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emperature difference between the woman and the man RAW novel - chapter 45
“그만해요.”
자리에서 급히 일어서며 현우의 입을 막으려고 손을 뻗는 초원을 승준은 굳은 얼굴로 응시했다.
“기억 안 나요? 그날 밤 내 침대에서 잔 거?”
“그런 얘긴 왜 해요?”
초원이 반쯤 울상이 된 얼굴로 노려보았다. 현우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술기운에 마비되었던 이성이 돌아오자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아무리 초원에게 섭섭했어도 이런 소리를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해서는 안 됐는데.
“⋯미안해요.”
테이블 위로 귀신이라도 지나간 듯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아이고, 차 주임도 취했네.”
병훈이 뒤늦게 덧없는 수습을 시도했지만 분위기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어색하게 시선을 돌리는 사람들 사이로 승준의 얼굴은 점점 뒤틀려 가고 있었다.
“저 먼저 가 보겠습니다.”
더는 이 숨 막히는 상황을 견딜 수 없었던 초원은 가방과 코트를 챙겨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다.
‘화났겠지?’
창 너머 가로등 불만이 새어 들어오는 어두운 방, 초원은 정장 차림 그대로 침대에 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그녀를 따라 나온 사람은 승준이 아니라 현우였다. 미안하다고 집까지 데려다준다는 그에게 화를 버럭 내고 다시 대로변을 향해 걷는데, 이번에는 뒤늦게 아름이 쫓아왔다. 알아서 가겠다는 초원에게 아름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주임님 집에 무사히 들어가는지 보고, 전화하라고 팀장님이 그러셨단 말이에요.’
그 말을 다시 떠올리니 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올라오려 했다. 직접 따라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아름이라도 대신 보냈겠지.
‘근데 따라올 수 있는 상황이어도 따라왔을까?’
그저 보고 싶지 않아서 따라오지 않은 것일 수도 있었다. 초원은 두 손으로 얼굴을 거칠게 문질렀다.
‘미친⋯. 거기서 그런 얘긴 왜 해? 오해받기 딱 좋게.’
술 취해서 한 말실수라고 사람들이 웃어넘기고 잊어 줄 수준이 아니었다. 여자가 크리스마스에 남자 동료 집에서 잤다는 말을 듣고 이상한 생각을 안 할 사람이 있을까? 둘이서만 알면 웃기는 해프닝일 것이 남들이 알게 되면 망측한 스캔들이 되는 것이다.
‘또 이상한 소문 나겠네.’
이번엔 차라리 오피스 와이프가 양호할 수준의 소문이 날 게 분명했다. 온갖 추한 소문에 승준이 티도 내지 못하고 속앓이를 할 생각을 하자 미칠 것 같았다. 초원은 양손에 얼굴을 묻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팀장님도 나랑 현우 선배 사이에 뭐가 있었다고 생각하진⋯.’
벌써 전화를 열댓 번은 하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아직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초원은 물끄러미 발치에 둔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띠링. 마침 핸드폰이 짧게 울리고 승준인가 싶어 냉큼 핸드폰을 집어 들었던 초원은 실망해 얼굴을 찡그렸다.
[초원 씨. 진짜 미안해요. 내가 아까 하면 안 될⋯]화면에 뜬 메시지는 잘려 있었다. 초원은 현우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할 생각도 하지 않고 전화 앱을 열었다.
“하아⋯. 진짜⋯.”
승준의 이름 위로 손가락을 댈 듯 말 듯 망설이던 초원은 한숨을 쉬었다. 그런 거 아니라고, 아무 일 없었다고 말해야 하는데 머릿속으로는 온갖 최악의 반응이 스쳐 지나가면서 눈가가 촉촉해지고 있었다.
크게 심호흡을 한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초조하게 손가락을 무릎 위로 두드렸다. 신호가 여섯 번이나 갔지만 받을 기미가 없었다. 원래라면 세 번이 채 울리기도 전에 전화 너머로 초원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야 정상이었다.
‘화 단단히 났구나.’
마지못해 끊으려는 찰나, 신호음이 멈추더니 정적이 이어졌다.
“⋯네.”
목소리가 무거웠다. 그 둔탁한 소리에 심장을 얻어맞기라도 한 듯 초원의 가슴이 아려왔다.
“⋯화났어요?”
“아니.”
차갑기 그지없는 대답이 아닌 게 아니라는 걸 말해 주고 있었다.
‘진짜 화 많이 났구나.’
초원의 어깨가 더욱 움츠러들었다.
“내가 화날 권리가 있나?”
체념과 냉소로 벼려진 말투가 송곳처럼 머리를 파고들었다. 초원은 찌르르한 통증이 퍼지는 관자놀이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나랑 사귀기 전에 초원 씨가 뭘 했든 내가 뭐라 할 권리가 있냐고.”
“뭐라 할 것도 없어요.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그게 말이 돼? 둘이 그렇게 붙어 다니고 한방에서 잠까지 잤는데 아무 일이 없을 수가 있냐고.”
“진짜 아무 일 없었다니까요? 남녀가 한방에서 자면 꼭 무슨 일이 있어야 해요? 우리도 울릉도에서 아무 일 없었잖아요.”
승준은 허탈한 듯 웃었다.
‘이 여자, 남자를 몰라도 너무 모르네.’
그날 밤 초원이 조금만 더 틈을 보였더라면 승준은 자제력을 잃고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질렀을 거다. 초원의 마음이 약해진 틈을 이렇게 노리는 건 비열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 그녀의 몸으로 손이 가는 걸 그도 어쩔 수 없었다.
“그날 내가 얼마나 참은 건지는 알아요?”
그날 밤 침대에서 몸과 이성의 사투를 벌이던 건 자신뿐인 줄 알았던 초원은 잠시 말문을 잃었다.
“그놈도 남잔데, 게다가 저 좋다는 여자가 자기 침대에 누워 있는데 마음이 있든 없든 건드리고도 남지.”
아무 일 없었다고 몇 번을 말해도 승준이 믿지 않자 초원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내가 지금 거짓말한다는 거예요?”
“혹시나 내가 화낼까 봐 숨기려는 거면 그럴 필요 없다는 뜻이에요.”
“아니라니까요.”
머리를 망치로 내려치는 듯한 통증에 초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혹시 차 주임한테 아직 마음 있으면서 나랑 만나는 거라면⋯.”
“네? 하아, 진짜 왜 그래요?”
마음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 고스란히 보여 줬는데 왜 이런 소리가 나오는 걸까? 왜 이렇게 믿어 주지 않는 걸까 싶어 초원의 눈시울이 시큰하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요? 아무리 초원 씨 내 여자라고 외쳐도 한편으론 남의 여자 뺏은 기분인 거.”
“그게 무슨⋯.”
생각지도 못한 소리에 초원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아무 일 없었다니까요? 그냥 내가 한심하게 짝사랑 좀 했고 진짜 그게 다예요. 끝난 지 오래고 이젠 아무 감정도 없는데 왜 그래요?”
벌거벗겨진 기분을 느끼며 ‘아무 일 없이 끝난 한심한 짝사랑’을 제 입으로 인정하기까지 했건만 승준은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었다. 답답함과 억울함에 초원은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팀장님 말대로 사귀기 전 일에 화낼 권리도 없는데 내가 왜 이렇게까지 믿어 달라고 매달려야 해요?”
인내의 한계에 달한 초원의 태도마저 차갑게 변하고, 자신의 집 거실에서 바닥을 보이는 위스키 잔을 앞에 두고 앉아 있던 승준은 한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답은 혼자 정해 놓은 거잖아요. 애초에 내 말은 믿을 생각도 없었고⋯.”
그를 힐난하는 목소리가 눈에 띄게 젖어 있었다.
“초원 씨⋯.”
“하긴, 팀장님이랑 사귀지도 않는데 잤으니 내가 얼마나 헤픈 여자로 보였겠어요.”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서러운 눈물을 초원은 연신 손등으로 닦아 냈다.
“무슨 소릴⋯.”
“현우 선배랑도 그랬을 거라고 의심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죠. 이해해요.”
“나는 그런 뜻이 아니고⋯.”
“너무 오랜만에 해서 연애가 이렇게 피곤한 일이란 걸 잊고 있었네요.”
한숨처럼 초원이 쏟아 낸 말에 승준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어질 말을 예상하니 입 안이 바싹 마르기 시작했다.
“지금 갈게요. 얼굴 보고 얘기해요.”
승준은 벌떡 일어나 소파에 아무렇게나 걸쳐 두었던 재킷을 집어 들었다.
“됐어요. 그런다고 뭐가 달라져요? 저 피곤하니까 오지 마세요.”
“초원⋯.”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발치로 던진 초원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이내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하는 핸드폰을 다시 집어 든 그녀는 전원을 꺼 버리고 현관으로 향했다. 도어락의 빨간 스위치도 잠가 버리고 침대로 돌아와 쓰러지듯 누웠다.
‘짝사랑 좀 한 게 죄야?’
베개를 끌어안고 몸을 웅크렸다.
‘그냥 바보짓 했다고 웃고 넘어갈 일인데 왜 나를 죄인으로 만들어?’
두꺼운 베개 사이로 숨죽인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현우 선배도 팀장님도 다 짜증 나. 남자들 다 짜증 나.’
다시 머리가 지끈거리자 초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남자는 다를 줄 알았던 내가 바보지.’
처음엔 이 사람이 내 운명의 반쪽이라고 온갖 유난을 떨다가 끝에 가선 남보다 못한 싸늘한 사이가 되어 버리는 그런 흔한 연애와 이 연애도 다를 바 없을 텐데, 그 달콤함에 취해서 또 순진하게 평생을 약속해 버린 자신이 한심했다.
사랑이라는 게 사람을 얼마나 바보로 만드는지 잊고 있었다.
‘바보 같아. 나도, 저 남자도.’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철컥 손잡이를 비트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런다고 굳게 잠긴 문이 열릴 리가 없었다.
문 너머에서 자신을 부르는 초조한 목소리에 초원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지극히 흔한 연애
본청 사무실 전체가 크리스마스이브의 분위기에 젖어 들떠 있었다. 설령 솔로라 해도 빨간 날이 싫은 직장인은 있을 턱이 없으니.
퇴근을 5분 앞둔 5시 55분, 복도를 지나는 얼굴은 하나같이 싱글벙글이었지만 커피 가득한 머그잔을 들고 탕비실을 나서는 생물3팀 팀장만은 늘 그렇듯 저승사자 상이었다.
3팀 사무실로 들어오던 승준은 습관대로 초원의 자리에 시선을 던졌다. 평소라면 눈치채고 잠시라도 눈을 마주쳐 주었을 여자는 묵묵히 노트북 모니터만 응시하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승준은 씁쓸한 얼굴로 팀장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머, 이런 날은 여자 친구랑 보내셔야지 또 야근이세요?”
퇴근 인사를 하러 팀장실 문을 두드린 희경에게 승준은 대답 대신 쓰게 웃었다.
‘그러게⋯. 지금 그 말 홍 주임한테 가서 해 주지?’
희경이 나가자 팀원들이 하나둘씩 팀장실 앞을 지나치며 인사를 해 왔다. 내심 다른 사람들이 모두 퇴근해 버리고 초원과 단둘이 남길 바랐던 승준은 유리 너머에서 이쪽으로 걸어오는 익숙한 실루엣을 보자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그 무미건조한 인사에 울컥한 그는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 붙잡고 싶었지만 그럴 때도 장소도 아니었다.
대답이 없자 초원은 무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까딱 숙이더니 사무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승준은 그녀가 서 있던 자리를 멍하니 응시했다.
전화로 다퉜던 다음 날 초원은 출근하지 않았다.
“홍 주임은?”
출근 전 자취방에 다시 들렀지만 전날 밤처럼 초원의 머리카락조차 보지 못한 그는 사무실에서도 모습이 보이지 않자 진이 빠졌다.
“아, 초원 주임님 아까 전화 주셨는데요. 두통이 심해서 오늘 출근 못 하실 것 같다시네요.”
그 말에 팀장실로 들어와 다시 전화를 해 봤지만 아니나 다를까 핸드폰은 또 꺼져 있었다.
그날은 그답지 않게 마음이 종일 콩밭, 정확히 말하자면 풀밭에 가 있는 하루였다. 종일 미친놈처럼 핸드폰 배터리가 닳을 때까지 전화를 하고 또 했지만 초원의 핸드폰은 한시도 켜져 있는 틈이 없었고 점심도 포기하고 찾아갔지만 문은 여전히 굳게 잠겨 있었다.
인내심이 극에 달한 그는 별것 아닌 일로 이번 일의 원흉을 쥐 잡듯 잡았다. 다들 종로에서 뺨 맞은 팀장이 엉뚱하게 현우에게 화풀이를 한다고 생각했지만 승준은 뺨 때린 놈을 잡는 것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끌려갔던 윗사람들과의 송년회가 끝난 늦은 밤, 습관처럼 터덜터덜 초원의 자취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창문이라도 깨 버리면 나오려나?’
원룸 건물 앞에서 굳게 닫힌 검은 창문을 올려다보던 승준은 던질 돌이라도 있나 싶어 둘러봤지만 길바닥엔 아무것도 없었다.
“하아⋯.”
길게 한숨을 내쉰 그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안 열릴 걸 뻔히 알면서도 도어락으로 손을 가져갔다. 비밀번호를 이미 외운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였다.
띠리릭.
어쩐 일인지 이번엔 문이 열렸다.
천천히 문을 열고 현관으로 들어갔다. 어두컴컴했지만 창밖의 가로등 불빛 덕에 실루엣 정도는 분간할 수 있었다.
방은 비었나 싶을 정도로 고요했다.
‘설마 집에 없는 건 아니겠지?’
다행히도 집주인은 집에 있었다. 승준은 벽 쪽으로 몸을 돌린 채 베개를 끌어안고 죽은 듯 자고 있는 초원을 내려다보았다. 침대 옆 서랍 위에는 반쯤 빈 물컵과 진통제, 그리고 생일 선물로 준 목걸이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몸을 숙여 이마에 손을 얹었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놀랐는지 초원이 몸을 움찔하더니 베개를 더욱 단단히 끌어안았다.
이마는 뜨겁고 축축했다. 승준은 땀에 젖어 이마에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떼어 넘겼다.
“많이 아파요? 병원은 갔다 왔어요?”
아무리 기다려도 대답이 없자 그는 한숨을 내쉬곤 욕실로 향했다.
차가운 물수건이 이마에 닿자 잠시 움찔했을 뿐 초원은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승준은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이마에 얹은 물수건을 붙잡고 있었다.
“약은 먹었어요?”
궁금해서 물은 건 아니었다. 서랍 위의 진통제 포장만 봐도 그건 알 수 있었다. ‘네’, ‘아니요’, ‘꼴도 보기 싫으니까 꺼지세요.’든 뭐든 좋으니 대답을 듣고 싶었는데 초원은 묵묵부답이었다.
‘악플이 무플보다 낫다는 게 이런 뜻이군.’
“밥은?”
이번에는 정말 궁금해서 어깨까지 흔들며 물었지만 역시 아무 반응이 없었다.
“빈속에 약 먹으면 안 되는데. 죽 끓여 줄까요?”
어깨에 얹었던 손을 등으로 옮겼더니 셔츠가 축축했다. 차갑게 젖은 옷을 입고 있다가 감기라도 걸릴까 걱정이 되었던 그는 초원이 안고 있던 베개를 뺏고 셔츠 단추로 손을 가져갔다.
“아, 나는 그게 아니고⋯.”
찰싹 맞은 손등이 쓰라렸다. 그제야 눈을 뜬 초원이 잠시 흘겨보더니 다시 베개를 끌어안았다.
“땀 너무 많이 흘려서 잠옷 다 젖었는데⋯. 이거 입고 자다가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요? 잘 거면 이거부터 갈아입고 자요.”
“팀장님⋯.”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응?”
드디어 초원이 입을 열자 승준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머리 깨질 것 같아요.”
“병원 갈래요?”
“아뇨.”
“왜?”
“좀 조용히 해 주세요.”
승준이 말을 할 때마다 머릿속이 울렸다. 살짝 얼굴을 찡그린 초원은 물수건을 쥔 그의 손마저 밀어내고 다시 눈을 감았다.
사실 그녀의 두통을 없애는 특효약을 알고 있는 그였지만, 옷을 벗기려다 한 대 맞은 이 분위기에 그런 말을 꺼냈다가는 변태 취급을 당할 게 분명했다. 결국 입을 꾹 다문 승준은 옷을 갈아입히는 걸 포기하고 이불을 단단히 덮어 주었다.
미동도 하지 않고 한참을 초원의 얼굴만 내려다보았다. 다시 잠이 든 건지 숨소리가 잠잠했다.
어떻게든 사과를 하고 오해도 풀려고 왔는데 그녀는 그걸 받아 줄 상태가 아니었다. 어젯밤 초원이 연애가 피곤하다고 했을 때부터 그를 괴롭히던 초조함에 숨이 막혔다.
손에 쥐고 있던 물수건을 서랍 위에 놓은 그는 침대 위로 올라갔다.
“꽃구경이라도 실컷 해야지.”
침대가 출렁이는 바람에 눈을 뜬 초원은 벽과 자신 사이의 좁은 공간을 큰 덩치로 비집고 들어오는 남자를 보고 엉겁결에 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봐도 불편해 보이는 자세로 누운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렇게 화가 많이 난 건 아닌가 보네.’
그는 다시 눈을 감은 초원의 얼굴을 물끄러미 감상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데 내가 왜 그랬을까?’
질투는 쉽게 사람을 미치게 했다.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약속한 지 얼마 됐다고 아프게 한 자신이 한심했다.
승준은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다가갔다.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