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emperature difference between the woman and the man RAW novel - chapter 43
“왜?”
시선을 느낀 그가 묻자 초원이 배시시 웃더니 영문 모를 소리를 했다.
“승준 씨는 겉바속촉인 것 같아요.”
“겉바 뭐?”
한 번씩 초원이 이런 뜻 모를 말을 할 때마다 자신이 어느새 요즘 유행어도 모르는 아재 반열에 오른 건가 싶어 당혹스러웠다.
“겉은 바삭, 속은 촉촉이요.”
초원이 한 입 베어 문 새우튀김을 보란 듯 흔들며 설명했다. 새우튀김이라면 이해가 되는데, 자신을 보고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다는 의미를 몰라 승준의 미간은 더욱 좁아졌다.
“겉은 딱딱한데 속은 부드럽잖아요.”
그제야 이해한 그는 쑥스럽게 웃었다.
“무뚝뚝의 끝을 달릴 줄 알았는데 의외예요.”
그 말에 씁쓸한 미소를 지은 승준은 숟가락으로 카레를 뒤적였다. 의외라니, 초원이 보기엔 그래도 나아진 모양이었다.
“예전엔 그랬지. 말로 표현도 못 하고⋯. 그러니까 오해밖에 안 생기고⋯.”
봉인되어 있던 옛 추억이 승준의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일렁이는 불빛과 달아오른 숨소리, 그리고 그 끈적한 열기까지 생생했다.
‘오늘 밤은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어요?’
여느 때처럼 마음을 감추고 그것이 제 의무인 양 사무적으로 물으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던 날이었다.
‘저 좀 사랑해 주세요.’
그 붉은 입술에서 탄식처럼 뱉어져 나온 말이었다. 그녀의 눈에 촉촉이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승준은 이런 말을 하게 만든 자신이 싫어졌다. 다시는 비겁하게 굴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침묵을 깼다.
‘그건 늘 하고 있는데.’
초원은 아련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남자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뭐야? 전 여친 생각이라도 하나?’
초원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뒤늦게 느낀 승준은 겸연쩍게 웃더니 딴소리를 했다.
“참, 오늘 병원 갔다 온 건 어떻게 됐어요? 진짜 뱀파이어 소행인 것 같아요?”
“아,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사체는 그래 보이는데 꼭 그게 뱀파이어 짓이라고 할 순 없잖아요.”
“흠, 그렇지.”
“특관청 생긴 이래로 뱀파이어는 접수된 적도 없다면서요?”
“아, 그건 엄밀히 따지면 사실이 아닌데. 등록된 적은 없지만 접수는 있었거든.”
“왜요? 놓쳤어요?”
“그건 아니고 추방시켜서. 옛날에 일본 쪽에서 세력 다툼하다가 밀려난 무리가 있었는데, 멋모르고 우리나라가 블루 오션이라고 왔다가⋯.”
승준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으며 물잔을 기울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마늘 먹은 사람 피 마시고 쓰러져서 응급실로 실려 가는 바람에 난리가 났었지.”
“하하, 역시 한국이 뱀파이어 청정국인 데는 다 이유가 있다니까요.”
“그래도 이번엔 뱀파이어가 머리를 좀 썼을 수도 있고⋯.”
그 말에 초원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같은 사인으로 죽은 이들이 모두 외국인인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하긴 피해자가 다 마늘 잘 안 먹는 나라 출신이네요.”
젓가락으로 김치를 집던 승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이번엔 증거가 좀 나왔나?”
“그런 것 같아요. 일단 상처 주변에 타액이 있는지 본다고 검사 맡겨 놨다네요.”
“타액에서 혈액 항응고제 검출되면 뱀파이어일 가능성이 크니까 항응고제 검사도 신청해 놓으세⋯.”
승준은 문득 말을 멈추더니 인상을 구겼다.
“우리 지금 뭐 하는 거지?”
그 자조적인 한탄에 초원은 웃음을 터트렸다.
책상머리에서의 습관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밥상머리에서까지 튀어나왔다. 초원에게는 팀장이라고 부르지 말라 해 놓고는 팀장 짓을 해 버린 자신이 한심해 승준은 긴 한숨을 쉬었다.
“팀장님께서 먼저 시작하셨잖아요?”
초원은 일부러 극존칭을 쓰며 얄밉게 눈을 깜빡였다.
“우리 집에 우렁총각 생겼네.”
초원은 설거지를 하는 승준의 너른 등을 뿌듯하게 바라보다가 와락 껴안았다.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가 나며 그 넓은 등이 잠시 들썩였다.
“우렁각시의 남자 버전은 우렁서방 아닌가?”
승준은 한 팔을 들어 올리고 몸을 조금 틀었다. 등에 딱 붙어 있던 초원이 팔 아래를 비집고 들어오더니 옆구리에 매달렸다. 아기 원숭이처럼 안긴 모습에 아빠 미소를 지은 그는 초원의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허리 아프다면서요. 누워 있어요.”
“약 먹었잖아요.”
저녁을 먹고 나니 약효가 다 떨어졌는지 허리가 다시 아파 왔다. 욱신거리는 불편함이 끊어지는 아픔으로 변하기 전에 초원은 약국에서 사 온 진통제를 삼켰다.
“그래도 약 먹는다고 바로 낫나? 가서 누워 있어요.”
“그래도 하늘 같은 팀장님이 설거지하는데 주임 나부랭이가 어떻게 누워 있어요?”
반 농담, 반 진담이었다. 승준이 자신의 자취방에서 집안일을 하고 있는 이 어색한 풍경을 술도 안 마신 맨정신으로 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옆에서 귀여운 척이라도 하려 했는데 이 남자는 위협적인 척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당장 가서 안 누우면 내가 들쳐 메고 가서 침대 위로 던질 거예요.”
“오호⋯.”
기대에 차 생글거리는 눈빛에 승준은 한숨을 쉬었다.
‘이 여자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야?’
그는 설거지를 하다 말고 장갑을 벗어 던졌다.
“아, 진짜 말 안 듣네.”
“앗!”
초원의 몸이 번쩍 위로 들렸다. 들어 올릴 땐 박력 넘치기 그지없더니 내려놓을 땐 깨지기 쉬운 물건이라도 되는 양 침대 위로 살포시 놓았다.
이불을 꼼꼼히 둘러 주는 손길을 느끼며 초원은 공주님이라도 된 기분을 만끽했다.
“여기 얌전히 있어요.”
승준이 몸을 일으키고 싱크대로 가려는 찰나, 초원은 이불 속에 묻혀 있던 손을 뻗어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앗, 까먹은 거 있는데⋯.”
그 말에 승준은 은근히 입꼬리를 올리더니 입술에 쪽 소리 나도록 입을 맞췄다.
“아니, 그것도 좋지만 내 핸드폰⋯.”
초원이 쑥스러운 얼굴로 식탁 위의 핸드폰을 가리켰다. 김샌 듯, 쓰게 웃은 승준이 이내 핸드폰을 가지고 돌아왔다. 손을 내밀어 받으려는 찰나 그는 핸드폰을 등 뒤로 감추더니 몸을 숙였다.
“배달비.”
키득키득 웃은 초원은 그가 내민 입술에 쪽쪽 두 번이나 배달비를 냈다.
“아, 그건 내일 내가 버릴게요.”
핸드폰으로 몰래 하늘 같은 팀장이 설거지를 하는 진귀한 풍경을 찍던 초원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승준은 냉장고 옆 쓰레기통을 비우고 있었다.
“잠깐 내려갔다 오기만 하면 되는데, 뭐.”
쓰레기봉투를 들고 현관에서 신발을 신던 승준의 움직임이 별안간 잠잠해졌다. 핸드폰을 놓고 몸을 웅크리던 초원은 현관이 조용하자 고개를 들었다. 승준의 날카로운 시선은 신발장 위의 작은 화분으로 향해 있었다.
‘왜 그러지?’
눈을 깜빡이던 그녀는 그제야 화분 뒤에 놓인 작은 종이 백을 눈치챘다. 가슴이 빠르게 두근대기 시작했다.
‘헉, 저게 언제부터 저기 있었지?’
승준은 아니나 다를까 종이 백 안을 들여다보더니 집어 들었다.
“이건 뭐예요?”
초원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아, 저 짐승 같은 감하고는⋯.’
난처한 기색을 눈치챈 그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 갔다.
“차 주임?”
그 세 글자를 뱉는 목소리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차가웠다. 초원은 눈을 감고 긴 한숨을 쉬었다.
“받고 싶어서 받은 거 아니에요. 필요 없다고 했는데 생일 선물이라고 주는 거 안 받기도 무안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 내가 쓸 생각 요만큼도 없고 다음에 언니 주려고 그냥 둔 거예요.”
길게 말다툼을 벌이고 싶지 않아 숨도 쉬지 않고 해명했지만 승준의 표정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한마디 따지지도 않고 그는 종이 백을 집어 든 채로 밖으로 나가 버렸다. 현관문이 쾅 닫히고 초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최악이다.’
다시 침대에 누워 베개에 뺨을 묻고 목걸이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왜 선배는 또 쓸데없이 안 하던 짓을 해서⋯.’
이내 문밖에서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승준이 빈손으로 돌아왔다. 무슨 말을 할지 잠자코 기다렸지만 그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냉장고로 가더니 딸기를 꺼내 씻기 시작했다.
연유를 잔뜩 뿌린 딸기를 가져와 침대 머리맡에 앉은 승준이 그제야 길고 불편했던 침묵을 깼다.
“흠, 별말 안 하네?”
“내 잘못인데요, 뭐.”
초원은 한탄하는 투로 중얼거리며 침대 정면에 있는 TV를 켰다.
“알긴 아네.”
승준은 따갑게 쏘아보는 시선을 고스란히 받으며 포크로 딸기 하나를 찍어 연유를 잔뜩 묻혔다. 그가 주는 딸기를 받아먹으면서도 초원은 여전히 부루퉁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예쁜 것도 잘못이지.”
풋, 웃음을 터트리는 초원의 턱을 잡고 격하게 입술을 집어삼켰다. 딸기의 상큼함과 연유의 달콤함이 입속을 감돌았다. 딸기가 이토록 맛있는 건지 승준은 이날 처음 알았다.
초원은 단단한 품에 안긴 채로 TV에 시선을 고정했지만 드라마의 내용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뜨거운 손바닥이 그녀의 아랫배를 다정하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차갑던 아랫배가 따뜻해지면서 몸은 편안해졌지만 마음속으로는 불편한 감정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여자 많이 만나 봤겠지?’
날 때부터 여자를 이렇게 잘 아는 남자는 없다. 다들 여자와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을 거치면서 ‘생리통에는 배를 따뜻하게 해 주는 게 좋다’는 여자만의 상식을 체득하게 된다.
초원은 저녁을 먹다 말고 허공을 응시하던 승준의 눈빛을 떠올렸다. 그 아련한 눈빛은 분명 여자를 향한 거였겠지.
‘어떤 여자였을까?’
분명 이 남자와 잘 어울리는 예쁘고 잘난 여자였을 거다.
‘그 여자한테도 이렇게 해 줬을까?’
배를 문지르는 따뜻한 손길을 느끼며 초원은 목걸이로 손을 가져갔다.
‘많이 사랑했겠지?’
갑자기 정수리에 입술이 꾹 와 닿았다.
‘어쩌다 헤어졌을까?’
초원은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멍하니 그의 세찬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술은 적당히, 질투도 적당히
뚝, 샤프심이 부러졌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간드러진 웃음소리에 이를 앙다문 초원은 신경질적으로 샤프 끄트머리를 눌러댔다.
“홍 주임.”
“네?”
“듣고 있어요?”
옆에서 한참 뱀파이어 의심 건을 두고 가설을 가장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현우가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예전에는 안 이랬는데.’
초원은 항상 현우의 가설에 무조건 딴지를 걸고 헛소리 작작하라는 듯 눈살을 찌푸리곤 했지만 오늘은 달랐다. 반응이 없었다. 아예 듣지도 않는 것 같았다. 정신이 딴 데 팔린 건지, 아니면 그냥 듣기 싫은 건지. 그 딴지와 눈살이 그리워지는 날이 오다니. 현우는 웃음이 나오려다가도 한숨이 나왔다.
“네, 듣고 있으니까 계속해요.”
멋대로 끄적이던 노트에서 시선을 뗀 초원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뱀파이어 건은 아직 확실히 밝혀진 게 없었다. 검사 결과 타액은 맞았지만 검체가 너무 소량인 탓인지 항응고제 검출에는 실패했다. 그래서 아직 특관청 쪽 사건이 아닌데도 현우는 흥미가 온통 그쪽으로 쏠려 있었다.
“내가 여름에 발견된 일본인 피해자 SNS를 확인해 봤는데요.”
“그런데요?”
“실종되기 전날에 친구한테 내일은 절에 간다고 댓글을 단 게 있더라고요.”
“그래요?”
“뭔가 딱 감이 오지 않아요?”
“뭐가요?”
“절이랑 향냄새.”
딱 맞는 퍼즐 조각을 찾은 듯, 신이 난 현우의 눈이 반짝였다.
“기억 안 나요? 2주 전에 발견된 백인 남자 사체에서 향냄새 났던 거?”
“흠, 그럴듯하긴 한데⋯.”
초원은 삐딱하게 의자에 머리를 기대곤 쓴웃음을 지었다.
“절은 관광객 필수 코스고 절 잠깐 구경하고 온다고 향냄새가 배지도 않잖아요.”
초원의 반박에 현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옅은 한숨을 쉬다 풋 웃었다. 초원이 딴지를 거는 건 늘 힘 빠지는 일이었는데 오늘은 기쁘다니. 바보 같기 짝이 없다.
“그 남자도 절에 갔다는 증거는 있어요?”
“찾아봐야죠. 김 경위님이 그러던데, 그 사람 신원 확인했대요.”
“어떻게요? 빠르네요.”
“게스트하우스 직원이 짐 맡기고 안 찾아간 사람 있다고 신고했나 봐요.”
“착한 사람이네요. 그냥 꿀꺽 안 하고⋯.”
초원의 시니컬한 말투에 현우는 피식 웃었다.
“그래서 경찰에서 조사 다 끝나면 소지품이랑 수사 자료 받기로 했어요.”
초원은 못마땅한 듯 다시 노트에 샤프를 아무렇게나 긁적이기 시작했다.
‘왜 벌써 땡겨 오려고⋯. 그럼 나도 같이 봐야 하잖아.’
그 속을 모를 리 없는 현우는 ‘아, 귀찮아.’가 쓰여 있는 초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웃었다.
“이건 뱀파이어로 확정될 때까진 내가 혼자 조사할 테니까 걱정 마요.”
“됐어요. 그런 게 어딨어요. 같이 해야지.”
아무리 귀찮아도 파트너를 모른 체할 만큼 모질지는 못했던 초원이었다.
어느새 표정을 풀고 현우에게 부드럽게 웃어 주던 그녀는 또 팀장실 문틈으로 여자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자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용건인 건지, 법무과 여자 변호사가 팀장실로 들어간 지 벌써 20분은 족히 넘었다.
“되게 분위기 화기애애해 보이네요.”
현우는 별일이 다 있다는 듯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갑자기 병훈이 칸막이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밀더니 히죽히죽 웃었다.
“의왼데? 돌부처 같으신 양반이 여자 웃기는 재주가 다 있으시고⋯.”
뚝, 샤프심이 다시 부러졌다. 한 번만 더 인내심에 금이 가면 샤프심이 아니라 샤프가 부러지겠다 싶을 즈음, 팀장실 문이 벌컥 열렸다.
도도한 미소를 지으며 한 발짝 걸어 나온 여자가 갑자기 팀장실 쪽으로 몸을 휙 돌렸다.
“어쨌거나 잘 마무리돼서 다행이에요. 팀장님 너무너무 고생 많으셨어요.”
여자의 눈웃음에서 농익은 요염함이 철철 흘러나왔다. 초원은 승준이 어떤 얼굴일지 궁금해 미칠 것 같았지만 팀장실 흰 유리 너머로 보이는 건 그의 실루엣뿐이었다.
“아닙니다. 고생은 김 변호사님이 하셨죠.”
“그럼 다음에 고생한 사람들끼리 꼭 술 한잔하는 거죠?”
“아⋯, 하하⋯.”
난처한 웃음소리가 팀장실 문간을 넘어왔다.
“꼭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