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ymbiotic Relationship Between the Rabbit and the Black Panther RAW novel - Chapter (62)
토끼와 흑표범의 공생관계 9화(62/75)
반짝 눈을 뜬 나는 나무로 이루어진 낯선 천장을 올려다봤다. 아지랑이처럼 흩어졌던 시야가 점점 또렷해졌다.
열에 시달렸다는 사실이 거짓말처럼 여겨질 정도로 몸이 가벼웠다.
무슨 이유에선지 상처의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고, 혈관을 타고 흐르는 페로몬의 감각이 한층 뚜렷하게 살아났다.
설마 상처가 완전히 나을 만큼 오래 잠들어 있었던 걸까.
멍하니 생각하던 나는 굳은 몸을 풀기 위해 앞발을 내밀었다.
스르륵, 천에서 빠져나온 하얀 팔이 천장을 향해 뻗어졌다. 둔해 보이는 솜 뭉텅이가 아닌,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사이로 램프 불이 갈라졌다.
그제야 실감이 나기 시작하며, 퀸과 지난나 교수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그래서, 지금 이 토끼가 인간화를 치르는 중이라고?’
‘비비 님한테 나타나는 모든 증상이 수인열의 증상과 일치하니까요. 상처로 인해 동반되는 열과는 다릅니다.’
‘…이십 년 가까이 전조도 없다가 갑자기? 어떻게?’
‘이런 특수한 경우를 제가 어떻게 아나요. 비비 님이 깨어나면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겠죠. 지금은 수인열의 고통을 줄일 수 있는 조치를 취할 수밖에요.’
믿기지 않는 현실이 아닌가. 벌떡 몸을 일으키던 나는 황급히 흘러내리는 이불을 끌어 올렸다.
‘도대체….’
어쩌다가 통나무집에서 수인열을 겪게 된 걸까. 얼떨떨한 시선이 책상에 엎드린 채 잠든 지난나 교수에게 머물렀다.
‘지, 진정해.’
흩어진 이성을 되찾고 영리하게 굴 필요가 있었다.
나 비비, 이제는 담력 빼면 시체인 토끼가 아닌가. 겁먹을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우선 일어나자.’
다짐이 무색하게도 툭, 맨살에 닿은 털의 감촉에 기겁한 내가 이불을 감싼 채 빛의 속도로 굴렀다. 침대 아래로 쿵 떨어진 나는 곧장 고개를 들어 털의 정체를 확인했다.
‘카피바라…?’
혹시 러셀인가. 열에 헐떡일 당시 어렴풋이 러셀을 만났던 기억이 스쳤다. 아무래도 내가 추울까 봐 본모습으로 돌아가서 몸을 데워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뭉클한 시선을 보낸 나는 곧 떨리는 손으로 목뒤를 더듬었다. 손끝으로 희미한 굴곡 정도가 아닌, 이질적인 굴곡이 느껴졌다.
‘열꽃 흉터가 깊어졌어.’
나는 시험 삼아 허공에 치유계 페로몬을 운용해 보았다.
페레니움 없이 페로몬을 사용하면 자연스레 새끼 토끼로 돌아가곤 했으니까. 그러나 긴 기다림 끝에도 여전히 사람의 모습이었다.
‘…말도 안 돼.’
인간화라니, 인간화라니…!
실험을 거치고도 쉽게 믿기지 않았다. 그도 그럴게, 평생을 바라 온 소망이 한순간에 이루어졌는데 어떻게 바로 받아들이겠나.
뺨을 쭈욱 쓸어내렸다가, 다시 이불 속에 칭칭 파묻혔다가, 괜히 두리번거리는 둥 불안한 사람이 할 법한 행동을 반복하던 내가 묘안을 떠올렸다.
인간화를 치른 수인은 성수(成獸)로 변하지 않나. 만일 본모습으로 돌아갔을 때, 새끼 토끼의 모습이 아니라면 인간화를 의심할 여지조차 없었다.
‘…본모습으로는 어떻게 변하는 거지?’
지금까지는 페로몬을 사용하면 자동으로 돌아갔는데. 막막히 손만 내려다보던 나는 이곳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카피바라와 시선이 마주쳤다.
“…러셀?”
확인차 이름을 부르자마자 촐랑촐랑 뛰어온 카피바라가 덥석 안겨 들었다.
설치류 중에 가장 크다더니. 상상 이상의 무게에 눌린 내가 휘청거리며 러셀을 안았다.
털에 뺨을 비비며 재회의 인사를 나눈 후, 나는 지난나 교수가 깨지 않게끔 조용히 속삭였다.
“있잖아, 나한테 본모습으로 변하는 방법을 알려 줄 수 있어?”
네가 카피바라가 된 것처럼.
기대를 한 몸에 업은 러셀은 대뜸 힘차게 엉덩이를 흔들기 시작했다.
‘뭐야, 저게.’
이불을 감싼 채 엉거주춤하게 일어난 나는 긴가민가하며 물었다.
“그러면서 페로몬을… 운용하라고…?”
카피바라는 더 설명이 필요 없다는 듯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특유의 무덤덤한 얼굴은 신뢰와 확신을 담아내고 있었다.
‘엉덩이를 흔드는 건 나도 자신 있지만….’
지금이 수치심이나 느낄 때인가.
몸의 움직임에 따라 페로몬의 흐름도 달라지는 건 사실이었고, 당장은 러셀의 가르침 외에는 방도가 없었다.
결심한 나는 엉덩이를 씰룩거려야 하는 토끼 일족의 전통 춤을 췄다. 동시에 조심스레 페로몬을 운용하자, 몸이 빛으로 감싸이며 시야가 점점 낮아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팔을 뻗으니 손 대신 익숙한 앞발이 나타났다.
‘돌아왔다!’
거울, 거울.
홱홱 고개를 돌리던 나는 곧장 구석에 세워진 전신 거울을 향해 발을 굴렀다. 뒤편에서 러셀이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금세 거울 앞에 당도한 내가 긴장을 삼키며 두 발로 섰다.
‘반드시… 성수(成獸)여야만 해.’
반들반들한 거울 속에 새하얀 솜뭉치와 카피바라의 형체가 드리워졌다.
거울을 확인하자마자 말을 잇지 못한 내가 입을 틀어막았다.
‘이럴 수가.’
한껏 심각해진 내 뒤로 오뚝이처럼 기우뚱거리는 갈색 카피바라가 비쳤다. 게슴츠레 뜬 눈이 금방이라도 감길 것만 같았다.
‘……?’
뒤이어 책상에 엎드린 지난나 교수의 코 고는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아!’
그제야 어수선하게 치유계 페로몬을 발산하고 있음을 깨달은 내가 갈무리를 시도했다. 그 즉시 손쉽게 페로몬이 잔잔해졌다.
이전까지는 숨을 끙 참아야 페로몬을 진정시킬 수 있었는데. 급작스러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내가 멀거니 앞발을 번갈아 봤다.
인간화는 수인이 페로몬에 적응하기 위한 과정과도 같다더니. 몸소 체감하고 있으면서도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어째서 이렇게 갑자기…?’
분명 인간화를 치를 만큼 페로몬을 능숙하게 다루진 못했지 않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물구나무는 누워서 건초 먹기일 정도로 몸이 가벼웠고, 아픈 내내 지끈거리던 머리도 개운했다.
털을 헤집으며 페로몬을 점검하던 나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감당하기 힘들 만큼 넘치던 페로몬이, 딱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적당한 흐름을 보이고 있었다.
이상하단 말이야. 골똘히 고민하던 나는 문득 한 가지 가설을 떠올렸다.
‘그때마다 나는 치유계 페로몬을 빨아들이는 듯한 감각을 느꼈어.’
…실제로 나도 아힌에게 페로몬을 전달하는 게 아닌, 빼앗기는 느낌이었지. 그랬기에 더더욱 위기감이 들기도 했고.
추측대로라면 감당하기 힘든 치유계 페로몬을 반절이나 빼앗기면서 인간화에 이르렀을 가능성이 컸다.
일순 목을 물리는 그 순간을 떠올려 버린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는데.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온몸에 오한이 들며 식은땀이 날 것만 같았다.
공황 속을 헤엄치는 와중, 툭, 무언가가 몸을 치는 감각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뭐야!’
눈을 뜨자 그새 수마에서 벗어난 카피바라가 보였다. 미동 없이 선 내가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러셀, 이거 봐.’
애써 반색한 나는 앞발로 자신만만하게 거울을 짚었다.
거울 속에는 주먹만 한 새끼 토끼에서 주먹 두 개를 붙인 크기로 변모한 토끼가 자리했다. 비록 상상 속의 멋들어진 성수(成獸)는 아니었지만.
‘뭐, 그래도 얼굴은 조금 똘똘해진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이 비비 님께서 인간화를 치렀다 이 말씀이야.
의기양양해진 내가 카피바라를 향해 배를 쭉 내밀며 성과를 뽐냈다. 당장 누구에게라도 자랑하고 싶어 온몸이 근질거렸다.
인간화가 늦어졌다는 비슷한 아픔 때문인지, 러셀은 제 일처럼 기뻐하며 힘찬 박수를 보냈다.
‘러셀…!’
그 격한 반응에 감동한 나는 손바닥을 마주치자는 의미로 앞발을 내밀었다. 그러자 흥에 겨운 카피바라가 두두두 달려들었다.
‘잠깐, 러셀, 너무 빨라.’
뭔가 불길한데.
‘악!’
퉁, 막을 새도 없이 카피바라의 머리와 충돌한 내가 뒤로 튕겨 나갔다.
막 깨어났을 때도 달려들어 품에 안기더니. 아무래도 러셀은 인간화를 치른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탓에, 몇십 킬로그램에 달하는 제 본모습을 아직 새끼 카피바라라고 여기는 듯했다.
그래, 내 앞길이 평탄할 리가 없지. 나무 바닥을 데굴데굴 구른 나는 통나무 벽에 부딪히며 장렬하게 눈을 감았다. 인간화를 치른 이후 첫 기절이었다.
* * *
깨어났을 때는 또다시 하루가 지난 밤이었고, 자연스레 본모습에서 사람의 외형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수인은 본모습으로 반나절 이상 지내지 못하는 것을 경험해 볼 줄이야. 감격스러움에 한바탕 눈물을 쏟은 나는 겨우 몸을 추스른 후, 지난나 교수가 건넨 두꺼운 의복과 은색 망토를 둘렀다.
“방금 뭐라고요? 본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엉덩이를 흔들어야 하냐고요?”
대강의 자초지종을 들은 그녀는 우스워 죽겠다는 듯 배를 잡고 깔깔 넘어갔다.
러셀의 방식이 특이한 거지, 실제로는 몸을 흔들 필요 없이 페로몬을 뒤흔들 듯 운용하면 된다고. 자신도 처음에는 러셀이 사람의 모습으로 씰룩거릴 땐 뭘 하는 건가 싶었다고 설명했다.
‘그럴 줄 알았어.’
뭔가 많이 이상하다 싶더니. 화롯불 앞에 앉은 내가 가자미눈을 하는 순간, 러셀이 내 망토 속에서 쏙 튀어나왔다. 사람으로 돌아온 이후 품에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중이었다.
“러셀, 너어-….”
쓴소리를 하려 입을 뻐끔거리니, 대뜸 왜 편지를 쓰지 않았냐는 질문이 돌아온 탓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토끼의 몸으로는 편지를 쓰기가 벅찼거든….
“나쁜 새.”
그때 벌떡 일어난 러셀이 창가로 달려갔다. 동시에 의자를 박차고 일어난 지난나 교수가 내 어깨를 눌렀다.
“비비 님, 잠깐만요.”
차르륵, 커튼을 친 그녀가 빼꼼 고개만 내밀어 창밖을 내다봤다.
확인하지 않아도 틈 사이로 얼핏 보인 물빛 머리칼과, 나쁜 새라는 단서로 미루어 퀸임을 알 수 있었다.
지난나 교수가 막아선 건 내가 맹수계 수인에게 느끼는 공포심을 염려한 거겠지. 이유 모를 불안감에 손을 꼼지락거리자, 그 행동을 발견한 러셀이 비장한 얼굴을 했다.
“내가 혼내 줄게.”
“러셀, 안 돼!”
저 매가 얼마나 성격이 더러운데. 아니나 다를까, 커튼으로 파고들었던 러셀은 금방 도로 돌아와서 내 품에 안겼다.
“새의 눈에는 악마가 사나 봐.”
이만큼 뾰족해, 속닥거린 러셀이 식은땀을 주르륵 흘렸다.
그 평가에 깊이 공감하고 있자니, 지난나 교수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비비 님. 퀸 님이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데, 가능할까요?”
괜찮아, 늘 봐 오던 퀸인걸.
그러한 생각과는 다르게 대답은 쉽게 튀어나오지 않았다. 손끝이 덜덜 떨리며 한기마저 들었다.
진땀이 배어난 손을 망토에 닦자, 러셀이 손을 꼭 잡아 왔다. 그 작은 온기에 기댄 나는 한참의 망설임 후에 허용 가능한 한 가지 방편을 떠올렸다.
“자, 러셀. 밤마실이나 다녀오자꾸나.”
“지난나 교수, 나는 여기 있을래.”
“…그럼 이 어머니가 너무 외롭잖니.”
약 오 분 후. 러셀을 안아 든 지난나 교수가 자리를 피해 줬다.
남겨진 나는 창문 아래에 슬며시 자리를 잡았다. 벽에 기대어 무릎을 모으고 앉자, 퀸도 바닥에 주저앉는 모양인지 털썩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망할 토끼라는 중얼거림을 애써 무시한 내가 입술을 열었다.
“…지난나 교수님께 대충 전해 들었어.”
이곳이 돼지 영토이며, 맹수를 본 내가 흥분할 것을 염려한 발렌스 님의 지시 아래, 퀸이 옮겨온 것까지.
“고마… 악!”
콩, 감사 인사를 뱉기도 전에 머리 위로 단단한 서간지가 떨어졌다.
‘곱게 좀 주면 어디가 덧나?’
속으로만 툴툴거린 내가 서간지를 펼쳤다. 발신인은 발렌스 님이었다.
[직접 얼굴을 보고 말해 주고 싶건만, 편지로밖에 전달할 수 없는 게 아쉽구나.우선 사경을 헤매는 너를 그리 보낸 것을 너그러이 양해해 주렴. 부끄럽게도 네가 또 맹수계 수인을 맞닥뜨려 상처가 더 심각해지면 어쩌나 두려웠던지라, 그 위험부터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거든.
그리고 퀸을 통해 돼지 영토에서 인간화를 치른 소식을 전해 들었단다. 많이 두렵고 힘들었겠지만, 먼저 축하한다는 말부터 전하고 싶구나.]
서간지 속 내용은 그녀답지 않게 장황하면서도 몇 번이나 망설인 듯한 흔적이 묻어났다.
나는 서간지 사이에 끼워진, 연보라색 보석으로 만든 꽃을 집어 들었다.
어쩐지 종이치고 너무 묵직하더라니. 편지에 의하면, 흑표범 영토는 갓 인간화를 치른 수인에게 꽃을 선물하는 게 관례라고 설명되어 있었다.
[…더욱이 평생을 가도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말았지. 그러나 내가 줄 수 있는 값진 건 선택과 자유뿐이라는 사실이 씁쓸하구나.]이후로 나는 말없이 긴긴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새끼 토끼로 살아온 네게는 필요한 것이겠지. 마차를 탈 때면 쉴 새 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문득문득 비치는 배움에 대한 갈망을 모르지 않으니.]중간중간 내가 코를 훌쩍이는 소리와, 창문을 열어 둔 탓에 새어 드는 풀벌레 소리만이 정적을 물들였다.
[마지막으로 아가, 야윈 새끼 토끼가 그레이스가(家)에 온 것은 축복이자 선물이었단다. 네가 걸을 길을 존중하며, 언제까지고 기다리마. 너의 발렌스 님이.]툭, 투둑. 눈가에 한가득 차오른 눈물이 서간지를 적셨다. 망토로 눈을 꾹꾹 누른 나는 다시 처음부터 편지를 읽어 내렸다.
발렌스 님은 우회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한 번 심어진 공포감은 한순간에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며, 생명의 위협이 없는 곳에서 안정을 취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또 그와 관련한 내 선택을 존중하며, 전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임을 알렸다.
머리가 멍해진 나는 그저 멀리 타오르는 화롯불을 바라봤다. 현실을 마주할 시간이었다.
‘모르겠어….’
아힌이 보고 싶고, 마음은 당장이라도 그레이스저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아힌과 이브린의 티격태격하는 소리에 잠에서 깨고, 메이미의 현란한 손길에 강제로 채비를 마치고.
발렌스 님과의 티타임 후에는 애쉬, 바라와 산책을 나서며 오전을 마무리하곤 했다.
그다음 할아버님과의 혹독한 수업에 임한 후, 녹초가 되어 침실로 돌아가면 치근대는 아힌을 발로 차 주는.
얼마나 지났다고 그레이스저에서의 일상이 한없이 그리웠다.
그러나 눈감으면 일상은커녕 끔찍한 감각이 어둠 속에 그려지고, 눈을 뜨더라도 그 환상은 여전했다.
목을 뜯길 때 느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살려 달라고 나도 모르게 빌어 버린 내 모습이. 언제든 목숨을 거둬 갈 수 있는 송곳니. 그리고 달아나는 나를 보는 아힌의 눈에 어렸던 물기가.
이런 상황에서 돌아가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모두에게 공포감과 혐오에 물든 얼굴을 보여 주고 말겠지.
‘보통의 초식계 수인은 맹수계 수인이 단지 불편한 사람쯤으로 느껴질 뿐이죠.’
지난나 교수는 내가 맹수계 수인에게 느끼는 공포가 일반적인 초식계 수인에 비해 훨씬 심한 편이라 일렀다.
아마 평생 새끼 토끼로 살아왔기에 한층 본능적이며, 적절한 시기에 배워야 할 것들을 배우지 못했기에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아힌 그레이스는,”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자니, 창밖에서 퀸의 까칠한 음성이 들려왔다.
“-더 이상 페로몬 발작이 나타나지 않아. 주치의도 확신하는 눈치고, 실제로 그 일이 있었던 이후로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으니. 네가 죽을 뻔한 대신 그놈이 살았다고 보면 돼.”
“…….”
“그러니까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말고 네 앞가림이나 똑바로 하시지. 지금 차기 수장의 처지나 걱정할 입장은 아닐 텐데.”
가장 기다린 소식이긴 한데, 꼭 위로와 격려를 저런 식으로 해야 하나. 성격답게 아힌의 호칭마저 막 부르고 있었다. 더욱이 퀸은 짜증 나는 토끼라는 말을 빼먹지 않고 덧붙였다.
‘경우 없는 새 같으니라고.’
눈을 날카롭게 뜨고 있자니, 머리 위로 작은 종이쪽지가 툭 떨어졌다.
“이건…,”
“흑표범 수장이 전해 주라더군. 토끼 영토에 있을 때 아힌 그레이스가 네게 보낸 서신이라던데.”
토끼 영토에 있을 때라면, 아힌이 내가 따라간 줄 모르고 그레이스저로 부친 서신인 건가.
그러고 보니 나를 버리고 떠나기 전에 편지를 쓰라는 둥 실없는 소리를 늘어놨던 것 같기도 했다.
알찬 내용일 거라곤 기대도 안 한 나는 잘 접힌 종이쪽지를 펼쳤다.
[금방 갈게]이게 뭐라고. 울컥 감정이 복받친 내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손등으로 눈을 꾹꾹 눌렀으나, 오히려 봇물 터지듯 흘러나온 눈물이 옷자락을 축축하게 만들었다.
결국 눈물을 주체 못 한 나는 어린아이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울고 말았다. 외롭고 혹독한 겨울의 시작이었다.
* * *
그레이스가(家)의 아침이 밝았다.
뚜벅뚜벅, 발렌스의 침실 앞에서 걸음을 멈춘 이브린은 야트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병상에서 일어난 이래, 아힌의 잠자리는 비비가 머무는 침실 앞이 되어 있었다.
“이브린 님을 뵙습니다….”
옆에서 대기하던 유안은 눈치를 살피며 슬그머니 자리를 비켰다. 왠지 이브린이 이상한 짓을 할 것만 같은 예감이 든 탓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브린은 문에 기대어 앉아 잠든 아힌에게 살짝 다가섰다. 말릴 새도 없이 그의 손에 있던 토끼 귀 장식이 아힌의 머리에 살포시 안착했다.
질린 낯을 한 발렌스의 전속 기사들은 옆으로 세 걸음 물러났다.
‘떨어지자고.’
‘진중한 얼굴을 해선 예고도 없이 저러니…. 미칠 노릇이군.’
미친 자가 많은 그레이스가(家)에서도 단연 으뜸인 이브린과 엮여서 좋을 게 없었다.
“아힌 님, 일어나십시오.”
“-왜 머리에 쓰레기를 얹어.”
“토끼 귀입니다. 일족을 바꾸시면 토끼님이 한 번쯤은 돌아봐 주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럼 쓰고 있지, 뭐.”
막 깨어나도 청아한 얼굴인 아힌이 귀 장식을 정돈했다. 이어서 제복을 털며 일어나던 그는 복도 한편을 돌아봤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자의로 인간 모습이 된 퀸이 서 있었다. 그것은 곧 언어로 알려야 할 전달 사항이 있다는 의미.
완전히 몸을 틀어 마주한 아힌은 느릿하게 퀸을 훑었다.
퀸은 사람으로 돌아오더라도 늘 간단한 셔츠에 경장 바지 차림을 고수했건만. 오늘은 베스트에 타이까지 착용하고, 대충 묶던 물빛 머리카락도 느슨히 풀어 내린 상태였다.
아힌이 가만히 기다리자, 머리 위의 귀 장식을 더럽다는 듯 흘긴 퀸이 말문을 뗐다.
“이번 비행은 조금 길어질 것 같아서.”
새 수인인 퀸은 아주 그레이스저에 머무는 건 아니었다. 늘 바깥 생활을 했으며, 간혹 저렇게 말하고는 석 달 후에나 고개를 들이민 적도 있었다.
그래도 언제나 둥지로 돌아왔기에, 딱히 의미를 두지 않은 아힌이 한 박자 늦게 물었다.
“-어디로 가?”
“네가 언제 그런 걸 물었었나.”
까칠하게 답한 퀸이 대뜸 손에 있던 작은 종이쪽지를 던졌다. 가볍게 낚아챈 아힌이 눈썹을 들었다.
“뭔데?”
이미 제 할 말을 다 한 퀸은 답 없이 창틀을 짚고 올라섰다. 매로 돌아가기 위해 페로몬을 운용하는 그의 뒤로 아힌의 저음이 꽂혔다.
“죽지 마.”
“…그래.”
“딸기 서리하다가 잡히지도 말고.”
끝까지 재수 없는 새끼,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떠나는데. 눈을 부라림으로써 답을 대신한 퀸이 순식간에 매로 변했다.
삐이-
저택 상공을 크게 한 바퀴 돈 퀸은 돼지 영토를 향해 날갯짓했다.
매의 뒷모습이 구름에 가릴 때까지 바라보던 아힌은 초라한 종이쪽지를 만지작거렸다.
어울리지 않게 전언이라도 남긴 건가. 팅, 튕긴 쪽지가 높이 떠올랐다가 손에 안착했다.
“…….”
팅, 팅, 의미 없는 손장난을 반복하던 아힌은 일순 미간을 확 구겼다.
결국 인성마저 새로 변한 게 아니고서야, 제아무리 퀸이라도 이런 시기에 멀리 떠난다는 사실이 퍽 의심스럽게 다가왔다.
그제야 굳어 있던 머리가 돌기 시작한 그는 멀찍이 선 발렌스의 전속 기사 두 사람을 훑었다. 탁하게 물든 시선을 받은 기사단장이 바짝 긴장했다.
“…새끼 토끼의 호위에 기사단장을 붙이는 건 어머니치곤 조금 유난스러운 짓이지.”
그 유난이 요즘은 자주 있는 일이었기에 미처 놓치고 말았지만.
또 환자를 돌보는 사람치곤 꼭 아힌이 나타나는 시각에만 문을 열고 나오던 다람쥐 의관.
곱씹어 보면 마치 비비를 치료 중이란 것을 증명하듯 꼬박꼬박 얼굴을 비추곤 했다.
‘그리고….’
뒤늦게 요 며칠 잊고 있던 존재를 떠올린 그가 이브린을 돌아봤다.
“-애쉬는?”
“예?”
“요즘 안 보이던데.”
“평소와 같이 규칙적인 생활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규칙적이라니, 왜 규칙적이죠?”
“말한 건 넌데 왜 나한테 물어.”
워낙 정신이 없었던 탓에, 그제야 위화감을 느낀 이브린이 턱을 매만졌다.
이상하지 않은가. 비비가 병상에 누운 것치고는 애쉬가 지나치게 얌전했다. 아힌처럼 침실 앞을 서성여도 모자랄 판이건만.
마치 애쉬는 아무 일도 없단 듯 제시간에 일어나서 외출하고, 취침 시간이 되면 꼬박꼬박 이브린의 침실로 돌아오고 있었다. 늘 뒤를 따르는 바라도 유독 고분고분한 태도를 보였지 않나.
“수,”
그가 지극히 수상하다고 주장하려는 찰나, 아힌은 지체 없이 창문을 뛰어넘어 사라졌다.
“아힌 님,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창밖을 내다보던 이브린은 아차 싶은 마음에 석상처럼 선 기사들을 돌아봤다.
“…아힌 님께서 토끼 귀 장식을 빼고 가셨던가?”
“아뇨, 쓰고 가셨습니다.”
“나중에 목이 잘릴지도 모르겠군요. 그러게 싫다는데 왜 저한테 그런 장난을 시키십니까? 책임지십시오.”
“죄송합…, 예에?!”
황망히 선 기사들을 뒤로한 그가 아힌이 사라진 방향으로 달려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