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emperature difference between the woman and the man RAW novel - chapter 37
“잡기는⋯. 잡힐 뻔해 놓고⋯.”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리던 초원은 단호하게 표정을 고치곤 현우를 마주 보았다.
“약속해요. 다신 장산범 안 쫓아다닌다고.”
“알았어요. 안 그래도 여기저기서 욕 많이 먹었어요.”
장산범을 다시 쫓을 일은 없을 거다. 초원은 안 믿는 눈치이지만 진심이었다.
혼자 맹수를 잡으려 하다니 얼마나 멍청한 짓이었는지. 초원은 같이 갔더라면 현우가 다치지 않았을 거라 자책했지만 그가 보기에는 그날 초원이 없어서 천만다행이었다. 그랬다가 초원도 다쳤더라면 현우는 평생 저를 용서하지 못했을 거다.
‘난 왜 멍청하게 매번 그 위험한 일에 초원 씨를 끌고 간 걸까?’
의식이 잠시 돌아올 때마다 후회했다. 그러다 한순간 깨달았다. 그가 좋아했던 건 그 위험한 추적이 아니라 초원이었다는걸. 장산범이 나타나지 않아도 그게 허무했던 적은 없었다. 밤에는 캠핑 온 것처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음날 산을 내려오면 초원에게 지갑을 기꺼이 털려 주는 그 시간이 재미있었다. 그러니까 초원 없이 홀로 간 그날은 재미가 없었지.
산에 어둠이 짙게 내리면 세상에 그와 초원, 단둘만 있는 기분이었다. 그럴 때면 가슴 속에서 솜털이라도 날리듯 간질간질한 느낌이 드는 걸 애써 모른 척했었다. 우린 그런 사이가 아니라며. 그런데 이제는 그런 사이이고 싶어졌다.
그리고 초원도 그런 사이이고 싶은 거 아닐까? 설마, 회사 동료일 뿐인 남자를 위해 매일 울어 주고 팀장과 싸워가며 위험천만한 일에 자신을 내던지지는 않을 테니까.
무언가 기대하듯 초원의 표정을 살피던 현우는 소주병을 들어 초원의 잔을 채웠다.
“많이 먹어요. 초원 씨 고생시킨 거 사과하는 의미로 사는 거니까. 물론 이거 한 번으로 되진 않겠지만⋯.”
“그럼 앞으론 미안할 일을 안 하면 되죠.”
그 칼 같은 말에 현우는 싱겁게 웃었다. 이럴 때 초원은 꼭 엄마 같았다. 현우가 대답은 하지 않고 실없이 웃기만 하자 초원이 부루퉁하게 쏘아보기 시작했다.
“진짜 약속할게요. 앞으론 초원 씨 생각해서 위험한 일 안 할게요.”
사뭇 진지해진 얼굴로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알았다는 듯 초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씨익 웃으며 소주잔을 들어 올렸다. 내키지 않는 척 잔을 부딪친 초원은 소주잔을 바로 비웠다.
반찬으로 나온 삶은 메추리알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초원이 물었다.
“근데 밥은 팀장님한테 사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정작 선배 살려 준 사람은 팀장님인데⋯.”
“아, 안 그래도 팀장님께 감사하다고 보답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는데⋯. 하하⋯.”
현우는 말을 하다 말고 허탈하게 웃었다.
“그랬는데요?”
무슨 소리를 들었길래 저러나 싶어 초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예뻐서 한 일도 아니니까 보답 같은 거 필요 없으시다네요.”
그 말에 초원은 눈치 없이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려 괜히 볼을 부풀렸다.
‘내가⋯. 내가 예뻐서 한 일이지.’
혼자 생각하다 혼자 쑥스러워진 초원은 먹지도 않을 와사비만 간장에 열심히 개기 시작했다.
“아, 그리고 또 혼났어요.”
“흐응, 왜요?”
의미 없이 젓가락을 놀리며 건성으로 물었다. 현우가 승준에게 혼나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니 새삼스러울 게 없었다.
“초원 씨 힘들게 했다고.”
그 말에 콧날이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하아, 이 남자 정말⋯.’
젓가락을 내려놓은 초원은 말없이 소주를 잔에 따랐다.
“또 사고 쳐서 초원 씨 힘들게 하면 그때는 진짜 지방으로 보내 버린다고 하시더라고요.”
“잘 가요. 멀리 안 나갈 테니까.”
피식 웃으며 놀린 초원은 소주잔을 비웠다.
“사고 안 친다니까요?”
“그간 선배를 봐 온 내 감으로는 흠⋯ 3개월 줄게요.”
“와, 심했다.”
능청스럽게 턱 끝을 문지르며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내리는 초원을 보며 현우가 섭섭한 듯 입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아, 이것도 너무 길게 쳐줬네.”
“앞으론 진짜 몸 사린다니까요?”
“늦기 전에 지금 있는 오피스텔이나 내놔요. 짐도 미리 싸 놓고⋯.”
“그럼 초원 씨도 원룸 내놔야지.”
현우는 젓가락을 놀리며 씨익 웃었다.
“내가 왜요?”
“같이 가기로 했잖아요.”
그제야 차돌박이를 먹으며 했던 약속이 떠오른 초원은 당황해 말을 잇지 못했다.
‘아니, 그때랑 지금이랑 같나⋯.’
매정하다 해도 할 말 없지만, 저승길이라도 같이 가고 싶은 남자의 자리는 이미 주인이 바뀌었다. 말 그대로 정신줄을 놓고 있는 현우를 승준이 뻥 차 버리고는 그 자리를 차지한 게 언젠데 이제 와서 같이 가자니⋯.
“손가락도 걸고 약속했는데 벌써 잊은 거 아니죠?”
“내가 언제 걸었어요. 선배가 억지로 걸었지.”
초원이 퉁명스럽게 대꾸하더니 회와 마늘을 잔뜩 집어 쌈을 싸기 시작했다.
“와, 치사하다.”
쑥스러워서 튕기는 거겠지. 현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딜 가든 같이 가준다고 이미 병실에서 약속하지 않았나.
“이제 와서 말 바꾸기 있⋯.”
턱이 붙들리더니 주먹만 한 쌈이 현우의 입속에 쑤셔 넣어졌다.
“위약금이에요. 됐죠?”
인상을 찌푸리고 우물우물 쌈을 씹는 현우에게 초원은 얄밉게 눈썹을 쫑긋거리더니 메추리알을 휴지로 정성스럽게 감싸기 시작했다.
“내가, 내가 사는 거로 위약금을 내는 경우가 어딨어요.”
겨우 쌈을 삼킨 현우가 물로 마른 목을 축이며 따졌다.
“그런 경우 여깄네요.”
초원은 실실 웃으며 메추리알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근데 그건 왜 안 먹고 싸가요?”
현우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지만 초원은 대답 대신 빙긋 웃기만 했다.
띵동.
문 건너편에서 드르륵 중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누구냐고 묻지도 않고 현관문을 활짝 연 집주인의 얼굴은 회사에서 볼 때와 완전히 딴판이었다.
“전화도 안 하고 어디서 뭐 하나 했더니 우리 집 오는 중이었네.”
싱글벙글 웃는 승준에게 초원은 손에 든 걸 내밀었다.
“뭔데요?”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옆으로 비켜선 그는 물건을 감싼 휴지를 하나씩 벗기기 시작했다.
“메추리알?”
“네.”
중문 문턱에 앉은 초원이 부츠를 벗으려고 낑낑대기 시작하자 승준은 다가가 한 손으로 쑥 뽑아 벗겨 주었다.
“메추리알은 왜?”
“까 주세요.”
자신을 올려다보며 배시시 웃는 여자를 보고 승준은 맥빠진 웃음을 터트렸다.
‘이 아가씨 취했네⋯.’
“먹으라는 것도 아니고 까 달라니⋯.”
싱크대 앞에 서서 메추리알 껍질을 까던 승준은 아일랜드 카운터에 기대어 선 초원을 향해 피식 웃었다.
“팀장님 드실⋯.”
초원의 입에 메추리알을 쏙 집어넣은 승준은 곧바로 두 손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감쌌다.
“내가 먹고 싶은 건 따로 있거든.”
미처 대꾸도 하기 전에 초원의 몸이 위로 들리더니 카운터 가장자리에 엉덩이가 걸쳐졌다. 손이 떨어져 나가자마자 내려 온 그녀는 미꾸라지처럼 승준의 팔 아래로 빠져나가 거실로 도망쳤다.
“많이 드셨잖아요.”
“굶은 지 오래됐잖아요.”
초원의 말투를 따라 하던 그가 거실로 와 소파에 앉더니 멀뚱히 서 있기만 하는 여자에게 앉으라는 듯 자신의 허벅지를 두드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초원은 옆자리에 털썩 앉아 버렸다.
“먹어 봐야 이미 아는 맛인데⋯.”
“먹어 봐서 아니까 더 먹고 싶은 거지.”
승준은 똑바로 앉은 초원의 허리와 무릎 아래에 손을 넣어 그 몸을 옆으로 돌렸다. 초원의 다리가 그의 허벅지 위에 가로로 걸쳐지고 허리를 감쌌던 손은 어느새 위로 올라와 머리를 감쌌다. 얼굴이 점점 다가가고 조금 전처럼 빠져나갈 줄 알았던 초원은 어쩐 일인지 고개까지 살짝 기울이며 입술을 받아들였다.
한참 승준의 움직임에 맞춰 입술을 겹치던 초원은 그의 손끝이 스타킹 위로 다리를 감질나게 쓰다듬기 시작하자 입술을 뗄 수밖에 없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달아오른 한숨이 새어 나갔다.
“나 보고 싶어서 온 거예요?”
그녀의 콧날에 코끝을 부드럽게 비비던 승준이 속삭였다. 초원은 대답 대신 싱긋 웃더니 가볍게 입을 맞췄다.
“데리러 오라고 하지.”
“택시 타면 되는데요, 뭐.”
“위험하잖아. 앞으로는 나 불러요.”
승준은 초원에게 눈을 맞춘 채로 그녀의 손바닥과 손끝에 끈적하게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이 눈빛이 더 위험한 것 같은데⋯.’
입속이 바짝 마르기 시작했다. 이건 분명 술 탓일 거라고, 아니 술 탓이어야 한다고 초원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녁 누구랑 먹었는데요?”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 입을 맞추던 그가 물었다.
“어⋯.”
딱히 켕길 짓 한 건 없지만 반응이 안 좋을 걸 알기에 대답하기 망설여졌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는 건 무덤을 파는 짓이었다.
“차 주임님요.”
역시나였다. 승준은 미간을 잔뜩 좁히더니 붙들고 있던 손을 놓았다.
“아, 그런 거 아니에요.”
초원은 떨어져 나간 손을 잽싸게 붙잡아 자신의 허리께에 얹었다.
“그럼 뭔데?”
“그냥 미안하다고 밥 사 주겠다길래 얻어먹은 거예요.”
“미안할 짓을 안 하면 되지. 이거 일부러 사고 치고 그 핑계로 수작 부리는 거 아닌가?”
“아, 차 주임님 나 돌 보듯이 하는 거 알면서 그러시네.”
“난 그것도 이해가 안 되는데. 눈이 달렸으면 이게 어떻게 돌로 보이냐고, 꽃이지!”
‘이게’라고 하며 승준은 두 손으로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엉뚱한 포인트로 분통을 터트리는 그를 보고 초원은 사뭇 심각한 분위기인 것도 잊고 깔깔 웃었다.
어쨌거나 꽃이라니 기분이 좋았던 초원은 그의 허리에 팔을 휘감고 목덜미에 자잘하게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지만, 승준은 그게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쌓인 게 많았던 모양이었다.
“회사 사람들이 초원 씨랑 차 주임 두고 뭐라는 줄 알아요?”
“흠⋯.”
또 보나 마나 둘이 썸 탄다, 사귄다 이런 소리겠지 싶었던 초원은 대수롭지 않게 그의 가슴팍만 매만졌다.
“초원 씨보고 차 주임 오피스 와이프래요.”
“헐⋯.”
처음 듣는 소리였다. ‘둘이 사귄다’와 ‘누가 누구의 오피스 와이프다’는 그 어감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목덜미에 묻었던 고개를 든 초원이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누가 그래요? 미친 거 아닌가?”
몸을 더 일으킨 그녀는 당장 따지러 갈 기세로 주먹을 쥐었다.
‘오피스 와이프는 무슨, 오피스 마미면 몰라도.’
그동안 현우의 뒤치다꺼리를 너무 과하게 해 줬나 보다. 초원은 선을 더 확실히 그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미친놈은 그놈이지. 왜 남의 여자한테 밥을 사 준다고 그래.”
“앞으론 내가 조심할게요. 네?”
초원은 미안한 얼굴로 그의 가슴팍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그 반응에 승준은 화가 좀 누그러졌다. ‘남의 여자’, 달리 말해 초원은 승준의 여자라는 말에 그녀는 딴지를 걸기는커녕 현우와 거리를 두겠다고 약속했다.
요즘 내기네 뭐네 하며 열심히 튕기고 있긴 해도 역시 진심으로 밀어내는 건 아니구나 싶어 마음이 놓였다.
“내가 밥 먹자고 할 때마다 퇴짜 놓더니⋯.”
기분이 좀 풀린 승준은 입으로는 여전히 불평을 쏟아 내면서 손으로는 그녀의 작은 발을 잡고 부드럽게 마사지를 시작했다. 초원은 다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로 눈을 감았다. 하루 종일 부츠 속에 갇혀 있던 발이 그의 따스한 손길에 말랑말랑 녹아내렸다.
“퇴짜가 아니라 요즘 누구 덕분에 야근하느라 그런 거잖아요.”
그 ‘누구’는 피식 웃더니 그녀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근거 없는 질투는 좀 접어 두세요. 밥은 아무하고나 먹는 거지만 밤은 팀장님하고만 보내는 건데⋯.”
발을 어루만지던 손이 멈췄다. 온몸의 피가 다리 사이 짐승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침대로 갈⋯.”
“아! 우리 공사 구분을 좀 해야 하지 않을까요?”
“응?”
불쑥 고개를 든 초원이 느닷없이 화제를 돌렸다.
“여기가 회사도 아닌데 호칭이 좀 그렇잖아요.”
“그렇지.”
승준의 얼굴이 형광등 100개를 켠 듯 환해졌다. 무슨 상처 입은 짐승도 아니고, 다가오나 싶다가도 물러나 일정 거리를 유지하던 초원이 오늘따라 나서서 벽을 허물어 주니 기쁘기 그지없었다.
‘술의 힘인가?’
그러고 보니 그 여름밤의 역사적인 키스도 다 초원이 취한 덕이었다. 승준은 평일에 낮술을 잔뜩 먹인 다음 잠깐 쉬다 가자며 구청으로 끌고 가는 음흉한 흉계를 꾸몄다.
‘잠깐, 혼인신고는 어떻게 하는 거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묘하게 웃는 남자를 보며 초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서 뭐라고 불러요?”
“글쎄⋯. 이름으로 불러도 좋고⋯. 오빠라고 불러 주면 더 좋고.”
승준이 잔뜩 기대하는 눈으로 ‘오빠’ 소리를 꺼내자 초원은 피식 웃었다.
‘아, 진짜 남자들이란⋯. 오빠 소리 못 들어 죽은 귀신이라도 씌었나.’
초원은 볼을 한껏 부풀리더니 결심한 듯 입술을 벌렸다.
“오빠⋯.”
마주 보고 있는 남자의 입꼬리가 천장을 뚫을 기세로 치솟았다.
“으응? 왜?”
승준은 그녀의 볼을 사랑스럽다는 듯 쓰다듬기 시작했다.
“오빠, 나 오늘 짜증 나는 일 있었어요.”
초원이 어울리지 않게 혀 짧은 소리까지 내기 시작했지만, 콩깍지가 겹겹이 씐 눈에는 그게 그저 깜찍해 보일 뿐이었다.
“왜? 누가 우리 귀여운 초원 씨 짜증 나게 했어?”
승준은 다른 손으로 아이를 달래듯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오빠가 혼내 줄 거예요?”
입술을 삐죽 내밀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안 떨던 애교를 백만 년 만에 떨려니 오장육부에 닭살이 돋아 올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눈앞의 남자는 오빠 소리에 영혼이라도 판 듯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당연하지. 누가 그랬어, 누가?”
사실 묻지 않아도 누군지는 뻔했다.
‘분명 안 사무관이 또 여우짓이나 헛소리를 했겠지.’
그게 아니라 한국은행 쪽 사람이라면⋯.
“팀장님이요.”
헤벌레 웃던 승준의 표정이 아주 보기 좋게 얼어붙었다. 초원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꾹 참았다.
“우리 팀장님 명치 완전 세게 때려 줘요.”
그 큰 눈을 얄밉게 깜빡이며 검지로 승준의 명치를 쿡 찔렀다. 그는 얼이 빠진 얼굴로 초원을 바라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