내가 허리를 두른 팔을 풀기 위해 버둥거렸다. 그를 허용치 않은 아힌이 손등을 덮은 손에 힘을 가했다. 반강제로 뒤에서 끌어안는 것을 유지하게 된 내가 눈을 사납게 떴다.
“이거 놔!”
“바구니를 처음으로 발견한 게 나라서 다행이야.”
“무슨…,”
“내가 비비를 주울 수 있어서 다행이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말이 화살처럼 날아와 가슴에 쿡 박혔다. 예고도 없이 이러는 게 어디 있어. 의식의 흐름대로 사는 흑표범답다고 생각한 내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주워 주나?”
“입속에 넣어서라도 모셔와야지.”
“진짜 싫어.”
“그 말도 생각보다 설레는데.”
낮게 웃은 아힌이 말을 이었다.
“아무튼 인간화에 대해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 나는 네가 어떤 모습이더라도 괜찮으니까.”
“새끼 토끼라도…?”
“응.”
“사람이라도?”
“그래.”
“…멋대로 왔다 갔다 해도?”
“어차피 지금도 비비 멋대로 그러고 있잖아.”
불완전한 나를 전부 받아들여 줄 사람이 세상에 아힌 말고 또 있을까. 목이 멘 나는 단단한 등에 이마를 푹 묻었다.
“아힌.”
어쩌면, 지금이 인간화의 징조에 대해 전달하기 가장 좋은 적기가 아닐까 싶었다.
“실은, 나 목뒤에-…,”
순간이었다. 대뜸 그의 팔에 확 밀쳐진 내가 뒷걸음질 쳤다.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던 나는 카펫 위로 털썩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러나 아파할 겨를도, 정신도 없었다.
분명히 방금 전, 닿아 있던 아힌의 몸에서 지배계 페로몬이 요동쳤지 않나.
‘페로몬 발작.’
지체 없이 몸을 일으킨 내가 그를 향해 다가섰다.
“아힌!”
팍, 입을 막은 아힌이 팔을 잡으려는 내 손을 강하게 내쳤다. 일순 주춤거린 나는 아릿한 손등을 감싸 쥐었다.
“…오지 마.”
거리를 벌리려는 듯 뒤로 물러나던 그가 쿨럭거리며 기침을 했다.
아힌의 입가와 손이 붉은 피로 물들었을 때, 쿵, 망치에 머리를 맞은 듯 사고가 마비됐다.
* * *
떠들썩한 연회가 끝난 밤은 오히려 다른 때에 비해 적막했다. 어쩌면 폭풍 전야의 고요 같기도 했다.
안개 짙은 쌀쌀한 밤. 간신히 셔츠와 바지만 갖춘 이브린은 추위를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제발 진정하십시오. 저는 문관이라 체력이 약합니다.”
저택 정원을 두두두 활주하는 애쉬와 바라의 꼬리를 붙든 그가 애원조로 말했다.
그도 그럴 게, 이 둘이 향하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아힌의 침실 테라스가 있는 방향이었으니. 거의 질질 끌려가다시피 했지만 꼬리를 놓칠 순 없었다.
“입구로 가서 아힌 님의 허가를 받아야만 합니다. 이런 식의 방문은 내일의 해를 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진격 중인 애쉬와 바라에게 있어 이브린은 불필요한 떨거지에 불과했다.
버릴까?
그러자.
시선을 교환한 두 흑표범이 그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두 분, 왜 저를 점점 구석으로 몹니까?”
이윽고 앞발과 꼬리를 이용한 일방적인 구타가 시작됐다. 팔로 머리를 방어한 이브린이,
“저는 아힌 님과 달리 당하는 걸 싫어합, 윽, 얼굴만은 안 됩니다.”
열심히 주장했지만 통할 리가 없었다.
그의 윤기 나는 흑발이 산발로 변해 가는 와중 푸드덕, 깃털 하나가 하늘하늘 땅으로 떨어졌다.
“퀸 님!”
곰 영토에서 막 귀환한 퀸이 바로 옆의 교목에 걸쳐 앉았다.
“부디 이 두 분 좀 말려 주십시오.”
‘내가 왜?’
방관을 선택한 퀸은 삑삑거리며 기쁨의 노래를 불렀다. 하물며 지나가는 경비 기사들마저 못 본 체하며 걸음을 빨리할 뿐이었다.
“아무래도 이 둘이 아힌 님의 침실에 침입할 요량인가 봅니다. 주군의 심기가 불편해지면 보고를 드려야 하는 퀸 님의 입장에서도 좋을 건 없을 텐데요.”
곧 있으면 의복까지 찢기게 생긴 이브린이 살살 구슬리자, 그제야 사뭇 심각해진 퀸이 노래를 멈췄다.
‘그건 절대 안 되지.’
딸기 금지령이 풀린 지 얼마나 지났다고.
이브린에게 도움의 부리를 내밀지 고민하던 퀸은 문득 달갑지 않은 목소리를 떠올렸다.
‘비비 말고, 나를 감시해.’
부리부리한 매의 눈이 유독 날뛰는 애쉬에게 닿았다. 망할 토끼 앞에서 재롱을 떨기도 바쁜 흑표범이 괜히 저럴 리가 없었다. 사뭇 표정을 굳힌 퀸이 쐐액- 날개를 펼쳐 높이 날아올랐다.
“…퀸 님?”
애쉬뿐만 아닌 퀸마저 묘한 반응이라니. 다리를 휘감는 불안감에,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던 이브린은 결국 애쉬와 바라를 놓치고 말았다.
* * *
망토를 들고 설치는 비비를 뿌리치고서라도 침실을 나서야 했건만. 아힌은 발작까지 조금쯤은 시간이 남았을 거라고 판단한 과오를 후회했다.
급한 김에 욕실 중문을 열어젖힌 그는 도망치듯 들어와 문고리를 걸어 잠갔다. 쿨럭, 기침을 반복할 때마다 새빨간 피가 손바닥을 물들였다.
내부 상황이 비치지 않는 안쪽 문까지 가야 했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버린 그가 미끄러지듯 유리문에 기대어 앉았다. 목구멍이 피비린내로 그득했다.
‘…각혈은 처음인데.’
가물거리는 그의 시야로 무거운 문을 열어젖히는 어린 날의 자신이 그려졌다.
‘아버지…?’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방에 쓰러져 있던 이디스.
입에서 흘러내린 피가 번진 턱.
나가라고, 헐떡이며 어린 아힌을 뿌리치던 낯선 손길.
그가 토해 낸 피에 젖어 든 이디스의 아름다운 금발과 떨어뜨린 토끼 인형.
가닥가닥 끊긴 장면이지만 결코 바래지 않은 기억이 아힌의 손발을 차게 만들었다.
육안으로 보이는 피를 마주하자, 딱히 실감 나지 않던 죽음의 그림자가 선명하게 드리워졌다.
그럼에도 아힌은 무감각한 눈으로 손을 적신 피를 응시했다.
어차피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반은 체념한 일. 죽음이니 뭐니 선명해져 봤자 크게 감흥이 없었다.
그저 이 혈관이 타들어 가는 듯한, 지긋지긋한 고통의 순간을 견뎌야 하는 게 짜증 날 뿐이었다.
쾅, 일순 강하게 유리가 흔들리는 충격으로 인해 아힌의 몸도 함께 진동했다.
그가 옆으로 비스듬히 몸을 틀자, 주저앉은 채 유리문을 두드리는 비비가 보였다. 이미 누가 죽기라도 한 것처럼 하얀 얼굴이 눈물범벅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