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ymbiotic Relationship Between the Rabbit and the Black Panther RAW novel - Chapter (72)
토끼와 흑표범의 공생관계 19화(72/75)
디너 파티의 준비는 헨드리와 지난나 교수의 철저한 관리 아래 이루어졌다.
여전히 연회용 차림이 어색한 나는 슬그머니 교내 연못을 들여다봤다. 환한 램프 빛을 받은 내 모습이 연못 표면에서 일렁였다.
‘흠….’
머리카락 한 가닥을 땋아 장신구로 고정한 후, 나머지는 아래로 늘어뜨린 백발이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흰빛이 섞인 연보라색 드레스는 계절에 맞춘 하늘하늘한 종류였는데, 드러난 쇄골 부분을 보석으로 장식하니 그리 부담스럽진 않았다.
부족하지도 과하지도 않은, 딱 적당한 차림새였다.
“이 녀석아, 최고이니 어서 가자꾸나. 주인공이 지나치게 늦어도 좋지 않아.”
“…어째서 디너 파티의 주인공이 저예요?”
“네가 아니면 누구란 말이더냐? 그리고 이 할아비의 말에 딴죽을 걸면 못 쓰니라.”
뒤편에 선 할아버님의 계속되는 억지를 못 견딘 내가 허리에 손을 얹었다.
“할아버님, 동반 입장은 절대 안 돼요.”
정말이지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디너 파티의 일정이 정해지자마자 러셀과 할아버님도 모자라 발렌스 님마저 파트너를 하겠노라 박박 우겨 댔으니.
간신히 어르고 달래어 러셀과 입장하기로 약조했건만, 당일에 할아버님이 고집을 부리고 있는 실정이었다.
“어차피 네가 그레이스가(家)와 관련된 건 나중에 다 알려질 사실이지 않더냐.”
“말씀드렸잖아요, 졸업 후에는 상관없다고. 그전엔 분명 할아버님까지 구설수에 오를 거예요.”
“나는 괜찮다만, 네가 꺼려 하니 직접 변장도 해 왔지 않느냐. 이리하면 아무도 나인지 모를 게다.”
질린 낯을 한 나는 불온한 시선으로 할아버님을 훑었다.
한쪽으로 땋아 내린 성성한 백발은 고사하고, 얼굴을 가린 께름칙한 토끼 가면은 도대체 어디서 구한 건지 모를 노릇이었다.
“뒤구르기 하면서 봐도 할아버님이세요.”
“우리 토끼가 이런 모진 말을 다 하고….”
“할아버님-.”
절대 안 된다는 엄한 눈빛을 비치자, 할아버님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일순 마음이 약해졌지만, 여기서 무르게 나가면 또다시 따라붙으시겠지. 눈 딱 감고 외면한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우리를 말리던 러셀을 안아 들었다.
“가자, 러셀.”
바스락바스락, 발을 옮길 때마다 마찰한 드레스가 소음을 냈다. 야외 파티장에 가까워질수록 교정이 낮처럼 환해졌다.
“…러셀.”
속으로 귀족식 예법과 에스코트 순서를 되뇌던 나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인지했다.
“왜 연회에 발레용 튜튜를 입고 왔어?”
너무 잘 어울려서 인지를 못 하고 있었어.
심지어 러셀은 튜튜뿐만 아닌, 어린이용 왕관까지 완벽하게 착용한 상태였다.
“지난나 교수랑 족제비들이 입혀 줬어.”
“족제비라면 클래스 메이트들?”
“으응.”
고사리 같은 손으로 양 뺨을 감싼 러셀이 수줍음에 몸을 배배 꼬았다.
이렇게나 잘 어울리는데 뭐 어떤가. 수긍하곤 걸음을 옮기던 내가 재차 멈춰 섰다.
“그런데 입장도 꼭 이렇게 안아서 해야 돼?”
“안아서야.”
“…아닐 텐데.”
러셀은 품에 꼭 안기며 손을 훠이훠이 저었다.
결국 러셀을 안아 든 상태로 야외 파티장에 입장하게 된 나는 살금살금 발을 내디뎠다. 우리의 독특한 입장 때문인지 걸음걸음마다 시선이 따라붙었다.
‘고, 곰 수인!’
맙소사. 기겁한 나는 우람한 곰 수인을 피해 이리저리 장내를 옮겨 다녔다. 러셀은 그런 내 품이 불편한지, 퉁 내려서선 파티 음식을 먹으러 달려갔다.
힉. 엄마야.
홀로 고군분투하며 피해 다니던 중, 정신을 차리니 어느덧 학도들은 파트너와 짝을 이뤄 춤에 취한 상태였다.
인파 속, 새로 만난다던 뱀 일족과 시선을 맞추고 있는 헨드리도 보였다.
불빛에 반사된 사람들의 미소가 왠지 나까지 행복에 젖게 만들었다.
새끼 토끼였다면 절대 볼 수 없었을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눈을 굴려 러셀을 찾았다. 러셀은 또래 학도에게 내가 가르쳐 준 토끼 일족의 전통춤을 선보이고 있었다.
이래서 헨드리가 꼭 이성 파트너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 거구나. 묘하게 머쓱하고 외로운 기분이 들었다.
구석에 덩그러니 서있던 나는 일순 괴이한 것을 발견하곤 가자미눈을 떴다.
‘…이 사람 뭐야.’
언제 다가왔는지도 모를 남자가 내 옆에 나란히 서 있었다.
그것만이라면 다행이지. 어디서 돌아버린 토끼 가면을 구해선 당당히 착용한 꼴이었다.
‘토끼 가면이 유행인가…?’
아까 할아버님도 쓰고 있었는데. 앞서 고양이 가면을 쓴 사람도 있었던 걸 미루면, 이상하게 여기는 건 무례인 걸지도.
아직 연회 문화에 대해 숙지가 덜 된 나는 슬그머니 옆으로 한 걸음 거리를 벌렸다.
그러자 남자도 따라서 옆으로 걸음을 옮긴 탓에 결국은 제자리였다. 흘끔흘끔, 의심 어린 시선이 남자를 향했다.
체격도 엇비슷하고, 혹시 몰래 참석한 아힌은 아닌가 싶었으나….
귓가에 머문 남자의 백금발이 가발임을 감안하더라도, 가면 너머의 보라색 눈동자는 어떻게 위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카데미 학도인가?’
같은 토끼 일족이랍시고 내게 친근감이라도 느끼는 걸까.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다시금 거리를 벌리려 시도할 즈음, 남자는 미약한 힘으로 나를 이끌었다.
마침 느릿한 박자로 음악이 바뀌는 순간이었으니. 얼떨결에 따라나선 나는 그에게 어설픈 춤 솜씨를 보여 줘야만 했다.
‘아무리 봐도 아힌 같은데….’
그러나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향은 낯선 종류였고, 손을 확인하면 바로 알 수 있겠지만 그마저도 두꺼운 새틴 장갑이 가로막고 있었다.
부드러운 손길에 이끌려 잔디 위를 도는 와중에도 탐색전은 끊이질 않았다.
“아-”
힌… 아니냐고 다짜고짜 물었는데, 만약 아힌이 아니면 어쩌나. 돌았다고 해도 여기까지 쫓아올 만큼 한가로운 맹수가 아닌데.
붕어처럼 입을 뻐끔뻐끔 여닫은 나는 빠르게 질문을 전환했다.
“…실례가 아니라면 성함을 여쭤도 될까요?”
좋게 말할 때 목소리라도 내 봐.
무언의 압박을 보내며 올려다보자, 보라색 눈동자의 남자는 그저 싱긋 웃을 뿐이었다.
입까지 가려 주는 토끼 가면으로 인해 송곳니의 유무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진정 모르는 사람이면 또 바람피운다는 누명이나 쓸 텐데. 휙, 하늘을 확인했으나 다행히 감시꾼인 퀸은 보이지 않았다.
시의 알맞게 음악도 멎어 들자, 이때다 싶었던 내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 그럼 안녕히….”
인사도 이상하게 해 버렸어. 낭패 어린 심정을 감추며 물러나는 동시에, 손을 잡은 남자의 손에 약간의 힘이 들어갔다.
“……?”
놔. 손을 떨치려 파닥파닥 흔들었지만, 남자가 짝짜꿍이라도 치듯 같이 손을 흔들어 댔다.
‘이게!’
대륙엔 원래 이렇게 미친 사람이 많나. 콧잔등을 부르르 떤 내가 회오리처럼 팔을 돌려 밀치려 할 때,
“흑표범들이 교정을 돌아다닌다고?”
“모, 목소리 낮추게.”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여 버린 경비 기사가 입을 틀어막았다.
‘흑표범이라고…?’
일순 아카데미에 짠 나타나서 이브린의 정수리를 물어 대던 애쉬가 눈앞을 스쳤다.
설마 애쉬는 아니겠지. 경비 기사들을 마주치면 험한 취급을 당할지도 모르는데.
탁탁,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발이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 * *
흑표범이란 단어에 번개처럼 반응한 비비는 쫓을 새도 없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토끼 수인이 흑표범 수인보다 더 흑표범 수인처럼 행동하면 어떡하나. 남겨진 아힌은 어이없이 눈을 깜박이다가 종국엔 웃음마저 새어 나왔다.
연회장이 소란에 휩싸이기도 잠시, 경비 기사들이 진정시키며 대열을 갖추자 금세 원래의 분위기를 되찾았다.
“은밀히 오겠다던 녀석이 흑표범은 왜 데려온 게냐?”
아힌의 옆으로 다가선 릴리언이 투덜거렸다. 그가 쓴 토끼 가면을 발견한 아힌은 자신도 저런 꼴인지에 대해 잠깐 고찰했다.
“비비만 관련되면 다들 유난이라. 이미 그레이스가(家)는 토끼한테 먹혔어.”
“아직 멀었다. 제대로 된 실세 노릇을 하려면 토끼의 집무실도 하나 만들어야겠구나. 내 발렌스 수장과 상의하마.”
의외로 릴리언에게선 진지하기 짝이 없는 답변이 돌아왔다.
아힌은 약간 멍한 얼굴로 릴리언을 돌아봤다.
원래대로라면 어딜 토끼 따위가 그레이스가(家)를 넘보냐고 답해야 하지 않나. 일족에서 그나마 상식적인 사고를 지닌 릴리언마저 무너지고 만 실정이었다.
언제부터일까. 웃음이 난 아힌이 가면을 들어 올렸다.
“영감, 많이 변했네.”
“마땅한 결과인 게지. 네놈은 목숨을 구해 준 우리 토끼에게 평생…,”
퉁명스레 답하던 릴리언이 숨을 뚝 멈췄다. 백금발의 가발을 쓴 아힌을 순간 이디스와 겹쳐 본 탓이었다. 그를 모르지 않는 아힌이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아버지가 조부님한테 전해 달라더라, 많이 사랑한다고.”
“…….”
“이제 전해서 미안.”
이디스의 죽음을 유일하게 목격했던 아힌이 처음으로 전하는 그의 유언이었다.
지배계 페로몬이 안정을 찾음으로써, 이제야 이디스의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시작한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발렌스도, 릴리언도 마찬가지였다.
가면을 쓴 덕분에 표정을 감출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 릴리언이 뒷짐을 졌다.
“꼭 중요한 말을 할 때만 호칭을 제대로 부르는군. 이러니 네놈을 예뻐하려야 예뻐할 수가 없어.”
“마찬가지야.”
아힌은 다시 토끼 가면을 내려써 얼굴을 완전히 감췄다.
그러고도 퉁명스레 대화를 주고받고 있을 때, 헨드리가 두 사람의 곁으로 조심조심 다가섰다.
‘흑표범 수인이 아니라 토끼 수인이네?’
비비와 아힌이 짧게나마 춤을 춘 것을 상기한 그녀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혹시 당신이… 비비의 애인인가요?”
“-그 단어 괜찮네.”
“…그 쓰레기?”
“어떻게 알았지?”
턱을 매만진 아힌이 릴리언에게 자문을 구했다.
“네 녀석 얼굴에 쓰여 있겠지.”
“가면을 썼는데?”
“인성은 가면으로도 숨길 수 없는 법이지. 이 학도는 우리 토끼의 절친한 친우이니, 무례하게 대하지 말거라.”
“무례는 내가 당한 것 같은데.”
헨드리는 다소 황당한 눈으로 아힌과 릴리언을 번갈아 살폈다. 비비의 애인은 학장과 친분이 있는 것으로도 모자라, 쓰레기란 단어에도 기뻐하고 있었다.
“영감, 가 볼게. 슬슬 비비가 애쉬랑 바람날 시간이라서.”
이쯤이면 애쉬와 릴을 만났을까. 아힌은 멀리 시계탑을 올려다본 후에 걸음을 돌렸다.
“…잠깐만요!”
비비를 나쁜 남자의 마수에서 구해 낼 심산이었던 헨드리가 꽥 외쳤다. 앞서가던 것을 멈춘 아힌은 살짝 가면을 위로 올리며 웃었다.
“비비만 쫓기도 바쁜 쓰레기니까 너무 걱정 마.”
아는 토끼 수인이라곤 비비밖에 없는데 왜 낯이 익을까. 멀거니 굳은 헨드리가 멀어지는 아힌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끝끝내 정체를 유추할 순 없었지만, 비비가 애인의 천사 같은 얼굴에 홀랑 넘어간 거란 사실 하나만은 틀림없었다.
* * *
밤이 드리워진 교정을 가로지르는 와중, 어딘가에서 불길한 소음이 들려왔다.
풍덩 풍덩, 얼핏 물장구를 치는 소리 같기도 했다.
‘설마….’
곧 그게 연못 방향임을 인지한 나는 사색이 되어 달려갔다.
애쉬, 애쉬.
빠르게 연못 인근까지 다다르자, 아니나 다를까 연못에 빠진 두 개의 인영이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새끼 흑표범들이었다.
왜 이곳에 있는지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풍덩, 이를 악문 내가 연못으로 몸을 던졌다.
“슈, 비온!”
내가 구해 줄게. 열심히 팔다리를 휘젓고 있을 즈음, 빤한 시선이 느껴졌다.
‘바라…?’
뱁새눈을 한 바라는 꼬물꼬물 헤엄쳐 슈와 비온을 건져 올렸다.
손쉬운 구출을 얼떨떨하게 쳐다보던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고작 허벅지에 닿을락 말락 한 깊이의 연못이었다.
‘…이게 뭐야.’
푸르르 몸을 턴 슈와 비온은 물에 쫄딱 젖은 내 꼴이 재밌는지 신나게 바닥을 뒹굴어 댔다.
저 장난꾸러기들. 분명 저런 식으로 놀다가 연못에 빠진 거겠지.
안도도 잠시, 따끔하게 혼내리라 마음먹던 나는 문득 인기척을 느끼곤 고개를 틀었다.
그새 쫓아온 괴짜 토끼 가면의 남자가 거리를 두고 멈춰 서 있었다.
연못 중앙에 자리한 내가 미동 없이 바라보자, 남자도 제자리를 지켰다. 불어온 밤바람이 귓가에 머문 그의 백금발을 어지럽혔다.
순간 괜히 눈물이 날 뻔한 내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오늘 제대로 차려입은 김에 확 청혼이라도 할 셈이었는데, 왜 세상만사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 걸까.
늘 이런 못난 꼴만 보이게 되는 것이 자못 속상했다.
맹수를 피해 도망치느라 흙바닥을 구른 꼴이나 잉크로 꼬질꼬질해진 모습. 또 퍽 하면 토끼에서 벌거숭이인 사람이 되어 버리고. 지금은 분명 물귀신 같을 거야.
‘…변장을 할 거면 완벽하게 했어야지.’
작정하고 눈동자 색까지 바꾼 탓에 긴가민가했지만…. 한쪽 귀에 착용한, 나와 나눠 가진 은 귀걸이는 남자의 정체를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다.
조용히 흘겨보고 있자니, 그가 다가오려는 듯 느릿하게 발을 뗐다.
“…다가오면 엉덩이를 때려 주지 않을 거야.”
일순 남자의 몸이 석상처럼 굳어졌다.
이런 창피한 협박에 굴종하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뿐이지 않은가. 기가 찬 얼굴로 토끼 가면을 노려본 내가 으르렁 이를 드러냈다.
“벗어.”
남자는 별반 반응 없이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외진 연못 주변의 기척은 수풀 쪽에 앉아 우리를 주시하는 흑표범 일가족뿐이었다.
곧 그는 느슨한 손길로 목을 조인 크라바트를 만지작거렸다.
직후 내려간 남자의 손이 연미복 재킷 단추를 하나둘 풀기 시작했다.
“……?”
저 무슨 망측한 짓이람. 깜짝 놀라 눈을 가린 나는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전방을 바라봤다.
“뭐 하… 뭐 하시는 거예요?”
“벗으라고 하셨잖아요.”
사근사근히 답한 남자는 벌써 마지막 재킷 단추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그제야 가면이란 단어를 생략한 사실을 깨달은 내가 첨벙 물을 때렸다.
“의복이 아니라 당연히 가면을 말하는 거잖아!”
“…….”
“…요!”
“당연히 의복이라 생각했는데.”
그거야 네 희망 사항이겠지. 차마 당황을 감추지 못한 내가 꽥 소리 질렀다.
“헛소리하지 말고 당장 벗어!”
“전부?”
“그래! …아니, 가면이래도!”
요망한 흑표범은 오늘도 위신과 체통머리가 현저히 부족했다.
실랑이 끝에야 그는 가면을 고정한 머리 뒤쪽 끈을 풀었다. 툭, 해괴한 토끼 가면이 벗겨지며 드디어 남자의 정체가 드러났다.
“……!”
여전히 얼굴을 가린 상태인 내가 손가락 사이로 눈을 껌벅였다.
고작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만 바꿨을 뿐인데 왜 이리 낯설게 느껴질까. 상상 이상의 시각적 충격으로 인해 숨이 턱턱 막혀 왔다.
“…다시 써.”
“-왜?”
이유를 뻔히 알면서 모른 척한 아힌이 재킷을 벗으며 다가왔다. 연못 앞에서 숙여 앉은 그가 나와 시선을 맞췄다.
“비비, 눈을 가릴 거면 제대로 가리든가.”
“…….”
“시늉만 하면 뭐 해, 이미 눈빛이 음흉한데.”
예전부터 아힌의 이런 면이 가장 싫었다. 그냥 넘어갈 수 있는 것을 콕 집어 말하는 점.
“계속 거기 있으려고?”
“…나갈 거야.”
퉁명스레 답한 후, 축축한 드레스를 모아 들던 나는 일순 행동을 멈췄다. 아힌의 뒤편으로 은밀히 접근한 애쉬와 눈이 마주친 덕분이었다.
풀어질 뻔한 표정을 다잡은 나는 눈썹을 꿈틀거려 애쉬에게 신호를 보냈다.
‘애쉬, 밀어 버릴까?’
눈썹 신호만으로도 의사가 통한 애쉬가 슬며시 뭉텅이 같은 앞발을 들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나를 향해 팔을 뻗고 있던 아힌은 비식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서, 애쉬.”
이 맹수는 등에도 눈이 달린 걸까. 금세 만행이 탄로 난 애쉬가 화들짝 눈을 크게 떴다.
가능할 리가 없지. 체념하며 드레스를 모으는 찰나, 애쉬의 입이 크왕 벌어졌다.
풍덩!
방심한 아힌을 흑표범의 무력으로 밀어뜨리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팔을 들어 물보라를 막은 나는 멀거니 입을 벌렸다. 반면 애쉬는 내가 없는 일 년 반 동안 쌓인 게 많았는지 후련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보글보글, 물 표면에서 거품이 들끓더니 이윽고 거대한 장신이 솟아올랐다.
“…헤엄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고양잇과 수인다운 말을 한 아힌이 물에 젖은 은발을 쓸어 넘겼다. 연못에 빠지면서 가발이 벗겨진 모양이었다.
“어딜 가려고.”
“자, 잠깐!”
슬그머니 도망가려던 내 몸이 대뜸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허벅지 아래를 받쳐서 나를 안아 든 아힌이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나인 건 어떻게 눈치챘어?”
빛에 일렁이는 보라색 눈동자가 서서히 붉은색으로 변해갔다. 이전에 한 번 사용했던 너구리 일족의 약을 이용한 듯했다.
“…모를 리가 없잖아.”
“모르던데. 춤출 때 중반 정도까지도.”
어쩜 사람이 이렇게 예리할까. 입을 삐죽인 내가 아힌의 한쪽 귀를 만지작거렸다.
“이 귀걸이, 내가 편지에 동봉해서 보내 준 거잖아. 빼는 걸 잊었지?”
“-아.”
정말 잊고 있었던 듯 아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허술함이 귀엽다는 생각이 들면 중증인 걸까. 조금 멍한 얼굴을 하던 그는 곧 나른하게 웃었다.
“한쪽만 보낸 건 의미가 있단 뜻이겠지.”
“그건-….”
귀걸이의 의미는 물에 흥건히 젖은 몰골로 말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서글프게 내려가는 눈매를 애써 올린 내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클래스 메이트가 그러던데, 돼지 영토에서 귀걸이를 나눠 갖는 건….”
수줍음에 얼굴 위로 방싯 어설픈 미소가 자리 잡았다.
“평생 함께하고 싶단 뜻이라기에.”
아힌은 오늘따라 유난히 어벙한 표정을 여러 번씩 지었다.
심지어 시간이 지날수록 뺨과 귀 부근에 열이 오르더니, 이내 휙 시선을 피하는 게 아닌가. 퍽 신선한 반응이었다.
얘도 부끄러움이 뭔지는 아나 봐. 나는 신기한 마음에 목을 길게 뺐다.
휙, 그러자 아힌은 아예 반대편 방향으로 고개를 틀어 피했다.
‘이게.’
오기로 따라가자, 그는 예고도 없이 쪽 입을 맞췄다가 떼어 냈다.
와중에도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고 간 것을 인지한 나는 양 뺨을 감쌌다. 예쁘게 불그스름해진 아힌과 다르게, 내 얼굴은 홍당무처럼 빨개졌을 게 분명했다.
“평생 함께하자는 말을 하면서 표정은 왜 그래?”
이내 아힌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물었다.
“내, 내 표정이 왜?”
“울 듯한 얼굴인데. 눈썹 끝이 내려갔어.”
기분이 축 처진 게 표정에 드러났구나. 멋쩍게 목덜미를 쓴 내가 고개를 푹 숙였다.
“실은, 이런 말은 좀 더….”
“잘 차려입고, 분위기 좋은 곳에서 선물을 내밀며 말하고 싶었겠지.”
“…어떻게 알았어?”
“낭만 토끼의 생각이야 뻔하니까.”
수를 전부 읽힌 건 딱히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조용히 째려보던 나는 아힌이 조금 더 높이 들어 올린 탓에, 반사적으로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젖은 의복 너머로 근육이 그대로 느껴졌다.
아힌은 고개를 살짝 꺾어 나를 올려다보며 무해한 미소를 걸었다.
유려하기 짝이 없는 웃음에 홀린 내가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봤다. 어쩐지 이곳만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파티장의 왁자지껄한 소음이 멀리서부터 들려왔고, 수풀에서 울리는 고요한 풀벌레 소리가 주변을 채웠다.
똑, 똑.
젖은 옷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연못 표면과 마찰하며 작은 소음을 일으켰다.
나는 구름이 개어 완전히 제 모습을 드러낸 달을 잠깐 바라봤다.
지금 같은 분위기라면 청혼해 버려도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조급함이 밀려든 내가 입을 달싹였다.
“아힌, 우리…!”
“비비.”
“어…?”
“초조해하지 않아도 돼.”
“…….”
“장로회 때문에 우리가 쫓기듯 서두를 필요는 없으니까.”
당장 어머니도 수장직을 넘길 생각은 추호도 없으시고. 아힌은 느릿하게 덧붙였다.
순간 말문이 턱 막혀 버린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어딘지 미안하기도, 한편으론 답답하기도 했다. 혼약에 대한 내 망설임을 아힌이 전부 읽었다는 뜻과도 같았으니까.
“비비, 그거 알아? 네 시선의 끝은 가끔 그레이스저가 아닌 바깥을 향해 있었던 거.”
“…내가?”
“그래. 그걸 알게 되었을 당시엔, 새끼 토끼로 살아왔으니까 바깥이 궁금한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어.”
나와 시선을 맞춘 아힌은 잠깐의 침묵 후 말을 이어 갔다.
“그런데 그게 어느 순간부터 불안해지더군. 잠깐 인간으로 변한 사이 사라지진 않을까, 혹은 완전히 인간화를 치른 후에 떠나가진 않을까.”
“…….”
“그래서 네가 사람으로 변하는 횟수가 늘어가는 게 달가우면서도 달갑지 않았어.”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나는 조금 어안이 벙벙해졌다.
나야말로 완전히 사람이 되어 버리면 더 이상 그레이스저에 있을 명분이 없기에, 매일매일 버려질까 불안에 떨었으니.
우리는 서로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고민을 했던 모양이었다.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사이, 계속해서 아힌의 진심이 이어졌다.
“사실 지금도 불안하지 않은 건 아니야. 당장 조금 전만 해도 가면 쓴 이름 모를 남자랑 춤바람이 나 버리는데.”
“…결국은 아힌이었잖아.”
“그렇긴 하지만.”
박자 느린 음성으로 긍정한 그가 바람 새는 소리를 냈다.
“그래도 원하는 걸 해. 가고 싶은 곳은 가고,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하고. 아카데미든 뭐든.”
끝끝내 잘 참고 있던 눈물이 글썽글썽 차오르며 툭 떨어졌다. 아힌은 자신과의 혼약이 내 발목을 잡을 거라 확신하고는, 오로지 나를 위한 것만 말하고 있었다.
이 못되고 사랑스러운 맹수를 어떡해야 할까. 메인 목을 억지로 삼킨 내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럼 아힌은?”
“-기다려야지.”
“이미 일 년 반이나 기다렸는데도?”
“어쩔 수 없….”
조곤조곤 답하던 그는 문득 미간을 바득 굳혔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못 기다려.”
“도대체 어쩌고 싶은 건데?”
“뭐든 같이 하는 편이 낫겠네. 차라리 입속에 넣어서 데리고 다녀야…,”
찰싹, 정색한 내가 몹쓸 주둥이를 응징했다.
한 대 더 때려 줄까 고심하던 나는 엄지로 그의 붉은 입술을 살짝 쓸었다. 오늘만은 예쁜 말을 더 많이 했으니 너그러이 용서해 줘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뒤를 돌면 언제나 아무도 없는 게 무서웠는데. 이제는 앞에서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이 있단 사실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충족감을 줬다.
“…걱정 안 해도 돼.”
늘 안정감 있게 받쳐 주던 까칠한 손바닥을 떠올린 내가 활짝 미소 지었다.
“내가 돌아갈 곳은 아힌의 옆뿐이니까.”
가득 찬 마음을 고스란히 내보인 나는 망설임 없이 입술을 맞췄다.
‘얘들아, 쉬이, 제발 조용히 하렴. 부탁이란다.’
바스락바스락. 연못 주변의 수풀 속, 릴은 날뛰는 새끼 흑표범 두 마리의 입을 간신히 봉했다. 연못 중간에서 펼쳐지는 한 편의 화폭 같은 장면을 감히 망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고릴라가 수고가 많군. 손을 앙 깨물리는 릴을 돌아본 바라는 앉은 채 슬금슬금 애쉬의 곁으로 다가갔다.
툭, 머리를 기대며 눈치를 살피자, 피식 콧방귀를 뀐 애쉬가 다시 전방을 바라봤다.
평소라면 귀찮다며 앞발로 머리를 후려치고도 남을 텐데. 아무래도 연못 쪽 분위기 때문에 한 수 접어준 모양이었다.
애쉬, 내 마음이 얼마나 큰지 알아?
딱히 궁금하진 않은데.
저 토끼의 졸개보다 내 마음이 이만큼 더 커.
그건 조금 놀랍네.
애쉬의 대답이 뭐가 됐든 좋은 바라가 몸을 기대며 가르릉거렸다. 행복이 흘러넘쳐 연못가를 뒤덮은, 흑표범처럼 까만 밤이었다.
* * *
그레이스가(家)
발렌스 님의 집무 책상에 앉은 나는 못마땅하게 당근 배낭을 등에 멨다.
발렌스 님이 유독 내 토끼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는 탓에, 종종 본모습으로 돌아와 그녀의 사리사욕을 충족시켜 줘야만 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티타임을 가장한 그 시간이었다.
‘뭐, 꼭 나쁘지만은 않지.’
일부러 보여 주기라도 하듯, 발렌스 님은 틈틈이 내가 업무 처리 방식을 눈으로 익히게 했으니까.
나는 대형 치료소 개설과 관련된 서류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아가, 오늘 자 대륙 신문은 읽었니?”
그때 발렌스 님의 나긋한 물음이 들려왔다.
고개를 젓자, 옆에서 대기하던 메이미가 칼같이 대륙 신문을 내밀었다. 묘하게 불길해진 나는 힐긋 눈치를 살피며 신문을 펼쳤다.
「반려 토끼 열풍」
이 괴상한 헤드라인은 뭐야. 기겁한 내가 앞발로 신문을 짚었다.
기사에는 한 손에 토끼를 든 채 광장을 걷는 룬, 그리고 사육장 토끼를 들고 서로의 뺨을 맞댄 지난나 교수와 러셀의 삽화가 포함되어 있었다.
유명 인사가 줄줄이 토끼와 엮이는 것을 시초로, 대륙에 토끼 바람이 불고 있다는… 턱도 없는 기사를 읽은 내가 신문을 거칠게 구겼다.
“아가 네가 일 면에 실렸어야 하는데.”
저는 정확히 말하자면 반려 토끼가 아니라 비상식량이었죠. 분개한 나는 앞발을 척 뻗으며 아쉬워하는 발렌스 님을 지적했다.
“솜뭉치가 두 배로 커지니 더 귀엽구나. 그러고 보니 아힌은 어디 갔지? 이쯤이면 방해하러 올 때가 되었는데.”
“집을 나가셨습니다.”
집무실 한편에서 대륙 신문을 스크랩하던 이브린이 대신 답했다.
“그게 무슨 소린가.”
“현재 토끼님의 전속 보좌관을 선별하는 중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토끼님이 프레디안가(家)의 앨렁 프레디안 님을 추천하는 바람에, 크게 다투시곤 그길로 가출을 감행하셨습니다.”
“그래? 아가, 프레디안가(家)의 자제를 추천한 이유가 있니?”
발렌스 님의 의문 서린 눈길을 피한 내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앨런이 차기 수장의 보좌관 자리를 노린단 소문이 있었으니, 나를 괴롭힌 만큼 혼내주고 싶은 마음에 추천했지.
불순한 사적 감정이 포함된지라, 금세 철회했으나 이미 토라진 아힌이 가출까지 감행한 것이었다.
‘데리러 가야 하나….’
한숨을 내쉬던 나는 주변을 알짱거리는 이브린을 향해 앞발을 으쓱였다.
도대체 너는 아까부터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그 몸짓을 곧바로 해석한 이브린이 가슴에 손을 얹었다.
“저도 토끼님의 보좌관 지원자입니다.”
‘아힌은 어쩌고?’
“이 이브린은 출중한 외모부터 유능한 업무 처리 능력까지 빠질 것 하나 없는 인재입니다. 토끼님, 부디 저를 아힌 님으로부터 빼앗아 주십시오.”
전혀 구미가 당기지 않는 이브린의 자기소개를 외면한 내가 메이미에게 발짓했다. 메이미, 아힌이나 데리러 가자.
“토끼님, 저를 받아 주셔야 합니다. 실은 어젯밤 아힌 님께 신랄한 사직서를 제출해 버렸으니까요.”
‘간사한 흑표범 같으니라고.’
내 꼬리를 붙든 이브린이 빌었으나, 뒷발로 차버린 내가 발렌스 님의 집무실을 나섰다. 첫 만남부터 단단히 꼬인 우리는 영원히 어우러질 수 없는 관계였다.
* * *
끼이익, 경계의 숲 입구에 다다른 마차가 천천히 멈춰 섰다.
가벼운 경장 바지 차림인 나는 망토를 두르며 마차에서 내려섰다. 자연스레 애쉬와 바라가 뒤따라 내렸다.
‘쌀쌀하네.’
아직은 서늘한 바람이 부는 탓에, 애쉬와 바라에게도 망토를 둘러 주던 내가 고개를 틀었다.
“메이미, 여기서 기다리려고?”
“예. 슈와 비온이 경계의 숲 흑표범들을 만나기엔 아직 무리라 사료됩니다.”
생떼 쓰는 슈와 비온을 마차로 밀어 넣은 메이미가 묵례했다.
“그럼 아힌을 찾아서 여기로 올게.”
릴과 메이미에게 인사를 전한 나는 곧장 경계의 숲으로 들어섰다.
양옆에 선 애쉬, 바라와 함께 거닐자 여러 개의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느덧 숲의 중앙쯤 들어온 내가 발을 뚝 멈췄다. 크르릉- 초입부터 계속 쫓아온 경계의 숲 파수꾼, 흑표범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이, 이놈들.’
저번에 나한테 혼쭐이 나고도 정신을 못 차렸나. 원형으로 주위를 둘러싼 그들을 하나하나 눈여겨본 내가 발을 쾅 굴렀다.
의외로 움찔 떤 흑표범들은 딱히 공격 의사 없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기웃거릴 뿐이었다.
혹시 이곳에 먼저 온 아힌에게 명령이라도 받은 걸까. 막연히 추측하던 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삐이- 퀸이 방향을 인도하듯 허공을 돌고 있었다.
손쉽게 가출 흑표범을 찾을 수 있겠다 싶었던 내가 퀸이 하늘에 만든 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덩달아 애쉬와 바라를 비롯한 흑표범들이 우르르 뒤따랐다.
자박자박.
차진 흙길을 걷던 나는 문득 이곳이 모든 일의 시작점이란, 새삼스러운 감회가 밀려들었다.
‘조금만 더 가면 흑표범의 영역일세.’
‘반드시 흑표범들의 손에 죽게 하라 명하셨으니.’
싸한 바람이 불어와 수풀과 나무를 뒤흔들었다.
‘새끼 토끼?’
‘우네?’
‘더 울어 봐.’
돌아버린 맹수. 과거를 아름답게 각색하려 노력해 봐도 아힌의 첫인상은 여전히 엉망진창이었다.
이제는 헛웃음밖에 안 나오는 첫 만남을 회상하던 나는 제자리에 뚝 멈췄다. 멀리, 평평한 수풀 사이에 고독하게 앉아있는 흑표범이 보였다.
“……?”
인상을 찌푸린 나는 경계하며 조심조심 다가갔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곧바로 고독한 흑표범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오늘 점심경, 그레이스저에서 가출한 흑표범이 아닌가. 바로 곁까지 다가간 나는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아힌, 여기서 뭐 해? 본모습으로는 왜 돌아간 거고?”
이게 다 무슨 꼴이람.
아힌은 본모습으로 돌아간 것도 모자라, 짚으로 엮은 바구니 속에 앞발 하나를 욱여넣은 상태였다.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자니, 뒤늦게 오늘이 무슨 날인지 떠올랐다.
아침저녁은 다소 쌀쌀하고 하늘이 청명한 날씨. 아힌이 나를 바구니 속에서 꺼내어 준 날이었다.
또라이는 깜짝 이벤트도 또라이처럼 하는가 봐. 그럼에도 울컥 치미는 감정을 누른 내가 옆에 무릎을 모으고 앉았다.
‘새끼 토끼?’
“-흑표범?”
장단을 맞춘 내가 일부러 아힌을 따라 나른한 음성을 냈다.
끄덕, 아힌은 긍정하며 마치 자신을 주워 가라는 듯 한쪽 앞발을 내밀었다.
내가 언제 이렇게 냉큼 데려가 달라 그랬어. 가자미눈으로 흘기던 나는 다소 망가진 바구니를 보자마자 웃음이 났다. 억지로 들어가려다 망가뜨린 모양이었다.
‘더 울어 봐.’
“울어 봐, 그럼 살려 줄 테니.”
아힌은 앞발로 눈을 비비며 강제로 눈물을 쥐어짜 냈다. 노력이 무색하게도 눈물은 한 방울이 전부였다.
‘근성이 부족하네. 모레 잡아먹을 테니까 노력해 봐.’
“근성이 부족하네. 잡아먹어 버릴까?”
여기서 고개는 왜 그렇게 열심히 끄덕여. 바구니를 준비한 것까진 좋았지만, 그 이후의 태도는 전부 실격이었다.
참나. 어이없이 코웃음 친 내가 수염을 당기자, 아힌은 모른 척 손에 뺨을 비벼 댔다.
“비상식량으로 데려가야겠네.”
잡초가 묻은 망토를 탁탁 털어 낸 나는 바구니를 들며 몸을 일으켰다.
비상식량으로 끌려가는 주제에 뭐가 좋은지, 아힌은 오히려 꼬리로 내 손목을 휘감았다.
이동할 기색을 비치자 애쉬와 바라를 비롯한 흑표범들이 길을 비켰다.
잠깐 제자리에 선 나는 멀리 토끼 영토로 가는 길목을 바라봤다. 이어서 천천히 그레이스저가 있는 방향을 돌아봤다.
‘저는 아힌 님의 수족, 러드 이브린이라 합니다.’
‘그래, 메이미. 이 아이가 아힌의 먹이라?’
‘아가, 손을 내밀어 보거라.’
이브린과 발렌스 님, 메이미도.
‘이분, 인간화를 푼 수인이죠?’
‘역시 그냥 토끼가 아니라 수인이었군.’
‘말세로다, 간병을 하는 것도 모자라 말을 알아듣는 토끼라니.’
‘망할 토끼.’
룬과 할아버님, 퀸.
그리고 내 곁을 묵묵히 지켜 주는 애쉬와 바라까지.
모두를 만난 곳은 높다란 첨탑이 치솟은 그레이스가(家)였다.
“아힌.”
경계의 숲에선 보이지 않는, 그 아름다운 저택을 그린 나는 아힌을 향해 행복하게 웃어 보였다.
“집에 가자.”
우리가 함께 살아갈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