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emperature difference between the woman and the man RAW novel - chapter 46
살포시 입술을 포갰다. 거부할 줄 알았던 초원이 살짝 입술을 벌렸다.
‘화 풀렸구나.’
윗입술이 부드럽게 초원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눈을 감은 채로 은근히 미소를 짓던 그의 얼굴이 갑자기 구겨졌다.
“아!”
깨물린 입술이 얼얼했다. 고개를 뒤로 물리자 어느새 눈을 뜬 초원이 노려보고 있었다.
“거짓말.”
“뭐가? 사랑한다는 말?”
초원은 눈을 흘기더니 등을 돌려 버렸다. 쓰라린 입술을 문지르던 승준은 그녀의 등 뒤로 바짝 다가갔다.
“진심인 거 알면서.”
한 팔로 머리를 괸 그는 부루퉁한 얼굴을 한 초원을 내려다보았다.
“팀장님이 나 못 믿는 건 괜찮고 나는 팀장님 하는 말 다 믿어 줘야 해요?”
“그게 아니라⋯.”
“나 하나도 안 믿으면서 사랑 좋아하시네.”
초원의 두 눈이 질끈 감기더니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서럽게 흐느끼는 소리에 승준의 가슴이 미어졌다.
“초원 씨⋯.”
뒤에서 끌어안았지만 초원은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쳤다.
“내가 잘못했어요.”
승준을 뒤로 밀어낸 초원은 몸을 일으켜 앉았다.
“남의 여자 뺏어 온 것 같다니⋯. 지금까지 그런 기분으로 날 만난 거예요?”
몸을 일으킨 승준은 원망 가득한 시선을 고스란히 받으며 초원의 젖은 눈가를 손으로 훔쳤다.
“어젠 제정신이 아니어서 하면 안 될 소릴 했어요. 미안해요.”
“그래도 하고 싶었던 말 아니에요?”
초원의 따가운 시선을 피하던 그는 곤란한 듯 이마를 문질렀다.
“그냥 난 아직 마음이 안 놓여서⋯.”
목숨까지 걸 정도로 딴 사람을 좋아했던 여자가 갑자기 자신에게 마음을 활짝 연 것이 못내 기쁘면서도 내심 불안했다.
“내가 그렇게 애매하게 굴었어요?”
초원의 두 눈에 그렁그렁 맺혀 있던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아니, 초원 씨 잘못이 아니고⋯.”
다시 끌어안으려는 승준을 초원은 밀어냈다.
“난 진심으로 팀장님만 보고 있었는데⋯.”
어젯밤 승준의 말에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던 초원은 모든 게 허무해져 하루 종일 침대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의심해서 미안해요.”
“나 진짜 그 사람이랑 연애 금지 규정 어길 만한 짓 안 했어요.”
억울함이 북받친 그녀는 숨이 넘어갈 듯 울기 시작했다.
“알아요. 미안.”
달래려고 다가가던 그는 다시 뒤로 밀쳐졌다.
“알긴 뭘 알아요? 아는 사람이 어제 그런 소릴 했어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울기 시작하는 초원을 달래려 손을 들던 승준은 대신 서랍 위에 놓인 티슈 갑을 집어 건네주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초원 씨 기분이 나아질까? 응?”
안아 주지도 못하게 하는 초원에게 뭐든지 하겠다는 간절함을 담아 물었다.
“내 기분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티슈를 한 뭉텅이 뽑은 초원은 눈물을 닦더니 승준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집에 가세요.”
알아서 한다더니 며칠이 지난 지금도 초원의 기분은 그대로였다.
텅 빈 사무실에 홀로 남아 의미 없는 야근을 하던 승준은 고개를 들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휘황찬란한 불빛이 서울역을 밝히고 수많은 인파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손목시계를 확인한 그는 책상 위에 놓인 핸드폰으로 손을 뻗었다.
‘저녁은 챙겨 먹었을까?’
[저녁 맛있게 먹었어요?]쓰긴 했지만 보내진 못했다. 승준은 날짜가 12월 22일인 마지막 메시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혼자 있게 해 주세요.]한숨을 쉰 그는 화면에 손가락을 대고 위에서 아래로 그었다.
[이브 날 같이 저녁 먹고 장 보러 갈래요?] [나 시간 좀 주면 안 돼요?] [무슨 시간?] [감정 정리할 시간이요.]그날 이 답장을 받고 심장이 철렁했다. 감정 정리라니 꼭 헤어지려고 마음먹은 사람 같지 않은가.
[무슨 감정?] [혼자 있게 해 주세요.]‘감이 안 좋아.’
이걸 다시 읽고 있자니 입 안이 바싹 타들어 갔다. 승준은 빈 머그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탕비실에 우두커니 서서 커피 머신이 멈추기만을 기다리는데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화면에 뜬 메시지를 확인하던 얼굴에 흥분과 긴장이 교차했다.
[끝이 안 좋을 걸 알아도 연애할 거예요?]탕비실 테이블 앞에 앉은 그는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왜 끝이 안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먼저 물었잖아요.] [어. 나는 할 건데.] [진지하게 생각해 봤어요?]‘겪어 봤으니까 하는 말이지.’
그땐 결말이 아플 걸 다 알고도 사랑해 놓고 이번에는 왜 이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그때의 기억이 잠재의식 속에 어렴풋이 남아 있어 두려운 걸까?
[인생도 그렇잖아요. 죽는 거 알고 시작하는 거. 이승에서의 기억도 인연도 다 버리고 백지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 그래도 다들 살아가잖아.] [태어나는 건 선택권이 없잖아요.] [사랑도 똑같잖아요. 선택권이 어딨어? 나도 모르게 빠지는 거지.]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초원은 답이 없었다. 승준은 기다리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써 내려갔다.
[우리 끝이 어떨지 누가 알아요? 새드엔딩일 것 같다고 여기서 끝내면 그건 해피엔딩인가?]이번엔 반드시 해피엔딩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다짐한 그였다.
[적어도 덜 아프겠죠.]승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시작인데 벌써 초원의 머릿속에서 이 연애는 슬픈 결말을 내린 모양이었다.
[한 번 생각해 봐요. 10년 20년 지나서 이번 일 생각하면 ‘그때 우리 왜 그랬지?’하고 웃음밖에 안 나올걸? 이 손 안 놓길 잘했다면서 둘이서 손 꼭 잡고]잠시 조용하던 초원이 갑자기 딴소리를 했다.
[뭐 해요?] [야근] [왜요?] [그냥]또 답장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답장하기도 애매한 답을 했다 싶어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저녁은 챙겨 먹었어요?]어려운 질문도 아닌데 여기에도 한참 답이 없었다. 한숨을 쉰 그는 다 식은 커피를 단숨에 들이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찬물로 세수를 한다고 답답한 속이 시원해지진 않았다. 얼굴에서 뚝뚝 흐르는 물을 종이 타월로 거칠게 닦아 낸 승준은 화장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텅 빈 복도를 지나 3팀 사무실로 들어가 팀장실 문을 벌컥 열던 그는 그 자리에서 굳었다.
언제 온 건지 책상 앞 의자에 앉아 있던 초원이 고개를 돌려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이는 그녀를 보고 승준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감이 안 좋아.’
“뭐 해요?”
의아한 얼굴로 초원이 물었다. 우두커니 문간에 서 있던 승준은 그제야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체 무슨 용건으로 갑자기 찾아온 건지 가늠해 보려 해도 저 차분한 얼굴은 아무런 힌트도 주지 않았다.
‘올 게 온 건가?’
문자로 한참 대화를 하다가 갑자기 여기로 찾아온 이유는 뭘까? 꼭 얼굴을 보고 해야 하는 이야기라면 좋은 소리일 리 없을 듯했다.
자리에 앉은 그는 깍지 낀 두 손을 책상 위에 올린 채로 선고를 기다리듯 눈앞의 여자를 응시했다.
초원은 희미하게 웃더니 용건을 꺼냈다.
“줄 게 있어서요.”
그 말에 승준은 그녀의 목 아래로 시선을 던졌다. 목걸이는 여전히 그곳에 매달려 반짝이고 있었다.
‘설마 돌려줄 거면 목에 걸고 오진 않았겠지?’
초원이 손을 들어 올리더니 책상 끄트머리에 놓여 있던 작은 종이 백을 한가운데로 밀었다. 정신이 없어 그런 게 책상 위에 있는 줄도 몰랐던 승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크리스마스 선물이에요.”
‘설마 헤어질 남자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진 않겠지?’
나쁜 예감이 점점 틀려 가는 듯했다. 슬금슬금 올라가기 시작하는 그의 입꼬리는 여전히 초조히 떨렸다.
“설마 이거 이별 선물 뭐 이런 건 아니죠?”
종이 백에 든 검은 상자를 꺼내며 미심쩍은 듯 묻자 초원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게 아니고, 이거 원랜 생일 선물인데⋯.”
“생일 선물?”
생일은 6월인데 어째서 반년이나 묵혀 뒀다 주는 건지 물어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때 어쩌다 보니 못 줘서⋯.”
어쩌다 못 주게 됐는지 떠올리는 초원의 목덜미가 어렴풋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선물을 풀어 보기도 전인데 승준은 감격한 얼굴이었다. 조심스레 상자를 연 그는 반짝이는 은빛 시계를 가만히 어루만지다 고개를 들었다.
산타할아버지의 선물이라도 받은 아이처럼 해맑게 웃는 얼굴이었다.
“마음에 들어요?”
“응, 당연하지.”
싱글벙글 웃는 그를 보며 초원은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사실 이 목걸이 값의 10분의 1조차도 안 되는 시계가 뭐가 그리 좋을까? 그보단 그걸 사 준 사람이 좋아서 저렇게 웃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찡하게 아렸다.
‘이 사람은 정말 나 하나로 일희일비하는구나.’
그러는 초원도 어느새 이 남자 하나로 일희일비하고 있었다.
더 늦기 전에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 깊어진 후에 빠져나오려 질척이다 넘어져 만신창이가 되기 전에.
이 남자가 한 말이 그렇게나 아팠다는 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천천히 마음을 열고 싶었는데 언제 이렇게 활짝 열어 버린 걸까?
승준이 며칠째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앓는 걸 보니 고소하면서도 마음이 짠했다. 그러다가 흔들림 없이 10년, 20년 후를 이야기하는 이 남자의 말에 저도 모르게 설렜다.
‘나도 진짜 바보네.’
흔하디흔한 보통의 연애처럼 별것 아닌 일로 지독하게 싸우면서도 꼭 붙잡은 손을 놓지 않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면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미 빠져나오긴 늦었어.’
이제 경우의 수대로 책상 서랍 속에서 민트색 반지 케이스가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 엉뚱한 상상에 홀로 웃던 초원은 승준의 말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근데 이거 못 받겠는데?”
‘헐, 이건 그 마지막 경우의 수!’
마지막 경우의 수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떠올린 그녀의 입술이 바싹 마르기 시작했다.
‘아, 망할. 오늘 곰돌이 팬티 입었는데.’
기껏 통장을 털털 털어 가며 예쁜 속옷 다 마련해 놓고 이런 날 유치찬란한 걸 입고 온 자신이 원망스러워 머리라도 쥐어박고 싶었지만, 초원은 침착하게 정해진 대사를 뱉었다.
“⋯왜요? 김영란법⋯ 때문에요?”
“아니, 우리 사이에 무슨⋯.”
승준이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더니 상자를 닫았다.
“다른 거로 바꿔 줄 수도 있는데⋯.”
초원은 마른 입술을 혀로 적시며 다리를 배배 꼬았다. 이제 승준이 몸으로 받겠다며 벌떡 일어나 초원의 허리를 휘감을 차례였다.
“그게 아니라 지금은 크리스마스가 아니잖아. 같이 있다가 12시 땡 하면 줘요.”
“아⋯.”
오늘 밤은 안 보내 주겠다고 나름 머리 써서 한 말인데 어째선지 초원은 실망한 기색이었다.
왜 그러냐는 듯 눈빛으로 묻는 승준을 향해 그녀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자리에서 일어나 옷걸이에 걸어 둔 코트를 집어 든 승준은 엉거주춤 서 있는 초원을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래서 감정 정리는 다 끝난 거예요?”
은은한 미소를 띠고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그의 목을 옥죄어오던 초조함이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헤어지자고 할까 봐 얼마나 불안했는지 알아요?”
승준은 다시는 안 놓을 기세로 초원을 꽈악 끌어안았다.
“내가 잘못했어요. 다신 초원 씨 아프게 안 할 테니까 다신 이렇게 겁주지 마요.”
“흐음, 하는 거 보고요.”
“차라리 멱살을 잡든지 한 대 치든지 하고.”
“진짜 그래도 돼요?”
초원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실천에 옮겼다. 넥타이를 있는 힘껏 잡아당겨 다짜고짜 입술 박치기를 해 버렸다.
‘이런 거면 평생 맞고 살고 싶네.’
오랜만에 그녀의 보드라운 입술을 탐하던 그는 갑자기 무언가를 느낀 듯 눈썹을 추켜세웠다.
별안간 입술을 뗀 그는 초원의 목덜미에 코를 묻더니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긴장한 초원이 입술을 깨물기 시작했다.
“젖은 것 같은데?”
배꼽 근처에 코를 대고 있던 승준이 고개를 들어 음흉한 미소를 짓고, 초원은 시선을 피하며 그의 머리를 밀어냈다.
“지금? 여기서?”
승준이 불쑥 일어서더니 그녀의 허리를 감고 바짝 끌어당겼다.
“아, 그건 좀⋯.”
초원은 말끝을 얼버무릴 뿐,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데, 뭐.”
허리를 감은 손을 푼 승준은 팀장실 입구로 걸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팔에 걸쳐 둔 코트를 뒤적이던 그는 지갑에서 네모난 포장지 하나를 꺼내 보란 듯 흔들었다.
언젠가 했던 야한 상상이 현실이 되려 했다. 초원은 눈치 없이 가빠지는 숨을 죽이며 저항 아닌 저항을 했다.
“야근하는 사람 있으면⋯.”
“이런 날 누가 야근한다고⋯.”
그 말에 초원은 그를 향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옷걸이에 코트를 다시 걸던 승준의 입가로 피식, 웃음이 새어 나갔다.
“나는 여자 친구님이 바람맞혀서 그런 거고.”
“흐응, 여자 친구분 너무 하시다.”
제 이야기가 아닌 척 능청스럽게 굴었다. 그 모습을 보던 승준은 뭔가 좋은 생각이 번쩍 든 듯 씨익 웃었다.
그는 초원을 그냥 지나쳐 자신의 의자로 가 앉더니 책상 위에 널려 있던 서류를 구석으로 치웠다. 어쩐지 쑥스러워 이런 건 잘하지 못하는 그였다. 하지만 사랑하는 여자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못 할 게 뭔가. 승준은 초원의 어리둥절한 얼굴을 흘끗 곁눈질하며 의자에 몸을 기대고 단단히 팔짱을 꼈다.
“이쪽으로 오세요, 홍 주임.”
목소리가 자세 못지않게 위압적이었다. 승준의 손가락은 그와 책상 사이의 좁은 틈을 가리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