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ymbiotic Relationship Between the Rabbit and the Black Panther RAW novel - Chapter (67)
토끼와 흑표범의 공생관계 14화(67/75)
장로회.
그레이스가(家)와 연을 댄 자의 모임으로, 주로 정계에서 은퇴한 이들로 이루어진 것이 장로회였다.
아힌은 장로회를 꼰대 소굴이라 조롱했지만, 실제로 그들이 흑표범 영토의 귀족 사회나 사교계에 미치는 영향은 현저했다.
현 수장인 발렌스도 영토의 중대한 문제를 결정할 때는 비공식적으로 장로회의 승인을 거치곤 했다.
그리고 현재.
장로회에서 가장 혈안이 되어 있는 사안은 그레이스가(家)의 후사 문제였다.
지금까지는 차기 수장, 아힌 그레이스의 구실 불구설이든, 토끼와의 염문설이든 코웃음 치며 넘겨왔으나…. 아힌의 나이 앞자리가 바뀌니 슬슬 불안이 고개를 든 탓이었다.
후계 문제가 빼놓을 수 없는 중대사인 그레이스가(家)는 대대로 혼인을 빨리 치르는 편이었다.
그러나 도대체. 왜. 어째서.
두 번째 성인식을 치르고도 이 년이나 흐른 이 시점까지 혼인은커녕 약혼 소식마저 들리지 않는 건지. 그렇다고 감히 차기 수장인 아힌의 멱을 흔들며 구실 여부를 추궁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따라서 수장인 발렌스에게 전서로 자문을 구했으나,
[정신조차 제구실을 못 하는 아이라. 때가 되면 알아서 하겠지요.]우아한 필체로 돌아온 답변은 장로회 일원이 뒷목을 잡기에 딱 좋은 내용이었다.
다른 방면으론 책잡힐 일 없이 완벽하면서, 어찌 후계 문제에서는 나 몰라라 식의 태평한 태도인지 모를 노릇이었다.
고로 최후의 방편은 문제 제기뿐.
그를 위해 그레이스가(家)로 파견된 장로회의 신입 보좌관, 레이먼은 공손히 무릎을 모았다.
접객용 소파에 앉은 그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조심스레 눈을 굴렸다. 미친놈이란 오명이 붙은 소문과 달리, 아힌의 집무실은 정갈하고 깔끔했다.
흘끔거리는 시선이 집무 책상에 앉은 아힌에게 닿았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게 탄생 연회에서 케이크를 올려다보는 모습이었는데.
가까이서 보게 된 아힌은 상상과는 사뭇 달랐다.
의복도 견장 달린 로브까지 걸친 완벽한 차림새였으며, 집중한 채 무언가를 작성하는 모습은 진중함을 더했다. 분명 영토의 사활이 걸린 사안이 아닐까.
붉은 눈에서 언뜻 읽히는 시린 기운 하며, 측방에 세워진 화려한 장검은 레이먼이 그려온 차기 수장의 표본이었다.
저런 분의 뒤로 어찌 미친놈에 토끼 애호가, 구실 불가도 모자라 개차반이란 속어까지 따라붙은 걸까.
넋 놓고 바라보던 그는 일순 옆에서 기묘한 기운을 느끼곤 휙 고개를 틀었다.
“장로회에서 나온 분이십니까?”
“으악!”
이브린의 무표정한 얼굴을 코앞에서 마주한 레이먼이 몸서리쳤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지금 무척 중한 서류를 작성 중이셔서.”
벌렁거리는 심장을 누르는 레이먼을 뒤로한 이브린이 아힌에게 다가섰다.
사각사각, 펜촉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브린은 그가 심혈을 기울여 작성 중인 서류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벨헬름 아카데미 입학 신청서였다.
“…반려당할 거란 것에 제 일기장을 겁니다.”
“역시 신분 조작을 해야 하나.”
“얼굴을 바꾸지 않는 이상 금세 들통나시겠죠. 아힌 님 말고 제가 대신 가겠습,”
“입.”
“예.”
레이먼은 은밀히 무언가를 논하는 두 사람의 대화에 청각을 곤두세웠다. 신분 조작에 보좌관의 희생정신이라니, 역시 보통 사안이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브린의 높낮이 없는 진지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포상은 없습니까?”
“무슨 포상?”
“납치에 성공한 것은 접니다.”
이브린은 태연스레 배낭을 메는 시늉을 보였다.
마치 사람을 짊어지고 납치한 듯한 시늉이 아닌가. 평생을 반듯하게 살아온 레이먼의 붉은 동공이 흔들렸다.
그러나 마나 입매를 매끄럽게 끌어 올린 아힌이 펜을 휘휘 돌렸다.
“이번 해는 봉급을 두 배로 쳐 주지.”
그 청량한 미소가 한없이 악랄해 보이기 시작한 레이먼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슥, 입학 신청서를 이브린에게 건넨 아힌은 얼빠진 레이먼에게 시선을 옮겼다.
“용건이 뭔데.”
“…….”
“용건이 뭐냐고.”
격식이라곤 일 할도 없는 물음이 저를 향한 것임을 깨달은 레이먼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호, 혼약 건을 논의하고자…!”
아차, 기에 눌려 외치던 그가 입을 가로막았다. 장로회에서 차기 수장을 잘 구슬려 제대로 된 대답을 얻어 내라 신신당부했건만. 본론부터 꺼내고 만 꼴이었다.
“죄송하지만… 아힌 님께서는 혼약을 논할 겨를이 없으십니다.”
눈을 깜박인 이브린이 레이먼을 향해 호언했다.
이판사판이라 생각한 레이먼은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무, 물론 늑대 영토와의 분쟁도 정리하는 중이고, 정무로 인해 바쁘신 것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하나 저희 장로회의 입장에선 혼약 또한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문제입니다. 정 사안을 미룰 시 정식 회의를 요청하는 수밖에…,”
“재차 죄송합니다만, 혼약보다 토끼님의 문제가 더 중한 탓에.”
“토, 토끼님이 뭡니까?”
“경계의 숲에서 주워 온 토끼입니다.”
“……?”
반려동물을 말하는 건가. 도무지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레이먼이 입을 달싹였다.
이브린은 태연히 들고 있던 입학 신청서를 가리켰다.
“아힌 님께서는 토끼님의 수발을 드느라 바쁠 예정이시니까요.”
감히 차기 수장을 그런 식으로 비하하다니. 천인공노할 하극상을 마주한 레이먼이 홱 아힌을 돌아봤다.
경악 어린 시선을 마주한 아힌은 조금 수줍어하며 턱을 괬다.
“-발밑을 기는 게 빠졌어.”
미친. 살면서 처음 속으로 욕지거리를 읊조린 레이먼은 어쩐지 현기증마저 느껴지는 듯했다.
“토끼님께서 방문을 원하십니다.”
그런 그가 정신을 차릴 겨를도 없이 똑똑, 문지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집무실 한편에 나란히 앉아 있던 보좌관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힌의 책상에 깨끗한 쿠션을 올려두고, 창을 열어 잉크와 서류 특유의 냄새를 환기시켰다.
“……?”
레이먼은 제가 왔을 때보다 훨씬 극진히 준비하는 이들을 어리둥절하게 둘러봤다.
끼익, 이윽고 문이 열리며 나타난 건 메이미와 흑표범 일가족, 그리고 애쉬의 머리에 찰싹 달라붙은 솜뭉치였다.
위풍당당한 동물들의 입장을 목격한 레이먼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친히 걸음을 옮겨 비비를 들어 올린 아힌은 애쉬를 빤히 내려다봤다. 내내 정문에서 기다린 정성을 높이 사 비비를 양보했더니, 돌아온 건 왜 빼앗느냐는 사나운 눈초리뿐이었다.
내 건데. 아힌은 비비 몰래 살짝 혀를 내민 후 집무 책상으로 돌아가 앉았다.
“이 거치적거리는 건 뭔데?”
검지를 뻗은 그는 비비가 걸친 발레용 튜튜를 건드렸다. 찰싹, 곧장 앞발로 불경한 검지를 쳐 낸 비비가 쿠션에 안착했다.
‘토끼 수인… 인가?’
레이먼은 흔들리는 눈으로 아힌과 이브린, 토끼를 번갈아 봤다.
“가주님께 인사를 올리고 오는 길이십니까?”
“아, 전속 화가를 만난 모양이군.”
더욱이 토끼는 앞발로 관자놀이를 짚으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을 뿐인데. 아힌과 이브린이 그 몸짓을 단번에 해석하는 광경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토끼 애호가는 헛소문이 아니었나….’
아힌의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진 건 물론, 그는 큼지막한 체구를 구겨 엎드리면서까지 토끼와 시선을 맞추고 있었다.
“-비비, 나 보러 왔어?”
느슨한 음성으로 물은 아힌이 팔에 머리를 비스듬히 묻었다.
비비는 탱탱 부은 눈 때문에 사람으로 돌아가지 않은 것에 감사했다. 아니었으면 초 단위로 붉어지는 얼굴을 들켰을 테니까.
큼큼, 헛기침을 하며 앞발을 가다듬은 그녀가 배낭을 메는 시늉을 했다.
“오늘 아카데미에 돌아가기로 어머니와 대화를 끝냈다고?”
해석하자마자 아힌의 미간이 바득 일그러졌다.
“중간 방학도 못 기다려. 나도 같이,”
찰싹, 비비의 앞발이 그의 입술에 명중했다.
말문이 막힌 아힌은 재차 반박을 시도했다.
“막아도,”
찰싹,
“소용 없,”
찰싹.
네 이놈. 비비는 필살기를 날려 턱없는 주장을 미연에 방지했다.
단호한 앞발이 책상 한편에 쌓인 서류의 산과 보좌관들을 가리켰다. 각자의 자리에서 할 일부터 똑바로 하자는 엄포였다.
“…짜증 나, 너.”
엎드린 몸을 일으킨 아힌이 못마땅한 심정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내 전부를 바쳤는데, 흥미가 떨어지니 버리는 거네.”
신파 연극에나 나올 법한, 딱 오해 사기 좋은 발언이었다.
기겁한 비비가 미심쩍은 표정이 된 보좌관들과 손님인 레이먼을 향해 앞발을 내저으며 해명했다. 실상은 중간 방학까지 한 달도 채 남지 않았건만, 그 헤어짐마저 싫다고 투정 부리는 실정이었다.
“이브린, 주방장한테 여기 살찐 토끼가 있다고 전해.”
‘이브린, 전하기만 해 봐.’
애꿎은 이브린에게 비비와 아힌의 날 선 시선이 꽂혔다. 뒷짐 진 이브린은 담담히 화창한 창밖을 돌아봤다.
토끼와 흑표범의 대치가 팽팽하게 이어지는 지금, 선택의 순간이었다.
‘이브린, 주군과 수하의 관계에 영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어머니가 말씀하시길, 이브린가(家)의 생존 법칙은 권력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하물며 지배계 페로몬은 사람을 죽이는 종류고, 치유계 페로몬은 사람을 살리는 종류가 아닌가.
유사시에 자신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은…. 눈을 감았다 뜬 그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아힌 님, 실질적으로 아카데미 입학은 무리임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토끼님, 아카데미로 돌아갈 준비는 이 유능한 이브린이 돕겠습니다.”
토끼의 권력으로 편승한 이브린이 조심스레 비비를 양손에 올렸다.
“입학 선물도 드리지 못했는데, 하계 교복과… 이제는 따로 전령 새를 두는 것도 괜찮겠군요.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달칵, 묵례한 이브린은 비비와 함께 문을 열고 집무실을 나섰다.
덩그러니 남겨진 아힌을 향해 콧방귀를 뀐 애쉬가 후다닥 비비를 따라나서자, 새끼 흑표범 두 마리가 빠르게 뒤를 따랐다.
바라는 홀대 받는 아힌을 짠하게 훑은 후, 양발로 조용히 문을 닫고 뒤따랐다.
주요 인물이 전부 자리를 뜬 집무실에 묵직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레이먼은 본능적으로 이곳에 머물러선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입을 여닫은 그가 긴긴 정적을 깨뜨렸다.
“…저희 장로회의 입장은 이게 전부입니다. 소, 송구하나 이만,”
“서.”
단어 하나에 몸이 얼어붙은 레이먼의 등으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토끼를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온도의 붉은 눈이 그에게 꽂혔다.
찍소리 못한 채 차렷 자세를 취한 레이먼을 훑은 아힌이 방긋 웃었다.
“방금 봤어? 토끼가 드디어 나한테 마음을 연 거.”
마음을 닫은 건 아니고?
전혀 공감하지 못한 보좌관들과 레이먼이 입을 오물거렸다. 오히려 다툼을 벌인 탓에 마음을 닫았다고 보는 편이 맞았다.
그런 그들의 반응은 안중 밖인 아힌이 송곳니를 느릿하게 만지작거렸다.
“원래는 내 입을 때리는 걸 꺼렸는데, 아무렇지도 않았잖아.”
“…….”
“-더 때려 주고 가면 좋았을 텐데.”
미친, 미친. 레이먼은 속으로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 불경한 욕을 되뇌었다.
“그러니까 장로회에 전해. 당분간 혼약에 대해서는 입 다무는 게 좋을 거라고.”
“그, 그게 무슨…!”
“괜히 혼약을 들먹이다 토끼가 도망치기라도 하면 장로회든 뭐든 없애 버릴 줄 알아.”
“…….”
“가 봐.”
쫓겨나듯 집무실을 나선 레이먼이 마른세수를 했다. 장로회에 무엇부터 전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차기 수장은 참신한 미친놈이었습니다?
맞는 것을 좋아합니다?
웬 토끼에게 눈이 먼 것 같습니다?
뭐가 되었든 장로회에 풍파를 불러일으킬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 * *
타원형 책상이 설치된 회의장.
쾅, 장로회 일원은 경악을 금치 못하며 책상을 내리쳤다.
신입 보좌관, 레이먼이 가져온 정보를 취합하면 하나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다.
약 이 년 전, 아힌 그레이스가 토끼 수인에게 홀랑 넘어갔단 가십 기사가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
“…그래서 저를 여기까지 부르신 겁니까? 가십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려고?”
턱을 괸 룬이 길게 하품했다.
“그게 기밀?”
“귀한 발걸음에 감사드립니다. 비록 가십이나, 흑표범 영토의 중대사이니 부디 증언을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수염을 쓸어내린 노신사가 신문 한 부를 내밀었다. 룬은 벌써 이 년이나 지난, 색 바랜 신문을 펼쳐 들었다.
「토끼와 흑표범, 그리고 사자」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본 그에게서 비식 바람 새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부스럭, 기사를 읽은 후 신문을 접는 룬의 손끝에 회의장 내 모든 이들의 시선이 박혔다.
“-반은 사실이네요.”
“……!”
룬은 나이 지긋한 노인들이 맞추기라도 한 듯 입을 틀어막는 광경을 훑었다.
“그래서 묻고 싶은 게 뭔데요? 토끼 수인에 대해?”
차마 대답도 못한 그들이 체통도 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꼴깍 마른침 넘어가는 소리가 바깥까지 울렸다.
놀리듯 뜸 들인 룬은 오랜만에 하얀 머리카락을 떠올렸다.
“예뻐요.”
맹수계 영토엔 없는 보라색 눈동자와 신기한 생김새가.
“멋있고,”
어울리지 않게 부딪치고 보는 성미가.
“웃기기도 하고,”
시시때때로 바뀌는 표정이.
“뭐, 힘이야 말할 것도 없죠.”
치유계 페로몬은 웬만한 영토의 수장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능력이었다.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답변이지 않나. 두루뭉술한 설명에 안달 난 장로회 일원이 레이먼을 곁눈질했다.
사실이냐는 무언의 추궁 앞, 푹신하게 생긴 토끼밖에 못 본 레이먼으로선 어깨를 으쓱이는 대답이 최선이었다.
“적어도 그레이스 경께는 과분한 토끼예요.”
의자에서 일어난 룬은 털레털레 걸어가 회의장 문 앞에서 멈췄다.
“아는 건 전부 말씀드렸으니, 앞으로 이런 일로는 뵐 일 없기를 바랍니다.”
초점 없는 금안 위로 일순 날카로운 기운이 스쳤다. 제아무리 장로회라지만 타 일족, 심지어 수장의 직계를 오가라 하기엔 애매한 사안이기도 했다.
“아, 그리고 그레이스 경이야 모르겠지만 저는 멀쩡합니다.”
구실요, 회의장을 나서던 룬이 고개를 쏙 내밀며 덧붙였다.
그의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도 회의장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일족이 다르더라도 최소한 맹수계 수인이어야 할 것 아닙니까.”
누군가 쥐어짜 내듯 말한 목소리에 장로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토끼 일족과 흑표범 일족이라니. 들을수록 머리가 지끈거리는 사안이었다.
물론 일족이 다르다고 자손에게 신체적 결함이나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장로회가 혼약에 심혈을 기울이는 이유가 무엇인가. 장차 흑표범 영토를 이을 차기 수장, 즉 후계를 위해서였다.
만약에라도 토끼 일족과 자손을 보게 된다면. 일족 고유의 눈동자 색은 고사하고, 본모습이 토끼나 흑표범일지조차 정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가령 보라색 눈동자를 지닌 흑표범 수인을 잉태해도 문제였다. 일족을 대표하는 수장의 눈동자가 토끼 일족처럼 보이게 되니까.
그렇다고 붉은 눈동자를 지닌 토끼 수인을 후계 자리에 앉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물며 붉은 눈동자를 지닌 흑표범 수인을 잉태할 확률도 낮을뿐더러…. 가장 큰 문제는 나약할 게 뻔한 토끼 수인의 페로몬이었다.
은연중에 초식계 수인의 페로몬은 한계치가 존재한다는 편견을 가진 장로회 일원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누구보다 강해야 할 수장의 후계가 근본 모를 토끼 수인의 페로몬을 가져선 안 될 일이었다.
더욱이 잘 구슬려 이중 결혼을 하는 것도 무리가 있어 보였다. 발렌스 수장도 정부를 두지 않는데, 구실 불가설이 떠도는 아힌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뜬 장로회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렌스 수장께 정식 회의를 요청하는 것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 * *
흑표범 영토를 거친 마니언츠가(家)의 마차가 토끼 영토로 막 넘어왔을 때였다.
덜커덩, 휘청거리던 마차가 완전히 멈춰 섰다.
“무슨 일이지?”
문을 열고 내려선 레스틴이 마부를 향해 물었다.
“송구합니다, 갑자기 바퀴 나사가 풀려서… 오는 중에 자갈 많은 길을 지난 탓인 모양입니다.”
“수리 시간은 얼마나 걸리겠나?”
“한 시간은 걸릴 듯합니다. 최대한 빨리 손보겠습니다.”
마차 창으로 씨름하는 두 사람을 둘러본 룬이 밖으로 내려섰다.
“룬 님, 어디 가십니까?”
“한 시간은 걸린다며. 근처 교목에서 눈 좀 붙이고 올게.”
햇볕도 적당하고, 바람도 선선한 날씨였다.
숲길로 발걸음을 돌리던 룬은 “힉!” 뒤편에서 비명이 들리자 고개를 돌렸다.
“무, 무슨 토끼가 이렇게 많습니까? 룬 님, 룬 님!”
소스라친 레스틴이 폴짝 뛰어 마차 난간에 올라섰다.
“저리 가… 주십시오!”
그러든지 말든지, 우르르 몰려든 하얀 토끼 군단이 마차를 탐색하듯 에워쌌다.
토끼 영토 내 경계의 숲이니까 토끼가 살겠지. 헛웃음을 흘린 룬은 무시하며 숲 깊숙이 걸어 들어갔다.
옅은 분홍색 곱슬머리가 산들바람에 흩날렸다.
신장은 한 뼘이나 더 자라고, 눈동자는 흐리지만 눈매는 조금 날카로워졌다. 외관이 변할 정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기억은 여전히 선명했다.
비비도 많이 변했을까.
늑대 영토와의 분쟁에서 부대 하나를 홀로 쓸던 아힌을 떠올린 룬은 찝찝하게 목덜미를 쓸었다.
고삐가 풀리다 못해 없는 수준인 흑표범을 토끼가 어떻게 감당하고 있을지.
더군다나 장로회에서 저렇게 나오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비비에게 또 시련이 주어질 모양이었다.
곧 제가 걱정할 일이 아니라 되뇌며 고개를 저은 그가 발을 옮겼다. 자박자박, 안락한 교목을 찾아 걸어가던 룬이 대뜸 멈췄다.
“…….”
자박자박, 다시 걸음을 옮기던 발이 재차 멈췄다.
“…언제까지 따라올 셈이지?”
뒤돈 룬은 발치까지 따라붙은 새하얀 토끼를 내려다봤다.
쌀쌀한 어느 날, 아힌의 구두코에서 엉덩이를 덥혔던 토끼였다. 무릎을 굽힌 룬은 도망갈 생각조차 안 하는 토끼의 턱을 검지로 짚었다.
“닮았군.”
이내 팽하니 뒷발로 룬의 손가락을 걷어찬 토끼는 그의 구두코에 앉아 엉덩이를 덥혔다.
감히 비비를 닮은 토끼를 떨치지 못한 룬은 멍하니 구두코만 내려다봤다.
“룬 님!”
레스틴이 룬을 찾는 외침이 들릴 때까지도 하얀 토끼의 휴식은 계속됐다.
“룬 님, 어디 계십니까?”
마차가 있는 방향을 한 번, 노곤하게 눈을 붙인 토끼를 한 번. 번갈아 보던 룬이 나지막이 물었다.
“나랑 갈래?”
훨씬 따뜻한 곳에서 지낼 수 있게 해 줄게. 토끼를 들어 올린 그가 해사하게 미소 지었다.
* * *
비어 있던 강의실이 점점 학도들로 들어찼다.
수업 준비를 마친 나는 책상에 잠깐 엎드렸다.
아카데미로 돌아오기까지 얼마나 험난한 여정이었던가. 특히 꼬물거리는 새끼 흑표범들을 이끌고 당연하게 마차에 앉아 있는 애쉬와 바라가 문제였다.
애쉬 하나도 아니고, 기숙사에서 흑표범 일가족을 어떻게 데리고 살아….
호통치는 애쉬에게 잠을 스무 번만 자면 돌아온다고 싹싹 빈 후에야 상황을 정리할 수 있었다.
‘용사님, 나빠.’
드디어 숨 좀 돌리나 싶었더니, 아카데미에 돌아오자마자 울고불고 땅을 치는 러셀을 달래야만 했고.
더욱이 여전히 강의실 한편에서 등이 쿡쿡 쑤실 만큼 노려보는 앨런의 존재까지.
‘…하.’
며칠 사이 퀭해진 내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그도 모자라, 결코 조용할 것 같지 않던 아힌이 묘하게 조용한 부분도 걱정이었다.
‘편지에는 답장도 없고….’
막돼 먹은 맹수.
헤어지기 싫어하는 아힌에게 너무 잔혹하게 대한 걸까. 그래도 짜증 난다고 할 것까진 없잖아.
툴툴거린 나는 힐끔 손목 부근을 확인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온몸에 새겨진 울혈을 치유계 페로몬으로 지울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왠지 아힌이 알면 몹시 못마땅해할 것 같은데. 당분간 이 사실은 숨기는 편이 좋을까.
양손에 얼굴을 묻은 채 온갖 생각을 이어 가던 나는 문득 축축 처지는 우울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측방으로 고개를 틀자, 클래스 메이트인 헨드리가 나와 똑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이 돼지는 또 왜 이래. 흠칫 어깨를 떤 나는 조심스레 그녀를 살폈다.
“…헨드리?”
“비비….”
손에 얼굴을 묻고 있던 헨드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 안색이 왜 그래요?”
낯빛에는 먹구름이 잔뜩 드리워졌고, 눈은 온종일 울기라도 한 듯 퉁퉁 부어 있었다. 순간 이유를 직감한 나는 헨드리의 어깨를 붙들었다.
“그때 만나 본다던 흑표범 때문이죠?”
정답인 모양인지 경련하던 그녀의 표정이 점점 울상으로 변했다.
“…몹쓸 사람이었어요.”
“무슨 일인데요?”
“글쎄, 저를 만나기로 한 날만 해도 세 명의 영애를 만났다지 뭐예요…!”
언성을 높인 헨드리가 손수건을 꺼내어 눈가를 찍었다.
이걸 어떻게 달래야 하나. 난감하게 목덜미를 쓸던 내가 살며시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그러게 말했잖아요, 흑표범은 안 된다고….”
“애인 하나 없었을 것 같은 비비의 말이니까 흘려들었죠.”
그런 앞뒤 없는 논리가 어디 있어. 울컥한 내가 책상을 탕 내리쳤다.
“저도 연인 정도는 있…!”
“있?”
“있…!”
아힌을 여기서 함부로 거론하면 안 되겠지.
당차게 주장하다 말고 멈춘 나는 입을 뻐끔뻐끔 여닫았다. 더군다나 아힌의 얼굴이 떠오르자마자 의도치 않게 뺨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어쩔 줄 모르는 내 태도를 마주한 헨드리의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비비, 설마 진짜 있…!”
“모두 정숙하세요.”
마침 교수님이 강의실에 들어섬으로써 대화가 뚝 끊겼다.
사각사각, 필기 소리와 교재를 읊는 교수님의 음성만이 강의실을 울렸다.
필기에 집중하고 있자니, 쿡쿡, 헨드리가 팔꿈치로 옆구리를 찔러 왔다. 시선이 마주친 그녀는 종이에 전할 말을 쓰다가 답답했는지 곧장 속삭였다.
“틈만 나면 도서관이랑 사육장만 들락거리던 분이, 애인이 있었어요?”
“그건….”
아힌을 없다고 말하긴 싫은데.
이 정도야 괜찮겠다고 생각한 나는 수줍게 긍정했다. 헨드리는 부르르 떨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흑표범 일족한테 예민하게 반응하더니, 알고 보면 흑표범 일족 아닌가 몰라.”
“……!”
대답하지 않았지만 표정에 다 드러났는지, 헨드리의 얼굴이 확신으로 물들었다.
“얼굴 한 번 비춘 적 없는 분이 애인이라고요? …그러고 보니 비비는 매일같이 흑표범의 험담만 일삼았었죠.”
내 침묵을 긍정으로 해석한 헨드리는 파란 머리칼을 귀 뒤로 꽂으며 진중히 말했다.
“남몰래 마음고생 중인 거 아니에요? 보아하니 안색도 좋지 않아요. 비비, 어서 말해 봐요.”
따듯한 눈을 한 헨드리가 내 손위로 제 손을 꼭 덮어왔다.
아힌 때문에 마음고생 할 게 뭐가 있어. 오해라며 고개를 젓던 나는 일순 미간을 와락 구겼다.
“편지에 대한 답장이 오지 않아서요.”
퀸 말고 첫 전령 새가 생기자마자 아힌에게 가장 먼저 전서를 부쳤는데. 생각할수록 괘씸했다.
‘변태 쓰레기 토끼.’
“…종종 폭언도 하고.”
자세히 설명할 수 없었던 나는 두루뭉술하게 중얼거렸다.
“계속 말해 봐요.”
낯빛이 굳어진 헨드리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바람둥이가 아니어야지.’
그녀의 강한 공감에 탄력이라도 받은 건지, 그간의 설움이 하나하나 떠오르기 시작했다.
“외간 토끼를 침실에 들이면서 오히려 내게 바람쟁이란 누명을 씌우고….”
‘더 울어 봐.’
“또 제가 매일 슬펐으면 좋겠나 봐요.”
“쓰레기네.”
“……!”
“그거 다시없을 쓰레기네요!”
격분한 헨드리가 내 멱살을 콱 틀어잡았다. 지금까지 보여 준 고상한 모습과 대비되는 과격한 행동이었다.
“혹시 디너 파티의 파트너마저 그 쓰레기는 아니겠죠?”
나는 멱을 잡힌 채 동공을 떨었다.
디너 파티라면 중간 방학을 기념하며 개최되는 아카데미의 연례행사였다. 기숙사에 쌓인, 발렌스 님이 잔뜩 보내 온 드레스 더미를 떠올린 내가 입을 달싹였다.
“파, 파트너로 와 줄 리가 없는데…. 혼자 참석할 예정이에요.”
정확히는 신분, 그리고 얼굴이 다 알려진 탓에 올 수 없는 거지만. 설명을 애매하게 했음을 깨닫기도 전에 헨드리의 눈에 쌍심지가 켜졌다.
“설마하니 혼약을 전제로 만나는 상대는 아니겠죠, 당장 헤어…,”
“비비 학도, 헨드리 학도.”
어느새 책상 앞에 선 교수님을 올려다본 우리가 조용히 교재에 코를 박았다.
마침 대륙사 교재에는 그레이스가(家)와 마니언츠가(家) 등, 각 영토 수장의 가문에서 이룬 업적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책에서 시선을 뗀 나는 날 좋은 창밖을 돌아봤다.
새삼 그들의 무게가 와 닿은 동시에 헨드리가 말한 혼약이란 단어가 머릿속을 떠다녔다.
지금까지는 인간화와 아힌을 향한 마음 하나로 달려왔으나, 앞으로는 현실적인 가시밭길이 남아 있었다.
냉정히 정의 내리면 아힌은 죽어서도 역사로 남을 사람이지만, 나는 약물로 인해 인간화가 늦었을 뿐인 일개 토끼에 불과하니까.
물론 발렌스 님과 할아버님이 그 격차를 줄이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발렌스 님은 후세를 위해서도 지배계 페로몬과 치유계 페로몬의 상관관계를 공표하는 동시에, 아힌을 살린 내 존재를 알릴 심산인 듯하고.
할아버님이 아카데미 입학을 제안한 것엔 이곳 귀족들에게 얼굴도장을 찍어 두기 위한 목적도 있었겠지.
한숨을 감추지 못한 내가 턱을 괬다.
아무도 내게 혼인이나 약혼에 대한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발렌스 님은 토끼 영토 수장처럼 허리가 굽을 때까지 수장의 권좌에 앉아 있겠노라 우스갯소리도 흘렸고.
그러나 이것이 멀리 미룰 수 없는 사안임을 알고 있었다. 후계의 입지가 탄탄할수록 가문도 안정적으로 자리 잡으니까.
중급 귀족인 래비안가(家)에서도 뛰어난 후계를 선별하려 혈안이었는데, 하물며 그레이스가(家)의 차기 수장이 약혼자 하나 없다는 건 말이 안 됐다.
남은 것은 내가 그 왕관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냐는 건데.
이제 모든 것을 배워가기 시작한 입장에선 섣불리 호언하기가 힘들었다. 한 영토의 사활이 걸린 자리니까.
그런 주제에 아힌의 옆자리에 다른 수인이 앉는다고 생각하면 눈에 불길부터 이는 한심한 일개 토끼였다.
상념에 잠긴 채 밖을 바라보던 나는 몽롱하게 눈을 깜박였다. 하도 흑표범 생각을 해서 그런가, 창밖으로 흑표범의 머리통이 보였다.
‘애쉬네….’
오늘도 육아는 바라한테 맡기고 돌아다니는 건가. 칼 같은 앞발 경례로 인사를 전한 애쉬가 스르륵 사라졌다.
다음에 솟아오른 것은 이브린의 머리였다. 그는 입 모양으로 열심히 의사를 전달했다.
[토끼님, 강의 후에 학장실로 와 주십시오.]자리를 빼앗긴 애쉬는 뒤에서 그의 머리통을 잘근잘근 물어 댔다. 주르륵, 이브린의 이마에서 한줄기 피가 흘러내렸다.
세상에. 멍하니 그 참상을 바라보던 나는 자리를 쾅 박차며 일어났다.
허상 따위가 아니었다.
“-비비 학도.”
기겁하던 나는 교수님의 엄한 음성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흐, 흑표범이…!”
휙, 다급히 검지로 창문을 가리켰지만 창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마침 퇴장하기 좋은 화창한 날씨로군요.”
함께 창밖을 돌아보던 교수님은 단호하게 뒷문을 손가락질했다.
“퇴장.”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