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ymbiotic Relationship Between the Rabbit and the Black Panther RAW novel - Chapter (61)
토끼와 흑표범의 공생관계 8화(61/75)
메이미와 바라의 권유에 떠밀려 산책을 나서게 된 애쉬가 정원을 거닐었다.
재미없어.
털썩, 얼마 안 가 엎어진 애쉬는 의욕 없이 잔디를 뒹굴었다. 비비가 빠진 산책 따위는 아무런 감흥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이제부터 저 토끼가 네 주인이야.’
처음에는 그저 아힌의 지배계 페로몬에 홀려 복종했을 뿐이었다.
서로 어색하게 안부만 물으며 지내던 초반.
하루는 비비가 계단을 오르기 힘겨워하기에, 입으로 옮겨 주려 했더니 뒷발로 차 버린 탓에 오히려 서먹함만 더해졌다.
콧대 높은 토끼. 애쉬는 도움의 입질을 쌩하니 무시한 털 뭉치가 야속했던 것 같다.
그렇게 감정의 골이 깊어지던 어느 날.
비비와 산책을 나선 애쉬는 크나큰 난관을 맞이하고 말았다. 막 훈련을 끝낸 기사들이 호스를 연결하여 물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물을 몹시 꺼리는 애쉬에겐 지옥과도 같은 시련이었다.
그때였다, 앞발을 착 펼친 비비가 움츠린 애쉬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비범한 기세에 눌린 기사들이 허둥지둥 물을 치우는 건 순식간이었다.
비비가 목숨 걸고 나를 지켜 줬어. 애쉬의 노란 눈동자 위로 감동의 물결이 일렁였다.
그럼에도 유세 떨지 않고 돌아서는 비비의 뒷모습은 웬만한 우두머리보다 늠름했다.
한 번 호감을 갖고 나니 그제야 안 보이던 배려가 보이기 시작했다.
침대 시트를 더럽힌 애쉬가 메이미에게 혼날까 전전긍긍할 때면, 비비는 앞발 뒷발을 열심히 굴려 제가 더럽힌 척 시치미를 뗐다.
발자국이 확연히 다르건만. 메이미는 다 알면서도 한숨만 푹 쉴 수밖에 없었다.
또 낮잠을 청할 때 햇살이 따가우면, 비비는 부스스하게 일어나서 애쉬의 얼굴 위로 손수건을 덮어 줬다. 그 다정함이 좋아서 일부러 더 햇살 강한 곳에서 낮잠을 청했던 것 같다.
비비는 대부분의 시간을 서재에서 네모난 물건을 뒤적이며 보냈다. 팔락팔락 소리만 들리는 따분한 행위였다. 그래도 얌전히 앉아 들여다보고 있으면, 종종 기특하단 듯 엉덩이를 쓰다듬어 주는 게 행복했다.
별다른 이유 없이 애정은 커져만 갔다.
태어나면서부터 철저한 훈련만 받으며 자라 오느라 못 부린 어리광을 받아 주는 게 좋았고, 배탈이 났을 때 종일 간호해 주던 보살핌도 좋았다.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위대해 보이던 전 주인, 아힌이 성가신 떨거지로밖에 느껴지지 않을 만큼.
왜 그런 나부랭이랑 비비의 관심을 나눠 가져야 하는 걸까. 곱상한 얼굴로 매일같이 비비를 잡아먹을 궁리만 하는 나쁜 놈인데.
질투의 연속이었으나, 나부랭이만 나타나면 수줍게 발로 땅을 긁는 비비가 행복해 보여 한 수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양보가 무색하게도, 나부랭이는 비비를 상처 입히고 말았다. 내가 있었다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또다시 우울해진 애쉬가 의미 없이 꼬리로 잔디를 두드렸다.
빨리 비비가 나았으면 좋겠다. 먹이를 잡아서 선물하면 꿀꺽 먹고 건강해지지 않을까.
사냥을 나설까 고민하던 애쉬는 땅에 드리워진 새의 그림자를 발견했다. 그림자의 주인은 근본부터 비뚤어진 퀸이었다.
콧방귀를 뀌며 늘어지던 애쉬가 다시금 휙 고개를 들었다.
하늘을 가로지르는 퀸의 다리에 들린 바구니가 이상하게 신경을 거슬렀다.
‘애쉬, 저리 가.’
분명, 비비가 처음 나타난 장소도 아힌이 바구니를 열었을 때였는데.
하늘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애쉬가 쏜살같이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
“애쉬!”
돌발 행동에 깜짝 놀란 메이미와 바라가 뒤를 따랐다.
메이미, 저 바구니를 열면 비비가 있을지도 몰라. 이제 다 나아서 우리만 빼고 매랑 놀러 가려나 봐!
신난 애쉬가 정문 방향으로 달려갔다.
“애쉬, 더 이상은 갈 수 없단다.”
그러나 얼마 못 가 경비 기사들에게 가로막히고 말았다.
비비를 따라가야 하니까 비켜 줘.
초조해진 애쉬가 이리저리 발을 틀었지만, 경비 기사들이 굳건하게 앞을 막아섰다. 함부로 저택을 벗어나 시가지에 들어서면 소란이 일기 때문이었다.
“애쉬, 얌전히 있도록.”
영문을 모르는 메이미마저 날뛰는 애쉬의 제지에 힘썼다. 그사이에도 퀸은 눈으로 좇기 힘들 속도로 멀어지고 있었다.
‘비비!’
커헝- 따라가지 못해 속상한 마음이 포효가 되어 표출됐다.
결국 퀸을 놓쳐 버린 애쉬는 별수 없이 비비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정문 앞을 지켰다.
돌아오면 다시 나랑 놀아 주겠지. 빨리 다녀와, 비비.
하루, 이틀, 닷새. 날이 저물었다가 새벽이 밝는 게 여러 번 반복됐다. 그리고 열흘이 지나도 비비는 돌아오지 않았다.
* * *
강 표면이 볕을 받아 반짝거리며 빛났다. 그 위를 지나는 중인 퀸은 숨이 차오를 만큼 날갯짓을 했다.
왜 이렇게 서두르는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분명히 토끼는 처음 아힌이 감시를 맡겼을 때부터 달갑지 않았는데. 먼지 같은 꼴로 굴러다니는 것을 보면 괜히 짜증이 치밀곤 했었다.
‘자유가 신념인 새 수인이 토끼의 자유를 빼앗진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 이유 모를 짜증을 발렌스가 한순간에 해소시켜 줬다. 무엇 하나 스스로 할 수 없는, 자유를 제약받은 토끼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토끼를 지하 감옥에 데려갔던 행동은 거의 충동에 가까웠다.
습기 많은 심란한 밤이고, 딸기에 대한 보답 겸. 아무것도 모른 채 밤하늘만 올려다보는 토끼에게 연민을 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접하게 된 토끼의 몸에 대한 진실은 생각 이상으로 가혹했다.
괜히 데려갔나, 당시에는 어울리지 않게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요, 쏟아진 소금이었다.
하나 토끼는 퀸의 예상만큼 심약하지 않았다. 까마득한 절망도 딛고 일어났으며,
‘밖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고, 나한테 뭘 숨기려는 건지 말해.’
아힌이라는 편하고 유용한 패를 이용하려는 의도도 보이지 않고,
‘퀸, 거래에는 오고 가는 게 있어야지.’
문제라고 인식한 것은 직접 해결하고자 부딪치는 집념이 꽤나 후한 평가를 내리게 만들었다.
‘이번에도 토끼는 저 알아서 하겠지.’
그렇기에, 퀸은 굳이 발렌스가 언질을 주지 않아도 토끼의 위치를 아힌에게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칠 생각은 없었다. 토끼에게 있어 당장 그레이스가(家)는 지옥과도 같음을 모르지 않으니.
‘이틀 안에 다람쥐를 데리고 저택으로 돌아오려무나. 그 의관이 내 침실을 들락거려야 토끼의 부재를 숨길 수 있을 테니.’
‘일단은 숨길 수 있을 때까진 숨겨 보고, 차후에 아힌의 행동을 보고 토끼의 거처 여부는 내가 따로 생각해 보마. 내 아들이라지만 생각이 어디로 뻗칠지 알 수가 없어서 말이지.’
하물며 토끼에 대한 걱정보다는, 저택에 누워 있는 아힌이 토끼의 부재를 깨달았을 때가 더 문제였다.
순전히 본인의 의지로 토끼를 옮기는 중인 퀸이 상념에 잠겼다.
나도 미련하지, 망할 토끼의 어디가 불쌍해선. 동조한 것을 들키면 딸기 평생 금지령이 휘몰아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톡톡, 일순 바구니에서 들려온 진동이 그의 잡념을 날렸다. 다람쥐가 보내는 신호였다.
속히 강을 건넌 후, 들짐승이 없음을 확인한 퀸이 바닥에 바구니를 내려 뒀다. 뚜껑을 들추자마자 새끼 토끼 곁에 선 다람쥐가 그의 시야로 들어왔다.
‘큰일입니다…!’
당황을 감추지 못한 다람쥐는 제 체구보다 긴 의료 도구를 이용하여 허공에 글자를 써 내려갔다. 조금 전부터 원인 모를 고열이 비비의 몸을 달구고 있었다.
* * *
아카데미의 방학 기간인 현재. 지난나 교수는 임시 거처에서 돼지 일족의 전염병에 관한 연구에 임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오늘따라 영 연구에 전념할 수 없었던 그녀는 날이 깜깜해질 때까지 창문 앞만 서성였다.
그 기행을 멀뚱멀뚱 지켜보던 러셀이 따라서 뒷짐을 지며 창문 주변을 서성였다. 이번에는 엔델루스처럼 위험이 따르는 연구가 아니었기에 따라온 참이었다.
고뇌에 잠긴 사람처럼 제자리를 빙빙 돌던 러셀은 문득 창틀을 짚으며 까치발을 들었다.
‘용사님?’
하늘 쪽에서 비비의 맑은 기운이 느껴졌다.
“지난나 교수.”
“러셀, 어머니라 불러 달라 몇 번을…”
“나쁜 새가 오고 있어.”
“이제는 이 어머니가 말을 끝까지 하는 것조차 허용치 않는구… 뭐라고? 나쁜 새?”
덜커덩, 놀란 그녀는 탁상에 정강이를 부딪쳐 깡충깡충 뛰면서도 창문으로 다가섰다. 내내 기다리고 있던 발렌스의 답장일지도 몰랐다.
쐐액-
하늘을 가로지른 매가 순식간에 그들이 있는 거처로 들어섰다.
바구니를 테이블에 내려 둔 퀸은 황급히 부리로 바구니 뚜껑을 들췄다.
곧장 뽀르르 튀어나온 다람쥐가 지난나 교수에게 위급함을 알렸다. 약 한 시간 전부터 비비가 상처 때문도 아닌, 영문 모를 열병에 시달리고 있었으니. 일개 민간 의원인 그로서는 병명을 파악하는 것에 한계가 따랐다.
“이게 다 무슨…!”
잇따라 급해진 지난나 교수는 일단 비비를 조심스레 꺼내어 진료를 시작했다.
‘목의 자상 때문인가?’
자세히 살필수록 그녀의 미간이 오묘하게 일그러졌다.
‘아니, 조금 이상한데. 하지만 비비 님은….’
진료를 마친 후에도 긴가민가한 지난나 교수가 여러 번 재확인을 거쳤다. 달그락거리며 의료 도구가 마찰하는 소음만이 적막을 채웠다.
“아무래도…,”
이윽고 천천히 의료 도구를 내려 둔 그녀가 말꼬리를 늘였다.
“수인열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군요.”
확신이 들어찬 일족 특유의 까만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 * *
“세상에! 이리 갑자기 사람으로 돌아오시면 어쩌나요.”
“따, 따로 자리를 피할 시간이 없었던지라….”
“러셀, 어서 눈을 가리려무나.”
경악 어린 목소리가 멍한 정신을 일깨웠다.
‘지난나 교수님…?’
가물가물한 시야로 우람한 맨몸에 식탁보를 두른 다람쥐 의관과, 서로의 눈을 가려 주고 있는 지난나 교수와 러셀이 보였다.
토끼 영토에서 헤어졌던 두 사람이 어째서 그레이스저에 있는 걸까. 뒤이어 옮겨진 시선이 문에 기대어 선 남자에게 머물렀다.
‘퀸?’
두 번째로 보게 된 퀸의 인간 모습이었다. 마침 시선이 마주쳐 버린 그는 물빛 머리카락을 느슨히 묶으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오지 마. 소심한 저항을 시도했지만 축 늘어진 몸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거 깬 거 같은데?”
“네? 어디 봐요.”
퍽 가까워진 퀸과 지난나 교수의 얼굴이 확장되듯 커다래졌다. 몸이 조심스레 들춰지며 시야가 약간 흔들렸다.
“흠-. 의식만 미약하게나마 깨어났을 뿐, 열병 때문에 몸을 가누거나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진 못하는 상태네요. 금방 열에 들떠 잠들 겁니다. 수인열은 인간화를 치를 때까지 지속되니, 지금 같은 경우가 여러 번 반복될 거예요.”
‘수인열이라고?’
수인열이라면 분명 인간화를 치르기 직전에 겪는 열병이 아니었던가. 환청인가 싶었으나 계속해서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수인열. 인간화.
몽롱한 의식 속에서 두 단어를 되뇌고 있자니, 뒤늦게 온몸이 후끈거리면서도 으슬으슬 추운 이중적인 감각이 느껴졌다.
‘이게 수인열이야?’
어째서 이렇게 갑자기? 목에 생겨난 희미한 열꽃 흉터 때문인가?
온갖 의문이 들었지만, 객관적인 사고를 할 수 없는 지금은 그저 불안감과 두려움만 커져 갔다.
힘겹게 시선을 옮긴 내가 낯선 공간을 둘러봤다. 둥근 나무를 층층이 쌓은 벽은 아무리 봐도….
‘그레이스저가 아니야.’
열에 들뜬 탓에, 고작 이런 것에도 서러움이 밀려들었다.
‘여긴 어디지?’
왜 나는 어딘지도 모르는 낯선 장소에 누워, 그토록 열망하던 수인열을 겪고 있는 건지.
무서워…. 외로운 마음에 보고 싶은 얼굴들을 생각하다가도, 송곳니를 떠올리면 아직 지워지지 않은 공포감이 온몸을 에워쌌다.
“아파?”
불쑥 나타난 까만 눈망울이 코앞에서 흔들렸다. 러셀이었다.
“무서워?”
무감하던 러셀의 표정이 구겨진 종이처럼 찌그러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으앙 울음을 터뜨렸다.
기운을 읽는 페로몬인 만큼 내 감정에 공감한 걸까. 앞발을 내밀었지만 별 힘도 쓰지 못한 채 툭 떨어졌다.
‘돌아가고 싶어.’
그레이스 저택으로, 맹수에게 지독한 공포감을 느끼기 전으로.
달래기는커녕 덩달아 얼굴이 찌그러져 버린 내가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시원하게 목 놓아 우는 러셀을 보고 있자니, 오늘만은 그냥 울고 싶었다.
* * *
그레이스가(家)
비비와 아힌이 함께 쓰러진 이후, 또다시 삼 일이 흐른 아침이었다.
“…비비는.”
눈을 뜬 아힌에게서 가장 먼저 흘러나온 질문이었다. 이브린은 발렌스와 다람쥐 수인에게 전달받은, 토끼의 상태가 차차 안정되어 가고 있다는 소식을 그대로 전했다. 상황상 침실을 직접 확인할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괜찮다니 다행이군.”
고개를 끄덕인 아힌은 주변의 만류를 제치고 평소와 같은 일상에 임했다. 유안의 시중을 받으며 주머니가 필수로 달린 프록코트를 걸치고, 허리 안쪽에 검을 찼다.
“아힌 님, 아직 무리하시면…,”
“괜찮다니까.”
완전히 몸이 나은 건 아니었으나, 그는 주치의가 혀를 내두를 만큼 회복 속도가 빨랐다.
더욱이 마지막으로 페로몬 발작이 일어난 지 일주일이 되어 가건만. 지배계 페로몬은 발작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은 채 잔잔했다.
아힌은 주먹을 쥐었다 펴 보았다. 다루기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제 페로몬이라는, 온전한 제 것이 되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이 또한 오롯이 비비로 인해 비롯된 기적이었다.
* * *
보통의 수인은 몇 시간 열병을 앓은 후에는 인간화를 치른다. 그러나 비비는 특수한 경우인 만큼 수인열 기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러셀도 수인열을 거의 하루 동안 앓았으니….’
비비는 더 길어지지 않을지. 찻잔을 든 지난나 교수가 색색 숨을 몰아쉬는 새끼 토끼와 카피바라로 변한 러셀을 내려다봤다.
비비가 몸을 움츠릴 때면 카피바라가 슬금슬금 움직이며 착 달라붙었다. 아무래도 러셀은 기운을 통해 새끼 토끼가 용사님임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열병이 너무 길어지지 않으면 좋겠는데.’
지난나 교수의 근심 어린 한숨이 공중에 흩어졌다.
* * *
어느덧 정오가 지났다.
아힌은 며칠 만에 깨어난 사람치고는 평소와 같은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회의에 참석하고, 밀린 서류 중에서도 중요한 안건부터 처리하며.
사자 일족의 동맹 대표가 룬 대신 다른 자로 바뀐 건 썩 달가운 일이었다.
비비에게 차이기라도 했나. 분명히 탄생일 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거라고 추측한 그가 내심 만족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아힌은 암살 길드에 재의뢰하려던 계획을 너그러이 미루는 미덕을 베풀었다.
반면, 최근 또다시 늑대 일족이 영역을 함부로 넘나든다는 사안은 꽤나 머리를 아프게 만들었다.
이렇게 된 거 아예 밀어 버리면 좋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하던 아힌은 고개를 저었다. 대륙 규정을 고려하면 분쟁은 최후의 방편이었다.
“아힌 니임-…. 막 깨어나신 분이 이리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누워 있어 봤자 일은 쌓여만 갈 텐데. 주치의가 종일 따라다니며 징징거리는 탓에, 아힌은 하는 수 없이 매 시간 진찰을 맡겼다.
“내상은 아직 신경 쓰셔야 하지만, 지배계 페로몬이 보통의 수인과 비교해도 안정적입니다. 어찌 이런 기적 같은 일이!”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기세인 주치의를 외면한 아힌이 쯧 혀를 찼다.
“그러니까 괜찮다고 했잖아.”
무심결에 주머니를 만지려던 그는 일순 손을 멈췄다. 공허했다. 텅 빈 공간에서 방향을 튼 손이 뭉친 어깨를 주물렀다.
* * *
날이 저물기 직전의 시각이었다.
쿠당탕, 대뜸 창문으로 돌진해서 들어온 발렌스의 수리부엉이가 벽과 충돌했다.
“에구머니!”
기겁한 지난나 교수가 쓰러진 수리부엉이를 진료했다. 낮 동안 비행하느라 생긴 단순 수면 부족일 뿐이었다.
안심한 그녀는 발렌스가 새로이 보낸 급서를 집어 들었다. 이번에는 꽤나 긴 내용의 전서였다.
요약하면 지난나 교수의 근무지인 중립 구역, 벨헬름에 러셀의 앞으로 저택을 사 두었다는 내용이었다.
비비가 차도를 보이면 그쪽으로 옮긴 후, 당분간 상태를 보고해 주면 저택은 그대로 러셀의 소유로 두겠다고.
실상 가주인 남편을 잃은 뒤 인맥만 넓지, 경제 규모가 소박한 하급 귀족에 속하는 그녀로선 달콤한 제안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어째서 애지중지하는 것으로 보이던 비비를 이곳으로 보낸 걸까. 그레이스가(家)에는 훨씬 유능한 의관이 차고 넘칠 텐데.
지난나 교수의 시선이 아직 수인열에 시달리는 중인 새끼 토끼에게 머물렀다. 무참한 송곳니 자국을 미루어 보면, 대강의 전후 상황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공감과 연민을 동시에 느끼던 그녀는 다급히 비비에게 다가갔다.
‘이, 이게 무슨…?’
파도에 모래가 쓸려 가듯 비비의 상처가 사라지고 있었다.
* * *
밤이 깊어지자 비비의 목에 있던 상처가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하얀 털에 눌어붙은 핏자국만이 그 자리에 상처가 존재했음을 증명할 뿐이었다.
치유계 페로몬. 지난나 교수는 어렵지 않게 비비의 페로몬을 짐작할 수 있었다.
“러셀.”
그녀는 사람의 모습으로 고롱고롱 잠든 러셀을 흔들었다.
“일어나 보렴, 물어볼 게 있단다.”
“러셀은 부재중….”
지난나 교수는 부재중입니다. 그녀가 연구 중이라 귀찮을 때 방문객에게 매번 외치는 핑계였다.
인간화를 치른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탓에 앵무새처럼 말을 따라 하니, 말조심의 필요성을 되뇐 지난나 교수가 재차 러셀을 흔들었다.
“러셀, 긴히 물어볼 게 있으니 잠깐만 일어나 주렴.”
“이것들이, 부재중이라는 데도 귀찮게….”
“…그런 말은 따라 하는 게 아니란다.”
“으응.”
이내 눈을 끔벅이며 몸을 일으킨 러셀이 어딘가로 도도도 달려갔다.
납작 엎드린 러셀은 미간을 모으며 비비를 관찰했다. 불규칙하게 숨을 몰아쉬던 아까에 비해서는 안정된 상태였다.
그 옆에 나란히 수그려 앉은 지난나 교수가 느지막이 물었다.
“러셀, 혹시 수인열을 겪을 때 특이한 일은 없었니?”
“특이한 일?”
“예를 들면 페로몬이 막 이상하다든가. …잘 기억나진 않지?”
질문을 들은 러셀이 통통한 볼을 짚으며 생각에 잠겼다.
“페로몬을 사용하는 게 편해졌어.”
“갑자기?”
“으응, 이만큼. 그전에는 되게 어려웠는데. 그러더니 갑자기 사람이 됐어.”
뜻밖의 정보를 수확한 지난나 교수가 턱을 매만졌다.
‘수인열을 거치면서 몸이 페로몬에 적응하게 되는 건가.’
본래 수인은 인간화를 치르고 나서야 페로몬이 발현된다.
그러나 러셀이나 비비처럼 인간화가 지극히 늦어진 경우에는 페로몬이 먼저 발현해 버리니. 지난나 교수는 그제야 비비의 인간화가 러셀보다 훨씬 늦어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초식계 수인의 몸으로 치유계 페로몬을, 그것도 본인의 상처를 치료하는 게 가능한 수준의 능력이니 그럴 수밖에.
‘흠….’
분명 비비는 그녀와 토끼 영토에서 마주쳤을 때만 하더라도 제 손등에 난 상처를 치료하지 못했다.
고로 스스로의 상처를 치료한 방금 전의 경우는, 몸이 페로몬에 적응하며 지금까지 사용하던 능력 그 이상을 발휘한 것과도 다름없었다.
그것은 곧 인간화가 목전이란 의미였다.
* * *
황혼이 내린 후, 창밖이 컴컴한 어둠으로 물들었다.
집무실 책상에 착석한 아힌은 아침까지 드러누워 있던 사람이라곤 믿기 힘들 만큼 착실히 업무에 임했다. 더욱이 보통 때보다 서류를 처리하는 속도가 두 배는 빨랐다.
근면 성실한 상관을 맞닥뜨린 세 명의 보좌관은 오들오들 떨어 댈 뿐이었다.
“괜찮으니까 가 봐.”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떠는 꼴이 거슬렸던 아힌이 손을 휙휙 내저었다. 퇴근하란 의미였다.
파박, 의례상의 말조차 생략한 그들은 번개처럼 서류 가방을 챙겼다. 와중에도 열 맞춰 나가는 모습에서 시선을 뗀 아힌이 종이 더미에 집중했다.
시간이 더디게 흘러갔다.
곁눈질로 힐긋 연무장을 살피자, 흑표범을 거느리며 발차기를 날리던 토끼 장군이 허상처럼 그려졌다.
피곤한가. 핏발 선 눈을 비빈 아힌은 슬슬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한편, 집무실로 오던 이브린은,
“이브린 님!”
“저, 저희 좀…,”
“살려 주십시오!”
마침 퇴근하는 세 보좌관에게 붙들려 하소연을 들어야만 했다. 아힌 님이 너무 정상적이라 무서워 죽겠다는, 그런 호들갑이 근 삼십 분이나 지속됐다.
영 신경 쓰였던 이브린은 유능한 보좌관의 역할을 다하고자 토끼 귀를 쓴 채 집무실 앞에 숨어 있었다.
지나가던 고용인들은 망측해라, 경악한 직후에는 하나같이 얼굴을 붉혔다. 적응하고 나니 제법 귀여운 꼴이었다.
“어쩌다가 머리에 쓰레기를 얹어 놨어?”
정작 아힌은 오물 보는 듯한 눈길을 던진 후에 침실 방향으로 발을 돌렸다.
그래도 복도를 걷는 중에 비식 웃음이 나는 걸 보면, 웃음을 주고자 했던 이브린의 노력이 아주 실패한 건 아니었다.
달칵, 침실로 돌아온 그는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고요한 정적이 머물렀다.
일부러 과장스럽게 프록코트를 벗고, 크라바트를 푸는 소음을 냈지만 엉큼한 눈길은 느껴지지 않았다.
테라스로 나서자 어김없이 난간에 서 있던 퀸이 아힌을 빤히 응시했다. 행여나 아힌이 토끼의 부재를 눈치챘을 때, 곧장 발렌스에게 알리기 위한 감시였다.
그 시선을 걱정으로 오인한 아힌은 낮게 읊조렸다.
“괜찮아. 비비도, 나도.”
도중에 만난 우람한 다람쥐가 비비는 휴식만 잘 취하면 된다고 호언했으니까. 되뇐 아힌이 청명하게 웃었다.
“-괜찮아.”
주문처럼 뇌까린 그가 테라스 문을 닫고, 커튼을 쳤다.
퀸을 뒤로한 아힌은 책상 아래와 소파 바닥, 침대 밑을 의미 없이 들여다봤다.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털썩, 던지듯 침대에 몸을 뉜 그가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봤다.
다 괜찮았다. 괜찮아질 것이었다.
페로몬 발작이 완전히 사라질 듯한 긍정적인 징조도, 상태가 나아지고 있다는 비비도.
탄생일 날 서로에게 입힌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새살이 돋고 흉터도 희미해지겠지.
그때까지 비비의 발밑을 기고 아부를 떨며 비위를 맞출 자신도 있었다.
‘그러니까 괜찮,’
쉴 새 없이 이어지던 생각이 뚝 끊겼다. 째깍, 째깍, 시계 초침 소리만이 침실을 메웠다.
“아힌 님?”
쾅, 급작스레 문을 박차고 나온 아힌으로 인해 경비 기사들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들을 뒤로한 아힌은 길게 이어진 복도를 달렸다.
왜 이렇게 불안할까.
어느덧 비비가 머무는 발렌스의 침실 앞에 도착한 아힌이 간헐적인 숨을 몰아쉬었다.
굳건히 닫힌 문은 바깥에서조차 함부로 들어갈 수 없게끔 자물쇠를 걸어 둔 상태였다.
“송구하지만 아힌 님이라도 들여선 안 된다는 명을 받았습니다.”
문 앞을 지키던 검은 복식의 기사들이 아힌을 경계 어린 눈으로 지켜봤다.
발렌스의 명만 따르는 그림자들답게, 제아무리 아힌이라도 한 합에 쓰러뜨리긴 힘든 실력을 가진 자들이었다.
“안 들어가.”
정확히는 못 들어간다는 말이 맞았다. 또다시 비비가 저를 피하기 위해 물러나다가 상처가 터지면 안 될 일이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들의 음산한 눈빛은 아힌에게서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재밌네.”
주워 온 토끼가 이제는 수장 직속 기사단의 호위를 받고.
간사한 이브린이 비비의 줄로 갈아탈 날도 머지않은 모양이었다. 차기 수장인 아힌으로서도 아직 받아 보지 못한 특례였으니까.
아힌은 검을 뽑으려는 듯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동시에 발군의 속도로 검을 뽑아 들던 기사들이 일순 휘청거리며 자세가 무너졌다. 아힌의 허리춤은 검은커녕 텅 비어 있기 때문이었다.
“놀라긴, 들어갈 생각 없다니까.”
“…….”
“그런 표정을 지으면 더 놀리고 싶어지는데.”
나른하게 웃은 아힌이 툭, 힘없이 문에 이마를 묻었다.
“앞에 서 있는 것 정도는 하게 해 줘.”
긴 속눈썹이 눈 아래에 그늘을 만들었다.
눈을 감으면 고통에 몸부림치던 비비가 떠오르고, 눈을 뜨면 상처가 터진 것도 모른 채 공포 어린 얼굴로 달아나는 비비가 그려졌다.
비비, 실은 나 하나도 괜찮지 않은 것 같아.
하루 종일 괜찮다는 말을 달고 산 게 무색할 만큼. 그리고 그 이상으로 비비도 괜찮지 않을 것이었다.
주르륵, 문에 기대어 미끄러지듯 앉은 아힌이 눈을 감았다. 감히 비비가 이겨 냈으면 좋겠다는 바람조차 가질 수 없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