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emperature difference between the woman and the man RAW novel - chapter 36
벌레 씹은 얼굴이 된 희경을 보고 초원은 속으로 웃었다가 다음 말에 굳었다.
“차 주임이랑 홍 주임이 따라가고.”
“네⋯.”
대답하는 초원의 말꼬리가 유독 길었다.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던 승준은 팀 회의 내내 초원 쪽을 곁눈질했다.
‘화난 건 아니겠지?’
희경과 사이가 안 좋은 건 알고 있지만 이번에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부루퉁한 얼굴로 앉아 있던 초원이 시선을 느꼈는지 이쪽을 흘끗거렸다. 승준은 웃어 주고 싶은 걸 겨우 참으며 눈빛만 보냈다. 느닷없이 고개를 푹 숙인 그녀의 목덜미가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허⋯. 아파서 앓는 게 아니라 딴 걸 앓는 거였네.’
여태까지 회사에서 초원이 저렇게 발그레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감기라도 걸렸나, 열이라도 있나 싶어 걱정했는데⋯. 이제 보니 완전 헛짚었구나 싶었다.
‘지금까지 그걸 모르고 시간 낭비했네.’
고개를 숙인 채로 펜 끝을 깨물던 초원이 다시 이쪽을 곁눈질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안기고 싶었으면 말이나 하든가 하지.’
그는 초원을 향해 피식 웃고는 회의 자료로 시선을 돌렸다.
‘관상용 조각 미남⋯.’
서류를 넘기는 승준을 흘끗 훔쳐보던 초원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원래 조각은 관상용이지.’
몇 년 전, 특관청 여직원들끼리 가진 모임에서 모 간부의 비서가 조승준 팀장을 두고 그랬다.
관상용 미남이라고.
어떤 여직원이 이곳에 취직한 지 얼마 안 돼 팀장의 잘생긴 얼굴만 보고 대시를 했는데 칼 같이 거절당했단다. 그래서 마음에 스크래치가 생겼다며 하소연하는 직원에게 청에 다닌 지 오래된 한 간부 비서가 그랬다.
‘조승준 팀장님은 관상용 미남이지. 잘생겼는데 얼굴에 ‘만지지 마시오.’가 궁서체로 써 있잖아.’
그러게, 만지지 말라면 만지지 말았어야지. 괜히 술 취해서 입술 한 번 맞댔다가 어느새 몸도 마음도 다 넘어가 버렸다.
‘근데 먼저 만진 건 팀장님 아닌가?’
반년도 넘게 지난 일인데 입술에 닿았던 그 뜨거운 손끝을 떠올리면 여전히 몸속 깊은 곳이 움찔했다.
‘아, 진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초원은 또 몰래 승준의 팔뚝을 훔쳐보고 있었다.
‘덥지도 않은데 팔뚝은 왜 걷어붙이고 난리람⋯.’
정작 난리 난 건 그녀의 몸이었다. 아까 눈이 마주치면서 달아오르기 시작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숨이 가빠져 오기 시작했다.
지금 승준이 팀원들에게 뭔가 열심히 지시를 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한마디도 들어오지 않았다. 자신의 한껏 예민해진 가슴을 꾹 눌러 감싸던 저 팔뚝의 단단함만이 자꾸 떠오를 뿐이었다.
또 눈이 마주쳤다.
그의 묘한 눈빛에 초원은 속내를 들킨 것 같아 곧바로 시선을 돌려 버렸다.
“홍 주임, 잠깐 나 좀 봅시다.”
회의가 끝나고 주섬주섬 물건을 챙기던 초원은 화들짝 놀랐다. 승준은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팔짱을 끼고 있었다. 팀원들이 눈치를 보더니 하나둘씩 회의실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홍 주임, 뭐 실수한 거 있어요?”
옆에 선 현우가 속삭이고 초원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차 주임, 문 닫고 나가세요.”
회의실 밖으로 나가던 현우가 그 말에 멈춰 섰지만 한 팔은 깁스 신세, 다른 팔은 이미 회의 자료를 들고 있는 신세라 남은 손이 없었다. 허둥지둥하는 그를 본 초원이 다가가 문을 닫았다.
“이리 와 봐요.”
문 앞에 우두커니 선 초원을 보고 승준이 손을 내밀었다. 화난 투로 잠깐 보자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목소리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좀 보자’는 이유가 다분히 사적인 게 분명해지자 초원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팔짱을 꼈다.
“왜 그러시는데요?”
“와야 얘기를 하든가 하지.”
“여기서도 잘 들리는데요.”
“아, 진짜 고집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승준이 성큼성큼 초원을 향해 걸어왔다. 껴안으려는 건가 싶어 손을 들어 그의 가슴팍을 밀어냈지만 승준은 초원의 목덜미 근처에 코만 대고 있었다.
“뭐 하세요?”
“잠깐 확인할 게 있어서.”
맨살에 숨결이 닿자 간지러웠다. 몸을 움츠리는 초원을 보고 그는 씨익 장난스럽게 웃었다.
“초원 씨.”
“네?”
“그거 알아요?”
“뭘요?”
“초원 씨 흥분하면 체취가 달라지는 거.”
듣도 보도 못한 소리에 초원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와 동시에 들킨 건가 싶어 가슴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아, 뭐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초원은 승준의 팔을 뿌리치고 회의실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른 짐을 챙겨 나가지 않으면 위험했다.
“내 말이 틀린지 맞는지 확인해 볼까?”
뒤에서 구릿빛 팔뚝이 불쑥 튀어나와 허리를 휘감았다.
“지금 젖어 있죠?”
그의 품에 닿은 작은 등이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세찬 심장 박동이 얇은 셔츠와 블라우스를 뚫고 초원의 심장까지 쿵쿵 울렸다.
“하아, 진짜⋯.”
한숨을 내쉬자마자 승준의 낮은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외근 갈래요? 우리끼리⋯.”
“저 이미 외근 있거든요.”
“한국은행은 안 사무관이랑 차 주임, 둘이서 가라고 하고⋯.”
“아, 저 이 일에 필요 없는 거였어요? 그럼 아주 빼 주시지.”
초원은 눈을 가늘게 뜨고 쏘아보았다.
“아니, 오늘 오후만⋯.”
“팀장님 바쁘신 분인 줄 알았는데⋯. 그럴 시간 있으시면 직접 와서 도와주시는 건 어때요?”
팔을 떼어 낸 초원은 다시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물건을 집어 들고 나가려는데 승준이 허리춤에 손을 짚은 자세로 막아섰다.
“내기는 적당히 하고 그냥 지지? 손해 볼 것도 없는데⋯.”
“내기는 팀장님이 먼저 시작하신 거 아니에요? 아직 3주도 안 됐는데 이렇게 인내심이 없으셔서야⋯.”
초원이 얄밉게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지만,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앞에 선 남자는 싱글벙글이었다.
“아니, 나는 어차피 초원 씨가 질 게임인데 애써 버티는 게 안쓰러워서 그러지.”
“헐, 누가 지는 게임일지는 붙어봐야 아는 거죠.”
“우리 이미 붙어봤잖아. 항상 초원 씨가 먼저 나가떨어지던데?”
“네?”
생각도 못 한 음담패설이 이 돌부처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순간 초원의 입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웃느라 정신이 없는 틈을 노려 승준이 입술을 겹쳐왔다.
직원들 득시글거리는 회사 한가운데라는 것도 잊고 두 사람은 서로의 입술을 끈적하게 머금었다.
“오늘 저녁에 시간 돼요?”
입술이 떨어지자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승준이 물었다.
“흠, 어쩌죠? 나 데이트 있는데⋯.”
데이트라는 말에 그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누구랑.”
“직업 군인이래요.”
금방 그렇게 달콤하게 입을 맞춰놓고 딴 남자랑 데이트라니⋯. 승준의 얼굴에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입술에 번진 립스틱을 손가락으로 닦아 낸 초원은 회의실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무려 장군이래요. 이순신 장군이라고.”
그제야 100원짜리 동전을 말한 거란 걸 깨달은 그는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초원은 씨익 웃더니 회의실 문을 벌컥 열고 나가 버렸다.
***
금속 부딪히는 소리에 이따금 한숨 소리가 섞여 들었다. 창문 하나 없는 방에 갇혀 청원 경찰의 삼엄한 감시를 받고 있자니 숨이 턱턱 막혔다.
‘이게 벌써 며칠 째야?’
한국은행 직원이 동전 묶음을 풀어 건네주면 초원은 그 속에서 1998년도 발행 주화를 찾아 가장자리를 확인한 다음, 특이 생물이면 테이블 가운데의 상자에 넣고 계수기 숫자를 하나 올렸다. 멀쩡한 동전인 경우에는 한은 직원에게 다시 돌려주고 개수가 맞는지 확인하는 지루한 작업이 계속됐다.
하루 종일 100원짜리 동전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더니 눈이 빠질 것 같았다. 분명 배정된 인력은 셋인데 제대로 1인분을 해내는 건 초원뿐이었다. 손 하나를 못 쓰는 현우는 초원보다 느릴 수밖에 없었고 희경은 툭하면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방 밖으로 사라지기 일쑤였다.
“아이씨, 짜증 나게⋯.”
30분 넘게 사라졌다 겨우 돌아와 앉은 희경이 일을 시작하자마자 짜증을 냈다. 얼굴을 찡그리며 긴 손톱을 내려다보더니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아, 이거 새로 한 네일인데⋯.”
그러고도 희경은 이 네일이 얼마짜리인지, 이거 한다고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 왜 팀장은 이런 일을 남자들 안 시키고 여자들한테 시키는 건지 불평을 끝없이 쏟아 냈다.
이런 분위기인데 대놓고 이어폰을 낄 수도 없어 초원은 꾹꾹 참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죽음의 조를 짠 거야? 팀장님 보면 명치 세게 때려 줘야지⋯.’
“나 먼저 간다. 자기들도 하던 것만 대충 마무리하고 가.”
6시가 되려면 아직 30분도 넘게 남았는데 희경은 자체 퇴근해 버렸다.
‘그래, 차라리 없는 게 도와주는 거지.’
초원은 새 동전 묶음을 쫙 펼쳐 연도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우리도 오늘은 6시 땡 하면 가요.”
현우의 말에 초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 직원들을 붙잡고 계속 야근을 하는 것도 무리였다.
“오늘 약속 있어요?”
“네? 아뇨.”
초원은 분주히 동전을 골라내면서 건성으로 대답했다. 당연히 야근할 줄 알았으니 저녁 약속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 전어 먹으러 갈래요?”
“전어요?”
그제야 고개를 든 초원이 의아한 눈으로 현우를 바라보았다.
“응. 초원 씨 전어 좋아하잖아요.”
그 말에 초원은 피식 웃었다.
“선배가 사는 거예요?”
“당연하지.”
활짝 웃는 현우를 향해 어렴풋이 웃은 그녀는 다시 고개를 숙이더니 바쁘게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잘 먹을게요.”
초원은 소주잔을 들어 현우의 잔에 부딪쳤다.
“맛있게 먹어요.”
“벌써 맛있네요.”
초원은 고소한 전어를 잔뜩 집어 올려 입에 넣었다. 집 나간 며느리가 어째서 돌아오는지 충분히 납득이 되는 맛이었다. 물론 굳이 시월드로 돌아가지 않아도 전어 먹을 곳은 넘친다는 딴지는 걸지 않기로 했다.
전어를 오물오물하며 시선을 들었더니 현우가 먹지는 않고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저런 미소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근데 왜 느닷없이 전어를 사 주는 거예요?”
오늘이 무슨 날도 아니고, 별일도 없는데 갑자기 밥을 사겠다는 게 의아했다.
“원래 사 주려고 그랬거든요.”
씁쓸한 미소가 현우의 얼굴 위로 번졌다.
“그날 밤에 ‘초원 씨 전어 사 줘야지.’라고 생각했는데 하필 사고 나서⋯. 못 사 줄 뻔했네.”
그 말에 한숨을 쉰 초원은 소주잔을 다시 채우고 비웠다.
“몸은 괜찮아요?”
현우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끄덕 흔들었다.
“이거만 풀면 더 바랄 게 없는데 말이죠.”
깁스를 한 왼팔을 들어 보인 그는 입술을 비죽였다.
“갑갑해도 어쩔 수 없으니 좀 참아요.”
그 말투가 꼭 어린아이를 달래는 것 같았다. 누군가가 이렇게 아이 취급을 하면 듣기 싫은데 이상하게 초원이 하면 듣기 좋았다. 그리고 이제야 현우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초원의 가방 안에 있던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핸드폰을 꺼내 확인한 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아직 일하는 중?] [아뇨] [저녁은?] [먹고 있어요] [왜?]‘밥때 돼서 밥 먹는다는데 ‘왜?’라니 무슨 질문이 이래?’
사실 ‘같이 저녁 먹자 하려고 문자했는데 벌써 먹고 있다 하니 매우 실망했다.’가 아주 잘 함축된 한마디인 건 초원도 알고 있었다.
‘쫌 귀엽네⋯.’
피식 웃는 초원을 현우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응시했다.
“흠, 남자?”
솔직하게 답하면 캐물을까 두려웠던 초원은 대충 고개를 젓고는 계속 답장을 썼다.
[팀장님도 저녁 맛있게 드세요. 이따 집에 가서 전화할게요.]메시지가 전송된 걸 확인하고는 핸드폰을 다시 가방에 집어넣었다.
“참, 나 초원 씨 면회 온 거 기억나요.”
분명 의식이 없었는데 기억이 난다니⋯. 초원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현우를 바라보았다.
“초원 씨가 막 내일은 꼭 일어나 달라고 그랬잖아요.”
그 말을 들은 그녀는 멋쩍게 웃었다. 혼수상태에 빠진 환자가 주변에서 오고 간 대화를 듣고 기억하는 일도 있다고 들었는데, 정말인 듯했다.
‘헐, 설마 내가 운 것도 다 들은 건 아니겠지?’
혼자 정신줄 놓고 신파극 찍은 걸 생각하자 얼굴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초원은 고개를 숙이고 죄 없는 콘 치즈를 뒤적였다.
사실 현우는 다 들었다. 그리고 놀랐다. 늘 무심하고 자존심 센 초원이 그의 앞에서 운 건 처음이라서. 마음이 너무 아파 달래 주고 싶은데도 그럴 수 없어 얼마나 끙끙 앓았는지 초원은 모를 거다.
아마 이것도 모를 거다. 매일 초원이 찾아오는 시간만 기다린걸. 죽음의 문턱 앞에서,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막막함 앞에서 매일 들려오던 초원의 목소리가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리고 손에 감기는 그 서늘한 체온과 따뜻한 손길도. 일어나 그 손을 잡아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는데.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해요.”
힘없는 현우의 목소리에 초원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씁쓸하게 웃었다.
“결국은 지켰잖아요. 그러면 됐죠.”
“박 주임님이 그러던데, 초원 씨가 나 깨우려고 고생 많이 했다고⋯.”
깨울 방법을 찾았다며 꼭 살려 주겠다고 한 후로 초원이 찾아오지 않아 걱정했었다. 희미한 감각과 몽롱한 의식밖에 남질 않아 며칠이 흘렀는지는 몰랐지만, 어렴풋이 알았다. 초원이 오지 않은 지 꽤 되었다고. 대체 무슨 방법이길래. 설마 위험한 일은 아니길. 초원이 다치거나 혹시 더 끔찍한 일을 당한 건 아니길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깨어난 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고는 어찌나 미안했던지. 저 때문에 그 힘든 일을 겪어야 했다니 말이다. 그리고 얼마나 고마웠는지. 그를 위해 이렇게까지 애를 써 주다니.
하지만 그 사건은 초원에게는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한숨을 쉰 그녀는 화제를 돌려 버렸다.
“다신 그 고생 안 할 거니까 또 장산범 쫓아다니기만 해 봐요.”
장산범 소리에 쓰게 웃은 현우는 소주를 들이켰다.
“아깝네. 다 잡은 거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