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emperature difference between the woman and the man RAW novel - chapter 30
이러고 어떻게 차를 타야 할지 막막해하는데 뒤에서 병훈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어? 저거 뭐야?”
그가 손가락으로 으뜸의 뒤를 가리켰다.
‘그냥 하늘 아닌가?’
그저 밤하늘인 줄 알았던 것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움직였다. 놀라 심장이 멎을 듯했다. 저 멀리서 장벽처럼 높은 파도가 빠르게 몰려오고 있었다.
“아, 망할. 꼭 잡으십쇼.”
으뜸이 엔진 조향타를 병훈에게서 뺏어 잡고 방향을 틀더니 속도를 높였다. 초원은 보트 가장자리를 꼭 잡고 아이를 끌어안았다.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아이에게 하는지 제 스스로에게 하는지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시야의 가장자리로 검은 장벽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초원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아이가 입은 구명조끼의 끈을 단단히 제 조끼에 묶었다. 머릿속으로 자꾸만 얼음장 같던 검은 바다의 기억이 밀고 들어왔다.
아무리 속력을 내도 고무보트로 파도를 앞지르는 건 무리였다. 파도가 불과 몇 미터 안으로 다가오자 초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안 죽어. 구명조끼도 입었잖아.’
아무리 이성이 달래려고 해도 교감 신경이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했다. 도망가고 싶어도 이 망망대해에 발 디딜 곳은 없었다.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심장이 쿵쿵 울리는 소리에 귀가 먹는 순간, 보트 뒤쪽에 꽝 하고 무언가가 부딪히더니 충격을 받은 보트 후미가 위로 들렸다.
“어!”
“아악!”
그대로 파도가 선미로 밀려들어 오면서 보트가 뒤집혔다. 초원은 아이를 끌어안은 채로 차디찬 바닷속으로 곤두박질쳤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위로 올라가려고 팔다리를 허우적댔지만 계속 거센 파도에 휩쓸리기만 할 뿐이었다. 휘몰아치는 물살 속에서 겨우 시린 눈을 떴지만 어디가 위고 어디가 아래인지 분간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러다 구명조끼고 뭐고 정말 죽겠다 싶었을 때 소용돌이치던 물살이 순식간에 찰싹이는 수준으로 잠잠해졌다.
초원은 팔을 휘저어 물 밖으로 머리를 끄집어냈다.
“하아, 하아⋯.”
숨을 고르며 아이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물에 홀딱 젖은 꼴로 역시 홀딱 젖은 강아지 인형을 아직도 부둥켜안고 아이는 그녀의 옆을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초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묶어 놓길 잘했네.’
“괜⋯.”
괜찮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너울거리던 바닷물이 자꾸 얼굴을 때리며 입속으로 들어왔다. 바닷물의 짠맛에 입속이 아렸다. 초원은 입을 꾹 다물고 아이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다들 어딨지?’
병훈과 으뜸을 찾아 주변을 돌아보았다. 저 멀리 머리 두 개와 오렌지색 조끼가 엎어진 고무보트를 향해 헤엄치고 있었다.
‘멀리도 떠내려 왔네.’
초원은 잠시 숨을 고르고 한 손으론 아이의 구명조끼를 붙든 채 보트를 향해 팔다리를 저었다. 아이는 바다에 빠졌는데도 겁에 질리거나 동요하는 구석 하나 없이 얌전히 딸려 왔다.
‘이따가 칭찬해 줘야지.’
한참을 아이를 끌고 물살과 씨름하며 헤엄을 치다 보니 슬슬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고지가 코앞이었다. 네다섯 번만 더 팔다리를 저으면 보트를 붙잡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손끝에 잡힌 아이의 구명조끼가 가벼워졌다.
“안 돼!”
파도가 입속으로 치고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초원은 비명을 질렀다. 구명조끼 버클을 풀었다. 그것도 아이가, 제 손으로.
파도에 실려 떠내려가는 아이를 잡으려고 급하게 방향을 틀었다가 그대로 굳었다.
이 차디차고 거친 바닷속에서 아이는 강아지 인형을 꼭 끌어안은 채로 평온하게 웃고 있었다.
파도가 다시 거세게 쳤다. 겨우 잦아들었을 때 아이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초원을 향해 다가오는 어선의 노란 불빛이 검은 바다 위로 너울댔다. 아이를 집어삼키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렁이는 수면을 멍하니 응시했다. 눈물이 채 흐르기도 전에 찰싹이는 파도에 쓸려 사라졌다.
‘미안해, 난 그것도 모르고⋯.’
‘너 진짜 밉다.’
노란 불빛 아래, 거울 속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울 것 같은 얼굴로 쏘아보는 여자를 초원도 지지 않고 노려보았다.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인간이네.’
현우를 구할 마지막 희망이 물거품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 ‘희망’은 자신을 이용해 사욕을 채우려는 어른들의 밤바다처럼 검은 속셈에 절망해 저승사자의 손을 잡았다. 그 이기적인 어른의 리스트 마지막쯤에는 ‘홍초원’, 이 세 글자도 새겨져 있겠지.
‘시온아, 미안해⋯.’
세면대를 잡은 손이 파르르 떨렸다. 뚝뚝, 하얀 도자기 위로 눈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좁은 욕실을 울렸다. 더는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변기 위에 웅크리고 앉은 채로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뭐라고 하지?’
현우에게 살려 주겠다고 그렇게 철석같이 약속했는데 서울 가서 볼 면목이 없었다.
‘팀장님은?’
무슨 일 안 생길 수도 있다며 큰소리 땅땅 치고 왔는데, 정말 무슨 일, 그것도 관리 대상이 구출 작전 중에 저승으로 가는 대형 사고가 터졌다.
‘엄청나게 혼나겠지?’
차라리 팀장이 혼내고 화내면 낫지. 싸늘하게 굴기 시작하면 어쩌나 싶어 덜컥 겁이 났다.
‘내가 얼마나 미울까? 나도 내가 이렇게 미운데, 팀장님 눈에는 또 얼마나 미워 보일까? 그런데 언제부터 나는 이 남자에게 미움받는 게 이렇게 무서웠던 거지?’
훌쩍임이 점점 흐느낌으로 변해 갔다.
손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울던 초원은 욕실 밖에서 문 열리는 소리와 분주한 발소리가 들리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언제까지나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젖은 수건으로 대충 눈물을 닦고 욕실 밖으로 나갔다.
병실에는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병원 침대 테이블에 덩그러니 놓인 아침 식사만이 모락모락 김을 내고 있었다.
입맛이 있을 리가 없었다. 침대 옆 캐비닛에 식판을 옮겨 놓고 침대에 누웠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지만 얇은 이불 너머로 따가운 아침 햇살이 새어 들어왔다. 퉁퉁 부어 아린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은 자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똑똑.
한참 뒤척이는데 누군가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팀장님인가?’
새벽, 응급실에서 병훈이 죄지은 사람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통화를 하는 걸 멀찍이서 지켜봤었다. 그때 출발했다면 지금 즈음이면 도착할 시간이었다.
“네.”
초원은 잠겨서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짰다. 문이 열리더니 승준이 아니라 처음 보는 중년 남자 둘이 저벅저벅 걸어 들어왔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그녀는 이불을 가슴 위로 끌어 올리고 팔짱을 꼈다.
“국정원 요원 맞습니까?”
“네?”
“경남지방경찰청에서 나왔습니다.”
둘 중에 그나마 말랐고 안경을 낀 남자가 무뚝뚝하게 소속을 댔다. 그제야 초원은 병훈이 국정원인 척하고 경찰청에서 기도원 정보를 받았다는 게 기억났다.
“무슨 일이시죠?”
“무슨 일인지는 우리 쪽에서 물어야 하는 거 아인가?”
땅딸막한 다른 남자가 침대 가까이 다가오더니 위협이라도 하려는 듯 허리춤에 손을 짚었다.
“저는 모르니까 박병훈 주무관님이랑 얘기하시죠.”
남자는 잠시 초원을 노려보더니 팔뚝을 걷으며 한 발 다가왔다.
“아니, 그쪽은 같은 국정원 사람 아인가? 모른다고 잡아떼면 단교?”
안경을 낀 남자가 말리는 척 다른 남자의 어깨를 짚었다.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기도원이 하루 사이에 다 난장판이 돼 가지고. 주범 다 도망가삐고⋯. 공들여 수사한 거 다 망쳐 놓고 모른다는 말이 나오는교?”
왜 담당자인 병훈에게 가지 않고 초원에게 와서 이러는지야 뻔했다. 아무리 국정원이라도 수사를 망쳤으니 분풀이는 해야겠고, 분풀이에는 남자 둘보다는 만만한 여자 하나가 제격이겠지.
‘치졸하긴⋯.’
“수사하면서 증거 안 모으셨나 보죠? 도망갔으면 수배해서 잡는 게 경찰이 하는 일 아닙니까?”
초원의 대꾸에 남자는 열이 받은 듯 고개를 뒤로 젖히더니 목을 좌우로 꺾기 시작했다.
“와, 씨⋯. 이 여자 말하는 거⋯.”
“당신들 뭐야?”
익숙한 중저음이 열린 문 너머로 울리더니 승준이 병실 안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왔다. 그를 본 경찰이 침대에서 한 걸음 물러섰지만 딱히 태도가 부드러워지지는 않았다. 태도가 부드럽지 않은 건 승준도 못지않았다.
“환자한테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당장 나가요.”
남자들과 초원의 사이를 승준이 가로막고 섰다.
“아니, 누구신데?”
“이 여자 상삽니다. 그러는 그쪽은 뭡니까?”
남자가 나가질 않자 승준이 허리에 손을 짚더니 놈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초원은 이러다 정말 몸싸움이라도 벌어질까 조마조마했다. 그건 다른 남자도 마찬가지였는지 이제는 진심으로 동료를 말리기 시작했다.
“경찰청에서 나왔는데, 별거는 아니고⋯. 아이고, 가입시다.”
“경찰청? 조폭이 아니고?”
승준의 어깨 너머로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렸다. 땅딸막한 남자의 얼굴이 씰룩거렸다.
“따질 게 있으면 병원에 누워 있는 말단 요원한테 이럴 게 아니라 윗선에 따져야 하는 거 아닙니까? 졸렬하기는. 내 손으로 끌어내기 전에 당장 나가세요.”
승준이 다시 문을 가리키며 위협하자 남자는 동료에게 끌려 병실 밖으로 나갔지만 문밖으로 사라지는 순간까지도 그를 향해 부릅뜬 시선은 절대 떼지 않았다.
문이 닫히자 승준이 뒤돌아 초원을 바라보았다. 그녀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전혀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어쨌거나 면목 없어진 초원은 차마 눈을 마주 볼 수 없어 고개를 숙이고 감사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그치만 제가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요.”
‘이것 봐. 나 또 이런다.’
또 이렇게 이 남자 앞에서 쓸데없는 객기를 부린다.
“나도 압니다.”
승준의 퉁명스러운 대답을 끝으로 둘은 한참 말이 없었다. 그는 침대 발치에 걸터앉아 벽만 바라보았다.
‘화나셨겠지?’
초원은 고개를 푹 숙이고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괜찮아요?”
그게 불편한 침묵을 깬 그의 첫마디였다. 그렇게 온갖 모진 말을 내뱉고 빽빽 우겨서 와 놓고는 다 망쳤는데, ‘내가 뭐랬습니까?’, ‘기껏 보내 줬더니 그 결과가 고작 이겁니까?’ 이런 비난 한마디 없이 “괜찮아요?”라니. 형식적으로 묻는 투도 아니고 저렇게 다정하고 아프게.
초원은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단단한 팔이 들썩이는 어깨를 감싸 안았다. 초원은 저를 놓고 그 따뜻한 품에 매달렸다. 커다란 손이 머리와 등을 다정하게 쓰다듬고 정수리에는 입술이 지그시 와닿았다.
‘이 남자 바보같이 왜 이래, 정말⋯.’
초원은 고개를 들고 힘겹게 울음을 삼켰다.
“팀장님은 제가 밉지도 않으세요?”
와이셔츠 옷깃을 부여잡고 분명 엉망이 됐을 얼굴로 물었다. 대답 대신 애틋한 손길이 젖은 얼굴을 어루만지고, 못지않게 애틋한 눈길이 굳어 버린 초원의 심장을 어루만졌다. 그렇게 한참 그녀를 어루만지던 그가 다시 그 다정하고도 아픈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운데, 살아 있으면 그걸로 됐지.”
겨우 억눌렀던 눈물이 다시 터졌다.
“팀장님 진짜⋯.”
초원은 다시 그 어깨에 매달려 눈물이 마를 때까지 울었다. 정말로 눈물이 말라 더는 나오지 않게 되었을 때도 그는 그녀를 감싸 안은 손을 풀지 않았다. 평소라면 이쯤에서 이성을 되찾고 몸을 떼어 냈을 초원도 얌전히 그의 품에 기댄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언제부터 이 품이 내 집처럼 편안해진 걸까?
“죄송해요⋯.”
“뭐가?”
“알잖아요⋯.”
“너무 많아서 뭘 말하는지 모르겠는데?”
두 사람은 동시에 피식 웃었다.
“습관만 들이지 마요.”
무슨 습관을 들이지 말라는 건지 알 수 없어 초원은 고개를 기울이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 말은, 물에 좀 그만 빠지라고. 앞으론 내가 위험해서 안 보낸다고 하면 제발 말 좀 들어요. 알겠죠?”
아이를 타이르기라도 하는 듯 내려다보는 승준에게 초원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대답을 해야지.”
“아야!”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볼을 살짝 꼬집었다. 뾰로통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그를 밀어내는데 두 손이 초원의 얼굴을 단단히 붙들더니 꼬집혔던 볼에 입술이 와닿았다.
‘이거 위험한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초원은 제 입술에 살포시 포개어져 오는 입술을 거부하지 않았다.
똑똑.
화들짝 놀라 그를 밀어냈다. 들어오라고 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리더니 병원 직원이 점심 식사를 들고 들어왔다.
“식사하세요.”
거울을 안 봐도 얼굴이 활활 타오르는 게 느껴지는 초원과는 달리, 승준은 몇 초 전만 해도 부하 직원이랑 하면 안 될 짓 하던 사람답지 않게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저 입맛 없는데, 팀장님 드실래요?”
테이블 위에 놓인 밥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대답 대신 그는 그릇을 덮은 뚜껑을 하나씩 열더니 수저를 들어 초원의 손에 쥐여 주었다.
“입맛 없어도 먹어요. 안 먹는다 그러면 내가 직접 먹여 줄 거니까.”
‘내가 무슨 애도 아니고.’
아기 참새처럼 입을 벌리고 떠주는 밥을 받아먹는 상상을 하며 웃다가 그의 다음 말에 굳었다.
“박 주임 여기 불러 놓고. 그럼 다음 주부터 회사에 소문 다 나겠지.”
초원은 대꾸 없이 꾸역꾸역 밥을 넘겼다.
밥을 먹자마자 퇴원 수속을 밟기 시작했다. 욕실에서 대충 말린 옷을 입고 나왔더니 병훈과 으뜸을 보러 간다던 승준이 벌써 와서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있었다.
“누워서 쉬어야 하지 않아요?”
집에 갈 준비를 하는 초원을 보며 그가 못마땅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
“괜찮아요.”
말없이 지그시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팀장실에서 자주 보던, 거짓말인 거 다 안다는 눈빛이었다.
“진짜요, 전 괜찮아요.”
‘진짜로요. 머리가 깨질 것 같고 온몸이 안 쑤신 데가 없으니까 마음이 찢어질 것 같은지도 모르겠네요.’
서울로 가는 길, 차 안에서 창밖을 응시하며 생각했다. 운다고 해결되는 일은 없었다. 다시 죄책감과 절망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와 머릿속을 울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자 무리했던 몸도 아프기 시작했다.
초원은 담요를 두르고 웅크리고 앉아 운전하는 그를 응시했다. 눈을 감고 잠이 들 때까지 기다려볼까 싶기도 했지만 눈을 감고 있으면 후회의 늪에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시선을 느꼈는지 승준이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이쪽은 눈보라 매섭게 날리는 겨울인데 저쪽만 벚꽃 흩날리는 봄이었다.
그 미소가 어쩐지 그녀를 외롭게 했다.
‘화도 내든가, 혼이라도 좀 내 주지.’
혼나겠다고 조마조마했던 때는 언제고, 막상 비난하질 않으니 그게 더 아팠다.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았다. ‘차라리 후회의 늪이 낫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커다란 손이 초원의 머리를 잔인할 정도로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언제 잠든 걸까? 핸드브레이크 올리는 소리에 눈을 떴더니 자취방 앞이었다. 잠들기 전에는 분명 낮이었는데 벌써 밖은 어두워져 있었다.
“다 왔어요.”
초원은 부스스 일어나 덮고 있던 담요를 접었다. 잠이 덜 깨 머릿속에는 짙은 안개가 껴 있었다.
“차 주임 일은 내가 방법을 찾아볼 테니까 딴생각 말고 주말 동안 푹 쉬어요. 혹시 더 쉬고 싶으면 얘기하고.”
초원은 대답 없이 멍하니 자취방 창문을 올려다보다가 입을 뗐다.
“팀장님⋯, 혼자 사세요?”
시선은 불 꺼진 창문에 고정한 채였다.
“네, 그런데요.”
시선을 돌려 승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초원의 생각을 읽으려는 듯 한참 시선을 마주하던 그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핸드브레이크를 풀고 기어를 넣었다.
현실은 꿈보다 더하다
이게 사람 사는 집인가?
초원의 자취방과는 정반대의 의미로 여긴 사람 사는 집이 아니었다. 비밀번호 누르는 걸 보지 못했다면 이 남자가 저를 호텔에 데려왔나 착각했을지도.
흰 대리석이 깔린 현관을 지나자 눈앞에 한강의 야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졌다. 초원은 홀린 사람처럼 집주인에게 묻지도 않고 남의 집 거실을 가로질러 통유리창 앞으로 다가갔다. 도시의 불빛이 검은 한강을 붉고 푸르게 물들이고 있었다. 어느새 뒤로 다가온 승준의 손이 초원의 허리에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감겨왔다.
“야경 보면서 와인이라도 한잔할래요?”
“아, 그게⋯.”
이미 각오는 하고 왔다. 팀장의 사적인 공간에 발을 들이는 순간, 공적인 가면은 벗어 던지고 그의 밑에 깔려 알몸으로 떨게 될 거라고.
“샤워부터⋯ 해야 할 것 같은데요.”
너무 노골적인가? 그렇지만 이런 꼴로 하는 건 싫었다. 병원에서 대충 씻어서 아직도 소금기가 남은 머리카락은 푸석푸석했고 빨지 못한 옷은 소금에 절인 수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