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ymbiotic Relationship Between the Rabbit and the Black Panther RAW novel - Chapter (73)
토끼와 흑표범의 공생관계 <외전1>(73/75)
<5권 : 외전1, 외전2, 에필로그>
<외전1>
비비와 아힌이 재회한 지도 어느덧 이 년. 그사이 슈와 비온은 그레이스 저택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누구야! 대체 누가 연회에 올라갈 당근 케이크를 훔쳐 먹은 거야!”
“내 목검이 왜 이래? 어째서 이갈이 자국이…?”
“세상에, 아힌 님의 셔츠가 넝마가 되어 버렸잖아!”
“슈-! 비온-!”
아무튼 사랑을 듬뿍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났다.
시간이 흘러, 질풍노도의 시기에 들어섰을 즈음. 그들에게 닥친 인생 최대의 시련은 다름 아닌 자아 정체성에 관한 것이었다.
두 흑표범을 번뇌에 빠지게 만든 건 바로,
-슈, 비온. 어엿한 성수(成獸)가 되기 위해서 이제는 알아 둬야 할 것이 있다.
어렵사리 꺼낸 바라의 진심 어린 한마디였다.
-사실 너희는… 토끼가 아니란다.
우리가 비비와 같은 종족이 아니라니! 일생을 토끼로서 살아온 그들에겐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다.
비비를 따라 깡충깡충 뛰어다니고, 건초가 주식인 줄 알고. 자신들의 동그란 귀도 언젠가는 비비처럼 길쭉해질 거라 굳게 믿어 왔는데.
-이럴 수가….
깊은 밤, 산책으로 심란한 마음을 달래던 비온이 폭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엄마랑 아빠만 우리와 생김새가 달랐잖아.
-그게 아니지. 애초부터 우리는 비비가 아니라 엄마 아빠랑 똑같이 생겼던 거야.
정정하던 슈는 복도에 비치된 거울 앞에서 멈춰 섰다. 둥근 귀에 긴 꼬리, 예리한 송곳니까지. 비비와 다른 면면을 마주한 슈가 세뇌하듯 고개를 저었다.
-아냐, 비온. 누가 뭐래도 우리는 엄연한 토끼야. 조금 몸집이 클 뿐이라고.
-거짓말. 세상에 우리처럼 산더미만 한 토끼가 어디 있어?
아흑, 비온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외면하며 울먹였다. 인지하고 보니 비비와는 앞발 생김새부터가 달랐다.
-인간들이 우릴 속였어. 다들 우리더러 애쉬와 바라의 토끼 같은 자식들이라고 했으면서!
-비온….
-누이, 이제 우린 비비의 친구가 아닌 거지? 언젠가는 비비랑 헤어져야 하는 거야?
슈는 이브린의 조언을 되새기며 비온을 타일렀다.
-정신 차려, 졸개의 졸개가 비비는 그릇이 큰 토끼라고 말했잖아. 설마 비비가 종족이 다르단 이유로 우리를 버리겠냐?
-경계의 숲에서 만난 녀석이 토끼랑 흑표범은 함께 살 수 없다고 했는걸!
-어떤 똥강아지 같은 놈이 그래?
-자하 녀석이….
-야, 너는 그 허풍쟁이의 말을 믿어?
의연한 척 대꾸하는 슈의 눈망울이 약간이지만 흔들렸다. 누이의 반응에 더욱 불안해진 비온은 결국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어떡해? 나 너무 슬퍼….
-그만 울고 방으로 돌아가자. 이 누님께서 흑표범이 토끼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테니까.
어차피 전방은 비비의 침실-과거 아힌의 침실-이기에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슈가 버티는 비온의 꼬리를 물어 당기는 찰나, 갑작스레 비비의 침실 안에서 고성이 오갔다.
벌컥. 곧장 문이 열리며 네글리제에 배낭을 메고, 베개까지 단단히 챙겨 든 비비가 퉁 튕겨 나왔다.
토끼 일족답게 층계참으로 내려가는 속도가 바람처럼 빨랐다. 하얀 머리카락이 어둠 속에서 잔상처럼 흔들렸다.
“비비!”
뒤이어 비비의 망토를 집어 든 아힌이 뛰어나왔다. 비비가 네글리제를 입은 반면, 그는 막 퇴근한 듯 말끔한 차림새였다.
난데없는 소란에 울던 것도 잊은 비온이 슈를 톡톡 쳤다.
-…누이, 또 다툰 걸까? 이번에는 조금 심각해 보이지 않아?
-보나 마나 말 안 듣는 저 졸개가 하극상을 벌인 거겠지.
-하긴, 쟤도 참 나빠. 직속 졸개란 이유로 매일 비비 옆을 차지하면 좀 잘할 것이지.
신랄하게 아힌을 험담하던 슈와 비온은 불현듯 시선을 맞췄다.
그렇다면. 저 못된 졸개를 몰아내고, 우리가 비비의 직속 졸개가 되면 헤어질 일은 전혀 없지 않을까. 생각이 일치한 두 흑표범은 어둠 속에서 음산하게 눈을 빛냈다.
푸드덕.
한편, 교목에서 그 광경을 내려다보던 퀸은 순간 묘한 불길함에 인상을 찌푸렸다. 두 흑표범이 비비와 아힌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삐약 삐약 떠드는 게 영 수상했다.
저것들이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심중을 파악하기 위해 주시했지만, 안타깝게도 매가 흑표범의 언어 체계를 이해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영원히.
* * *
아힌과 재회하고 나서도 이 년.
지난 시간 동안 나는 한층 훌륭한 토끼 수인으로 거듭났다.
내내 아카데미 전체 수석을 유지하고, 토끼 수인이 학생회장으로 선출되는 전례 없던 일도 이룩하고. 심지어 이것은 그레이스가(家)와의 관계를 완전히 숨긴 채 이뤄낸 나름의 성과였다.
어느덧 낙엽이 지고 겨울의 끝자락, 아카데미 졸업식이 머지않았을 시점이었다.
‘토끼님, 이제 집무실로 들어갈 테니 절대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귓가로 이브린의 낮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아힌 님께 기척을 읽힐지도 모르니까요. 그분은 사람이 아닙니다.’
준비됐어. 토끼로 변한 채 이브린의 베스트 속에 숨은 나는 앞발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와 동시에 숨죽이자, 이브린이 태연스레 개인 책상 앞에 착석하는 게 느껴졌다.
수월히 집무실 잠입에 성공한 나는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이 번거로운 행위는 전부 아힌의 심중을 읽기 위해서였다. 날이 추워진 이후부터 그가 묘하게 달라졌기에.
이상해진 기점이 따로 있는 건 아니었으나, 순간순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나를 은근히 피하고 있단 사실을.
자세히 말하자면 형용 못 할 거리감이 생겼다는 표현이 맞았다.
처음에야 저 맹수가 또 관심이 고픈가 보다… 생각했지만, 그 기행이 생각보다 길어지는 게 문제였다.
기행의 시작은 퇴근이 늦어진 것에서부터였다.
아직은 아카데미 기숙사 생활을 하기에, 내가 저택에 머무는 날이면 아힌은 서류를 침실로 가져오면서까지 조기 퇴근을 하곤 했다.
그런 그가 요즘은 새벽이 깊어서야 슬그머니 들어오고. 아침도 바쁘다는 핑계로 함께 하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비단 이뿐만이 아니었다. 대화는 평소처럼 하면서 왠지 시선을 맞추지 않고, 피부가 닿는 횟수도 차차 줄었다.
그러나 주변인들은 눈치채지 못할 수준의 미세한 변화였기에, 굳이 언급하기에도 애매한 사안이었다.
이유를 물었을 때 아힌이 그런 적 없다고 답하면 할 말이 없어질 만큼의, 딱 그 정도.
그럼에도 나는 가슴 한편이 뻥 뚫린 듯한 묘한 상실감을 느꼈다. 잠을 청하다가도 물 흐르듯 내게서 시선을 돌리는 아힌이 스쳤고, 강의를 듣다가도 손이 닿았을 때 자연스레 거리를 벌리던 아힌이 떠올랐다.
그 애매한 변화는 졸업을 앞두고 그레이스저에서 머물기 시작한 이후 더욱 여실히 와닿았다.
결국 지난밤.
말도 못 한 채 앓던 나는 핏발 선 눈으로 아힌의 퇴근을 기다렸다. 밤이 깊어지고 소리를 죽인 발이 침실로 들어왔을 때,
‘아힌, 왜 요즘 나를 피해?’
내내 목구멍으로 삼켜 온 물음을 던지고 말았다.
그러나 기대한 진심은 들을 수 없었다. 하물며 그런 적 없다며 시치미를 떼거나, 다른 핑계라도 댈 줄 알았던 아힌은 오히려 아무런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어째서 대답을 못 하는 걸까.
예상 못 한 긴 침묵은 마치 살얼음판 한가운데 서 있는 듯한 긴장을 불러왔다. 참을 수 없이 불안하고 두려웠다.
그 고요를 버티지 못한 나는 충동적으로 침실을 뛰쳐나와 버리고 말았다. 그토록 피하고 싶다면 당분간 떨어지자는, 오기 어린 가출 선언과 함께.
거기까지가 지난밤에 일어난 소동이었다.
‘숨이 안 쉬어져.’
답답함에 살짝 꼼지락거리자, 손가락이 몸을 톡톡 두드려 왔다.
‘토끼님, 간지러우니 제발 얌전히.’
오늘만큼은 순순히 협조 중인 이브린의 신호였다.
하지만 옷 속이 너무 갑갑한 걸 어떡해.
심지어 셔츠 너머로 느껴지는 이브린의 탄탄한 복근-의외로-이 뺨을 짜부라트렸다. 하는 수 없이 조심스레 뺨을 움직이던 나는 뻣뻣하게 얼어붙었다.
“흡,”
결국 간지러움을 참지 못한 이브린이 웃음을 터뜨리고 만 것이었다.
‘어떡해, 들켰나?’
긴장한 나는 입을 가로막은 채 청각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집무실의 어느 누구도 웃음의 여부에 관해 묻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브린이 홀로 웃어대는 정도는 놀랄 일도 아닌 모양이었다.
난생처음으로 이브린의 인성에 감사한 나는 숨죽여 시기를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개인 책상에 앉아 업무를 지속하던 이브린이 내게 신호를 보냈다. 슬슬 아힌을 떠보겠다는 의미였다.
“아힌 님.”
집무실에 퍽 건조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아침부터 저택이 꽤나 떠들썩합니다만.”
“-비비가 어머니의 침실로 가출한 것 때문이겠지.”
대답하는 아힌의 표정을 볼 수 없는 게 내심 갑갑했다.
“…예. 송구하나 어쩌다가 장군님의 분노를 사셨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하늘도 노해서 곧 천둥 번개가 칠 겁니, 컥,”
자연스레 이어지는 조롱에 분개한 나는 이브린의 배를 뒷발로 뻥 차버렸다.
‘필요만 말만 해, 필요한 말만!’
“이브린, 갑자기 왜 그래?”
아힌의 의아한 물음에, 그제야 정신이 든 내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죄송합니다, 배가 조금…. 원래 저 같은 미인은 병약한 법이죠.”
“헛소리만 지껄여 대니 배에 천둥 번개가 내리지.”
다행히 이브린의 의연한 대처로 인해 아힌은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쟤가 웬일로 무르게 넘어간대?’
아무렴 어때. 안심한 나와 이브린이 안도의 숨을 삼키고 있을 때였다.
“이브린.”
“예.”
“자리에서 일어나 봐.”
앞뒤 생략된 아힌의 명령으로 인해 우리는 뚝 굳고 말았다.
지금 일어나면 의복 속에 나를 숨겨 둔 사실을 들킬 텐데. 쿵, 쿵. 빠르게 뛰는 심장이 내 것인지 이브린의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드물게 뜸 들인 이브린은 느지막이 입술을 열었다.
“시키실 거라도?”
“오늘따라 말수가 적은 게 조금 수상해서.”
도대체 평소에는 얼마나 말을 많이 한다는 거야. 초조해진 내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직 아힌이 이상한 태도를 보인 이유를 알아내지 못했는데. 오늘만큼 아힌의 비상한 눈치가 원망스러운 날이 없었다.
드르륵, 결국 별다른 방안을 찾지 못한 이브린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야를 가린 의복이 이다지도 답답할 수가 없었다.
무거운 정적이 견디기 힘들어질 즈음, 아힌의 느릿한 음성이 들려왔다.
“하루 사이에 배가 많이 불었네.”
“부끄럽습니다.”
이브린은 내가 뱃살이라도 되는 양 느른히 문지르며 너스레를 떨었다.
“조식을 너무 많이 먹었나 봅니다. 메뉴에 제가 즐겨 먹는 고기가,”
“벗어.”
“…예?”
“베스트.”
그러나 저 맹수의 집요한 추궁은 피할 길이 없었다.
하여간 눈치만 비상하게 빨라선.
더는 숨기는 건 무리라고 판단한 나는 이브린의 옷 속에서 헤엄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이상 뻔뻔하게 나가는 수밖에.
앞발과 뒷발을 구르며 거슬러 올라가자, 다른 보좌관의 짧은 비명이 들렸다.
“맙소사, 이브린 님의 뱃살이…!”
드디어 베스트의 첫 단추까지 다다른 나는 바깥으로 고개를 쏙 내밀었다. 그와 동시에 이쪽을 물끄러미 주시하고 있던 아힌과 시선이 부딪혔다.
뭐, 뭘 봐. 어제부로 엇나가기로 결정한 내가 도끼눈을 떴다. 비록 염탐 시도는 들켰으나 마음만은 당당했다.
내가 숨어 있을 것까진 생각 못 했던지, 조금 놀란 표정을 짓고 있던 아힌은 이내 입술을 비틀었다. 기분이 저조하다는 증거와도 다름없었다.
“…이브린, 조식에 먹은 고기가 토끼 고기였나 봐?”
“아힌 님.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 했는데, 여기 첩자가 있습니다.”
척, 단호한 손가락이 내 귀를 향했다. 작전에 실패하자마자 배신을 택한 이브린의 손가락이었다.
“저는 결백합니다. 아힌 님의 동태를 염탐하는 것에 협조하란 협박을 당했을 뿐입니다.”
흑흑. 높낮이 없는 음성으로 우는소리를 낸 그가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단번에 첩자로 몰린 나는 씩씩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몹쓸 흑표범 같으니라고. 네가 자진해서 아힌의 심경을 살필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했잖아!
앞발로 이브린을 응징하는 와중,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어느새 다가온 아힌이 이브린에게서 나를 뺏어 든 탓이었다.
새삼 이게 며칠만의 접촉이란 사실을 깨닫자마자 울컥 설움이 치밀었다. 굳은살 박인 손바닥이 퍽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비비.”
속이 꼬인 내 앞으로 아힌의 얼굴이 드리워졌다.
창문을 등진 아름다운 얼굴은 자칫 조각상처럼 느껴질 만큼 잔잔했다. 감정이 격양된 나와 달리 한 치의 동요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째서일까. 나는 그 고요한 얼굴에서 오랜만에 처음 만났을 때의 낯섦을 느꼈다.
어제도, 그저께도. 하루 이틀도 아닌,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갈 때부터 보인 아힌의 행동거지가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지나쳤다.
왜 그래?
왜 자꾸 나를 피해?
내가 뭐 잘못했어?
쉽게 내뱉지 못한 서운하고 속상한 감정이 퍼져나가 파문을 일으켰다.
“비비. 나한테 화나서 이러는 건 알겠지만,”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린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아힌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그래도 이브린의 옷 속은 싫어.”
‘…지금 그런 걸 따질 때야?’
뚝, 내 안에서 이성 줄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네가 나를 멀리하는 바람에 몇 날 며칠을 끙끙 앓았는데. 대체 왜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 거야.
‘이제 됐어.’
피하든 말든, 나도 이젠 이유 따위 몰라도 돼.
“비비, 표정이 왜 그,”
‘내려 줘.’
참아 온 설움이 터진 나는 다가오는 아힌의 손가락을 충동적으로 꽉 깨물어 버렸다.
전례 없는 일에, 붉은 눈동자가 충격과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것은 입을 가로막은 이브린과 보좌관들도 마찬가지였다.
‘나 갈 거야.’
내려줘, 아랑곳하지 않고 잘근잘근 물던 나는 앞발로 바닥을 가리켰다.
넋 나간 아힌이 기계적으로 몸을 굽히자, 손에서 뛰어내린 내가 팽하니 입구 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닫힌 문을 토끼의 힘으로 열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대리석 문을 아득하게 올려다보던 나는 문득 못 보던 그림으로 시선을 옮겼다. 연무장에서 체조를 하는 토끼의 초상화였다.
다 없앴다고 생각했는데, 저런 수치스러운 장면은 또 언제 그려 둔 거람. 복받친 감정에 기름까지 부어진 나는 멀거니 선 보좌관의 바지 자락을 흔들었다.
“이, 이 그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용케 의사를 알아챈 보좌관이 허둥지둥 초상화를 떼어 내밀었다.
좍, 좍. 날카로운 앞발질에 따라 체조하는 토끼가 갈기갈기 찢어졌다.
“그건 안 돼. 세상에 한 장밖에 없는,”
드물게 당황을 내비친 아힌이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졌다.
저리 가. 그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나는 앞발로 힘차게 구두코를 밀었다.
‘…악!’
그러나 오히려 뒤로 벌렁 넘어지고 말았다.
“안 다쳤어?”
나를 피할 때는 언제고, 마음대로 만지지 마.
시련에 굴하지 않고 일어난 나는 다가오는 아힌의 손을 찰싹 쳐 냈다. 덕분에 2차 충격을 받은 그의 동공이 순간적으로 물결쳤다.
일순 심했나 싶었지만, 마음을 다잡은 내가 보좌관의 손을 빌려 책상 위로 올라섰다.
댕댕댕, 솜방망이 같은 앞발이 간이 종을 여러 번 울렸다. 동시에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애쉬가 집무실로 들이닥쳤다. 염탐을 들켜 도주해야 할 때를 대비한 히든카드였다.
진짜 미워. 우리는 달아나기 직전까지도 아힌을 길이길이 째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 * *
짙은 새벽. 휙, 검은 인영이 은밀히 테라스 난간을 뛰어넘었다. 곧장 발렌스의 침실로 이어지는 테라스였다.
소리 죽인 침입자의 발걸음은 침실을 가로질러 이윽고 넓은 침대 앞에서 멈췄다.
“함부로 수장의 침실에 잠입하다니, 목이 두 개라도 부족할 텐데.”
그 순간 발렌스의 우아한 음성이 적막을 깨뜨렸다.
“-아힌.”
“…들어올 때부터 이미 알고 계셨지 않나?”
“그렇긴 하다만.”
비뚜름히 웃으며 일어난 발렌스는 침대와 가까운 램프 불을 밝혔다. 침실이 환해지는 동시에 깊이 잠든 비비가 드러났다.
툭, 가볍게 침대에 걸터앉은 아힌은 이틀째 가출 중인 비행 토끼를 내려다봤다. 침대 헤드와 반대로 누워 있는 것을 보아 또 자면서 반 바퀴 회전한 모양이었다.
무심코 검지로 하얀 뺨을 쓸려던 그가 멈칫했다. 낮에 비비에게 손가락을 깨물린 사건이 떠오른 탓이었다.
비비는 정말 싫은 놈만 깨문다고 알고 있는데. 미움받는 것도 나름 짜릿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의 미움은 독이었다.
아힌은 심각한 얼굴로 자는 비비에게서 시선을 돌려 발렌스를 흘긋 봤다.
“어머니, 뺨이 부으셨는데?”
조르륵, 잔에 와인을 따르는 중인 그녀는 뺨이 미세하게 부은 상태였다.
“방심한 탓에 토끼의 발에 차였지. 의도가 없는 공격이라 기척을 읽기가 어렵더구나.”
“그거 제법 아플 텐데.”
“따끔하더군.”
대륙에 내게 발찌검을 할 수 있는 자는 아마 그 아이밖에 없을 거다. 농담 아닌 농담을 던진 발렌스가 입에 술잔을 가져갔다.
와인을 한 모금 머금은 그녀는 반 박자 늦게 말문을 뗐다.
“그래서, 왜 그러니?”
왜 비비를 피하냐는, 우회적인 질문의 의미를 모르지 않는 아힌은 침묵을 선택했다.
“뭐… 내게도 이유를 말해 줄 것 같진 않구나.”
딱히 답을 기대하지 않은 발렌스가 잔으로 문 쪽을 가리켰다.
“얼굴도 보았으니 이제 그만 나가 보거라.”
“조금만 더.”
“하루도 못 견디고 내 방에 침입할 정도면서, 무슨 용기로 토끼를 멀리하는지 모르겠구나.”
“…….”
“힘들게 만들지 말렴. 네게서 토끼를 두 번 숨기는 건 내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란다.”
한쪽 눈썹을 든 아힌은 발렌스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현재 비비가 가출한 상황만으로도 아힌의 세상은 이브린보다 지독하고 끔찍한데. 비비와 그런 식으로 생이별을 경험하는 건 한 번으로 족했다.
발렌스 또한 몸을 비스듬히 틀어 그를 마주 봤다. 아힌이 때때로 비치는 무감한 표정은 이디스를 너무도 빼닮아 있었다.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군.”
비비의 답답한 심정을 십분 이해한 그녀가 나긋이 미소 지었다.
아마도 페로몬 발작은 아닐 테고. 과거에 비비를 잃을 뻔한 이상, 아힌은 페로몬 발작을 숨기는 둥의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었다. 보통 극성이 아니니까.
발렌스는 비비를 제대로 만지지도 못한 채 손끝만 만지작거리는 아힌을 응시했다.
이어서 잠든 비비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세상을 잃은 듯한 근심이 내려앉은 표정이었다.
퍽 심각한 미간을 바라보던 그녀는 비비가 잠들기 직전에 한 말을 떠올렸다.
‘아힌이 가끔씩 우울해 보인다… 라.’
달리 이유도 없이, 하물며 다른 이도 아닌 아힌이?
고민하던 발렌스는 우연히 침실에 비치된 달력을 발견했다. 겨울의 끝자락은 비비의 졸업식, 그리고 봄은 혼약식.
“아힌, 어울리지 않게 메리지 블루라도 느끼는 거니?”
“메리지 블루?”
“혼인을 앞둔 이들이 큰 이유 없이 우울감을 느끼는 증상이지.”
아힌은 말도 안 된다는 듯 입매를 끌어 올렸다.
“그럴 리가요.”
“하기야, 나와 이디스도 평이하게 지나갔으니.”
“당연히 그렇겠죠, 두 분의 혼인 과정은 아직도 회자될 정도니까.”
흑표범 영토의 최연소 수장과 대륙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칭송되는 미인의 사랑. 릴리언은 이디스를 험담하면서도 은근히 두 사람의 이야기를 자랑스러워하곤 했다. 불꽃 같은 세기의 사랑이었다며, 어린 아힌의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해 줄 만큼.
“그 반대지.”
의미심장하게 웃은 발렌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반대라는 말은….”
비비의 코를 콕콕 누르며 괴롭히던 아힌이 고개를 들었다. 발렌스의 말이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애초에 사랑이 없는 혼인이었으니까.”
“……?”
“메리지 블루 같은 걸 느낄 이유도 없지 않겠니?”
“……?”
릴리언이 듣는다면 지팡이를 수십 개는 부러뜨리고도 남을 사실이 아닌가.
입을 살짝 벌린 아힌은 저도 모르게 만지고 있던 비비의 코를 비틀었다. 헉, 덕분에 숨쉬기가 버거워진 비비는 망망대해에서 헤엄치는 꿈을 꾸며 발을 허우적거렸다.
* * *
열여덟. 태생부터 고귀한 발렌스는 규율에 엄격하고 명예와 권력을 우선시하는 사람이었다. 또한 본인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에 민감하며, 애당초 침입을 허락하지조차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이디스는 이단 같은 존재였다.
페이언트 가문의 삼남으로서 비교적 책임에서 자유롭고, 머릿속에 명예란 단어 따윈 존재하지 않는 놈팡이가 아닌가. 그럼에도 빼어난 미모로 타인의 호의를 쉽게 얻는 점이 이상하게 얄미웠다.
정반대의 성향인 이유에서일까. 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사교 모임에서 마주쳤다 하면 냉랭한 분위기를 피워 냈다.
애당초 서로의 눈동자에 뻔히 드러나 있었다. 발렌스는 이디스를 재수 없는 종자로, 이디스는 발렌스를 오만하고 꽉 막힌 수인으로. 다만 신분의 상하 관계상, 발렌스만이 노골적으로 껄끄러운 티를 낼 뿐이었다.
‘골이 깨질 것 같아.’
그리고 그날은 유독 장로회에서 혼인, 후계를 외치며 발렌스를 들들 볶은 날이었다.
실수인 척 장로회가 머무는 회의장을 폭파시켜 버릴까. 지지직, 집무실에서 서명 중인 서류에 구멍이 뚫렸다.
“그거 중요한 서류 아닌가?”
극단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발렌스는 천천히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창틀에는 검은 인영이 걸터앉은 상태였다. 구름에 가렸던 달이 드러나며, 그녀가 익히 아는 백금발이 밤바람에 흩날렸다.
이내 시선을 뗀 발렌스는 서류에 서명을 지속하며 물었다.
“이곳을 허락 없이 드나들면 목이 잘리는 건 아시나요?”
“너무하네요, 수장님. 장로회 소속인 조부님을 따라온 건데도?”
“제아무리 고위 귀족이라도 즉각 처벌이 불가능한 건 아니죠. 또한 당신과 내가 이렇게 따로 만날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하물며 사교 모임도 아닌, 이런 식의 독대부터가 처음이었다.
팔락팔락, 서류를 넘긴 발렌스가 서명을 지속했다.
“처벌 전에 이곳에 온 용건이나 묻,”
“혼인하죠.”
“…….”
“우리.”
뚝, 서류 위를 유영하던 펜촉이 멈췄다.
고개를 든 발렌스는 창틀에 앉은 이디스를 응시했다. 남자는 상상도 못 한 말을 던져놓고선 뻔뻔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 있었다.
매끄러운 미소는 오늘도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여전히 재수 없었다.
* * *
이디스 페이언트.
그는 페이언트가(家)의 삼남으로, 가주 자리를 잇는 것엔 무리가 따르는 평범한 영식이었다.
단, 동물도 눈을 비비게 만드는 잘난 외모와 정체를 알 수 없는 희귀한 페로몬을 지닌 특이점만 빼고는.
어쨌든 그럭저럭 평안한 삶을 영위해오던 이디스는 어느 순간부터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딜 가나 뒤따르는 시선과 출처 모를 소문이. 껍데기만 보고 쏟아지는 혼담서가. 불필요할 만큼의 지나친 관심이 귀찮기 짝이 없었다.
때때로 어둠 한가운데 선 제 주변으로 무수한 눈동자가 떠다니는 기분마저 들었다.
이 모든 건 대륙 끝자락까지 알려진 아름다운 외모 하나 때문이었다.
그래서일까.
이디스는 보통의 수인이라면 절대 하지 않는 취미를 즐기기 시작했다. 지금처럼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흑표범의 모습으로 나돌아다니는 것이었다.
탁탁, 어김없이 흑표범의 모습으로 변한 그는 달리는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목적지는 토끼 영토로 이어지는 경계의 숲이었다. 숲 특유의 공기와 바람에 역행하는 속도감은 따분한 일상의 몇 없는 탈출구였기에.
‘…혼담이 들어왔느니라. 여우 영토의 차기 수장 측에서!’
숨 가쁠 만큼 달리던 발이 서서히 느려졌다.
오늘 오전, 아버지인 릴리언이 꽥 외친 소식은 생각 이상으로 성가신 종류였다.
‘그 미인 수집가?’
‘그래!’
‘하기야, 그런 자가 왜 나를 가만히 두나 했어.’
‘이놈아, 아비가 지금 농담하는 걸로 보이더냐?’
‘…농담이 아니라고요?’
‘내 이럴까 싶어 적당한 영애와 약혼이라도 해두라고 몇 번을 말했건만. 이 혼담을 대체 어찌 거절할 셈이냐?’
여우 영토 차기 수장과의 혼담.
이번만은 지금까지처럼 적당한 핑계를 대며 거절하기엔 무리가 따랐다.
비록 페이언트가(家)가 고위 귀족이라지만, 한 영토의 수장이 될 자와의 혼담을, 그것도 삼남이 쉽게 내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더욱이 여우 영토는 흑표범 영토와 외교적으로 가까워지기 시작한 곳이기에, 꼼짝없이 혼담에 응해야 할지도 몰랐다. 심지어 여우 영토 차기 수장의 네 번째 정부로.
눈앞이 아득해진 이디스가 꼬리로 바닥을 탁탁 쳤다.
언젠가 제 혼인이 가문의 유리한 패로 이용될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타 영토, 하물며 차기 수장의 부군은 생각조차 못 한 일이었다.
필시 외교적으로도 휩쓸릴 테고. 일처다부제인 여우 영토의 특성상, 정부 간의 알력 싸움도 모자라 평생 암살 위협에 시달릴 게 분명했다.
그러게 좀 작작 예뻤으면 좋았을 것을.
하- 앞발로 뺨을 짚은 이디스가 근심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의욕 없이 어슬렁거리던 그는 드넓은 초원 앞에서 우뚝 멈췄다. 영혼이 빠져나간 눈동자 속에 한 여성이 들어찼다.
곧 귀를 맑게 만드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안 그래도 찾고 있었는데.”
초원 한복판에 자리 잡은 그녀는 이디스를 부르며 옆자리를 두드렸다. 저항 없이 다가간 이디스는 얌전히 옆자리에 착석했다.
“다행이야, 오늘도 만나지 못하나 싶었거든.”
미소 지은 그녀가 이디스를 향해 왼손을 내밀었다.
“손.”
‘너는 앞발이 손으로 보여?’
애초에 흑표범을 교육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이디스는 눈썹을 꿈틀거리면서도 얌전히 앞발을 내밀었다.
“반대편 손.”
‘제길.’
착, 뭉텅이 같은 반대편 앞발이 여성의 손바닥 위로 안착했다. 거기서 멈추지 않은 그녀는 이디스를 향해 검을 휘두르는 시늉을 했다.
“얍.”
풀썩, 이디스는 장단에 맞춰 꼴까닥 죽는시늉을 했다.
도대체 저가 왜 이러고 있는 건지. 주인과 놀아주는 전 대륙의 반려동물들에게 경의가 밀려드는 순간이었다.
“착하다.”
드디어 만족한 여성의 입꼬리가 나긋하게 말려 올라갔다. 움직인 손이 기특하단 듯 이디스의 턱을 살살 쓸었다.
“당분간은 이곳에 오기 힘들 거야. 아무래도 바빠질 것 같거든.”
‘네가 바쁜 게 하루 이틀인가?’
“-슬슬 혼인을 할까 싶어서.”
쿵, 일순 발밑이 꺼지는 듯한 기분을 느낀 이디스가 그녀를 돌아봤다.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여성은 그저 발끝을 응시하고 있었다.
풀어 내린 은발을 귀 뒤로 넘기는 손가락은 검을 쥐는 자 특유의 굳은살이 박인 상태였다. 그리고 옮겨진 시선이 긴 속눈썹과 살짝 열린 붉은 입술을 지났다.
근래 이디스의 신장이 부쩍 자란 것처럼, 여성도 날이 지날수록 소녀티가 사라지고 있었다.
그때 바람에 흩날린 은발이 그의 코끝을 간질였다. 그제야 제가 멍하니 여성을 바라보고 있단 사실을 깨우친 이디스가 황급히 고개를 틀었다.
‘-무슨 상관이라고.’
여성은 당장 내일 혼인식을 치른다 해도 전혀 놀라울 게 없는 신분의 사람이었다.
발렌스 그레이스.
그녀와의 이런 이상한 관계는 벌써 이 년째 이어지고 있었다.
만남의 시작은 이디스가 여느 때처럼 흑표범의 모습으로 경계의 숲을 쏘다니고 있을 때였다.
때마침 마차로 주변을 지나가던 발렌스는 그의 아름다움에 홀려-이디스의 시선- 접근을 시도했다.
평소 그녀에게 딱히 좋은 감정이 없었던 이디스는 놀리는 심정으로 흑표범인 시늉을 지속했다.
아직도 무슨 오기였는지는 모르겠다.
사교 모임에서 보아 온 발렌스의 깔아보는 듯한 오만한 시선이 싫어서일까. 아니면 처음 마주한 그녀의 경계 없는 표정에 이끌려서일까.
문제는 금세 들통날 거란 예상과 달리, 발렌스가 이디스를 보통의 흑표범이라 여긴 것에서부터 발생했다.
흑표범 영토에서 가장 강한 그녀가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는데.
따로 속셈이 있나 싶었지만, 종종 넋두리를 늘어놓기도 하고,
‘물어 와!’
진지하게 원반을 던지며 놀이에 매진하는 모습을 보면… 절대 연기일 수가 없었다.
이것은 이디스가 가진 페로몬이 발렌스와 대등하거나, 또는 그보다 높은 수준이란 의미였다.
흑표범 영토에서 본인의 페로몬과 대등한 자는 없다는, 발렌스의 자만에서 나온 방심도 한몫했고. 호위를 병풍쯤으로 여기는 성정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이디스는 여태껏 본 적 없던 발렌스의 면면이 꽤나 신기했다. 이따금씩 경계의 숲에 들릴 때면 혹시 그녀가 오진 않을까 무심결에 찾을 만큼.
이 묘한 만남이 본격적으로 변한 건 초원에 가만히 선 발렌스를 발견한 시점부터였다.
그날은 하나 남은 부모이자 수장이 병환으로 사망한 후, 발렌스가 최연소 수장으로서 즉위를 마친 날이었다.
더 이상의 마주침은 안 되는데. 수장을 우롱한 죄는 사형이라 해도 할 말이 없는데.
그럼에도 이디스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소리 죽여 우는 발렌스를 외면하지 못했다.
말없이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때때로 엄격히 교육하려 드는 발렌스에게 맞춰 주고.
정체를 숨긴 아슬아슬한 만남은 어느덧 손에 꼽기 힘들 만큼 횟수가 늘어나 버리고 말았다.
“혼인도 수장의 의무 중 하나이니까. 당장 장로회에서도 난리라서… 참, 내가 흑표범한테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웃음을 흘린 발렌스가 이디스를 베개 삼아 초원에 몸을 뉘었다.
“권력욕은 없는 남자이면 좋겠는데. 수장의 권력을 조금도 나눠 주고 싶지 않거든.”
‘귀족 중에 권력욕 없는 놈이 존재할 리가 없잖아.’
수장의 부군이라니, 어차피 자신은 전혀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이지 않나.
“또….”
눈썹을 든 이디스는 중얼중얼 이어지는 발렌스의 혼잣말을 들었다.
그녀가 주장하는 부군의 조건은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는 내용이었다.
혈통을 위해 고위 귀족의 영식일 것은 필수. 후계의 페로몬은 어차피 발렌스가 가진 우성 유전자로 발현되니, 페로몬의 여부는 상관없었다.
또한 고지식한 면모가 있는 그녀를 보완하기 위해 사고가 다채로운 사람일 것.
외교적으로 유용하도록 인맥은 넓어야 하고, 이왕이면 영토민의 환심을 얻을 만한 외모이면 좋고.
무엇보다 서로 이성 간의 감정을 가져선 안 될 것. 사랑은 군주에게 있어 가장 큰 강점이자 약점이 되니까.
발렌스는 사랑을 영토를 통치하는 것에 가장 불필요한 감정이라 여기고 있었다.
‘차라리 부군 자리에 허수아비를 세워 두시지 그래.’
그냥 살아가는 데 부군 따위는 필요 없다고 하지. 혼인식 날 발렌스의 옆에 덩그러니 선 허수아비를 상상한 이디스가 픽 헛웃음을 쳤다.
애당초 발렌스에게 이성적인 감정을 갖지 않을 남자가 세상에 존재하긴 하나. 무심코 미친 생각을 해 버린 그는 경악하며 제 뺨을 내리쳤다.
덕분에 깜짝 놀란 발렌스가 이디스의 양 뺨을 잡아챘다.
“너는 가끔씩 이런 나쁜 행동을 하더라?”
‘그거야 전부 너 때문에….’
신경질적으로 도리질 치던 이디스는 코앞의 발렌스로 인해 우뚝 굳어 버리고 말았다. 너무 가까웠다.
“간지러워서 그래?”
걱정스레 묻는 발렌스의 음성이 이디스의 의식 너머로 멀어졌다.
붉은 눈동자에 비친 흑표범을 마주하자마자 그간 모른 척해 온 감정이 파도처럼 범람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타인은 모르는 발렌스의 면면을 아는 것에서 온 우월감인 줄 알았는데. 단지 냉랭한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지는 게 신기해서, 몇 번 더 보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어느새 크기를 불린 마음은 발렌스가 혼인 따위를 하지 않길 바라고 있었다.
이디스는 발렌스를 홱 등져 흔들리는 동공을 감췄다.
굳은 나무도 가끔씩 기댈 곳을 찾듯, 발렌스가 자신을 찾는다고 생각한 건 얼마나 큰 오만이었는가. 이것도 흑표범일 때나 해당되는 이야기지, 인간인 이디스와는 데면데면을 넘어 말 한 번 제대로 섞어 본 적 없는 관계였다.
정확히는 별로 달갑지 않게 여긴다고 보는 편이 맞았다.
그와 마주쳤을 때의 시선 처리.
무감한 붉은 눈동자.
굳게 닫히는 입술.
빼어난 미모로 늘 호의만 받아 오던 이디스가 그 서늘함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만두자.’
이대로 달아나 다시는 만나지 않는 편이 좋았다. 자각해 봤자 조용히 묻어야 할 마음이었으니까.
무덤까지 가져갈 감정이라고 생각한 이디스가 휙, 도망을 택했다. 쿠당탕, 그리고 한 걸음도 못가 고꾸라지고 말았다.
“갑자기 어디 가니? 사냥감이라도 발견했어?”
살랑거리는 꼬리를 낚아챈 발렌스가 줄다리기하듯 이디스를 당겼다.
“얼마 있지도 않았으면서, 자꾸 이러면 서운해.”
‘뭔 인간의 힘이….’
그레이스가(家)의 혈통들은 하나같이 괴물이라더니. 실연의 슬픔을 만끽할 자유마저 박탈당한 그는 짐짝처럼 질질 끌려갔다.
결국 다시 발렌스의 옆에 끌려간 이디스는 해탈한 심정으로 자리를 지켰다. 발렌스에게서 태어날 후계는 또 어떤 어마어마한 인간일지 벌써부터 두려웠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차라리 타 일족의 고귀한 혈통이 나을까.”
‘타 영토에도 그런 부군 후보는 없을걸.’
속으로 시큰둥하게 답변한 이디스가 혀를 찼다.
우수한 혈통에 권력욕은 없고, 여유롭고 자유로운 사고를 가진. 인맥은 넓고, 타인의 호의를 살 수 있는 외모···.
‘애초에 고위 귀족의 혈통인데 권력욕은 없는 멍청한 놈이 세상에 어딨,’
뇌까리던 이디스는 일순 머리를 망치에 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그 멍청한 놈이 나잖아?’
그 말도 안 되는 부군의 조건에 전부 해당되는 사람이.
비록 발렌스에겐 통하지 않았지만, 아버지인 릴리언도 한 수 접어 주는 외모도 있지 않나.
덧붙여 권력욕은 일 할도 부리지 않고 납작 부복할 자신이 있었다.
“……?”
한편, 발렌스는 도망가다 말고 까만 털을 자신만만하게 쓸어 넘기는 흑표범을 바라봤다.
이 흑표범은 생김새가 특출하게 예쁘긴 하지만, 왕왕 나르시시즘에 빠진 사람처럼 치명적인 척을 하곤 하는데….
“그래, 그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발렌스가 미모를 뽐내는 흑표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흑표범들에게도 미의 기준이 있는 건지 도통 모를 일이었다.
* * *
“일평생 함께하는 반려로서….”
혼인식의 반은 대신관의 연설로 이어졌다.
따분함을 철저히 감춘 발렌스는 주변 귀족들의 부축을 받는 릴리언을 바라봤다.
‘수장이시여, 제발 이 혼담을 물려 주십시오!’
절대 우리 아들은 줄 수 없다고, 흑표범 영토가 망할 거라며 노발대발하더니.
‘당장 이 혼약을 막아야만, 허억!’
‘리, 릴리언 님!’
결국 혼인식 도중에 뽀글뽀글 거품을 물며 넘어가고 말았다.
슬쩍 웃던 발렌스는 자연스레 부군이 될 남자를 올려 봤다. 큰 키를 따라 올라간 시선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얼굴에 머물렀다.
대륙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인이란 명성을 증명하듯, 이디스는 무감한 표정마저 사연 있는 사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비현실적인 외모를 올려다보던 발렌스가 생각에 잠겼다.
‘혼인하죠.’
대뜸 나타나 미친 소리를 지껄일 때만 해도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주정을 부리는 걸까 생각했는데.
곱씹어 보면 이 놈팡이-이디스- 만큼 발렌스가 원하는 부군 상에 적합한 자가 없었다. 더욱이 생소하지만 지배계 페로몬이란 상급 페로몬마저 갖췄다지 않은가.
‘제가 지금 꽤나 절박한 상황이라서요.’
이디스의 부탁은 제법 그럴싸한 종류였다.
발렌스가 이디스를 부군 후보로 지목함으로써 여우 영토 차기 수장과의 혼담을 막아 주는 것.
일개 영애도 아닌, 수장인 발렌스와의 혼담이 진행되는 순간부터 그쪽과의 혼담은 자연스레 파기하는 게 가능하니까.
여우 영토의 차기 수장이 호락호락한 위인이 아닌 만큼 이보다 확실한 거절 방법은 없었다.
‘더 이상 첫 번째가 아닌 삶을 사는 건 싫기도 하고.’
느릿하게 흘린 한마디는 대충이나마 그가 겪어온 삶을 예상하기에 충분했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제게 꽂힌 시선을 눈치챈 이디스가 발렌스만이 들릴 목소리로 물었다. 발렌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을 말했다.
“예뻐서요.”
“알아요, 제 얼굴 꽤 마음에 들어 하시는 거.”
자기애도 적당히여야지. 순간이나마 혐오 어린 표정을 감추지 못한 발렌스가 입술을 움찔거렸다.
사람의 모습으로는 처음 보게 된 발렌스의 솔직한 표정을 마주한 이디스가 방긋 웃었다.
그 실없는 웃음에 오히려 당황한 발렌스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최근까지도, 그를 껄끄럽게 여기던 이유는 속내를 읽기 어려운 가식적인 미소 때문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지금만은 그다지 별다른 의도가 느껴지지 않았다.
펑! 대신관의 축사가 끝나며 쩌렁쩌렁한 폭죽 소리와 영토민의 함성이 뒤섞였다. 흩날리는 하얀 꽃잎 한가운데 선 발렌스가 입술을 열었다.
“약속 지키세요, 서로 이성 간의 감정은 원하지 않는 것.”
“수장님이야말로.”
“…그러고 보니 이 조건이 지켜지지 않았을 때의 조항은 정하지 않았군요.”
“아.”
짧게 탄식한 이디스가 고민하듯 인상을 찌푸렸다. 답을 기다리던 발렌스는 영토민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말했다시피 나는 이곳을 어떤 영토보다 강한 영토로 만드는 게 목표예요. 만에 하나 불필요한 감정이 생겨 문제가 생길 시에는….”
“…….”
“떠나도 좋아요.”
물론 후사를 본 후에. 덧붙인 발렌스가 고개를 돌려 이디스와 시선을 맞췄다. 이디스는 속을 읽기 어려운 표정으로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백금발 아래 자리한 붉은 눈동자가 예쁘게 휘어졌다.
“그럴게요.”
왜 이 순간 뜬금없이 경계의 숲에 있을 흑표범이 떠오르는 걸까.
발렌스가 그때의 흑표범이 이디스임을 알게 되는 건 혼인식을 치르고도 한참 후의 일이었다.
* * *
긴 이야기를 담담히 마친 발렌스는 흘러내린 은발을 귀 뒤로 넘겼다. 떠나라는 말은 영영 볼 수 없는 곳으로 가 버리란 의미가 아니었는데.
“아마 나도 모르는 사이 네 아버지에게 많은 상처를 줬겠지.”
상상도 못 한 사실을 접한 아힌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발렌스는 얼빠진 반응은 오랜만인 아들을 등지며 흘리듯 말했다.
“상처를 준 사람에게 남는 건 후회뿐이란다.”
그러니까 있을 때 잘하란 의미와도 다름없었다.
미동 없이 가만히 앉아 있던 아힌은 이내 잠든 비비를 이불에 둘둘 말기 시작했다. 덕분에 네글리제만 입고 있던 비비의 몸통이 한층 거대하게 불어났다.
불어난 솜뭉치를 안아 든 아힌이 곧장 문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럼 어머니는,”
잠깐 멈춰 선 그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입술을 뗐다.
“아버지를 사랑하긴 하셨습니까?”
“…….”
분위기상 하나뿐인 이불을 빼앗아 가면 어쩌냐고 말하진 못한 발렌스는 팔짱을 꼈다.
‘수장님이 먼저 저를 사랑하는 경우는요?’
‘당신한테 그럴 일은 없어요.’
‘깐깐하네, 가정조차 못 해요?’
‘쓸데없는 화제는 넣어 두죠.’
왜 그때 평생 놓지 않을 거라고 답해 주지 못했을까. 희미하게 미소 지은 발렌스가 입을 달싹였다.
“여전히.”
짧은 답이었지만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대로 발렌스의 침실을 나선 아힌은 느린 걸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자신은 아버지와 고작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음에도 잊을 수가 없는데.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짊어지고도 제자리를 지키는 발렌스의 심정을 감히 재단할 수 없었다.
천천히 움직인 아힌의 시선이 비비의 얼굴에 떨어졌다.
언제부터 깨어 있던 건지. 연기력이라곤 열정밖에 없는 비비가 콧잔등을 움찔움찔 떨어 댔다.
모른 척 넘어가 준 아힌은 문득 창밖을 돌아봤다. 밤하늘에서 내려온 눈송이가 어두운 정원을 물들이고 있었다.
‘아힌, 왜 나를 피해?’
분명 비비의 추궁에 적당히 둘러댈 만한 기회는 많았는데. 어째서 이 하얀 얼굴만 보면 거짓말은커녕 변명조차 나오지 않는지 모를 일이었다.
‘상처를 준 사람에게 남는 건 후회뿐이란다.’
파도처럼 일렁이던 보라색 눈동자가 내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뻗은 손을 피하던 위태로운 몸짓도, 주춤거리며 물러나던 발걸음도.
고개를 숙인 아힌은 이불 속에 꽁꽁 감춰둔 비비의 목 쪽을 내려다봤다.
얼마 전, 무심결에 만진 비비의 목 부근에서 느꼈던 감촉이 여전히 선명했다. 어느 겨울날 그의 송곳니가 만든 흔적은 사라졌지만, 남은 흔적 또한 제가 만든 것임은 부정할 수 없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자연스레 아힌의 눈앞에 죽어 가던 비비의 모습이 그려졌다. 목에서 피를 흩뿌리며 밭은 숨을 몰아쉬던 새끼 토끼의 모습이.
‘정신을 차렸을 땐 상처는 거의 회복한 상태여서….’
비비는 고집스럽게 괜찮다고 주장하지만, 아힌은 여전히 괜찮지 않았다.
“…….”
새하얀 눈과 어울리지 않는 붉은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언젠가부터 그는 겨울만 되면 비비가 두려웠고, 또 겨울이 진저리 날 만큼 싫었다.
* * *
덜컹덜컹, 마차 밖 전경이 빠르게 바뀌었다.
턱을 괸 채 창밖만 바라보고 있자니 어젯밤의 일이 떠올랐다.
발렌스 님과 아힌의 대화, 가출한 나를 몰래 다시 침실로 되돌려 둔 아힌. 그리고 깜박 잠든 후 눈을 떴을 땐 여전히 홀로였다.
‘아힌, 어울리지 않게 메리지 블루라도 느끼는 거니?’
정말 아힌이 혼인 전 우울감을 겪고 있기라도 한 걸까. 멀거니 생각에 잠겨 있던 차에, 마부석 쪽의 릴이 말을 걸어왔다.
“토끼야, 정말 아힌 님께 인사도 없이 가도 되겠니?”
“잠깐 아카데미에 다녀오는 것뿐인데요, 뭐.”
의도하진 않았으나 새침한 음성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헛기침을 한 나는 빠르게 덧붙였다.
“아힌도 가끔씩 저와 떨어져 지내고 싶을 때가 있을 테니까요.”
“맙소사.”
“왜 그래요?”
“아힌 님이 그럴 분이 아닌데… 어디 아프신 건 아니고?”
마음이 아픈가 봐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한 나는 폭 한숨을 내쉬었다.
아힌은 가녀리고 섬세한 맹수니까. 이 비비 님께서 어른스럽게 기다려 주는 수밖에.
아무렇게나 뇌까린 나는 발끝부터 피어나는 불안감을 억지로 눌렀다. 혹시나 아힌이 내게 질린 건 아닐까, 하는 그런 작은 불안을.
자꾸만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드는 생각을 떨친 내가 티 나게 말을 돌렸다.
“아 참, 릴. 짐칸이 무거운 것 같던데, 뭐예요?”
“릴리언 님께서 아직 아카데미에 계시잖니. 가는 김에 즐겨 드시는 사과를 가득 챙겼지.”
“그렇구나.”
“그러는 토끼 너는 아카데미엔 왜 가는 거니? 곧 졸업이라 강의도 없을 텐데.”
“지난나 교수님을 뵐 일이 있어서요.”
교복 위에 걸친 망토를 만지작거린 나는 최근 가장 걱정스러운 문제를 떠올렸다.
다가온 졸업식과 혼인식에 설렌 것도 잠깐. 곧바로 떠오른 사안은 차후 아힌과 나 사이에 태어날 아이에 대한 것이었다.
초식계와 맹수계란 일족 차이는 고사하더라도… 아이의 페로몬이 아힌의 지배계 페로몬으로 나타나 버리면 정말 큰일이었기에.
물론 내가 가진 치유계 페로몬으로 억제할 순 있겠지만, 고통은 면치 못하는 게 문제였다. 내 페로몬 또한 만만치 않은 점도 걱정이고.
아힌과도 상의하려 했으나, 또라이의 성격상 아이는 됐다며 극단적인 선택을 해 버릴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우선 우리의 사정을 아는 지난나 교수에게 자문을 구해 둔 상태였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을 즈음, 천천히 속도를 줄이던 마차가 이내 멈춰 섰다.
이어서 릴이 마부석과 연결된 창으로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토끼야, 조금 문제가 생겼구나.”
“문제라뇨?”
“아카데미로 가는 길목의 시가지에서 농성이 벌어졌다는데… 아무래도 다른 길로 돌아가는 편이 안전하겠어.”
“그럼 그렇게 해요.”
위험하다면 당연히 우회해야지. 칼같이 대답하자마자 릴의 눈망울이 약간 떨렸다.
“벨헬름과 이어진 사자 영토의 초원으로 우회해야 할 듯한데, 괜찮겠니?”
“사자… 요?”
덩달아 내 동공도 세차게 진동했다.
“혹시라도 지나가는 도중에 사자가 나타나면 어떡해요?”
“그런!”
릴은 사자보다 더 무서운 얼굴로 입을 틀어막았다.
“릴….”
“토끼야….”
목석처럼 서로를 마주 보던 우리는 호위로서 따라온 메이미에게 시선을 옮겼다.
과묵을 넘어 존재감조차 사라져 가던 그녀는 묵묵히 앞치마에서 단검을 꺼냈다. 사자 몇 마리쯤이야 문제없다는 의사 표시였다.
그 듬직한 모습에 나와 릴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덜컹덜컹, 별수 없이 사자 영토로 우회한 마차가 쉼 없이 바퀴를 굴렸다.
달달 다리를 떨던 나는 슬그머니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느덧 마차는 사자 영토의 초입을 지나 넓은 초원을 달리고 있었다.
‘사자 영토도 한번 놀러 와요.’
‘아, 초원 쪽으로 가면 야생 사자들이 있긴 하네.’
문득 짓궂게 말하던 룬의 얼굴이 스쳤다.
방정맞은 사자, 괜히 사람 겁먹게 그런 건 왜 알려줘선. 애꿎은 룬을 질타한 나는 잽싸게 커튼으로 창문을 가렸다.
빤히 쳐다보는 메이미를 향해 어색하게 웃은 나는 태연한 척 턱을 괬다. 물론 다리는 계속 떨리는 상태였다.
이 비비 님의 맹수 경력이 얼만데. 머리만 한 바가지인 사자가 무서울 리 없잖,
덜컹.
“메이미, 사잔가 봐!”
마차가 크게 흔들리는 동시에 번개처럼 날아간 내가 메이미의 무릎 위에 착석했다.
“짐칸 쪽에서 기척이 느껴집니다.”
나와 단검을 든 채 경계하던 메이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짐칸…?”
릴이 짐칸에는 사과를 실었다고 하지 않았나. 사자도 애쉬처럼 사과 서리를 한다든가.
터무니없는 상상에 다다른 나는 짐칸을 확인하기 위해 조심스레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차르륵, 커튼을 걷자마자 와다다 달려가는 흑표범 두 마리의 엉덩이가 보였다.
‘사자 영토의 초원에도… 흑표범이 사나?’
조금 덩치 큰 검은 고양이인가?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왈칵 인상을 찌푸렸다.
오른쪽 흑표범의 꼬리에 달린 리본은 분명 내가 비온에게 달아 준 건데.
깊은 정적 속, 몇 초 만에 슈와 비온이 짐칸에 숨어 따라왔음을 깨달은 나는 사색이 되었다.
‘안 돼.’
저 사고뭉치들이 만일 사자 무리에게 덤비기라도 하면. 아직 다 자라지도 못한 흑표범 두 마리가 당할 일은 불 보듯 뻔했다.
* * *
짹짹, 짹짹. 새 지저귀는 소리가 멍한 정신을 일깨웠다.
‘여기는….’
머리 위의 교목이 파란 하늘을 가렸고, 눈앞으론 수풀이 성기게 자란 초원이 펼쳐졌다.
망망대해에 남겨진 기분이 된 나는 흙 묻은 앞발을 아연히 응시했다.
어쩌다가 사자의 서식지에서 길을 잃고 만 걸까. 마른침을 꼴깍 삼킨 나는 약 삼십 분 전을 되돌아봤다.
짐칸에 숨어 있던 슈와 비온이 초원으로 뛰어내린 장면을 목격했을 때. 둘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앞이 까마득하게 변했다.
그 순간 이성을 거스른 몸은 튕기듯 마차를 뻥 박차고 나갔다.
“세상에, 토끼야-!”
“토끼님!”
릴과 메이미의 다급한 부름은 귀를 스치고 지나갈 뿐이었다.
기동성을 위해 단번에 토끼로 변한 나는 드넓은 초원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겨우 둘을 따라잡았을 땐, 이미 마차 따위는 보이지도 않을 만큼 달려온 게 사건의 전말이었다.
‘너희들…!’
눈을 날카롭게 뜬 나는 휙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슈와 비온이 있었다.
‘왜 그랬어!’
몰래 짐칸에 올라 따라오는 일은 거의 없었으면서, 왜 하필 오늘!
앞발로 둘의 엉덩이를 팡팡 매질하던 내가 숨을 골랐다.
우선 훈계보다는 한시라도 빨리 마차를 찾아야만 했다. 사자를 만나도 내 한 몸 정도야 건사할 수 있다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슈와 비온을 통제하기에는 힘에 부쳤다.
‘…사람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허허벌판이라 해도 벌거숭이인 몰골로 돌아다닐 순 없는 노릇이니까.
마차로 돌아갈 방편을 궁리하는 와중, 수풀 쪽에서 묘한 기척이 느껴졌다.
뭐야. 앞발로 입을 가로막은 나는 귀를 바짝 곤두세웠다.
사냥감을 발견하곤 몸을 낮춘 사자라거나. 아니면 무리로 다니는 암사자들이라든지. 오만가지 생각이 밀려들었다.
그새 울음을 그친 슈와 비온도 내 뒤에서 경계하며 털을 세웠다.
바스락, 바스락.
이윽고 푸른 수풀이 두 갈래로 갈라지며 작은 생물이 힘차게 튀어나왔다. 동시에 맥이 탁 풀린 내가 끌어 올렸던 페로몬을 갈무리했다.
‘토끼잖아?’
하긴, 사자 영토라고 사자만 있으란 법은 없지. 한시름 놓은 나는 뒤에 있을 슈와 비온을 돌아봤다.
그러나 둘은 내 뒤가 아닌, 멀리 나무 뒤에 숨어 이곳을 지켜보고 있었다. 답지 않게 겁먹은 모양새였다.
‘……?’
왜 저래. 코앞의 토끼와 부들부들 떠는 슈, 그리고 비온을 번갈아 본 내가 미간을 구겼다.
아힌이나 이브린 앞에서도 겁먹은 적 없으면서. 설마 토끼의 먹이사슬이 그들보다 높다고 알고 있는 걸까.
‘도대체 어디서 뭘 배운 거야.’
토끼를 두려워하는 저 흑표범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떨리는 눈으로 둘을 바라보던 나는 다시금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까이에서 확인한 토끼는 제법 심오한 얼굴로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덩달아 심오하게 마주하던 찰나, 찰싹, 토끼가 앞발로 내 뺨을 갈겼다.
‘때렸어…?’
어안이 벙벙해진 내가 뺨을 짚기 무섭게 찰싹, 또다시 고개가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순혈 토끼 수인인 이상 웬만한 토끼들은 내게 호의적으로 다가올 텐데.
‘서열 싸움이라도 하려는 건가?’
이러지 마. 차마 똑같이 치진 못한 나는 앞발로 토끼의 몸을 살짝 밀었다.
그러나 콧방귀를 뀐 토끼는 재차 찰싹 뺨을 치며 반격했다.
‘하지 말래도!’
밀면 반격하고, 밀면 반격하고. 마지막으로 토끼가 높이 도약하며 불거진 건 치열한 앞발 싸움이었다.
“내가 멋대로 돌아다니면 안 된다고… 비비?”
이 비비 님의 뺨을 치다니.
파바박, 불붙은 우리는 인기척마저 무시한 채 흙먼지가 날리도록 바닥을 굴렀다.
“-잠깐, 잠깐. 둘 다 그만.”
그때 공중에서 나타난 손이 나와 토끼를 억지로 갈라놓았다. 나는 커다란 손에 몸뚱이를 가로막힌 채 씩씩 숨을 골랐다.
“이제는 사자 영토까지 정복하러 온 거예요?”
‘···어?’
분명 아는 목소리인데. 뒤늦게 위를 올려 보니, 가장 먼저 익숙한 분홍색 곱슬머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 콧등에 흙 묻었다.”
슥, 엄지가 내 코를 살짝 훑고 지나가자마자 한량 같은 얼굴이 보였다. 룬이었다.
* * *
마니언츠가(家)
겨우 사람으로 돌아온 나는 룬이 건넨 의복을 주섬주섬 입었다. 새틴으로 된 원피스에 허리띠를 두르는 독특한 복식이었다.
‘…이제 진짜 어쩐담.’
지금 선 장소는 다름 아닌 룬의 집무실에 딸린 간이 침실이었다.
즉 마니언츠 저택이자 사자 영토의 본거지라는 의미.
‘비비, 열심히 씰룩이는데 미안하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전혀 모르겠어요.’
토끼인 상태로는 도무지 처한 상황을 설명할 수 없었기에, 룬은 언제 사람으로 돌아갈지 모르는 나를 일단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었다.
“흠···.”
초조하게 제자리를 돌던 나는 곧 비장하게 허리끈을 조였다.
초원에 있을 마차와 그레이스가(家)에 이 소식을 전하는 게 가장 먼저겠지. 이런저런 방편을 세우던 나는 이 사건의 원흉을 향해 시선을 틀었다.
“슈, 비온.”
엄한 부름에 커튼 뒤에 숨어 있던 슈와 비온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아까부터 묘할 정도로 기죽은 모습이었다. 주방 서리를 하고도 늘 위풍당당하던 슈와 비온이었는데.
“아까 그 토끼 때문에 그래?”
너무 겁을 집어먹어서일까. 둘을 향해 다가간 내가 무릎을 굽혀 앉았다.
“걱정 마, 토끼의 먹이는 흑표범이 아니니까.”
토끼와 흑표범의 관계성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한 내가 슈와 비온의 앞발을 붙들었다.
“잘 들어,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니야. 여기에 우리 편은 없어.”
아무리 우호 관계라곤 해도, 타 영토 수장의 저택이란 사실이 위기감을 가져왔다.
“룬은 여차하면 도와주긴 하겠지만, 게을러서 완전히 신뢰하긴 힘들거든.”
“눈 때문에 더 게을러 보이나?”
“그렇지.”
반사적으로 긍정해 버린 나는 뻣뻣하게 허리를 세웠다.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틀자 문지방에 무료하게 기대어 선 룬이 보였다. 그는 타 영토에서 만났을 때와 달리, 지금은 허리끈이 달린 사자 영토 특유의 복식을 입은 상태였다.
“초원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구세주 보듯 앞발을 모으더니.”
“…….”
“도와주니까 이렇게 싹 안면 몰수를 해 버리시네.”
흘끔흘끔 눈치를 살피던 나는 조금 의아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아까 나와 결투를 벌인 토끼가 보이지 않았다.
그 시선을 눈치챈 룬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흑표범들이 토끼한테 진짜 겁이라도 먹었나 싶어서. 잠깐 사용인들에게 맡겼어요.”
저벅저벅, 천천히 다가온 그가 옆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나는 움찔거리며 이빨을 드러내는 슈와 비온을 진정시켰다.
“비비를 따라다니던 흑표범이랑 되게 닮았네요.”
“애쉬의 아기들이니까요.”
이제 아기라 치기엔 덩치가 너무 산만 해졌지만.
“어쩐지. 레스틴.”
슈와 비온을 바라보던 룬이 손가락을 딱 소리 나게 튕겼다.
동시에 레스틴이 문 너머에서 불쑥 얼굴만 내밀었다. 그는 오늘도 예민함이 넘쳐흐르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해석해 봐, 이 흑표범들이 왜 이렇게 떠는지.”
“제가요? 싫습니다. 애초에 페로몬 능력을 사용하는 것도 선호하지 않고요.”
레스틴은 외알 안경을 추켜올리며 완강히 거부했다.
“그리고 저 토끼 분과 엮여서 좋은 꼴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지 않습니까.”
“그건…!”
“다, 다가오지 마십시오.”
반발하려던 나는 뒤늦게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나와 엮이면 자연스레 아힌과 이브린 등 이상한 사람들이 따라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레스틴.”
룬이 힘주어 부르자, 레스틴은 결국 쭈뼛거리며 눈으로 슈와 비온을 관찰했다.
“…버림받는 걸 두려워하는 것 같군요.”
“그런 건 어떻게 알아요?”
해석해 보라는 건 장난인 줄 알았는데. 당황한 내가 동공을 떨었다.
그러자 옆에서 턱을 괴고 있던 룬이 대신 설명을 이어 갔다.
“레스틴의 페로몬은 아주 약간이나마 동물과 의사소통이 가능한 거라서요.”
“딱히 활용할 곳은 없는 페로몬이죠.”
“하긴, 동물들도 꺼림칙한지 레스틴을 좀. 더러워하더라고요.”
“더럽다뇨, 반기지 않을 뿐입니다!”
책으로만 보던 페로몬을 접하게 된 내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어쩐지.’
드디어 사자인 레스틴이 나를 기피한 이유를 알게 된 순간이었다. 분명 동물임에도 아무것도 읽을 수 없으니까 꺼림칙했겠지.
그렇다면. 입을 뻐끔거리던 나는 홱 소리 나게 슈와 비온을 돌아봤다. 둘은 아직도 꼬리를 내린 채 눈치를 살살 보고 있었다.
“저게 무슨 소리야, 도대체 누가 너희를 버려? 설마 그래서 마차까지 따라붙은 거야?”
속상하게 왜 그런 생각을 해. 둘의 앞발을 붙든 내가 추궁하듯 흔들었다.
“레스틴 경, 좀 전해 주세요.”
“뭐라고 전하면 됩니까?”
“절대로 버릴 일은 없다고요.”
“알겠으니까 너무, 너무 다가오지 마십시오.”
무슨 사자가 저렇게 간이 콩알만 해. 뱁새눈을 한 내가 몸을 뒤로 빼자, 그제야 슬슬 다가온 레스틴이 페로몬으로 의사소통을 시도했다.
“혼인식 때 꽃도 뿌려 주고, 나중에 아이가 태어나면 지켜 주기로 약속도 했으면서….”
답답함에 중얼거리던 나는 아차 싶어 룬을 돌아봤다.
“방금 들었어요?”
“작아서 거의 못 들었어요. 혼인식 어쩌고부터?”
전부 들었네. 맑은 금안 속에 다소 당황스러운 낯빛을 한 내가 비쳤다.
아직 나에 대한 마음이 남아 있을까. 룬도 곧 있을 혼인식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들었을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불편했다.
“비비.”
그저 물끄러미 마주하던 룬이 붉은 입술을 여닫았다.
“마, 말씀하시죠….”
“왜 갑자기 극존칭을 써요?”
불리할 땐 자꾸만 존칭이 튀어나와서 그만. 머쓱해진 내가 양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그는 내 얼굴을 가로지르고 있는 머리카락 한 가닥을 뒤로 넘겨줬다.
“진짜 하나도 안 변했네요. 여전히 겁도 많고.”
건조한 얼굴이 푸스스 허물어지는 모습이 어울리지 않게 다정했다. 조금 분위기가 묘해진다 싶을 즈음,
“실례.”
레스틴이 우리 사이로 불쑥 얼굴을 디밀었다.
“버림받는 것에 관한 오해는 대충 풀었지만, 이 흑표범들이 그래도 졸개는 반드시 없애야 한답니다.”
“…졸개? 졸개가 누군데요?”
“저야 모르죠. 눈엣가시 같은 쭉정이랍니다.”
“설마 이브린인가?”
“일리 있군요. 그 쭉정이는 없어져야 합니다.”
처음으로 마음이 통한 나와 레스틴이 눈빛을 교환했다.
뭐라 더 말을 덧붙이려던 나는 일순 창가를 돌아봤다. 먹구름이 약간 드리워진 하늘은 나중에라도 비가 쏟아질 모양새였다.
함께 창가를 바라보던 룬은 느릿하게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비비, 일단 그레이스가(家) 측에 전서는 넣어 뒀어요. 뭐, 그러지 않아도 어련히 아힌 그레이스가 날아오겠지만.”
아힌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내 어깨가 움찔 떨렸다.
최근 들어 자주 보게 된 넓은 등이 떠오르며 불안감이 엄습했다.
어쩌면 데리러 오지 않을지도. 부정적인 생각을 해 버린 나는 나도 모르게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왜 그래요?”
룬의 질문에, 퍼뜩 정신이 든 내가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어차피 스스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뭐.
“별거 아니에요. 다들 걱정하기 전에 돌아갈까 싶어서.”
“아, 그렇죠. 돌아가야죠. …이곳에 너무 오래 머물기도 무리니까.”
대답하는 룬은 드물게 난감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덩달아 심각해진 내가 눈썹을 모았다.
“비비, 미안한데 제가 간과한 게 하나 있어요. 여기 도착한 후에서야 생각난 탓에.”
“…뭔데요?”
불길하게 뜸 들이지 말고 당장 말해 봐.
“이 저택에서 나설 때 마주치면 안 되는 사람이 있어요.”
‘마주치면 안 되는 사람? 사자 영토 수장님인가?’
마니언츠가(家). 즉 이 저택은 사자 영토의 수뇌부들이 모인 곳과도 다름없었다.
일단은 나도 장차 그레이스가(家) 소속이 될 사람이니까. 타 영토 수장을 만나는 건 외교의 일환이었기에 주의를 가할 필요가 있었다.
이윽고 망설이던 룬이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제 누이요.”
“룬의 누이라면, 차기 수장님이요?”
“네, 뭐.”
레오나 마니언츠. 수틀리면 주먹부터 나간다는 소문을 떠올린 내가 파르르 떨었다.
“주먹이… 아니, 그분은 갑자기 왜….”
“설명하자면 복잡한데, 대충 아힌 그레이스와 비슷한 부류라서. 마주치면 꽤 귀찮아져요.”
“뭐라고요?”
“비비가 여기 있는 걸 알게 되면 귀찮다고요.”
“아니, 그거 말고.”
“아힌 그레이스와 비슷한 부,”
“세상에.”
입을 가로막은 나는 연신 고개만 도리도리 저었다.
달리 더 이상의 설명이나 이유 따위는 필요 없었다. 아힌 같은 맹수를 인생에서 두 번이나 만나고 싶진 않으니까.
무조건 피해야만 해.
* * *
흑표범 영토의 끝자락.
히히힝, 제인을 멈춰 세운 아힌은 태양이 사라진 하늘을 올려다봤다. 차가운 바람에 은발이 이리저리 나부꼈다.
“비가 올 것 같군.”
“날도 좋지 않은데, 토끼님의 마차를 따라잡아야 하는 이유를 여쭙고 싶습니다만.”
뒤이어 말을 세운 이브린이 불만을 감춘 채 물었다.
“비비가 늘 들고 다니던 책을 두고 가 버렸잖아.”
아힌은 로브 안에서 서적 한 권을 꺼내 들었다. 맹수를 길들이는 방법이 저술된 책이었다.
“그런 서적은 아카데미 도서관에 차고 넘칠 텐데요. 토끼님께 빌러 가는 거라고 솔직히 말씀하셔도 괜찮습니다.”
“빌러 가는 거 맞아.”
“그러게 토끼님은 대체 왜 피하신 겁니까?”
답하지 않은 아힌이 입술을 비틀었다.
비비를 피하는 기색은 전혀 비치지 않은 채 홀로 그 트라우마를 감내하려 했는데. 막상 눈앞에서 알짱거리는 비비만 보면 손끝이 뻣뻣하게 굳어서 미칠 노릇이었다.
그뿐인가. 속도 모른 채 아힌이 잘 때면 조물조물 얼굴이나 손을 만져 대고. 겨울밤마다 이성과 두려움 사이에서 뒤척이는 나날이었다.
“이유를 말씀해 주셔야 방책이라도 찾죠. 그리고 이 사실이 릴리언 님의 귀에 들어가면 또 지팡이가 부러질 겁니다.”
이브린은 점점 올라가는 아힌의 눈썹을 모른 채 말을 이었다.
“주제넘지만 이 이브린도 이유를 알아야,”
“아니, 이브린은 이유를 알면 죽을지도 몰라.”
“영원히 몰라도 될 듯합니다.”
한순간에 의견을 바꾼 이브린이 침묵했다.
무미건조한 얼굴을 흘끗 훑은 아힌은 고민하며 입술을 매만졌다.
“…무릎을 꿇는 것만으론 부족하겠지?”
“눈물도 보이시면 토끼님의 분노가 조금은 누그러들지 않을까요.”
살면서 용서를 빌어 본 기억이 없는 이브린이 곰곰이 생각했다.
“어렵군요, 연인과 다퉈 본 적이 없어서.”
“애초에 넌 만나 본 적도 없지 않나?”
“제 미모는 공공재로 남겨 둬야 하니까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당돌한 주장이었다.
그 뻔뻔함에 설득당한 아힌은 이브린을 위아래로 훑었다. 실제로 혼기도 찬 만큼, 최근 들어 귀족들이 은근히 이브린의 혼인 여부를 물어 오고 있었다.
“너는, 아무도 만날 생각이 없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길 고대하는 중입니다.”
“그런 게 쉬운 줄 알아?”
“아힌 님께서도 어느 날 갑자기 토끼 병에 걸리지 않았습니까.”
이브린의 말마따나 어쩌면 비비를 주운 순간부터 토끼 병에 걸렸을지도. 반박 못 한 채 피식 웃던 아힌이 멈칫했다.
‘…저 토끼가 아니면 싫어.’
문득 알 수 없는 기억이 스친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득한 어린 날의 기억 같기도 했다.
“아힌 님?”
이브린은 갑자기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는 아힌을 의아하게 불렀다.
“…이브린, 아버지가 언제쯤 내게 토끼 인형을 사 주셨지?”
“예? 너무 어릴 때라….”
뜬금없는 질문을 들은 이브린이 미간을 구겼다.
“아마 토끼 영토에 다녀오신 이후쯤이 아니었을까요? 대충 그맘때부터 아힌 님께서 토끼 인형을 휘두른 것 같습니다.”
아리송하게 서로를 쳐다보던 두 사람은 동시에 같은 방향을 돌아봤다. 숲 너머로 웬 고릴라가 그들을 공격하기 위해 달려오고 있었다.
“이 숲이 고릴라의 서식지였던가?”
“아니요, 분명한 흑표범의 서식지입니다.”
“그럼 저건 뭐야.”
“사람의 형체 같기도… 아, 릴 님이군요. 마차가 주변에 있나 봅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눈물범벅인 릴의 얼굴이 선명해졌다. 일순 불길한 예감이 든 아힌은 급히 제인의 몸에서 내려왔다.
“아, 아힌 니임!”
“뭐야.”
아힌의 곁으로 달려온 릴이 대뜸 검은 천을 내밀었다. 벨헬름 아카데미의 교복 재킷이었다.
설마. 숨을 삼킨 아힌은 이어질 릴의 말을 고요히 기다렸다.
“거, 건너편 영토에서 갑자기 불거진 농성 때문에 사자 영토로 우회했는데….”
비비가 사라진 슈와 비온을 쫓아간 사실. 그리고 릴과 메이미가 흩어져서 찾던 도중, 룬의 전령 새를 만난 것까지 전한 릴이 떨리는 손으로 서간지를 내밀었다.
확, 아힌은 그것을 순식간에 낚아챘다. 둘둘 말린 서간지를 풀어헤치는 손이 몇 번이나 미끄러졌다.
「비비가 원하면 알아서 돌려보낼게.
– 룬 마니언츠」
아흑, 곁눈질로 내용을 확인하고 만 릴이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그 우렁찬 울음소리와 함께 아힌의 심장도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 * *
슈와 비온이 캄캄한 구멍 아래로 쏙 뛰어들었다. 마니언츠 저택 내에서 외부로 이어지는 기밀 통로였다.
여긴 어디이며, 난 뭐 하는 토끼인가. 고찰하던 나는 뒤늦게 양손을 동그랗게 모아 외쳤다.
“다리 접질리지 않게 조심해!”
“비비, 꼭 지금 가야 돼요?”
옆에 수그려 앉아 있던 룬이 못마땅하게 물었다.
“마차를 찾아서 전서도 보내 놨고, 낮은 어렵지만 새벽이 늦으면 누이의 눈을 피할 수도 있는데.”
“다들 걱정이 심한 편이라서요. 슈랑 비온이 새벽까지 얌전히 기다릴 리도 없고.”
“하긴, 아무래도 지금쯤 아힌 그레이스가 거품을 물었을 것 같은데.”
“뭐어-….”
자신 없게 미소 지은 내가 자연스레 말을 돌렸다.
“그런데 이런 기밀 통로를 알려 줘도 돼요?”
“어차피 곧 없앨 예정이어서 괜찮아요.”
그때까지도 나를 빤히 바라보던 룬이 손을 털며 일어났다.
“자, 그럼 비비도 뛰어야죠.”
“높이가 꽤 되는데 밑으로 어떻게,”
예고 없이 나를 한 팔로 번쩍 안아 든 룬이 그대로 뛰어들었다.
“살려 줘!”
“토끼일 땐 잘만 날아다니더니.”
이 막돼 먹은 사자가.
몸이 아래로 훅 꺼지는 느낌에 반사적으로 눈이 질끈 감겼다.
“비비, 이제 눈 떠도… 아야, 머리, 머리.”
고통에 찬 목소리를 들은 내가 반짝 눈을 떴다. 나도 모르게 곱슬머리를 쥐어뜯고 만 모양이었다.
황급히 손을 떼어 내는 순간, 어스름한 어둠 속에서 마주친 금안이 퍽 몽환적이었다.
초점 없는 눈은 어두울수록 반짝이나 봐. 넋 놓고 쳐다보던 나는 이내 허둥지둥 바닥을 딛고 내려섰다.
“죄, 죄송합니다….”
“별말씀을.”
어깨를 으쓱인 룬은 철로 만든 묘한 띠를 내 머리에 달아 줬다.
“흑표범들은 밤눈도 밝고 감각이 예민해서 괜찮지만,”
찰칵 소리와 함께 작은 램프가 눈앞에서 대롱대롱 흔들렸다. 기밀 통로를 지날 때 어둠을 밝히기 위한 용도 같았다.
“비비는 아니니까. 기억하죠? 두 갈래 길에서는 무조건,”
“오른쪽.”
“좋아요. 출구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룬은 같이 안 가요?”
“말했잖아요, 어릴 때나 지나다니던 통로라고. 보시다시피 지금은 몸뚱이가 이래서.”
나는 전방의 작은 통로와 고개를 꺾어 올려 봐야 하는 룬을 번갈아 봤다.
과연. 통로는 입구가 좁아서, 가늠하면 룬은 어깨부터 입장이 불가능할 것 같았다.
“잘할 수 있죠? 출구까지 그렇게 멀지 않을 거예요.”
“문제없어요.”
힘차게 끄덕인 나는 몸을 낮춰 조심스레 통로로 발을 들였다.
“아. 말 안 한 게 있는데, 거기 가끔 유령이 나온대요.”
이 비비 님이 그런 유치한 놀림에 겁먹을 줄 아나. 쪽 째진 눈으로 뒤돌아보자, 룬은 몸을 굽힌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 참. 세상에 유령 나부랭이가 어디 있다고.”
“-저기요 토끼님, 뭐 하나 물어도 돼요?”
“또 뭐!”
허튼소리 하면 뒷발차기를 날릴 줄 알아. 다짐한 내가 눈을 번뜩였다.
“아힌 그레이스의 이름만 나오면 표정이 조금 어두워지던데.”
“…….”
“싸웠어요?”
얼굴에 전부 티가 났구나. 일순 당황한 나는 입을 뻐끔뻐끔 여닫았다.
낯선 영토에서 나를 알아 준 사람이 있어서일까. 애써 눌러 둔 감정이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그 못된 흑표범 때문에 기분이 하루 종일 오르내리고. 메인 목을 삼킨 내가 양손을 꼼지락거렸다.
“기억나요?”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던 룬이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사자 영토로 오면 못 나간다고 말했던 거.”
“설마···.”
설마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에 대한 감정이 그대로인 걸까. 섣불리 말문을 떼지 못한 내가 한 박자 늦게 입을 달싹였다.
“룬이랑 있던 그 토끼, 수인인 줄 알았는데.”
“평범한 토끼예요. 아힌 그레이스와 비비의 만남 같은 우연이 쉽게 일어날 리가 없잖아요.”
피식 웃은 룬이 손을 내밀었다.
“지금이 혼인식 전에 도망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것 같은데.”
“…….”
“오늘도 사자는 별로예요?”
잔인한 거절을 말하지 못한 나는 등을 돌림으로써 답을 대신했다.
조심조심 걸음을 옮기다가 살짝 뒤도니, 룬은 아직까지도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룬, 있잖아요.”
“말해요.”
“사실 우리는 몇 번 만난 적도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나를 좋아하는 이유가 뭐예요, 끝맺지 못한 물음이 혀끝에서 맴돌았다.
“원래 그런 건가 봐요. 고작 몇 시간 같이 있었는데도 며칠은 함께한 것처럼 기억이 커지고.”
그러나 쉽게 질문을 유추한 룬이 고저 없이 답했다.
“별거 아닌 거에 의미를 두고, 신경 쓰이고. 딱히 만난 횟수에 비례하는 감정은 아니더라고요.”
물 흐르듯 말한 룬이 휙휙 손을 내저었다. 저런 말을 한 것치곤 놀라울 만큼 무료한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보내 줄 때 빨리 가는 게 좋을걸요.”
비비가 그랬잖아요, 맹수들은 다 변덕이 심하다고. 언제 마음이 바뀔지 몰라요.
덧붙인 말을 들은 내가 후다닥 발에 속도를 붙였다. 통로가 점점 깊어지며, 룬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뒤를 돌아봤다.
‘고작 몇 시간 같이 있었는데도 며칠은 함께한 것처럼 기억이 커지고.’
어쩐지 알 것 같은 마음이었다.
* * *
레오나는 거치적거리는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 넘겼다. 손길에 따라 룬과 닮은 분홍색 곱슬머리가 굼실거렸다.
“룬은 이번 혼담도 거절한다죠?”
시원스러운 음성이 집무실에 울려 퍼졌다.
“걱정이구나. 명색이 수장의 자제인데 구…, 구실 불…, 크흠, 아무튼 그런 낯 뜨거운 소문이 맴돌아서야.”
소파에 앉은 룬의 외조부, 에즈란이 쯧 혀를 찼다. 그의 거대한 손에서 으스러지는 앙증맞은 찻잔을 곁눈질한 레오나가 중얼거렸다.
“이쯤 되면 소문이 사실일지도.”
“레오나, 동생에게 그 무슨 망언이더냐! 룬이 얼마나… 얼마나!”
“얼마나?”
“…내가 진지하게 룬과 대화해 보마.”
소문에 대한 확신이 없어진 에즈란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갔다. 휘리릭, 레오나는 들고 있던 펜을 돌리며 덧붙였다.
“그야 당연히 헛소문이겠죠. 은근히 순진한 구석이 있는 녀석이라… 여전히 그레이스가(家)의 토끼를 마음에 두고 있다든지.”
“아직도? 아서라, 올봄에 혼인식을 치른다고 릴리언 그 영감탱이의 입이 귀에 걸렸어.”
“흠, 조부님은 보셨다면서요. 그렇게 괜찮은 토끼예요?”
생각 못 한 질문에 흠칫 떤 에즈란은 하얀 토끼를 떠올렸다.
아힌과 룬에게 돌부리를 차서 날려 버리고, 흑표범 영토의 실세인 발렌스의 맹목적인 애정을 등에 업고, 또···.
“사람으로 변한 모습을 봤는데, 인정하기 싫지만 눈빛이 좋더군. 기개가 보통이 아니야.”
“오···.”
“실력도 제법인지 일전에 발렌스 수장을 만났을 때 그러더구나. 겪어 본 바 발차기가 상당히 맵다고.”
“…그분께 발차기를 날릴 수 있는 위인이 존재하긴 했네요?”
“내 말이 그 말이다. 대련 중 우연히 공격이 들어갔다 쳐도 대단한 게지.”
감탄한 레오나는 세월이 흘러도 근육으로 가득한 에즈란을 응시했다.
저런 조부님과 발렌스 수장이 인정할 정도이면 힘깨나 쓸지도.
멋대로 판단하던 그녀는 문득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덜컹덜컹, 바닥 한쪽이 소심하다 싶을 정도로 미약하게 들썩이고 있었다.
‘저곳은···.’
레오나의 금안이 가늘어졌다. 어릴 적, 룬과 숨바꼭질을 할 때나 사용하던 기밀 통로였다.
“저 통로는 폐쇄한 게 아니었더냐? 살수 따위가 통과할 수 있는 크기가 아닐 텐데….”
분노를 감추지 않은 에즈란이 당장이라도 공격할 기세로 페로몬을 끌어 올렸다.
“조부님, 일단은 얼굴이나 확인해 두죠.”
“어차피 이 자리에서 처리할,”
“쉿.”
뭐든 부수고 보는 그의 페로몬을 상기한 레오나가 입가에 검지를 가져갔다. 제아무리 임시 집무실이라 해도 쑥대밭으로 변하는 건 사양이었다.
덜컹덜컹. 와중에도 엉성하게 흔들리던 바닥이 열리며, 웬 하얀 머리통이 불쑥 솟아올랐다.
곧바로 불청객과 눈이 마주친 레오나는 때아닌 상념에 잠겼다.
살수라기엔 너무 유순하게 생긴 것이, 방심을 부르기 위한 술수인가. 더군다나 달랑거리는 램프를 머리에 단 꼴은 살수보다 도굴꾼에 더 가까워 보였다.
‘…침입은 본인이 해 놓고 왜 제가 겁먹어?’
심지어 램프 아래 드러난 보랏빛 눈동자는 잔뜩 겁을 집어먹은 모양새였다.
이윽고 제 처지를 자각한 살수는 미끄러지듯 스르륵 아래로 사라졌다. 뒤이어 솟아 나온 하얀 팔이 도로 바닥을 닫으려 했지만, 구조상 쉽게 닫힐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덜컹덜컹, 가는 팔이 애처롭게 허우적거렸다.
“저런.”
짧게 탄식한 레오나가 기밀 통로 쪽으로 다가섰다. 곧장 살수의 뒷덜미를 잡아챈 그녀는 비상한 힘으로 집어 올렸다.
“뭐야, 이 한 입 거리는.”
미간을 모은 레오나가 중얼거렸다.
그 잔인한 발언에 공중에서 대롱대롱 흔들리던 살수가 애원하듯 양손을 모았다.
크흠. 그제야 굳어 있던 에즈란이 크게 헛기침을 했다.
“레오나, 일단 내려 두는 편이 좋겠구나.”
“왜죠?”
“왜 거기서 나온 건지는 모르겠다만…,”
가다듬은 목소리 끝이 염소처럼 떨렸다.
“…그, 그거다.”
“그거?”
“그레이스가(家)의 실세.”
뜬금없이 그레이스가(家)의 토끼 얘기는 왜 꺼내시나. 제대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레오나가 미간을 구겼다.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거예요?”
“그 왜, 내가 봤다고 했던 아기 토끼 말이다.”
에즈란이 검지로 무언가를 가리키듯 허공을 쿡쿡 찔렀다.
‘웬 아기 토끼?’
멀거니 에즈란을 바라보던 레오나의 시선이 휙, 번개처럼 살수에게 꽂혔다.
연보라색 눈동자에 송곳니라곤 찾아볼 수 없는 치아. 의심할 여지 없는 토끼 수인이었다.
* * *
의도치 않게 사자 영토의 차기 수장과 독대하게 된 비비가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가시방석에 앉은 엉덩이가 계속해서 불안하게 들썩였다. 어쩌다 자신이 레오나 마니언츠의 집무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이게 다 그 사자 때문이야.’
그러게 쓸데없이 유령 타령은 왜 해선…!
램프 빛에만 의존한 캄캄한 어둠 속. 어느 순간 겁에 질려 부리나케 통로를 헤쳐 가다 보니 도착한 곳이 바로 여기였다.
분명히 룬이 길을 잘못 들더라도 빈방이 나올 거라고 했는데. 어째서 빈방은커녕 레오나 마니언츠의 집무실인 걸까.
온갖 의문이 몰아쳤지만 답해 줄 수 있는 사자는 이 자리에 없었다.
애꿎은 룬을 향해 분노를 불태운 비비는 흘끔 레오나를 곁눈질했다.
풀어헤친 곱슬머리와 시원하게 올라간 눈은 마치 사자를 수인으로 빚은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언뜻 발렌스의 우아함과 아힌의 오만함을 섞은 느낌이기도 하고.
뭐가 되었든 레오나는 한 영토의 차기 수장다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 에즈란조차 자리를 비켜달란 레오나의 한마디에 어쩔 도리 없이 나갈 정도니까.
‘아힌 그레이스와 비슷한 부류….’
‘아힌 그레이스와 비슷….’
순간 룬의 말이 귓가에 메아리친 비비는 눈앞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한편, 집무 책상에 앉은 레오나는 그레이스가(家)의 실세 토끼를 유심히 관찰했다.
소파에 앉아선 잡아먹을 듯 이글이글한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더니, 돌연 기죽은 얼굴로 고개를 숙이질 않나.
희한한 행태를 지켜보던 레오나가 천천히 다리로 시선을 내렸다. 토끼는 뒷발차기가 일품이라던 에즈란의 평가와 달리, 무예라곤 배우지 못한 자의 발목이었다.
‘뭐… 그레이스 가문이나 이쪽이나 우롱하는 걸 즐기긴 하지. 취미하고는.’
순 허풍이라 생각한 그녀는 비비가 이곳까지 오게 된 자초지종을 곱씹었다.
비비는 기별 없이 들른 것을 우려하여 통로를 이용했다 둘러댔지만, 배후는 룬이 틀림없었다.
필시 제 귀에 토끼의 존재가 들어오는 것을 피하려 한 거겠지. 동생의 괘씸죄를 너그러이 넘어가기로 결정한 레오나가 양손에 턱을 괬다.
“토끼님이었나?”
“…비비라고 부르시면 되는데.”
아까부터 부들부들 떠는 주제에 어떻게 할 말은 꼭 다 하는지. 레오나의 입매가 만족스럽게 호선을 그렸다. 다른 건 몰라도 토끼 같은 얼굴과 그렇지 못한 성격이 맹수계 수인에게 있어선 퍽 매력적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여기서 일주일 정도 푹 쉬다가는 건 어때요? 대접하고 싶은데.”
제안한 레오나는 아힌 그레이스의 혼인식 소식을 들은 직후부터 혼이 빠진 룬을 상기했다. 풀떼기를 스테이크처럼 질겅질겅 씹질 않나, 교목에서 졸다가 떨어지는 건 예사였다.
“어려우면 삼 일 정도라도.”
룬의 곱상한 외모면 어떻게 흔들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아힌 그레이스에겐 결코 없을 다정함도 강점 중 하나고. 혼인식 후엔 영영 돌이킬 수 없으니 지금만 한 기회가 없었다.
“어때요?”
작은 기대를 품은 레오나가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제안은 감사드리지만…,”
아힌과 닮은 속 모를 웃음을 바라보던 비비가 입을 달싹였다.
“기다리는 분이 많아서요. 갑자기 사라져서 다들 많이 놀랐을 거예요.”
우회적인 거절이었다.
도르르 눈을 굴린 비비는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레오나가 겉으로는 지극히 멀쩡해 보여도, 아힌과 비슷한 부류라면 최대한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무례한 방문은 다시 한번 사과드릴게요. 다음번에 기회가 된다면 정식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정중히 거절한 비비가 살갑게 웃어 보였다. 덩달아 레오나의 입꼬리도 한층 말려 올라갔다.
흐흥, 서로의 웃음소리가 집무실에 퍼져 나갔다.
‘되… 된 건가?’
배시시 웃고 있던 비비가 은근슬쩍 뒤로 물러날 때였다.
“그럼 이만…,”
“이를 어쩌나, 제 간절한 부탁만 들어주시면 집무실에 침입한 건은 문제 삼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 맹수가 정말. 비비의 눈이 새초롬히 올라갔다. 간절한 부탁은커녕 제안을 가장한 협박에 가까웠다.
“그거 알아요? 내가 허가하지 않으면 토끼님은 마음대로 저택을 출입할 수 없어요. 아힌 그레이스 또한 이곳에 못 들어오고.”
“…데리러 오길 기다릴 거였으면 통로를 지나지도 않았을 거예요.”
애초에 데리러 오지 않을지도 모르고. 또다시 차오르는 불안감을 누른 비비가 레오나의 눈을 똑바로 마주 봤다. 황금색 눈동자는 절대 순순히 놓아주지 않을 듯한, 녹록지 않은 빛을 띠고 있었다.
“그럼 이렇게 하도록 하죠. 토끼님의 주장대로, 스스로 이곳에서 나가는 것에 성공하면 집무실 침입도 문제 삼지 않을게요.”
“…….”
“대신 실패하면 이곳에 일주일은 머물러 주는 거예요. 이래 봬도 제가 동생을 사랑하는 누이라서.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거든요.”
‘기회…?’
꼴깍, 긴장한 비비의 침 삼키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체 이러는 이유가 뭐예,”
“이유가 꼭 필요한가.”
이곳의 주인이 난데. 딱, 레오나가 손가락을 튕기자마자 순식간에 무장한 기사들이 집무실로 들어찼다. 차기 수장이 부리는 정예 기사단이었다.
넷, 다섯, 여섯. 제 위로 그림자를 만들 만큼 거대한 장정들을 둘러본 비비가 레오나를 돌아봤다. 척 봐도 높은 수준의 기사들을 붙일 정도면 아예 돌려보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힌이랑 비슷한 부류라더니….’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생각과 손가락 하나로 세상을 부리는 맹수인 점이 똑 닮았네.
가자미눈으로 그녀를 노려본 비비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여전히 턱을 괸 상태인 레오나는 쭈뼛쭈뼛 움직이는 비비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기척을 못 숨기는 걸 보아 무예도 바닥이고, 룬의 말에 의하면 페로몬도 공격형은 아니라고 했고.
그녀의 얼굴 위로 자신만만한 미소가 번졌다. 토끼의 항복을 고대하는 찰나, 풀썩, 대뜸 기사 중 하나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무슨….”
풀썩, 풀썩. 레오나가 놀랄 새도 없이 기사들의 몸이 종이 인형처럼 기울기 시작했다.
‘페로몬 능력?’
확장된 금안이 지진이 일 듯 떨렸다.
어느덧 쓰러진 여섯 장정 사이에 덩그러니 선 비비는 슬쩍 뒤를 돌아봤다.
“…주, 주무시는 거라서 괜찮아요.”
그 말을 신호로 드르렁, 한 기사가 우렁차게 코를 골아 댔다.
“이만 가 볼게요, 문제 삼지 않겠단 약속은 지켜 주실 거라 믿어요.”
“…….”
“그럼 안녕히….”
슬그머니, 그리고 빛보다 빠르게 발을 굴린 비비가 집무실 문을 열어젖혔다.
탁, 문이 닫힌 지 일 초도 지나지 않아 다시금 소심하게 열렸다.
문틈에 끼어 버린 원피스 자락을 쏙 뺀 비비는 혹여 붙잡힐세라 바람처럼 달아났다.
탁탁, 레오나는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한참 후에야 깜박 정신이 든 그녀가 느지막이 코를 틀어막았다.
‘-말도 안 되는 능력인데.’
도대체 저 자극적인 페로몬 향은 뭔지. 정예 기사들을 몇 초 만에 쓰러뜨린 실력은 둘째였다.
그 향을 맡고도 아직까지 토끼를 삼키지 않은 아힌 그레이스의 인내심이 존경스러울 지경이었다.
* * *
“살려줘!”
“놓치지 말되 절대 상처를 입혀선 안 된다고 하셨다!”
“크허헝!”
한 바가지다, 한 바가지야.
기겁한 나는 수사자를 피해 저택 정원을 이리저리 들쑤셨다.
‘사자가 쫓아온단 말은 없었잖아!’
심지어 정원은 또 왜 이렇게 넓은 건데.
‘출구는 어디야?’
뒤돌자마자 보인 광경은 우악스러운 얼굴로 쫓아오는 기사와 사자들, 그리고 잠든 기사와 사자 여러 마리였다. 거의 내가 달리는 길이 수면 침대로 변하고 있단 설명이 맞았다.
쿠르릉- 설상가상으로 하늘에서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툭, 투둑. 점점 축축해지는 땅을 밟고 달리던 나는 가슴 언저리가 시큰거렸다.
어쩌다가 아힌과 서먹해지고, 이 겨울에 사자 영토에서 길을 잃고, 차기 수장과 기 싸움을 벌이질 않나, 또 이런 무시무시한 저택에서 사자에게 쫓기고 있는 건지.
비에 젖은 머리카락이 늘어질수록 발걸음도 축축 늘어졌다. 막연한 우울감이 발목을 잡아당기는 것만 같았다.
‘…울면 안 돼.’
눈 앞머리를 꾹 당긴 내가 고개를 저었다. 상황부터 모면한 후에 한탄해도 충분했다.
달리기에 박차를 가하던 나는 이윽고 눈을 크게 떴다.
‘통로의 출구는 가문의 휘장이 달린 벽 너머예요. 거기서 기다릴게요.’
마니언츠가(家)의 문양을 박은 휘장. 그것을 발견한 나는 그대로 벽과 이어진 계단에 발을 디뎠다.
벽 너머에 룬이 있다.
그 희망 하나로 벽 위에까지 올라선 나는 희게 질렸다. 뛰어내리기엔 너무 까마득한 높이였다.
망연히 서서 바깥을 내려다보던 중, 등 뒤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렸다.
“얘야, 아기 토끼야!”
누구더러 아기 토끼라는 거야. 눈을 부릅뜨며 고개를 돌리자마자 정원에 선 에즈란 님이 보였다.
“위험한 짓일랑 하지 말고 내려오너라! 상처 하나라도 생기면 릴리언 그 영감탱이가 노발대발 난리도 아닐 게다!”
“할아버님….”
“이 에즈란의 명예를 걸고서라도 무사히 내보내 줄 테니 이리 오거라, 어서!”
애타게 외친 에즈란 님이 맹세하듯 가슴께를 두드렸다.
돌려보내 준다는데, 뭐…. 딱히 버틸 이유도 없었던 나는 조심스레 계단 쪽으로 발을 디뎠다.
“비비!”
그때 결코 모를 수 없는 목소리가 빗속을 뚫고 울려 퍼졌다.
* * *
하늘이 먹구름으로 완전히 뒤덮이며 비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대기시켜 둔 마차 앞에 선 룬은 후드를 깊게 눌러썼다.
“너무 늦는데….”
벌써 통로에서 나오고도 남을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비비는 영 소식이 없었다.
-누이, 비비는 왜 이렇게 안 올까?
-그러게, 누구보다 잽싸면서….
먼저 도착한 슈와 비온 또한 비비에 대한 걱정으로 앉았다 일어났다만 반복했다.
그런 그들의 곁에 선 레스틴은 휙, 느닷없이 처절한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물론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레스틴, 뒤에 뭐가 있어?”
“조금 전부터 이상하게 등이 서늘해서 말입니다….”
한껏 날을 세운 레스틴이 연거푸 뒤를 확인했다.
“예민하긴.”
“농담이 아닙니다. 이브린 경을 마주치기 직전마다 꼭 이런 불길한 기분이 들어서…!”
레스틴이 답답함에 가슴을 탕탕 쳤다.
“날아오는 게 아닌 이상 저녁쯤에 도착할걸.”
“하지만 이브린 경은 늘 신출귀몰하는 사람인걸요.”
“너, 그 정도면 미움이 아니라 사랑이야.”
이브린의 이름을 염불처럼 외는 레스틴을 뒤로한 룬이 물끄러미 통로를 바라봤다.
딱히 긴 통로도 아니고, 두 갈래 길이라 자칫 길을 잘못 들더라도 금방 되돌아가면 되는 구조인데.
‘-어째서?’
흑표범들을 다시 들여보내서 살펴봐야 하나. 엄지로 턱을 쓸던 룬은 대뜸 홱 소리 나게 레스틴을 돌아봤다.
“레스틴. 엊그제 누이가 임시로 집무실을 옮긴다고 했었지?”
“아, 예. 벽난로에 문제가 생겼다고 하셨죠.”
“…어디로?”
“1층의 서재 옆 빈방으로, 헉!”
기계적으로 답하던 레스틴이 괴성을 지르며 입을 틀어막았다. 서재 옆 빈방은 통로에서 길을 잘못 들었을 때 연결되는 장소였다.
설마 비비가 레오나에게….
두 사람의 눈앞에 철퇴 같은 주먹에 맞고 산 나날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떨리는 눈으로 서로를 마주 보던 그들이 맞춘 듯 마차로 달려갔다. 당장이라도 저택 내부로 들어가야만 했다.
‘젠장,’
룬은 급히 마차와 연결된 말의 고삐를 풀기 시작했다.
평소엔 잘만 풀리던 게 왜 이럴 때만 말썽인지. 후드가 벗겨져 비를 맞고 있단 사실조차 모를 정도로 마음이 조급했다.
욕지거리를 뱉은 룬이 고삐를 푸는 도중, 레스틴이 갑작스레 발을 동동 굴러댔다.
“것 보십시오, 룬 님! 제 말이 맞잖습니까!”
“헛소리 말고 이거나 도와.”
“옵니다, 옵니다, 온다고요!”
“도대체 뭐가 온다고 그,”
“미, 미친 사람이 옵니다!”
레스틴은 제가 무엄하기 짝이 없는 말을 뱉은 사실도 모른 채 뒷걸음질 쳤다. 뒤늦게 어마어마한 살기를 눈치챈 룬은 반대편으로 고개를 틀었다.
시선 끝, 장검을 빼 든 미친 사람이 그들이 선 곳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빗물 묻은 검이 서슬 퍼렇게 번쩍였다.
‘아힌 그레이스.’
살기에 기민한 슈와 비온은 이미 멀리 숨은 이브린의 곁으로 도망간 지 오래였다.
천천히 고삐를 놓아 둔 룬은 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너무 빨리 왔는데.’
마침 사자 영토 근처에 있지 않고선 불가능한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침침한 빗속이어선지, 아니면 새빨간 눈동자를 가져서인지. 아힌의 눈빛이 한층 돌아 있단 사실이었다.
‘미쳤군.’
살기를 직면한 룬은 자칫 정말 죽을지도 모른단 직감이 들었다.
정확히 제 목에 꽂힌 형형한 시선이나, 전신을 옥죄는 지배계 페로몬. 특히 젖은 은발 사이로 드러난 붉은 눈은 살의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찰박찰박, 점점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룬이 어떻게 대응할지 생각하는 순간, 아힌이 놓친 검이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살벌하게 걸어오던 것치곤 허무한 실수였다.
떨어진 검을 곁눈질한 룬이 다시금 아힌을 마주했지만, 아힌은 그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던 룬이 눈을 크게 떴다. 통로에 있어야 할 비비가 벽 위에서 주먹을 내민 자세로 서 있었다.
* * *
인상 쓴 나는 어느새 뒤쫓아 온 기사들을 향해 엄중히 경고했다.
“오, 오지 마. 더 다가오면 잠재우는 수가 있어.”
아주 뜨거운 주먹맛도 보게 될 거야. 스윽, 협박성 짙은 주먹을 내밀자 기사들의 어깨가 경직됐다. 내 경고를 헛소리로 치부하기엔 정원에서 잠꼬대 중인 동료들이 너무 많은 모양이었다.
굳은 그들을 매섭게 쏘아봐 준 나는 바깥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흐릿한 빗속에서 오로지 아힌만이 또렷하게 보였다.
‘뭐야….’
눈꼬리를 축 늘어뜨린 내가 입술을 깨물었다.
안 올 줄 알았는데.
쌀쌀맞게 굴 땐 언제고, 저렇게 하얗게 질린 얼굴로 올려다보고 있는 건 너무 반칙이었다.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그는 어울리지 않게 바쁜 손길로 로브와 휘장을 벗어 던졌다.
“움직이지 말고 기다려. 내가 바로 올라갈,”
“아힌.”
아힌의 말을 끊어 버린 나는 입을 여러 번 달싹였다.
데리러 와줘서 고맙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왜 이제 왔냐고 타박해야 할지. 피할 땐 언제고 이러냐고 따져야 할지.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 복합적인 감정이었다.
결국 어떠한 말도 찾지 못한 내가 조심스레 물었다.
“나 가도 돼?”
어렵사리 꺼낸 질문임에도 불구하고 아힌에게선 아무런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다만 망치에 머리라도 맞은 듯한 얼굴로 멍하니 나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잠시간 눈만 깜박이던 그가 이내 양팔을 내 쪽으로 뻗었다.
“못 올 이유가 뭐가 있는데.”
“…….”
“그런 거 묻지 마.”
확신 어린 저음이 왜 이렇게 가슴께를 저릿하게 만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입술을 말아 물던 나는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을 향해 휙 고개를 틀었다. 얌체 같은 기사들이 그새 슬금슬금 접근을 시도하고 있었다.
사자 주제에 어딜 토끼를 잡으려고. 거치적거리는 옷자락을 잡은 나는 아힌을 향해 턱을 까딱였다. 이 비비 님이 곧 몸을 날릴 예정이란 신호였다.
그의 눈이 확장되는 동시에 발을 굴린 내가 그대로 뛰어내렸다.
‘맙소사.’
눈을 질끈 감자 반대로 온몸의 오감이 곤두섰다. 바람에 저항하며 떨어지던 몸이 풀썩, 누군가의 품으로 안착했다.
드디어 사자의 저택에서 탈출했다는 기쁨도 잠시. 눈을 뜨자마자 멀게만 느껴지던 아힌의 얼굴이 코앞이었다. 비를 맞고 온 듯 깨끗한 피부가 자못 창백했다.
“왜 저런 곳에 있었어, 조금만 기다리면 됐는데.”
“…찾으러 오지 않을까 봐.”
작게 답한 나는 곧바로 땅에 발을 디뎌 아힌을 끌어안았다. 이러지 않으면 또 칠칠치 못하게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기를 쓰며 저택을 나가려고 한 건 사실 아힌이 와 주지 않을 거란 불안감 때문이기도 했다. 초조하게 기다릴 바에야 스스로 나가는 게 훨씬 나으니까.
“아힌, 우리 돌아가자.”
가슴팍에 이마만 박고 있자, 커다란 손이 뒷머리를 꾹 눌렀다. 가두듯 나를 끌어안은 아힌이 연신 뒷머리를 헤집었다. 마치 내 존재를 확인하듯 조급한 손길이었다.
“-미안.”
차가운 입술이 젖은 머리카락 위로 스치듯 닿았다.
이런 순간에 입술까지 이용한 사과는 아까보다도 더한 반칙 아닌가. 그러한 불평을 말하진 못한 내가 아힌의 품에 파고들며 이마를 비볐다.
“미안해.”
덩달아 몸을 굽혀 나를 옭아매듯 안은 아힌이 재차 속삭였다.
“미안….”
뒷머리를 쓰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어떠한 변명도 붙지 않은 사과였지만, 난생처음 듣는 억눌린 목소리만으로도 충분했다.
쌓인 서운함을 한층 덜어 낸 나는 폭 한숨을 내쉬었다. 빗속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안도감을 가져다줬다.
* * *
하늘이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질 땐 언제고, 별이 보일 정도로 맑은 밤이 찾아왔다.
멀어지는 그레이스가(家)의 마차를 바라보던 룬이 툭, 저택 벽에 몸을 기대었다.
조금 전, 벽에서 뛰어내릴 때까지 비비의 시선은 단 한 번도 룬에게 닿지 않았다.
‘처참하네.’
서로만 좇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는 게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간접적으로 또 차여 버린 룬이 피식 웃으며 입술을 뗐다.
“누이, 비비를 억지로 붙들어 둬 봤자 아무 소용없어요.”
“이번엔 네 말이 맞는 것 같네.”
어느덧 곁으로 다가온 레오나가 뒷짐을 졌다.
“아힌 그레이스는 토끼가 감당할 만한 놈이 아니라 조금쯤은 승산이 있을 줄 알았는데.”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죠.”
의욕 없이 중얼거린 룬이 기지개를 쭉 켰다.
유난히 생기 없는 그를 흘끔거린 레오나가 곧 헛웃음을 쳤다. 아힌 그레이스의 성격상 깽판을 칠 줄 알았건만, 돌아가자는 토끼의 한마디에 꼬리를 내리던 꼴이 아직도 기가 막혔다.
“내 평생에 저 재수 없는 흑표범이 쩔쩔매는 꼴을 보게 될 줄이야.”
체구는 산만 한 놈이 조그마한 토끼 뒤만 따라다니는 모습이라니. 그도 모자라 토끼를 망토로 칭칭 싸매며 직접 수발까지 들고.
충격적인 장면이 계속해서 레오나의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문제입니다, 문제. 요즘은 온 그레이스저택 일원이 토끼님의 뒤만 졸졸 따라다닙니다.”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사이로 불쑥 이브린이 끼어들었다. 덕분에 질겁한 레오나가 노골적으로 표정을 구겼다.
“네 녀석은 왜 안 가고 여기 있어?”
“저를 깜박 두고 가셨거든요. 모두의 기억 속에서 잊힌 모양입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이브린은 버려진 사람치곤 지나치게 태연한 얼굴이었다. 퍽 진중한 낯짝을 올려 보던 레오나는 문득 턱을 매만졌다.
“…생각해 봤는데,”
“예.”
“아무래도 토끼의 힘은 그레이스가(家)에는 아까운 것 같아.”
지나치게 터무니없는 힘이었다.
정예 기사 몇십 명을, 하물며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잠재우는 힘은 웬만한 수장 가문에 버금가는 능력. 실제로 장차 그레이스가(家)의 뛰어난 전력이 될지도 몰랐다.
“맞습니다, 토끼님은 앞발로 대륙을 뒤흔들 분이시니까요.”
“…그거 일리 있군.”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고 생각한 레오나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영웅의 후손일지도 모릅니다.”
“과연. 그런데 넌 안 가?”
“송구하지만 멱살을 놓아 주셔야 갈 수 있습니다.”
“아, 습관적으로 그만.”
시시덕거리는 두 사람을 외면한 룬은 미끄러지듯 수그려 앉았다. 그런 그의 곁으로 레스틴이 데려온 토끼가 껑충껑충 뛰어왔다.
“첫사랑이 꽤 기네.”
혼잣말을 읊조린 룬은 검지로 토끼의 뺨을 가볍게 간질였다.
“난 아무래도 평생 혼자일 운명인가 본데.”
토끼는 마치 제가 있다는 듯 앞발로 그의 다리를 짚고 섰다.
“그래, 평생 우리 둘이 살자.”
처연한 웃음을 흘린 룬이 옆에 가만히 선 레스틴을 올려다봤다.
“토끼의 수명은 언제까지지?”
“사자보다 짧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역시.”
탄식한 룬은 문득 오래전, 비비가 중얼거리던 것을 떠올렸다. 멀뚱멀뚱 고개만 갸웃거리는 애쉬의 양 뺨을 붙들고선,
‘오래 살아 줘.’
‘비비. 뭐예요, 그게?’
‘누가 그러는데, 동물은 좋은 말을 많이 들을수록 오래오래 행복하게 산대요. 그래서 그냥 주문처럼 매일 말하고 있어요.’
그런 게 정말 효과가 있긴 하나.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룬이 토끼의 아래턱을 살살 쓸었다. 그의 입가에 다정한 미소가 떠올랐다.
“오래 살아 줘.”
오래오래 아프지 말고, 행복하게.
* * *
마니언츠가(家)를 떠난 마차가 흑표범 영토 방향으로 바퀴를 틀었다.
망토에 거의 파묻히다시피 한 나는 저녁이 내린 창밖을 응시했다. 세차게 내리던 빗줄기가 점점 얇아지고 있었다.
‘비가 그치려나….’
창밖에서 시선을 뗀 나는 슬그머니 위를 올려다봤다. 톡, 아힌의 젖은 머리카락에서 흘러내린 물방울이 눈가에 명중했다.
그것을 망토 자락으로 훔친 내가 눈만 도르르 굴렸다. 마차를 모는 중인 릴과 함께 있어야 할 메이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힌, 메이미는?”
“제인과 함께 그레이스저로 돌려보냈어. 만약을 대비해서 어머니께도 알려 둬야 하니까.”
만약을 대비한다는 게 뭐를 대비하는 건데? 차마 묻지 못한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듣지 않아도 뻔했으니까. 아까 아힌이 보인 기세만 봐도 혈혈단신으로 마니언츠 저택에 들이닥칠 심산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오히려 내가 벽에서 뛰어내려 아힌을 만난 게 다행일지도.’
흑표범과 사자의 대립에 토끼 등이 터질 뻔한 위기를 모면한 것과도 다름없었다.
뒤늦은 오한에 부르르 떨자 아힌이 곧바로 물어왔다.
“추워?”
“아니, 딱히 그런 건 아니고.”
어색하게 답한 내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숨이 막히면 막혔지, 이렇게 사람을 꽁꽁 싸맨 채 안아 들고 있는데 추울 리가. 내 손마저 피할 땐 언제고, 현재는 지나치게 몸이 밀착된 상태였다.
몸을 아힌의 반대편으로 살짝 비틀던 나는 흠칫 표정을 굳혔다. 마차 구석에 앉은 슈와 비온이 이쪽을 게슴츠레 흘겨보고 있었기에. 무언가 몹시 아니꼬운 기색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흑표범들이 보기에도 우리 꼴이 우스운 건가 봐.
괜히 멋쩍어진 내가 다시금 입을 달싹였다.
“저기요….”
“말씀하세요.”
“언제까지 이 자세로 있을 건가 해서….”
“저택에 도착할 때까지. 자칫하면 감기 들 수도 있으니까.”
그렇군. 딱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내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오랜만인 듯한 아힌의 품이 썩 나쁘지 않았다.
툭, 천천히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자 그의 몸이 경직되는 게 느껴졌다.
마차 내부가 고요 속에 잠겼다.
가만히 눈만 깜박인 나는 내내 묻고 싶었던 질문으로 정적을 깨뜨렸다.
“…아힌.”
“왜?”
“있잖아, 혹시 내가 불편해?”
아힌에게선 한참 동안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내가 초조함 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이, 아힌 또한 망설이며 입술을 여닫았다.
왠지 답변을 듣기 무서워진 나는 숨듯이 망토 후드를 푹 내려썼다. 후드에 장식된 복슬복슬한 털이 얼굴을 완전히 가렸다.
“-저번에 비비가 나더러 또라이라고 그랬잖아.”
곧 뜬금없이 맞는 말이 들려왔다.
“그 정도로 마음대로 살아왔는데, 살다 보니 마음대로 안 되는 것도 있더라고.”
“…….”
“예전부터 너만 관련되면 그래.”
스르륵, 아힌은 천천히 망토 후드를 끌어 내렸다.
“불안하게 만들어서 미안.”
뼈대 굵은 손이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느릿하게 넘겼다.
이어서 내 손바닥에 비껴가듯 입을 맞춘 아힌이 설핏 미소 지었다. 잘게 부서지는 듯한 웃음이었다.
웃고 있음에도 웃는 것 같지 않다고 해야 할까.
그저 빤히 바라보고만 있자, 드물게 그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 늘 먼저 눈을 피하는 건 나였는데.
“일부러 비비를 피한 건 아니야. 그저,”
“…그저?”
“미안, 당장은 말하기가 어려운 종류라서.”
시선을 내린 아힌은 자칫하면 사라져 버리는 것을 대하듯 조심스럽게 내 손을 만지작거렸다.
“모든 것을 숨김없이 공유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가끔은 아닐 때도 있더라. 비비가 아카데미에 들르려는 이유를 내게 말하지 않는 것처럼.”
‘알고 있었어?’
이 귀신같이 눈치만 빠른 맹수.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 했으나 입이 살짝 벌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네 지배계 페로몬이 미래의 아이에게 미칠 영향이 염려된다는 것이… 쉽사리 말하기 힘든 종류긴 했다. 어쩌면 아힌도 이것처럼 내게 전하기 어려운 말이 있을지도.
삐질삐질 식은땀만 흘리던 나는 스치듯 무언가가 떠올랐다.
‘그러니까 발작이든 뭐든 나랑 거리 두려 하지 마.’
이전에 지배계 페로몬이 날뛸 당시, 아힌이 은근히 나를 피했던 기억이었다. 일순 눈을 엄하게 뜬 내가 양손으로 그의 멱살을 잡아챘다.
“설마 다시 페로몬 발작,”
“그런 거 아니야. 토끼의 간을 걸고 맹세해.”
아힌은 양팔을 가볍게 들며 항복 자세를 취했다.
“느닷없이 내 간은 왜 걸어? 걸어도 네 간을 걸어야지!”
“내 간은 비비 거잖아, 비비 간은 내 거고. 그러니까 토끼의 간을 거는 거지.”
헛소리다 싶으면서도 구렁이 담 넘어가듯 설득된 내가 입을 뻐끔거렸다.
“…정말 아픈 거 아니지?”
“토끼의 간을 건대도.”
그사이 은근슬쩍 멱살 잡은 손을 푼 아힌이 나를 휙 돌려 안았다.
얼굴 보고 싶은데. 졸지에 그의 가슴팍에 등을 기대고 앉게 된 나는 불만스럽게 미간을 구겼다.
“이 겨울이 지나기 전에 제대로 말할 수 있도록 할게.”
내 머리에 턱을 묻은 아힌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래, 넓은 마음을 가진 비비 님이 기다려 줄 수밖에.
“그래도 너무 피하진 마.”
“응, 안 그럴게. 또 사자 영토를 휩쓸러 가면 곤란하니까.”
말하기 무섭게 청산유수처럼 고분고분한 답변이 돌아왔다.
‘말만 잘하지, 거의 한 달을 도망 다녔으면서.’
기다려 주기로 다짐한 것과 지난날의 설움은 별개였다.
그렇다면…. 허리에 둘러진 팔을 떨친 내가 순식간에 아힌을 밀쳤다. 풀썩, 난데없이 마차 벽으로 밀려난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슬금슬금 다가간 나와 아힌의 얼굴이 숨결이 섞일 만큼 가까워졌다.
“진짜 안 피해…?”
“안 피해.”
아힌의 대답과 동시에 스치듯 입술이 맞닿았다가 떨어졌다. 막상 저지르고 나니 자신이 없어진 나는 애꿎은 그의 옷 장식을 만지작거렸다.
“이래도?”
“…이걸 내가 어떻게 피하는데.”
아힌은 진심으로 기가 찬다는 듯 어이없는 한숨을 뱉었다. 덕분에 실낱같은 용기가 피어난 나는 다시금 입술을 겹쳤다.
분명히 시작은 나였는데. 어느새 비스듬히 고개를 튼 그가 깊숙이 파고들었다. 숨이 가빠질 만큼 어지러운 입맞춤이었다.
갈급한 손이 내 목덜미를 누를 즈음, 나는 예고 없이 입술을 떼어 냈다.
“-왜.”
잠긴 저음과 반쯤 뜨인 붉은 눈이 뭇 토끼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불굴의 의지로 유혹을 떨친 내가 탁탁, 자리를 정리하며 아힌을 원 자세로 복귀시켰다.
“무슨….”
뒤이어 부지런히 움직인 나는 조금 전과 같은 자세로 그의 품에 등을 기대었다.
“당분간은 내가 만지고 싶을 때만 닿는 걸로 할래.”
무거운 침묵의 시간이 지나갔다.
앙금 서린 복수를 당했단 사실을 깨달았는지, 아힌은 아직 열기가 남은 헛웃음을 흘렸다.
“차라리 발밑을 기는 벌을 내려.”
“그건 네가 좋아하는 거잖아.”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데.”
“어떻게 하긴, 나한테 휘둘리란 소리지.”
항변을 시도하던 아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얌전해졌다. 아무래도 나한테 휘둘린단 사실이 짜릿하게 다가온 모양이었다.
‘또라이….’
몸에 힘을 풀며 아힌에게 기댄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나도 일부러 아카데미에 가는 이유를 말하지 않은 건 아니야. 그, 나중에…,”
“비비.”
“어?”
“말하고 싶을 때 말해도 돼.”
“무슨 얘기인 줄 알고?”
“언젠간 말해 주는 거 아닌가? 바람피우는 것만 아니면 괜찮아.”
순간이지만 바람이란 단어에 힘이 실렸다. 그것을 모른 척한 내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사실 난 아힌이 나를 피하는 이유가 질렸다거나… 아무튼 그런 건 줄 알았어.”
“그럴 리가. 너한테 질릴 바엔 차라리 죽는 편이 낫지.”
왜 밑도 끝도 없이 그런 극단적인 결말로 가시는 건데요.
기가 찬 마음에 홱 고개를 꺾어 올려 보자, 비에 젖어도 젖은 대로 예쁜 얼굴이 보였다. 더욱이 평소보다 하얀 피부로 인해 붉은 입술이 더욱 도드라졌다.
‘사람이 이렇게 생겨도 되나.’
해도 해도 너무한 얼굴이라고 생각한 내가 가자미눈을 떴다.
“갑자기 왜 째려보는데.”
“내가 언제… 요.”
맹수들이 대체로 미려하게 생긴 건 먹이를 유인하기 위해서란 편견을 도통 지울 수가 없었다.
덩달아 슬쩍 째려보던 아힌은 대뜸 내 볼을 양쪽으로 쭉 늘렸다.
“오히려 나는 비비가 날 버리고 사자 영토로 가버린 걸까 봐 불안했는데.”
볼이 가로로 늘어난 내가 슬쩍 물었다.
“…만약 진짜 그런 거였으면 어떡하려고 했는데?”
“그냥 조금.”
“그냥 조금?”
“미쳐 버리지 않았을까.”
한순간 붉은 눈동자 위에 머무른 선득함을 발견한 나는 목석처럼 전방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렇구나….”
“그렇지.”
유순하고 나른한 음성은 전부 연막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렇지 같은 소리 하네.’
원래도 미친 맹수가 더 미쳐 버리면 어떻게 될지 감히 가늠할 수 없었다.
하하, 영혼 없이 웃던 나는 문득 출처 모를 허전함을 느꼈다. 마치 귓가에서 종알종알 떠드는 앵무새라도 잃어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슈와 비온은 피곤했는지 애쉬처럼 크왕 잠꼬대를 하는 중이고. 릴은 마부석에 앉아 있고.
빠르게 두리번거리던 내가 곧 망연한 얼굴로 입을 가로막았다. 둘째 또라이가 없었다.
“아힌, 이브린을 두고 왔나 봐!”
“알아.”
“안다고?”
태연스레 답한 아힌은 내 머리에 턱을 비비적거리며 말했다.
“사자의 저택에 쳐들어가자마자 나만 두고 숨기에. 비비랑 화해하라고 자리를 비켜 준 건가 싶어서 두고 왔어.”
그게 아니라 위험할 것 같으니까 홀랑 달아난 거겠지. 괘씸함에 이브린을 사자 영토에 고의로 두고 온 것임이 분명했다.
아연해진 나는 아힌의 뺨을 밀어내곤 마차 창문에 찰싹 붙었다.
덜컹덜컹, 이브린이 남겨진 사자 영토가 빠른 속도로 멀어지는 중이었다.
“혼자 돌아올 수 있으려나?”
“난 항상 혼자 돌아왔잖아.”
“그렇긴 해도….”
“사자라도 타고 돌아오겠지. 빨리 이리 와, 젖어서 감기 걸려.”
주르륵 끌려간 나는 다시금 아힌의 품에 폭삭 갇히고 말았다.
평소 대화를 나눌 땐 맞춘 듯 죽이 잘 맞으면서, 위기 상황에는 누구보다 열심히 서로를 버리고. 정말 알다가도 모를 군신 관계였다.
* * *
그레이스가(家)
“아니, 이 흉물은 뭐야!”
“셰, 셰프! 왜 그러십니까?”
“어느 녀석이 이딴 혼종 케이크를 만들어 놨어! 대체 누가 토끼 머리에 흑표범의 몸통을 붙여 둔 거야!”
“그게, 이건 토끼님의 졸업식 피로연에 올라갈 케이크 샘플인데, 이브린 님께서 특별 주문을 하셔서….”
이른 오전, 떠들썩한 주방 모퉁이에 새 부리가 번개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오늘도 혼란스러운 주방에서 딸기를 서리한 퀸은 그레이스 저택의 하늘을 가로질렀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퀸의 시야로 웬 수사자를 타고 귀가한 이브린이 들어왔다. 늘 깔끔하던 평소와 달리 유난히 초췌한 차림새였다.
“덕분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답례로 고기라도 대접… 저기, 제 손을 대접하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사자에게 악수를 요청하던 이브린은 그대로 손을 질겅질겅 먹히고 말았다.
‘머리카락은 또 왜 저렇게 치솟은 건지.’
쯧, 혀를 차며 외면한 퀸은 이번엔 발렌스의 집무실로 날아갔다.
“수고했다.”
푸드덕, 발렌스는 퀸이 창가에 안착하자마자 냉큼 딸기 파이가 든 상자를 내밀었다. 이따금씩 화가가 그린 토끼의 초상화를 아힌 몰래 전달하는 임무에 대한 대가였다.
“내 것은 아버님이 슬쩍 가져가 버리셔서 말이야. 처음엔 책 읽는 토끼를 보곤 기절까지 하셨던 분이…. 세상만사 모를 일이지.”
책 읽는 토끼 초상화의 복제본과 최고급 딸기 파이의 맞교환. 그것은 기밀문서를 주고받는 행위 이상의 진중함이었다.
상자를 집어 든 퀸이 날아가려는 찰나,
“최근 저택이 비교적 한가로워졌구나.”
발렌스가 창틀을 톡톡 치며 발길을 붙들었다.
“네가 전달할 만한 기밀 전서도 대폭 줄었고. 그래서 그런지 요즘따라 따분해 보이는군.”
날갯짓을 멈춘 퀸은 약간 뜨끔한 얼굴로 발렌스를 돌아봤다. 누가 혈육 아니랄까 봐 아힌처럼 눈치 하나는 일품이었다.
“나무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건 네게 있어 꽤나 고역일 텐데.”
창가에 선 발렌스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창밖으로 손을 뻗었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차가운 겨울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이 저택에만 머문 지도 벌써 십 년이 다 되어 가는데, 얽매이는 걸 꺼리는 새 수인에겐 상당히 긴 시간이지 않니?”
딱히 반응하지 않은 퀸은 괜히 파이 상자를 깔짝거렸다. 속내를 꿰뚫어 보듯이 말하는 발렌스가 껄끄러운 탓이었다.
“혹시 떠나게 되면 내게도 한 번은 들러 주렴, 뭐든 원하는 것을 줄 테니. 예전에 토끼를 돼지 영토로 옮겨 준 것에 대한 보답을 하고 싶구나.”
대답 대신 까딱 고갯짓을 한 퀸이 높이 날아올랐다.
‘-떠날 때라.’
그는 하늘을 가로지르며 발렌스의 말을 되뇌었다.
확실히. 근래에 종종 대륙 너머로 날아가 볼까 싶은 생각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발렌스 수장의 말대로 벌써 십 년이 다 되어 가는군.’
처음 아힌을 만났을 때가 예쁘장한 소년일 때였으니까. 물론 당시에도 정강이를 차 주고 싶을 만큼 오만한 인간이긴 했다.
‘목숨을 구해 줬는데 아무런 보답도 없나? 이브린이 새들은 은혜를 베풀면 보은을 한다던데.’
‘보은?’
‘-가령 수발을 든다든가. 마침 전령 새도 필요했던 참이니까… 음, 한 오 년 정도?’
‘이 고양이 새끼가, 내가 언제 구해 달래?’
‘고양이가 아니라 흑표범인데. 말이 너무 심해서 마음에 상처를 입었으니까 수발 기간을 십 년으로 늘리지.’
바라에게 죽을 뻔한 목숨을 구원받은 직후, 아힌과 약속한 십 년이란 시간이 다 되어가기도 하고. 더욱이 비비가 완전히 저택으로 귀환하면 아카데미를 오갈 필요마저 사라지는 것이었다.
‘여기도 슬슬 떠날 때가 되었나.’
퀸은 상념에 빠지기 직전, 호시탐탐 딸기를 노리는 애쉬를 피해 파이 상자를 숨겼다.
푸드덕, 완벽한 은폐 후 날아오른 퀸이 저택 위를 맴돌았다.
언제부터일까.
언뜻 삭막하기까지 하던 그레이스 저택은 인지하지 못한 사이 여러 색채가 깃들어 있었다. 고용인들의 얼굴빛이 한층 산뜻해진 건 물론, 필요에 의해 기르던 흑표범들은 어느덧 퀸의 딸기를 노릴 정도로 신분이 상승했다.
이것은 전부 위험한 미친놈이던 아힌이 온건한 또라이-비비 한정-로 거듭난 것에서 기인한 변화였다. 그 모든 건 바구니 속에 있던 꼬질꼬질한 새끼 토끼의 등장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이제 바구니만 보면 노여워하는 토끼를 떠올린 퀸이 피식 바람 새는 소리를 냈다. 발로 바닥을 탕 구르는 게 아주 폭군이 따로 없었다.
쐐액- 자연스레 실내 온실로 날아가던 그는 비비를 발견하자마자 왈칵 인상을 찌푸렸다.
‘저건….’
근래 아힌과 사이가 서먹하다고 하더니. 그새 화해했는지 누더기 같은 꽃다발을 든 낭만 토끼가 힘차게 걸어가고 있었다.
아힌이 환하게 웃는 건 꽃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꽃을 내미는 저 때문인 것도 모르고. 아직까지도 아힌이 꽃을 좋아한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실정이었다.
괜히 걱정이 된 퀸은 비비가 걷는 길을 따라 천천히 비행했다.
‘저 답답한 게.’
아힌 그레이스가 제게 얼마나 환장해 있는지도 모른 채 위태로운 짓만 골라 할 때마다 속이 탔다.
굳이 꽃을 주는 수고를 거치지 않고, 발로 차주기만 해도 그 인간은 좋아 죽을 텐데.
스스로 불구덩이로 걸어가는 비비를 따라가던 퀸이 멈칫했다. 잠깐 멈춘 비비가 고개를 꺾어 그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기에.
“퀸!”
활짝 웃은 비비는 꽃다발에서 꽃 한 송이를 꺼내어 달랑달랑 흔들었다. 선물로 주겠다는 의미였다.
딸기 외의 선물은 쓸모없는 퀸은 팽하니 콧방귀를 뀌었다.
“하여간 쌀쌀맞긴, 여기 두고 갈게.”
툴툴거린 비비가 다시금 제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뒤따라 날던 퀸은 비비의 발이 머무는 곳을 흘끔 내려다봤다. 생각해 보면 자신은 어느 순간부터 토끼의 발자취를 좇고 있었다.
시작은 아힌이 주워 온 새끼 토끼의 감시에서부터였다.
모두가 자리를 비운 밤, 그때가 되면 새끼 토끼는 늘 테라스에 앉아 달을 올려다보곤 했다. 은연중 자유에 대한 갈망이 드러나는 행동이었다.
퀸은 간간이 함께 달을 감상하는 시간이 꽤 나쁘지 않았다.
또 제힘을 깨닫기 위해 매일같이 허공에 솜뭉치를 날리며 수련하고,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을 동경하며 지도를 펼치기도 하고. 그러다 사람으로 변한 토끼가 스스로 벌컥 문을 열고 걸음을 내디뎠을 땐, 오히려 그가 희열을 느껴 버린 적도 있었다.
더욱이 그레이스가(家)를 떠난 일 년 반, 아카데미에 재학하는 몇 년 동안에도 토끼는 수많은 맹수들을 제압하며 정진하고 또 정진했다.
곱씹어 보면 생각 이상으로 아힌이 모르는 비비의 시간을 함께해온 퀸이었다.
“아힌!”
이어지던 퀸의 상념이 아힌의 등장으로 인해 깨졌다.
꽃다발을 등 뒤로 숨긴 비비는 기웃거리며 아힌의 주변을 돌았다.
“비비, 추운데 왜 나와 있어. 일단 안으로,”
“이거 봐.”
낭만 토끼가 드디어 숨겨 둔 누더기 꽃다발을 불쑥 내밀었다.
주변 교목에 안착한 퀸은 이어질 이런 예쁜 꽃다발은 처음이란 아힌의 거짓 찬사를 기다렸다. 그러한 예상과 달리, 꽃다발을 받아 든 아힌은 눈에 띄게 미간을 구겼다.
“꽃다발 모양이 좀 이상한데?”
저 흑표범이 미쳤나. 아힌의 노골적인 질타에 놀란 퀸이 날개로 부리를 가로막았다.
그러나 비비는 기분 나쁜 기색 없이 은근히 발뒤꿈치를 들썩였다.
“모양을 자세히 봐 봐.”
지시에 따라 심오하게 꽃다발을 관찰한 아힌이 중얼거렸다.
“-복숭아?”
“틀렸어.”
“엉덩이?”
“아니, 이게 어딜 봐서 엉덩이야? 누가 봐도 하트잖아!”
일순 긴장이 탁 풀려 버린 퀸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오늘따라 꽃다발이 한층 엉망이다 싶더라니. 나름 모양까지 새기는 정성을 들인 덕분이었다.
“내가 비비 님의 깊은 뜻을 몰랐네.”
“괜찮아, 틀릴 수도 있지.”
비소를 흘리던 퀸은 미세하게 꿈틀거리는 아힌의 입꼬리를 발견했다. 고작 하트 꽃다발 하나로도 좋아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모양이었다.
“잠깐만.”
화룡점정으로 비비는 꽃다발을 만든 후 남은 리본으로 아힌의 손목을 묶기 시작했다.
그를 기점으로 퀸은 아힌의 이성 줄이 끊기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꽃다발 다음엔 납치인가?”
순순히 묶인 아힌이 나른하게 눈가를 접었다.
“요즘 식사도 같이 못 했잖아. 오후에 아카데미로 출발할 예정이니까, 오늘 점심은 꼭 나랑 먹어야 돼.”
“아, 점심 메뉴가 나인 거네.”
“맞아, 내가 너를… 네?”
“짐승 토끼.”
그렇게 토끼는 대낮부터 인내심이 사라진 맹수에게 들려 가고 말았다.
저럴 줄 알았다. 예상한 결말을 바라보던 퀸은 문득 혼인식 날짜가 잡힌 후, 비비가 제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퀸, 혹시 나중에라도 토끼 수인인 아이가 태어나면… 나랑 같이 토끼 영토에 데려다줄 수 있을까? 바구니에 태워서라든지.’
‘토끼 영토가 어떤 곳인지는 알려 주고 싶거든.’
‘아무래도 아힌이나 메이미랑 같이 시가지에 가면 사람들이 달아나기 바쁘지 않을까 싶어서.’
맹금류라도 새 수인은 덜 무서워하잖아, 비비는 어깨를 으쓱이며 너스레를 떨었었다.
‘떠나기엔 아직 할 일이 남긴 했군.’
맹수의 영토에서 살아가는 토끼의 삶을 조금 더 응원하고 싶기도 하고.
당장 떠나는 것까진 보류한 퀸은 비비가 그의 몫으로 두고 간 꽃 한 송이를 물어 챘다.
그레이스가(家)나, 토끼나. 어느새 떨칠 수 없을 만큼 정이 들어 버린 모양이었다.
* * *
마차에 배낭을 실은 나는 배웅 나온 애쉬의 앞에 숙여 앉았다.
“애쉬, 이번이 정말 마지막으로 다녀오는 거야. 졸업한 후엔 매일매일 붙어 있자.”
애쉬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앞발로 힘차게 거수경례를 취했다. 덩달아 경례하던 나는 묘한 허전함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바라랑 슈, 비온은?”
“경계의 숲. 슬슬 바라가 사냥을 가르칠 모양이던데.”
대신 답한 아힌이 마차에 기대어 섰다.
“이틀 뒤면 내가 데려다줄 수 있다고 했잖아. 꼭 오늘 가야 돼?”
묻는 음성이 지독히도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나랑 아힌이랑 함께 가면 아카데미가 뒤집힐걸.”
“어차피 졸업 후에는 전부 들킬 텐데 뭐.”
“이왕이면 졸업식까진 감추는 편이 좋지. 할아버님도 졸업식 준비로 바쁘신데 소문까지 더할 순 없잖아.”
불만스러워 보이는 아힌을 흘끔거린 나는 슬금슬금 게걸음으로 거리를 벌렸다.
‘위험해….’
어떻게 식사 신청을 그런 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지. 백주부터 사람을 기진맥진하게 만들어 놓은 주제에, 정작 본인은 저토록 멀쩡한 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다.
뺨을 붉게 물들인 나는 도망치듯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뒤이어 황급히 문을 닫으려 했지만,
“비비, 진짜 졸업식 당일까지 안 돌아오려고?”
탁, 슬프게도 아힌이 발로 가로막는 게 더 빨랐다.
“며칠 안 남았기도 하고, 졸업식 연설 내용도 아직 작성 중이라서.”
“졸업식엔 어머니도 가실 것 같던데.”
“응, 내가 초대했어. 졸업식 당일까지 숨길 필요는 없으니까.”
벌컥, 탁. 벌컥, 탁. 태연히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문을 열고 닫는 씨름은 계속됐다.
“왜 이렇게 보내기 싫지.”
결국 승리한 아힌은 문을 완전히 열고선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조심해, 어제처럼 다른 길로 새면 주머니에 넣어 버릴 거니까.”
“이, 이제 안 들어가지거든?”
“큰 토끼 전용으로 제작하면 돼.”
참나. 슬쩍 노려본 나는 수가 부쩍 불어난 호위 기사들을 둘러봤다. 다른 길로 새고 싶어도 불가능한 숫자였다.
내 망토를 제대로 여미어 준 아힌은 문고리를 붙잡았다.
“문 닫을게.”
“아힌, 잠시만.”
급히 만류한 내가 의자에 둔 배낭을 뒤적였다.
어디 넣어뒀더라. 팔을 휘적거리고 있으니 곧 작은 유리병이 손에 잡혔다.
“이거.”
유리병을 꺼내어 불쑥 내밀자, 받아 든 아힌이 아리송하게 눈을 깜박였다. 설명을 요하는 눈빛이었다.
“그-, 물약 제조 강의 시간에 만든 건데….”
망설인 내가 조금 수줍게 말을 이어 갔다.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물약을 만들어 봤거든.”
“너무 추상적인데. 샘플인가?”
“으응. 어차피 효능도 없을 거니까 기념으로 갖고 있, 그걸 마시면 어떡해?”
아힌은 설명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물약을 털어 넣고 말았다.
“비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며.”
이 맹수는 내일이 없나 봐. 경악한 나는 튕기듯 마차에서 내려 아힌을 붙들었다.
“괘, 괜찮아?”
걱정과 달리 지극히 멀쩡한 아힌이 팔을 으쓱였다. 그럼에도 믿지 못한 내가 얼른 치유계 페로몬을 운용하여 그의 몸으로 흘려 넣었다.
“비비, 강의 중에 만든 수준의 물약은 아무런 효과도 없어.”
“하지만….”
아힌은 한 팔로 나를 들어 친히 마차에 올려줬다.
“너구리 일족인 칼렌 교수의 강의였겠지.”
“맞아, 어떻게 알아?”
“아는 자거든. 어차피 너구리 일족 약의 효과는 기한이 지나면 사라지는데 아깝잖아, 비비가 준 건데. 그런 설명 없었어?”
설명? 안절부절 엉덩이를 들썩이던 나는 칼렌 교수와의 강의를 떠올렸다.
‘학도 여러분이 만든 물약은 영양제 정도이니, 지인에게 선물해도 무방합니다. 학도끼리 교환해도 좋고요.’
뒤늦게 강의 내용을 상기한 내가 안심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무리 그래도 간 떨어질 뻔했잖아.
도끼눈을 한 채 흘기자, 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춘 아힌이 햇살처럼 미소 지었다.
“그럼 졸업식 때 봐.”
* * *
물약에 대한 여파가 가시질 않았는지, 마차 창밖으로 고개를 내민 비비가 길이길이 아힌을 쏘아봤다.
마차가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준 아힌은 회중시계를 확인했다.
늦은 오후엔 혼인식에 입을 예복 치수를 미리 측정해야 한다며 부르짖는 의상 전문가를 만나고. 내일은 페레니움 반지 세공사의 방문.
비비의 졸업식 당일에 시간을 전부 비우려면 일정이 촉박했다.
“애쉬.”
아힌은 여전히 마차가 사라진 방향 쪽에 앉은 애쉬를 돌아봤다.
“애쉬, 이제 그만 들어,”
순간 애쉬의 모습이 잔상처럼 미어진 그가 머리를 짚었다.
‘무슨….’
그 자세로 가만히 제자리에 서 있자, 얼마 지나지 않아 눈앞이 온전해졌다. 가벼운 현기증이라도 일으킨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상하리만치 시야가 어색한 느낌이기도 했다. 세상이 커다랗게 변한 느낌이라고 설명해야 할까.
타박타박, 꺼림칙한 위화감을 떨치지 못한 채 두리번거리는 아힌의 앞으로 애쉬가 다가왔다.
천천히 올라간 그의 시선이 애쉬의 앞발, 긴 다리, 장엄한 턱. 끝으로 번득이는 노란 눈동자에서 멈췄다.
그제야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은 아힌이 급속도로 표정을 굳혔다. 애쉬가 어림잡아 다섯 배는 산만 해진 상태였다.
‘-뭐야, 이건.’
산만 해진 애쉬를 올려다보는 아힌의 동공이 전에 없이 떨렸다.
툭, 반사적으로 물러나던 그의 발에 부드러운 천이 스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힌이 입고 있던 옷가지였다.
내가 옷을 벗었던가. 바깥에서 벗는 것엔 딱히 취미가 없는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해버린 그가 옷가지를 줍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앞발이 천 위에서 미끄러질 뿐이었다.
‘…앞발?’
검은 솜뭉치를 멀거니 응시하던 아힌이 손을 착 뒤집었다. 곧장 크고 작은 동그라미가 모인 발바닥이 보였다.
‘……?’
손바닥이 아니라 발바닥이라고?
더듬더듬, 몸을 문질렀지만 느껴지는 거라곤 털, 털, 털… 이 전부였다.
어울리지 않게 어지럼증을 느낀 그가 저택, 인근의 나무, 애쉬를 차례로 둘러봤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참혹한 현실을 직시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이 커진 게 아니었다. 단지 자신이 작아진 것일 뿐.
자세히 확인하진 못했지만, 새끼 흑표범 비슷한 걸로 변한 게 틀림없었다.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물약을 만들어 봤거든.’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물약···.’
수줍게 말하던 비비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메아리쳤다.
‘그게 너도 한번 작아져 보란 의미였어?’
연거푸 발을 뒤집던 아힌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페로몬을 운용했다. 다행히 지배계 페로몬은 활용이 가능했으나, 희한하게도 몸은 그가 사람으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냥 기절할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아힌의 위로 거뭇한 그림자가 졌다. 눈을 반쯤 내리뜬 애쉬였다.
어딘지 으스대는 듯한 표정의 애쉬는 앞발로 아힌을 툭툭 밀기 시작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매일 비비를 뺏어 가는 옛 주인에게 복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 나쁜 놈, 도둑놈. 어느 때보다 우쭐해진 애쉬가 이리저리 아힌을 밀어 댔다.
‘멈춰, 애쉬.’
힘의 우위에 밀려 데굴데굴 구르던 아힌이 고민에 잠겼다.
페로몬으로 반격하자니 애쉬의 뒷배엔 비비가 있었고, 계속 구르자니 이런 모욕은 난생처음이었다.
철퍼덕, 끝끝내 비비의 최측근을 공격하지 못한 아힌이 나가떨어졌다.
‘젠장.’
넝마가 된 꼴로 엉금엉금 기던 그는 절망을 느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경계의 숲에서 돌아온 바라가 놀란 표정을 하고선 달려오고 있었다.
-애쉬…?
둘 앞에 당도한 바라는 애쉬와 새끼 흑표범을 당혹스럽게 번갈아 봤다.
우리가 슈와 비온 외에 언제 또 새끼를 낳았던가. 기억상실에라도 걸렸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애쉬가 자애롭게 다른 흑표범의 새끼를 돌봐 줄 성미도 아니고. 설마 숨겨 둔….
끝으로 터무니없는 가설에 다다른 바라가 현기증을 느끼며 털썩 주저앉았다.
애쉬의 바람, 그리고 숨겨 둔 아이. 이미 바라의 세상은 피폐한 장르로 변모하고 말았다.
비틀거리는 바라를 무시한 애쉬는 아힌을 뚫어져라 내려다봤다.
마음 같아선 무력해진 옛 주인을 콱 물어뜯고 싶지만, 짜증 나게도 비비가 세상에서 두 번째로 예뻐하는 생물이라 차마 실행에 옮길 순 없었다. 물론 비비의 첫 번째는 애쉬 자신이었다.
마침 비슷한 생각을 한 아힌 또한 느릿하게 애쉬를 올려다봤다.
서로 비비를 봐서 넘어가는 것으로 하도록 하지. 애쉬와 아힌은 눈빛을 주고받으며 타협을 마쳤다.
이윽고 천천히 아힌의 덜미를 물어 든 애쉬가 얼빠진 바라를 툭 밀었다.
-바라, 저택으로,
-애쉬, 변명이라도 해.
애쉬의 바람 상대를 찾아 없애고, 아무것도 모르는 새끼 흑표범은 거두겠단 결심까지 끝낸 바라가 애쉬를 돌아봤다. 샛노란 눈 주변에 물기가 핑 돌았다.
-거짓말이라도 괜찮아. 어차피 나는 네가 어떤 행동을 해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
-뜬금없이 뭐라는 거야? 그보다 저것 좀 주워서 따라와.
-……?
얼떨떨한 시선이 바닥에 널브러진 웬 옷가지에 닿았다. 굳은 채 옷가지를 바라보던 바라가 곧 킁킁거리며 아힌의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외간 새끼 흑표범이 아니라 토끼의 졸개였군!
드디어 새끼 흑표범의 정체를 깨달은 바라가 눈에 띄게 밝아졌다. 엉덩이를 씰룩이며 옷가지를 무는 속도가 화살보다도 빨랐다.
안 봐도 뻔한 생각의 흐름을 눈치챈 애쉬는 픽 웃음 치며 저택 입구로 걸음을 틀었다.
목적지는 비비의 노예-이브린-가 있을 아힌의 집무실이었다.
* * *
아힌의 집무실 내부.
이브린은 애쉬와 바라가 물어온 새끼 흑표범을 빤히 눈여겨봤다.
그는 살면서 이렇게 오만한 흑표범을 본 적이 없었다.
당당히 걸어가선 최상석인 아힌의 의자에 떡하니 앉는 태도라니. 책상 너머로 귀만 빼꼼 보이는 모습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근엄함이었다.
혹시 그레이스가(家)에 방문한 어린 귀족 자제인가 싶었던 이브린이 다른 보좌관들에게 눈짓했다.
“…누구?”
모릅니다, 나란히 선 세 명의 보좌관이 동시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애당초 새끼 흑표범은 인간화를 치르지 않은 어린 수인이라 보기엔 지나치게 몸놀림이 날렵했다. 그러나 이상하리만치 이브린의 생존 본능은 저 새끼 흑표범을 경계하고 있었다.
차분히 살피던 이브린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라가 입에 문 옷가지를 발견했다. 오늘 아침 아힌이 입고 있던 검은 정복이었다.
“설마,”
드물게 동요한 이브린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설마 아힌 님… 이십니까?”
“어휴, 이브린 님. 또 이러신다!”
“농담도 참.”
그게 으레 있는 이브린의 질 나쁜 농담이라 생각한 보좌관들이 허허 너스레를 떨었다. 아직 옷가지를 발견하지 못한 것에서 오는 용기였다.
“저런 깜찍한 아힌 님이라니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브린은 퍼져 나가는 웃음 속에서 미소조차 지을 수 없었다. 새끼 흑표범의 눈동자가 깜찍은커녕 무섭도록 스산한 빛을 띠고 있었으니.
“절대 아힌 님이 아니라는 것에 제 목을 걸겠습니다.”
개중 끝까지 우스갯소리를 하던 보좌관은 뒤늦게 분위기가 묘한 것을 깨달았다.
하하, 하하하…. 호쾌한 웃음소리가 점점 멎어 들었다.
그제야 바라의 입에 물린 옷가지를 확인한 보좌관이 양손을 모았다.
죽었다. 끔찍한 미래를 그린 보좌관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입은 웃고 눈은 우는 희한한 광경에서 시선을 뗀 이브린은 고저 없이 말했다.
“목이 잘리기 전에 주치의를 불러오는 게 좋겠군요. 다른 사용인에게 알리지 말고, 은밀히.”
잠시 후, 헐레벌떡 달려온 주치의는 조심스레 아힌의 몸을 뒤집었다.
아힌의 옷가지에 함께 딸려온 유리병을 살피고, 이어서 각종 진단을 마친 그가 말문을 텄다.
“약병에 남은 성분은 무사히 채취했습니다. 아무래도… 이런, 죄송합니다.”
실수로 민감한 부위인 배를 만져 버린 주치의가 거듭 사과했다.
어딜. 앞발로 찰싹 그의 손을 쳐 낸 아힌은 배를 소중히 보호했다.
“크흠, 큼.”
예민한 고양이와 다름없다고 생각한 주치의는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아카데미 강의에서 만든 수준의 물약은 실제로 영양제 정도가 맞지만, 제조자가 토끼님인 게 문제인 듯합니다.”
‘비비가? 어째서지?’
아힌은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실도 잊은 채 입을 뻐끔거렸다. 다행히 용케 알아들은 주치의가 설명을 덧붙였다.
“너구리 일족의 물약은 제조자가 가진 페로몬 힘에 따라 효과가 결정되기도 하죠. 그러니 아무리 초심자라 해도 토끼님이 만든 물약은….”
뜸 들인 주치의는 대륙을 뒤져도 전무하다시피 한 치유계 페로몬을 상기했다.
“전문가가 만든 물약과 비슷한 효과를 발휘하지 않을까 감히 아뢰어 봅니다.”
“…….”
“또한 강의에서 신체가 줄어드는 물약을 만들 리는 없으니…. 제조 중에 토끼님의 페로몬이 과하게 스며들거나, 배합을 잘못하신 건 아닐지 추측 중입니다.”
자신의 크나큰 방심을 깨달은 아힌이 앞발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하필 비비는 왜 그렇게 생겨선.
온유한 이목구비를 비롯하여, 큰 소리만 들려도 몸을 날려 숨는 행동은 비비가 아힌보다 강할지도 모른단 사실을 잊게끔 만들었다.
“그럼 인간으로 돌아가는 방법은?”
잠자코 듣고 있던 이브린이 물었다.
“그게, 물약의 정확한 성분을 알 수 없어서…. 그래도 너구리 일족의 약은 시간제한이 존재하니, 늦어도 닷새 안엔 사람으로 돌아갈 수 있으실 겁니다.”
‘닷새라고?’
절대 안 돼. 벌떡 몸을 일으킨 아힌이 주치의의 손가락을 잡고 흔들었다.
닷새 후면 분명 비비의 아카데미 졸업식이 있는 날. 그 중요한 날에 이런 꼬질꼬질한 꼴로 참석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졸업식 날 모두가 올 텐데, 연설 때 실수하면 어떡하지?’
아힌의 눈앞에 은근히 기대하며 발을 까딱이던 비비가 아른거렸다.
‘조부님은 졸업식 후에 피로연이라도 개최할 심산이신 것 같던데.’
‘할아버님도 참, 제발 그러지 말라고 당부드렸는데도.’
곤란해하는 표정과 달리, 온 가족이 참석하는 게 내심 기쁜 모양새였다.
탕탕, 반드시 사람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아힌이 거칠게 앞발로 책상을 내려쳤다. 사람으로 돌아갈 방도를 찾아내란 의미였다.
“아힌 님, 송구합니다만 조금 더 자세히 표현해 주셔야….”
서툰 몸 신호를 거의 알아듣지 못한 주치의는 어리둥절하게 뺨을 긁었다.
그간 비비는 얼마나 속이 터졌을까. 그 답답함을 십분 이해한 아힌은 홱 소리 나게 이브린을 돌아봤다.
자그마치 이십 년. 함께해 온 세월이 있는 만큼 눈빛만으로도 의사를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희망에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일사천리로 고개를 끄덕인 이브린은 침착히 무언가를 들고 왔다. 새끼 흑표범이 들어갈 만한 크기의 솥이었다.
“실례합니다.”
그는 날뛰는 아힌을 안아 솥으로 집어넣었다.
“여러분, 지금이 하극상을 벌일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입니다.”
솥뚜껑을 든 이브린이 비장하게 말했다.
“대륙에서 가장 귀한 흑표범 구이를 맛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죠.”
“…….”
“드실 분?”
차마 동조하지 못한 주치의와 보좌관들이 식은땀을 흘리며 시선을 피했다.
‘-죽여 버릴까.’
솥을 짚고 두 발로 선 아힌이 이브린을 죽어라 노려봤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듯한 정적인 얼굴이 오늘만큼 없애 버리고 싶은 적이 없었다.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물약을 만들어 봤거든.’
이브린을 볼 때마다 눈을 세모로 뜨는 비비의 심정을 누구보다 이해하게 된 순간이었다.
* * *
어느덧 노을이 아카데미 교정을 붉게 물들였다.
부스럭,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아카데미에 도착한 이브린이 수풀 속에서 불쑥 솟아올랐다.
얼굴 여기저기엔 발톱 자국이 선명했고, 아힌이 든 솥을 양팔로 안아 든 몰골이었다. 아힌이 이브린에게 안기는 것을 결사반대한 탓에 찾은 특단의 조치였다.
‘물약을 분석하면 해약을 얻을 수 있긴 하지만, 해약을 만들기 전에 닷새가 지날 겁니다. 송구하나 제조법을 가르친 칼렌 교수를 찾아가는 게 가장 빠른 방법입니다.’
주치의의 조언대로 곧장 칼렌 교수에게 연락을 취했으나, 그는 연구실에 틀어박히기라도 한 건지 도통 연락이 닿질 않았다.
고로 친히 아카데미까지 걸음 한 참. 한산한 교정을 주시하던 이브린이 앓는 소리를 냈다.
“교정 내에선 마차 이용도 금지되어 있고…. 칼렌 교수를 찾다가 제 소중한 다리가 부러지겠습니다. 학도들을 피해 어떻게 이 넓은 교정을 다 뒤진답니까?”
그는 이미 아카데미에 도착했을 비비를 떠올리며 제안했다.
“제발 토끼님께 도움을 청합시다.”
도리도리, 아힌은 한껏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도대체 왜죠? 애초에 학생회장이신 토끼님의 귀에 저희의 방문 소식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부터가 불가능한 수준입니다.”
‘아무튼 안 된다니까.’
수치심이라곤 내던진 아힌이라도 비비에게만은 보여 주고 싶지 않은 모습이 있는 법. 스스로가 봐도 새끼 흑표범인 지금의 모습은 너무 깜찍하기 짝이 없었다.
“그럼 릴리언 님께 가 보는 건 어떻습니까? 제가 학장실 위치는 잘 알고 있습니다.”
완고한 태도를 마주한 이브린은 하는 수 없이 다른 방안을 제시했다.
‘머리 굴리지 말고 직접 찾아.’
아힌은 릴리언의 이름이 언급되자마자 으르렁 반발을 표했다. 솥에 들어간 채 돌아다니는 꼴을 본다면 두고두고 낄낄거릴 게 자명했기에.
흉흉한 기세의 아힌을 외면한 이브린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까다롭기는.”
‘다시 말해 봐.’
“길을 찾기가 까다롭다는 의미였습니다.”
이브린은 배신이 뇌를 지배한 건 아닐까. 앞발을 내민 아힌이 목을 그어 버릴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한편, 이브린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저분은….”
아카데미 학도 중 앨런 외에 유일하게 비비와 아힌의 관계를 아는 돼지 수인. 파란 머리카락을 반 묶음 한 비비의 클래스 메이트, 헨드리였다.
지체 없이 일어난 이브린이 수풀을 제치고 달려갔다. 잘만 회유하면 도움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희망적인 존재였다.
“돼지님.”
“아니, 멀쩡한 이름을 두고 왜 종족을…, 어?”
기가 찬 마음에 몸을 돌리던 헨드리가 눈을 크게 떴다. 첫 번째는 이브린의 말끔한 외모에 놀라고, 두 번째는 그의 신분을 상기한 까닭에서였다.
그녀가 예를 취하려 하자, 손을 저어 만류한 이브린이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칼렌 교수가 있는 곳으로 좀 안내해 주십시오. 물론 토끼님이 모르도록.”
“칼렌 교수님을요? 연구실에 계실 땐 뵙기가 어려울 텐데…. 그보다 왜 비비에겐 비밀로 하는 건지 여쭤도 되나요?”
“사정이 복잡하니 일단 이동하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뭐어… 괜찮긴 한데 뒤에 비비가 오고 있을걸요. 직전에 헤어진 참이라.”
헨드리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이브린은 심장이 덜컥 곤두박질쳤다. 교정 변두리 쪽에서 새하얀 게 힘차게 걸어오고 있었다.
“숨으셔야 합니다.”
다급히 헨드리를 이끈 그는 수풀 속으로 풍덩 몸을 던졌다. 얼떨결에 함께 숨게 된 헨드리가 따지듯 속삭였다.
“갑자기 무슨 짓이에요?”
“토끼님을 피하려는 짓입니다.”
누가 그걸 몰라서 묻나. 속 터지는 답변을 들은 헨드리가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그러니까 그 피하는 짓에 왜 저까지 끌어들이는 건지.
재차 따지려 고개를 돌리던 그녀는 말문이 턱 막혔다. 이브린의 얼굴이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탓이었다.
파르르 떨리는 시선이 나뭇잎이 붙은 흑발과 단정한 이목구비를 오갔다. 하는 짓은 괴짜가 따로 없는데, 왜 껍데기는 불필요할 정도로 깨끗한지 모를 일이었다.
오묘한 정적 속, 이브린이 먼저 입술을 뗐다.
“괜찮습니다.”
“…뭐가요?”
“첫눈에 반해도요. 그런 전개는 익숙한 일입니다.”
“허, 나 참.”
안타깝게도 죄악 같은 말솜씨로 인해 미모는 빛을 잃고 말았다. 하고픈 말은 많지만, 하지 않기로 결정한 헨드리가 부글부글 끓는 얼굴로 전방을 주시했다.
“이브린 님, 그런데요,”
“말씀하십시오.”
“저거 두고 와도 되는 거예요? 솥이랑… 고양이인가?”
뒤늦게 허전함을 깨달은 이브린이 텅 빈 손을 확인했다. 시종일관 무덤덤하던 얼굴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그는 교정 한복판에 놓인 솥을 응시하며 입을 달싹였다.
“아, 아힌 님.”
‘…아힌 님?’
아힌이란 이름이 제가 아는 비비의 연인이 맞나. 솥 속의 고양이와 이브린을 어리둥절하게 번갈아 본 헨드리가 곧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쉿.”
비명을 지르려던 헨드리의 입술을 기다란 검지가 가로막았다. 이브린의 시선은 어느덧 솥 가까이까지 접근한 비비에게 닿아 있었다.
그가 너무 필사적으로 숨는 중이라, 덩달아 기척을 내기가 애매해진 헨드리가 조용히 물었다.
“…비비가 왜 저러는 거죠?”
“글쎄요, 사실 저도 토끼님의 생각은 읽기가 어려워서.”
비비는 주변의 교목 뒤에서 몸을 반만 내민 채 솥을 뚫어져라 노려보는 상태였다. 정확히는 솥 속에 있는 아힌을.
낭패 어린 심정이 된 아힌은 차마 자신을 째려보는 비비의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 애매한 상태로 십 분가량이 지나갔다.
그때까지도 지그시 솥을 예의주시하던 비비가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걸음, 두 걸음. 숨죽인 채 발을 내딛던 비비는 갑자기 땅을 팍 박찼다.
‘저게 무슨…!’
이브린이 놀라기도 전에 몸을 튕긴 그녀는 맹수가 사냥감을 습격하듯 솥을 낚아챘다.
탁탁탁, 아힌이 든 솥을 납치한 비비가 달아나기까진 채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이게 아닌데. 이브린은 말릴 새도 없이 멀어지는 비비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 *
솥 안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던 아힌은 여러모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저를 잊은 무능한 이브린에 대한 원망 한 줌.
왜 비비는 자신을 납치하여 이렇게 뛰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 한 줌.
전부 망했다는 포기 한 줌.
생각에 지친 아힌이 속세를 벗어난 표정을 지을 즈음, 인적이 드문 곳에 다다른 비비가 숨을 몰아쉬었다.
솥을 바닥에 내려 둔 그녀는 조심스레 새끼 흑표범을 꺼내 들었다.
“누가 너를 이런 솥에 넣어 뒀어?”
야만인 같으니라고. 하필 새끼 흑표범이라 더욱 감정 이입을 해 버린 비비였다.
“어쩌다 그런 곳에 있던 건진 모르겠지만, 자칫하면 큰일 날 뻔했어. 여기는 맹수가 득실거리는 곳이란 말이야.”
어린 맹수는 한 입 거리로 삼켜질 수도 있다는 게 비비의 정론이었다.
“알아들었어?”
그녀는 아힌을 살짝 흔들면서도 주변을 경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공중에 대롱대롱 들린 아힌은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제게 있어 비비는 늘 작고 자칫하면 부서지진 않을까 싶은 존재였는데. 현재는 반대로 비비가 자신을 조심스럽게 다루는 게 어색하면서도 새로웠다.
‘…꽤 괜찮은데.’
애쉬의 근본 없는 우쭐함은 이런 맹목적인 애정과 보호에서 오는 건가. 막상 접해 보니 상상 이상으로 나쁘지 않았다.
언제 비비에게 이런 귀여움을 받아 보겠나. 이브린이 올 때까진 이 상태로 있는 것도 괜찮을지도.
거기까지 생각이 다다른 아힌은 곧장 그렁그렁한 눈망울을 했다. 이브린이 있었다면 그 광경을 본 스스로의 눈을 찌를 만큼의 가식이었다.
“그래, 그래.”
그 가여운 눈동자에 속절없이 넘어간 비비가 연신 고개를 주억였다.
“내가 꼭 주인을 찾아 줄게. ···아니지, 솥에 넣는 주인이라면 찾지 않는 편이 나을 텐데.”
혼잣말한 그녀는 아힌을 품에 안은 채 어딘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길 잃은 어린 맹수를 연기하던 그는 힐긋 비비를 올려다봤다.
이 정도로 가까운 접촉을 하고 있음에도 비비가 부담스럽지 않은 건 올겨울 들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마 비비를 해칠 수 없는 몸으로 변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약해 빠진 모습이 된 건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몰랐다.
자신의 나약함에 고마워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던 그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앞발로 그다지 날카롭지 않은 송곳니를 만지작거리는 와중, 화려한 건물로 들어선 비비가 계단을 올랐다.
“이제 다 와 가.”
망설임 없이 발을 내딛는 그녀와 달리, 층수가 높아질수록 아힌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렸다. 그는 이 복도의 끝이 어딘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학장실.
그 끔찍한 장소 앞에 다다른 비비가 문 사이로 빼꼼 얼굴을 들이밀었다.
“할아버님, 바쁘세요?”
“오오- 우리 토끼가 연락도 없이 웬일이더냐.”
안쪽에서 솜사탕처럼 부드러운 음성이 울려 퍼졌다. 평소의 릴리언이라곤 믿기 어려울 정도의 어조였다.
벌컥, 비비는 익숙한 일인 양 활짝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카데미에선 이 할아비한테 아는 척도 안 하더니, 무슨 바람이 분 게지?”
마침 업무를 끝낸 릴리언이 양팔 벌려 환영했다.
“어쩔 수 없는 거 다 아시면서.”
“말대답도 아주 잘하는구먼. 늠름하기도 하지.”
“할아버님, 그런 건 늠름한 게 아니에요.”
릴리언은 투덜거리는 비비의 모습마저 사랑스러운지 헤벌쭉 입꼬리를 올렸다.
영감이 반주라도 드셨나. 기가 찬 아힌이 이맛살을 구겼다. 보는 눈이 있을 땐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뒤에서는 비비가 숨만 쉬어도 박수갈채를 보낼 기세였다.
“저녁은 먹었고? 날이 추운데 더 두둑하게 입고 다니지 그랬느… 이건 무엇이지?”
릴리언은 한참이나 비비를 살피고 나서야 새끼 흑표범을 발견했다.
가늘어진 릴리언의 눈이 관통하듯 아힌을 훑어 내렸다. 수인인지 동물인지 가늠하기 위한 눈빛이었다.
이런 상태, 하물며 릴리언에게 정체를 들키고 싶진 않았던 아힌이 페로몬을 한층 깊숙이 감췄다.
“흠.”
이내 아힌을 동물이라 판단한 릴리언이 수염을 쓸어내렸다.
“아직 새끼 흑표범 같은데, 이빨도 제대로 안 난 걸 어디서 데려온 게냐?”
“누가 교정에 버린 것 같더라고요.”
조금 분개한 비비가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교정에 덩그러니 버려진 것도 모자라, 솥 안에 넣어두기까지 한 야만스러움까지.
귀 기울여 듣던 릴리언이 쯧 혀를 찼다.
“가끔씩 학도들이 허가 없이 반려동물을 들여오거나, 우연히 교내로 들어온 야생동물을 실험 용도로 쓰기도 하지. 이 경우엔 후자 같구나.”
“무슨… 벨헬름 아카데미는 그런 실험이 금지되어 있잖아요.”
“알다시피 모든 학도가 교칙을 지키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주인에게 돌려보낼 일말의 마음조차 사라진 비비가 새끼 흑표범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측은지심이 피어난 릴리언 또한 노기를 누르며 뒷짐 졌다.
“일단 이 할아비가 흑표범을 유기한 학도를 찾아보마. 며칠간 몸을 의탁할 곳도 생각해 보아야겠구나.”
아힌은 이미 비비에게 몸을 의탁하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얌전히 안긴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릴리언은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고놈 참 닮았구먼.”
“누구를요?”
“아힌 말이다. 그 녀석이 인간화를 치르기 전의 모습이 딱 이랬지.”
“흑표범이 다 이렇죠. 슈와 비온도 비슷하게 생겼었잖아요.”
“큼, 그런가?”
릴리언이 검지로 장난스럽게 코를 누르자, 아힌은 곧장 주름진 손가락을 콱 깨물어 버렸다.
에잉, 쯧. 기겁한 그가 얼른 손을 거뒀다.
“할아버님, 괜찮으세요?”
“문제없느니라. 앙칼진 것, 토끼 네게만 얌전한 꼴마저 손주 놈을 똑 닮았구나.”
이 새끼 흑표범이 그렇게도 아힌을 닮았나. 내심 그의 어린 시절이 궁금해진 비비가 호기심 어린 눈을 했다.
“아힌도 이런 어린 흑표범일 때가 있었겠네요, 한번 보고 싶다.”
“볼 필요도 없느니라, 지금이랑 똑같아. 그리 거만한 아기는 세상에 또 없을 게다.”
“하긴. 그 성격이 어디 가겠어요?”
의도치 않게 앞담화를 듣게 된 아힌이 흥 콧김을 뿜었다. 딱히 기억나지도 않는 어린 시절에 대한 험담은 그에겐 일말의 타격도 주지 못했다.
“그래도 궁금하긴 하다. 그렇지?”
새끼 흑표범의 머리를 쓰다듬던 비비는 문득 멍한 표정을 지었다.
기억도 희미한 어린 날, 언뜻 흑표범 수인 특유의 적안을 본 적이 있는 듯한 기시감이 들었다.
‘아기 토끼는 함부로 만져선 안 돼. 우리와는 다르게 약한 존재거든.’
다른 장면 없이, 오로지 두 쌍의 붉은 눈동자만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내가 아힌을 만나기 전에도 흑표범 수인을 만난 적이 있었던가. 외출이 불가능했으니 그럴 기회가 없었을 텐데.
‘…꿈인가?’
골똘히 생각하던 비비는 말랑한 앞발이 제 손등을 짚는 감촉에 아차 정신이 들었다. 손등을 짚고 선 새끼 흑표범이 퍽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귀여워라. 일순 애쉬와 겹쳐 본 비비가 방싯 웃어 보였다.
“왜, 내가 관심을 안 줘서 그래?”
“아주 껌딱지가 따로 없군. 일단 이 아이는 할아비가 수의학 교수에게 데려가 보마. 날이 늦었으니 토끼 너는 기숙사로 돌아가 보거라.”
비비랑 떨어지라니. 경악한 아힌이 채 달아나기도 전에 릴리언의 손에 딸려갔다. 두 앞발로 버텨봤자 소파에 주르륵 쓸린 자국만 남을 뿐이었다.
버티는 아힌을 얼굴 앞까지 가져간 릴리언은 흐뭇한 미소를 걸었다.
“깜찍하구먼, 오랜만에 손주 놈의 어릴 적을 보는 기분이구나.”
“저기, 할아버님…. 조금 싫어하는 것 같은… 아.”
만류하던 비비가 깜짝 놀라며 입을 마름모꼴로 벌렸다.
쪽, 릴리언의 거친 입술이 아힌의 주둥이와 닿았다 떨어지는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대로 쩍 굳어 버린 아힌은 차마 눈도 깜박이지 못했다. 주둥이에 천재지변과 맞먹는 재난이 닥치고 말았다.
‘영감이랑,’
방금 일어난 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영감이랑….’
부들부들 경기를 일으키던 아힌의 몸이 곧이어 축 늘어졌다. 심심하면 기절하던 비비의 심경을 몸소 체험하게 된 하루였다.
* * *
캄캄한 어둠 속에서 헤엄치던 아힌이 천천히 눈을 떴다. 찰찰찰, 물병을 흔드는 듯한 소음이 어스름한 의식을 일깨웠다.
“일어났어?”
눈꺼풀을 끔벅이는 아힌의 시야로 말간 비비의 얼굴이 드리워졌다. 가닥가닥 흘러내린 백발이 그의 뺨을 간질였다.
“갑자기 쓰러져서 놀랐지 뭐야. 할아버님이 기절할 만큼 무서웠어? …아니면 뽀뽀를 싫어하나?”
뽀뽀. 그제야 기절 전에 당한 악재를 떠올린 아힌이 벌떡 일어났다. 앞발로 주둥이를 벅벅 닦을수록 다가오는 입술에 대한 기억이 선명해졌다.
제길. 욕지거리를 삼키던 그는 공기 중에 비비의 페로몬 향이 유독 짙은 것을 깨달았다.
‘여기는….’
한 박자 늦게 제가 있는 장소를 확인한 아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늑한 크기의 방에 원목 침대가 자리한 곳. 다름 아닌 비비의 기숙사였다.
왠지 기분이 묘해진 그는 두리번거리며 기숙사 내부를 살폈다.
창문을 가린 우중충한 커튼 하며, 겹겹이 쌓인 맹수 조련 서적, 진열장에 장식된 살벌한 단검-메이미의 선물-까지.
비비의 포부와 기백이 적나라하게 담긴 기숙사였다.
이어서 벽에 걸린 괴생물체에 가까운 토끼 그림-러셀의 작품-을 응시하던 아힌이 침대 위를 뒹굴 굴렀다.
맹수 입장에선 다소 섬뜩한 방이긴 하지만 뭐 어떤가. 비비의 흔적으로 가득한 기숙사가 세상 어디보다도 마음에 들었다.
일편, 비비는 침대에서 구르는 새끼 흑표범을 곁눈질로 살폈다.
‘…쌩쌩하네?’
조금 놀란 것뿐이란 수의학 교수의 진단대로, 새끼 흑표범은 일어나자마자 홀로 놀기 바빴다.
“네가 할아버님을 너무 무서워하는 것 같아서, 거처가 정해질 때까진 내가 돌보기로 했어.”
안도의 한숨을 내쉰 비비는 배낭에서 꺼낸 분유통을 찰찰 흔들기 시작했다. 아직은 분유를 먹을 시기라는 수의학 교수의 조언에 따라 얻어온 것이었다.
찰랑이는 소리와 동시에 새끼 흑표범의 매서운 눈이 분유통에 박혔다. 거부 어린 눈빛을 마주한 비비는 엄한 얼굴로 허리에 손을 얹었다.
“편식은 안 돼.”
혹여 식사를 거부하더라도 꼭 먹여야 한다고 했으니까.
“영양실조라도 오면 큰일이란 말이야.”
약이 섞인 분유통을 고루 흔들던 비비는 눈살을 찌푸렸다.
흐물흐물 뒹굴 땐 언제고, 날쌔게 일어난 새끼 흑표범이 앞발로 침대를 내리치며 거부를 표했다.
그레이스가(家)를 주름잡는 슈와 비온도 업어 키운 제 앞에서 어디 가당찮은 투정을. 어이가 없어진 비비가 분유통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러자 새끼 흑표범은 또다시 앞발로 소파를 탁탁 두드리며 크르릉 울부짖었다.
편식도 모자라 투정까지! 퐁, 분유통 뚜껑을 개봉한 비비의 눈에 불길이 어렸다.
“이리 안 와?”
새끼 흑표범은 얄밉게도 덮치는 족족 한 끗 차이로 비비의 손아귀를 빠져나갔다. 미끄러지듯 도망가는 속도를 미뤄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하, 지금 너도 흑표범이다 이거지?”
이 비비 님의 명예를 걸고서라도 분유를 먹이고 말겠노라, 다짐한 비비는 교복 재킷 단추를 풀어헤쳤다. 기동성을 높이기 위한 행동이었다.
‘지금.’
손을 뻗던 비비는 그만 침대 모서리에 발이 걸려 쿠당탕, 엄청난 소음과 함께 넘어지고 말았다.
필사적으로 도주하던 아힌은 쓰러진 그녀를 얼떨떨하게 바라봤다.
비비의 성격상 바로 일어나거나 아프다며 엉엉 울 줄 알았는데. 엎드린 자세 그대로 미동이 없었다.
만약 넘어지며 머리를 세게 부딪친 거라면.
‘…비비!’
핏기가 가신 아힌이 달려간 순간,
“잡았다!”
바닥에 부딪혀 발개진 이마를 치켜든 비비가 아힌의 앞발을 낚아챘다. 단숨에 쭉 잡아당겨 분유통을 입에 물리기까진 채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기겁한 아힌이 버둥거렸지만, 그렇다고 제 몸을 뒤집어 안아 든 비비를 할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 안 먹으면 엉덩이를 때려 주지 않을 줄 알아!”
흑표범의 약점이 엉덩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비비가 엄하게 외쳤다.
‘제발, 비비.’
이번만은 엉덩이도 아힌의 마음을 흔들 순 없었다.
릴리언과의 입맞춤도 모자라 이 나이에 분유라니. 살아온 나날 중 가장 참혹한 경험을 연속으로 하는 중이었다.
질끈 눈을 감은 아힌은 슬슬 비비에게 자신의 정체를 알리고자 했던 계획을 보류했다. 이 모든 걸 들킬 바에야 이승에서 사라지는 편이 나았다.
* * *
날이 밝고 시침이 정확히 정오를 가리켰다.
기숙사 창가에 오도카니 앉은 아힌은 숙연한 얼굴로 바깥 전경을 바라봤다.
이브린은 언제쯤 토끼 굴에 납치된 나를 데리러 와줄까. 기다림이 무색하게도 이브린은커녕 개미 한 마리조차 나타나지 않았다.
‘사라지고 싶다.’
기다림의 시간 동안 당한 일을 떠올리고 만 아힌이 부르르 치를 떨었다. 팡, 검은 솜방망이가 장렬하게 유리창을 강타했다.
비비와 함께 자는데 빌어먹을 새끼 흑표범의 몸인 것으로도 모자라, 아침부터 밥을 먹여 주고, 수치스럽기 짝이 없는 목욕에….
하루 새 다녀온 지옥을 뇌까리던 아힌은 느지막이 앞발로 뺨을 긁적였다.
흠, 다시 생각해 보니 마냥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기도. 매일 아힌만 비비에게 음식을 집어 내밀었지, 언제 비비가 친히 음식을 먹여 주겠나 싶었다.
“자, 이제 나갈 준비 해야지.”
인간으로서의 인권과 새끼 흑표범으로서의 범권. 둘 사이에서 갈등하던 아힌이 새침하게 비비를 흘겼다. 외간 흑표범을 줍고 다니는 저 바람둥이만 아니었더라도 고민하지 않을 일이었다.
“또 반항한다, 또.”
헛웃음을 친 비비는 아힌의 정수리를 콕 눌렀다.
무슨 새끼 흑표범이 이렇게 반항적인 눈빛을 하는지. 얻어 온 겨울용 강아지 옷을 입히는 와중에도 사납게 올라간 눈꼬리는 내려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팔을 뻗으면 얌전히 안기는 게 퍽 아이러니했다. 덕분에 종일 씨름하는 와중에도 비비의 팔엔 긁힌 상처 하나 없었다.
‘가만히만 놔두면 얌전한데 말이야. 식사랑 목욕이 그렇게 싫나?’
하긴, 애쉬도 물을 엄청 싫어하긴 하네. 비비는 물웅덩이만 봐도 줄행랑치는 애쉬를 생각하며 새끼 흑표범을 배낭에 넣었다.
머리만 쏙 내민 새끼 흑표범은 세상 다 산 얼굴로 먼 곳을 바라볼 뿐이었다.
혹시 달아날까 배낭을 야무지게 고정한 비비가 기숙사 문을 열고 나섰다. 발걸음이 향한 곳은 의과 계열 교수실이 있는 건물이었다.
* * *
“지난나 교수님!”
“어머, 비비 님. 이쪽으로 앉으세요.”
인사한 비비가 부드러운 벨벳 소파에 안착했다.
슬그머니 배낭에서 나온 아힌은 온갖 플라스크가 진열된 방을 둘러봤다. 비비가 향한 장소는 다름 아닌 지난나 교수의 연구실이었다.
“새끼 흑표범이네요, 예뻐라. 애쉬가 그새 아기를 낳았나?”
여기저기 널브러진 서류를 정리하던 지난나 교수가 물었다.
“아뇨, 애쉬의 아기는 아니고…. 사정이 있어서 잠깐 맡게 됐어요.”
“그래요? 조막만 한 아이한테 무슨 사정일까.”
두 사람은 자연스레 새끼 흑표범을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소파에서 노닥거리던 아힌은 손잡이 너머의 검은 눈동자와 딱 시선이 마주쳤다. 또래에 비해 여전히 체구는 작지만, 나름 의젓한 어린이로 자라난 러셀이었다.
‘오랜만이군.’
순간 새끼 흑표범의 상태임을 잊은 아힌이 오만하게 턱을 까딱였다.
한편, 소파 손잡이 너머로 얼굴만 내민 러셀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
‘나쁜 기운.’
기운을 읽는 페로몬이 저 새끼 흑표범을 위험인물이라 간주하고 있었다.
칙칙하면서 새까만 데다, 차갑고 위협적인 이 기운은 분명…. 단박에 새끼 흑표범의 정체를 간파한 러셀이 입을 오물거렸다.
“아냐, 아니야….”
“러셀, 뭐라고?”
중얼거림을 들은 비비가 휙 고개를 틀었다.
뒤늦게 러셀의 페로몬을 기억해 낸 아힌은 안절부절 앉았다 일어서길 반복했다.
“용사님, 이 아기는 안 돼. 얘는, 으읍!”
아힌의 정체를 폭로하려던 러셀의 입이 웬 솜뭉치로 가로막혔다. 주먹을 꽂듯 순식간에 입속으로 쏙 집어넣은 아힌의 앞발이었다.
말하지 마. 새끼 흑표범의 무시무시한 눈빛을 읽은 러셀이 도망치듯 지난나 교수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지난나 교수.”
“러셀?”
아힌은 곧장 얌전히 있었던 척 딴청을 피워 댔다.
지난나 교수는 영문도 모른 채 무릎에 앉은 러셀의 등을 두드렸다. 그럼에도 러셀은 고양이 앞의 쥐처럼 숨어들기 바빴다.
“놀란 것 같은, 아.”
의문스레 러셀과 새끼 흑표범을 번갈아 보던 비비가 탄식했다.
흑표범이 고양잇과인 반면 카피바라는 쥣과였으니. 그간 애쉬와 잘 지낸 게 특이한 거지, 낯선 천적을 꺼림칙하게 여기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나도 그 마음 잘 알지. 러셀의 두려움에 십분 공감한 비비가 새끼 흑표범을 당겨 안았다.
“미안해, 러셀. 내가 잘 잡고 있을게.”
“용사님, 그거 버려. 괴물이야….”
도리도리 고개를 저은 러셀은 고목나무의 매미인 양 지난나 교수에게 달라붙었다.
엉거주춤한 자세가 된 지난나 교수는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독수리 먹이도 잘 주는 애가 왜 이런담. 러셀, 그럼 잠깐 나가 있으련?”
러셀은 나가는 것도 싫다 고집하며 꿋꿋이 자리를 지켰다.
결국 그 상태로 대화를 진행하게 된 지난나 교수가 웬 보고서를 불쑥 내밀었다.
“안 그래도 결과가 나왔거든요. 일전에 비비 님이 물어보셨던 거.”
‘비비가 물어본 거라고?’
목을 길게 뺀 아힌이 은근슬쩍 보고서를 기웃거렸다.
‘이것 때문에 비비가 아카데미에 꼭 들르려 한 건가.’
보고서는 대륙 공용어가 아닌, 주로 의학계에 종사하는 수인들이 사용하는 고대어가 나열되어 있었다.
“이건….”
아직 고대어까진 익히지 못한 비비가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어리둥절한 그녀와 달리 단번에 이해한 아힌의 표정이 점차 굳어졌다.
지배계 페로몬 특유의 발작이 훗날 태어날 아이에게 나타날 가능성.
지난나 교수는 흘긋 비비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당연히 걱정할 수밖에 없는 종류죠. 미래의 아이가 아힌 님과 같은 지배계 페로몬을 갖게 되면 큰일이니까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비비가 긴장한 낯빛으로 중얼거렸다.
“외에도 혹시 치유계 페로몬을 이어받으면 저처럼 인간화가 늦어진다거나···.”
“그렇진 않을 거예요. 일단 비비 님은 약물의 영향도 있었고. 또 맹수계 수인, 그것도 수장의 혈통을 받은 무식한 몸뚱이라면 치유계 페로몬을 충분히 감당할 거예요.”
손으로 철도 으스러뜨릴 듯한 아힌의 체력을 가늠한 비비가 깊이 수긍했다.
“반박할 여지가 없네요.”
“그러니까 치유계 페로몬 부분은 걱정 말아요. 인간화가 늦어 봤자 남들보다 일, 이 년 정도?”
이제 뒷담쯤은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는 아힌이 지난나 교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문제는 특유의 발작을 일으키는 지배계 페로몬이에요. 학계에 자료가 거의 없는 건 아마 지배계 페로몬을 가진 자가 대부분-”
“…죽었기 때문에.”
“그렇죠.”
등골이 서늘해진 비비가 저도 모르게 아힌을 안은 팔에 힘을 줬다. 컥, 덕분에 배가 졸린 아힌이 버둥버둥 뒷다리를 휘저었다.
“아무튼 본론으로 들어가죠. 지난번에 제가 아힌 님의 머리카락 몇 올을 가져와 달라고 말씀드린 거 기억하죠?”
“네, 네.”
진지하게 대화를 듣던 아힌은 유난히 비비가 제 머리카락에 집착한 날을 떠올렸다.
머리가 맑아지는 마사지라며 두피가 늘어날 정도로 당기더니, 그런 이유에서였나.
비비의 황송한 집착을 차마 거절도 못 한 채, 눈이 세로로 치솟을 만큼 머리카락을 뜯긴 고통을 상기한 아힌이 눈가를 훔쳤다.
“또 비비 님의 머리카락도 몇 올 가져갔죠.”
아힌이 우수에 젖은 사이, 지난나 교수의 설명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네에. 그런데 머리카락은 왜…?”
“수인은 신체 일부에서 페로몬을 추출할 수가 있거든요. 그렇게 추출한 두 분의 페로몬을 비교해서 어떤 게 더 우성인지 판별했죠. 수인의 특성상 약간이라도 뛰어난 페로몬이 자식에게 발현될 확률이 높으니까요.”
그렇다는 건 치유계 페로몬이 우성이어야 안전하다는 의미. 안달 난 비비가 앉은 자리에서 들썩였다.
“결과는 나왔나요? 아힌과 저 중에 누구의 페로몬이 더 우성이에요?”
“그게, 조금 드문 결과가 나와서. 보고서를 뒷장으로 좀 넘겨 주실래요?”
러셀을 고쳐 안은 지난나 교수는 턱짓으로 서류를 가리켰다. 초조해진 아힌은 자신도 모르게 보고서로 앞발을 쭉 뻗었다.
“안 돼.”
심심한 장난질이라고 여긴 비비는 미간을 엄하게 모으며 저지했다.
팔락, 아힌을 떨쳐 낸 비비의 손이 보고서를 한 장 넘겼다. 의연한 표정과는 반대로 손끝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보라색?”
바로 뒷장에는 오묘한 색상의 동그라미가 그려진 상태였다. 의미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 비비는 설명을 바라는 눈길로 지난나 교수를 바라봤다.
“신비로운 색감이죠? 페로몬을 연구하는 학계에서 보라색은 중간을 뜻해요.”
“그렇단 말씀은….”
“비비 님과 아힌 님의 페로몬이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는 결론입니다. 웬만하면 둘 중 하나에서 우성 반응이 나타나야 하는데… 그것을 가릴 수 없을 때 중간반응, 즉 보라색이 나타나죠.”
이내 지난나 교수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렸다.
“앞선 사례에 의하면, 아주 높은 확률로 자식에게도 중간반응이 나타날 거예요.”
“설마… 지배계 페로몬과 치유계 페로몬을 동시에 타고난다는 말씀이세요?”
“네, 아니면 낮은 확률로 우성인 발렌스 수장님의 페로몬이 나타날 수도 있고요. 그래서 페로몬은 연구하고 연구해도 끝이 없는 거랍니다.”
도대체 얼마나 무지막지한 힘을 가진 아이가 나온다는 거야. 두려움에 감히 상상도 못 한 비비가 입을 뻐끔뻐끔 여닫았다. 지배계로 병 주고 치유계로 약 주는 수준의 페로몬이 나올 가능성도 있었다.
“게다가 비비 님의 치유계 페로몬으로 아힌 님의 페로몬 발작을 눌렀다고 하셨으니까… 치유계의 혈통이 섞인 아이에게서 발작이 나타날 확률도 바닥에 가깝죠.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
“비비 님.”
“네, 네?”
멍하니 넋을 빼고 있던 비비가 더듬거리며 답했다.
훗날 아이에게는 문제가 없는 것에 대한 안도. 그리고 제가 치유계 페로몬을 갖고 있지 않았더라면 아힌이 죽었을지도 모른단 새삼스러운 불안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싱긋 웃은 지난나 교수는 보고서의 보라색 원을 손가락질로 콕콕 가리켰다.
비비의 시선이 홀린 듯 그녀가 가리킨 보라색 원에 머물렀다. 빨려 들어갈 듯한 몽환적인 색상이었다.
“보라색은 어우러지지 않을 것 같던 두 가지 색상이 공존하는 색깔이죠. 비비 님과 아힌 님처럼.”
“아….”
“-어쩌면 두 사람이 만난 건 천운일지도 모르겠네요. 특히 아힌 님께는.”
* * *
배낭을 앞으로 멘 비비가 지난나 교수의 교수실을 나섰다.
겨울 방학을 맞은 너른 교정은 오늘따라 유난히 삭막했다. 겨울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꽂은 그녀가 흑표범 영토 방향을 돌아봤다.
‘더 울어 봐.’
‘내일 잡아먹을 거라서.’
처음 아힌을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수신(獸神)이 내린 끔찍한 시련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와의 인연이 행운처럼 여겨지는 게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론 우스웠다.
‘아이에겐 발작이 일어나지 않는다니 다행이야.’
보라색….
이윽고 샐쭉 웃은 비비가 보고서를 꼬깃꼬깃 접어 교복 주머니에 넣었다.
“있잖아, 그거 알아? 난 옛날부터 보라색을 가장 좋아했어.”
배낭의 새끼 흑표범에게 실없는 소리를 한 비비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구름을 밟듯 가벼워진 발걸음이었다.
‘녹색을 가장 좋아하면서.’
거짓말하긴.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던 아힌이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기실, 비비가 지난나 교수와 상의한 주제는 아힌 또한 염려한 부분이었다.
‘송구하지만 페로몬의 우성 여부를 판별하려면 토끼님의 신체 일부가 필요합니다.’
‘…미쳤어?’
‘그, 손이나 그런 게 아니라, 머리카락 소량이면 충분합니다. 본모습인 토끼로 돌아가셨을 때의 털도 괜찮고요!’
그래서 비비에게 뒷발차기를 맞아 가면서까지 얻은 토끼털을 주치의에게 맡겨 뒀건만. 뜬금없이 그 결과를 지난나 교수의 입을 통해 듣게 된 실정이었다.
긍정적 결과에 내심 깊이 안도한 아힌은 콧노래를 부르는 비비를 흘긋 올려다봤다.
왜 우리는 같은 고민을 하면서도 서로 다른 곳에서 해답을 찾으려 한 걸까. 굳이 지난나 교수를 거칠 필요 없이, 제게 말해 줬더라면 바로 답해줄 수 있었을 것을.
그렇게 생각하던 아힌이 앞발로 마른세수를 했다.
‘-웃기지도 않는군.’
당장 자신만 해도 모든 것을 터놓고 말하지 못하는데, 비비라고 이런저런 궁금증을 쉽게 털어놓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또한 비비가 아힌보다 지난나 교수를 먼저 찾은 이유야 뻔했다.
그들은 은연중에 몇 년 전, 아힌이 비비를 죽일 뻔한 그날과 관련된 이야기를 피하고 있었으니까. 지배계 페로몬에 관한 심층적인 대화도 기피하는 추세였다.
새삼스레 아힌이 대화의 부족함을 인지한 와중, 낭창한 음성이 그의 상념을 깨뜨렸다.
“비비 님, 오랜만이에요.”
“죄송해요, 조금 늦었죠?”
비비의 다음 일정은 교내 온실에서 개최된 학도들과의 다과회였다.
그녀가 도착하기 무섭게 배낭 속의 새끼 흑표범을 발견한 학도들이 술렁였다.
“세상에, 새끼 흑표범이네요?”
화제의 중심이 된 아힌은 태연스레 테이블 위에 앉았다. 의도치 않게 함께하게 된 비비의 아카데미 생활이 꽤나 흥미로웠다.
“잠깐 맡고 있는 중인 아이예요.”
뒤늦게 빈자리에 착석한 비비가 설명을 덧붙였다.
“예뻐라, 이름이 뭐예요?”
‘이름?’
그러고 보니 이름이 없는 아힌이 비비를 돌아봤다. 당황할 거란 예상과 달리,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입술을 열었다.
“안리예요.”
“안리? 이름도 앙증맞네요.”
아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안리가 된 모양이었다. 더군다나 비비는 제가 지은 이름이 퍽 마음에 드는지, 다소 수줍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괜찮군.’
덩달아 하사받은 이름에 만족한 아힌은 느릿하게 다과회 참석자들을 둘러봤다.
돼지, 양, 호랑이, 개….
초식계에서 맹수계까지, 접점이 거의 없다시피 한 일족들의 모임이었다.
아무리 다양한 일족이 섞인 아카데미라도 초식계와 맹수계가 함께 어울리긴 쉽지 않은 법인데. 흑표범을 평정한 비비의 마성이 타 일족에게도 유효하다고 결론 내린 아힌이 눈을 삐딱하게 떴다.
경계와 질투로 똘똘 뭉친 그의 반대편, 참석자 중 한 명으로서 앉아 있던 헨드리가 허리를 곧추세웠다. 긴장한 그녀의 귓가에 이브린과의 대화가 스쳐 지나갔다.
‘어째서 비비에게 그분의 정체를 알리지 말라는 거죠? 아무리 높은 분의 명이라도, 절친한 친우로서 비비를 속일 순 없어요.’
‘전부 아힌 님의 뜻입니다. 혹시라도 그분의 심기를 거스르는 날엔 우리 모두 쓱싹입니다, 쓱싹.’
‘뭐… 뭐가 쓱싹이란 거죠?’
이브린은 태연히 목 주변에 손날을 그으며 헨드리를 타일렀다.
‘아힌 님의 눈빛을 보십시오, 그럴 분입니다.’
식은땀을 흘린 헨드리는 슬며시 아힌의 눈빛을 확인했다.
과연. 비비가 볼 때만 초롱초롱하지, 고개를 돌릴 땐 한순간에 세상을 깔보는 듯 싸한 눈빛으로 돌변했다.
아힌 그레이스.
내일이 없는 또라이란 비비의 험담 하며. 고작 일 년 만에 늑대 영토를 집어삼킨 괴물이란 세간의 평가를 떠올린 헨드리가 눈을 질끈 감았다.
‘미안해요, 비비.’
자고로 남의 연애사에는 참견하지 않는 법.
입에 지퍼를 채우기로 결심한 그녀가 남몰래 아힌의 꼬리를 당겼다.
아힌이 의아하게 뒤돌자, 헨드리는 다른 이들의 시선을 피해 은밀히 종이쪽지를 펼쳤다.
「내일 아침이면 칼렌 교수의 해약이 완성됩니다. 이 이브린을 믿고 조금만 더 버텨 주십시오.
-아힌 님의 이브린」
이브린의 아부 섞인 전언이었다.
안리 행세도 내일이면 작별. 희망이 깃든 아힌의 낯빛이 눈에 띄게 해사해졌다.
“안리, 너무 멀어지지 마. 특히 다과 쪽으로는 안 돼.”
그때 비비가 아힌의 몸을 제 쪽으로 살짝 당겼다. 애쉬처럼 다과를 홀랑 흡입해 버릴까 염려한 탓이었다.
다과를 멀리멀리 물린 비비는 묘하게 기뻐 보이는 새끼 흑표범을 힐끔거렸다.
다과회의 이 많은 인원이 부담스럽지도 않은 건지. 제게 꽂힌 관심이 당연하단 듯 누리는 태도가 마치 아힌 같았다.
흑표범들은 혈통 자체에 교만이 섞여 있는 걸까.
“비비 님.”
“네?”
고찰하던 비비는 어느 귀족 영애의 부름으로 인해 깜박 정신이 들었다.
“그럼 졸업식 당일에는 드디어 그분이 오시는 건가요? 지금까지는 행사마다 늘 바쁘셔서 오지 못한다고 하셨잖아요.”
“그분…?”
어리둥절하게 반문한 비비가 이내 그분의 의미를 깨달았다. 아카데미에 재학하는 내내 숨겨온 비비의 연인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이었다.
호기심 어린 눈길을 한 몸에 받게 된 그녀가 뺨을 약간 붉혔다.
“아, 그때는 꼭 와 주기로 약속했거든요.”
“어머나, 정말 잘됐네요.”
“네에-….”
수줍어하는 비비를 마주한 학도들이 은근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때때로 토끼 수인이라곤 믿기 힘들 만큼 대범한 면모를 보이면서. 매번 화두에 오를 때마다 비비를 저토록 쑥스러워하게 만드는 연인의 정체가 이루 말할 데 없이 궁금했다.
선량하다, 예의 바르다, 초식계 수인이다 등등 많은 소문이 있었지만, 출처 없는 유언비어일 뿐이었다.
더욱이 졸업식은 베일에 싸인 비비의 가문 사람들이 참석할지도 모르는 결전의 날.
근 몇 년간 쌓인 궁금증에 몸이 단 학도들이 온갖 의문을 쏟아 냈다.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만난 건지, 또 정략결혼인지. 몰아치는 질문에 일일이 답하지 못한 비비는 뭉뚱그려 설명하기 시작했다.
“별거 없어요. 음, 어두운 곳에 갇힌 저를 꺼내 주고….”
그 경우 없는 맹수가 바구니에 갇혀 있던 나를 주머니로 쑤셔 넣었지. 추억에 잠긴 비비가 아련하게 허공을 바라봤다.
그것을 엇나간 비비를 바른길로 인도해 줬단 의미로 해석한 학도들이 감명 어린 눈을 했다. 인성이 올바른 사람이란 소문은 마냥 뜬소문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또 강한 호위도 붙여 주고….”
시녀의 탈을 쓴 메이미에게 적응하기까지 어찌나 긴 시간이 필요했던지. 앞치마에서 끊임없이 나오던 단검 덕에 풀썩 기절했던 기억을 상기한 비비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당시 말을 제대로 못 하던 저를 위해 늘 웃으며 기다려줬죠.”
새끼 토끼의 몸으로 의사를 전달하는 게 얼마나 힘든데. 킥킥 비웃으며 몸짓을 구경하던 아힌을 생각한 비비가 이번엔 분노로 몸을 떨었다.
‘방정맞은 흑표범 같으니라고. 어디 한번 똑같이 당해봤으면 좋겠네.’
후. 손부채질을 하며 진정한 그녀는 테이블의 화병에서 뽑은 꽃 한 송이를 새끼 흑표범에게 내밀었다. 연인은 흑표범 일족이란, 학도들에게 보내는 나름의 힌트였다.
“정략결혼은 아니에요.”
곧 희미하게 웃은 비비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그저…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
“세상에서 제일.”
어렵사리 말한 그녀가 붉어진 귓불을 한 채 고개를 푹 숙였다.
과거의 불량 비비를 올바르게 인도하고, 자애롭고 다정다감한 성품을 가진 사람.
연인에 대해 확신하던 학도들은 의문스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부끄러워하는 비비야 이해하지만, 왜 새끼 흑표범도 흐물흐물 녹아 종이처럼 팔랑거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 * *
다과회 직후, 비비는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묘하게 기세등등해진 새끼 흑표범을 흘끔거렸다.
주인의 뒷배를 믿고 자신감이 폭발하기라도 한 것일까.
교내 각 곳을 방문하는 와중에도 남자만 접근하면 하악질을 해 댄 통에, 말리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칠 지경이었다.
달칵, 밤이 늦어서야 기숙사로 돌아온 그녀는 책상 위로 서류를 층층이 쌓아 올렸다. 학생회장이다 보니 졸업을 앞두고도 처리할 일이 산더미였다.
‘이제 인수인계할 서류만 남았네.’
뻐근한 어깨를 돌린 비비가 기지개를 쭉 켰다.
졸업이 시원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양가감정을 느끼던 그녀는 살금살금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동시에 딱, 침대에 늘어져 있던 새끼 흑표범과 눈이 마주쳤다.
“…안 자?”
나른하게 뜬 눈은 졸려서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 건지 도통 구분이 가질 않았다.
아무리 야행성이라 해도 종일 함께 돌아다녔는데 피곤하지도 않나. 새끼 시절엔 눈 뜨고서도 졸던 슈와 비온과는 퍽 대조되는 행보였다.
“피곤할 텐데.”
비비는 가져온 담요를 슬그머니 새끼 흑표범의 몸 위로 덮었다. 수면을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가져온 게 무색하게도 팽, 까만 앞발이 매정하게 담요를 밀어냈다.
잠투정에 굴하지 않은 비비가 다시금 침착히 담요를 끌어 올렸다. 절대 먼저 잠들 생각이 없는 아힌이 이번에는 뒷발로 담요를 뻥 차 버렸다.
‘너부터 누워.’
쉬지 않고 아카데미를 돌아다녔으면서 또 서류 작업이라니. 그는 비비가 몸을 혹사시키는 꼴을 더 이상 눈 뜨고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또 투정 부린다, 또.”
속상해진 비비는 허리에 양손을 얹은 채 엄한 목소리를 냈다. 바짝 올라간 눈꼬리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나 화나면 아주 무서운 사람이야.”
안타깝게도 비비가 화내는 모습마저 좋아하는 또라이에겐 일말의 타격도 주지 못했다. 그러한 사실은 꿈에도 모른 그녀가 근본 없는 훈련을 이어 갔다.
“차렷, 열중쉬어.”
크릉- 굴하지 않은 아힌이 포효하며 침대를 꼬리로 탁탁 쳤다.
쪼그마한 게 저도 맹수랍시고…. 움찔 떤 비비의 기세가 급격하게 누그러들었다.
“부디 주무세요….”
화나면 무서운 사람인 비비의 항복은 누구보다도 빨랐다.
“많이 먹고 많이 자야 얼른 크지.”
간절한 염원이 통하기라도 했는지, 이내 담요 속에 파묻힌 새끼 흑표범이 주둥이만 쏙 내밀었다. 드러난 둥근 코끝이 꾹 누르고 싶을 만큼 앙증맞았다.
‘새끼는 종족을 불문하고 다 귀엽나 봐.’
피식 웃어버린 비비가 몰래 혀를 찼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미워하기 어렵게 만든단 말이야. 특히 적당한 선에서 치고 빠지는 게 아힌과 똑 닮은꼴이었다.
‘그 맹수는 다 계산하고 하는 거겠지만.’
뭘 해도 예쁘기만 한 아힌을 흉본 그녀는 새끼 흑표범의 담요를 잘 정돈해 줬다.
“잘 자.”
새끼 흑표범 재우기. 임무 하나를 완수한 비비는 책상의 램프를 켰다. 산처럼 쌓인 서류 업무의 시작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슬쩍 담요에서 기어 나온 아힌이 책상 위로 올라섰다.
은은한 불빛 아래 보이는 글자라곤 하나같이 따분한 종류였다.
서류를 기웃거리던 그의 시선이 빠르게 유영하는 비비의 펜촉을 따라갔다.
비비. 서명란에 써 내린 이름이 지나치게 명료했다.
성이 없는, 허전한 이름을 응시하던 아힌이 물끄러미 비비를 올려다봤다.
‘비비… 예요.’
그녀는 가문을 버린 이후, 이따금씩 자기소개를 할 때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어머니가 친히 그레이스의 성을 써도 된다고 언급한 적이 있을 텐데. 그럼에도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는 이유를 아힌으로선 막연히 추측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아카데미에서는 그레이스가(家)와의 관계를 숨겨야 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아직 그레이스란 성을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인지.
그의 성격상 당장이라도 묻고 싶었지만, 나오는 말이라곤 캥캥거리는 소리뿐이었다.
‘하찮기 짝이 없군.’
앞발로 이마를 짚은 아힌이 진득한 고뇌에 잠겼다.
비교적 거동이 자유로운 새끼 흑표범임에도 불구하고 하고픈 말을 표현하는 게 막막한데. 비비는 어떻게 그 짧은 몸뚱이를 흔들어서 의사 표현을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역시 비비는 천재 토끼일지도 모른다는 팔불출 결론으로 뻗어 나가는 찰나, 펜 끝이 그의 코를 톡 건드렸다.
“또 안 자고 이런다.”
인지할 겨를도 없이 비비의 얼굴이 아힌의 눈앞에 불쑥 나타났다.
방심하고 있던 그는 심장이 벌렁거렸다. 사람일 때보다 훨씬 더 비비의 얼굴을 낱낱이 보게 된 탓이었다.
수채화 같은 얼굴을 마주하던 아힌은 순간 속은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주워 온 새끼 토끼의 발밑을 기게 된 건 우연이 아닌 필연일지도. 잊을 만하면 토끼가 저런 얼굴로 변해선 어색하게 웃어 대는데, 어느 맹수가 굴종하지 않고 버티겠나 싶었다.
느닷없이 벅차오른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진 아힌이 책상 위를 서성였다.
비비라면 어떻게 표현했을까. 고심하던 그는 돌연 이전에도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 있었던 것을 상기했다.
‘안 자? 그래도 자.’
물론 그땐 밤늦게 서류를 처리하는 사람이 아힌이었고, 비비는 새끼 토끼였던 상황이었지만. 현재는 위치가 완전히 뒤바뀌고 만 실정이었다.
울지도 웃지도 못한 그는 뒤이어 당시 비비가 앞발로 엑스를 그리곤 버둥버둥 구르던 과거를 떠올렸다.
그러다가 결국 잉크병을 쏟아서 점박이 토끼로 변했었지. 별거 아닌 몸짓임에도 이상하게 부끄러워했기에 꽤 인상적으로 남은 기억의 단편이었다.
‘-도대체 뭐야, 그게.’
무심코 양 앞발을 교차시켜 보던 아힌은 드디어 이 몸짓의 의미를 깨닫고 말았다. 정답은 하트였다.
‘아, 진짜….’
엉큼한 토끼 같으니라고.
몇 년이 흘러서야 직격타를 맞게 된 아힌이 앞발로 눈을 가렸다. 달아오른 얼굴을 전부 가리고 싶었으나, 주둥이 때문에 선택한 차선책이었다.
“이제야 좀 졸린가 봐?”
이러한 사정은 꿈에도 모른 비비가 납작하게 녹아내린 아힌을 침대로 옮겼다. 늘어진 그의 몸이 좀처럼 회복되지 못한 채 나풀나풀 흩날렸다.
“자라고 말해도 고집부리더니. 다 너 좋으라고 그런 건데, 언제쯤 내 마음을 좀 알아줄래?”
다른 건 몰라도 비비의 마음만은 착실히 알아가는 중인 아힌이었다.
* * *
짙은 밤, 매서운 겨울바람을 맞은 창문이 덜컹거리며 흔들렸다.
선잠을 청하던 아힌은 끙끙 앓는 소음에 짐짓 눈을 떴다. 몽롱한 시선이 거슬리는 소리의 근원을 찾아 움직였다.
이윽고 비 내리듯 식은땀을 흘리는 비비를 발견한 그가 벌떡 일어났다.
‘비비?’
달빛 아래 어스름히 비친 비비의 낯빛은 파리하게 질린 상태였다. 경황없이 비비를 안아 들려던 아힌이 멈칫했다.
‘아.’
뒤늦게 제 모습을 자각한 그가 비비의 팔을 흔들었으나, 터무니없이 약한 힘에 불과했다.
이어서 위쪽으로 이동한 아힌은 앞발로 그녀의 뺨을 찰싹찰싹 치기 시작했다.
‘비비, 일어나.’
부드러운 볼이 앞발에 밀려 찌그러졌다.
그럼에도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한 비비가 몸을 잘게 떨었다. 가위라도 눌린 듯 손끝과 발끝이 덜덜 경련했다.
당황을 누른 아힌은 비비의 맥을 짚어 페로몬의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도 페로몬 발작은 아니었다.
‘악몽인가.’
비비, 비비.
미친 듯이 초조해진 아힌이 비비의 이마를 꾹꾹 누르고, 코를 틀어막고, 재차 뺨을 밀며 깨워 댔다. 그러나 할퀴지 않는 이상 간질임에 가까운 몸부림일 뿐이었다.
드물게 흐트러진 그가 의관이라도 부르기 위해 몸을 틀 즈음, 비비의 눈이 반짝 뜨였다.
헉, 숨을 삼킨 비비는 황급히 목을 짚었다. 이전에 아힌에게 물어뜯긴 전적이 있는 부위였다.
“…….”
파도가 휘몰아치듯 흔들리는 보라색 눈동자엔 초점이 없었다.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을 확인하는 양 연신 목을 더듬던 비비는 이번엔 이불을 확 들췄다.
곧장 쫓기는 사람처럼 파고든 그녀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썼다. 둥글게 웅크린 몸이 떨릴 때마다 새하얀 침구도 달달 떨렸다.
이불 밖에 남겨진 아힌은 우두커니 굳은 채 자리를 지켰다.
비비가 이러는 이유를 굳이 넘겨짚을 필요 없이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수년 전 겨울, 죽을 뻔했던 끔찍한 기억이 악몽으로 이어진 것임을.
그날의 사건이 트라우마로 남은 건 아힌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비비 또한 괜찮은 척해 왔지만 괜찮지 않았던 것이었다.
허공을 맴돌던 앞발이 차마 비비에게 닿지 못한 채 아래로 떨어졌다.
사람의 형태도 아닌, 한낱 새끼 흑표범의 모습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새끼 토끼일 때의 비비도 철문을 앞두면 이런 기분이었을까. 아힌은 저와 비비의 사이를 막은 솜이불이 철문보다도 두껍고 굳건하게 느껴졌다.
처음으로 극심한 무력감을 체감하게 된 밤이었다.
* * *
파바박, 새하얀 발이 이불을 힘차게 후려 찼다.
이른 아침부터 살벌한 잠버릇을 자랑하던 비비는 사뭇 인상을 찌푸렸다. 얼굴을 비추는 햇살이 퍽 따가웠다.
“으응….”
괜히 꾸물꾸물 뒤척이던 그녀는 잠깐의 정적 후에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제 몹쓸 잠버릇이 떠오른 덕분이었다.
잠결에 새끼 흑표범을 차 버린 건 아니겠지.
바쁘게 배회한 시선이 곧 베개 위의 까만 생물체에서 멈췄다. 둥글게 몸을 말곤 색색 잠든 새끼 흑표범이었다.
‘놀래라….’
새끼 흑표범의 무사에 안심하던 비비는 얼핏 손에 스친 축축한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젖은 수건?’
뚝, 뚝. 물기가 거의 제거되지 않은 수건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침구를 적셨다.
이 물에 젖은 수건의 출처는 어디일까.
‘내가 잠결에 가져왔나?’
그러고 보니 직전까지 수건을 얹고 있기라도 한 듯, 제 얼굴 전체가 지나치게 촉촉했다.
심각하게 고뇌하던 그녀는 천천히 눈길을 베개 쪽으로 옮겼다. 달리 가져올 만한 인물이 저 새끼 흑표범 말곤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설마하니 새끼 흑표범이 욕실로 가서 수건을 조물조물 빨기라도 했단 건가.
불가능한 가설을 세운 비비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일단 씻자. 정신부터 맑게 하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한 그녀는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곧 선반에서 마른 수건을 챙긴 비비가 욕실 너머로 사라졌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음과 동시에 아힌의 눈이 느릿하게 뜨였다.
‘아픈 건 아닌가 보네.’
음소거로 기지개도 쭉쭉 켜고, 체조도 곧잘 하는 거 보면. 안도의 한숨을 내쉰 아힌이 미적미적 일어났다.
‘앞발이….’
양말 같군. 체념 어린 낯빛이 된 그가 수건을 빠느라 축축해진 앞발을 응시할 때였다.
똑똑, 무언가가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긴 3층인데.’
아힌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틀자마자 급속도로 정색했다. 창문 너머, 꿈에서도 보고 싶지 않은 이브린의 덤덤한 얼굴이 있었다.
* * *
이브린이 사다리를 이용해 아힌을 납치하기까진 채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기숙사 인근 수풀 속. 그곳에 몸을 숨긴 이브린은 아힌의 덜미를 집어 올렸다. 순식간에 발이 바닥에서 떠오른 아힌이 대롱대롱 흔들렸다.
“가엽게도, 요 며칠 얼마나 수치스러우셨을까.”
비비의 극진한 보살핌 아래, 반질반질해진 아힌을 살핀 이브린이 고저 없이 말했다.
“이 이브린이 구했으니 더 이상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죽여 버릴까.’
아힌은 안 그래도 별로 없는 이빨을 뿌득 갈았다. 필시 이브린은 자신이 무력해진 틈을 타 일부러 거칠게 다루고 있음이 분명했다.
‘더군다나….’
앨런 프레디안. 바득 인상 쓴 아힌이 망을 보는 중인 앨런을 가리켰다.
‘저놈은 왜 데려왔지?’
“기억 안 나십니까? 앨렁 프레디안입니다. 현재는 아카데미 부학생회장이죠.”
‘누군지를 물은 게 아니라, 왜 앨렁을 데려왔냐고.’
처음부터 끝까지, 즉 영원히 앨런이 마음에 안 들 예정인 아힌이 앨런을 삿대질했다.
“우연히 만나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덕분에 칼렌 교수를 빠른 시간 내에 찾을 수 있었죠.”
또다시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 이브린이 입술을 열었다.
“졸업 직후 그레이스가(家) 보좌관 선발 면접을 본다더군요. 그때 가산점을 주기로 합의 봤습니다.”
‘누구 마음대로. 미친 거 아니야?’
뒷골이 당긴 아힌이 이브린의 얼굴을 세로로 확 그어 내렸다.
“윽,”
어떻게 신이 내린 미모에 흠집을.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른 이브린은 일단 품에서 작은 약병을 꺼냈다.
“칼렌 교수의 해약입니다. 의복도 준비해 왔으니, 실내로 자리를 옮겨서…,”
“비비, 아니, 토끼님입니다.”
그때 망을 보던 앨런이 소스라치며 속삭였다. 바스락, 숨죽인 그들이 조심스레 수풀 사이로 얼굴만 쏙 내밀었다.
“안리!”
비비는 이 추운 겨울에 교복만 덜렁 입은 모습으로 수풀을 뒤지고 있었다. 기숙사에서 갑작스레 사라져 버린 새끼 흑표범을 찾고 있음이 자명했다.
허둥지둥 움직이는 비비를 바라보던 아힌이 이브린을 돌아봤다.
“일부러 창문을 열어 두고 왔습니다. 그래야 없어져도 이상하지 않으니까요.”
용케 의사를 읽은 이브린이 설명을 덧붙였다.
“들키기 전에 장소를 옮기시죠.”
필사적으로 자신을 찾는 비비로 인해 아힌은 쉽사리 자리를 뜨지 못했다. 이브린은 그런 아힌의 엉덩이를 가볍게 토닥였다.
“이제 와 아힌 님인 걸 알릴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습니까.”
‘엉덩이 치지 마, 짜증 나게.’
“토끼님은 헨드리 님께 데리고 들어가 달라 부탁드리겠습니다. 자, 앨렁 님도 어서.”
앨런을 향해 손짓한 이브린이 비비의 시선을 피해 기어가기 시작했다.
수석 보좌관의 삶이란 이런 것인가. 잠깐 망설인 앨런이 덩달아 네발짐승으로 변모했다.
“아힌 님, 앨렁 님. 대기시켜 둔 마차로 갑시다.”
엉금엉금, 거북이들의 은밀한 행차가 이어졌다.
하는 수 없이 걸음을 옮기던 아힌은 다시 뒤돌았다.
‘비비.’
한 걸음 옮긴 후 뒤돌고, 한 걸음 옮긴 후 뒤돌고. 여린 손으로 수풀을 파헤치는 비비가 계속해서 눈에 밟혔다.
복장이 터질 지경인 이브린이 입을 달싹이는 순간, 아힌의 눈이 크게 뜨였다. 마구잡이로 수풀을 뒤지던 비비가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진 탓이었다.
곧장 벌떡 일어난 비비는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손바닥은 바닥을 짚느라 흙이 덕지덕지 묻은 상태였다.
바스락, 바스락.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새끼 흑표범을 찾는 행위는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저런 비비를 두고 어떻게 가는데. 아힌이 갈등과 고뇌에 휩싸인 찰나,
“안리, 어디 있어?”
비비의 울먹이는 음성이 귀를 때렸다.
“제발 나와….”
그 목소리에 결국 무너지고 만 아힌이 수풀 밖으로 뛰쳐나갔다. 정체를 들키는 것보다 비비의 부름에 답하는 게 더 중요했다.
“안리!”
양팔 벌린 비비가 달려오는 새끼 흑표범을 와락 끌어안았다.
앨런은 떨리는 눈으로 비비와 안리의 극적인 상봉을 바라봤다.
‘저게 무슨….’
전쟁터를 단신으로 누비는 인물이라며. 역대 수장 중에 가장 강할지도 모르는 사람이라며.
앨런의 사전에 토끼에게 폭 안겨 옮겨지는 아힌은 없었다.
이브린에게 토끼가 앞발로 그레이스가(家)를 연주한다는 헛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긴가민가했는데…. 현실을 부정한 그는 삐거덕거리며 이브린을 돌아봤다.
“대체….”
“방금 아힌 님께서 실낱만큼 남은 수치심마저 버리셨군요. 더 이상 정체를 숨길 생각이 없어 보이시니, 해약만 전해드리면 끝날 일입니다.”
기숙사로 돌아가는 두 사람을 지켜보던 이브린이 얼어붙은 앨런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는데 아쉽게 되었습니다, 앨렁 님. 그래도 보좌관 면접 때 수장님의 호의를 얻을 수 있는 팁을 드리죠.”
이브린은 얼마 전, 발렌스가 난감한 표정으로 푸념하던 것을 떠올렸다. 비비와 잘 때마다 침대 끝에 웅크려 자기도 힘이 드니, 더 큰 침대로 바꿔야 하지 않을까 하는.
“어떤…?”
은근히 기대 어린 낯빛이 된 앨런은 이어질 이브린의 조언을 기다렸다.
“잠버릇 개선에 유용하거나, 넓은 침대를 제작하는 장인을 추천하십시오.”
“예! …예? 아니, 보좌관 면접에서 왜 그런 걸 말합니까?”
“분명 수장님께서 크게 흥미로워하실 겁니다.”
잠버릇과 침대 장인. 보좌관 면접에서 두 가지에 관해 열변을 토한 앨런이 턱걸이로 합격점을 받게 되는 건 조금 나중의 일이었다.
* * *
아힌을 데리고 기숙사로 돌아온 비비는 창문을 잠그지 않은 부주의함을 연거푸 사과했다.
그러고도 다친 곳은 없는지 아힌의 몸뚱이를 이리저리 살피기를 한참. 치유계 페로몬을 사용하는 일까지 불사한 그녀는 비장한 얼굴로 그의 앞발을 잡았다.
“안리, 그냥 흑표범 영토로 가자.”
거긴 원래 내 영토인데. 설명이 불가능한 아힌은 그저 멀뚱멀뚱 그녀를 올려다봤다.
“처음엔 적응하기 힘들지도 모르지만···.”
말끝을 흐리던 비비가 이내 결의 어린 눈을 했다.
아카데미엔 흑표범 우리도 없고, 더군다나 원래 주인에게 보내는 것도 안 되고. 또다시 솥에 넣어 유기할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돌려보낼 순 없었다.
“내가 너 하나는 꼭 책임질게. 나만 믿어.”
그마저도 사랑 고백으로 들린 아힌이 수줍게 귀를 붉혔다.
열심히 끄덕거리는 새끼 흑표범을 마주한 비비는 헛웃음을 지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정말 알아듣기라도 한 건지.
“좋아, 그럼 할아버님께 가자.”
엉덩이를 토닥토닥 두드려 준 그녀가 짐을 싸기 시작했다. 학장실에 들러 새끼 흑표범의 거처와 관련한 릴리언의 허가부터 받을 생각이었다.
분주하게 움직인 비비가 욕실로 들어가자, 아까처럼 누군가 창문을 똑똑 두드렸다.
“창문 좀 열어 주십시오.”
사다리를 타고 오른 이브린이 입을 뻐끔거렸다. 그는 저택에 있어야 할 퀸까지 머리에 얹은 상태였다.
‘기다려.’
있는 힘껏 뛰어오른 아힌이 창문 고리에 매달렸다. 찰칵, 굳게 잠긴 잠금장치가 열렸다.
“졸업식 전에는 사람으로 돌아가셔야죠.”
창문을 연 이브린은 품에서 푸른 색감의 해약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퀸 님이 전서를 가져왔는데, 보좌관들이 아힌 님의 서명이 필요한 서류가 산더미라며 울부짖는 중이랍니다.”
‘내일 돌아가도 되잖아.’
둘의 대치를 지켜보던 퀸은 쯧 혀를 찼다.
보아하니 새끼 흑표범 노릇에 맛 들인 모양인데, 설득하다간 날이 저물 기세였다.
날아오른 퀸은 발로 해약을 낚아채어 아힌의 주둥이로 꽂아 넣었다. 꼴깍, 순식간에 푸른 약물이 아힌의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몇 분 후면 자연스레 사람으로 돌아오실 겁니다. 그리고 제가 한 게 아닙니다, 퀸 님이 한 거죠.”
꺼림칙해하는 아힌을 살핀 이브린이 창문을 닫은 후 도주했다.
‘이브린!’
의복은 주고 가야지. 팡, 아힌이 앞발로 유리창을 때렸지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도주 실력을 가진 이브린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 * *
새끼 흑표범을 찾느라 넘어진 탓에 묻은 흙을 씻고 나온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또다시 새끼 흑표범이 보이지 않았다.
‘설마.’
번개처럼 확인한 유리창은 단단히 잠긴 상태였다.
그나마 한시름 놓은 나는 사부작거리며 새끼 흑표범을 찾기 시작했다.
“안리∼?”
이 비비 님이 애쉬랑 숨바꼭질 경력이 몇 년인데.
“안 나오면 잡아먹는다?”
코웃음 친 내가 침대 밑, 옷장 안, 커튼 뒤를 샅샅이 뒤졌다.
요놈 봐라. 제법 고단수라고 생각할 즈음, 이불 아래로 삐죽 튀어나온 까만 꼬리가 보였다.
발소리를 죽인 채 접근한 나는 예고 없이 이불을 확 들췄다.
“찾았다!”
흘끔 나를 확인한 새끼 흑표범은 앞발로 이불을 당겨 도로 닫아버렸다. 이불 속에서 나오고 싶지 않은 모양새였다.
추위라도 타나. 짐짓 걱정된 나는 뒤따라 이불 속으로 엉금엉금 기어 들어갔다.
“왜 그래?”
그대로 몸을 누인 내가 붙든 새끼 흑표범을 배 위에 앉혔다. 이상하리만치 체념한 얼굴이 된 새끼 흑표범이 앞발을 으쓱였다.
‘…앞발을 으쓱였다고?’
흑표범이 그런 사람 같은 행동이 가능한가.
의문을 뒤로한 나는 우선 새끼 흑표범의 상태를 점검했다. 동시에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읽은 적 없던 기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틀림없는 페로몬의 흐름이었다.
‘동물한테… 어떻게 페로몬이…?’
경악한 내가 입을 살짝 벌리는 순간, 새끼 흑표범의 몸에서 새하얀 빛이 일기 시작했다.
묵직한 무게감과 함께 빛 속에서 뻗어져 나온 팔이 내 머리 옆을 짚었다.
빛이 점차 수그러들며 이윽고 새끼 흑표범이 완전한 사람의 형체를 갖췄다.
새끼 흑표범의 정체를 확인한 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어, 어떻게…. 네가, 네가 왜 여기에….”
댁이 왜 여기서 나오시는 건데요.
“말도 안 돼….”
시야가 청명한 아힌의 얼굴과 목, 너른 어깨로 가득 찼다.
“-왜 그렇게 놀라, 비비의 안리인데.”
‘이렇게 거대한 안리는 둔 적 없거든.’
방금 새끼 흑표범에서 사람으로 변한 것치곤 지나치게 태연한 음성이었다.
반면 여전히 얼어붙은 상태인 나는 연신 눈만 껌벅였다.
아힌도 내가 처음 사람으로 변했을 때는 이런 기분이었을까. 너무 놀란 탓에 제대로 된 사고조차 할 수 없었다.
“비비.”
아힌은 내 머리카락 한 가닥을 손가락으로 빙빙 꼬았다. 말려 올라간 입매가 전에 없이 짓궂었다.
“그러니까 동물은 함부로 줍는 게 아니야.”
‘…네가 언제부터 동물이었는데.’
헛것이라도 보고 있는 걸까. 몸을 이탈한 정신은 도통 돌아올 생각을 하질 않았다.
째깍, 째깍. 묵언을 수행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아힌이 손가락으로 내 눈꺼풀을 살짝 들었다.
“눈 뜨고 주무시나?”
“네….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몸을 누른 아힌을 뿌리치던 나는 황급히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새끼 흑표범에서 사람으로 변하느라 그가 전라의 상태임을 인지하고 말았기에.
‘맙소사.’
더 큰 문제는 단단하고 굴곡진 상체가 고스란히 보이는 자세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서로의 숨소리가 뒤섞였다. 헐벗은 어깨를 마주한 속눈썹은 파르르 떨리고, 긴장으로 꼿꼿이 선 발끝엔 쥐마저 났다.
“비비, 얼굴만 가리면 뭐 해. 눈을 안 가렸는데.”
“내, 내가 언제.”
마른침을 삼킨 나는 아힌을 이불로 둘둘 말기 시작했다. 쓸데없이 크고 길쭉한 몸뚱이로 인해 굴리는 것까진 무리였다.
후, 그를 번데기 같은 모양새로 똘똘 뭉친 내가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쳤다.
“우선 입을 만한 의복을 구해 올 테니까 얌전히 있어. 꼭. 설명은 그다음이야!”
엄하게 당부한 내가 꿈틀거리는 아힌을 꾹 눌렀다. 일단 전라를 내보일 뻔한 고비는 넘겼지만,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아힌을 상대로 방심은 금물이었다.
몇 번 버둥거리더니 금세 포기했는지, 침대에 모로 얼굴을 묻은 그가 설핏 미소 지었다. 비스듬히 흘러내린 은발이 가늘게 휘어진 눈을 반쯤 가렸다.
“익숙하면서 왜 유난이실까.”
“…아힌은 진짜 수치심이란 게 없어?”
“지금 음흉한 눈을 한 토끼가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
“내 눈이 어, 어떻다고….”
“귀, 거의 빨간색이야.”
눈을 비비던 내가 달아오른 귀를 양손으로 감췄다.
요사스러운 흑표범 같으니라고. 제 얼굴과 육탄 공세가 얼마나 큰 효과를 발휘하는지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게 더없이 얄미웠다.
나는 아힌을 째려보며 뒷걸음질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아, 아무튼. 의복을 빌려 올게.”
“누구한테?”
그의 질문에 곧바로 답하지 못한 내가 입을 달싹였다. 아힌과 그나마 신장이 비슷한 사람이라면,
“-앨런 프레디안?”
“기각.”
사근사근 웃고 있던 아힌의 표정이 급속도로 무너졌다.
“앨렁의 옷을 입을 바에야 이러고 있는 게 나아.”
“그건 내가 안 돼!”
세차게 고개를 저은 내가 눈을 도르르 굴렸다.
의복을 구할 만한 곳이…. 일순 머릿속에 아힌의 체구에 맞는 옷을 구할 수 있을 만한 상점이 스쳤다.
“금방 돌아오니까 도망갈 생각일랑 말고 기다려.”
“내가 비비한테서 도망을 왜 가.”
또 요망한 대사를 던지는 그를 외면한 내가 슬그머니 문을 열고 나섰다.
끼이익, 문틈 사이로 팔랑팔랑 손을 흔드는 아힌을 끝으로 문이 완전히 닫혔다.
* * *
아카데미 상점가에 위치한 교복점. 다행스럽게도 그곳에서 아힌의 체격에 맞는 교복을 구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브린이 기다리고 있을 마차로 은밀히 이동 중이던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약물의 부작용부터 아카데미에 오고, 솥에 담겨 버려지기까지. 아힌에게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직후, 찾아온 건 극심한 후회와 절망이었다.
‘대체 솥에는 왜 들어가 있었던 건데?’
옛말에 길에서 아무거나 줍고 다니는 게 아니라고. 또라이로 탈피한 새끼 흑표범 때문에 여러모로 심경이 복잡했다. 할아버님도 속을 만큼 감쪽같이 페로몬을 숨긴 탓에 의심조차 못 한 부분이었다.
‘하….’
눈앞에 새끼 흑표범과의 나날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분유를 먹지 않으려고 발광한 이유를 이제야 알겠네.’
그뿐인가. 할아버님과 입을 맞춘 후 그대로 기절하질 않나, 정서를 위해 동화책을 읽어 주니 어이없단 듯이 쳐다보질 않나. 강아지용 옷을 입혔을 땐 눈빛이 유독 죽어 있었기도 했고.
새끼 흑표범 주제에 때때로 고독한 얼굴을 한 건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다.
기억을 헤집을수록 목숨의 위협을 느낀 내가 부들부들 떨었다.
‘헨드리…. 전부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했다 이거지.’
어쩐지 수다쟁이인 헨드리가 다과회에선 묘하게 말수가 없다 싶더라니. 괘씸함에 걷는 것도 멈춘 채 발을 탕탕 구르던 내가 점점 누그러들었다.
막상 아힌 앞에 서면 웬만한 맹수도 고양이 앞의 쥐가 되니. 하물며 돼지인 헨드리가 모른 척한 심정이 누구보다 잘 이해됐다.
얼굴이 새빨개졌다가 파래짐을 반복하던 내가 따라오는 아힌을 곁눈질했다.
“그냥 말하면 되는 걸, 숨기긴 왜 숨겨.”
“비비, 나도 사람이야.”
“그게 무슨 말이야?”
“가끔은 부끄러운 것도 있다는 의미지.”
너는 새끼 흑표범이 된 걸 부끄러워하기 전에 자신이 살아온 삶을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아마 나는 아힌의 부끄러움에 대한 기준을 영영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전서에 답장을 안 한 건 이것 때문이었구나.”
“그래서, 서운했어?”
이어진 물음에 흠칫 떤 내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답했다.
“뭐, 딱히.”
“-딱히?”
“사실 조금 서운했어….”
그와 동시에 아힌은 인근에 있던 교목에 이마를 박았다. 지나치게 좋을 때나 우스울 때 벽이나 나무에 이마를 박는 습관은 여전했다.
굳이 고칠 필요까지는 없으나… 다만 사람이 좀 이상해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
“아힌, 그만해. 다들 쳐다보잖아.”
“애초에 이런 꼴로 있는데 쳐다보지 않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
나무에서 이마를 뗀 아힌이 제 머리를 감싼 화려한 무늬의 보자기를 가리켰다. 이어서 옮겨진 손가락이 붉은 눈동자를 가린 독특한 안경을 매만졌다.
“이 안경 때문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데.”
“…….”
할 말이 없어진 나는 우두커니 선 아힌을 아래위로 훑었다. 확실히 꽃무늬 보자기를 머리에 두른 그는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특히 러셀의 장난감 안경에 그려진 초롱초롱한 눈이 위화감을 더했다.
“아힌이 망토는 절대 입지 않겠다며….”
“그건 비비 거니까.”
망토에 달린 후드를 쓰면 어느 정도 얼굴을 감출 수 있을 텐데.
말끝을 흐린 나는 망토 자락을 만지작거렸다. 기숙사 짐을 미리 뺀 탓에 하나뿐인 망토를 내가 강제로 입게 된 실정이었다.
“마차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까 조금만 참아.”
“-꼭 정체를 숨겨야 되나, 이틀 후면 졸업식인데.”
“그렇긴 하지만…. 아니, 안 돼.”
은근한 설득에 넘어갈 뻔한 내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왜?”
“할아버님이 졸업식 준비 때문에 골머리를 썩이고 계신단 말이야. 들키면 분명 교수님이나 귀족들이 엄청 찾아갈 텐데, 쓰러지시기라도 하면 어떡해?”
“영감은 내심 밝혀지길 바랄걸. 자랑을 못 해서 안달이니까.”
“됐어. 자, 어서 손이나 잡아.”
아힌은 아카데미 구경도 안 시켜 주냐며 덧붙이면서도 순순히 손을 잡아 왔다.
“나와 진솔한 대화를 나눠야겠다며.”
“마차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어.”
손을 단단히 붙든 나는 앞이 침침한 그를 위해 조심히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강의가 없는 기간이라 교정은 비교적 한산했다. 더욱이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던 지난 며칠과는 달리, 오늘은 올겨울 들어 가장 화창한 날씨였다.
볕이 내린 교정을 가로지르던 나는 한발 늦게 따라오는 아힌을 힐긋 돌아봤다.
흑색 교복을 입은 그와 아카데미를 걷고 있으니 새삼 묘한 기분이 들었다. 비록 얼굴은 아힌이 아닌 큼지막하고 반짝이는 눈을 가진 괴한이었지만.
내 손에 의지해서 얌전히 따라오는 맹수가 귀여워 보이는 걸 보면, 나도 아힌을 따라 단단히 미쳐 가는 모양이었다.
“회장, 어디 가는… 아?”
“회장, 점심은 먹었, 누구… 신지?”
“회장, 졸업 축하… 뭐, 뭐야.”
간간이 내게 인사를 건네던 학도들이 아힌을 발견하자마자 빠르게 멀어졌다. 특이하게 얼굴을 감춘 게 오히려 타인의 접근을 막는 신통한 효과를 일으킨 순간이었다.
“전교생이랑 친분이 있어?”
살짝 안경을 내린 아힌이 사라지는 학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건 아냐.”
“지나가는 족족 인사를 하던데.”
“다들 내가 토끼 수인이라서 편한가 봐. 음, 일단은 신분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기도 하고…?”
그래? 반문하며 다시 안경을 올린 그가 내 귀에 속삭였다.
“비비, 제왕학 1구절 기억나?”
“어진 제왕의 첫 번째 조건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 잠깐. 갑자기 제왕학은 왜?”
“-요즘따라 그런 생각이 들더군. 이브린의 말마따나 비비가 어진 제왕의 현신은 아닐까,”
“그만둬.”
“싶은 생각이,”
“이 이상 나를 수치스럽게 만들지 마.”
적당히 놀려. 얼굴이 달아오른 내가 아힌의 교복 타이를 콱 졸라맸다.
한참 실랑이를 벌이는 와중, 우리 쪽으로 접근하는 여러 개의 발소리가 들렸다. 지인인가 싶어 시선을 틀던 나는 곧장 표정을 굳혔다.
“회장 아냐?”
“오늘은 웬일로 수풀이 아니라 멀쩡한 길로 다니실까.”
아카데미 학도 중 비행을 일삼고 다니는 하이에나 무리였다. 낭패 어린 상황을 맞닥뜨린 내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이 시간엔 늘 교정 뒤에서 노닥거리면서. 왜 하필 오늘 여기 있대?’
“수풀?”
안경이 시야를 가린 탓에, 청각에 의존 중인 아힌이 조용히 물어왔다.
“벼, 별거 아니야.”
맹수들을 피해 이따금씩 수풀에 뛰어드는 것만큼은 절대 말할 수 없었던 내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누군데?”
“그냥. 학생회장에 지원했던 하이에나 수인인데, 내가 그 자리에 앉아서. 그때부터 나만 보면 괜히 사소한 시비를 걸어오거든.”
“…….”
“괜찮아. 내가 다 이겨.”
침묵하던 아힌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지금껏 그런 건 얘기한 적 없었잖아.”
“그야….”
네가 이럴까 봐. 화가 날수록 짙게 웃는 경향이 있는 그를 마주한 내가 식은땀을 흘렸다.
‘무슨 짓을 벌일지 상상을 할 수가 있어야지.’
그나마 아힌의 허리춤에 늘 있던 장검이 없는 게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까. 나는 밀치듯 뒤로 보낸 아힌의 앞을 양팔 벌려 가로막았다. 물론 생각한 것의 반의반만큼도 가려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최대한 온몸을 펼친 내가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비켜줘.”
드물게 강한 대응을 보인 게 심기를 거슬렀는지, 하이에나 수인들의 입가가 아니꼽게 경련했다. 보통 때면 토끼로 변해서라도 달아나곤 했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저건 또 뭐야.”
그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내 뒤에 감춘 아힌에게 꽂혔다. 동시에 맞춘 것처럼 미간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거슬리던 카피바라 꼬맹이는 어디 가고 또 희한한 걸 데려왔군.”
하이에나 수인들은 늘 내 등에 매달려 다니던 러셀을 찾으며 두리번거렸다. 이어서 검지를 머리 주변에서 빙빙 돌리며 아힌을 조롱하는 듯한 몸짓을 취했다.
“함부로 말하지 마.”
아힌을 걸고넘어지자마자 나 또한 온유한 태도가 나오질 않았다.
“이 사람을 건드리면 재미없을 줄 알아.”
“멋지다, 비비.”
말을 끝맺자마자 뒤편의 아힌이 나만 들을 수 있게끔 소곤거렸다.
“나도 그런 박력 좋아하는데.”
“…제발 조용히 해.”
“그래.”
무너질 뻔한 표정을 바로잡은 나는 하이에나 수인들을 향해 절절한 눈빛을 보냈다.
잘 봐, 순순히 이런 꼴로 돌아다니는 것에서부터 느낌이 오지 않아? 얘는 어마어마하게 무서운 또라이란 말이야.
그들의 생존을 위해 신호를 보냈지만, 오히려 하이에나 수인들은 눈만 사납게 뜨면 다냐며 비아냥대기 바빴다.
‘내가 언제 눈을 사납게 떴다고….’
억울해진 나는 몇 마디를 덧붙이려다 그냥 입을 닫았다. 애당초 마주치기만 하면 시비를 걸어오는 이들이 쉽게 물러날 리가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우리를 빙 둘러싼 채 거리가 점점 좁혀지기 시작했다.
맹수계 수인다운 큼지막한 체구가 우리 주변으로 그늘을 만들었다. 반사적으로 팔을 뻗은 내가 비장하게 말했다.
“다, 다가오지 마.”
“얼씨구, 그 소문 자자한 연인이라도 되나 봐?”
“…내가 지금 얘를 보호하는 건 줄 알아? 전부 너희를 위해서 그러는 거야.”
“뭐야, 비비. 나를 지켜 주려는 게 아니었어?”
등 뒤에서 아힌의 퍽 실망스러운 음성이 들렸다.
넌 또 무슨 턱도 없는 착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 기가 찬 나는 휙 뒤돌아서 그의 양 손목을 붙들었다. 혹시 아힌이 손이라도 휘두르면 이 어린 양들은 몇 미터나 날아갈 게 불 보듯 뻔했으니.
탈출구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나는 절망 어린 심정이 되었다.
“회장의 연인이라고? 아카데미 재학생이었어?”
“저 묘한 안경은 대체….”
“지난나 교수님의 아들이 쓰고 다니던 장난감 아닌가?”
우리의 대치를 발견한 학도들이 어느새 주위를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었다. 여러 쌍의 눈동자가 아힌이 입은 아카데미 교복을 훑어 내렸다.
“다들 댁의 민낯을 궁금해하는데, 그 해괴한 거나 좀 벗어 보지 그래.”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한껏 기세등등해진 하이에나 수인들이 아힌을 툭툭 건드려댔다. 그나마 페로몬을 활용할 기미는 없는 듯한 게 다행스러울 지경이었다.
“벗는 건 좋아하지만 네놈 앞에서 벗고 싶진 않아.”
한술 더 떠, 기대 이상으로 오래 참은 아힌이 낮게 깔린 저음으로 경고했다.
“-그리고 비비의 말은 듣는 편이 좋아. 앞발 하나로 흑표범 영토를 점령한 토끼니까.”
“무슨 헛소리를,”
“얼마 전엔 사자 영토도 휩쓸었지.”
“이거 완전히 미친놈 아니야?”
전부 망했어. 더 이상 개선의 여지조차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거의 자포자기한 나는 해쓱해진 얼굴로 충고했다.
“그…, 안경은 벗기지 않는 편이 정서에 좋을…,”
하지 말라 하면 무릇 하고 싶어지는 게 사람의 심리. 이러한 옛 명언을 떠올릴 새도 없이 아힌의 안경이 내치듯 벗겨졌다.
“흐, 흑표범?”
드러난 붉은 눈동자를 확인한 하이에나 수인이 흠칫 떨었다. 그러나 주변의 반응을 살피며 금세 기세를 회복한 그가 아힌을 유심히 관찰했다.
“낯이… 익은데….”
그래, 그거야. 낯익은 게 당연한 사람이니까 누구인지 인지하기 전에 멈춰.
간절한 염원이 닿기도 전에 다음번엔 휙, 아힌이 둘러쓰고 있던 보자기가 벗겨졌다. 욱여넣었던 머리카락이 드러나며 공중에 나부꼈다.
“…….”
그와 함께 거짓말 같은 정적이 휘몰아쳤다.
엉망으로 치솟은 은발을 멍하니 바라보던 학도들은 맞춘 것처럼 천천히 입을 벌렸다. 아직 아리송해하는 이들 반, 연간 신문 일 면을 장식하는 얼굴임을 깨달은 이들 반이었다.
아무래도 이런 해괴한 꼴로 아카데미에 있단 사실이 아힌임을 확단하기 어렵게끔 만든 모양이었다.
“그….”
보자기를 벗긴 하이에나 수인 또한 황망한 얼굴로 읊조렸다.
“아, 아힌… 그레이스?”
“왜.”
완벽한 확인 절차와 동시에 이름 모를 누군가의 딸꾹질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것을 신호로 모든 학도의 쩌렁쩌렁한 비명이 아카데미 일대를 뒤덮었다.
* * *
어차피 정체도 드러난 마당에, 아힌은 내게 하이에나 수인들의 안위와 아카데미 관광의 맞교환을 제안해 왔다.
회장으로서 아카데미에 몰아칠 피바람을 방관할 수도 없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하이에나 수인들을 학장실로 보낸-나름의 복수- 나는 아힌을 데리고 도서관으로 왔다. 그나마 이목이 덜 집중되는 곳이자 내가 가장 즐겨 찾는 장소였다.
2층 창가에 자리 잡은 나는 책을 베개 삼아 엎드린 채 따사로운 햇볕을 맞았다.
도서관은 학도들이 아힌을 피해 전부 아래층으로 내려간 탓에 유독 적막했다.
‘졸업 직전에 들킨 게 다행이지, 뭐….’
마음의 평온을 위해 합리화를 한 나는 몸을 뒤척여 반대편으로 엎드렸다. 곧장 같은 자세로 엎드린 채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아힌과 눈이 마주쳤다.
그저 가만히 마주 보던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입술을 열었다.
“괜찮아? 분유 먹은 거.”
“부끄러우라고 일부러 묻는 건가.”
“…맞아.”
새끼 흑표범인 사실을 숨겼던 것에 대한 소심한 복수였다. 수치스러워할 거란 기대와 달리, 아힌은 한 치의 동요조차 없이 답했다.
“처음에는 거지 같았는데, 네가 먹여 주는 거라 그렇게 나쁘진 않던데.”
칠칠치 못한 맹수. 나는 대답 대신 콧등을 찌푸렸다. 그런 내 콧등을 엄지로 펴 준 아힌이 눈매를 접었다.
“-그래도 개 옷을 입힌 건 너무했지.”
“추운 것보단 낫잖아.”
“그도 모자라 인형을 줄에 매달아서 흔들어 대고. 못 잡으면 잡아먹는다고 했던가.”
“놀아준 거야. 그리고 아힌 네가 나한테 했던 짓인 거 기억 안 나?”
또박또박 반박을 이어갈수록 헤실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는 물약이 정말 물리적으로 아힌을 새끼 흑표범으로 만드는 부작용을 초래할 줄이야. 어떻게 보면 새끼 토끼였을 때의 나를 반쯤은 이해할 수 있는 완벽한 부작용이었다.
“저기, 아힌.”
홀로 실실거리는 것을 멈춘 나는 잠시간 말을 망설였다. 아힌이 사람으로 돌아온 직후부터 내내 신경 쓰이던 주제가 있었다.
“…지난나 교수님과의 대화도 전부 들었지? 아이에 대한 거.”
“바로 옆에 있었는데 들을 수밖에.”
아힌은 의중을 읽기 힘든 옅은 미소를 걸었다.
“일부러 말하지 않은 건 아니야. 다만… 아힌한테는 상처가 될 수 있는 사안인 것 같아서.”
“신경 쓰지 마. 나도 똑같은 걸 주치의에게 의뢰해둔 상태니까.”
“정말?”
눈을 동그랗게 뜨던 나는 곧 미심쩍은 표정으로 돌변했다.
“내 머리카락은 언제… 아니네, 토끼로 변했을 때 털을 뽑아 간 게 그것 때문이었구나.”
“덧붙여 뽑다가 뒷발차기에 맞았고.”
“…….”
“짜릿했지.”
여전히 엎드린 자세로 서로를 노려보던 우리가 동시에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어쨌든 다행이다, 그치?”
“그래. 안 그래도 비비가 그랬잖아, 흑표범 같은 딸이랑 토끼 같은 아들이 있는 것도 괜찮겠다고.”
“아니, 지금은 마음이 바뀌었어.”
한순간에 정색한 내가 입매를 일자로 굳혔다.
지난나 교수의 말에 의하면, 미래에 태어날 아이는 지배계와 치유계 페로몬을 함께 가질 확률이 높다 했으니. 면 기저귀를 찬 채 무기를 든 장군감이 태어난다 하더라도 이상할 게 없는 수준이었다.
“하나면 돼, 하나면.”
나는 한껏 단호하게 검지를 쫙 펼쳤다.
별다른 언급 없이 수긍한 그는 내 손을 약한 힘으로 끌어당겼다. 얼떨결에 손을 맞잡자, 아힌이 엄지로 천천히 내 손등을 쓸었다.
“그보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뭔데?”
“악몽은 언제부터 꿨어?”
“악몽? 그게 무슨… 아.”
그제야 지난밤, 악몽에 시달린 것을 상기한 나는 아차 싶은 마음이 들었다.
대충 둘러대는 게 좋을까, 솔직하게 말해야 할까. 짧은 고민이 무색하게도, 그는 이미 전부 알고 있는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정황상 물에 흠뻑 젖은 수건을 내 얼굴에 끼얹은 것도 아힌이겠지.
결국 감추는 것을 포기한 내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뗐다.
“실은 그때 아힌에게 물린 이후로 종종 꿔. 아, 그렇다고 자주 꾸는 건 아니고…!”
“나는 악몽을 꾸는 건 이번에 처음 봤는데.”
“주로 겨울에 기숙사에서 꾼 게 다라서….”
“그럼. 어제처럼 늘 혼자 이불 속에 숨어서 떨었어?”
아힌은 손을 천천히 움직여 내 뺨을 가볍게 쓸었다. 손의 온기가 차가운 피부에 그대로 전해졌다.
“그러라고 이불 속에 숨는 걸 가르쳐 준 게 아닌데.”
뺨을 감싼 커다란 손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안정감을 가져다줬다. 눈물이 핑 돌 것 같은 기분이 된 나는 괜히 미간에 힘을 줬다.
‘이불 속에 숨으면 아픔을 숨길 수 있거든.’
언젠가 아힌이 가르쳐 준 방법을 유용하게 활용하고 있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대답 안 해 줄 거야?”
“…….”
“어차피 꿈이고, 걱정할 게 뻔하니까 말하지 않은 건가.”
아힌은 말없이 버티는 내 속내를 무참히 꼬집었다. 괜히 찔린 내가 시선을 피하며 시치미를 떼자, 그의 손가락이 내 코를 살짝 비틀었다.
“아야.”
“…나도 마찬가지야.”
“뭐?”
아힌의 말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한 내가 눈을 깜박였다.
“나도 그래. 겨울만 되면 네가 사라졌던 어머니의 침실이 꺼림칙하고, 네가 머리카락을 묶을 때마다 보이는 목의 흉터가 두려워.”
그는 남의 이야기를 하는 양 잔잔한 저음으로 말을 이었다.
“그냥, 그러고 싶지 않은데 피하게 돼. 자꾸 눈앞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비비가 보여서.”
아힌이 말하는 모든 게 메아리가 되어 내 귀를 두드렸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입김이 나오는 겨울이면 어김없이 그날의 기억이 덮쳐 오는 것은.
차가운 대리석 바닥, 수술 도구가 달그락거리며 부딪히는 소리, 텅 빈 침실의 고요, 외로웠던 겨울 냄새.
어느 하나 빠짐없이 칼날 같은 아픔이 되어 온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조금은 흐릿해져 가는 기억을 되짚은 나는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나를 피한 거구나.”
“미안해. 내 선에서 해결하면 끝날 일이라 생각했어.”
순순히 사과를 뱉은 그는 내 뺨에서 느릿하게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 재차 내 손을 맞잡았다.
“비비가 사라진 일 년 반이 다시는 되풀이하고 싶지 않을 만큼 끔찍했거든. 내가 정상적인 사고를 하게 될 만큼.”
아힌이 정상적인 사고를 하다니. 그 힘듦이 어느 정도였는지 감히 짐작하기조차 두려웠다.
“네가 영영 돌아오지 않을 생각은 아닌지. 내게 진절머리가 난 건지. 그런 거면 나는 어떡해야 할지.”
“그럴 리가 없잖아….”
“맞아. 그래서 혹시 진짜 대륙을 떠도는 무용수가 된 건 아닐까 생각도 해 봤어.”
누구더러 자꾸 무용수래. 눈이 쪼뼛해진 내가 팔목을 비틀어 아힌의 손을 꺾어 버렸다.
아파, 손가락이 꺾인 그가 실없이 웃었다.
자비로운 마음으로 풀어 주자, 아힌은 이번엔 내 새끼손가락과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엮었다.
“약속할게.”
“뭘…?”
“그날과 관련된 두려움을 숨기지 않겠다고. 그러니까 비비도 감추지 마.”
“…….”
“악몽을 꿀 때면 언제든 내가 깨워 줄게.”
교차로 엮인 새끼손가락을 응시하는 내 눈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온전히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단 것에 대한 감사함이 새삼 와닿았다.
“나도 약속할게. 근데,”
목이 멘 탓에 한참을 뜸 들인 내가 이윽고 어렵사리 입술을 달싹였다.
“토끼의 간을 거는 건 안 돼….”
“-그건 좀.”
간 집착 맹수 같으니라고. 눈물이 쏙 들어간 내가 아힌의 손을 팽하니 뿌리쳤다.
씩씩대던 나는 여태 엎드린 상태인 아힌의 얼굴에 시선이 머물렀다. 대화를 나누는 내내 엎드려 있느라 한쪽 뺨이 불그스름한 상태였다.
분명 내 볼도 저렇겠지.
나란히 뺨이 붉은 모습을 상상하자,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웃음이 난 내가 입꼬리를 삐죽 올렸다.
“왜 웃어.”
그렇게 묻는 아힌도 비식 바람 새는 소리를 냈다. 웃음이 번진 모양이었다.
한참을 이유도 모른 채 킥킥거리던 우리가 서로를 마주 봤다. 자연스레 또다시 웃음이 터졌다.
늘 화날 정도로 미려하기만 하던 아힌의 얼굴이 오늘따라 이상하게 우스웠다.
나는 웃느라 나온 생리적인 눈물을 검지로 훔치며 조언했다.
“쉿. 입 모양으로만 웃어, 도서관이란 말이야.”
학생회장의 숙명이었다.
“비비, 어차피 아무도 없어.”
그렇군. 학도들이 아힌을 피해 사라진 사실을 상기한 나는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서적을 둘러봤다.
아무도 없는 도서관은 생각 이상으로 고요했으며, 창문으로 스며든 햇살은 따듯했다.
도서관 특유의 공기 때문인지, 시름을 하나 덜어서인지. 묘하게 마음이 호수처럼 잔잔해진 내가 조곤조곤 물었다.
“있잖아, 아힌. 그거 알아?”
“모를걸.”
“헨드리가 그러는데, 여기서 사랑을 말하면 평생 헤어지지 않는대.”
어느 아카데미에나 있을 법한 다소 유치한 전설이었다. 그럼에도 지금만은 믿고 싶어진 나는 도로 엎드리며 방싯 웃었다.
“사랑,”
덜컹, 미처 말을 끝맺기도 전에 움직인 아힌이 가까워졌다. 목덜미가 당겨지고, 입술이 가볍게 맞물렸다 떨어지는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 상태로 굳어 버린 나는 멍하니 눈을 끔벅였다. 상체를 숙였던 그가 몸을 바로 세우는 게 파노라마처럼 느리게 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 아힌은 팔에 옆얼굴을 묻었다.
“사랑해.”
나른한 저음이 꽂히듯 귓가에 파고들었다.
“어렸을 때는,”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그의 다음 말이 이어졌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자신의 전부라고 말하는 걸 이해하지 못했는데.”
“…….”
“이제는 알 것 같아.”
아힌은 한편에 쌓아 둔 책을 슬그머니 당겨 나와 자신의 사이에 세웠다.
“-비비는 내 전부야.”
상투적인 표현조차 아힌이 말하니 치명적으로 들리는 건 왜일까.
벽처럼 세운 서적 때문에 표정을 확인할 수 없는 게 자못 답답했다. 휙, 책을 치우자마자 청아하게 미소 짓는 아힌의 얼굴이 그림처럼 눈에 박혔다.
“사랑을 말했으니까 이제 비비는 평생 도망 못 가.”
가식도, 위선도, 위험한 미소도 아닌. 지금까지 본 것 중에 가장 순수한 웃음이었다.
반면 얼굴이 엉망진창으로 찌그러진 내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런 시점에서 울면 안 되는데. 그럼에도 턱에 그려진 진실의 호두는 짙어져만 갔다.
아힌은 매번 이런 식이었다. 예고 없이 박차듯 내 공간에 들어와 멋대로 똬리를 틀고 눌러앉는 게.
아마 나는 지금 이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하겠지.
‘비비, 그거 알아요? 도서관 2층의 창가 자리 있잖아요. 거기서 사랑을 말하면 평생의 인연이 된대요.’
‘헨드리, 방금 지어 냈죠?’
‘…비비는 꼭 놀리는 건 귀신같이 알더라.’
아프기만 했던 겨울 위로 새로운 겨울의 기억이 덧대어졌다.
* * *
졸업식 전날. 발렌스와 릴리언, 아힌, 그리고 이브린은 오랜만에 한 묘비 앞을 찾았다.
이디스 그레이스. 꽃을 내려 둔 그들은 비석에 선명히 아로새겨진 이름을 말없이 내려다봤다.
얼마나 침묵을 지켰을까.
끕, 어흑. 마부로서 따라온 릴의 울음 삼키는 소음이 적막을 깨뜨렸다.
“저 고릴라는 왜 저러느냐?”
“글쎄요….”
도대체 왜 우는지 모를 릴을 잠깐 돌아본 발렌스와 릴리언이 도로 비석을 응시했다.
한참의 묵념 후, 릴리언은 아쉬운 음성으로 대화의 물꼬를 텄다.
“우리 토끼도 같이 오는 편이 좋지 않았겠느냐?”
“다시 함께 와야지요. 다만 그 아이가 오면 저렇게….”
뒷말을 얼버무린 발렌스가 뒤를 가리켰다. 마음 여린 릴은 장대한 몸을 웅크린 채 꾸역꾸역 눈물을 참고 있었다.
금방 수긍한 릴리언이 연신 고개를 주억였다.
“눈물바다가 되겠구먼. 그래, 앞으로는 늘 함께 올 테니, 마지막으로 조용한 시간을 갖는 것도 나쁘진 않지.”
다시금 고요한 묵념의 시간이 찾아왔다. 이디스의 이름을 응시하던 릴리언은 이번엔 퍽 불만 어린 얼굴로 혀를 찼다.
“아들놈은 어쩌다 제 자식의 혼약식도 못 보고 먼저 가 버렸을꼬.”
“그러게요. 살아 있었더라면 이 사람도 비비를 많이 좋아했을 텐데요.”
“말도 말거라. 보나 마나 헤실거리며 토끼를 등에 태워 기어 다녔겠지.”
정작 그렇게 주장하는 릴리언은 기어 다니지만 않을 뿐, 비비가 눈만 깜박여도 잘한다, 잘한다 손뼉을 치는 실정이었다.
아힌이나 릴리언이나, 왜 항상 기어 다니는 걸 전제에 넣는 걸까. 발렌스는 굳이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쯧, 맹목적인 애정은 토끼에게도 독이니라. 자고로 자식이란 엄하게 키워야 하는 것이거늘!”
열변을 토하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발렌스가 수긍하며 말했다.
“그렇군요. 말씀대로 과도한 애정은 독이니, 슬슬 춤추는 토끼의 초상화를 경매에 올릴까 해요.”
“얼마더냐? 지금 내가 사겠다.”
“…….”
“…….”
뒤늦게 겸연쩍어진 릴리언이 연신 헛기침을 했다.
“큼, 크흠-”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랍니다, 아버님.”
작게 웃음을 터뜨린 발렌스는 손수건을 꺼내어 뒤편의 릴에게 건넸다.
“아버님께선 혼약식 때 이 고릴라 수인처럼 눈물을 보이지 않도록 조심하셔야 할 것 같은… 어머?”
그때 대화를 나누는 그들의 위로 커다란 새의 그림자가 졌다.
쐐액- 엄청난 속도로 허공을 가로지른 수리부엉이가 비석 주변의 수풀에 처박혔다. 발렌스의 전령 새인 힐라였다.
“사자 영토 수장의 서신이네요.”
해롱거리는 힐라를 다독인 그녀가 둘둘 말린 전서를 펼쳤다. 내용은 미리 보낸 혼약식 초청장에 대한 사자 영토 수장의 답변이었다.
“꼭 혼약식에 참석하겠다는군요. 그리고···.”
전서를 읽어 내리던 발렌스의 표정이 모호하게 변했다.
“레오나 마니언츠가 비비에게 긴히 전하고픈 말이 있다는데요?”
“아니, 그 위험한 작자가 우리 토끼는 왜?”
펄쩍 뛴 릴리언이 곧바로 이브린을 돌아봤다. 왠지 모르게 이유를 알고 있을 듯한 느낌에서였다.
발렌스와 릴리언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이브린은 고저 없이 말했다.
“얼마 전에 토끼님이 마니언츠 저택에서 위용을 뽐내서 그런 듯합니다.”
“위용을 뽐냈다고? 우리 토끼가 거기서 혈투라도 벌였단 소리더냐?”
“비슷합니다. 레오나 마니언츠 님의 정예 기사단을 쓰러뜨렸으니.”
“이 무슨…!”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 귀를 후빈 릴리언이 발렌스의 손에서 전서를 낚아챘다. 사자 영토 수장의 전언 밑으로 레오나 마니언츠의 필적이 이어졌다.
찬찬히 전서를 읽던 릴리언은 부들부들 수염을 떨기 시작했다. 주름진 피부가 시간이 지날수록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찌지직, 이윽고 두터운 서간지가 지팡이처럼 두 갈래로 찢어졌다.
도대체 레오나 마니언츠의 전언이 뭐기에. 호기심 어린 눈동자들이 릴리언에게 집중됐다.
“…우리 토끼가 지닌 무력이 무척 마음에 든다는군. 차후에 후손끼리 약혼을 진행하고 싶다는구나.”
“미쳤군. 사자 따위가?”
노골적으로 비웃은 아힌이 검에 손을 얹은 채 어딘가로 걸음을 옮겼다. 사자 영토가 있는 방향이었다.
“저런, 큰일 날 소리를. 절대 안 되지요.”
얼음장처럼 차가운 미소를 건 발렌스도 우아한 걸음으로 아힌을 따라갔다.
“내 말이 그 말이다. 사자 나부랭이들이 감히 내 증손주를…!”
있지도 않은 증손주를 가지고 벌써부터 분노를 불태운 릴리언마저 줄지어 뒤따랐다.
“수, 수장님. 아힌 님. 릴리언 님···!”
이대로 사자 영토에 쳐들어가 버리면 어쩌나. 차마 말리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못하던 릴이 쿵쿵거리며 그들을 쫓아갔다.
졸지에 홀로 남겨진 이브린은 덤덤히 이디스의 묘비를 바라봤다. 이디스가 세상을 등진 이후, 그의 묘 앞에서 오늘처럼 소란을 떠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분명 이디스는 기뻐할 거라 생각한 이브린은 제가 아힌에게 만들어줬던 토끼 인형을 비석 앞에 내려뒀다. 비비가 돌아온 이후 역할을 다한 누더기 토끼 인형이었다.
‘아힌 님이 저런 토끼광이 되어 버린 것엔 필시 이디스 님의 지분도 있을 겁니다.’
왜 하필 토끼 인형을 선물하셔선. 정중히 고인을 기리던 이브린은 일순 얼마 전, 아힌이 제게 질문한 것을 떠올렸다.
‘아버지가 언제쯤 내게 토끼 인형을 사 주셨지?’
그러고 보니 왜 이디스는 흑표범도 무엇도 아닌 토끼 인형을 선물한 걸까.
워낙 어린 날의 일이라, 날아오는 토끼 인형에 자주 맞았던 기억만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왜…?’
갑작스레 인 궁금증으로 인해 몸이 달았지만, 비석은 말이 없었다.
* * *
졸업식 당일, 벨헬름 아카데미의 중앙 광장.
단상에 오른 나는 줄지어 선 졸업생들을 내려다봤다. 그들의 시선은 단상이 아닌 오로지 뒤편을 향해 있었다.
그곳에는 아힌을 비롯한 발렌스 님, 이브린, 메이미에 릴, 사람으로 돌아온 퀸. 애쉬와 바라, 슈, 비온 등 흑표범 일가족까지. 어디 가서 보기 힘든 조합이 나란히 자리한 상태였다.
어제 이미 아힌의 존재를 들켰다 해도, 소문을 육안으로 직접 확인한 모든 이의 표정 위로 만감이 교차하는 중이었다.
“큼, 큼. 저기…, 저기요….”
연거푸 헛기침을 해 봤자 누구 하나 관심 주지 않는, 고요 속의 울림일 뿐이었다.
‘이대로 진행해도 되나…?’
거의 뒤돌다시피 한 졸업생들은 턱이 빠져라 입을 벌린 몰골이고.
저 멀리 구석의 러셀은 이미 졸업식이 끝나기라도 한 양 꽃을 뿌려 대고. 더군다나 발렌스 님의 옆에 있는 화가는 팔이 빠져라 무언가를 그려 대고 있었다.
‘할아버님, 어떡하죠?’
총체적 난국인 현장을 응시하던 나는 단상 우측에 계신 할아버님을 돌아봤다. 그리고 모든 희망을 잃었다.
“우리 토끼가 졸업을 다 하고….”
할아버님은 아카데미가 폐교라도 한 것처럼 눈물을 찍어내고 있었기에. 벌써 졸업식이 끝나기라도 한 양 박수를 뻑뻑 치기도 했다.
우리 토끼가… 우리 토끼가….
반복적으로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굳이 의미를 알고 싶지 않았다.
빛바랜 얼굴로 다시 전방을 주시하니, 마침 눈이 마주친 발렌스 님이 살짝 손을 흔들었다.
‘발렌스 님….’
아가, 졸업 축하한다. 입 모양을 읽은 것만으로도 왠지 용기가 생긴 나는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어느 봄날, 우리는 한날한시에 벨헬름 아카데미의 정문을 지났습니다.”
다행히 연설을 시작하자 졸업생들의 이목이 내게 돌아왔다.
나는 연설을 하면서 친숙한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봤다.
“벨헬름 아카데미에서의 배움과 경험으로 인해 우리는 한층 더 빛나고 성숙한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할아버님과 발렌스 님, 얄미운 이브린과 퀸. 메이미와 릴. 지난나 교수님과 러셀. 그리고….
마지막 문단을 남겨 둔 와중, 갑작스레 무언가가 내 엉덩이를 쿡 찔러 왔다.
‘뭐, 뭐야.’
기겁한 내가 뒤돌자, 도대체 어떻게 올라왔는지 모를 애쉬가 있었다.
‘애쉬?’
분명 처음엔 릴과 함께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는다 싶더라니. 단상에 가려 아래에서는 애쉬가 보이지 않는 사실이 천만다행일 지경이었다.
이 제멋대로인 흑표범을 어떡하나. 두리번거렸지만 단상의 애쉬를 끌어낼 수 있을 만한 위인은 없었다.
‘진짜 이럴 거야?’
눈으로 묻자, 애쉬는 시치미를 뚝 떼며 제자리에 퍼질러 앉았다.
긴장한 나를 위해 이 애쉬 님이 뒤를 받쳐 주겠다는 의미로 느껴진다면 착각일까.
하는 수 없이 이대로 연설을 지속하게 된 나는 다시금 전방을 바라봤다.
“…그럼 졸업생들의 앞날에 무궁한 영광과 발전만이 있기를 바라며.”
마지막 문장을 말한 나는 미세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옮겨진 시선의 종착점은 오직 한 곳뿐이었다.
“졸업생 대표, 학생회장 비비-”
나는 눈을 맞춘 아힌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그레이스.”
펑, 끝맺음과 동시에 너구리 일족이 터뜨린 폭죽이 하늘을 수놓았다.
폭죽 소리는 먹먹한 울림이 되어 가슴 전체로 퍼져나갔다. 비로소 온전한 이름을 찾게 된, 기념적인 날이었다.
* * *
신전 뒤편의 폭포 소리와 새소리가 어우러져 귀를 두드렸다.
아힌이 선 곳은 언젠가 와 본 기억이 있는 토끼 영토의 신전이었다.
수신(獸神)이 아로새겨진 석벽을 뒤로한 아힌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알 수 없는 미지의 힘이 발을 당기고 있었다.
“이건….”
신전 밖으로 나온 그의 시야로 비현실적인 절경이 펼쳐졌다.
‘꿈… 인가.’
쏴아아- 연보랏빛 나뭇잎이 흩날리는 교목을 멍하니 바라보던 아힌은 황급히 뒤돌았다. 정체 모를 기척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튼 곳엔 애쉬와 바라가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
미간을 구긴 아힌은 애쉬가 물어 든 의문의 천 뭉치를 응시했다. 움직임에 따라 대롱대롱 흔들리는 걸 보아 무언가가 들어 있는 모양이었다.
주저 없이 걸어온 애쉬는 대뜸 아힌을 향해 천 뭉치를 내밀었다. 또다시 의도를 반한 아힌의 손이 자연스레 그것을 받아 들었다.
‘뭐야.’
기대 없이 천을 둘둘 풀어 보던 아힌은 눈을 크게 떴다.
은발과 연한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토끼 수인으로 추정되는 아기였다.
꺄아. 어딘지 비비를 닮은 아기는 작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내밀었다.
아힌이 홀린 듯 아기를 향해 고개를 숙이자,
“윽,”
조막만 한 주먹이 그의 턱을 빡 올려쳤다. 그리고 만족한 듯 느릿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외모는 비비와 비슷한 반면 눈빛은 아힌의 오만함을 담고 있는 건 왜일까. 아힌을 팬 후 웃을 수 있는 여유만 봐도 보통 비범한 토끼가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던 아힌은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번에는 애쉬와 같은 천 뭉치를 든 퀸이 공중을 빙빙 돌고 있었다.
‘무슨 속셈인 거지?’
묘한 불안감을 느끼기 무섭게 휙, 퀸은 그대로 천 뭉치를 쥔 발에 힘을 풀었다.
“저 새대가리가…!”
하늘을 보며 달린 아힌은 추락하는 천 뭉치를 가까스로 받아 들었다.
천 속에는 백발과 붉은 눈동자를 지닌, 흑표범 수인으로 추정되는 아기가 자리했다.
‘…나?’
이목구비가 아힌을 빼닮은 아기는 쪼그마한 손으로 입을 가로막았다. 어딘지 질겁한 표정이었다.
아, 얘는 말도 못 할 울보에 겁쟁이가 분명하다. 버둥거리는 아이를 내려다보던 아힌은 직감적으로 그런 확신이 들었다.
“쉬이-”
드물게 당황한 그는 두 아기를 둥가둥가 어르기 시작했다.
토끼 수인인 아기는 배부른 맹수인 양 배를 두드리고. 흑표범 수인인 아기는 쫓기는 초식동물처럼 우렁차게 울어 대고. 토끼 같은 흑표범과 흑표범 같은 토끼가 아닐 수 없었다.
꺄우. 심지어 아힌의 은발을 잡아당기는 악력이 웬만한 장수도 울고 갈 수준이었다.
“…좀 놓아주면 좋겠는데.”
두 아기에게 어쩔 도리 없이 머리를 쥐어뜯기던 아힌은 무심코 위를 올려다봤다.
댕, 댕. 신전 꼭대기에서 마치 축복하듯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 * *
“……!”
헉, 숨을 들이마신 아힌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사라진 두 아기를 찾아 움직인 손이 푹신한 천을 더듬었다. 깜박 졸기 직전까지 누워 있던 해먹이었다.
‘무슨….’
이윽고 그는 혼인식 후, 대륙 끝으로 기념 여행을 온 사실을 상기해 냈다. 지나치게 성대한 혼인식과 릴리언의 호들갑에 질린 비비가 한사코 기념 여행은 조용한 곳으로 가기를 원했기에. 덕분에 오게 된 인어가 존재하는 대륙 끝은 아힌마저 방심한 채 깜박 잠들 만큼 평화롭고 한적했다.
“하···.”
손바닥으로 눈가를 짚은 아힌이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무슨 신의 계시도 아니고. 애쉬와 바라, 퀸도 비웃고 갈 개꿈이었다.
그럼에도 은근한 아쉬움에 꿈을 곱씹던 그는 곧 비비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바다로 이어지는 푸른 호수를 배회하던 시선이 한곳에 머물렀다. 바위 위에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앉은 비비였다.
‘얼굴이….’
그녀의 낯빛이 다소 피로해 보인다고 생각하던 아힌은 아차 싶었다.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저 정도면 양호한 수준이었다.
‘-뭘 보는 거지?’
자연스레 아힌의 눈길이 비비가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따라갔다. 호수 속에 반신을 담근 인어들이었다.
태생부터 유순한 종족인 인어들은 젖은 머리를 넘기며 호기심을 드러냈다. 푸른 피부와 스산한 눈동자가 지나치게 고혹적이었다.
긴장한 마음에 눈만 맞추던 비비는 용기 내어 가슴에 손을 얹었다.
“반가워요, 저는 비비… 아니, 토끼예요.”
비스듬히 누워 지켜보던 아힌은 그 이상한 자기소개를 듣자마자 해먹에 이마를 박았다.
‘저게 뭐야.’
누가 봐도 토끼같이 생긴 걸 모르나. 그런 생김새로 ‘안녕하세요, 저는 토끼예요.’라며 각 잡고 소개하는 모습이 우스워 미칠 것 같았다.
“토끼는 이렇게 생긴 육지 동물인데… 아, 그렇다고 제가 완전한 토끼인 건 아니고.”
비비는 손을 귀처럼 까딱거리며 제 정체를 설명하기 위해 힘썼지만, 언어 체계가 전혀 다른 인어들은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귀는 길고 털은 복슬복슬하고.
열정적으로 의사소통을 시도하던 그녀는 문득 시선을 돌렸다. 시야로 해먹에 누워 어깨를 들썩이고 있는 아힌이 들어왔다.
“아힌!”
드디어 인어가 수면 위로 나왔어, 외친 비비가 신나게 손을 흔들었다. 겨우 웃음을 멈춘 아힌은 화답하기 위해 손을 들다가 돌연 멈칫했다.
‘…이상하군.’
분명 이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빠 생각엔 아직 인간화를 치르기 전인 수인이지 싶은데.’
흐릿한 목소리가 떠오르며 까마득한 기시감이 몸을 덮쳐 왔다.
‘아힌, 아기 토끼는 함부로 만져선 안 돼. 우리와는 다르게 약한 존재거든.’
먼 어린 날의 기억 같기도 하고. 마치 중요한 걸 잊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일전에도 비슷한 기억이 스쳤지 않나.
“아힌, 왜 그래?”
제 손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그는 비비의 부름에 흠칫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냥, 잠이 덜 깬 것 같아.”
나중에 생각하지 뭐. 흐트러진 은발을 정리한 아힌이 손을 흔들자, 더 신난 비비가 양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의 여행이라 그런지 무척 들뜬 모양새였다.
“인어들이 선물로 진주도 줬다?”
…불안한데. 손짓에 따라 덩실덩실 흔들리는 비비를 바라보는 아힌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 갔다.
“아…!”
“비비!”
일순 그의 눈앞이 아득하게 변했다.
어째 몸이 기우는 게 위태롭다 싶더라니, 바위에서 미끄러질 뻔한 비비가 죽어라 양팔을 돌려 댔다. 당황한 인어들도 비명을 지르며 호수를 맴돌았다.
잔상이 보일 속도로 팔을 회전시킨 것도 잠시, 간신히 중심을 잡고선 씩 웃는데….
달려가려던 자세 그대로 굳어 버린 그는 덩달아 비식 웃고 말았다.
기념 여행을 조용한 곳으로 오면 뭐 하나. 정말이지 함께이면 평생 조용할 날이 없을 듯한 토끼였다.
* * *
아몬가(家)
공기 중에 입김이 뽀얗게 퍼져 나가는 계절. 그날은 토끼 영토 수장과 흑표범 영토 수장의 화합이 있던 날이었다.
탁탁, 이디스를 따돌린 네 살의 아힌은 둥근 기둥 사이사이를 가로질러 뛰었다. 토끼 영토 수장의 저택은 그레이스 저택과는 퍽 다른 생소한 구조였다.
바쁘게 움직이던 발은 이윽고 커다란 대리석 문 앞에서 멈췄다. 정확히는 처음 보는 생소한 생물 앞이었다.
‘뭐지 이게?’
쿠션에 넣는 솜 같기도 하고, 하얀 먼지 같기도 하고.
호기심이 인 아힌은 쪼그려 앉아 관찰하기 시작했다. 동물 같긴 한데, 그레이스 저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흑표범과는 비교하기조차 애매할 만큼 작았다.
몹시 수상한 생물을 가만히 주시하던 아힌은 입을 오물거렸다.
“우네?”
생물은 눈 아래쪽 털이 축축하게 젖은 상태였다. 보통 때라면 무시하고 지나쳤겠지만, 이상하게 발이 묶인 아힌이 고개를 기울였다.
“왜 우는데.”
질문을 알아듣기라도 한 건지, 하얀 솜뭉치의 몸이 움찔 떨렸다.
망설이던 생물은 곧 옆의 대리석 문을 짚고 섰다. 마치 열어 달라고 부탁하는 듯한 몸짓이었다.
‘문이 닫혀서 못 들어가고 있었던 건가.’
끼이익, 아힌은 답지 않게 순순히 대리석 문을 살짝 열어줬다.
“오랜만일세, 루어 부인.”
“세상에, 가주님! 소식 들었습니다, 엊그제 손주를 보셨다지요?”
미세하게 열린 문틈 사이로 귀부인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토끼 영토 귀족들이 모여 티타임이라도 벌이는 모양이었다.
눈에 띄게 밝아진 작은 생물은 폴짝 뛰어 안으로 들어갔다.
아쉬움도 잠깐, 얼마 지나지 않아 솜뭉치가 문틈 사이로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양 앞발을 공손히 모은 생물이 우물쭈물 문 뒤로 숨었다가 나타나길 반복했다.
“감사 인사라도 하려고?”
도대체 이건 뭘까. 다시금 수그려 앉아 눈싸움에 임하던 아힌이 혀 짧은 발음으로 읊조렸다.
“먹는 건가?”
무심결에 손을 뻗자, 움츠린 생물은 엉덩이를 뒤로 물려 피했다.
“먹이가 아니라 아기 토끼지.”
아힌의 뒤로 나지막한 저음이 울려 퍼졌다.
드디어 쏘다니는 아힌을 찾아낸 이디스가 곁으로 몸을 굽혀 앉았다.
“이놈아, 아기 토끼가 뭐야?”
“아힌, 도대체 그건 무슨 호칭이지? 아빠를 그렇게 부르면 못 써.”
“왜? 조부님은 매일매일 아빠를 네 이놈이라고 부르는걸.”
“하, 아버지도 진짜-….”
아힌 앞에서는 언행에 조심하라고 여러 번 말씀드려도. 중얼거린 이디스가 찰랑이는 백금발을 가볍게 쓸어 넘겼다.
“아빠, 그래서 아기 토끼가 뭔데?”
아힌은 문틈 사이로 고개만 빼꼼 내민 새끼 토끼를 가리켰다. 새끼 토끼 또한 아힌과 이디스가 퍽 신기한 눈치였다.
“여기는 토끼 영토잖아. 흑표범 영토에 흑표범이 살듯이 이곳에는 토끼들이 모여 사는 거지. 토끼들은 대부분 저렇게 생겼어.”
“그럼 저 아기도 우리처럼 수인이야?”
“아마? 아빠 생각엔 아직 인간화를 치르기 전인 수인이지 싶은데.”
진짜 토끼는 웬만하면 흑표범 수인을 발견하자마자 도망치니까. 추측한 이디스가 느릿하게 턱을 매만졌다.
“못 먹어?”
“음, 먹을 순 있지 않나?”
애매하게 반문한 이디스는 만지고 싶어서 안달복달하는 아힌을 제지시켰다. 대충 의미를 알아들은 새끼 토끼가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으니. 자신을 먹으려 드는 순간 콱 깨물어 버리겠다는 듯한 강맹한 기세였다.
‘-뭐야.’
피곤해서 눈이 조금 침침한가.
콩알만 한 새끼 토끼에게서 개선장군의 그림자를 본 이디스가 눈을 비볐다.
“토끼가… 아닐지도.”
크게 될 녀석일세. 새끼 토끼는 기백 하나로 대륙을 뒤흔들 관상을 가지고 있었다.
“아빠, 토끼 아냐? 방금 전까지는 토끼라며.”
“기백에 압도당할 뻔했…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어쨌든 아힌, 아기 토끼는 함부로 만져선 안 돼. 우리와는 다르게 약한 존재거든.”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데?”
“인사해야지, 이렇게.”
안녕, 이디스는 손을 펼쳐 새끼 토끼를 향해 흔들어 보였다.
아힌은 이디스를 따라 펼친 제 손바닥을 빤히 응시했다. 수장의 자제라는 신분, 더욱이 또래라고는 이브린밖에 만나 보지 못했기에 생소한 인사법이었다.
“…싫어.”
“왜?”
“어쩐지 부끄러워.”
결국 인사하지 못한 아힌은 어색하게 볼을 긁었다.
쪼그려 앉은 채 가만히 무릎에 손만 얹고 있으니, 경계를 조금 누그러뜨린 새끼 토끼가 문 뒤에서 살짝 나왔다.
‘···안녕.’
먼저 인사하듯 앞발이 흔들리자, 수줍어진 아힌이 괜히 이디스의 크라바트를 꾹꾹 당겼다.
“아힌, 아빠 숨 막혀, 숨.”
“봤어? 토끼가 나한테 인사했,”
“비비- 밖에서 뭐 하니?”
그때 응접실 문틈 사이로 어느 귀부인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위험하니까 돌아다니지 말고 어서 이리 오렴.”
그 부름에 화들짝 놀란 새끼 토끼가 안으로 쌩하니 모습을 감춰버렸다. 아힌은 한순간에 텅 빈 문틈을 허망하게 바라봤다.
“날 버리고 가 버렸어. …내가 살면서 처음으로 문을 여는 수발까지 들어 줬는데.”
“아쉬워?”
“조금.”
“어쩔 수 없지, 아무래도 저 아기 토끼는 수인인 모양이니까.”
시선을 맞춘 이디스는 시무룩해진 아힌을 다독였다.
“대신 후원으로 가 보자. 아몬가(家)에서 기르는 토끼가 가득하다던데.”
“…저 토끼가 아니면 싫어.”
“저 토끼는 수인일 거래도. 말을 알아듣는 걸 봤잖아.”
“아무튼 싫다니까. 지금 내 마음은 몹시 단호해.”
“얼마나 단호한데?”
“이브린만큼.”
이브린 만큼 단호해진 아힌이 고집스레 한쪽 발을 통 굴렸다.
이 황소고집은 발렌스를 닮았나. 이디스의 입꼬리가 피식 호선을 그렸다.
“이만 가자, 엄마가 기다릴 거야. 영토로 돌아가는 길에 상점에서 토끼 인형이라도 살까?”
“지금 적당히 인형으로 타협하려는 속셈이네.”
“아힌…. 도대체 그런 말솜씨는 누구한테 배워 오는 거야?”
직후부터 아힌의 지독한 토끼 타령에 시달릴 거란 사실은 꿈에도 모른 이디스가 걸음을 옮겼다.
그의 손에 이끌려 걷던 아힌은 묘한 아쉬움에 뒤를 돌아봤다. 동시에 문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민 토끼를 발견한 눈이 커다래졌다.
지금이 아니면. 이번만은 주저하지 않은 아힌이 펼친 손을 살짝 흔들었다.
‘안녕.’
그러자 화답하듯 다시금 토끼가 앞발로 포물선을 그렸다.
아힌은 뒤로 걷다시피 하며 붕붕 흔들리는 하얀 솜뭉치를 바라봤다. 제힘에 못 이겨 결국 털썩 엉덩방아를 찧는 모습이 어이가 없었다.
웃긴 토끼. 곧 일자로 다물려 있던 아힌의 입꼬리가 방긋 올라갔다.
‘나중에 꼭 또 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