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ymbiotic Relationship Between the Rabbit and the Black Panther RAW novel - Chapter (74)
토끼와 흑표범의 공생관계 <외전2>(74/75)
<외전2>
봄날에 치러진, 전례 없이 호화로웠던 혼인식은 몇 달 동안 흑표범 영토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호사가들의 관심도 점차 시들시들해질 무렵. 어느덧 계절은 두 번이나 바뀌어 그레이스 저택을 단풍으로 물들였다.
늦은 오후, 태연하게 복도를 걷던 나는 돌연 모퉁이 뒤에 숨어 슬그머니 얼굴을 내밀었다.
‘아무도 없지?’
대부분의 고용인이 저택 외벽 청소에 나선 현재, 복도에는 인적 하나 없었다.
신중히 전방을 살핀 나는 다리 부근을 간질이는 흑표범들을 내려다봤다. 휴식 핑계를 대며 메이미와 앨런을 겨우 떼어 냈더니, 그새 따라붙은 애쉬와 바라였다.
“기어코 따라와야겠어?”
애쉬는 영문도 모르면서 대뜸 거수경례를 해 댔고, 바라는 새침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심지어 둘의 시선은 내 손에 있는 육포 봉투에 박혀 있었다.
아차. 무의식중에 들고 있었음을 인지한 나는 육포 봉투를 자수가 새겨진 크로스백으로 주섬주섬 집어넣었다.
최근 육포를 즐겨 먹는 나를 본 메이미가 챙겨 준 육포 전용 가방이었다.
“…이상하게 입이 심심하단 말이야.”
말도 살찌는 가을이라 그런가. 혼잣말한 나는 본 목적으로 돌아와 의무실 문을 콩콩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허가가 떨어진 후, 조심스레 문을 열자마자 애쉬가 바람처럼 뛰어 들어갔다.
그 행동에 의아해하고 있자니, 안쪽에서 중년 여성의 밝은 인사 소리가 들려왔다.
“오, 애쉬로구나. 그런데 오늘은 챙겨 줄 간식이 없는데 어쩌니?”
“세상에, 로나. 로나도 애쉬한테 간식을 챙겨 주고 있었어요?”
“비, 비비 님!”
내 전담 주치의인 로나가 사색이 된 채 뒷걸음질 쳤다.
얼마 전에 정원사도 애쉬에게 몰래 간식을 주던 것을 들켰는데.
배신감에 눈을 뾰족하게 뜬 내가 허리에 손을 얹었다. 이런 식이어서야 제아무리 영양 균형에 신경 써 봤자 말짱 도루묵이었다.
“애쉬, 그렇게 얻어먹고도 배고픈 척 점심 식사마다 따라온 거야? 과식은 못 써!”
불호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애쉬가 슬금슬금 바라의 뒤로 몸을 숨겼다. 크르릉, 바라는 기꺼이 방패막이가 될 심산인지 냉큼 내 앞을 척 가로막았다.
“바라, 너까지…!”
이 흑표범 한 쌍을 어떻게 해야 할까. 부글부글 끓는 속을 진정시킨 내가 심호흡을 하며 로나를 돌아봤다.
다른 이들의 눈에 띄기 전에 주치의를 찾은 용무부터가 우선이었다.
“…로나, 추궁하지 않을 테니 커튼 뒤에서 나와요.”
“소, 송구합니다….”
겁에 질린 낯을 한 로나가 커튼을 젖히며 종종걸음으로 나왔다.
‘저런 겁 많은 흑표범은 또 처음 보네.’
섬세한 실력으로 그레이스 저택 내 개인 의무실까지 얻어 낸 인재라고는 하는데…. 아직까지는 커튼 뒤에 숨는 게 습관인 주치의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발렌스 님은 혹시 일부러 나와 비슷한 면이 있는 주치의를 붙여 주신 걸까. 잠깐 고찰한 나는 문이 완전히 닫힌 것을 확인한 후 환자용 의자에 착석했다.
그제야 후다닥 소리 나게 달려온 로나가 내 앞에 자리 잡았다.
“침실이나 집무실로 부르시지, 어찌 직접 걸음 하셨는지요.”
“로나를 불렀다가는 난리가 날 것 같아서 은밀히 찾아온 거예요.”
듣는 이가 있나 싶어 두리번거린 내가 한껏 목소리를 낮춰 속닥거렸다.
“아시다시피 기침 한 번 하는 것도 눈치가 보여서….”
곧장 의미를 이해한 로나가 어색하게 끄덕였다. 사레에 들려 몇 번 기침을 했더니 경악하며 의관을 외치던 할아버님을 상기한 모양이었다.
“의술을 공부하고 있지만 아직 많이 부족해서요. 로나의 조언이 필요해요.”
“기꺼이요. 혹 불편한 곳이라도 있으신가요?”
“그게 요즘….”
잠시간 망설인 나는 요 근래 느낀 별것 아닌 듯하면서도 이상한 증상들을 생각했다.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는 졸음 하며, 기분이 널뛰기라도 하는 양 오락가락 바뀌었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심장이 벌렁거리기도 하고, 무엇보다 자주 찾지도 않던 육류와 달짝지근한 음료에 대한 갈망을 참을 수가 없었다.
월경 전후와 비스름한 증세 같기도 했다.
이런저런 증상을 나열하고 있자니, 로나의 표정이 점점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설마.’
덩달아 불현듯 한 가지 가설을 떠올린 나 또한 애매한 낯빛으로 로나의 진료를 받았다.
‘설마아….’
침대에 눕고 나서도 로나의 진료는 꽤 오래 이어졌다. 그녀는 전에 없이 진중한 눈빛을 하고선 분주히 움직였다.
시간이 꽤 길어진다고 생각할 즈음, 그녀가 한껏 상기된 얼굴로 손을 짝 마주쳤다.
“회임을 축하드립니다, 비비 님!”
회임. 추측을 확신으로 만들어 주는 단어가 귓가에 윙윙 메아리쳤다.
* * *
로나의 의무실을 벗어난 나는 좀처럼 진정치 못하며 복도를 서성였다.
‘어떻게…?’
아힌은 확실한 아이 계획을 세우기 전까지는 임신을 피할 수 있는 약을 복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벌써 4주 차라니.
‘도대체 언제?’
벙찐 얼굴로 과거를 되짚던 나는 한참 만에 입을 틀어막았다.
해가 중천일 때, 침실에 구비된 과실주를 호기심에 몇 잔이나 들이켠 그날.
아침 훈련 후, 침실로 돌아온 아힌이 입은 훈련복을 보곤 코피가 나는지 확인한 그날.
‘비비, 대낮부터 무슨 술을 이렇게….’
다짜고짜 입을 맞추자마자 아힌이 무방비하게 웃음 지은 그날…!
평소보다 유난히 예뻐 보이는 그를 바닥에 휙 내동댕이친 그날이 틀림없었다. 물론 이후의 기억은 끊어지고 말았다.
덕분에 며칠 동안 고주망태 변태 토끼 취급을 벗어날 수 없었지.
그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진 내가 주르륵, 손으로 양 뺨을 쓸어내렸다.
“어떻게… 어떻게 그 한 번으로….”
넋 나간 사람처럼 중얼대는 와중, 뒤를 졸졸 따라오는 애쉬 및 바라와 시선이 마주쳤다.
흑표범…. 고개를 갸웃대는 둘을 심오하게 주시한 나는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달았다. 흑표범 수인들과 부대끼며 살아오느라 깜박하고 있던 것.
‘나… 토끼였지.’
나는 래비안의 피를 이은, 순혈 토끼 수인이란 사실이었다.
예로부터 인구 밀도가 높은 토끼 수인은 다산의 상징으로 여겨지곤 했다. 타 일족이 일부러 토끼 영토의 신전에 들러 순산을 기원할 만큼.
실제로 래비안가(家)에서 지낼 때도 이복형제, 자매가 셀 수 없이 많았다.
‘조건은 충분했네.’
맙소사, 맙소사.
방방 뛰며 오두방정을 떨던 나는 곧 정신을 차리며 제자리에 섰다. 이러나저러나 앞으로는 행동거지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배를 쓰다듬었으나 아직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다만 내 몸속에 생명이 깃들었다는 사실이 기분을 오묘하게 만들었다. 그럴 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심장박동이 전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가만히 배에 손을 얹고 있던 나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나와 아힌의 흔적, 새로운 가족.
계획하고 있던 것이 조금 이르게 찾아왔을 뿐이었다. 당황과 놀라움이 지나간 곳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만이 자리 잡았다.
‘로나, 우선 이 일은 비밀에 부쳐 줘요.’
‘예? 어찌 그러시는지…?’
‘제가 직접 말하고 싶어서요.’
아힌에게는 어떻게 알리면 좋을까. 그냥 지나가듯 말하기에는 낭만 토끼라는 별칭이 아까운데.
곰곰이 고민하던 나는 벅차오른 마음을 주체 못 하며 중얼거렸다.
“많이 좋아하겠지?”
“응, 좋아해.”
뜬금없는 동문서답이 들려옴과 동시에 누군가가 뒤에서 나를 감싸 안았다. 가두듯 허리와 어깨를 감싼 팔의 주인은 아힌이었다.
“비비, 귀 빨개졌어.”
여전히 이런 종류의 접근에는 면역이 없는 내가 양손으로 귀를 가렸다.
“노, 놀래서 그래.”
“이 못 보던 주머니는 뭐고?”
그는 몸을 속박한 팔을 풀지 않은 채 허리 부근의 감색 육포 가방을 만지작거렸다. 귓가에 닿는 숨결이 지나치게 가까웠다.
“주머니가 아니라 가방이야.”
“그렇군. 어쨌든 메이미랑 앨렁은 어디 두고 혼자 있어? 그것도 복도에서 덩실대면서.”
내가 그러고 있었던가. 머쓱함에 손을 꼼지락거리던 나는 곧 환해진 낯빛으로 몸을 돌렸다.
“아힌, 있잖아…!”
들뜬 마음에 아무것도 준비 못 한 채 말할 뻔한 내가 입을 합 다물었다. 이어서 의아하게 내려다보는 아힌을 떨치며 뒷걸음질 쳤다.
“비비, 말은 끝까지 해야지. 궁금해서 돌게 만들려고?”
그 자그마한 단서마저 놓치지 않은 아힌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원래 돌았… 아니, 아무튼 거기서 움직이지 마.”
“-왜?”
팔을 뻗다가 멈칫한 그는 느릿하게 뒷짐을 졌다.
웬일로 순순히 말을 듣는 걸 보아, 내가 취할 다음 행동을 기대하는 중인 게 분명했다. 교묘히 말려 올라간 입꼬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짓궂은 흑표범.
쪽 찢어진 눈으로 노려본 나는 애쉬 및 바라와 시선을 교환했다. 슬금슬금, 우리는 조금씩 아힌과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달려서 도망치자니 혹시라도 넘어질까 괜히 신경 쓰이고. 배를 흘끔 내려다본 내가 멀뚱히 선 아힌에게 삿대질했다.
“거기 딱 서 있어.”
따라 움직이려던 아힌이 우뚝 서며 영문 모를 낯빛을 했다. 그사이 빠르게 발을 옮긴 내가 훌쩍 거리를 벌렸다.
어느덧 복도 끝에 다다르자, 또다시 말을 거스른 아힌이 긴 다리를 움직였다.
“비비, 어디까지 가려는…….”
“서라니까, 움직이는 순간 엉덩이고 뭐고 다시는 안 때려 줄 거야.”
“그런 진부한 협박은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나?”
주춤. 파렴치한 흑표범은 또다시 어정쩡한 자세로 멈춰 섰다.
수월히 도주로를 확보한 나는 황망히 선 아힌을 뒤로한 채 복도를 벗어났다.
배 속의 아이에 대해 어떻게 전해야 기억에 남을지, 머릿속으로 수십 가지 방법을 그리며.
* * *
점심 직후, 응접실에 자리 잡은 아힌은 벨벳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아힌, 있잖아…!’
바로 어제, 화색을 띤 비비가 말하다 만 게 무엇인지 대충 예상이 갔다.
이른 아침부터 바쁘게 온실을 들락거리는 중이라고 하니까. 또 온갖 색이 뒤엉킨 누더기 꽃다발을 정성스레 만드는 모양이었다.
‘…오늘 무슨 날이었던가?’
다만 문제는 하루 종일 되짚어도 꽃다발을 만들 만큼 기념할 만한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한 아힌이 내쉰 숨에서 초조함이 묻어났다.
처음 만난 날도 아니고, 탄생일도 아니고, 재회한 날도 아니고. 갖은 예시를 떠올린 그가 얼마 지나지 않아 판단을 내렸다.
낭만주의자의 깜짝 이벤트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감동받는 역할만 남은 아힌이 혀로 아랫입술을 축였다. 추측이 맞는 것 같긴 한데, 확단을 내리자니 중요한 무언가를 놓친 양 묘하게 찝찝했다.
“아힌 님,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시는지요. 따로 근심거리라도 있으십니까?”
저를 부르는 음성에 상념에서 깨어난 아힌이 아래로 깔았던 시선을 들었다.
“경은 왜 여기에 있지?”
“섭섭합니다. 매일 저택에 들르라고 하신 분은 아힌 님이시지 않습니까.”
“그거야 어릴 적 얘기고.”
이브린의 아버지, 세드릭 이브린.
세월이 담긴 주름과 수염을 제외하면 이브린과 다를 게 없는 그를 응시하던 아힌이 입술을 뗐다.
“그보다 경이 요즘 비비에게 보내는 선물 양이 지나치게 늘어난 것 같은데. 거의 일주일에 한 번꼴이야.”
“흑표범 영토의 귀인이 아니십니까. 소소한 물질로밖에 모실 수 없어서 송구할 따름입니다.”
세드릭 이브린은 눈물을 찍어 내는 시늉을 하며 아힌을 흘긋거렸다.
열여덟,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있던 아힌은 채 숨기지 못한 선득한 가시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아주 사소한 가시마저 무감한 눈빛 뒤로 감추는, 완벽한 성년이자 군주로 자라났다. 습관적으로 짓는 찬연한 미소는 이따금씩 호의가 담긴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이렇듯 한층 견고해진 아힌이지만, 토끼 앞에서만은 아첨을 부린다는 이브린의 속삭임이 세드릭 이브린의 머릿속을 점령했다.
“그래서, 혼인식을 치르자마자 비비에게로 갈아타시겠다?”
“그리 말씀하시면 서운합니다. 비록 제 마음은 비비 님께 가 있지만, 이렇게 몸만은 늘 아힌 님 곁에 있지 않습니까.”
결국 비비 뒤로 줄을 서겠다는 의미와 다름없었다.
그 아들에 그 아버지가 아닌가. 토끼의 등에 업혀 손쉽게 권력에 편승하려는 의도가 눈에 빤히 보였다.
“세드릭 이브린. 자식 교육은 확실히 시켰군그래.”
“쑥스럽습니다, 아힌 님.”
마침 아힌의 뒤에서 대화를 경청하던 이브린이 불쑥 얼굴을 디밀었다.
“칭찬 아니니까 입.”
“예.”
속을 뒤집는 재능이 있는 이브린 부자를 무시한 아힌은 너른 응접실을 둘러봤다.
응접실에는 오랜만에 가족이 모인다는 취지로 자리한 발렌스와 릴리언, 이브린 부자, 그리고 사람 모습으로 강제로 참석시킨 퀸이 있었다.
발렌스와 담소를 나누고 있던 릴리언은 아힌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노기 어린 음성을 냈다.
“아니, 오랜만에 일족이 모이는 자리에 왜 우리 토끼는 부르지 않은 게냐?”
“맞습니다, 아힌 님. 우리 토끼님이 얼마나 상심하실까요.”
이브린마저 동참하며 비비를 부르기 위해 당장이라도 나갈 기세였다. 난동을 피우는 그들을 손짓으로 진정시킨 아힌이 본론을 꺼냈다.
“안 그래도 그 우리 토끼 때문에 말인데.”
비비가 화두에 오르자마자 모든 시선이 아힌에게 집중됐다.
“요즘 조금 이상해서.”
그러한 주장과 동시에 응접실 내 모든 이의 눈빛이 기묘하게 변했다. 이브린은 총대를 메기로 결심하며 나직이 속삭였다.
“아힌 님께서 타인더러 이상하다고 표현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다고 사료됩니다만.”
풀썩, 그리고 아힌이 흘린 지배계 페로몬에 맞아 조용히 기절했다. 여전히 비비에 관한 것에는 자비라곤 없는 모습이었다.
퀸은 입 닫고 있었음에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비비가 은근히 숨기는 게 많아서 말이지.”
아힌은 느른하게 다리를 꼬며 무릎에 손을 얹었다.
“최근 다들 이상하다고 느낀 적 없어?”
평소라면 아힌의 유난이라고 생각하며 넘겼겠지만, 불현듯 무언가가 스친 발렌스와 퀸이 입을 달싹였다.
발렌스는 며칠 전, 비비가 제 방으로 가출한 당일에 있었던 기이한 사건을 기억했다.
토끼 모습으로 잠을 잘 땐 온 침대를 호령하며 구르던 비비가.
흑표범 영토 수장의 뺨을 발로 후리고서도 몸부림을 멈추지 않던 그 비비가.
사람이 뒤바뀐 듯 손을 배에 가지런히 얹은 채 잠든 건 전에 없는 큰 변화였다. 시간이 흘러도 팔을 위협적으로 휘두르거나, 발을 구르며 이불을 차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잠버릇에 대해 짚고 넘어가자니 비비가 민망해할 듯하고. 그러려니 넘어가기에는 왠지 찜찜했던 그 밤을 떠올린 발렌스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잠버릇이 몰라보게 좋아졌더구나.”
릴리언은 발렌스와 아힌을 어리둥절하게 번갈아 봤다.
“우리 토끼의 잠버릇에 문제가 있었더냐?”
“고질병이었죠.”
“고질병이었지.”
발렌스와 거의 동시에 대답한 아힌은 뜻밖의 사실로 인해 인상을 찌푸렸다.
매일같이 비비를 두 팔로 껴안고 자기 때문에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되짚어 보니 짜릿한 발차기 맛을 본 지가 꽤 오래된 듯했다.
‘그 잠버릇이 한순간에 고쳐질 수가 있나?’
이따금씩 얌전히 잘 때도 있으니 발렌스의 염려는 일시적인 현상일 가능성도 있었다.
툭툭, 탁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린 아힌은 이번에는 퀸을 돌아봤다. 찰나였지만 입을 여닫는 것을 발견한 까닭이었다.
“퀸, 말해.”
눈치 하나는 귀신이라고 생각한 퀸은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분명히 시작은 별거 아닌 일이었기에.
평소와 다름없이 이브린이 토끼 님은 뛰어난 지배자라며 비비를 추켜세웠고, 퀸이 망할 토끼라고 추임새를 넣은 그때.
놀리지 말라며 발을 굴러야 하는 비비가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린 건 참으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죄책감을 느낀 퀸과 이브린이 석상처럼 굳는 것도 잠시, 쩔쩔매며 비비의 뒤꽁무니만 따라다닌 게 바로 일주일 전의 일이었다.
이 비밀을 여기서 털어놓으면 괴물 같은 그레이스 일족에게 날개털이 죄다 뽑히지 않을까.
공범인 이브린은 현재 기절한 상태라 도움을 요청하기조차 불가능했다.
몇 초 동안 심사숙고한 퀸이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감정 기복이… 꽤 심해졌더군.”
“감정 기복이? 어떤 식으로?”
푸드덕, 퀸은 더 이상의 발언을 거부하며 순식간에 매 형태로 돌아갔다.
미심쩍지만 일단은 갖가지 증언을 조합한 아힌이 턱을 쓸었다. 떨쳐지지 않는 위화감이 발끝을 휘감았다.
그가 처음 비비의 변화를 인지한 건 식습관이었다.
시작은 아닌 밤중에 벌떡 일어나 스테이크를 찾던 비비의 모습이었다.
‘아힌, 나 스테이크가 너무 먹고 싶어…. 아니, 먹어야겠어.’
‘이 시간에?’
잠꼬대라고 생각했지만 진정 주방으로 달려가기라도 할 기세였다.
혹시라도 체할까 설득하여 미트볼 샐러드로 타협했지만, 그 이후부터 눈에 띄게 육류를 즐기게 된 건 이상함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일단은 초식계 수인이기도 하고, 몇 년이나 채식 위주의 식생활을 해 온 비비였으니까.
주방장은 건강을 염려할 만큼 육류 섭취가 늘어난 건 아니라 판단했으나, 유난이 전공인 아힌에게는 염려할 만한 종류였다.
‘역시 안 되겠군.’
멀쩡하니 작작 좀 하라며 입을 찰싹 칠 비비의 반응이 뻔하지만 아힌 또한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갑자기 식습관이 바뀌고, 몇 년을 바꾸지 못하던 잠버릇이 개선되고, 비교적 평이한 성격인 비비가 감정 기복이 심해지고.
놓치기 쉬운, 소소하고 일시적인 변화일 순 있으나 동시다발적인 게 마음에 걸렸다.
“어머니, 비비의 정기검진이 며칠 정도 남았죠?”
“보름 후란다.”
“늦어. 아무래도 오늘 저녁에 주치의를….”
덜컹, 예고 없이 열린 응접실 문이 대화의 맥을 끊었다.
헐레벌떡 들이닥친 앨런은 그제야 제 실수를 인지하곤 고개를 조아렸다.
“소, 송구합니다!”
보좌관으로서 늘 비비의 곁을 지켜야 할 앨런이 왜. 불안감이 피어난 아힌은 이어질 앨런의 보고를 기다렸다.
헐떡거리며 숨을 고른 앨런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했다.
“비, 비비 님이 쓰러지셨습니다.”
“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아힌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걸 느꼈다.
역시나. 사소한 위화감은 언제나 해일처럼 위협적인 현실이 되어 돌아오기 마련이었다.
* * *
의무실에서 비비를 진료하던 주치의, 로나가 뒤편을 돌아봤다.
벌써 소식이 전달된 모양인지, 여러 개의 발소리가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벌컥, 아힌은 의무실 문을 열어젖히자마자 검은 엉덩이들을 마주했다. 비비가 누운 침대 앞을 점령한 애쉬와 바라, 슈, 비온이었다.
“비비!”
지체 없이 다가간 그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꽃다발을 두 손에 꼭 쥐고 눈을 감은 비비가 망자를 연상시킨 탓이었다.
초식계 수인치고도 작은 체구에, 어딘가로 사라져 버릴 듯한 투명한 피부와 머리 색이 위화감을 더했다.
“우리 토끼가 실신하다니, 이게 다 무슨 소린가!”
쾅, 문을 박차고 들어온 릴리언과 발렌스로 인해 아득했던 아힌의 이성이 제자리를 찾았다.
높은 분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로나가 허둥지둥 고개를 조아렸다.
“수장님을 뵙습니다!”
“인사는 되었으니 어서 설명을.”
살벌한 분위기에 지레 겁먹은 로나의 낯빛이 파리하게 질렸다.
달달 떨리는 입술 끝을 발견한 메이미는 빠른 설명은 글렀다 싶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온실에 계시다가 갑작스레 쓰러지셔서 이곳으로 옮겨 온 참입니다. 그리고….”
말끝을 흐린 그녀가 재촉하듯 로나를 곁눈질했다. 이 이상은 주치의의 영역이었다.
애써 정신을 다잡은 로나는 떠듬거리며 뒷말을 이었다.
“가, 가벼운 빈혈을 일으킨 것뿐이니 너무 염려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임신 초기에 흔히 나타나는 증상이라… 안정만 취하면 금방 깨어나실 겁니다.”
그녀의 발언이 끝나자마자 찬물을 끼얹은 듯한 싸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비비에게 미리 귀띔을 들은 메이미를 제외한 모든 이의 표정이 파란으로 물들었다.
소리 없는 혼란 속, 가장 먼저 고요를 깨뜨린 건 릴리언의 걸걸한 목소리였다.
“…다시 말해 보거라.”
“가벼운 빈혈일 뿐이니 안심하셔도 괜찮습니다.”
“아니, 그다음 말일세.”
“임신 초기에 흔히 나타나는 증세… 어머?”
어리둥절하게 대답하던 로나가 천천히 입을 틀어막았다.
‘에구머니, 이를 어째!’
반응을 보니 아직 회임 사실을 알리지 않으셨구나.
깨달음과 함께 입을 가로막은 손이 잘게 경련했다. 닥쳐 올 파란을 일개 주치의의 몸으로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물 좀, 물 좀 줘 봐.”
목이 타는지 난데없이 물을 찾은 아힌이 기둥에 몸을 부딪치며 튕겨 나왔다. 쿵, 뒤이어 그대로 닫힌 문에 얼굴을 박으며 뒤로 넘어졌다.
이례적인 실수임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지적하지 못했다. 아힌이 대표로 나뒹굴지 않았다면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건 그들 자신이었을지도 모르니.
“괜찮으십니까?”
의무실 내에서 유일하게 평정을 유지한 메이미가 주저앉은 아힌의 곁으로 다가갔다. 앞치마 뒤에서 꺼낸 물건은 새하얀 손수건이었다.
“아힌 님, 이마에 상처가.”
“아….”
“코피도 나십니다.”
툭, 툭. 아래로 떨어진 핏방울이 회색 경장을 짙게 물들였다. 흐트러진 은발이 그의 심정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다.
“회임.”
그럼 어젯밤에 비비가 괜히 배를 내밀며 제 주변을 서성거렸던 게.
아힌은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중얼거렸다.
“…내가 회임을 했다고?”
“아뇨, 회임을 하신 건 비비 님입니다. 아힌 님께서는 이마와 코를 치료하셔야 하고요.”
얼빠진 그가 손수건을 받아 드는 동시에 릴리언은 체면도 잊은 채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앞으로 시작될 호들갑과 유난의 도화선과도 같은 괴성이었다.
* * *
조용히 의무실을 나선 세드릭 이브린은 직전에 본 광경을 곱씹었다.
토끼가 그레이스 일족을 주무른다는, 말로만 들었던 그 광경을 실제로 확인하니 아주 가관이 따로 없었다.
가관의 시작은 소란의 중심인 비비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며 깨어났을 때였다.
“저 여린 것이 앞으로 얼마나 고생할꼬…. 나뭇가지 같은 비실비실한 팔목으로 어찌 열 달 가까이 고역을 치르려고?”
릴리언은 흐릿한 보라색 눈동자를 보자마자 폭포수처럼 눈물을 쏟아 냈다.
증손주가 생긴다는 사실에 허허 웃다가도 비비에 대한 염려로 눈물을 훔치기를 여러 번. 울고 웃는 얼굴이 기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뿐인가. 발렌스는 가까스로 체면을 유지한 듯했지만 자세히 살피면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다.
비비의 한쪽 손을 조물조물 주무르며 연신 “아가….”라는 말만 반복하는 걸 보면.
“할아버님, 왜 울고 그러세요….”
침대에 앉은 채 덩달아 울상을 하던 비비가 어깨를 흠칫 떨었다. 이마와 코가 피로 적셔진 아힌을 발견한 탓이었다.
“아, 아힌. 얼굴이 왜 피투성이야?”
아힌은 조그마한 입술에서 제 이름이 나오기 무섭게 비비의 품에 폭삭 안겼다. 실상은 아힌의 품에 그녀가 완전히 감춰진 모양새였다.
또라이가 얼굴 빼면 볼 게 어디 있다고…. 비비가 짐짓 심각하게 중얼거리며 아힌의 얼굴을 치유했지만, 그 말을 신경 쓰는 사람은 세드릭 이브린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아힌의 눈물 때문에 축축이 젖어 가던 비비의 어깨를 회상한 세드릭 이브린은 헛웃음을 쳤다.
그가 아는 아힌은 전쟁 중에 화살에 맞거나 갈비뼈가 부러져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던 사람이었다.
“오래 살고 볼 일이로군.”
“저 정도는 놀랄 일도 아닙니다.”
뒤따라 나온 이브린은 그레이스 일족의 실태에 관해 담담히 토로했다.
“어쨌든 우리 흑표범 영토의 경사와도 다름없으니, 저택으로 돌아가 제대로 된 축하 선물을 준비해야겠구나.”
“살펴 가십시오, 아버님.”
“…살펴 가라니. 이 아비가 가는데 배웅도 않겠다고?”
“비비 님께서 곧 저를 찾으실 겁니다, 이 이브린을 몹시 총애하시니.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건조한 인사와 함께 의무실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답지 않게 부산스러웠다. 홀로 남겨진 세드릭 이브린은 멀어지는 막내아들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봤다.
“허, 참. 저 녀석이 저리 실없이 웃을 줄도 알고…. 별일이로군.”
결국 소란 통에 배웅 없이 귀가하게 된 그가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머지않아 아기님이 태어나게 되면 새로운 권력의 흐름이 도래할 거라 생각하며.
그리고 비비는 모두의 축하를 받은 후 애쉬와 함께 잠들 때까지도 이브린을 찾지 않았다.
* * *
피부를 찢을 듯한 칼바람이 휘몰아치는 어느 설원.
평평한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왜 이런 고산지대에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는 이브린이 바위 뒤로 피신했다.
호오오, 부르튼 손을 입김으로 녹이던 그는 어정쩡하게 선 기사들을 향해 손짓했다.
“여러분, 이쪽으로 숨으십시오. 아힌 님께서 방해 말고 꺼지라며 친히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자, 어서요.”
검을 든 채 알짱거려 봤자 아힌에게는 도리어 장해물일 뿐이었다.
“이브린 님, 아무리 그래도….”
“키에엑!”
덩치 큰 기사들이 옹기종기 모여들기 무섭게 현실감 없는 비명이 설원을 뒤흔들었다.
이브린은 질린 낯으로 설원 한복판에 선 마물을 응시했다.
잿빛 생물이 발을 디딜 때마다 쿵쿵대며 천지가 진동했다. 아힌보다 덩치가 족히 서너 배는 큰, 삼 두 괴물로 유명한 키메라였다.
사자, 염소, 용. 머리 세 개를 번갈아 본 이브린은 깊이 고찰했다.
타 영토로 출타를 나섰다가 귀가하는 길. 아힌은 편리한 인도를 두고 왜 굳이 눈 덮인 산을 꾸역꾸역 올랐을까.
심지어 이 설산이 키메라의 서식지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
이브린은 아힌의 검이 세 개의 머리 중, 용머리를 베는 순간 정답을 도출할 수 있었다.
키메라의 사자 머리는 남성의 정력에. 염소 머리는 고령자의 회춘에. 그리고 용 머리는… 임산부의 기력 회복에 효과가 높았다. 특히 갓 잡은 키메라일수록.
결국 절명한 키메라의 몸이 눈 바닥 쪽으로 기울었다. 번진 피가 서서히 눈밭을 검푸른 색으로 물들였다.
“기사 백 명이 달려들어도 못 잡는 키메라를 몇 합 만에 쓰러뜨리시다니, 역시 제 주군이십니다.”
언제 숨었냐는 듯 빛의 속도로 튀어 나간 이브린이 가슴에 손을 얹었다. 덕분에 기사들은 주인을 버린 채 바위 뒤에 숨은 꼴이 돼 버리고 말았다.
“비비한테 갈아탄 거 아니었어?”
스르릉, 검을 갈무리한 아힌은 용 머리를 질질 끌며 설원을 횡단했다.
이브린은 키메라를 쓰러뜨리고도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아힌의 로브를 곁눈질했다. 마물은 키메라가 아니라 눈앞의 이 흑표범일지도 몰랐다.
“그럴 리가요, 저를 무릎 꿇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마물, 아니, 아힌 님 한 분뿐입니다.”
“비비한테 꿇으라면 얼마든지 꿇겠다고 말하는 걸 분명히 들었는데. 무릎이 여러 개인가 봐?”
“예.”
무릎이 여러 개인 간신을 무시한 아힌은 제 몸통만 한 용머리를 기사들에게 넘겼다.
이브린은 장정 여럿이 힘겹게 받아 든 마물의 머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저, 아힌 님.”
“왜.”
“아무리 키메라가 임산부의 기력 회복에 좋다지만, 저걸 과연 비비 님께서 드실까요.”
먹는 건 고사하고 까무룩 실신이나 안 하면 다행일 지경이었다.
아. 뒤늦게 가장 큰 문제를 인지한 탓에 아힌의 고운 미간이 일그러졌다.
조금만 생각하면 금방 알 수 있는 사실을 왜 키메라를 해치울 때까지도 깨닫지 못했을까. 정말 모를 일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아힌은 퍽 멍청한 얼굴로 이브린을 돌아봤다.
“-이브린, 어떡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해, 이 미치광이가.
이브린은 목구멍을 간질이는 저속한 욕을 간신히 삼켰다.
용머리를 중간에 두고 두런두런 토론하기 시작한 아힌과 기사들을 등진 이브린은 설원을 멍하니 바라봤다.
의무실 소동이 일어난 지 한 달이 지난 현재. 아힌의 모든 사고 회로는 비비로 시작하여 비비로 귀결됐다.
즉, 매사에 여유롭던 면모는 벗어던진 채 토끼병 말기 환자처럼 굴고 있다는 의미였다.
* * *
따스한 겨울, 정오의 햇빛이 아힌의 집무실을 환하게 밝혔다. 사각거리는 깃펜 소리가 고요한 집무실을 채웠다.
단단한 가슴팍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던 비비는 반짝 눈을 떴다.
째깍, 째깍.
탁상시계의 시침이 정확히 한 시를 가리킨 동시에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드디어 아힌에게서 벗어날 시간이었다.
“약속한 한 시야. 나 이제 갈래.”
“그럴 리가, 아직 열두 시인데?”
제 품속에서 벗어나려는 비비를 왼팔로 가둔 아힌이 탁상시계를 당겼다. 끼리릭, 강제로 돌아간 시침이 다시 열두 시를 가리켰다.
비비는 부정행위를 저지르고도 뻔뻔한 그를 기가 찬 눈으로 올려다봤다.
“나를 들고 일하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데?”
“눈에 안 보이면 불안해서 일이 손에 안 잡히거든. 그리고 네 업무 중 반절을 내가 가져왔으니까 이 정도는 같이 있어 줄 수 있잖아.”
“그러니까 그건 내가 마저 처리하겠대도.”
“무리는 금물이라던 주치의의 경고가 기억 안 나나 봐?”
대꾸할수록 아힌의 언변에 휘말려 버린 비비가 입을 꾹 여물었다.
보좌관과 고용인들을 전부 내보내고, 이렇게 아힌의 품에서 약 두 시간 동안 낮잠을 청하는 생활이 벌써 보름 이상 이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오히려 일의 능률은 올라갔다는 사실이 어이가 없었다.
또 하나 기가 막힌 점이라면, 회임한 비비는 멀쩡한 것에 비해 아힌이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따금씩 새하얘진 낯빛으로 입을 가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정말이지 무어라 정의를 내리기 어려운 맹수였다.
혹시 제가 집무실을 나가 버릴까 눈치 보는 아힌을 밀칠 수도 없고.
그 정도로 냉정하진 못한 비비가 신경질적으로 아힌의 가슴께에 머리를 묻었다.
“…딱 한 시간만이야.”
“좋아.”
그제야 굳어 있던 아힌의 입매가 나긋나긋하게 말려 올라갔다. 비비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춘 그가 다시 깃펜을 잡았다.
나른한 오후, 품속에서 사부작거리는 비비의 존재가 놀라울 만큼 안정감을 가져다줬다.
과거의 자신은 무슨 정신으로 새끼 토끼가 사람으로 변했을 때 베어 버리면 된다는 생각을 했던 걸까.
어떻게 감히 나 따위가 비비를….
오싹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던 아힌은 졸다가 제 가슴팍에 머리를 쿵 박은 비비를 내려다봤다.
“아윽….”
“아파?”
기민하게 반응한 아힌이 그녀의 관자놀이를 살살 문질렀다. 전부 다 쓸데없이 단단한 제 몸뚱이 탓이었다.
일반인마저 숟가락 정도는 쉽게 휘는 맹수계 수인에 비해 초식계 수인은 왜 이렇게 약한 건지.
이전에는 흔적이 쉽게 남는 비비의 여린 피부가 몹시 흡족했는데, 현재는 그러한 모든 것들이 불안 요소로 다가왔다.
한순간에 걷잡을 수 없이 초조해진 아힌이 낮게 깔린 음성으로 물었다.
“비비, 대체 왜 이렇게 태어난 건데? 꼭 토끼여야 했어?”
“아니, 뜬금없이 출생은 왜 들먹여? 이럴 거면 나 갈래.”
“자꾸 그런 협박으로 내 섬세한 마음에 상처를 입히지 마.”
이 방정맞은 맹수는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걸까.
잠이 몽땅 달아난 비비가 아힌의 입을 찰싹 갈겼다. 정상의 궤도를 한참 벗어난 대화를 끝내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초점을 되찾은 아힌이 비비를 꼭 껴안았다.
“차라리 족제비나 너구리였으면 지금보다는 튼튼했을 텐데.”
또라이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간신히 유추한 비비가 한숨을 내쉬었다.
초식계 수인의 몸으로 맹수의 아이를 배었으니, 혹시 모를 난산을 우려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내가 가진 치유계 페로몬이 그렇게 두진 않을 거라, 굳이 사서 걱정할 필요까진 없는데. 그러한 타박을 삼킨 비비가 아힌의 손을 당겨 배에 얹었다.
“있잖아. 토끼일까, 흑표범일까?”
노골적인 말 돌리기였지만 넘어간 아힌이 원을 그리듯 비비의 배를 쓰다듬었다. 비비가 새끼 토끼일 당시 콧잔등을 만지던 것만큼이나 신중한 손길이었다.
“글쎄. 어느 쪽이든 세상을 줄 거야.”
그런 거창한 대답을 바란 것까진 아니었던 비비가 입을 뻐끔뻐끔 여닫았다.
아힌의 입가에 자리한 비틀린 미소 때문에 농담으로 치부하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식은땀을 훔친 그녀가 더듬거리며 덧붙였다.
“지, 지키겠다는 표현 정도면 딱 충분해… 합니다.”
“그래요?”
배에서 옮겨 간 아힌의 손이 비비의 머리카락 한 줌을 매만졌다. 이내 나른하게 웃은 그가 하얀 머리카락에 입술을 맞췄다.
“그럼 지켜 줄게.”
“…….”
“네가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별것 아닌 말임에도 불구하고 심장박동이 빨라진 비비는 아힌을 빤히 올려다봤다. 창가로 스민 햇살이 기다란 속눈썹에 걸렸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포근하던 공기가 뭉근하게 달아올랐다.
이윽고 두 사람의 입술이 자연스레 맞물렸다.
아힌은 제 다리 위에 앉은 비비의 허벅지를 느릿하게 쓸었다. 잡아먹듯 파고드는 것에 비해 솜털을 만지는 양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입술이 떨어진 건 비비의 숨이 가파르게 오르내릴 즈음이었다.
더 이상은 안 된다는 듯, 얌체처럼 시선을 피하는 그녀를 내려다보던 아힌이 둥글게 눈가를 휘었다.
하얀 피부와 대조되게 붉어진 눈가 하며, 흔들리는 보라색 눈동자, 새침하게 다문 입술.
그 모든 게 매일같이 아힌의 속을 들끓게 하다못해 뒤집어 놓았다. 뭘 어떻게 하면 성내거나 짜증 부리는 것조차 사랑스러울 수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랫배가 뻐근해진 그는 흘러내린 제 은발을 괜히 쓸어 넘겼다. 기겁하며 도망갈 토끼를 고려하여, 온몸에 울혈을 만들고 싶은 충동을 참기 위한 행위였다.
독점욕과 정욕으로 점철된 눈동자를 외면한 비비가 곁눈질로 탁상시계를 확인했다.
열두 시에 맞춰 둔 분침이 어느덧 한 바퀴를 돌아 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세상에, 벌써 한 시네? 이제 진짜 가 볼게. 메이미가 기다릴 거야.”
“나도 같이….”
“아힌은 일해.”
매정하게 내친 비비가 후다닥 집무실 밖으로 달아났다.
날을 거듭할수록 짙어지는 아힌의 집착에 일일이 장단 맞춰 줄 순 없었다.
“하….”
홀로 남겨진 아힌은 곧 침음성을 흘리며 손에 얼굴을 묻었다.
오늘도 비비의 은밀한 취미 생활을 말리지 못했다.
한 달 전, 태교 담당 교사인 네르아 부인은 비비에게 태교에 도움이 될 만한 건전한 취미를 권유했다.
‘다치진 말아야 할 텐데.’
안절부절못하며 일어난 아힌이 창가로 딱 붙어 섰다. 비비가 있을 연무장이 한눈에 보이는 위치였다.
미술, 음악, 독서, 자수, 필사 등등. 차고 넘치는 안전한 취미 중, 비비가 선택한 취미는 다름 아닌 활쏘기였다.
* * *
“다리를 조금 더 벌리고, 허리를 곧게 펴십시오.”
메이미의 지시에 따라 자세를 바로잡은 내가 활시위를 당겼다.
취미로 활쏘기를 고른 건 순전히 내 의지를 벗어난 선택이었다. 거의 본능에 가까웠다.
도대체 뱃속에서 얼마나 어마어마한 아이가 자라고 있는 건지.
단 한 번도 무기를 만져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는데, 기사가 지니고 있던 활을 보는 순간 그것을 쥐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들었다.
연무장 중앙의 과녁을 주시하던 나는 다급히 활을 내렸다.
“메이미, 수풀에 아이가 있어!”
“예? 그럴 리가 없….”
부인하던 메이미가 빠른 속도로 표정을 굳혔다. 바스락거리는 움직임을 목도한 탓이었다.
“물러나십시오.”
혹시 몰라 단검을 꺼내 든 그녀가 기척을 죽인 채 수풀로 접근했다.
수풀과의 거리가 몹시 좁혀졌을 즈음, 분홍색 덩어리가 불쑥 솟아올랐다. 아이를 확인한 메이미는 긴장을 탁 풀며 단검을 앞치마 뒤로 집어넣었다.
“아인트 마니언츠 님이십니다.”
“마니언츠라면….”
“레오나 마니언츠 님의 적통이자 첫째 아들이시죠.”
설마 후계끼리 약혼을 도모하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했던 그 아이인가.
활을 내려 둔 나는 조심스레 아이의 앞으로 다가가 몸을 낮췄다. 끽해야 세 살 정도의 조그마한 아이였다.
‘에잉, 쯧. 에즈란 그놈의 증손주가 인간화를 치렀다더군. 이번에 사절로 올 때 데려온다는 걸 보면 분명 자랑할 속셈인 게야!’
어렴풋이 에즈란 님이 그레이스 저택에 방문할 거라며 짜증을 내던 할아버님이 떠올랐다.
과연. 마니언츠가의 혈통임을 증명하듯, 아이는 색소 옅은 분홍색 머리카락과 금안을 지니고 있었다.
특이점을 꼽자면 마니언츠 가문의 심볼과도 같은 곱슬머리가 아니라는 점과 어린아이임에도 불구하고 눈에 묘하게 초점이 없다는 점일까.
삶의 부질없음을 말하는 듯한 초연한 표정은 덤이었다.
“왜 이런 곳에 혼자 있니? 에즈란 님은 어디 가시고?”
말을 너무 편하게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지만, 개의치 않은 아이가 종알거렸다.
“에즈란 할아범이랑 릴리언 할아범이 길을 잃었져. 나랑 숨바꼭질하다가.”
“할아버님들이…?”
“하기 시른데 자꾸 놀자며 귀찮게 해서는, 아휴.”
할아버님들이 아니라 네가 길을 잃은 거겠지. 혀 짧은 발음을 용케 알아들은 나는 손을 내밀었다. 애타게 아이를 찾고 있을 할아버님들이 눈에 선했다.
“혹시 호위 기사는 없어?”
“걔네가 술래야.”
“…그럼 우리 같이 할아버님들을 찾으러 갈까?”
“시러, 너는 눈이 보라색이잖아. 난 토끼랑은 상정? 상종? 아무튼 그거 안 해.”
아이의 이유 모를 반감에 조금 침울해진 내가 눈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왜…?”
“우리 삼춘이가 기르는 토끼가 성질이 나빠. 아주 못됐어.”
“삼춘이?”
“룬 마니언츠. 알아?”
뭐라고 대답하려는 순간 멀리서 에즈란 님의 절절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인트, 얘야! 어서 나와다오!”
“할아범이다.”
눈에 띄게 밝아진 아이가 어설프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말은 저렇게 해도 낯선 장소에 홀로 있는 게 무서웠던 모양이었다.
차마 손도 못 댄 채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는 와중, 아장거리면서 열심히 걷던 아이가 짐짓 나를 돌아봤다.
“있짜나, 네 배에 페로몬 네 개가 있어.”
“뭐?”
무서운 이야기를 들은 듯한 공포에 휩싸인 내가 겨우 입술을 열었다.
“그런 걸 어떻게 알아? 노, 농담은.”
“눈에 보이는데. 믿기 시름 믿지 마.”
입술을 쭉 내민 아이는 다시금 에즈란 님의 음성이 들리는 방향으로 힘차게 발을 옮겼다.
‘한 명이 페로몬 네 개를 가졌단 거야, 아니면 태어날 아이가 여러 명이란 거야?’
믿기 어려웠지만, 어린아이의 허황된 주장으로 치부하기에는 아이의 신분과 혈통이 너무도 강력했다. 고유의 페로몬 능력일 가능성이 높았다.
“말도 안 돼….”
머릿속이 멍해진 나는 일순 다리에 힘이 풀리며 휘청거렸다.
속히 다가온 메이미의 부축을 받으며 정신을 차렸을 때, 아이의 뒷모습은 이미 점처럼 멀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 나는 거짓말처럼 쌍둥이를 출산했다. 각각 치유계 페로몬과 지배계 페로몬을 동시에 가진 쌍둥이를.
* * *
덜컹덜컹. 매서운 눈보라가 창문을 부술 듯이 흔들었다. 쨍하게 떠 있던 해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침대 앞에 의자를 끌고 와서 자리 잡은 아힌은 잠든 비비를 내려다봤다.
오늘 오전, 슈와 비온의 등쌀에 못 이겨 눈사람을 만든 비비는 오후가 되자마자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에취, 에취. 마른기침을 몇 번 반복하더니 열이 오르는 건 순식간이었다.
결국 몸져누워 끙끙 앓다가 밤이 되어서야 겨우 잠든 게 방금 전. 그 신통한 치유계 페로몬마저 몸살에는 별반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걱정스레 응시하던 아힌은 뒤늦게 비비가 덮은 이불에 생긴 커다란 언덕을 발견했다.
확, 이불을 들추자마자 숨어 있던 애쉬가 드러났다.
“애쉬, 좋게 말할 때 내려와.”
옛 주인 나부랭이의 위협 따위에 굴하지 않은 애쉬가 크르릉 낮게 울었다.
그래, 비비의 몸이라도 덥히는 편이 낫겠지. 찰거머리를 떨치는 것을 일찌감치 포기한 아힌이 다시 이불을 정돈했다.
한숨 돌린 그는 옆방에 잠들어 있을 쌍둥이를 떠올렸다. 비비를 간호하느라 매일 밤 나누던 굿나잇 키스를 잊은 참이었다.
쌍둥이가 태어난 지도 어느덧 삼 년. 그 짧은 시간 동안 쌍둥이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몸으로 그레이스 저택을 함락시켰다.
그들은 앞발로 아힌을 다스렸고, 발렌스의 애정을 독식하였으며, 애정 표현에 박한 릴리언을 사랑만 노래하는 사랑꾼으로 만들었다.
하다못해 이브린과 퀸마저 우르르 까꿍 소리를 내다가 아힌이 나타나면 아닌 척 정색을 반복하기 일쑤였다.
동물인 지금도 이런데, 인간화를 치른 후에는 지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게 눈에 훤히 보였다.
으응, 비비의 뒤척임으로 인해 상념에서 깨어난 아힌이 미간을 구겼다.
“왜 아프고 그래.”
달래듯 비비를 토닥거리는 찰나, 문밖에서 들리는 이브린의 다급한 외침이 신경을 거슬렀다.
“아힌 님, 나와 보셔야 할 듯합니다.”
비비가 잠들었으니 숨소리도 내지 말라고 경고했건만. 조용히 문을 연 아힌은 이브린의 목에 검을 겨눈 채 입 모양으로 말했다.
“어디부터 베어 줄까.”
목숨의 위협을 느낀 이브린은 옆방을 필사적으로 가리키며 입을 뻐끔거렸다.
아기님, 수인열, 시작.
세 단어의 조합만으로도 의미를 깨달은 아힌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약에 취해 잠든 비비와 옆방을 초조하게 번갈아 본 그는 이미 대기 중인 메이미에게 눈짓했다.
“비비가 깨어나면 곧장 보고하도록.”
묵례하는 메이미를 뒤로한 아힌은 뒤이어 침대 위의 애쉬를 돌아봤다.
“잘 지켜.”
지시하기 무섭게 애쉬가 컹, 울음소리로 회답했다. 알아들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아힌은 차림새를 바로 하는 것도 잊은 채 뛰듯이 옆방으로 이동했다.
수인열. 전조 없이 시작된 열병은 아이들의 인간화가 목전이라는 의미였다.
* * *
수인은 인간과 달리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존재한다.
태어날 당시에는 인간의 외형을 갖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동물의 형태로 바뀌게 된다.
토끼 수인이라면 새끼 토끼로, 흑표범 수인이라면 새끼 흑표범으로.
그 후, 수인열을 거치면서 온전한 인간의 외형을 갖추게 되고, 본모습 또한 새끼 토끼에서 성수(成獸)로 탈바꿈하는 게 정석적인 절차였다.
수인이 온전한 인간으로 변화하는 일. 그 과정을 시작한 두 아이 앞에 선 아힌이 제자리를 오갔다.
침대 위, 각자의 요람에 누운 새끼 토끼와 새끼 흑표범이 색색 앓는 소리를 냈다. 제아무리 쌍둥이라지만 수인열을 동시에 치르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쌍둥이는 올해 세 살로, 인간화가 그리 늦어진 건 아니라는 점이었다.
“우리 토끼가 겨우 잠들었다는 보고를 받은 게 방금 전이건만, 야밤에 이게 다 무슨 일인 게냐!”
소식을 접한 릴리언과 발렌스가 흐트러진 모습으로 들어섰다. 창밖에서는 퀸이 부리로 창문을 쪼아 대며 난리도 아니었다.
급한 대로 숄만 두르고 온 발렌스는 조심스레 요람을 들여다봤다.
“이왕이면 날 따스할 때 겪으면 좋을 것을. 하필….”
조롱이떡 같은 몸이 숨을 쉴 때마다 위로 솟았다가 꺼지기를 반복했다. 특히 첫째이자 딸인 새끼 토끼는 먼 과거, 목숨이 위태로웠던 비비가 겹쳐 보였다.
괜히 불안해진 발렌스가 문을 흘끔거리며 아힌에게 물었다.
“아가는, 비비는 괜찮은 거니?”
“열이 완전히 내린 건 아니라, 오가면서 확인할 예정입니다.”
수인이라면 누구나 다 겪는 과정인데 왜 이리 조마조마한지.
오랜만에 같은 심정이 된 발렌스와 아힌이 시선을 교환했다. 평소보다 길고 긴 밤이 될 듯했다.
* * *
새벽이 밝으며 하늘이 푸르스름한 색감을 띠었다.
잘 버티던 발렌스의 고개가 끝내 약간 기울어진 시각.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힌이 핏발 선 눈으로 요람을 주시했다. 그는 시선을 떼지 않으며 대기 중인 주치의에게 물었다.
“비비는.”
“아직 주무시는 중입니다. 다행히 열은 내렸으니 안정을 취하시는 일만 남았습니다.”
안도의 숨을 머금던 아힌은 대뜸 피가 몰릴 만큼 주먹을 세게 쥐었다. 두 개의 요람 중 새끼 토끼가 있는 요람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아힌 님…?”
잠에서 깬 이브린이 눈을 끔벅이다 말고 벌떡 일어났다.
드디어. 주치의는 아힌의 눈짓에 따라 아이에게 덮어 줄 감색 모포를 준비했다.
아힌과 이브린은 섣불리 접근하지 못한 채 밖으로 튀어나올 만큼 뛰어 대는 심장을 달랬다. 오래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박동이 빨라졌다.
화아악, 이윽고 존재를 알리듯 빛이 크게 범람했다. 화한 빛 속에서 손, 발, 머리카락이 언뜻언뜻 보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빛이 사그라들며 인간의 외형을 갖춘 여자아이가 드러났다.
“인간화를 축하드립니다, 아기님.”
속히 접근한 주치의는 추위에 솜털이 곤두선 아이의 몸을 모포로 감쌌다.
그때까지도 아힌과 이브린은 굳은 채 어떠한 반응조차 보이지 못했다.
아힌의 은발과 비비의 보라색 눈동자, 그리고 비비를 빼닮은 유순한 외양이 그림처럼 아힌의 눈에 박혔다. 유독 투명한 피부마저 비비와 똑 닮은 꼴이었다.
“…이브린.”
올망졸망한 눈망울에 시선을 빼앗긴 그는 한참 만에 간신히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염소에 빙의라도 한 양 무참히 떨리고 있었다.
“너무 기쁘면 벽을 박살 내고 싶은 충동이 드나 본데. 내가 제정신인가?”
“저 또한 경박스럽게 벽을 부수고 싶은 걸 보면 제정신인 듯합니다.”
제정신의 범주를 벗어난 두 사람이 서로를 진단해 봤자 제대로 된 결과가 나올 리 없었다.
목석처럼 선 한심한 두 남자를 빤히 응시하던 여자아이가 곧 입을 오물거렸다.
“압빠?”
고작 어설픈 호칭 하나에도 현기증을 느낀 아힌이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제 두 눈을 찌르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운 존재였다.
“이브린, 들었어? 이제부터 내 이름은 압빠야.”
“기록하겠습니다.”
호들갑에도 아랑곳 않은 아이는 모포를 잡으며 엉거주춤 일어섰다. 갓 인간화를 치렀다기에는 놀라울 만큼 안정적인 걸음마와 말솜씨였다.
뒤뚱거리며 바로 서는 것에 성공한 아이는 돌연 엄한 표정으로 선언했다.
“이짜나, 나 토끼일 때 계속 하고 시픈 말이 이써써. 근데 말을 못 해서 못 해써.”
“응, 말해 봐, 딸.”
인간화를 치르자마자 자신의 의견을 주장할 줄도 알고. 누구 딸인지 영민하기 짝이 없는 아이를 마주한 아힌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용기를 얻은 아이는 발을 통 구르며 본인의 불만을 토로했다.
“내가 아직 이름이 없짜나.”
“…아, 그래. 그렇지.”
아힌은 뒤늦게 커다란 문제점 한 가지를 상기했다.
기실, 쌍둥이는 인간화를 치른 현재까지도 이름이 정해지지 않았다. 매달 이름에 대한 논의가 불거졌지만 늘 의견이 좁혀지지 못한 채 무산된 탓이었다.
쌍둥이는 그레이스 일족의 경사이니 뭐든지 신중해야 한다는 장로회의 간섭도 한몫했고.
간신히 두 개의 후보까지 간추렸으나, 확정되지 못한 채 아기님이란 호칭으로 불리며 인간화를 겪게 된 게 사건의 전말이었다.
“그-”
어울리지 않게 말끝을 흐린 아힌이 난감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제니아 그레이스와 안리 그레이스.
두 가지 후보 중 하나를 비비와 상의 없이 독단적으로 정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적당한 말을 고르는 와중, 아이가 먼저 선수를 쳤다.
“내가 건초를 머그면서 매일매일 생각했는데, 제니아가 조아.”
“…뭐라고?”
“제니아로 할래.”
비뚜름하게 웃는 표정에서 아힌의 환영을 본 이브린이 눈을 비볐다.
외양은 딱 비비의 어릴 적 모습 같은데 아힌을 떠올려 버리다니. 현실을 부정한 그는 막 제니아가 된 아이가 듣지 못하게끔 속삭였다.
“…외람되지만 본인의 이름을 스스로 정하는 비범한 아기는 난생처음 봅니다.”
“나도 처음 봐.”
여전히 제자리에 박힌 상태인 두 사람은 멍하니 제니아를 바라봤다.
그사이 뒤뚱뒤뚱 움직인 제니아는 예고도 없이 요람을 흔들었다. 쌍둥이 중 둘째이자, 아들인 새끼 흑표범이 자리한 요람이었다.
“얘는 왜 이러케 느려? 야, 이제르. 빨리 일어나, 압빠랑 이부링이 기다리자나.”
둘째를 아주 자연스럽게 이제르라고 칭한 제니아가 열심히 요람을 흔들었다.
제니아는 둘째의 이름 후보인 칸다 그레이스와 이제르 그레이스 중, 이제르 그레이스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된 아힌이 어렵사리 입을 뗐다.
“이부링, 둘째의 이름도 결정된 듯한데.”
“개인적으로는 저도 이제르란 이름을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부링이 아니라 이브린입니다.”
요람을 흔드는 행위를 말릴 새도 없이 부지런히 이동한 제니아는 침대 왼편에 도착했다.
자그마한 발이 멈춘 곳은 침대에 턱을 괸 채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흑표범들의 앞이었다.
“슈, 비온.”
한편, 슈와 비온은 약간의 혼란에 휩싸인 상태였다.
주인인 비비가 어여삐 여기던 새끼 토끼가 사라진 후, 그 자리에 작은 비비가 나타났다. 풍기는 냄새 또한 비비와 퍽 비슷했다.
비비의 종자인 아힌과 이브린이 꼼짝 못 하는 걸 보면 센 녀석인 건 확실한데, 바로 굴종하기에는 확신이 없었다.
늘 그들에게 현명한 지식을 알려 주는 바라는 현재 비비의 시중을 드는 중이었기에 조언을 구하기도 힘들었다.
비교적 호승심이 강한 슈는 턱을 치켜들며 거들먹거렸다.
쳐다보면 어쩔 건데, 그래 봤자 우리보다 센 건 비비밖에 없어.
그러한 뜻을 내포한 움직임을 본 비온도 누이를 따라 으르렁 포효했다.
“어어?”
깝죽거리는 검은 맹수들을 마주한 제니아가 한쪽 눈썹을 들었다. 보라색 눈동자에 자리 잡은 감정은 아니꼬움과 오만이었다.
“안자.”
철퍼덕, 의도에 반한 슈와 비온의 엉덩이가 바닥과 맞닿았다.
“이러나.”
또다시 말을 듣지 않은 엉덩이가 벌떡 솟아올랐다.
안자, 이러나. 안자, 이러나.
명령에 따라 슈와 비온이 앉았다 일어서는 행위를 반복했다. 두 흑표범이 끙끙거리며 완강히 거부했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엉덩이가 말을 듣지 않았다.
그 비현실적인 장면을 가만히 지켜보던 아힌이 헛웃음을 쳤다.
‘지배계 페로몬.’
제니아가 사용하고 있는 힘은 두말할 것도 없이 아힌의 지배계 페로몬이었다.
고작 세 살 난 아이가, 갓 인간화를 치르자마자. 본능적으로 힘을 깨닫고 완벽하게 페로몬을 다스리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거만하고 여유로운 낯빛으로.
“딱 아힌 네 어릴 적을 보는 듯하구나.”
“어찌 저리 빼닮았을꼬…. 아힌 네 녀석도 저런 식으로 이 할아비를 조종하곤 했지.”
그새 깨어난 발렌스와 릴리언은 멀거니 제니아가 하는 행태를 지켜봤다.
두 사람의 증언을 들은 아힌은 그제야 이 난감한 기분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의 눈앞에 “수신님, 태어날 아이는 꼭 저를 닮게 해 주세요. 아힌만은 절대 안 돼요.” 하고 배가 동그랗게 불러서도 밤마다 몰래 빌던 비비가 아른거렸다.
기도대로 비비를 닮긴 닮았는데, 속 알맹이는 아힌의 판박이라니. 벌써부터 비비의 절규가 귓가에 메아리치는듯했다.
안자, 이러나, 엎드려.
추가된 명령이 굳은 어른들이 자리한 침실에 울려 퍼졌다.
* * *
어느덧 그레이스 저택을 따스한 봄이 감쌌다.
쌍둥이가 인간화를 치른 이후, 아힌의 집무실은 항상 방문객들로 북적거렸다.
쌍둥이는 물론이며 릴리언, 발렌스, 그리고 훌륭한 육아 도우미로 거듭난 퀸까지.
그들의 집결지는 늘 아힌의 집무실이었다. 아힌이 좋아서라기보다는 괜히 비비의 집무실을 찾아가 방해하면 안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올해 여섯 살이 된 둘째, 이제르는 소파에 앉은 퀸의 물색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작은 손가락 사이사이로 결 좋은 머리카락이 사르륵 빠져나갔다.
“삼촌, 너무 예쁘다.”
수줍게 말한 이제르가 손거울을 쓱 내밀었다. 손거울 속의 퀸은 날카로운 눈매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주 앙증맞은 양 갈래를 하고 있었다.
고사리 같은 손끝에서 탄생한 머리 모양은 극악무도하기 짝이 없었다.
“큭.”
작은 소리에도 기민하게 반응한 퀸이 홱 고개를 돌렸다.
예상대로 집무 책상에 얼굴을 박은 아힌이 손에 쥔 깃펜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어젯밤에 저 일을 당할 땐 끔찍했는데, 자신이 아닌 남이 당하니 이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욱여넣은 그가 침착히 말했다.
“어제 아빠 머리를 묶어 준 것보다 훨씬 잘했는데? 퀸 삼촌이 엄청 좋아하겠다.”
사탕발림에 넘어간 이제르는 한껏 기대 어린 눈으로 퀸을 올려다봤다.
당장이라도 머리를 풀어헤치고픈 충동을 느끼던 퀸이 흠칫 떨었다. 호수처럼 맑은 이제르의 붉은색 눈동자를 감히 내칠 수가 없었다.
이제르는 비비를 닮은 백발만 제외하면 아힌의 어린 시절을 가져다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어린 시절의 아힌은 입만 다문다면 천사가 따로 없을 정도로 선한 외모였다.
‘아무리 그래도….’
도저히 이 머리 모양만은 수긍할 수 없다고 생각하던 퀸은 등을 찌르는 따가운 살기를 느꼈다.
행여나 험한 말이라도 하면 네 딸기밭을 갈아 버리겠다는 아힌의 눈빛이었다.
두 부자의 눈빛 공격에 패배한 퀸이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귀 위로 묶인 물빛 머리카락이 달랑달랑 흔들렸다.
“…이런 예쁜 머리는 처음이군.”
“정말?”
봄꽃이 만개하듯 표정이 밝아진 이제르가 양손을 꼭 모았다. 다음 순서는 리본이었다.
그 한심한 광경을 바라보던 제니아는 문득 이브린의 책상 한편에 산처럼 쌓인 고급스러운 봉투에 시선이 닿았다.
“구혼서?”
아차. 불태우는 것을 잊은 이브린이 황급히 서랍 속으로 편지 더미를 집어넣었다.
쌍둥이는 고작 여섯 살임에도 불구하고 구혼서가 쏟아지고 있었다. 아직은 나이가 나이이다 보니 시작점은 약혼이었지만, 실상은 구혼서와 거의 다를 게 없었다.
나중에 죽인다. 이브린을 지그시 노려봐 준 아힌은 제니아를 향해 생긋 웃어 보였다.
아이가 조금이라도 약혼에 관심을 보일까 등으로는 식은땀이 흐르는 상태였다.
“별거 아니야, 제나.”
그는 애써 나긋한 음성으로 애칭을 부르며 제니아의 주의를 환기했다.
“별거 아닌데 저렇게 숨겨?”
총총거리며 이동한 제니아가 드르륵, 다시금 이브린의 서랍을 열어젖혔다. 감히 막지도 못한 이브린이 고개만 붕붕 저어 댔다.
“제 비밀 일기입니다.”
“어디 보자… 비밀 일기는 무슨, 구혼서 맞네.”
정갈한 글씨체를 읽어 내린 제니아는 곧 흥미를 잃으며 구혼서를 제자리에 뒀다.
“나는 별로야, 약혼 뭐 그런 거.”
“응, 아빠도 별로라고 생각해.”
“맞아. 저번에 들었는데, 남자는 많이 만나 봐야 하는 거래.”
뭘 많이 만나?
생글생글 웃고 있던 아힌의 얼굴이 한순간에 형편없이 무너졌다.
스멀스멀 흘러나온 살기 어린 기운이 적막해진 집무실을 가득 채웠다. 낯빛이 까매진 아힌과 퀸, 그리고 이브린이 거의 동시에 왈칵 입을 열었다.
“도대체 어떤 미친 새끼가,”
“누가 그딴 개소리를,”
“지하 감옥에 처넣을,”
“아힌 님, 퀸 님, 이브린 님.”
손으로 제니아의 귀를 재빨리 덮은 보좌관이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다행히 이제르의 귀도 마침 가까이 있던 다른 보좌관의 손에 막힌 상태였다.
그러나 제니아의 말을 정확히 들어 버린 이제르는 눈물을 글썽글썽 매달았다.
“누야, 그게 뭐야…. 나랑 평생 살겠다며?”
“그래, 제나. 아빠랑 이제르랑 평생 살기로 했잖아.”
“아빠, 이제르. 원래 토끼의 마음이란 게 시도 때도 없이 바뀌는 거래. 그러니까 슬슬 각자 갈 길 가는 게 좋을 듯해.”
도대체 누가 저딴 걸 가르친 건지. 아힌과 퀸, 이브린은 제니아의 말이 이어질수록 처참함에 치를 떨었다.
만일 릴리언이 있었다면 괴성을 지르며 용의자를 색출했을 게 눈에 훤했다.
목까지 차오른 저속한 욕지거리를 간신히 삼킨 아힌이 말을 골랐다.
“어떤… 어떤 이상한 친구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을까?”
언어 순화에 부단히 노력한 보람이 있듯, 웃음기 섞인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보좌관들은 눈이 전혀 웃고 있지 않은 아힌에게서 최대한 시선을 돌렸다. 이상한 친구의 최후를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제니아는 흥미로운 물건이 많은 이브린의 책상을 뒤적거리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흠. 누군지 알려 주면 혼내려고 그러지?”
“그럴 리가. 아빠가 누구 혼내는 거 봤어?”
쌍둥이 앞에서만은 다정하고 자애로우며 깜찍한 아빠를 철저히 연기해 온 아힌이 자신만만하게 호언했다.
“하긴, 어차피 알아도 아빠가 못 혼내는 사람이야.”
이브린의 서랍에서 맹수 퇴치제를 찾아낸 제니아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
치이익- 맹수 퇴치제를 정통으로 맞아 버린 이브린이 콜록거리며 주저앉았다.
“어머니가 그랬거든.”
드디어 정답을 알아낸 아힌은 발밑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감각을 느꼈다.
제니아가 꼬박꼬박 어머니라는 존칭을 쓰며 따르는 존재는 세상에 단 한 사람뿐.
이상한 친구의 정체는 비비 그레이스 외에는 있을 수 없었다.
* * *
불길한 예감이 든다.
서류에 서명을 하던 나는 번쩍 고개를 치켜들었다. 위기를 감지하는 동물적 감각이 칼날처럼 날아와 내 몸을 관통했다.
고개를 들자마자 시선이 마주친 애쉬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협탁 위의 과일 바구니를 훔치는 중이었던 탓이었다.
타닥, 쏜살같이 질주한 애쉬가 순식간에 집무실 문 너머로 도주했다. 거칠게 닫히는 문을 바라보던 나는 기묘한 오한에 몸을 떨었다.
“…앨런, 창문을 전부 잠그자. 지금 당장.”
“꽃가루 때문이죠? 그러니까 집무실을 조금 더 높은 층으로 하시라니까. 왜 굳이 일 층을 고집해요?”
몇 년 사이 꽤나 가까워진 앨런이 조잘조잘 잔소리를 이어 갔다. 물론 손은 착실하게 창문 고리를 당기고 있었다.
이상하게 불안이 가시지 않은 나는 오소소 소름이 돋은 팔뚝을 문질렀다. 온몸의 신경이 도망가라고 외치고 있었다.
근 몇 년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마치 이 저택에 처음 온 당시, 모든 감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때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위험해.’
이유는 아직 모르지만, 자리부터 피하고 보기로 결심한 나는 벌떡 일어나 문고리를 잡았다.
“앨런, 집무실을 왜 일 층으로 고집했냐고 물었지?”
“예? 아, 그렇죠.”
창문을 전부 잠근 후 커튼까지 치던 앨런이 어리둥절하게 돌아봤다.
“어떤 문제가 터지든 일 층이 도망치기에 가장 유리해서야.”
진지하게 답한 나는 힘차게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이미 바로 앞에 손님이 와 계셨기에.
“비비, 얘기 좀 하지.”
사르르 휘어지는 아힌의 눈매가 오늘따라 유독 무해했다.
그럼에도 전신이 전율할 정도의 공포를 느낀 내가 천천히 문을 닫았다. 절대 무해한 미소 따위가 아닌, 세상에서 가장 유해한 미소였다.
“문은 왜 다시 닫아요? 어어, 잠그긴 또 왜 잠그세요?”
앨런의 황당한 음성이 등을 찔렀다. 나는 그새 주르륵 흘러내린 식은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읊조렸다.
“뭔가 있어, 뭔가가….”
“뭔가가 아니라 아힌 님께서 서 계셨… 아니, 잘 잠근 창문은 갑자기 왜 여시는, 비비 님!”
숨겨 둔 사다리를 꺼낸 나는 망설임 없이 창문을 넘었다.
가까스로 화단에 발을 디딘 후 달음박질을 치기까지는 채 일 분도 걸리지 않았다.
송곳니를 드러낸 맹수에게서 살아남는 방법은 도주밖에 없었다.
* * *
대낮에 뜬금없이 술래잡기를 하게 된 나는 심장이 터질 만큼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런 나를 손쉽게 따라잡은 아힌이 숨결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음성으로 물었다.
“비비, 왜 도망쳐?”
“그야 네가 쫓아오니까!”
“도망치니까 따라가는 거지. 계속 뛸 거야?”
나란히 달리는 우스운 꼴이 되었음을 인지한 내가 급격히 발에 제동을 가했다. 더 이상 달아나 봤자 힘만 뺄 뿐이었다.
휙, 아힌의 손목을 붙든 나는 가까이 보이는 별관의 서재로 들어섰다. 본관과는 거리가 있는, 고서적을 보관해 두는 서재라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쌕쌕 숨을 고른 내가 눈에 힘주며 아힌을 돌아봤다.
“하, 할 얘기가 뭔데?”
“그런 간단한 질문을 못 해서 도망쳤을 리는 없고. 찔리는 게 있나 봐?”
당당함 하면 이 비비 님이신데 찔리는 게 있을 리가 없었다.
다만 오랜 시간 아힌을 보아 온 바, 아까와 같은 표정을 지을 때면 늘 내가 무언가 잘못한 게 있을 때였기에.
집요한 추궁을 피하기 위해 발이 본능적으로 달아났을 뿐이었다.
“뭐, 대체 왜 그러는 건데.”
“….”
“혹시 내가 뭔가 잘못한 거라도 있… 있나요?”
진실을 마주할 수 있게끔 마음을 다스린 내가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그 작은 용기는 찰칵, 아힌이 서재 입구를 잠그는 동시에 재가 되어 사라졌다.
“바람둥이 토끼.”
아힌의 붉은 눈동자가 서슬 퍼렇게 빛났다.
뚜벅, 뚜벅. 아힌이 다가올수록 주춤주춤 물러났지만 거리는 점점 좁혀져만 갔다.
몇 년 만에 들어 보는 바람둥이란 단어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입을 가로막은 나는 열심히 눈을 굴리며 왜 이런 추궁을 당하는지에 대해 고뇌했다.
내가 설마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냈던가. 그저께 귀족들이랑 와인을 즐겼을 때 입을 잘못 놀리기라도 했나. 오만가지 가설을 그리던 나는 횡설수설 실토하기 시작했다.
“그저께 귀부인들과의 티타임에서 봤던 리아트 가문 호위 기사의 머리카락이 아힌처럼 은발이라… 아름답다고 잠깐 생각했을 뿐이야. 그 외에는 정말 없어!”
“다른 남자를 아름답다고 생각했었어?”
“…그거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야?”
“응. 죄가 하나 더 늘었네.”
제 발로 불구덩이에 뛰어들고 말았구나. 잘못 짚었음을 깨달은 나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조차 아니라면 아힌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러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
계속해서 뒤로 물러나던 나는 일순 정체 모를 물건에 걸려 몸이 뒤로 기울었다.
“비비!”
표정이 변한 그가 손을 뻗는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느리게 보였다.
순식간에 내 허리를 붙든 아힌은 제 등이 바닥 쪽으로 가게끔 몸을 휙 틀었다. 풀썩, 엎어진 곳은 바닥이 아닌 폭신한 벨벳 소파였다.
너무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라, 아힌의 품에 갇혀 눈만 끔벅이던 내가 다급히 상체를 세웠다.
“아힌, 괜찮아? 안 다쳤어?”
행여나 긁힌 곳이라도 있을까 싶어 매만졌지만 상처 하나 없이 멀끔했다. 그럼에도 아힌은 누운 상태로 움직이지 않은 채 팔로 눈가를 덮었다.
“거봐, 비비는 이런 식으로 내 몸만 탐하고.”
“뭐, 뭘 탐해?”
이 맹수가 오늘 머리라도 세게 부딪혔나. 정말 변태 토끼라도 된 듯한 기분을 느낀 내가 아힌의 몸에서 손을 확 떼어 냈다.
만세 자세가 된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가늘게 떴다.
“…너 지금 나 놀리고 싶어서 괜히 누명 씌우는 거지.”
지금까지처럼 금방 수긍하며 키득거릴 거란 추측과 달리, 아힌은 별다른 미동이 없었다.
오히려 예고 없이 나를 당겨 다시 품에 가둬 버렸다. 덕분에 단단한 가슴팍에 코를 쿵 박은 내가 작게 신음했다.
“아윽….”
“왜 그런 말을 해?”
속삭이듯 묻는 아힌의 목소리에서 장난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결국 품에서 벗어나는 걸 포기한 나는 숨쉬기 편하게끔 비스듬히 고개를 틀었다.
“무슨 말?”
“남자는 많이 만날수록 좋다고. 왜 그런 말을 했어.”
내가 언제 그랬더라. 골똘히 머리를 굴리고 있자니 퍼뜩 어떤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변명할 새도 없이 아힌의 다음 말이 튀어나왔다.
“나 하나로는 안 돼?”
떨리지는 않지만 왠지 금방이라도 울 듯 낮게 잠긴 물음이었다.
“그런 거 절대 아니야!”
몸을 옥죄는 팔을 뿌리치며 허둥지둥 일어난 내가 아힌의 양 뺨을 붙들었다.
얼굴을 고정할 심산이었지만 너무 힘을 줬는지, 내 손에 뺨이 짜부라진 그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알잖아, 제나가 누굴 닮았는지는 몰라도 예쁜 이성을 좋아하는 거.”
“그 누구는 어느 바람둥이겠지.”
“토, 토 달지 말고. 아무튼. 며칠 전에 이스티나 가문의 영식이 저택에 방문했잖아. 그때 그 아이랑 헤어지는 게 싫었는지, 약혼할 거라고 갑자기 드러눕기에… 대충 둘러댄다는 게 그만.”
나중에 다른 방식으로 잘 타일렀지만, 제니아는 둘러댄 말에 이미 깊은 감명을 받았는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대신에 제나가 깔끔하게 마음을 접었잖아. 아직 우리 눈에는 아기인데 약혼이 다 무슨 말이야, 그치?”
“…….”
“아힌?”
살살 어르고 타일러도 아힌은 묵묵부답이었다. 얼굴을 쳐다보지 않고 고개를 팽 돌린 꼴이 쌍둥이랑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대답 안 할 거면 나 갈래.”
가자미눈으로 내려다본 나는 몸을 뒤척이며 움직이는 시늉을 했다.
“진짜 간다?”
아힌의 몸에서 내려가려는 찰나 미지의 힘이 내 몸을 끌어당겼다. 익숙한 이 기운은 지배계 페로몬이 틀림없었다.
“악!”
다시 가슴팍에 쓰러져 버린 내가 팔을 버둥거렸지만, 자꾸 미끄러지며 아힌을 더듬은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짐승 토끼.”
낮은 웃음소리가 귓전을 간질이는 동시에 시야가 빠르게 뒤집혔다.
어느새 내 위로 자리 잡은 아힌은 여름날의 햇살처럼 청량하게 눈가를 접었다.
“이번만 용서하는 거야. 다음번엔 먼저 덮쳐도 그냥 안 넘어가.”
지배계 페로몬을 사용하여 덮치도록 종용한 사람이 할 말인가. 반감이 일었지만 괜히 입 밖으로 꺼내면 더한 폭풍이 휘몰아칠 게 뻔했다.
대신 다른 질문을 선택한 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다음번에는 용서도 안 해 주나?”
“글쎄….”
싱겁게 대답한 아힌이 내 팔을 당겨 손목 안쪽에 입술을 맞췄다. 나와 시선을 맞추느라 내리깐 눈은 위험한 열감이 서린 지 오래였다. 맞닿은 몸이 버티기조차 버거울 만큼 단단했다.
“내가 너를 용서 안 할 수가 있을까.”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린 그가 내 몸 곳곳에 흔적을 남기기 시작했다.
“여기, 여기 서재야…!”
“언제는 내가 장소를 가렸었나?”
지독하게 당당한 표정으로 인해 할 말을 잃어버린 내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곳은 독서를 하는 공간이라는, 미미한 죄책감에 휩싸였던 게 퍽 허무해지게끔 만드는 대사였다.
“어차피 문을 잠글 때부터 다 알고 있었잖아.”
문 쪽으로 턱을 까딱이는 행동 하나하나가 오만하면서도 관능적이었다.
“…짜증 나는 맹수.”
“알아, 허리에 힘 풀어.”
느릿하게 움직인 손이 달래듯 허리 부근을 두드렸다. 그를 시작으로 시야가 까맣게 점멸되었다가 밝아지는 게 반복됐다.
숨 막히게 반복되는 입맞춤으로 인해 결국 열락 어린 울음이 터졌다.
아힌은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몇 번이나 받아 갔을까.
깜박거리는 의식 속에서 부질없는 횟수를 세어 보기도 여러 번. 아힌이 동일한 약속을 열 번째 받아 갈 즈음, 거의 실신에 이른 나는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 * *
꽃이 만개한 봄날의 오후. 후원 산책을 즐기던 제니아는 현재 곤란한 상황에 처한 상태였다.
날렵한 슈와 비온을 따라 어찌어찌 나무에 올랐는데, 막상 내려가자니 내심 겁이 난 탓이었다.
이제르라면 본모습으로 변해서 손쉽게 내려갔을 텐데. 처음으로 흑표범이 부러워진 제니아가 난감하게 입술을 오물거렸다.
하필 인적도 드문 곳이라 주변에 고용인조차 없고. 경비 기사들이 순찰을 돌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슈와 비온도 퍽 당황했는지 교목 주위만 빙글빙글 돌며 끙끙거리는 소리를 냈다.
무력 부문에서는 완벽했으나, 말이 안 통하는 사실이 다소 불편한 호위 기사들이었다.
“그 교목 내 자린데.”
아래에서 들린 인기척에 눈을 동그랗게 뜬 제니아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사자? 아니면 소?’
분홍색 곱슬머리에 권태로운 금안을 가진 미남자가 위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인상을 찌푸리던 제니아는 묘한 반응을 보이는 슈와 비온을 내려다봤다.
낯선 수인을 마주하면 위협하며 서열 정리부터 하는 아이들이건만. 위협은커녕 남자와 안면이 있는 듯 앞발로 바지 자락을 툭툭 건드리고 있었다.
약간이나마 경계를 푼 제니아가 호기심 어린 목소리를 냈다.
“너, 슈랑 비온을 알아?”
“이전에 한 번 만났었지.”
“우리 저택에 온 적이 있나 봐? 이상하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넌 이름이 뭐야?”
“룬.”
“룽? 희한한 이름이네.”
굳이 정정하지 않은 룬은 제니아를 향해 팔을 뻗었다. 아이가 앉은 나뭇가지가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뛰어내려, 받아 줄게.”
“당신을 어떻게 믿고… 앗!”
뚜둑, 나뭇가지가 예고 없이 부러지며 작은 몸이 아래로 추락했다.
제니아는 닥쳐올 고통이 느껴지지 않자 찡그린 눈을 살며시 떴다. 멀리서 내려다볼 때보다 훨씬 미려한 남자의 얼굴이 코앞이었다.
“룽, 너 가까이서 보니까 우리 아빠만큼 예쁘다.”
“딱히 기분 좋은 칭찬은 아닌 듯한데.”
피식 실소를 흘린 룬이 제니아를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 줬다.
나뭇잎이 붙은 검은 경장 바지를 탁탁 턴 제니아는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메이미가 정성스럽게 땋아 준 머리 모양이 엉망으로 치솟고 말았다.
“아이, 나 머리가 엉켰어.”
“다시 땋아 달라는 소리네.”
선선히 끄덕인 룬은 주변의 평평한 바위 위에 제 재킷을 깔았다.
자연스럽게 바위에 착석한 제니아는 흐트러진 제 소매를 정돈해 주는 룬을 흘끔거렸다. 깔끔한 옷차림과 귀족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것에 비해 시중이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말을 편하게 해? 내가 누군지 알아?”
“…모르지. 그러면 안 되는 건가?”
“아냐, 구해 줬으니까 특별히 봐줄게.”
“영광이군.”
자세히 볼수록 귀족이라기에는 분위기가 지나치게 자유분방한 남자였다. 심지어 머리카락을 땋아 주는 솜씨가 아힌의 전속 시종인 유안보다도 섬세했다.
그제야 남자를 처음 보는 이유를 깨달은 제니아가 박수를 짝 쳤다.
“너 시종이구나. 방금 전에 도착했다는 사자 영토 사절단을 따라왔지?”
“맞아. 별로 오기 싫었는데 여행 겸 다녀오라고 등을 떠밀더군. 처져 있는 게 보기 싫다나 뭐라나.”
룬은 그레이스 저택에 도착하기 직전까지 들은 잔소리를 떠올렸다. 함께 온 까칠하기 짝이 없는 어린 조카에게.
‘그러고 보니 이 아이랑 또래인가.’
그제야 자신을 찾으며 성질부리고 있을 조카를 기억해 낸 룬이 제니아를 내려다봤다. 고개를 꺾어 그를 빤히 살피고 있던 제니아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대뜸 말했다.
“기분이 나빠 보이긴 해. 왜 자꾸 억지로 웃어?”
은발을 부지런히 만지작거리던 손이 일순 멈칫했다. 짧은 시간 뜸 들인 룬이 다시 머리카락을 땋아 내리기 시작했다.
“미안, 티 많이 났어?”
“응. 무슨 일인데? 도울 수 있는 일이면 도와줄게, 구해 준 보답으로. 내가 비록 나무에서 떨어졌긴 해도 엄청 유능해.”
이번에는 진심으로 웃음이 터진 룬이 어깨를 잘게 떨었다. 누구 딸 아니랄까 봐, 조그마한 게 벌써부터 언변이 수준급이었다.
“야, 룽. 웃지 말고 말해 보래도. 지금 아니면 기회 없어.”
재촉에도 불구하고 한참 키득거린 룬은 다시 머리를 곱게 땋으며 흘러가듯 말했다.
“얼마 전에 기르던 토끼가 죽었거든.”
순간적으로 당황한 제니아가 놀란 표정으로 룬을 돌아봤다.
당연히 동물을 말하는 거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토끼의 죽음은 토끼 수인으로서는 초연할 수 없는 주제였다.
아이의 말간 눈을 마주한 룬이 아차 싶어 급히 말을 덧붙였다.
“사고는 아니고 수명이 다한 거야. 편하게 간 거지. 근데 이따금씩 후회가 돼서….”
왜 이런 어린아이 앞에서 무거운 주제를 구구절절 나열하고 있는 건지 룬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마니언츠가(家)에는 그의 심정에 완전히 공감하는 이가 없어서일까. 모두가 토끼의 죽음을 애도하긴 했으나 룬만큼 커다란 상실감을 느끼진 못 하는듯했다.
그는 뻥 뚫린 듯한 가슴께를 괜히 문질렀다.
“왜 후회하는데? 나쁘게 대했어?”
“남들은 과분하게 대해 줬다고 하는데, 사실 잘 모르겠어. 후회만 남네.”
설명이 길어진 룬을 빤히 응시하던 제니아는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먼 미래이긴 하지만, 어른이 되면 없을지도 모르는 슈와 비온을 생각하니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있잖아, 룽.”
“응?”
“내가 슈랑 비온 때문에 매일매일 슬퍼하니까 어떤 사람이 말해 준 게 있거든. 원래 최선을 다해 잘해 줘도 후회가 남을 수밖에 없는 거래.”
“…….”
“백 년이나 사는 사람한테도 후회가 남는데, 동물은 우리랑 함께하는 시간이 더 짧잖아?”
아이답지 않은 담담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래서 마음껏 슬퍼하며 기억에 담고 살아가는 수밖에 없대. 그러니까 룽 너도 억지로 웃지 말고 많이 많이 울어.”
슈와 비온이 죽는 꿈을 꾼 제니아가 엉엉 울 당시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였다.
동화를 얘기하는 듯한 속살거림이었지만, 퍽 울상이었던 어머니의 표정을 제니아는 기억했다. 호두 모양의 주름이 진 턱이 움찔거리던 것까지도.
‘내가, 내가 애쉬를 어떻게 보내. 난 못 해….’
결국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흐느끼는 어머니를 아빠가 들고 사라지던 장면이 제니아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위로가 됐어?”
“응, 생각 이상으로.”
어느새 룬의 손끝에서 예쁜 땋은 머리가 완성됐다. 바위에서 내려선 제니아는 다소 경직된 룬의 다리를 통통 두드렸다.
“다행이야. 그럼 이만 가 볼게, 산책이 너무 늦어지면 아빠가 울거든. 슈, 비온, 가자.”
얌전히 기다리던 슈와 비온이 호위하듯 양옆으로 섰다.
본관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던 제니아는 몸을 살짝 틀었다. 헤어지기 전에 동태눈이 아름다운 남자의 얼굴을 한 번쯤 더 보고 싶어서였다.
“많이 닮았네.”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린 룬이 느릿하게 손을 흔들었다. 모든 움직임이 한여름의 낮잠처럼 권태로운 사람이었다.
“비비한테 전해 줘, 고맙다고.”
“알았어. 잘 전해 줄 테니까 너나 몸조리 잘해.”
“-그래.”
애늙은이 같은 말투로 인해 또다시 웃음이 터져 버린 그가 키들거렸다.
손을 마주 흔든 후 돌아서던 제니아는 움직임을 뚝 멈췄다. 뒤늦은 위화감이 발길을 붙들었다.
‘…비비한테 전해 달라니?’
얘기해 준 사람이 우리 어머니라고는 안 했던 것 같은데.
내 정체를 알고 있나?
시종이 어떻게 감히 어머니의 존함을 부르지?
온갖 의문에 사로잡힌 제니아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이미 교목 앞은 텅 비어 있었다.
* * *
‘…시체?’
룬과 헤어진 뒤, 슈와 비온과 함께 걷던 제니아가 멈춰 섰다. 후원 중앙에 쓰러진 웬 소년을 발견한 탓이었다.
“슈, 비온. 너희는 거기 있어.”
경계하며 다가선 제니아는 기절한 소년의 입술을 슬쩍 들췄다. 아니나 다를까 맹수의 상징인 송곳니가 드러났다.
‘죽은 건 아니네. 기절했나?’
어머니가 예쁜 맹수와는 어울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는데. 특히 요망하게 생긴 맹수일수록 글러 먹었을 확률이 높다고.
고민하던 제니아는 마침 정신을 차린 소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끔벅이는 황금빛 눈동자로 미뤄 보아 사자 수인인 모양이었다.
‘얘도 사자 영토 사절단인가?’
오래 지나지 않아 제니아는 소년의 얼굴에서 룬의 흔적을 찾아냈다. 지나치게 수려한 외모를 제외해도 분홍색 머리카락이 똑 닮은꼴이었다.
차이점이라면 부스스한 곱슬머리인 룬과 달리 차분한 머리카락이라는 정도일까.
어느덧 제니아는 소년의 얼굴에 착실히 홀려 가고 있었다.
“여긴….”
갓 깨어난 소년은 멍한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눈높이에 맞춰 쪼그려 앉은 제니아가 소년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뭐야, 너?”
“나?”
“너, 룽이랑 관련 있지?”
겨우 몸을 일으켜 앉은 소년이 제니아를 마주했다.
“룽? 그게 누구… 아.”
잠시 미간을 굳힌 소년은 곧 언제 그랬냐는 듯 유순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우리 삼촌.”
“삼촌이라고? 있잖아, 혹시 너 귀족이야?”
“응? 응.”
“그럼 룽도 귀족이겠네. 어쩐지, 어머니와 친분이 있는 게 이상하다 싶었어.”
드디어 의문을 해소한 제니아가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그 녀석, 나한테는 시종이라더니. 겁도 없이 이 제니아 님을 속였겠다.
부득부득 이를 갈던 제니아는 문득 느껴지는 피 냄새에 정신을 차렸다. 소년의 손등 이곳저곳이 상처로 가득했다.
“그러고 보니 너는 왜 이런 꼴로 여기 쓰러져 있어?”
“그건….”
“둘러댈 생각 말고 똑바로 말하는 게 신상에 좋을 거야. 내가 이 저택에서 두 번째로 센 토끼니까.”
제니아의 엄포에 소년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럼, 그럼. 토끼란 단어에 반응한 슈와 비온이 거들먹거렸다.
건달처럼 낄낄거리는 두 흑표범을 훑은 소년은 이윽고 처량하게 눈꼬리를 내렸다.
“삼촌한테… 버림받았거든. 내가 귀찮대.”
“룽이 너를 버렸다고?”
맑은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흐려졌다.
“룽 녀석, 그렇게 안 봤는데 나쁜 사람이었네? 나한테도 거짓말 치질 않나.”
가련한 외양에, 약간의 동정심을 느껴 버린 제니아가 덩달아 눈꼬리를 내렸다.
‘조금 불쌍하네.’
일단 얘를 치유계 페로몬으로 치료해 준 후 저택으로 데려갈까. 그러자니 동맹과는 별개로 사자 수인이라면 치를 떠는 아힌이 마음에 걸렸다.
‘아빠는 사자 수인을 왜 그렇게 싫어하지?’
팔짱 낀 제니아는 깊은 고심에 잠겼다.
도대체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아힌은 비비가 사자 영토로 출타를 갈 때면 시름시름 앓아누우며 아픈 시늉까지 불사하곤 했다. 바람난 토끼라는 헛소리까지 중얼거리며.
‘흠….’
어차피 실세, 즉 비비의 허가만 있으면 끝날 일이라고 판단한 제니아가 소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럼 내가 주워 줄게.”
“나를… 줍겠다고?”
“버림받았다며.”
소년은 다소 당황스러운 낯빛으로 제니아의 손을 응시했다.
치유계 페로몬을 가진 토끼의 환심을 얻으란 어머니의 부탁-을 가장한 명령-이 있었다고 해도….
미인에 약하다는 제니아 그레이스를 얼굴로 홀릴 작정이었지, 주워진다는 모욕적인 전개는 꿈에도 예상 못 한 상황이었다.
불행히도 아힌 그레이스를 닮은 토끼는 상식을 상실한 상태였다.
소년의 망설임이 길어지자, 인내심이 동난 제니아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빨리 손잡아. 지금 이 제니아 님이 꼬셔 주고 있잖아. 왜, 귀족이랍시고 주워지는 건 꼴사나워서 싫나 봐?”
“아니, 아니. 좋아. 나 꼴사나운 거 좋아해.”
황급히 고개를 저은 소년이 제니아의 손을 맞잡았다.
그때였다, 무언가가 털썩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 건.
깜짝 놀란 두 사람이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돌아봤다.
“누야… 대체, 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
그곳에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그렁그렁 눈물을 매단 이제르와 날개로 부리를 가로막은 퀸이 있었다.
척, 파리하게 질린 이제르가 소년을 손가락질했다.
“사자는 줍는 거 아냐. 걔 수상해. 방금 내가 봤어! 엄청 사악한 표정 짓는 거!”
“뭐?”
제니아가 곧장 소년을 확인했지만, 소년의 얼굴에서는 사악은커녕 청초함만이 묻어났다. 이제르의 새빨간 거짓말임이 분명했다.
“이제르, 너 또 거짓말하지. 아빠한테 이르기만 했담 봐.”
짜증 낸 제니아는 연애 사업마다 방해해 대는 이제르와 퀸을 등졌다.
그와 동시에 소년과 시선이 마주친 이제르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훼방, 놓지, 말고, 꺼져.
소년의 입 모양을 정확히 해석한 이제르가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한시 빨리 저 악독한 사자의 진상을 모두에게 알려야만 했다.
* * *
“애쉬, 그쪽은 안 돼. 퀸의 딸기 밭이 있는 방향이잖아. 괜히 가까이 갔다가 퀸한테 혼나도 모른다?”
엄한 경고에도 아랑곳 않은 애쉬가 살금살금 발을 옮겼다. 망가진 딸기 밭을 보고 조용히 절망하는 퀸의 반응을 즐기는 게 틀림없었다.
‘하여튼, 앙숙이라니까.’
정원을 산책하던 나는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응시했다.
개와 늑대의 시간.
하늘이 석양과 밤이 교차하는 불그스름한 빛으로 물들었다.
아힌은 하필 갯과를 들먹인 시간이라며 관심 두지 않았지만, 예전부터 나는 이상하리만치 이 시간이 좋았다.
마음껏 돌아다닐 수 없었던 어린 시절에도 이 시간이면 늘 창문을 올려다보곤 했다.
래비안가(家)의 고용인이 커튼을 쳐 두기라도 하는 날이면 못내 아쉬워서 서성거릴 만큼.
석양을 바라보는 건 인간화를 치르고,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혼인을 하고 쌍둥이를 낳은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습관이었다.
‘왜일까.’
어릴 적부터 이어진 습관에 대해 처음 고민해 보게 된 내가 우뚝 멈춰 섰다.
출처 모를 위화감이 발길을 붙들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이 정도로 특정한 시간을 좋아할 수가 있나. 별거 아닌 걸 진지하게 생각하나 싶으면서도, 막상 되짚으니 아주 중요한 걸 잊고 있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왜…?’
어린 시절의 하루하루는 사실상 너무 외롭고 힘든 시기였기에 일부러 잊어버린 걸까.
옆에서부터 불어온 바람이 대충 풀어 둔 머리카락을 흩날리게 만들었다.
‘아기 토끼는 함부로 만져선 안 돼.’
시야를 가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에 꽂던 나는 그 자세 그대로 굳었다.
‘우리와는 다르게 약한 존재거든’
석양이 내린 창문을 등진 붉은 눈동자와 부드러운 목소리. 분명히, 이전에도 한 번쯤 떠올린 적이 있는 말이었다.
왜 여태껏 이 목소리를 대수롭지 않은 꿈 정도로 치부했을까.
초조하게 제자리를 서성이는데, 별안간 무언가가 내 치맛자락을 당겼다.
“용사님, 용사님.”
흠칫 놀란 내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올해 각각 네 살, 다섯 살이 된 릴의 아이들이었다.
“왜 하늘만 보고 있어요? 하늘에 맹수라도 있어?”
“아… 잠깐 생각 좀 하느라고.”
“무슨 생각?”
“음, 그냥 옛날 생각?”
어색하게 둘러댄 나는 숙여 앉아 아이들의 어깨를 짚었다.
허둥지둥 달려온 릴은 내 눈치를 살피며 두 아이를 타일렀다.
“얘들아, 비비 님을 그렇게 부르면 못 쓴다고 했잖니. 아주 높은 분이란다.”
“왜요? 발렌스 님도 비비 님더러 용사라고 그랬는데. 위기에 빠진 흑표범 영토를 구했대요!”
“그게… 사실이긴 하지만 호칭을 똑바로,”
“릴, 뭐 어때요. 아무도 없는데.”
대수롭지 않게 답한 내가 손사래를 쳤다.
“릴도 사석에서는 예전처럼 편하게 대해 줘요.”
“아무리 그래도….”
“앗, 또 이런다. 우리 사이에 이러기예요?”
“이것 참.”
난감하게 웃은 그는 거대한 몸을 웅크려 앉으며 나와 시선을 맞췄다. 마구간에서 애쉬, 제인과 모여앉아 도란도란 떠들던 시절이 그리워졌다.
“릴이 흑표범 수인과 혼인한 건 지금 생각해도 신기해요. 그것도 기사분이랑.”
“토끼 너와 수장님의 혼인 발표 이후 온 대륙이 난리도 아니었잖니. 그때부터 영토민 사이에서도 맹수계 수인과 초식계 수인의 혼인이 제법 흔해졌단다.”
“그래도 말 수인인데. 그분이랑 가까워지기까지 어렵지 않았어요?”
“초반에 그녀가 나를 고릴라 수인으로 오해해서 비교적 대화가 수월했지. 본모습을 보여 줬을 때는 그만 목뒤를 잡지 뭐야.”
아하, 그랬구나….
이제 놀랍지도 않은 릴의 백마 모습을 떠올리던 나는 우측을 돌아봤다. 릴의 아이들이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지 뒤꿈치를 들썩여 댔다.
“용사님, 용사니임-.”
“오늘 시장에 다녀왔는데, 거기서 엄청난 걸 발견했어요!”
“엄청난 거라니, 그게 뭘까?”
궁금한 척 운을 떼자, 까치발을 든 아이가 퍽 진지하게 속삭였다.
“이건 비밀인데, 아힌 님보다 예쁜 맹수가 있어요.”
“에이, 설마.”
코웃음 친 내가 고개를 저었다. 이 비비 님이 장담하건대, 아힌보다 예쁜 맹수는 세상에 없어.
“어어, 진짠데! 상인이 이름도 알려 줬는데! 이름이 이디, 으음, 이디… 뭐더라?”
“…혹시 이디스 님을 말하고 싶은 거야?”
“와, 맞아요. 이거 봐요!”
아이는 품에 고이 넣어 둔 초상화를 꺼내 들었다. 아직까지도 영토민 사이에서 회자되는 이디스 님의 초상화였다.
그것을 받아 든 나는 이미 본 적 있는 이디스 님의 초상화를 물끄러미 살폈다.
‘뭐야….’
평범한 종이 한 장인데, 오늘따라 살아 숨 쉬는 이디스 님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산뜻하게 올라간 그의 입매를 응시하고 있자니, 예고 없이 눈앞에 어린 날이 그려졌다.
‘비비, 멋대로 돌아다니면 다시는 데리고 나오지 않을 줄 알거라.’
까마득한 어린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기억이 머리를 강타했다.
네 살쯤이었나.
그날은 어머니가 처음 나를 데리고 외출한 날이었다. 그것도 래비안 저택보다 훨씬 웅장한 저택으로.
응접실에 모인 귀부인들은 저마다 소식을 전하기 바빴다.
새끼 토끼인 나에 대한 대화도 잠시, 다시 내게 관심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대화가 길어질수록 뒷다리가 저릴 만큼 몸이 뻐근해졌다.
어머니의 발치에서 기다리던 나는 어느 귀부인이 들어오느라 살짝 열린 문틈을 발견했다.
응접실 구경에도 질려 가는 중에 나타난 매력적인 흥밋거리였다.
잠깐 나가서 구경하다가 돌아와도 괜찮지 않을까. 안일한 생각을 한 나는 어머니의 눈치를 살핀 후 문틈으로 빠져나갔다.
복도로 나와 해방감을 느끼는 동시에 쿵, 등 뒤에서 불길한 소음이 들렸다. 응접실 문이 완전히 닫혀 버린 것이었다.
‘비비, 멋대로 돌아다니면 다시는 데리고 나오지 않을 줄 알거라.’
안 돼. 아득해진 내가 애타게 문을 두드렸지만 열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 후에 어떻게 됐더라…?’
머리를 짚은 나는 겨우 떠오른 기억의 파편을 붙잡기 위해 하늘을 흘끔거렸다. 노을빛이 만연한 하늘을 바라볼수록 그림책을 빨리 넘기듯 장면이 띄엄띄엄 그려졌다.
‘우네?’
‘왜 우는데?’
시력을 의심할 정도의 아름다운 남자와 예쁘장한 내 또래의 남자아이. 그리고 붉은 눈동자.
‘…날 버리고 가 버렸어. 내가 살면서 처음으로 문을 여는 수발까지 들어 줬는데.’
‘아쉬워?’
‘조금.’
문 뒤에 숨었던 어린 날의 나는 소년의 침울한 중얼거림에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었다.
저 맹수가 문을 열어 줘서 어머니께 혼나지 않을 수 있었는데, 작별 인사 정도는 제대로 해야 하지 않을까.
용기 내어 고개를 빼꼼 내미니, 붉은빛이 스민 복도로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이만 가자, 엄마가 기다릴 거야.’
어른에게 이끌린 소년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이상하게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벌써 가는 거야?
잠깐만 기다려 줘.
그 몇 마디조차 내뱉을 수 없는 내 처지가 왠지 눈물이 날 만큼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때 거짓말처럼 고개 돌린 소년의 얼굴이 석양을 받아 말갛게 반짝였다. 기억하는 내에서 난생처음으로 타인에게 받아 보는 호의 어린 미소였다.
그리고 손을 흔들며 입 모양으로 하는 말….
“…나중에 꼭 또 만나.”
추억의 흔적을 육성으로 내뱉어 버린 나는 피가 몰릴 만큼 입술을 깨물었다. 이디스 님의 초상화를 그러쥔 양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응, 꼭 다시 만나자.
마음속으로 기약 없는 대답을 하며 앞발을 흔들던 순간이 떠올랐다.
“용사님, 울어요? 초상화가 진짜로 아힌 님보다 예뻐서?”
“울지 마요, 우리가 잘못 봤어. 아힌 님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걸로 해요….”
울먹거리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아득해진 정신을 일깨웠다.
“아…. 아냐, 이건 우는 게 아니라….”
당황한 내가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으나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툭, 투둑. 가득 차오른 눈물이 흘러넘쳐 초상화를 적셨다.
“토끼야, 느닷없이 눈물은 왜 흘리는… 크흡.”
떨리는 손으로 내 등을 짚던 릴이 돌연 입을 틀어막았다. 남이 울면 덩달아 울음을 터뜨리는 여린 성정은 여전했다.
“릴, 아힌 어디 있는지 알아요?”
초상화를 아이에게 돌려준 나는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수장님은 왜….”
소매로 눈물을 훔친 릴은 멍하니 나를 올려다봤다.
“아힌을 만나고 싶어요. 아니, 만나야만 해요.”
“그, 글쎄다. 조금 전에 나와 함께 출타를 다녀오셨으니, 지금쯤 집무실이나 연무장에 계시지 않을까 싶구나.”
“고마워요.”
“이런, 토끼야! 넘어질라!”
릴의 부름을 뒤로한 내가 곧장 연무장을 향해 달렸다.
원피스 자락을 움켜쥔 손이 하얗게 질렸다.
쉬지 않고 달리는 와중, 예전에 아힌과 나눈 영양가 없는 대화가 스쳤다.
‘뭐?’
‘그냥, 왠지 아힌을 만나기 전에 흑표범 수인을 만난 적있는 느낌이 들어.’
‘처음 만난 흑표범 수인이 내가 아니었어?’
‘아마도?’
약 올리듯 장난스럽게 말한 내가 실없이 웃었다. 따라서 미소 지은 아힌이 나긋나긋하게 물어왔다.
‘먼저 만난 흑표범 수인의 이름이나 인상착의는?’
‘글쎄. 거기까진 기억이 잘….’
‘잘 생각해 봐, 작은 단서라도 충분히 찾아낼 수 있으니까.’
귓가를 간질이는 속삭임에 넘어갈 뻔한 나는 경계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차, 찾아내서 뭐 하려고?’
아힌의 얼굴에 머물러 있던 상냥한 웃음이 급속도로 사라졌다.
‘없애 버리게.’
‘세상에….’
미친 흑표범한테는 장난도 못 치겠다며 부들거린 내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처음 만난 흑표범 수인.
‘어쩌면, 어쩌면….’
너무 비약인가 싶었지만, 이미 눈동자에는 희미한 기대가 넘실거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살면서 처음으로 문을 여는 수발까지 들어 줬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수발 어쩌고 같은, 그런 희한한 말을 할 만한 어린아이는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었다.
‘제발.’
넓은 저택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원망스러운지.
죽어라 뛰던 나는 일순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팔다리가 바닥에 쓸렸지만 치유계 페로몬을 사용할 겨를조차 없었다.
넘어진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 채 벌떡 일어난 나는 곧바로 달렸다. 탁탁, 연무장이 가까워질수록 발을 내딛는 속도가 빨라졌다.
‘제발 있어 줘.’
만나고 싶어, 지금 당장.
너를 만나 확인받아야만 했다.
어느덧 아힌이 주로 사용하는 연무장이 코앞이었다.
저 멀리, 아침에도 본 실루엣이 시야를 채우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치솟든 말든 달리던 나는 울컥 메이는 목을 억지로 삼켰다.
막 연무장에 도착했는지, 어깨를 돌리며 몸을 풀던 남자가 내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비비?”
발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이윽고 제자리에 멈춰 선 나는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카락을 멍하니 바라봤다. 시간이 멈춘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익숙한 은발이 과거의 어느 날처럼 석양을 받아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안녕.’
바람결에 따라 흔들리던 소년의 머리카락은 눈부신 은발이었다.
“비비!”
휘청대는 나를 발견한 아힌의 눈이 크게 뜨였다. 황급히 내 몸을 받친 그가 힘이 풀리려는 허리를 붙들었다.
“왜 그래,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말을 하다 만 아힌은 순식간에 나를 등 뒤로 감췄다. 검집에 손을 가져가는 걸 보아 내가 무언가에 쫓기는 중이라고 판단한 듯했다.
아냐, 그거 아니야.
고개를 저으며 아힌의 뒤에서 빠져나가려 했지만, 막무가내로 숨기는 통에 넓은 등에 얼굴을 박고 말았다.
쿵, 이마가 두 쪽으로 쪼개지는 듯한 고통이 엄습했다. 이놈의 등은 시간이 지나도 물렁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쫓기는 거 아니래도!”
간절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아힌은 주변에 기척이 없음을 확신하고 나서야 휙 뒤돌았다.
“그게 아니면 팔다리는 왜 이래.”
나를 샅샅이 살핀 그는 지금껏 본 적 없는 무서운 눈을 했다.
‘팔이랑 다리가 왜?’
쓸린 팔다리를 발견한 내가 뒤늦게 넘어진 사실을 인지했다. 바닥에 긁힌 상처가 이제야 쓰라렸다.
대충 상처를 둘러본 나는 급히 아힌의 옷자락을 잡아챘다.
“별거 아니야. 아힌, 그보다는 묻고 싶은 게,”
“우선 상처부터. 응?”
그의 주의는 쓸린 상처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비비.”
“알았어….”
이래서야 영 대화가 불가능하겠다고 판단한 내가 치유계 페로몬을 사용했다. 모래성이 파도에 스러지듯 상처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내 몸에 상처 하나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안도의 숨을 내쉰 아힌이 시선을 맞췄다. 날 서 있던 붉은 눈이 겨우 제 색깔을 찾았다.
“어떻게 된 건데. 이제 토끼일 때처럼 뛰지 않기로 약속했잖아.”
미간을 찌푸린 그가 손을 뻗어 내 양 뺨을 짜부라뜨렸다. 앞발이 닳고 닳도록 도망치던 과거의 나를 떠올린 듯했다.
“아힌을 빨리 만나고 싶어서.”
“나를 만나려고?”
“그래.”
그의 손목을 붙든 나는 안달 난 사람처럼 뒤꿈치를 들썩였다.
“나를 만나려고 넘어지면서까지 달려왔다고?”
“그렇대도.”
“나를 만나려고 넘어지면서까지,”
“그만 좀 해. 대체 몇 번을 묻는 건데?”
“…상상 이상으로 짜릿한 말이라서. 거짓말하지 마.”
제 안위를 가장 소중히 여기는 야만 토끼가 그럴 리가, 중얼거린 아힌이 슬쩍 나와 거리를 벌렸다.
미심쩍은 눈빛을 마주한 나는 기가 찬 마음에 발을 쾅 굴렀다.
“거짓말 아니야.”
“그럼 뭔가 원하는 게 있나 본데. …꿇을까?”
“그건 네 희망 사항이겠지.”
“들켰네.”
헛웃음 친 그가 내 허리를 잡아 공중으로 번쩍 들어 올렸다. 땅에서 떨어진 발이 반동으로 흔들렸다.
한순간에 아힌을 내려다보게 된 나는 괜히 입술을 달싹였다. 막상 마주하니 초조함이 밀려들었다.
만약 어린 날의 소년이 아힌이 아니면.
한껏 기대했다가 실망하는,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격이 아닐 수 없었다.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인 나는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묻고 싶은 게 있어.”
스스로가 듣기에도 지나치게 경직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혹시… 혹시 어렸을 때, 어떤 어른이랑 토끼 영토에 간 적 있어?”
아힌은 예상 못 한 질문에 의아하게 눈을 깜박였다.
“아마? 갑자기 그런 건 왜?”
“대답해 줘.”
재촉하듯 말한 내가 손을 꼼지락거렸다. 꽉 쥔 주먹에 땀이 배어났다.
“아주 어릴 적에 아버지를 따라 몇 번 갔을걸.”
“언제쯤? 몇 살 때?”
이상할 정도로 긴장한 나를 의심스럽게 살핀 아힌이 말을 이었다.
“아마 네다섯 살 정도. 아버지가 아몬 수장이랑 친분이 두터웠으니까. 그런데 뜬금없이 토끼 영토 얘기는 왜,”
말을 뚝 끊어 버린 그는 서서히 표정을 굳혔다. 종종 비치곤 하는 속을 읽기 힘든 얼굴이었다.
조심스레 나를 바닥에 내려 준 아힌은 무언가를 되짚는 듯 습관적으로 아랫입술을 쓸었다. 마치 내가 이런 질문을 한 이유를 깨달은 듯한 눈빛이었다.
정적 속에서 몇 시간처럼 느껴지는 수초가 지나갔다.
손 흔들며 미소 짓던 소년의 얼굴이 물에 번진 그림처럼 흐릿하게밖에 기억나지 않았다.
‘안녕.’
수줍은 듯 읊조린 입 모양만이 선명했다.
안녕. 그 단어를 곱씹을수록 어울리지 않는 상황에서 안녕이란 말을 내뱉은 과거의 내 모습이 겹쳐졌다.
엔델루스에서 처음 아힌의 앞에서 인간이 되었을 때도.
오랜 헤어짐 후, 느닷없이 침대에서 재회한 당시에도.
안녕, 열없는 웃음으로 때우며 아힌에게 건넸던 인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흔한 인사말일지는 몰라도, 내게 있어서는 무의식중 마음 한곳에 품고 있던 특별한 단어가 아니었을까.
“…하.”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아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람 새는 소리를 냈다.
“그래서 아버지가 토끼 인형을 사 주셨던 거군.”
너였다.
스르륵, 확신하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린 내가 잔디 위로 주저앉았다. 시야가 흐려질 만큼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이제야 종종 이제르를 볼 때 느낀 기시감의 정체가 이해됐다. 그날의 아힌과 똑 닮은 외모여서였다.
“이게 뭐야….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과거의 만남을 이렇게 늦게 알아차리는 법이 어디 있어.
중요하고 감동적인 순간에 눈물샘이 터진 나는 서럽게 바닥을 두드렸다. 따라서 무릎을 굽혀 앉은 그는 검지로 내 눈가를 약하게 쓸었다.
“내가 생각하는 게 맞다면 뒷발을 들어 주세요.”
이 근본 없는 맹수. 지금 내가 뒷발이 어디 있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엉엉 우느라 제대로 된 답변을 할 수 없었던 내가 발을 꼼지락거렸다.
필사적인 움직임을 발견한 아힌은 손등으로 입가를 가린 채 반대편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당연한 수순으로 어깨가 가느다랗게 떨렸다.
“웃지 마. 너는 지금 웃음이 나와?”
괜히 더 서러워진 내가 잔디를 아힌에게 던져 댔다. 나풀나풀 흩날린 푸른 잔디가 은발과 견장에 내려앉았다.
어릴 적에 운명 같은 만남이 있어 봤자 뭐 하나. 또라이를 상대로는 하등 쓸모없는 아름다운 과거에 불과했다.
“왜 바로 알아보지 못했어?”
메인 목을 삼킨 나는 양손으로 아힌의 옷깃을 잡은 채 애꿎은 원망만 흘렸다.
“어떻게 나를 잊을 수가 있어. 처음 주웠을 때부터, 흑, 입속에 넣으려고 하고….”
매일 토끼 구이로 만들어 버린다는 망언이나 하고!
내게 멱살을 붙들린 아힌은 흔드는 대로 짤짤 흔들렸다.
결국 통곡하는 나를 붙든 그가 번쩍 일으켜 세웠다. 축축이 젖은 눈꺼풀에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미안해, 내가 미쳤었나 봐.”
원래 미쳐 있으면서 아닌 척하긴.
소매로 눈물을 닦는 나를 품에 안은 아힌이 음산하게 말했다.
“그때 그냥 납치해 왔어야 하는데.”
“…뭐라고?”
“잠깐 생각했었거든, 그대로 잡아갈지.”
대답할 가치조차 없는 말이었다.
가만히 안겨 있던 나는 일순 느껴진 정체 모를 한기에 몸을 떨었다. 감동적인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아힌의 분위기가 묘하게 이상했다.
“……?”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리자, 아힌은 나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아힌, 잠깐 얼굴 좀 봐.”
“안 돼, 지금 표정 관리가 안 되는 중이라서.”
“표정이 왜?”
“별로 안 예뻐.”
대답하는 목소리가 겨울날의 서릿발보다 차가웠다.
흠칫 떤 나는 입을 살짝 벌렸다. 누구는 감명받아서 울고 있는데, 정작 아힌은 대상 모를 분노를 불태우고 있었다.
당시에 나를 래비안가(家)에서 빼 오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엇갈린 감정선을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폭 한숨을 내쉰 나는 그냥 아힌의 품에 이마를 묻었다.
지나간 과거에 대한 서로의 감상이 다르면 뭐 어떤가. 평소에는 울면 더 울도록 종용하는 맹수가 등을 토닥여 주고 있는 게 어딘가 싶었다.
일정한 손길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안정감을 가져다줬다. 조금 노곤해진 내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있잖아, 아힌. 하나 더 물어도 돼?”
“응, 뭐든.”
“그때 네가 나한테 그랬잖아, 또 만나자고. 그렇게 말한 이유가 궁금,”
“어머니!”
쿠당탕, 갑작스러운 소란으로 인해 내 말이 뚝 끊겼다.
예고도 없이 우리 곁으로 달려든 이제르가 비장하게 무릎을 꿇었다. 통통한 뺨 위로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어린 날의 기억에서 어른으로 돌아온 우리가 황급히 몸을 굽혔다.
“이제르?”
“존경하는 어머니, 누야를… 부디 누야를 말려 주세요.”
뒤따라온 슈와 비온, 바라는 영문도 모른 채 이제르를 따라 넙죽 엎드렸다.
함께 날아든 퀸이 삑삑대며 열심히 토로했으나 알아들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드물게 당황한 아힌이 비련의 주인공처럼 오열하는 이제르를 안아 올렸다.
“제나를 말려 달라니. 그게 무슨 의미지?”
“그래, 이제르. 울지 말고 자세히 얘기해 봐.”
눈물이 쏙 들어간 나는 우는 얼굴만큼은 나와 똑 닮은 이제르를 타일렀다.
겨우 숨을 고른 이제르는 붉은 입술을 오물거렸다.
“누야가… 누야가 후원에서 사자를 주웠어요.”
“맞아요, 후원에 쓰러져 있기에. 가엽게도 삼촌한테 버림받았다고 하더라고요.”
아래쪽에서 언제 왔는지 모를 제니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움직인 우리 시선이 제니아를 지나, 나란히 선 소년에게 머물렀다.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왕자님 같은 생김새의 수인이었다.
“이 사자랑 약혼할까 싶어요. 되게 예쁘죠?”
“아니. 아빠가 더 예쁘고, 당연히 약혼도 안 돼.”
아힌은 다 듣지도 않은 채 득달같이 거부부터 하고 들었다. 제니아의 약혼자 선별에 관해 얘기만 들었지, 실제로 목도하는 건 처음이라 충격에 휩싸인 상태였다.
반면 나는 워낙 자주 마주한 일이기에 그리 놀랍지도 않았다.
“제나.”
제니아의 시선에 맞춰 숙여 앉은 내가 조용히 속닥였다.
“당분간 약혼은 보류하겠다고 엄마랑 약속했지 않아?”
“그랬죠, 남자는 많이 만나 볼수록 좋은 거니까.”
“그런데 왜….”
말끝을 얼버무린 나는 단정한 자세로 선 소년에게 눈길을 옮겼다. 마침 시선이 마주친 소년이 눈웃음으로 화답했다.
‘그 아이네?’
레오나 마니언츠의 직계 혈통, 아인트 마니언츠.
‘난 토끼랑은 상정? 상종? 아무튼 그거 안 해.’
과거 내 배에서 네 개의 페로몬이 느껴진다고 말했던, 뛰어난 능력의 남자아이가 분명했다.
아무래도 오늘 막 도착한 사자 영토 사절단의 일원으로 온 듯했다.
‘토끼랑은 상종 안 한다더니.’
그새 무슨 바람이 불었을까. 제니아의 이상형으로 성장한 아인트를 살핀 나는 조금 난감해졌다.
치유계 페로몬을 탐내는 레오나가 주기적으로 보낸 구혼서에는 늘 아인트 마니언츠란 이름이 존재했기에.
하필 제니아가 이렇게 아인트를 데려온 건, 우연한 만남이라기보다는 교묘히 조작한 필연일 가능성이 높았다.
가령 아인트가 의도적으로 제니아의 앞에 쓰러져 있었다든가.
“그래서 말인데요, 어머니. 얘가 많이 만나도 상관없대요.”
두서없는 속삭임에 상념에서 깨어난 내가 제니아를 돌아봤다.
“남자요. 많이 만나 보고 질릴 즈음에 돌아오면 된다고 하네요.”
“돌아… 뭐?”
“구혼서를 일일이 거절하는 것도 난감해하셨으니까. 흠, 이 정도 조건이면 괜찮지 않나요? 사자치고 연약하긴 하지만.”
“…연약하다니. 이 아이가 누군지는 알고 말하는 거야?”
“아차, 이름 묻는 걸 깜박했다. 너 이름 뭐야?”
눈을 크게 뜬 제니아가 꼭 잡은 손을 흔들었다. 생긋 미소 지은 아인트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화답했다.
“마음대로 불러. 네가 나를 주웠잖아.”
“그래도 돼?”
“응, 난 네 거라며.”
“그렇다네요. 되게 순하죠? 주관이 없나 봐요.”
주관이 없긴 뭐가 없어, 순한 시늉을 하고 있는 거겠지.
아힌으로만 미뤄 봐도 무해하게 웃는 맹수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법이었다.
기가 찬 나는 동그랗게 뜬 눈을 껌벅였다. 서로 꼭 붙잡은 손을 억지로 떼 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빠, 아빠! 괜찮아?”
한편에서는 이제르가 구슬피 울며 아힌의 바지 자락을 흔들고 있었다. 아힌은 이제 정신마저 혼미한지 손으로 눈을 덮은 상태였다.
파리하게 질린 낯으로 중얼중얼 읊조리는데, 둘이 꼭 맞잡은 손부터 떼라는 의미 같기도 했다. 그 이상은 딱히 알고 싶지 않았다.
‘보아하니 아힌이 다 해결하겠네.’
한바탕 소란을 예감한 나는 아힌에게 이목이 집중된 사이 살금살금 자리를 떴다.
은밀히 거리를 벌리는 순간, 아니나 다를까 고성이 오가기 시작했다.
“절대 안 돼. 제나, 너 고작 여섯 살이야.”
“아빠가 어제 나더러 다 컸다고 그랬잖아, 장군 토끼라고. 지금 이브린처럼 한 입으로 두말하는 거야? 아빠 미워!”
“아빠가 밉… 다고?”
고용인들은 하던 일도 잊은 채 아힌과 제니아의 말다툼을 구경했다. 저 또라이 맹수가 제니아에게 맥을 못 추는 장면은 여러 번 봐도 신기한 모양이었다.
툭, 마침 하늘에서 날아든 전령새가 전서 하나를 떨어뜨렸다.
짤막한 내용의 전서를 확인한 내가 허하게 웃었다.
「친애하는 비비에게.
먼저 보낸 아인트가 모쪼록 비비와 제니아 그레이스의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요. 조만간 약혼 논의를 위해 정식으로 찾아뵙죠.
– 레오나 마니언츠」
역시나. 머지않아 아힌과 할아버님, 발렌스 님 사이에서 사자 영토를 치자는 주장이 불거질지도 모르겠다.
‘아차.’
그러고 보니 왜 다시 만나자는 말을 했냐는 질문에 대한 아힌의 답을 못 들었는데.
잠깐 뒤돌아본 나는 질린 낯으로 귀를 막았다.
“이익, 사자 너! 빨리 우리 누야한테서 떨어져…!”
“이제르, 내 사자 밀치지 마. 연약한 애라니까?”
저 소란 통에 휘말리기보다는 호기심을 미뤄 두는 편이 나았다.
나중에도 충분히 답을 들을 수 있으니까.
탁, 다시 발을 내딛는 동시에 애쉬와 눈이 마주친 나는 샐쭉 웃어 버리고 말았다.
“입가에는 뭘 묻힌 거야?”
산책 내내 안 보인다 싶더니, 결국 퀸의 딸기 밭 서리를 하고 온 모양새였다.
“애쉬, 오늘 저녁은 우리 둘이 오붓하게 먹을까?”
저녁이란 단어를 귀신같이 알아들은 애쉬가 우다다 달려왔다.
“아이참, 이제르. 내 다리 좀 놓고 얘기해!”
“누야, 제발 이러지 마. 자꾸 이러면 할머님께 다 이를 거야.”
“영악하긴, 넌 불리해지면 꼭 어머니랑 할머님을 찾더라? 쪼그마한 게 벌써부터 권력 맛을 알아 가지고.”
불거진 난장판을 뒤로한 우리는 오순도순 정원을 나섰다.
어느덧 날이 저물어, 램프 빛이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을 환히 밝혔다.
그레이스 저택은 오늘도, 그리고 앞으로도 시끄러울 예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