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emperature difference between the woman and the man RAW novel - chapter 49
“미안. 안에다 해 버렸네.”
미안한 기색이 조금도 없는 담담한 말투에 그녀는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속 보여.”
당황할 줄 알았던 여자가 태연하게 웃음을 터트리자 승준은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어리둥절한 눈으로 내려다보는 그를 끌어안으며 초원은 쓰디쓴 미소를 지었다.
***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승준은 웃음을 터트리지 않으려 애를 썼다. 맞은편에 서 있는 직원이 불편한 듯 터틀넥 니트의 목 부분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아, 진짜. 전생에 문어였어요?’
출근 준비를 하다 목에 선명히 새겨진 영역 표시의 흔적을 발견한 초원이 퉁명스럽게 내뱉은 말이었다. 또 생각나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던 승준은 입꼬리를 씰룩였다.
띵동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이미 반 정도 들어찬 엘리베이터로 3팀 사람들은 꾸역꾸역 몸을 집어넣었다.
“점심 한 번 먹기 참 힘드네요.”
엘리베이터를 두 번이나 보내고 겨우 탄 병훈의 푸념에 어렴풋이 웃던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옆에 서 있기라도 했다면 만원 엘리베이터에서 손이라도 잡는 대담한 짓을 벌여 봤겠지만 반대편에 섰으니 서로를 의식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어, 팀장님 시계 새로 사셨네요? 못 보던 건데.”
병훈이 승준의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오전 내내 쓸데없이 팀원들 앞에서 얼쩡거리며 괜히 머리도 쓸어 올리고 일부러 왼팔이 위로 오게 팔짱도 끼면서 티를 있는 대로 냈는데 이제야 누가 눈치를 채 주는 모양이었다.
“아, 내가 산 게 아니고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오, 여자 친구분이 주신 거구나. 이야, 팀장님께 잘 어울리는 게 여자 친구분께서 센스가 넘치시네요.”
병훈의 아부에 입꼬리가 올라가는 건 승준뿐이 아니었다.
‘그래, 내가 센스 빼면 시체지.’
“나도 좀 봐요.”
희경이 궁금한 듯 고개를 앞으로 쭉 뺐다. 승준은 채신머리없어 보이지 않으려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마지못한 척 팔을 내밀었다.
“흐응⋯.”
시계가 예쁘다며 칭찬 세례를 퍼붓는 팀원들 사이로 희경은 별 대단할 것도 없다는 듯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이야, 팀장님 이러다가 으뜸 씨보다 먼저 품절남 되시는 거 아닙니까?”
“어, 그럼 저도 순서 지키고 장가가니 하극상 아니게 되는 겁니까?”
결혼을 앞둔 으뜸을 두고 막내가 먼저 간다며, 3팀 사람들은 염불처럼 하극상을 읊으며 놀려대던 차였다.
느닷없는 결혼 이야기에 초원의 눈치를 살피던 승준은 멋쩍게 웃었다.
“뭐 꼭 식을 올려야 부부인가? 부부처럼 살면 되는 거지.”
“여자가 마음이 별로 없나 봐.”
빌딩 밖으로 나와 백반집으로 가는 길, 희경이 초원의 팔꿈치를 흔들며 속삭였다.
“네?”
“시계 브랜드 봤어? 완전 싸구려잖아.”
앞서 걸어가는 남자들을 흘끗 보던 희경은 초원의 표정이 굳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에이, 그래도 싸구려는 아니지 않아요? 막 엄청난 명품은 아니어도 준명품은 되는 브랜든데.”
“맞아.”
멋도 모르고 편을 들어주는 아름이 고마워 초원은 눈물이 찔끔 나는 걸 참으며 맞장구를 쳤다.
“아니, 그래도 급이 있는데. 여자 직업이 의사라며.”
‘하, 이럴 줄 알았으면 카드빚을 내서라도 더 비싼 거 살 걸 그랬나?’
“잘 벌 텐데 고작 저런 거 사 주는 거 보면 팀장은 그냥 심심풀이로 만나는 건가 봐.”
‘그런 거 아니거든요?’
초원은 대놓고 반박도 못 하고 속으로 이만 갈았다.
“아님 어장이거나요. 사귀는 거 아닌데 팀장님 혼자 착각하고 막 이런 거 아니에요?”
이제는 아름까지 키득거리며 팀장 여친 앞담화에 끼기 시작했다.
“근데 팀장도 딱히 진지한 건 아닌가 봐. 아까 결혼 얘기 나오니까 뜨뜻미지근하게 답하는 거 들었지?”
“아, 그렇네요. 별로 책임질 생각 없다는 투랄까?”
‘니들이 뭘 안다고 그래?!’
지금 마그마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부글부글 끓는 속 하나면 올겨울은 무리 없을 정도였다.
‘실질적 팀장 사모님 앞에서 이것들이⋯. 베갯머리송사의 파워를 보여 줘?’
앞으로 어떤 후환이 닥칠지는 꿈에도 모르고 두 사람은 알지도 못하는 남의 연애를 끝없이 헐뜯었다.
“적당히 갖고 놀다 버리겠단 소리 같기도 하고⋯. 팀장님 쫌 별로네요.”
“그치? 아니, 결혼을 하면 되지 그냥 부부처럼 살면 된다는 건 또 무슨 소리야. 안 그래, 초원 씨?”
맞장구를 강요하며 팔꿈치로 툭 치는 희경에게 억지 미소를 지어 주는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하하⋯. 팀장님이 알아서 하시겠죠.”
‘팀장님이 니들을 알아서 하시겠죠.’
“팀장은 혼기 다 지나가는데 아직도 저러고 다니네⋯. 저러다 늙으면 후회하지.”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속이 그 말에 차갑게 굳었다.
“뱀파이어는 산송장이라 체온이랑 수분 조절이 안 돼서 햇빛을 싫어하는 거래요. 영화에서처럼 타들어 가는 건 아니고.”
밥을 먹으며 신나게 뱀파이어 이야기를 하는 현우의 말을 초원은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아, 최면 능력 있는 경우도 있다네요. 그걸로 인간을 사역마로 만들어서 하인처럼 부린대요.”
“그래요? 부럽네.”
초원의 영혼 없는 대답에 대각선에 앉아 있던 승준은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근데 그 건은 이따가 저녁에 얘기해요.”
초원은 머릿속이 복잡해 현우의 말을 제대로 들어줄 수 없었다. 한편 승준은 저녁이라는 말에 의문 가득한 시선을 마주 앉은 두 사람에게 보냈다.
“아, 낮에 볼 시간이 없어서 뱀파이어 건은 이따 야근하면서 볼 생각입니다.”
초원은 ‘야근도 자진해서 하는 성실한 홍 주임’ 얼굴로 해명했다. 오늘 급하게 정해진 야근이었지만 어차피 승준도 회식이 있으니 상관없을 것 같았다.
그는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초원의 눈에 예전엔 안 보였던 게 보였다. 저 미세하게 불끈거리는 턱 근육 하며 평소보다 조금 삐죽 나온 아랫입술이 ‘초원 씨 저놈이랑 둘이서 야근하는 거 나는 반댈세!’라고 대놓고 광고를 하고 있었다.
‘그냥 업무일 뿐인데⋯.’
초원은 난감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수저를 들었다.
다른 팀원들은 잽싸게 탈출해 버린 사무실에서 초원과 현우는 경찰청에서 받은 박스의 내용물을 테이블 위에 펼쳐 놓기 시작했다.
“무리하지 말고 일찍들 들어가세요.”
언제 팀장실에서 나왔는지 테이블 주변을 기웃거리는 승준의 말에 초원은 속으로 웃었다. 평소엔 그냥 “수고들 하세요.” 이러고 가던 양반이 무리하지 말고 일찍 들어가라니. 그 속이 빤하다 못해 뻔했다.
“네, 팀장님.”
사무실용 미소를 지으며 어서 가라고 눈치를 줘도 승준은 괜히 수사 자료를 들춰보며 서성이고 있었다.
“일하는 데 방해되니까 가요.”
현우가 화장실에 간다며 사라지는 순간 초원은 싹싹한 홍 주임에서 저승사자도 떨게 하는 염라대왕으로 돌변했다.
“상사한테 말투가⋯.”
“하, 상사 자격으로 질척대고 있는 거 아니면서.”
“질척이라니⋯.”
삐죽 나왔던 승준의 입술이 돌연 쏙 들어갔다.
“어이, 조 팀장 갑시다.”
사무실 입구에서 다른 팀 팀장이 재촉하자 승준은 마지못해 발을 떼면서도 못마땅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저녁부터 먹고 할까요?”
현우의 말에 초원은 피해자의 노트북에 전원을 연결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뭐 먹고 싶어요?”
“음, 그냥 아무거나요.”
“부대찌개 집 옆에 즉석떡볶이 집 새로 생겼던데 가 볼래요?”
떡볶이면 삼시 세끼 먹어도 안 질린다던 초원이었기에 한 말이었다.
“나가기 귀찮은데 그냥 햄버거 같은 거나 시켜 먹어요.”
테이블 저편에서 한참 반응이 없자 초원은 노트북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현우는 풀이 죽은 얼굴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화났죠? 송년회 때 내가 한 말 때문에⋯.”
“아뇨, 그건 이미 얘기 다 끝냈잖아요.”
이상한 소문이 나더라도 초원은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현우는 좋은 연막이라고. 청 사람들이 둘 사이에 뭔가 있다고 믿는 한 레이더가 승준을 향할 일은 없었다.
“초원 씨 뭔가 달라졌어요.”
노트북 트랙패드 위를 오가던 손이 멈췄다. 연막이 안 통할 레이더가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연막 본인이었다.
“전엔 안 그랬는데 요즘은 거리 두고⋯.”
“선배⋯.”
초원은 노트북을 닫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현우가 곤란한 소릴 하기 전에 선수를 쳐야 했다.
“난 거리를 두는 게 아니라 선을 지키려는 거예요.”
“나는 선 넘었다고 생각한 적 없는데.”
“솔직히 직장 동료치고는 과했던 것 같지 않아요?”
“초원 씨는 나한테 단순한 직장 동료 이상이었는데.”
대체 무슨 뜻으로 뒤늦게 이런 소리를 하는 건지 초원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우린 그 이상의 끈끈함이 있었잖아요. 근데 나 복귀한 다음부터 그게 사라진 것 같아서 마음이 허전하네요.”
초원은 긴 한숨을 쉬었다.
‘그 끈끈함이 뭐로 유지됐던 건지 알기나 하는 건가?’
시선을 들어 눈을 맞춘 그녀는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선배, 난 여전히 선배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파트너예요.”
현우가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지못한 행동이라는 걸 초원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테이블에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래서 햄버거 뭐 먹을 건데요? 오늘은 내가 살게요.”
“진짜 딱딱 맞아떨어지잖아요. 안 그래요?”
“그렇다고 할 수밖에 없네요.”
지하철역에서 나와 자취방으로 걷는 길, 초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우의 추리가 맞아 가고 있었다. 피해자의 노트북에는 현우의 예상대로 템플스테이 검색 기록이 남아 있었다.
“마늘 들어간 거 안 먹지, 인적 드문 곳에 살지, 그러니까 십자가 볼 일도 거의 없고.”
뿌듯하게 웃는 파트너를 향해 초원은 어렴풋이 입꼬리를 올렸다.
“아, 나 진짜 명탐정 소리 들어야 할 것 같은데.”
“명탐정이 아니라 멍탐정이겠죠.”
놀림을 받고도 현우는 바보같이 웃기만 했다. 이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으니 다시 예전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당연한 건데, 어?”
현우의 어리둥절한 시선이 원룸 건물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초원은 아차 싶었다. 자취방 창문이 환했다.
‘벌써 왔나?’
회식 끝났으니 집에 간다는 문자는 받았지만 벌써 와 있을 줄은 몰랐다.
“집에 누구 있어요?”
“아, 아침에 까먹고 켜 놓고 나왔나 봐요.”
초원은 제발 승준이 창문을 열고 고개를 불쑥 내밀지 않기만을 빌었다.
“확실해요?”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꾸 창문을 바라보는 현우의 모습에 그녀는 속이 바짝 타들어 갔다.
“혹시 강도나 뭐 이런 거면⋯.”
“에이, 강도는 무슨⋯.”
“그래도⋯. 내가 같이 올라가 줄까요?”
“아, 됐어요. 그리고 가방에 총도 있는데⋯. 추운데 얼른 가요.”
초원의 손에 떠밀린 현우는 마지못해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마음이 안 놓이는지 이쪽을 보며 뒷걸음질 치는 현우를 향해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짓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헉, 아저씨. 가진 거 다 드릴 테니 목숨만은 살려 주세요.”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에 문을 열어 준 승준은 영문 모를 소리를 하는 여자를 향해 미간을 찌푸렸다.
“술 마셨어요?”
막 들어와서 옷을 벗던 중이었는지 셔츠가 풀어 헤쳐져 있었다.
“아, 상황극인데 좀 받아 주지. 그럼 몸을 내놓으라고 해야죠.”
“안 마시고도 취하는 재주가 있네.”
초원은 눈을 살짝 흘기며 신발을 벗어 던졌다. 승준은 초원의 코트를 벗겨 옷걸이에 걸어 주더니 옷을 마저 벗으려는 그녀를 끌어안고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뭐 해요?”
한참을 말없이 껴안고만 있는 남자에게 물었다.
“충전 중.”
풋 하고 웃은 초원은 고개를 들어 입술을 살짝 포개다 떼어 냈다.
“그럼 이건 급속 충전.”
“아니지. 급속 충전은 그쪽으로 하는 거 아닌데.”
엉덩이의 굴곡을 타고 내려간 손이 허벅지 안쪽을 훑으며 올라오기 시작했다. 간지러움을 참을 수 없어 키득키득 웃던 초원은 그 손을 붙잡아 코앞으로 끌어당겼다. 불빛 아래로 은빛 시계가 반짝였다. 초원은 시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내년에 적금 타면 내가 더 좋은 거 사 줄게요.”
“왜? 난 이거 좋은데.”
“그래도⋯.”
“다들 잘 어울린다고, 예쁘다고 그러던데.”
그 말에 입술을 비죽 내미는 초원의 얼굴이 울적해 보였다.
“왜?”
“싸구려래요.”
“뭐? 누가?”
“안 모 사무관이요.”
승준은 싸늘한 코웃음을 쳤다.
“그 주둥아리가 싸구려겠지.”
그 말을 뱉을 땐 날카롭기 그지없던 눈빛이 초원의 두 눈을 향하는 순간 전혀 다른 사람처럼 부드러워졌다.
“그래서 오늘 마음 상했어요?”
슬픈 강아지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초원을 승준은 부드럽게 보듬었다.
“난 누가 1억을 준다 해도 이 시계랑 안 바꿀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