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emperature difference between the woman and the man RAW novel - chapter 50
“1억 준다면 내가 홀랑 가져가서 바꿀 건데요.”
두 사람은 눈을 마주한 채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건 그렇고 방전되기 전에 급속 충전부터 해야 할 것 같은데?”
방전을 걱정하기에는 지나치게 힘이 넘치는 목소리였다. 허벅지 사이로 다시 슬금슬금 들어오는 손을 초원은 간지러워 키득키득 웃으면서도 밀어내지 않았다.
상실의 기억
“그냥 가지?”
승준은 안전벨트 버클을 푸는 초원을 못마땅한 눈으로 응시했다.
“됐어요. 급행 타면 되는데 번거롭게.”
초원은 멋쩍게 웃으며 핸드백을 어깨에 멨다. 이 대화를 승준의 집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용산역 앞에 차가 멈춘 지금까지 몇 번을 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운전대 잡은 사람이 안 번거롭다는데. 인천까지 타고 가면 초원 씨도 편하고 좋잖아요.”
‘마음이 안 편하잖아요!’
새해 떡국을 먹으러 본가에 가는 길, 계속 데려다주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게 난감했다.
‘먼 길 운전해 왔는데 집 앞에서 그냥 가라고 할 수도 없잖아.’
딸이 정초부터 예고도 없이 ‘짠, 나 남자 친구 생겼지롱!’ 이러고 남자를 데려오면 부모님이 과연 좋아하실⋯. 아, 물론 난리부르스에 지르박까지 추시며 좋아하시겠지만, 신나서 이것저것 묻다가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까지 나올까 걱정이었다.
‘그리고 인간적으로 사귄 지 3개월도 안 됐는데 쫌 이르지 않나?’
초원은 이미 수십 번도 더 한 거절 대신 입술을 부드럽게 포갰다. 입술이 떨어지자 서운함 가득한 그의 눈빛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떡국 먹고 싶은데.”
어린아이처럼 본심을 드러내는 그 말에 웃던 초원은 승준의 뺨을 다정하게 감쌌다.
“저녁때 와서 내가 해 줄게요. 알았죠?”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입술이 다시 살짝 와 닿았다. 이내 차에서 내려 손을 흔들다 역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초원을 승준은 더는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눈으로 좇았다.
집이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읽겠다고 펼쳐 든 책은 30분 넘게 한 페이지조차 넘기지 못했다. 이게 다 이 음울한 적막 탓이었다.
‘그냥 회사로 갈까?’
일에 파묻혀 있으면 잊을 수 있을 터였다.
사람들은 그를 두고 지독한 일 중독자라고 불렀지만 사실 지독한 건 이 허전함이었다. 두려움을 모를 것 같은 그가 가장 무서워하는 건 텅 빈 집으로 돌아와 홀로 적막을 마주하는 일이었다.
책을 덮고 잠시 고민하던 승준은 TV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보지도 않을 TV를 켜고 볼륨을 최대로 올렸다. 높은 천장과 유리창에 반사된 소리가 집을 쩌렁쩌렁 울리기 시작했다.
‘연말연시 끔찍하네.’
연말연시만 끔찍한 게 아니었다. 설날도 추석도 어버이날도 가족의 생일도 기일도⋯. 끔찍한 날이 한둘이 아니었다.
잠시 우두커니 앉아 있던 그는 결심한 듯 리모컨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일어섰다.
현관 옆 작은 방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렸지만 아무래도 용기가 더 필요했다.
주방으로 갔다 돌아온 그의 손에는 맥주 캔이 들려 있었다. 아직 제대로 돌지도 않은 술기운을 핑계 삼아 작은 방의 문을 열었다.
낮인데도 방은 어두컴컴했다. 희끄무레하게 보이는 박스 사이로 조심스레 발을 옮겨 창문으로 다가갔다.
두꺼운 커튼을 젖히자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 속으로 먼지가 유령처럼 피어올랐다.
방 안에는 주인들이 떠난 후 시간이 멈춰 버린 물건들이 가득했다. 주인과 함께 떠나보내 줘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아직 살아가야 할 시간이 많이 남은 승준은 차마 그러질 못했다.
먼지가 뽀얗게 앉은 낡은 피아노 위의 흰 레이스 덮개를 만지작거리던 그는 그 위에 놓인 목제 보석함을 열었다.
금반지 한 쌍 옆에 놓인 진주목걸이를 한 알 한 알 손가락으로 쓸어 보았다. 그렇게 갖고 싶어 하시더니 아낀다고 정작 몇 번 걸어 보지도 못한 목걸이였다.
승준은 옆 칸에 고이 잠든 고장 난 은빛 시계를 집어 들며 아련하게 웃었다.
‘사랑하는 아들, 졸업 축하한다.’
뒷면에 새겨진 글귀를 엄지로 매만지던 그는 시계를 다시 제자리에 두고 보석함을 닫았다.
먼지 구덩이인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손에 잡히는 대로 박스를 열어 보기 시작했다.
하트를 안고 있는 곰 인형과 가운데에 책갈피가 꽂혀 있는 만화책이 나오는 걸 보니 동생의 물건이 담긴 박스인 모양이었다.
‘열심히 사 모으더니 결국 결말도 못 보고⋯.’
만화책을 다시 박스에 넣으려던 승준은 책 귀퉁이에서 검붉은 자국을 발견하고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 자국이 생겨난 그날 밤의 기억이 막을 새도 없이 의식 속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녹슨 쇠처럼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저 왔습니다.”
평소보다 일찍 퇴근했으니 다들 깨어 있을 시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두운 거실에는 TV 불빛이 아른거리고 있었고 여동생의 방문 틈으로 노란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집에서 이상한 냄새 나는데⋯.”
여전히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신발을 벗은 승준은 중문을 지나 가장 가까운 동생의 방으로 향했다.
“뭐하냐? 대답도 없⋯.”
문을 열어젖힌 그는 그 자리에 굳었다. 눈앞의 광경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페인트라도 뒤집어쓴 걸까? 하필 새빨간 색으로 말이다.
끄윽끄윽 힘겹게 헐떡이는 숨소리에 별안간 정신이 든 승준은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승아야!”
침대 위로 올라가 고통에 일그러진 동생의 얼굴을 붙들었다. 침대가 출렁이고 무언가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쨍, 쇳소리를 냈다.
“이게 무슨⋯.”
티셔츠가 온통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피가 배어 나오는 곳을 압박하려 해도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달리 방법이 없었던 승준은 베개를 집어 들어 복부를 눌렀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핸드폰을 꺼내 들고 119를 누르는 손이 덜덜 떨렸다. 다급하게 신고를 한 그는 구급차가 올 때까지 승아의 의식을 붙들어 두려 애썼다.
“승아야, 정신 차려! 자면 안 돼!”
뺨을 계속해서 두드리자 흐리멍덩하던 눈에 일순간 빛이 돌아왔다.
“승아야, 오빠야.”
그 말에 이미 핏기 없는 승아의 얼굴이 더욱 새파랗게 질렸다. 뒤늦은 방어라도 하듯 이미 만신창이가 된 팔을 승준의 눈앞으로 힘없이 내젓더니 곧바로 축 늘어졌다.
“안 돼!”
헐떡임이 멈췄다. 승아의 두 눈은 공포에 파랗게 질린 그대로 영원히 빛을 잃었다.
“뭐야, 이 새끼. 왜 일찍 오고 지랄이야?”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승준은 고개를 번쩍 들었지만 늦었다. 눈앞으로 끈 같은 게 불쑥 나타나더니 목을 옥죄기 시작했다.
“씨발, 나라의 녹을 먹는 새끼가 빠져 가지고.”
끈이 살을 파고들어 오고 점점 눈앞이 흐려졌다. 목을 조르는 끈과 그걸 붙들고 있는 손을 떼어 내려 안간힘을 썼지만 그럴수록 압박만 거세질 뿐이었다.
싸워 보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승아의 뒤를 따라가는 건가 싶던 순간 국정원 연수 때 배웠던 호신술이 뇌리를 스쳤다. 승준은 있는 힘껏 몸을 돌려 놈의 얼굴을 가격했다.
쿵, 바닥을 둔탁하게 울리는 소리와 함께 목을 조르던 끈이 떨어져 나갔다. 숨을 헐떡이던 그는 바닥에 나뒹구는 놈의 얼굴을 보고 다시 숨을 멈췄다.
믿을 수가 없었다.
‘이거 악몽인가?’
매일같이 야근에 시달리다 책상 앞에서 곯아떨어진 것이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말이 됐다.
‘왜 내가 저기 있지?’
또 다른 승준은 바닥에 떨어진 노끈을 집어 들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너 뭐야?”
“알아서 뭐 하게?”
놈이 다시 달려들었다. 몸싸움이라면 웬만해선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자기 자신과의 싸움은 달랐다.
뒤엉켜 싸우다 잠시 빈틈을 보인 걸, 놈은 놓치지 않았다. 두 손이 목을 강하게 옥죄어 왔다. 놈을 떼어 내려 몸부림치던 그의 시야에 침대 아래 피로 물든 식칼이 들어왔다.
“악! 이 새끼가!”
놈이 허벅지를 감싸며 저 멀리 물러났다. 몸을 일으키던 승준은 눈을 찌푸리며 다시 주저앉았다. 두 번이나 목을 졸리고 나니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었다.
그는 칼 손잡이를 단단히 붙들었다. 문틀에 기대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상처를 감싸고 있는 저 괴물이 언제 또 달려들지 몰랐다.
그때 창밖에서 귀청을 울리는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아, 썅. 너 이 새끼 내가 꼭 끝내러 올 거니까 어디 가지 말고 기다려라.”
다리를 절뚝이며 밖으로 도망치려는 놈을 잡아야만 했다. 벌떡 일어나 몸을 던지던 승준은 놈이 휘두른 탁상 램프에 맞아 그대로 고꾸라졌다. 시야가 핏빛으로 물들었다. 철컥, 현관문 닫히는 소리에 손을 뻗던 그는 정신을 잃었다.
자신의 부족함을 탓했지만 이미 늦었다. 가족을 구하지도, 살인마를 잡지도 못했다.
그리고 그건 악몽의 시작일 뿐이었다.
모든 증거가 승준을 향하고 있었다. 아파트 CCTV에 찍힌 승준 아닌 승준의 모습부터 칼에 남은 지문까지 누가 봐도 그가 범인이었다.
담배 연기로 희뿌연 조사실, 승준과 마주 앉아 있는 두 형사의 얼굴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제가 아니라는 증거는 충분히 댔지 않습니까?”
퇴근길 CCTV 영상과 핸드폰 위치 기록 모두 그의 알리바이를 입증해 주고 있었지만 사건을 쉽게 해치우고 싶었던 경찰은 요지부동이었다.
“애초에 아파트 CCTV에 제가 다른 차림으로 들락날락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럼 조승준 씨랑 똑같이 생긴 놈이 갑자기 나타나서 식구들을 싸그리 죽였다는 건 말이 되고?”
형사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 승준이 생각해도 미친놈 취급당하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두 손에 얼굴을 묻은 그는 핏발이 선 두 눈을 비볐다.
“그럼 이건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그놈이 도망치는 장면이 CCTV에 찍혔는데 그 시간에 제가 집에 있었다는 건 구급대원이 이미 증명한 거 아닙니까?”
형사들이 피곤하다는 시선을 주고받았다.
“이러는 사이에 진범 놓치는 건 걱정도 안 되나 봅니다.”
경찰에겐 남의 일일 테니 애가 타는 건 가족을 한꺼번에 잃은 승준뿐인 듯했다.
“아니, 우린 조승준 씨 말대로 잡아 온 건데? 조승준 씨랑 똑같이 생겼다며?”
“DNA도 똑같던가요? 칼이랑 방바닥에 혈흔 남은 건 조사해 보셨냔 말입니다.”
승준이 더는 참지 못하고 분통을 터트리자 조용히 있던 다른 형사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내밀었다.
“이제 그만 자백하고 편해집시다.”
자백이란 말에 그가 눈을 부릅뜨자 형사는 멋쩍은 듯 입맛을 다시며 담배를 집어넣더니 다른 형사에게 중얼거렸다.
“뭐 이 정도면 증거도 충분한데 검찰에 송치시키고⋯.”
‘이제 남은 생은 감방에서 썩는 거구나.’
긴 싸움에 지친 승준은 자조적인 한숨을 내쉬었다.
똑똑.
형사들이 대답도 하기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아, 계장님. 여긴 어쩐 일로⋯.”
문을 열고 들어온 중년의 남자에게 형사들이 고개를 숙였다.
“이분이 그 반포 일가족 살인사건 장남인가?”
형사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나가 보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이 건은 딴 기관에서 맡기로 했으니 나가 보세요.”
형사들은 어리둥절한 시선을 주고받다 계장이란 남자의 날카로운 시선에 기가 눌려 쭈뼛쭈뼛 문밖으로 자취를 감췄다.
“들어오시죠.”
계장의 말에 아까부터 문간에서 기웃거리고 있던 젊은 남자 둘이 조사실 안으로 들어왔다.
“저흰 조승준 씨 말 믿습니다.”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대뜸 꺼낸 말이었다. 지금까지 세 살짜리에게도 안 통할 거짓말을 하는 존속 살해범 취급을 당하던 승준은 그 말이 쉽사리 믿기지 않아 미간을 좁혔다.
다른 남자가 서류 가방에서 두꺼운 서류철을 꺼내더니 승준을 향해 내밀었다.
미심쩍은 기색이 역력하던 그의 눈빛이 수사 자료를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변신 능력이 있는 연쇄 살인마입니다. 장남이 있는 가족을 골라 장남으로 변신해 나머지를 살해하고 장남은 자살로 위장시키죠.”
모든 의문이 풀렸다. 이제 남은 건 놈을 잡는 일뿐.
“어디서 나오셨죠?”
“특이현상관리청이라고 행안부 산하 비밀 기관입니다.”
“전 국정원 소속입니다. 그쪽으로 이동 가능합니까?”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에 멈칫하던 남자들이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수사 인력이 늘면 저희야 좋은데⋯.”
“저희 팀장님께 한 번 여쭤봐야겠네요.”
그 후로 지독하다 소리를 들을 정도로 놈을 쫓는 데 매일을 바쳤다. 그러다 2년 만에 결국 놈을 잡아 전라도 외진 섬의 격리소에 감금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승준은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밤마다 그를 괴롭히던 악몽은 사라지지 않았고 인생의 갈피만 잃었다. 남은 생을 어떻게 보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던 그는 기계처럼 일에만 매달렸다.
만화책 귀퉁이의 검붉은 자국을 닦아 낼까 고민하던 승준은 책을 박스에 넣고 덮어 버렸다.
다른 박스를 연 그는 두꺼운 앨범 하나를 꺼내 한 장씩 넘겨보기 시작했다.
‘사진 속에선 행복해서 좋네.’
사진이란 참 좋은 물건이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야속하게도 희미해져 가는 얼굴을 이렇게 다시 기억에 새길 수 있으니.
승준은 불현듯 긴 한숨을 쉬었다.
우여곡절 끝에 만든 또 다른 가족은 사진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얼굴들을 가만히 떠올려 보았다.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그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사고라도 쳐야겠네⋯.”
씁쓸하게 웃던 그는 앨범을 박스에 넣고 몸을 일으켰다. 거실에서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이렇게 짐이 많으면 그냥 인천까지 데리러 오라고 하지.”
양손 가득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주방으로 가던 승준이 볼멘소리를 했다. 초원도 체력 검정 다 통과한 특수 요원이란 걸 항상 잊는 그는 저 가느다란 팔로 이걸 들고 용산역까지 왔을 생각을 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괜찮아요. 지하철역에서만 들고 나머진 편하게 왔는데요, 뭐.”
초원은 냉장고를 열더니 본가에서 가져온 반찬을 장바구니에서 꺼내 차곡차곡 넣기 시작했다.
“엄청 많네. 둘이서 이거 다 먹을 수 있나?”
가방에서 끝없이 나오는 반찬통을 보며 승준은 이쯤이면 부모님 댁 냉장고를 다 털어 온 수준이 아닌가 싶어 걱정이 됐다.
“걱정 말아요. 내가 있는데.”
초원은 한쪽 눈을 찡긋하더니 두 번째 장바구니를 비우기 시작했다.
“아, 오징어 젓갈 좋아해요? 이거 우리 엄마가 직접 담근 건데 떡국이랑 먹으면 짱 맛있어요.”
젓갈 병을 흔들며 생글생글 웃는 얼굴을 승준은 물끄러미 응시했다. 아이처럼 신이 난 그 얼굴이 기억 속의 앳된 얼굴과 빼다 박은 듯 닮아 있었다. 제 손보다 커다란 빨간 사과에 손톱보다도 작은 잇자국을 남기며 생글생글 웃던 얼굴과. 절대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난생처음 아빠라고 불러 준 날이었으니까.
“왜요?”
우수에 잠긴 눈빛에 놀란 초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도 떡국 먹고 싶었는데.”
승준은 입술을 비죽 내밀며 어설픈 핑계를 댔다.
“에이, 내가 해 준다니까요? 안 그래도 집에서 떡이랑 사골국도 다 챙겨 왔어요.”
초원은 소매를 걷어붙이더니 장바구니에서 재료를 꺼내 들고 싱크대로 향했다.
“이거 내가 다들 TV 볼 때 언니 거에서 몰래 두 주먹 더 훔쳐 왔어요. 잘했죠?”
본가에서 가져온 LA갈비를 굽던 초원은 칭찬해 달라는 듯 고개를 들었다. 그런 그녀를 뒤에서 껴안고 있던 승준이 잘했다는 듯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아니, 나는 혼자 사니까 작은 통 갖고 가라는 거예요. 그런 게 어딨어? 안 그래요?”
어릴 때부터 홍씨 집안 삼 남매는 콩 한 쪽도 나눠 먹는 사이였다. 안 나눠 주면 온 집안이 뒤집어졌으며 정확히 3분의 1을 하지 않았을 때도 집안이 쑥대밭이 됐다.
그래도 언니가 가정을 꾸리고부턴 조카 생각에 양보하던 초원이었지만 먹여야 할 입이 하나 늘어난 이번에는 어림도 없었다.
“오랜만에 가족들 보니까 좋았어요?”
“뭐, 좋기도 하고 짜증도 나고요.”
늘 그렇듯 부모님이 ‘저거 저러다 혼자 살다 죽으면 어쩌나.’ 하는 얼굴로 잔소리를 퍼부었지만, 오늘은 그냥 ‘네, 네.’ 하며 참았다. 반찬을 무사히 얻어 가려면 그 정도 대가는 치러야 했다.
“왜? 싫은 소리 들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