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emperature difference between the woman and the man RAW novel - chapter 22
평소처럼 면담을 시작했다. 현우가 벽에 세워져 있던 의자 두 개를 끌고 와 침대 발치에 놓았다. 초원은 핸드폰을 꺼내 녹음 앱을 열었다.
현재 시각은 11시 50분이었다. 10분만 있으면 연구실 인원 대부분이 자리에서 일어나 1층 구내식당이나 연구소 밖으로 흩어질 시간이었다. 다행히도 예산 부족으로 지하 4층 치명 등급 격리소를 제외하곤 격리부대나 경비 인력이 상주하지 않았다.
“그럼 시작할까요?”
초원의 말에 현우가 자리에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초원은 핸드폰을 무릎 위에 놓고 녹음 앱의 빨간 버튼을 눌렀다.
“김순자 님, 안녕하세요. 저는 홍초원 주무관이라고 하고 여기 남자분은 차현우 주무관입니다. 오늘 몇 가지 여쭤볼 게 있어서 왔는데요. 잠시 시간 괜찮으시면 저희랑 얘기 좀 나누시겠어요?”
여자는 초원을 흘끗 보더니 다시 TV에 시선을 고정했다. 현우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1962년에 20살의 나이로, 시골에서 올라오시는 할머니를 마중하러 서울역에 갔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람이었다. 당시 실종 기사 하나만을 남긴 채 그렇게 50년 넘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는데 일주일 전 서울역에 실종 당시 차림 그대로 나타난 것이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여자는 사람을 경계하며 전혀 입을 열지 않았다.
여자가 보고 있는 TV에는 로마를 배경으로 한 옛날 흑백 영화가 나오고 있었다.
초원은 뇌물이 통하길 기대하며 쇼퍼 백에서 과자 상자를 꺼냈다. 외할머니가 자주 드시던 딸기 맛 샌드 과자였다.
“이거 좋아하세요? 드시라고 사 왔는데⋯.”
상자를 열어 여자에게 내밀었다. 여자는 상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고개를 숙였다.
‘먹고 싶은데 부끄러워서 그러나?’
상자를 침대 발치에 놓고 가운데로 밀었더니 가까이 오는 걸 보고 여자가 움찔했다. 초원은 바로 물러난 다음 의자를 살짝 뒤로 빼서 앉았다.
잠시 둘을 번갈아 쳐다보던 여자는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과자 상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띠링.
여자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아, 선배⋯.”
초원은 잔뜩 인상을 썼다. 현우가 황급히 정장 재킷에서 핸드폰을 꺼내더니 무음 모드로 바꿨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초원은 불현듯 잊고 있었던 게 생각났다.
이제 시각은 12시 2분이었다. 20분만 더 있으면 된다. 닫힌 문 너머로 복도를 지나는 발소리와 웅얼거리는 말소리가 새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드세요. 드시라고 사 온 건데.”
현우가 활짝 웃으며 말하자 여자가 다시 상자로 손을 뻗었다. 그 모습이 꼭 겁을 잔뜩 집어먹은 떠돌이 강아지 같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두 사람은 여자가 과자를 먹으며 영화를 보는 모습을 잠자코 지켜봤다. 경계가 조금 풀렸는지 여자가 먹으라는 듯 상자를 밀었지만, 초원은 도저히 지금 뭘 먹을 기분이 아니어서 고개를 저었다.
12시 15분. 7분 남았다. 초원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옆에서 현우가 슬며시 웃었다.
“이거 맛있죠? 전에도 자주 드셨어요?”
어쨌거나 면담은 해야 했기에 초원은 다시 말을 걸기 시작했다. 뇌물이 통했는지 여자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전에 먹던 맛이랑 똑같나요? 우리 할머니는 옛날 그 맛이 아니라고 그랬는데.”
여자가 고개를 저었지만 맛이 똑같다는 건지 다르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순자 씨 할머니도 이거 좋아하셨나요?”
현우가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할머니랑 사이좋았나 봐요. 할머니 오실 때마다 서울역까지 마중 나갔어요?”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일주일 전에는 할머니가 아무리 기다려도 안 왔네요, 그쵸?”
여자의 눈빛이 먹구름이 낀 듯 흐려지더니 고개가 살짝 아래로 처졌다.
“할머니는 괜찮으시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파출소 순경 아저씨가 순자 씨 집까지 모셔다드렸어요.”
초원은 살짝 고개를 갸우뚱하며 현우를 바라보았다. 실종 기사에 그런 얘기가 있었던가? 어쨌거나 여자는 조금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놀랐겠어요. 갑자기 막 눈앞에 큰 건물이 나타나더니 사람들도 막 요상한 옷을 입고 다니고 말이죠. 요렇게 짧은 치마를 입고⋯.”
현우가 느닷없이 초원의 정장 스커트를 가리키자 그녀는 이게 무슨 소리냐는 듯 그를 노려보았다.
“아니, 내 눈에 짧다는 게 아니라 순자 씨 눈에 짧다는 거죠.”
현우가 손사래를 치며 극구 해명했다. 초원은 녹음 앱을 일시 정지시켰다.
“선배, 22분이에요.”
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자가 의아한 눈으로 올려다봤지만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초원은 바로 관찰실로 가 라텍스 장갑 두 장을 상자에서 뽑아 현우에게 넘겼다.
“지하 3층부터 선배 출입 카드 쓰면 안 되는 거 알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있죠?”
현우가 긴장한 기색이 옅게 어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39분까지 꼭 와야 해요. 오기 전에 카드 폐기하고요.”
그는 잘 알고 있다는 듯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 폰 줘요. 위치 기록 될 수 있으니까.”
“아, 그렇지.”
초원은 핸드폰을 받아 정장 재킷에 넣었다.
“잘하고 와요.”
문밖을 살피다 밖으로 나가려는 현우의 손을 초원이 꽉 잡았다. 그가 슬며시 웃으며 걱정 말라는 듯 손을 한 번 쥐더니 비상계단 쪽으로 사라졌다.
12시 24분. 이제 15분 남았다.
초원은 도저히 이 산만한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일어나서 방 안을 돌아다니면 안정이 될까 싶었지만 괜히 김순자 씨를 자극하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얌전히 자리에 앉아 죄 없는 입술과 펜 끄트머리만 깨물었다.
시간이 너무 느리고도 빠르게 흘러갔다. 이제 겨우, 그리고 아직도 7분 남았다.
여자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조금 전 현우가 펼친 허무맹랑한 가설에 조금씩 반응을 보이는 것 같더니 지금은 멍하니 영화만 보고 있었다.
초원도 달리 말을 걸지는 않았다. 혹시나 입을 열기 시작해서 누군가에게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버리면 끝장이었으니까.
선배는 지금 어디쯤 있을까? 4245번 개체가 격리실에 붙어 있어야 하는데, 또 혼자 도망 다니고 있는 건 아니겠지? 145번 물체까진 무사히 갔을까? 5분밖에 안 남았는데. 설마 들킨 건 아니겠지? 선배, 총은 차고 있었던가? 아, 진짜 미치겠네.
긴 한숨 소리에 여자가 초원을 곁눈질했다. 초원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차라리 직접 뛰는 게 낫지. 얌전히 앉아 기다리는 건 정말 고역이었다.
아무리 전적이 있어도 그놈이 다시 나한테 달려들 이유가 없는데, 그리고 내가 저주받은 그림에 가까이 갈 사람도 아니고⋯. 어째서 팀장님은 굳이 나보고 가지 말라고 그렇게 신신당부를 하신 걸까? 아무리 그래도 이런 일에는 현우 선배보다 내가 더 믿음직스럽지 않나? 설마 내가 여자라서 그러나?
제게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이렇게까지 과보호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속으로 투덜대는데 뒤에서 출입 카드 리더기의 삑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12시 36분. 3분 일찍 끝냈네.
초원은 활짝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
현우는 복도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장갑을 꼈다. 비상계단 문을 조심스레 열고 다시 귀를 기울였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혹시 몰라 발뒤꿈치를 들고 계단을 내려간 그는 B3라고 적힌 문 앞에 서서 문고리를 조심스레 돌렸다.
고개를 빼꼼 내밀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다들 한창 식사를 하고 있을 시간이니까.
문밖으로 발을 성큼 내디뎠다가 흠칫했다. 복도에 구두 소리가 이렇게 크게 울리는지 이제야 알았다. 현우는 속도를 낮추고 살금살금 걷기 시작했다.
비상계단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돌고 복도 끝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돌아 세 번째 문이 남자가 있는 방이었다.
다행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현우는 4245번 개체가 있어야 할 방 앞에 서서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바늘은 12시 26분을 가리켰다.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고 재킷 안쪽 주머니에서 보안 2등급용 출입 카드를 꺼내 출입문 옆 리더기에 갖다 댔다. 빨간 불이 녹색으로 바뀌면서 잠금장치가 철컥 열렸다.
현우는 방 안에 직원은 없길 바라며 문을 살짝 열었다. 문틈 새로 보이는 관찰실은 어두웠다. 아무런 인기척도 느끼지 못한 그는 문을 조심스레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 망할⋯.”
문이 닫히며 다시 잠기는 순간 낮게 중얼거렸다. 불부터 켜는 걸 깜빡했더니 사방이 깜깜했다. 핸드폰이라도 꺼내서 스위치를 찾으려던 현우의 입에서 다시 ‘망할’ 소리가 튀어나왔다.
더듬더듬 문 옆의 벽을 더듬다 보니 스위치 같은 게 느껴졌다. 누르자 관찰실과 안쪽 방의 불이 켜졌다.
현우는 방으로 고개를 내밀고는 남자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이 격리실의 벽은 영화에서 본 정신병원 병실처럼 사방이 하얀 패드로 덮여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며 자세히 들여다보자 한쪽 구석에서 흰 덩어리가 떨고 있는 게 보였다.
현우는 안으로 발을 디디려다 멈칫했다.
발자국이 남을 게 분명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갈까 싶었지만 최대한 리스크를 줄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최은재 씨.”
구석에 웅크리고 앉은 남자가 현우의 목소리를 듣고 몸을 떨었다.
“최은재 씨, 접니다. 어제 봤죠?”
그제야 고개를 들어 현우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가가 벌겠다.
“여기서 빠져나가게 해 드릴 테니까 나오세요.”
남자는 그 말을 듣더니 반색하며 자리에서 뒤뚱뒤뚱 일어났다. 남자가 방 가운데쯤 왔을 때 현우는 남자가 왜 뒤뚱뒤뚱 걷는지 알 수 있었다. 구속복을 입어서 제대로 중심을 못 잡은 남자가 넘어졌다. 현우는 한숨을 쉬며 시계를 확인했다. 12시 29분이었다.
남자가 구르다시피 관찰실까지 왔을 때 현우는 구속복 버클을 재빠르게 풀며 설명을 시작했다.
“같은 층에 저주받은 그림이라고 있어요. 진짜 저주받은 건 아니고 시골 봄 풍경이 그려진 유화인데 가까이 가면 손이 튀어나와서 끌고 들어가요. 나쁜 덴 아니고 그림 속 낙원 같은 덴데 우리 청 직원들이 자꾸 현실 도피하려고 뛰어들어서 저주받았다고 하는 거예요. 은재 씨 거기로 갈 거예요. 괜찮죠?”
남자가 구속복을 벗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복도를 향해 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두 사람은 재빨리 밖으로 나와 문을 조용히 닫았다.
현우가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이제 여기서 비상계단 쪽으로 돌아간 다음에 문 2개를 지나 왼쪽으로 꺾으면 나오는 복도의 맨 끝 방에 그림이 있었다.
두 사람은 빠른 걸음으로 코너를 향해 걸었다. 코너에 멈춰 선 현우가 비상계단으로 향하는 복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무사히 비상계단 입구를 지나 두 번째 문으로 다가가는데 앞쪽에서 말소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젠장!’
달리 피할 곳이 없었던 현우는 그 두 번째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점심시간 면담실에 누가 있을 가능성은 적었다. 안을 재빨리 확인한 두 사람은 면담실로 들어와 문을 살며시 닫았다.
현우는 문에 귀를 대고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12시 33분이었다. 성인 남성 둘의 목소리가 오른쪽에서 다가오더니 문 앞을 지나 멈춰 섰다.
‘제발 엘리베이터는 기다리지 말아라.’
속이 타들어 갔다. 일산 연구소의 더럽게 느린 엘리베이터를 저 사람들이 기다린다면 그림이 있는 방에 도착하기도 전에 CCTV가 다시 켜질 게 분명했다.
목소리가 문 근처에서 잠시 웅얼거리더니 끼익, 문 닫히는 소리가 나며 사라졌다. 현우는 살짝 문을 열어 복도를 확인하곤 한숨을 내쉬었다.
잽싸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양 갈림길을 확인하고 두 사람은 왼쪽 끝 방으로 뛰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었다.
복도 끝에 이르자 안주머니에서 출입 카드를 꺼내 리더기에 댔다. 문이 열렸다.
안을 확인할 시간이 없었던 현우가 문을 활짝 열고 남자를 들여보냈다. 이미 노란 조명이 켜져 있는 격리실을 둘러보았지만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방 가장 안쪽 벽에는 가로, 세로 1.5m 정도 되는 캔버스가 걸려 있었다. 캔버스 위에는 개천과 물레방아, 오두막이 그려져 있고 그 위로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그림을 막아 둔 유리를 본 현우는 방구석에 놓인 소화기를 집어 들었다.
“저는 가까이 가면 안 돼요. 이걸로 유리를 깨고 들어가세요.”
멍하니 그림을 바라보던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소화기를 받아 들었다.
남자가 앞으로 걸어가더니 소화기를 유리 가운데로 휘둘렀다. 쿵 소리와 함께 유리에 패인 자국이 생겼다. 남자는 소화기를 한 번 더 휘둘렀다. 유리가 강화 유리인지, 아니면 남자의 체력이 쇠한 탓인지 유리는 쉽사리 깨지지 않았다.
마음이 급해진 현우가 달려가 소화기를 빼앗았다. 그림 옆으로 뛰어간 그는 유리 가장자리를 내려쳤다.
순간 유리에 쫘악 금이 가며 유리 조각이 바스스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그림 속에서 기다란 손이 튀어나오더니 남자의 팔을 잡아끌었다. 방심하고 있던 현우를 향해서도 손 하나가 튀어나오더니 넥타이를 움켜쥐려 했다.
놀란 그는 뒤로 펄쩍 뛰었다. 몇 걸음 더 물러나자 3m 넘게 거리가 벌어졌는지 손이 그림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남자는 이미 그림 속으로 거의 빨려 들어가 발끝만 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현우는 숨을 몰아쉬었다.
***
“홍 주임님, 배고프실까 봐.”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는 검은 비닐봉지와 음료수 두 병을 들고 있었다.
초원은 최선을 다해 웃는 표정을 유지했다. 평소엔 이런 일 없었는데 왜 하필 오늘⋯.
“안 그러셔도 되는데.”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건데 끼니를 거를 수 있나요.”
‘다 끝나고 먹겠다고 아까 그랬잖아, 이 아저씨야!’
격리팀 주임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봉투와 음료수를 건넸다.
“근데 남자 주임님은 어디 가셨어요?”
“아⋯, 화장실 급하다고 금방 나갔는데 못 보셨어요?”
“아, 그렇구나.”
남자는 갈 생각이 없는지 현우가 앉았던 의자에 떡 하니 앉았다.
“점심 드시고 오시는 길이세요?”
“네, 오늘 구내식당 메뉴가 별로여서 나가서 분식집에서 돈가스 먹고 왔네요. 그러고 홍 주임님 생각나서 김밥 좀 사 왔어요. 참치김밥 좋아하시죠? 참치김밥은 안 좋아하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좋아하죠, 당연히.”
주임님이 사 주는 건 빼고요.
“드세요. 배고프실 텐데⋯.”
그 순간 문밖에서 삑 소리가 났다. 문을 열고 들어온 현우는 격리팀 주임을 보고 그 자리에 굳었다.
“화장실 되게 금방 갔다 왔네요, 선배.”
“그러게요. 홍 주임님이랑 둘이서 좋은 시간 보내고 있었는데.”
“다시 나갈까요?”
현우가 능청스럽게 웃으며 문을 가리키고 초원은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숫자 8이 9로 바뀌고 있었다.
“들어와서 김밥이나 먹어요. 여기 주임님이 사 오셨어요.”
“아, 미친. 왜 느닷없이 친한 척이람?”
초원은 연구소 밖으로 나와 땡볕 속을 걸으며 분통을 터트렸다.
“아까 홍 주임이 너무 쓸데없이 많이 웃어 줘서 그런 거잖아요. 홍 주임은 스파이 같은 거 못 하겠네. 평소대로 해야 하는 데 너무 오버해 가지고⋯.”
“와, 선배. 그거 한 번 했다고 무슨 세기의 스파이라도 된 줄 아나 봐요. 그냥 이참에 국정원으로 옮기시든가요.”
“아니, 됐어요. 할 짓이 못되더라고요.”
현우는 손사래를 치며 겸연쩍게 웃었다.
“카드는 처리했어요?”
“네, 잘라서 변기에 내렸어요.”
“안 들켰죠?”
현우가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 다행이다. 이제 사무실 가서 팀장님 앞에서 실실 웃고 다니는 일만 남았네요. 그럼 아시겠지.”
“그랬다가 팀장님이 참치김밥 사다 주기 시작하면 어쩌려고요?”
“아, 헛소리 좀 작작 해요. 팀장님 나한테 눈곱만큼도 관심 없는데⋯.”
“그걸 어떻게 알아요?”
현우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어떻게 아냐는 말에 속이 뜨끔했던 초원은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이제 그 그림에 어떻게 빨려 들어가는지 봤으니 속 시원해요?”
현우는 신이 난 듯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미루다 퇴근 시간이 되었다. 초조히 팀장실 문만 바라보던 초원은 더는 미룰 수 없는 지경이 되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젠 망설이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문 앞에서 서성대고 있으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까.
‘에라, 모르겠다.’
눈을 질끈 감고 문을 두드려 버렸다.
“네.”
“팀장님.”
팀장실 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밀었다. 초원의 얼굴을 본 팀장이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화 안 나셨나?’
“앉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