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emperature difference between the woman and the man RAW novel - chapter 42
“근데 우리 뭐 해 먹어요?”
저녁과 별 상관없는 과일 코너에서 바나나를 고르던 초원이 물었다.
“초원 씨 먹고 싶은 거로 해요.”
“한두 가지가 아닌데⋯.”
바나나 한 손을 카트에 담으며 중얼거리는 걸 본 승준이 알 만하다는 듯 웃었다.
“그냥 요리하지 말고 초밥 같은 거 사 먹을까요? 집에 밥도 없는데⋯.”
초원은 저 멀리 초밥 코너를 손으로 가리켰다. 아직 시간이 일러서 할인 스티커는 안 붙어 있겠지만 오늘 같은 날은 사치를 부려도 좋지 않나 싶었다.
“밥은 내가 해 놓고 나왔어요.”
“오, 팀장님 좀 짱이시다.”
그새 밥까지 해 놓을 생각을 하다니. 역시 이 남자는 일등 신랑감이라고 속으로 감탄하며 엄지를 척 올렸다. 분명 칭찬인데도 어째선지 승준의 얼굴은 영 못마땅해 보였다.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하자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내 이름이 언제부터 팀장이었더라?”
회사 밖에선 팀장이 아니라며 이름을 불러 달라고 했건만, 초원은 그래도 자꾸 ‘팀장님’, ‘팀장님’거렸다.
“아, 헤헤⋯.”
자꾸 ‘팀장님’이 먼저 입에서 튀어나오는 걸 그녀도 어쩔 수 없었다. 몇 년이나 그렇게 불러왔는데 하루아침에 이름이 입에 붙을 리가 있나.
“불러 봐요.”
“⋯승준 씨.”
어쩐지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이 남자랑 물고 빨고 할 땐 몰랐던 어색함이 어째서 고작 이름 하나 부르는 데 이렇게 크게 다가오는 걸까?
“그렇지.”
강아지에게 재주라도 가르친 사람처럼 흐뭇하게 웃는 승준을 보니 초원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스윽 그의 팔에 팔짱을 끼며 매달리더니 올려다보며 생글생글 웃기 시작했다.
“승준 오빠⋯.”
한 번 속지 두 번 속을 그가 아니었다. 승준은 체념한 얼굴로 긴 한숨을 쉬었다.
“하⋯, 왜? 이번엔 팀장 놈이 무슨 짓을 했길래. 어쨌거나 그놈이 죽일 놈이네.”
선수를 치는 그의 팔뚝에 얼굴을 묻고 깔깔 웃던 초원이 고개를 들더니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헐, 왜 우리 팀장님 욕해요? 세상에 우리 팀장님만큼 훌륭하신 분이 어딨다고⋯.”
능청을 떠는 여자를 내려다보며 승준은 기가 찬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내 말은 그게 아니고요.”
초원은 붙들고 있던 팔을 놓더니 과일 코너로 몸을 돌렸다.
“오빠, 나 딸기 먹고 싶은데.”
제일 비싼 딸기 박스를 품에 안은 초원이 한쪽 눈을 찡긋했다.
승준이 입꼬리를 귀에 걸더니 딸기 박스를 냉큼 뺏어 카트에 넣었다. 윙크 하나에 넋을 놓은 게 이쯤 되면 뱀파이어에게 매혹당한 사역마 저리가라였다.
‘아싸!’
후식으로 딸기를 실컷 먹을 생각에 신이 난 초원이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게 마냥 귀여웠던 승준은 강아지라도 쓰다듬듯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 호주산 국거리 행사하네.’
정육 코너 앞을 지나던 초원이 걸음을 멈추더니 진열대 안에 든 고기를 유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소고기 먹고 싶어요?”
“소는 언제나 옳죠.”
그 생글생글한 눈웃음이 예뻐 승준은 저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소고기 카레 해 먹을까요? 집에 고형 카레 있는데.”
“그래요.”
“저기, 이거⋯.”
초원은 두 사람을 지켜보던 직원을 바라보며 고기를 가리켰다. 직원에게 500g만 달라고 하려는데 갑자기 승준이 어깨에 손을 올리더니 끼어들었다.
“저쪽에 한우 안심 1킬로 주세요.”
초원은 놀란 토끼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한우예요. 어마어마하게 비싸잖아요.”
직원에게 안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하지만 눈치가 빠른 직원은 마음 바뀌기 전에 빨리 팔아치울 생각인지 빠른 손놀림으로 고기 무게를 재고 있었다.
“먹는 데 돈 아끼는 거 아니에요.”
“팀장⋯, 아니지.”
덤덤하던 승준의 얼굴이 날카롭게 변하는 순간 초원은 입을 다물었다.
“1킬로보다 좀 더 나오시는데 괜찮으실까요?”
저울에는 1.3kg이 떡하니 찍혀 있었다.
‘저게 고작 ‘좀 더’야?’
딴 것도 아니고 100g에 만원이 넘는 한우인데 쿨하게 “네, 주세요.”할 수준이 아니었다. 초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뗐다.
“안 괜찮⋯.”
“네, 주세요.”
이 남자에겐 이게 쿨하게 넘어갈 수준이었나 보다. 초원이 눈을 부릅뜨든 말든 그는 포장된 고기를 받아 카트에 넣었다.
“제가 얼마나 잘 먹는지는 아세요? 먹는 데 돈 안 아끼다가는 패가망신할걸요?”
카레에 넣을 감자를 찾으러 채소 코너로 향하던 초원이 투덜거렸다.
“얼마나 잘 먹는지 아니까 1킬로 달라고 했지.”
그 말에 초원은 눈을 가늘게 떴다.
‘바나나가 1,980원, 감자는 1,750원, 한우는, 아이고⋯.’
감자를 카트에 넣으며 총액을 계산해 보다 한숨을 쉬었다.
‘오늘 내가 내려고 했는데⋯.’
지금까지 그 흔한 커피 한 잔도 산 적 없었다. 지갑을 꺼내기만 해도 험하게 인상을 쓰는 통에 요즘은 계산대 앞에서 핸드백 끈도 못 고쳐 맸다. 오늘은 딸기만 사 달라고 하고 나머지는 초원이 낼 생각이었건만 저 한우가 문제였다.
‘한우는 출혈이 쫌 심하게 큰데⋯.’
스티커에 찍힌 숫자는 무려 여섯 자리였다.
‘아, 근데 팀장님이 이때까지 쓴 게 얼마야? 그럼 나도 이 정도는 군말 없이 써야지.’
마음은 그렇게 먹어도 벌써 이번 달 카드값이 무서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속옷 지른 거 취소해야 하나?’
불시에 촌스러운 곰돌이 속옷을 들키느냐 아니면 예쁜 속옷 입은 거지가 되느냐를 두고 치열한 고민을 벌이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승준은 자꾸 옆에서 “이거 먹을래요?”, “저거 먹을래요?” 하더니 점점 묻지도 않고 막 집어넣고 있었다.
‘흠⋯, 이거 카레랑 먹으면 딱인데⋯.’
바삭해 보이는 새우튀김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데 옆에서 승준이 한 팩을 덥석 집더니 카트에 넣어 버렸다.
‘뭘 보질 못하겠네⋯.’
‘헐⋯.’
계산대 디스플레이에 찍힌 금액을 보고 잠시 정신줄을 놓았던 초원은 카드를 꺼내는 승준의 손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오늘은 내가 살게요.”
초원의 입에서 갑자기 외계어가 튀어나오기라도 한 듯 눈살을 찌푸린 그는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초원은 젖먹던 힘을 다해 손을 붙잡았다.
“내가 산다니까요.”
“왜 이래, 이거?”
때아닌 힘겨루기에 계산대 뒤 직원이 멋쩍은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다른 손으로 덥석 초원의 두 손목을 한꺼번에 붙든 승준은 붙잡힌 손을 쉽게 빼냈다.
‘엄마야, 남사스럽게⋯. 침대에서 하던 버릇이 밖에서도 툭 튀어나오네.’
낄 때 안 낄 때 모르는 음란마귀의 낄낄거림에 얼굴이 확 달아오른 초원은 손을 비틀어 뺐다. 승준이 카드를 직원에게 넘기는 모습을 부루퉁하게 바라보다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아, 팀장님 진짜⋯.”
“쓰읍⋯.”
“아, 승준 씨 진짜⋯.”
답답하다는 듯 흘겨보는 초원을 향해 그는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어디 아파요?”
차를 몰던 승준은 조수석 쪽을 곁눈질했다. 초원의 손에는 마트 약국에서 산 진통제가 들려 있었다.
“아, 그냥⋯. 그날이라⋯.”
겸연쩍게 웃은 초원은 약상자를 핸드백에 집어넣더니 초콜릿을 꺼내 들었다.
“아프면 말하지. 장은 나 혼자 봐도 됐는데.”
“낮에 약 먹어서 괜찮아요. 이건 그냥 미리 사 둔 거예요.”
초원은 초콜릿을 한 조각 쪼개 승준의 입술 앞으로 내밀었다. 승준은 익숙한 듯 여전히 운전대 너머를 응시한 채로 입술을 벌렸다. 입속으로 쏙 초콜릿이 들어가고 입술에 손가락이 와 닿는 찰나를 놓치지 않고 손끝에 입을 맞췄다. 수줍은 웃음소리가 차 안을 울렸다.
“그나저나 아쉬워서 어떡해요?”
“뭐가?”
“오늘 밤 기대하고 오신 거 아니에요?”
초원은 초콜릿을 오물오물 먹으며 얄밉게 웃었다.
“후식은 그냥 딸기로 만족하셔야겠네.”
승준은 도로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피식 웃었다.
“아, 근데 딸기 안 좋아한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주면 먹는데. 아, 근데⋯.”
“네?”
“말투가⋯.”
“네?”
“그, ‘시’ 자 좀 빼고 말해요.”
‘시’ 자라니⋯. 초원은 무슨 뜻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했다.
“오시다, 하시다 할 때 ‘시’ 자.”
“아⋯.”
“거리감 느껴지게⋯.”
아무 생각 없이 습관대로 쓴 말투가 승준은 내심 섭섭했던 모양이었다. 그 부루퉁한 얼굴을 보며 옅게 웃은 초원은 운전대에 걸쳐진 손 하나를 잡아끌었다.
“지금은요?”
치맛단 아래, 허벅지에 그 손을 살포시 내려놓았다.
“거리감 안 느껴지죠?”
대답 대신 승준의 입꼬리가 은근슬쩍 올라갔다. 허벅지를 다정하게 쓰다듬는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초원은 불현듯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말을 떠올렸다.
“근데 왜 자꾸 돈 못 쓰게 해요?”
“왜? 그러면 안 되나?”
“서로 공평하게 쓰면 좋잖아요.”
“내가 더 쓰는 게 공평한 거 아닌가? 벌어도 내가 더 버는데.”
승준은 사회생활도 오래 했고 집도 차도 있어 여유가 넘쳤지만 초원은 달랐다. 언젠가 팀원들이 모여 점심을 먹던 자리에서 아직도 학자금 대출을 갚고 있다며 푸념하던 걸 그는 잊지 않았다. 빠듯할 게 뻔한데 지갑을 열게 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 쓰는 게 아니라 다 쓰고 있으면서⋯. 계속 얻어먹기만 하니까 빈대 같잖아요.”
빈대 같다는 말에 승준은 인상을 찌푸렸다.
“내 돈 내 여자한테 쓴다는데 무슨 빈대 같은 소릴 하고 있어.”
초원의 입꼬리가 눈꼬리를 만날 기세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 남자 연애학원 다녔나? 장학생급인데? 아니지, 당장 가르쳐도 될 레벨인 듯.’
저 박력 넘치는 말 한마디에 초원은 내기고 뭐고 다 집어 던지고 확 덮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망할 자궁이 눈치 없이 깽판을 치지만 않았어도⋯.
달아오르는 몸을 식히려 의미 없는 손부채질을 하던 초원은 또 새침데기의 본성을 버리지 못하고 괜한 소리를 했다.
“칫, 그러다 나중에 수틀리면 딴소리하는 거 아니에요?”
“나 그런 쫌생이 아니라니까. 대체 전에 어떤 놈을 만났길래 이래요?”
그 말에 잊은 지 오래됐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초원의 머릿속을 스쳐 갔다.
‘나랑 사귀니까 콘돔값 안 들어서 좋다는 놈이랑 만났지.’
처음엔 뭐든 다 해 줄 것처럼 굴더니 점점 잡은 고기에 먹이 안 주던 남자였다. 사귀는 내내 결혼이니 뭐니 사탕 발린 소리를 하더니만 막판에 손바닥 뒤집듯 마음을 바꾼 남자이기도 했다.
초원은 해가 갈수록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지금 와서 보니 어째서 그런 놈이랑 5년이란 시간을 허비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도 진짜 사람 보는 눈 없었구나.’
승준은 갑자기 조용해진 조수석 쪽을 곁눈질했다. 그 사랑스러운 얼굴에 그늘이 짙게 드리워진 걸 보니 피가 끓어올랐다.
“그놈 이름, 생년월일, 주소.”
“네?”
“주소 모르면 직장이나 학력.”
“왜요?”
“일산 연구소 토끼 밥 주게.”
식인 토끼 격리실에 던져 넣겠다는 살벌한 소리를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하는 남자를 보며 초원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농담이죠?”
“내가 농담하는 거로 보이나?”
두 눈이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게 정말 하고도 남을 것 같았다. 설령 말뿐이라 해도 이렇게까지 분노해 주니 답답했던 속이 시원해졌다.
“됐어요. 복수 같은 거 해서 뭐 하게요.”
그런 흔한 똥차에겐 복수할 정도의 관심도 사치였다.
“다 잊을 정도로 행복하게 잘 사는 게 복수죠.”
“그건 내가 책임질게요.”
망설임 없는 대답에 초원은 방긋 웃었다.
‘이 남자가 내 남자라니. 그동안 지지리도 안 풀린 게 다 이 남자 만나려는 거였나?’
원룸 주차장으로 들어온 차가 멈춰 섰다. 안전벨트를 푼 초원은 냉큼 두 손을 뻗어 승준의 목덜미에 매달렸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두 입술이 서로를 달콤하게 머금었다.
“자취하니까 제일 좋은 게 뭔지 알아요?”
초원은 승준의 옆에 찰싹 붙어 생글생글 웃었다.
“뭔데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카레를 퍼서 그릇에 담던 그는 초원을 내려다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카레에 고기만 잔뜩 넣어도 되고 밤에 김치찌개 고기 건져 먹어도 등짝이 무사하다는 거죠.”
피식 웃은 승준은 국자 한가득 고기를 퍼 초원의 그릇에 올렸다.
“잘 먹을게요.”
초원은 식탁에 마주 앉은 남자 친구를 향해 활짝 웃었다. 밖에서 하는 데이트도 좋지만 이렇게 평범한 일상을 나누는 것만큼 설레는 일도 없었다.
“나도 잘 먹을게요.”
“팀, 아니지 승준 씨가 거의 다 차린 거면서⋯.”
초원이 한 거라곤 부엌 어딘가에서 화석이 되어가고 있던 고형 카레를 발굴하고 감자 껍질만 몇 알 벗긴 게 다였다.
“한우 안심 카레라니 럭셔리하다. 꼭 랍스터 라면 느낌이지 않아요?”
숟가락을 들던 승준은 그 말에 빙긋 웃었다. 집에 온 다음부터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발그레한 볼로 계속 조잘거리는 그녀가 귀여웠다.
그는 건성으로 카레를 비비며 마주 앉은 얼굴을 살폈다. 카레를 한술 떠 후후 불다 입속으로 넣은 초원이 이내 눈을 감고 황홀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요리해 주는 보람이 있는 여자였다.
“와, 비싼 고기는 다르네요. 오래 안 익혀도 진짜 야들야들하다.”
“거봐요. 먹는 데 돈 아끼는 거 아니라니까.”
그제야 승준은 흐뭇하게 웃으며 첫술을 떴다.
새우튀김 하나를 집어 카레에 찍어 먹던 초원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승준을 물끄러미 바라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