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emperature difference between the woman and the man RAW novel - chapter 25
“그러니까 횟집으로⋯.”
승준은 말하다 말고 한숨을 크게 쉬었다.
‘말이 통해야 말이지.’
“아름 씨, 다이어트 그만해도 될 것 같은데? 너무 비쩍 말라도 그래.”
병훈이 분위기 바꾸기에 나섰다.
“맞아요. 아름 씨는 토끼 같은 귀여움이 생명인데 세상에 뼈밖에 없어서 귀여운 토끼는 없지 않습니까?”
옆에서 으뜸까지 거드니 아름은 기분이 한결 좋아져 생글생글 웃었다.
“진짜요?”
“그러네, 아름 씨 진짜 토끼 같긴 하다.”
초원은 아름의 머리에서 토끼 귀가 솟아오르는 상상을 했다. 꽤 잘 어울렸다.
“헤헤, 그럼 초원 주임님은 무슨 동물이지? 음⋯.”
“고양이 아닌가?”
말없이 식사를 하던 현우가 불쑥 끼어들었다.
“아니지. 말티즈지.”
병훈이 고양이는 아니라는 듯 손가락을 저으며 말했다.
“말티즈? 너무 앙증맞은 거 아니에요?”
초원은 그럴 리가 없는 병훈이 귀여운 강아지에 자신을 빗댄 게 어리둥절했다.
“앙증맞게 생겨서 앙칼지잖아. 나는 개 중에서 말티즈랑 치와와가 그렇게 무섭더라고.”
‘그럼 그렇지.’
초원은 병훈을 앙칼지게 쏘아보았다.
“시끄러워요, 이 나무늘보.”
“햄스터 아닌가?”
승준이 불쑥 내뱉었다.
“네?”
모두가 이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 말은 초원 씨 뭐 먹을 때 오물오물 먹는 게 햄스터 같지 않나?”
은근히 입꼬리를 올리고 저를 쳐다보는 승준의 시선이 불편해진 초원은 오물오물 씹던 칠리새우를 그냥 꿀꺽 넘겼다.
“팀장님, 팀장님 앞에선 홍 주임이 햄스터처럼 구는진 몰라도 저희 앞에선 사나운 맹수입니다.”
별생각 없이 병훈이 던진 말에 승준은 어쩐지 기분이 좋아 웃었다.
‘햄스터라니⋯.’
자신이 그렇게 작고 깜찍한 동물일 리가 없다며 초원은 씁쓸하게 웃었다.
‘대체 저 남자는 무슨 생각일까? 앞으론 불편해서 밥도 제대로 못 먹겠네.’
초원은 최대한 오물오물하지 않고 밥을 먹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무슨 동물일까 곰곰이 생각했다.
‘현우 선배는 강아지과. 포슬포슬하게 생긴 시바견이려나? 으뜸 씨는 근육질에 몸집이 큰 게 캥거루 닮았네.’
캥거루라니. 혼자서 풋 웃다가 고개를 드는데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던 승준과 눈이 마주쳤다.
초원은 그 눈빛이 먹잇감을 노리는 흑표범 같다고 생각했다.
먹을 만큼 먹은 3팀 사람들은 마지막 코스로 후식을 먹기 시작했다.
“나 이거 무슨 맛인지 궁금한데. 한 입만 먹어 봐도 돼요?”
초원이 먹고 있던 인절미 아이스크림을 가리키며 현우가 물었다. 초원은 먹던 숟가락으로 한술 크게 떠 현우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그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 승준은 심장에 바늘이 파고드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이제 어디로 가죠? 팀장님, 어디로 갈까요?”
“글쎄요. 여러분 가고 싶은 데로 가죠.”
“글쎄요, 저는 됐으니 여러분 재밌게 노세요.”를 기대했던 병훈은 오늘따라 팀장이 왜 이럴까 싶었다.
“맨정신으로 노래방 가기는 그렇고⋯. 홍차 주임 이 근처에 마실 만한 데 있어?”
병훈은 여기서 집이 멀지 않은 두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초원은 어깨를 으쓱하곤 옆에 앉은 현우를 바라봤다. 현우는 열심히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누구?”
현우가 고개를 들더니 말없이 활짝 웃었다.
‘아⋯.’
“어제 한국 왔는데 오늘 바쁘다더니 보자네요.”
그렇게 말하는 그는 세상을 다 가진 표정이었다.
“저는 2차 못 갈 것 같은데요.”
“에이, 차 주임 어딜 가려고. 아름 씨 생일 축하 아직 안 끝났는데.”
“저는 못 가지만 여기 근처에 괜찮은 이자카야 있는데. 가는 길 알려 드릴게요.”
승준은 이해할 수 없었다. 초원의 어두워진 표정을 어째서 현우는 눈치채지 못하는 걸까.
아름의 생일 축하를 핑계로 온 2차인데 정작 주인공인 아름은 피곤하다며 집에 가 버렸다. 그렇게 남은 네 사람은 현우가 추천한 이자카야에서 맥주와 하이볼을 마시기 시작했다.
초원은 오늘따라 술이 술술 들어갔다. 안주가 좋아서도, 술맛이 좋아서도 아니었다. 그냥 잔뜩 취해서 자신이 얼마나 바보 같은지를 잊고 싶을 뿐이었다.
‘선배는 지금쯤 즐거운 시간 보내고 있겠지⋯. 나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자신보다 어린 아름은 금세 발을 뺐는데 초원은 어장 안에서 아직도 출구를 못 찾고 허우적대고 있었다. 그것도 바보같이 제 발로 들어간 어장에서⋯.
평생을 함께하자던 현우는 평생 초원을 여자로 보지 않을 게 분명했다. 자신이 원하는 건 그게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도 못 하고 초원은 비겁하게 취하는 길을 택했다.
“초원 씨, 너무 급하게 마시는데⋯.”
옆에 앉은 승준이 물잔을 채워 초원의 앞에 놓았다.
“홍 주임님, 안주도 좀 같이 드시면서 마시시죠.”
으뜸이 테이블에 놓인 모둠꼬치와 연어회를 가리켰다.
“홍 주임이 오늘 술이 좀 받는가 본데, 속도 조절해. 그러다 쓰러지면 어쩌려고? 나 홍 주임 집 어딘지도 몰라.”
“그럼 버리고 가시든가요.”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술 취한 여자를 버리고 가냐?”
“내가 초원 씨 집 아니까 이따가 데려다주면 되지.”
그 말에 초원은 다른 사람들이 보는 것도 잊고 미심쩍은 눈빛을 보냈다. 승준은 멋쩍은 듯 고개를 돌렸다.
남자 셋이 데드리프트며 야구며 초원은 관심 없는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녀는 계속 술잔을 기울이면서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팀장님, 그럼 저번 토요일 경기는 보셨어요?”
“아뇨, 약속이 있어서.”
초원은 속으로 ‘약속은 무슨⋯. 느닷없이 불러내 놓고⋯.’라고 중얼거렸다.
“장난 아니었는데.”
“생중계는 못 보고 나중에 하이라이트만 챙겨 봤죠.”
“그걸 포기하시고 가실 정도면⋯. 아아, 이거 감이 온다. 여자네요.”
병훈이 요란스럽게 손을 비비며 말하자 승준은 쑥스럽게 웃었다.
“웃으시는 것 보니까 맞네. 팀장님, 그럼 꼭 대답하셔야 하는 질문이 있지 않습니까?”
뜸을 들이는 병훈을 보고 승준이 눈썹을 추켜세웠다.
“예쁩니까?”
승준이 웃기도 전에 옆에 있던 초원이 먼저 웃음을 터트렸다.
‘남자들이란⋯. 어이가 없어서 정말.’
“당연하지. 숨 막히게 예쁘지.”
초원은 얼굴이 달아오르는 건 술 탓이라고 생각했다.
“오오, 누구 닮았어요?”
“글쎄⋯.”
“사진 없으세요?”
“아, 그러고 보니 없네.”
“그럼, 옆에 있는 홍 주임이랑 비교하면요?”
병훈도 취할 대로 취한 모양이었다. 생각 없이 한 말에 괜히 찔린 초원은 벌컥 짜증을 냈다.
“그만 좀 해요. 왜 거기서 내가 나와요?”
“아니, 으뜸 씨랑 비교해 달라고 할 순 없잖아.”
“아, 나 집에 갈래요.”
벽 쪽에 앉아 있던 초원이 벌떡 일어서면서 비키라는 듯 승준을 노려봤다. 그는 놀란 듯 초원을 응시하더니 천천히 일어섰다.
“오늘은 이만하고 갑시다.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
걸어서 10분 거리밖에 안 되니까 알아서 가겠다는데 승준은 취해서 안 된다며 굳이 여기까지 따라왔다.
집 앞에 도착한 초원은 이제 됐으니 가라며 등을 돌리고 건물 입구로 향했다. 텅 빈 골목길에 들리는 건 초원의 발소리뿐이었다. 비밀번호 패드에 손가락을 뻗던 초원은 갑자기 화가 났다.
가라는 데 가지도 않고 우두커니 서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남자가 이유 없이 미웠다.
초원은 몸을 휙 돌려 다시 승준에게 다가갔다.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그의 양팔을 매달리다시피 붙들고 따지듯 물었다.
“조승준 씨, 대체 나한테 뭘 원하는 거예요?”
가로등 불 아래에서 떨리는 눈으로 초원을 내려다보던 승준은 두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끌어당겼다.
놀란 초원은 그의 가슴팍을 양손으로 밀었지만, 승준은 그녀를 단단히 끌어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 밀어내기를 포기한 초원이 자포자기한 듯 물었다.
“저랑 자고 싶으신 거예요?”
그제야 팔이 스르륵 풀렸다. 초원은 술기운에 젖어 풀리는 눈을 부릅뜨고 그의 눈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자고 싶으신 거면 자 드릴 수 있어요. 그게 뭐라고요, 그쵸?”
이제 승준의 얼굴은 얼음장처럼 싸늘하게 굳어져 있었다.
“근데 혹시 제 마음을 원하시는 거라면 그건 못 드려요.”
“차현우 씨 때문인가?”
초원은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불쑥 튀어나오자 놀라 시선을 떨어트렸다.
‘어떻게 아신 거지?’
그러다 자신이 얼마나 바보 같은지 다시금 깨달았다. 실소가 절로 나왔다. 초원은 어리석은 자신을 향해 쓰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저 되게 미련하죠?”
“아니. 그럼 나도 미련한 건가?”
단호하게 묻는 그의 눈빛에 초원은 어쩐지 숨이 가빴다. 눈앞이 빙빙 도는 것 같아 그의 가슴팍에 손을 짚었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그것뿐이면 얼마나 좋겠어요. 근데 그게 다가 아니란 말이에요.”
“그럼 나한테 얘기해 봐요.”
승준이 다정하게 그녀의 등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초원은 모든 걸 털어놓고 매달려 울고 싶은 충동을 꾹꾹 누르며 입을 뗐다.
“팀장님, 결혼 생각 있으세요?”
승준은 잠자코 초원을 내려다보다가 되물었다.
“초원 씨는?”
“저는 없어요.”
“그럼 나도 없어요.”
77억이 사는 이 세상에 여자라고는 초원밖에 없는 듯, 승준은 간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 남자 왜 이러지, 정말.’
초원은 울 것 같아 고개를 다시 숙였다. 그녀의 등을 천천히 어루만지던 손 하나가 점점 위로 올라오더니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 손길에 얌전히 몸을 내맡기고 있다 보니 초원은 어느새 승준의 품속에 있었다.
그의 향기는 포근했다. 이성과의 치열한 싸움도 잊을 정도로. 이 남자의 품속이라면 어떤 일이든 괜찮을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초원은 그의 단단한 어깨에 고개를 묻고 그 향기를 깊이 들이켰다. 그런 그녀를 애틋하게 내려다보던 승준이 이마에 입을 맞췄다. 초원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가 입술을 덮는 부드러운 감촉에 몸을 떨었다.
늦은 밤 고요한 골목길, 두 입술이 서로를 탐하는 소리만 가득했다.
부드럽게 감기는 혀와 포근하게 자신을 감싸는 입술, 얼어붙은 심장을 녹이는 따뜻한 숨결에 초원은 점점 마음의 빗장이 풀려 가는 걸 느꼈다. 그때 불현듯 정신을 차린 이성이 속삭였다.
‘안 돼.’
초원은 아쉬움을 참고 천천히 입술을 뗐다. 저 부드러운 혀에 날카롭게 베여 피를 흘리게 될 날이 오는 게 무서웠다.
“팀장님, 저한테 잘해 주지 마세요.”
“어째서?”
희열에 달뜬 눈을 미처 가라앉히지도 못하고 자신을 밀어내는 말을 들은 승준이 물었다.
“새드엔딩일 게 뻔하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초원은 셔츠를 붙들고 있던 손을 풀고 뒤돌아 걸었다. 텅 빈 골목길, 들리는 건 여전히 초원의 발소리뿐이었다.
***
초원은 청명한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았다. 그렇게 비 오라고 빌었는데 날씨가 이렇게 화창할 수가 있을까.
청계산은 울긋불긋한 단풍이 한창인 만큼 금요일 낮에도 사람이 많았다. 이런데 여기서 본청 전체 가을 산행이라니⋯.
애초에 정상까지 갈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는데 동의한 3팀은 적당히 경치 구경이나 하며 올라가다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청에서 나눠 준 도시락을 폈다.
“아, 여기서 막걸리 마시면 딱인데.”
병훈이 반찬으로 들어 있던 무말랭이를 입에 넣으며 말했다.
“이따 내려가서 코 삐뚤어지게 마실 텐데요, 뭐.”
현우의 말에 병훈이 그건 아니라는 듯 손가락을 흔들었다.
“난 오리고기엔 소맥이 낫더라고.”
“오리고기는 뭔들⋯.”
초원은 억지로 끌려가는 가을 산행은 싫었지만 끝나고 먹는 오리고기 때문에 회사를 용서할 수 있었다.
“앗! 안 돼!”
젓가락이 엇갈리면서 들고 있던 김밥이 땅에 떨어졌다.
‘아까워라⋯.’
초원은 뱃살이 될 기회를 놓치고 사망한 김밥을 아쉬운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얼른 주워서 먹어.”
병훈이 김밥을 가리키며 줍는 시늉을 했다.
“뭐야, 땅거지도 아니고 저걸 왜 주워 먹어.”
희경이 인상을 찌푸렸다.
“흙 좀 묻은 거 털고 먹으면 되죠. 저거 좀 먹는다고 죽나.”
“그럼 박 주임이 주워 먹으면 되겠네.”
흙바닥에 얌전히 잠든 김밥을 애도하며 희경과 병훈이 티격태격하는 걸 구경하던 초원은 맞은편에 앉은 승준과 눈이 마주쳤다. 몇 주 전만 해도 자신을 노리는 범 같았던 눈빛이었는데, 요즘은 슬픈 강아지 눈이었다.
초원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김밥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내 거 하나 줄까요?”
옆에 앉은 현우가 도시락을 내밀었다.
“아뇨, 됐어요. 아직 많이 남았는데.”
“근데 왜 그렇게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어요?”
“내가 언제요?”
“금방. 나는 또 김밥 때문에 속상해서 그러는 줄 알았네, 하하.”
‘차라리 김밥 때문에 속상한 거면 좋겠네.’
그날 밤 이후로 승준은 별말이 없었다. 더는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고, 그저 가끔 저렇게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냥 자신을 미워하고 힐난하면 차라리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이럴 거면 그때 키스는 왜 했냐고. 왜 사람을 가지고 두 번씩이나 장난을 치냐고.
“또 한숨 쉬었어. 홍 주임 요즘 무슨 고민 있어요?”
현우가 걱정 어린 눈길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