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ymbiotic Relationship Between the Rabbit and the Black Panther RAW novel - Chapter (68)
토끼와 흑표범의 공생관계 15화(68/75)
이브린은 휴가도 반납한 채 아힌 몰래 벨헬름 아카데미로 숨어든 실정이었다.
그 과정 중 감시꾼인 퀸을 수면제를 넣은 딸기로 따돌리고, 귀신같이 따라붙은 애쉬를 떨치려다 물리기도 했다.
겨우겨우 학장실에 다다라, 릴리언에게 자초지종을 전한 그가 숨을 골랐다.
“장로회 그 썩을 것들, 우리 토끼의 진면목을 몰라보고 헛발질이나 해 대는군.”
창가에 선 릴리언은 못마땅하게 팔짱을 꼈다. 그 옆에 나란히 선 이브린이 창밖을 내다봤다. 아카데미 교정이 한눈에 들어오는 절경이 펼쳐졌다.
현재, 아힌은 허구한 날 반복되는 장로회의 이의 제기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토끼의 존재와 합당한 능력을 증명하라 외치는 그들로 인해 나날이 아힌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는 곧 장로회를 썰어 버리겠다는 끔찍한 신호와도 같았다.
실상 비비가 치유계 페로몬을 증명만 하면 어느 정도 잠재워질 소란인데. 아힌은 이상하리만치 장로회의 설레발이 비비의 귀에 들어가는 것을 꺼리고 있었다.
“애쉬 님, 애쉬 님은 알고 계시겠죠.”
제 답답한 마음을. 수그려 앉은 이브린이 애쉬의 앞발을 잡았다.
애쉬는 심드렁하게 무시하며 벌렁 드러누웠다. 어서 비비가 오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손주 녀석이 그러는 이유가 달리 있겠느냐.”
쯧 혀를 찬 릴리언이 뒷짐을 졌다.
“괜히 준비도 안 된 우리 토끼를 독촉하다 또 사라질까 겁나는 거겠지. 한심한 것.”
“릴리언 님도 너무하십니다, 토끼님을 몰래 빼돌리시고. 아힌 님이 토끼님과 떨어져 있는 동안 매일 악몽에 시달리셨는데.”
“그건 우리 토끼도 마찬가지다!”
몸을 일으킨 이브린은 꼬박꼬박 토끼 앞에 우리를 붙이는 릴리언을 곁눈질했다.
“그래서, 네놈이 예까지 온 목적은 무엇이냐.”
“장로회와의 갈등은 장기적으론 우리 토끼님에게도 좋지 않습니다. 하여, 은밀히 우리 토끼님의 의사를 여쭙기 위해 왔습니다.”
내일은 장로회와의 정식 회의가 개최되는 날. 그곳에서 이브린이 제 몸에 상처를 내고, 비비가 그를 즉시 치료하는 능력만 보여도 회의는 원만히 흘러갈 게 자명했다.
“저놈들이…!”
그때, 창밖을 바라보던 릴리언이 왈칵 인상을 썼다.
“왜 그러십니까?”
의아해진 이브린과 애쉬가 창가로 다가섰다. 일순 둘의 얼굴이 굳어졌다.
“또 앨런 프레디안이군.”
“우리 토끼님과 관계가 있는 분입니까?”
원형의 진을 친 학도들의 중간, 배낭끈을 꽉 말아 쥔 비비가 보였다. 얼핏 봐도 해코지의 현장이었다.
“아무렴, 우리 토끼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놈이지. 큰일이구나, 지금은 치유계 페로몬을 완전히 드러낼 수 없는 처지인데. 내가 가서 저지하고 오…,”
“잠깐만요, 릴리언 님께서 막으셔도 일시적인 해결일 뿐입니다.”
“그럼 방관하자는 말이더냐?”
“제가 누굽니까.”
“네가 누군지는 알고 싶지 않다!”
“이 유능한 이브린에게 생각이 있습니다.”
벌컥, 창문을 열어젖힌 이브린의 눈이 반짝 빛났다.
“상대에게 패배감을 주면서, 이참에 우리 토끼님의 매운맛을 보여 주는 것도 좋겠죠.”
담담히 설명한 이브린이 뚜둑, 소리 나게 손목뼈를 풀었다.
그가 말하는 매운맛이 내심 궁금해진 릴리언은 힐긋 밖을 내다봤다. 학장실은 건물 높이 위치한 터라 자세한 상황까지는 알 수 없는 거리였다.
“제 페로몬이 상쇄 페로몬인 것은 아십니까?”
천천히 페로몬을 운용시킨 이브린이 고저 없는 음성으로 물었다.
“너에 대해선 궁금하지 않으니 방법이 뭔지나 말하거라.”
“물론 이 작전엔 상대에게 충격을 주는 릴리언 님의 페로몬도 필요합니다.”
아무도 몰라주는 유능함을 증명할 시간이 온 이브린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칠흑 같은 새까만 머리칼이 흐트러졌다.
“예전부터 우리 토끼님은 궁지에 몰리면 오히려 위협을 시도하시곤 했죠.”
“…그래서?”
“혹여 학도들이 페로몬을 사용할 시, 제가 전부 상쇄시키겠습니다. 릴리언 님께서는 우리 토끼님이 위협하는 대상에게 페로몬을 쏘아 주시면 됩니다.”
“도대체 무슨 속셈인 게냐?”
릴리언은 반박하면서도 홀린 듯 손끝에 페로몬을 집중시켰다.
그런 그를 확인한 이브린이 신중하게 아래를 주시했다. 비비를 둘러싼 학도들이 점점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주춤거리던 비비가 발을 쾅 굴리며 위협을 시도하는 순간,
“릴리언 님, 지금입니다.”
이브린의 지시가 떨어졌다.
* * *
한편, 또다시 앨런의 시답지 않은 시비에 휘말린 비비가 미간을 모았다.
“강의실에서 흑표범이란 말은 왜 외친 거지?”
왜긴 왜야, 애쉬가 왔으니까.
이브린과 한시도 같이 있기 싫어하는 애쉬를 위해 빨리 학장실로 가야 하는데. 앨런이 맹수 여럿까지 거느리고 온 탓에 벗어나는 게 영 쉽지가 않았다.
“또 배낭부터 숨기는군.”
앨런의 날카로운 시선이 배낭끈을 부여잡은 비비의 손에 닿았다.
‘도대체 배낭에는 왜 집착하는 거야.’
지긋지긋한 맹수. 한없이 억울해진 비비가 입술을 깨물었다.
토끼로 변하면 피신은 용이하겠지만, 발렌스 님이 선물한 배낭을 빼앗기게 될 테고.
‘…유사시에는 치유계 페로몬을 사용하는 수밖에.’
고심하던 비비는 하이에나 수인이 슬슬 접근을 시도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오, 오면 가만 안 둔다.’
콧잔등을 떤 비비가 경고용으로 오른발을 세차게 굴렸다.
순간이었다.
은밀히 접근하던 하이에나 수인의 낯빛이 하얘지더니 이윽고 쿵, 바닥에 쓰러졌다.
“……?”
갑작스러운 상황을 마주한 비비와 앨런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휙, 앨런은 급히 몸을 굽혀 하이에나 수인이 기절한 것을 확인했다. 의심으로 물든 붉은 눈이 비비를 향했다.
“너!”
“내, 내가 그런 게 아니….”
양손을 휘저어 부인하던 비비는 뒤편에서 위험한 기척을 감지했다. 그사이 접근한 호랑이 수인의 기척이었다.
엄마야, 소스라친 비비가 저도 모르게 확 손을 뻗었다. 그와 동시에 호랑이 수인마저 종잇장처럼 픽 쓰러지고 말았다.
‘뭐야…?’
당황을 수습지 못한 그녀는 제 양손을 번갈아 살폈다.
페로몬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맹수들이 쓰러지는 걸까.
의문에 휩싸인 보라색 눈동자가 마침 페로몬을 사용하려 손을 드는 치타 수인에게 머물렀다.
사실 치타 수인은 계속 페로몬 운용을 시도하고 있었으나, 증발하듯 상쇄돼 버려 우왕좌왕하는 중이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페로몬 사용을 막는 듯한 감각이었다.
‘혹시 몰라.’
합, 비비는 시험 삼아 허공에 뒤 돌려 차기를 날렸다. 그러자 치타 수인 또한 앞선 수인들처럼 풀썩 기절해버리는 게 아닌가.
한순간에 일행이 전부 기절한 앨런은 힘이 풀리려는 다리를 억지로 지탱했다.
“이게 다 무슨…!”
함께 온 학도들은 자신과 비등비등한 실력자들이었건만. 입학하자마자 수석의 자리를 채간 건 요행이 아닌 모양이었다.
더욱이 자신은 토끼가 페로몬을 사용하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지 않나. 페로몬을 밖으로 흘리지도 않는 조준 실력은 감히 범접할 수조차 없는 경지였다.
“감히!”
발악하듯 페로몬을 끌어 올리던 앨런이 멈칫했다.
크르릉-
어디서 나타난 건지 모를 흑표범이 보호하듯 토끼의 곁을 지켰다.
흑표범 영토에서 영물로 취급되어도 손색이 없을 자태를 지닌 흑표범이었다.
어른어른하게 흐려진 앨런의 붉은 눈이 토끼에게 닿았다. 스윽, 토끼가 주먹을 내보이자 앨런은 저도 모르게 움찔 어깨를 떨었다.
토끼는 마치 숨겨 둔 능력을 드러낸 것처럼 오연한 얼굴로 앨런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아 쥔 작은 주먹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백이 보통이 아니었다.
토끼가 흑표범을 부리는, 꿈결 같은 장면을 마주한 앨런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초식계 수인이라며 얕보고 헐뜯은 오만에 대한 수치심, 그리고 패배감이 휘몰아친 그가 침음성을 흘렸다.
“젠장….”
마치 패배를 시인하는 듯한 앨런의 동작에, 제가 모두를 쓰러뜨린 양 연기하고 있던 비비도 몰래 안도의 숨을 삼켰다.
‘내, 내가 한 게 아닌데….’
비비는 바들바들 떨리는 자신의 양손을 번갈아 봤다.
페로몬은 일절 사용하지 않았건만. 그러나 분명 주먹을 내지를 때마다 수인들이 픽픽 쓰러졌지 않았던가.
“실력을 숨기고 있었군.”
자포자기한 앨런이 갈라진 음성을 냈다.
‘내가…?’
혼란에 휩싸인 비비의 보라색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단지 기합만으로…!’
오래전, 토끼님은 장군의 기백을 가졌다는 이브린의 말이 머릿속에 메아리쳤다.
* * *
밤안개가 그레이스 저택을 감쌌다.
집무실에 홀로 남은 아힌은 내일을 위해 검날을 확인했다.
곧게 뻗은 날붙이를 올려다보던 그는 푸드덕, 창틀로 날아온 전령 새를 훑었다. 릴리언의 나이 지긋한 비둘기였다.
가져온 전서 내용은,
[네 이놈, 어째서 우리 토끼에게 답장을 보내지 않는 게냐?]로 시작하여, 당장 비비에게 답장을 보내지 않으면 경을 치겠다는 협박으로 그득했다.
어이가 없어진 아힌은 전서를 구겨 뒤로 던졌다. 편지에 답장을 하지 않았더니, 비비가 그새 쪼르르 릴리언에게 달려가 하소연한 모양이었다.
철컹, 검을 검집에 집어넣은 그는 릴리언의 비둘기를 아니꼽게 쳐다봤다.
기어코 꼰대의 환심마저 등에 업게 된 비비라니.
다소 맹목적인 구석이 있는 릴리언은, 혹여 비비가 아힌의 곁이 싫다 말하면 얼씨구나 숨겨줄 위인이었다.
꽤나 성가신 조합이라 생각하던 아힌은 서랍에서 서간지를 꺼내어 펼쳤다. 저답게 꼼꼼한 필체로 써 내려간 비비의 편지였다.
주로 아카데미에서의 일상에 관한 내용이었으며, 마지막은 아힌도 함께이면 좋았을 거란 작은 소망을 덧붙였다.
“이런 건 굳이 답장할 필요가 없지.”
아힌은 서간지를 비둘기에게 보여 주며 느슨히 미소 지었다.
“당장 아카데미로 오란 말이잖아. 안 그래?”
비비가 들었으면 기겁할만한 해석을 한 그는 내일의 일정을 상기했다.
장로회를 족친 후에 벨헬름 아카데미로 넘어간다.
만족스레 되뇐 그가 홀로 소리 없이 웃자, 비둘기의 눈이 가늘어졌다. 미친 것. 비둘기는 전령 새 인생 말년에 고생이라 생각하며 높이 날아올랐다.
그 날갯짓에, 뒤늦게 하루 내내 퀸이 보이지 않았음을 깨달은 아힌이 창가로 다가섰다.
“퀸 님, 제 준수한 머리칼을, 잠깐만요. 쪼지 마십시오.”
마침 휴가를 맞아 본가에 다녀온 이브린이 아힌의 시야로 들어왔다.
무슨 이유에선지 날카로운 부리로 그를 쪼아대는 퀸. 그리고 옆에서 볼록한 배낭을 멘 채 어슬렁거리는 애쉬가 보였다.
함께 외출을 하고 온 듯한 그들을 내려다보던 아힌의 눈이 차갑게 식었다.
‘수상하군.’
이브린을 흉보기도 바쁜 애쉬가 같이 외출을 한 것이.
최근 이브린은 아힌과의 이십 년에 가까운 의리를 저버리며 배신을 꿈꾸고 있었다. 가령 비비의 끄나풀인 애쉬와 결탁하여 아힌의 의사에 반하는 짓을 벌인다든가.
팔짱 낀 아힌이 창가에 비스듬히 기대어 섰다.
‘…-너무 비약인가.’
기실 이브린과 애쉬가 하루 이틀 지낸 사이도 아니고, 외출 정도야 충분히 함께할 수 있는 정도였다.
애초에 아힌은 비비만 관련되면 안 그래도 없는 상식이 사라져 버리니. 어디까지가 적정선에 이르는 의심인지 정확히 감이 오지 않았다.
지난 일 년 반에 가까운 시간 동안 신경을 극도로 예민하게 곤두세운 탓일까.
버선발로 달려 나와 애쉬의 배낭을 받아 무는 바라를 보던 아힌이 커튼을 쳤다.
* * *
늦은 밤. 바라에게 배낭을 전달받은 이브린은 은밀히 발렌스 님의 집무실로 향했다. 달칵, 집무실로 완전히 들어선 그는 조심스레 배낭을 열어 바닥에 내려뒀다.
“토끼님, 나오셔도 됩니다.”
드디어 바깥으로 나오게 된 나는 헝클어진 털을 정리했다.
이브린은 집무 책상에 앉은 발렌스 님을 향해 공손히 묵례했다.
“가주님, 전달드린 대로 내일까지 토끼님을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멀뚱멀뚱 있을 수 없었던 나도 바닥에 납작 부복했다.
“걱정 마려무나.”
왠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 발렌스 님은 고아한 미소로 화답했다. 은발을 한쪽으로 땋아 내리고, 긴 숄을 두른 편안한 차림이었다.
이어서 문안 인사까지 마친 이브린은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섰다.
“…….”
그와 나는 열린 문을 사이에 두고 진한 시선을 교환했다.
몇 시간 전, 대뜸 아카데미로 찾아온 이브린은 장로회와의 갈등에 대해 전달했다.
당장 내일 나를 주제로 한 정식 회의가 개최되며, 아힌은 혼약이란 단어가 내 귀에 들어가는 것을 꺼린다는 사실까지도.
아힌이 이참에 사사건건 간섭하는 장로회를 쓸어 버릴 계획을 세우는 것 같단 설명을 들었을 때는 온몸에 오한마저 들었다.
그래서 할아버님께 허락을 받은 후에 부랴부랴 그레이스저로 오긴 했는데…. 이브린은 꼭 회의에 참석하여 능력을 선보일 필요는 없으니, 오늘 밤 동안 신중히 고민한 후에 거절해도 된다고 일렀다.
따라서 일단은 발렌스 님께 나를 인도하여 밤을 보내기로 한 참이었다.
‘그보다….’
조금 염려스러워진 나는 앞발로 이브린의 구두코를 짚었다.
그는 아힌에게 나를 그레이스저로 데려온 것도, 장로회에 대한 사실을 알린 것도 전하지 않았다.
내가 결심하기까지 평안한 시간을 주고픈 건 알겠지만, 독단적으로 행동한 이브린의 앞날은 위태로울지도 몰랐다.
“혼약이란 단어가 토끼님께는 무거운 단어임을 압니다.”
수그려 앉아 무릎에 손을 얹은 이브린이 시선을 맞췄다.
“그래서 아힌 님도 토끼님께 장로회에 관해 알리지 않으신 거겠죠. 그러나 제 생각에는… 회의를 엎어 버리면 당장은 장로회도 수그러들겠지만, 아마 빠른 시일 내에 다시 이의를 제기할 겁니다.”
잠깐 입을 여닫은 이브린이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그게 반복될수록 아힌 님과 토끼님에 대한 장로회의 반감은 깊어질 겁니다. 그럼 다른 사안을 논의할 때도 협조적으로 나오진 않겠죠.”
이브린도 깊은 생각을 한다는 놀라움 반, 장로회에 대한 고민 반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진 내가 철퍼덕 주저앉았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모르지 않았다.
장로회의 반감을 살수록 차후 혼약을 치르고자 할 때 반대도 심해지겠지. 종족을 문제 삼든, 신분을 문제 삼든.
그럴 바에는 이번 기회에 치유계 페로몬을 증명하여 반감 대신 능력에 대한 호의를 사두는 게 나았다.
그러나 그는 곧 아힌과의 혼약이 사실 시 되는 것과도 다름없었다.
“두 분을 위한 방법이라고는 하지만, 결국은 부담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물론 능력 증명을 거절하셔도 되고, 만일 증명을 하더라도-….”
흠, 고심하듯 허공을 바라본 이브린이 다시 나를 내려다봤다.
“차후 정 아힌 님이 마음에 안 들면 버리면 되죠. 덧붙여 이렇게 말씀드린 건 비밀입니다. 물론 두 분도요.”
이브린의 지긋한 시선이 양옆을 지키는 경비 기사들을 향했다. 무언의 압박을 받게 된 그들은 못 들은 척 눈길을 피했다.
“가주님께서도 비밀로 해 주실 거라 믿습니다.”
“생각해 보마.”
집무실 안쪽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발렌스 님의 대답이 들려왔다.
정말 이브린은 이러고도 어떻게 살아 있는 걸까.
“너무 늦게 말씀드리지만,”
폭 한숨을 내쉬고 있자니, 그의 검지가 앞발을 톡 덮었다.
“비비 님, 무사히 돌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브린에게서 흘러나온 비비 님이란 호칭이 낯설다고 생각하길 잠깐, 그가 처음 내 이름을 제대로 불러 주었음을 깨달았다.
가슴 찡해진 나는 앞발로 이브린의 검지를 살포시 쥐었다.
이제 그 토끼님이란 이상한 호칭은 버리기로 한 거야?
“하지만… 그래도 편지 한 통 정도는 쓰셨어야죠.”
하나 대번에 태도를 뒤바꾼 이브린은 톡, 검지로 앞발을 내쳤다.
“그레이스저에 지내는 내내 저를 열렬히 필요로 하셨으면서, 어찌 소식 하나 없을 수가 있습니까.”
‘그건…!’
송곳니만 떠올려도 손이 떨려서 전서조차 쓸 수 없었어. 하물며 너를 열렬히 필요로 한 적도 없고.
나름 할 말이 많은 내가 번쩍 두 발로 일어섰다. 톡, 그러나 이브린이 검지로 뒷발을 들어 버린 탓에 비틀거리며 쓰러지고 말았다.
“솔직히 서운합니다, 제 얼굴을 볼 때마다 이를 가시고.”
‘이게 정말!’
“아힌 님께 전부 이를 겁니다. 강의 시간마저 돼지 수인과 사랑을 속삭인 것도요.”
헨드리와는 그저 귓속말을 나눴을 뿐인 것을. 여전히 모함이 수준급이었다.
도끼눈을 뜬 나는 솜뭉치 같은 앞발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만일 낮에 내 기합에 맹수들이 픽픽 쓰러졌던 게 우연이 아니라면. 이브린에게 시험해 볼까 망설이는 와중, 단정한 그의 낯을 올려다보자 처음 만난 날이 파노라마처럼 스쳤다.
‘아마 특별한…! 비상식량인 것 같으니.’
저 침착한 또라이만 아니었더라면 내 위치가 주워 온 토끼에서 비상식량까지 추락하진 않았겠지.
제발 잠재된 능력이 있다면 지금 나와 주세요. 분노가 용솟음친 나는 허공을 향해 합! 기합과 함께 앞발을 내질렀다.
난데없는 기행을 멍하니 바라보던 이브린은 곧 풀썩, 배를 부여잡으며 바닥에 무너져 내렸다.
‘이, 이브린!’
황급히 달려가 이브린의 눈꺼풀을 들췄으나 미동이 없었다.
설마 진짜 통할 줄이야. 부들거리며 물러난 내가 앞발을 앞뒤로 뒤집었다. 아무래도 숨겨진 힘이 있나 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