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emperature difference between the woman and the man RAW novel - chapter 54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은 눈초리로 주지는 작은 건물 뒤편을 가리켰다.
드디어 불편한 이들을 피해 경내를 돌아볼 수 있게 된 초원은 안도의 한숨을 쉬다 무언가를 발견하고 걸음을 옮겼다.
작은 해우소 건물 뒤편에서 닭소리와 어린아이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건물과 산비탈 사이의 작은 뜰에는 닭 세 마리와 병아리 여러 마리가 종종대며 바닥을 쪼고 있었다.
‘저 아이인가?’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엉성한 닭장 앞에 쪼그려 앉아 병아리를 바라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쥬니⋯.”
‘병아리 이름인가?’
한 걸음 다가가자 인기척을 눈치챈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두려움과 피로가 서려 있는 그 눈빛을 보자 초원은 저승 어딘가에서 강아지와 행복하게 지내고 있을 아이를 떠올렸다.
“안녕?”
아이는 대답 없이 고개를 돌리더니 병아리를 작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초원은 아이의 옆으로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혹시나 목에 물린 자국이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아이는 얼굴만 남긴 채 꽁꽁 싸매고 있었다. 주민들 말대로 얼굴이 핏기 없이 창백했다. 추운 날씨에 튼 건지, 아토피라도 있는 건지 피부가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
“이름이 뭐야?”
아이는 얼굴을 찡그리며 몸을 일으키더니 다리에 힘이 빠진 듯 풀썩 주저앉았다.
“괜찮니? 어디 아파?”
초원이 재빨리 손을 뻗어 일으켜 주려 했지만, 아이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벗어나려 애를 썼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언제 온 건지 주지의 천둥 같은 호통이 귀청을 울렸다.
“아, 애기가 넘어져서요.”
“당장 나가요, 당장!”
삿대질을 하며 불호령을 치는 남자의 눈이 이상했다. 그 섬뜩한 광기에 떨며 초원은 몸을 일으켰다.
“죄송합니다.”
절 입구까지 따라 나와 두 사람을 쫓아내는 주지에게 현우는 고개를 숙였다.
“그럼 49재는 아버지와 상의해 보고 전화드리겠습니다.”
주지가 핸드폰 번호를 적어 준 쪽지를 만지작거리며 악수를 청했지만 주지는 뒷짐을 풀지 않고 두 사람을 살벌하게 노려보기만 했다.
“맞는 것 같죠?”
산을 내려가는 길, 길고도 어색했던 침묵을 깨고 현우가 물었다.
“네, 느낌이 그렇네요.”
“아까 초원 씨가 말할 때 손으로 코 가리는 거 봤어요?”
“네.”
“손도 잡아봤어야 하는데 아쉽네.”
“근데 이 정도면 확실한 것 같아요. 가서 팀장님한테 보고해 봐요.”
“원래는 주지가 안 그랬답니까?”
“네, 주민들 말은 그렇습니다.”
초원은 잠자코 팀장실에 앉아 두 남자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흠, 그럼 어떤 경로로 변이가 일어난 거지?”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긴 승준의 어깨 너머로 하늘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뭐, 확실한 것 같은데⋯. 우린 여기까지 하고 경기지청에 맡기도록 하죠.”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절은 경기도에 있으니 엄밀히 따져 본청 관할이 아니었다. 승준의 속셈은 그게 아니었지만 말이다.
초원이 알면 공사 구분 못 한다고, 팀장이랑 사귀면 콩고물이라도 떨어지는 줄 알았더니 출셋길만 막힌다며 멱살을 잡고 따지겠지만 위험할 수도 있는 일을 계속 맡기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역시나 말 더럽게 안 듣는 두 요원은 장단을 척척 맞춰가며 ‘하지만, 하지만’을 외치고 있었다.
“사건 이송하면 한두 달은 걸릴지도 모릅니다, 팀장님.”
“맞아요. 그러다 그사이에 도망가서 숨어 버리면 어떻게 찾겠어요?”
“어차피 경기지청이 받아 가도 일산 연구소랑 격리부대도 같이 들어가야 하는 일인데요.”
“그러니까 팀장님께서 지휘해 주시고 저희가 계속 맡으면 빨리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요? 네?”
‘하⋯, 저놈의 ‘네?’’
저렇게 한마디 덧붙여 간절하게 물으면 승준으로선 안 된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절 내부는 어떻게 되어 있죠?”
“별로 크진 않고 건물 세 채 정도 있습니다. 사진 보시겠습니까?”
“네, 그리고 내일 배치도 그려 오세요.”
현우가 건네는 카메라를 받아 사진을 확인해 보던 승준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었다.
‘이 새끼, 절 사진 찍어 오랬더니 왜 남의 마누라 사진을⋯.’
초원이 안 찍힌 사진이 드물었다. 그것도 몇 개는 대놓고 줌을 당겨 얼굴을 찍었다.
‘젠장, 쓸데없이 예쁘네.’
승준은 초원이 작게 나온 사진들도 하나하나 확대해 보고 있었다.
‘예쁜 것도 사람을 좀 가려가며 할 것이지.’
심장이 빠르게 쿵쿵대기 시작하는 게 눈앞의 남자를 향한 분노 때문인지 그 옆의 여자를 향한 설렘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딴 놈이 든 카메라를 보고 이런 표정을 지어 주면 안 되지.’
그 ‘이런 표정’이란 건 초원이 뒤돌아보며 눈살을 찌푸리는 모습일 뿐이었다.
‘혈세로 남친 놀이하라고 보내 준 줄 아나.’
이렇게 예쁜 초원의 사진을 찍고 간직할 수 있는 건 자신뿐이어야 했다.
‘망상은 집에서 저 혼자 할⋯.’
현우가 초원을 두고 역겨운 망상에 빠지는 상상을 하자 기분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더러워졌다. 승준은 카메라를 끄고 메모리 카드를 빼냈다.
“이건 내일 받으러 오세요.”
또 그 눈빛이었다. 도둑놈 보듯 하는 눈빛.
승준은 메모리 카드를 바지 주머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발을 받았으면 정신 차릴 때까지 대응 사격을 해 줘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 수고 많았어요. 내가 저녁 살 테니 나가죠.”
“뭐 먹고 싶어요?”
셋이서 탄 엘리베이터 안에서 승준이 갑자기 허리를 휘감자 초원은 사색이 됐다. 바로 옆에 현우가 있는데 왜 이러냐는 듯 곤란한 얼굴로 밀어내도 승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현우의 눈빛이 평소의 서글서글함을 잃고 날카로워졌다. 초원의 어깨를 향해 손을 들어 올리며 놓아주라고 하려는 찰나 승준이 건드리지 말라는 눈빛을 살벌하게 내뿜으며 초원을 바짝 끌어당겼다.
“차 주임 우리 사귀는 거 이미 알고 있던데. 그렇지 않나, 차 주임?”
승준의 품에 안기다시피 한 채, 눈을 커다랗게 뜨며 돌아보는 초원을 향해 현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내 입으로 인정하라 이건가?’
아버지의 말이 맞았다. 저 남자는 저승사자도, 돌부처도 아닌 교활한 여우였다.
“차 주임이 눈치가 참 좋아. 우린 티 안 내려고 애썼는데, 그렇죠?”
초원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두 남자를 번갈아 볼 뿐이었다.
‘이 남자들 무슨 생각이야?’
들켰어도 모른 척하고 시치미를 떼야지 승준은 왜 잠자코 있던 현우에게 둘 사이를 인정하는 것이며, 현우는 알고 있었으면서 왜 끌어안았던 걸까?
“차 주임, 어떻게 알았어요? 얘기 좀 해 봐요.”
승준은 끝까지 물고 늘어지며 현우의 입으로 두 사람의 연애를 인정하게 만들 셈인 모양이었다. 거기에 초원의 호기심 어린 시선까지 가세하자 현우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섬유 유연제 향이 같아서⋯.”
“아!”
초원은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아오, 이 바보야!’
들킨 건 완전히 제 잘못이었다.
“하하, 앞으로 빨래는 내가 해야겠네.”
승준은 웃음을 터트리며 보란 듯 초원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분명 삼겹살과 소주가 간절했는데 초원은 이 껄끄러운 분위기에 목이 턱 막혀 술도 고기도 안 넘어갈 것 같았다.
옆에 앉은 남자나 앞에 앉은 남자나 사람 좋게 웃는 얼굴이니 모르는 사람이 보면 분위기 화기애애하다 할 만했지만, 문제는 눈빛이었다. 초원은 인간에게 눈만으로 욕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그냥 삼각 김밥 먹자고 할걸⋯.’
괜히 오래 걸리는 고깃집에 와서 두 남자의 살벌한 기 싸움을 연장전까지 봐야 한다니 체할 것 같았다.
주임 위에 팀장, 팀장 위에 팀장 여친이니 오늘 고기 집게를 잡아야 하는 사람은 현우였다.
고기가 익어가며 불판 위에 기름기가 돌기 시작하자 현우는 마주 앉은 사람들에게 묻지도 않고 김치를 집어 불판에 올렸다. 초원은 삼겹살을 먹을 때 김치를 같이 구워 먹는 걸 좋아했다. 승준도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현우가 알 바 아니었다.
“아, 차 주임. 여자 친구분은 잘 계신가? 전에 병실에서 정신이 없어서 인사를 못 했네.”
“아⋯, 전 여친입니다.”
현우가 ‘전’을 강조하자 이미 다 알면서도 물은 승준은 한쪽 입꼬리만 씩 올렸다.
“그래요? 꽤 가까워 보이던데.”
“그냥 친구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흠, 보통 그냥 친구랑 그러던가? 하긴 뭐 사람마다 다르니까.”
일부러 초원의 앞에서 현우의 켕길 구석을 끄집어내어 확인 사살을 해 준 승준은 영전에 술을 올리는 마음으로 현우의 빈 잔에 소주를 따랐다.
이내 두 남자의 타오르는 시선이 부딪혀 불꽃을 튀기기 시작하고, 잠자코 있던 초원은 눈살을 찌푸렸다.
‘내 말이⋯. 그냥 친구 사이가 보통 그래?’
딴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하며 오매불망 연주 바라기이던 남자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자 초원은 실망스러웠다. 한 여자만을 향하는 그 애틋한 연정이 아름다워서, 나도 저런 남자의 사랑을 받아 보면 얼마나 좋을까 부러워서 현우에게 마음을 품은 것도 있는데, 초원에게 남자 친구가 생긴 걸 알자마자 이렇게 돌변하다니.
‘뭐야? 자기가 갖긴 싫고 남 주긴 아까웠던 거야?’
초원은 남자 보는 눈이 더럽게도 없었던 과거의 자신을 속으로 쥐어박으며 소주를 들이켰다.
현우가 잘 익은 삼겹살 몇 점을 집어 초원의 접시에 놓고, 그걸 승준이 냉큼 집어 명이나물 장아찌로 감싸더니 초원에게 내밀었다.
“아-.”
초원은 현우의 눈치를 보며 얼굴을 찡그렸지만 승준은 늘 그렇듯 포기를 모르는 남자였다.
“맛있어요?”
입을 오물오물 움직이며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승준은 흐뭇하게 바라보고, 그런 두 사람을 현우는 굳은 얼굴로 응시했다.
“그런데 난 이 장아찌 장모님이 해 주신 게 더 맛있던데.”
현우는 혼란스러웠다.
벌써 그렇게 깊은 사이인 걸까? 그에게 초원이 했던 말은 다 무엇이었을까?
현우는 며칠 전 식당에서 승준이 옆에 앉았을 때처럼 초조해 보이는 초원의 얼굴에 희망을 걸어봤지만, 소주를 한 잔 들이켠 그녀는 이내 어렴풋한 웃음을 얼굴에 띠고 승준을 흘겨보고 있었다.
‘으이그, 진짜. 이 남자 이러려고 밥 사 준다고 한 거야?’
초원은 클리셰 범벅인 소설을 읽듯이 그 속이 빤히 읽힌다는 눈빛을 승준을 향해 쏘아댔지만 이 남자는 모르는 일인 척 능청스럽게 웃어대고 있었다.
이 정도의 질투와 견제는 귀여웠다. 그리고 오늘 절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잘한다고 엉덩이를 팡팡 두드려 줘야 할 일이기도 했다.
그 누구도 고기를 더 시키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불판에 마지막으로 남은 한 점을 초원의 접시에 올려 준 승준이 물었다.
“초원 씨, 밥? 냉면?”
“초원 씨는 삼겹살 먹고 냉면 안 먹어요.”
또 현우가 도발을 하고 나섰다. 그래봤자 남자 친구도 아니고 직장 동료일 뿐이면서 이 여자는 자신이 더 잘 안다는 듯 구는 현우를 보며 승준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차 주임한테 물었나?”
살벌한 분위기에 초원은 다 씹지도 못한 삼겹살을 꿀꺽 삼키고 끼어들었다.
“됐어요. 안 먹어도 돼요.”
사실 아직 배가 덜 차 더 먹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현우의 말대로 밥을 먹는다고 하면 승준의 자존심이 상할 테고 그렇다고 차가운 냉면을 억지로 먹긴 싫었다.
“안 먹어도 되긴⋯. 밥 먹어요.”
현우와 혹한의 서릿발이 휘날리는 눈싸움을 벌일 땐 언제고 어느새 초원을 향하고 있는 승준의 눈빛이 봄날처럼 따뜻하기 그지없었다.
“오늘 추운데 고생 많이 했겠네.”
승준은 종업원에게 식사를 시키더니 발그레하게 익은 초원의 뺨을 손등으로 쓰다듬기 시작했다.
“다리 안 아파요?”
“아깐 좀 아팠는데 이젠 괜찮아요.”
“그럼 내일 더 아플 텐데? 밥 먹고 집에 가서 주물러 줄게요.”
초원의 뺨을 쓰다듬는 손에서 반짝이는 은빛 시계가 현우의 시선을 붙잡았다. 여자 친구가 사 줬다고 승준이 자랑하던 그 시계. 그리고 반년 전 즈음, 초원이 선물할 생각이라며 진열장 너머로 바라보던 그 시계.
맥이 빠졌다.
이걸 왜 이제야 눈치챘을까?
초원은 그때도 팀장에게 마음이 있었던 거구나. 그걸 가장 가까운 사이라 생각했던 그도 눈치 못 챌 정도로, 그렇게 철저히 이 여자는 숨겨 왔구나.
‘하⋯, 나 정말 한심하네.’
초원은 애초에 그에게 마음이 없었는데. 갑작스럽게 변해 버렸다며 자신이 뭘 잘못하기라도 했나 고민한 시간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두 사람의 관계를 오해했던 시간은 더 한심하고.
왜 솔직하게 말해 주지 않았을까? 연인은 아니더라도 서로 없인 못 사는 끈끈한 관계라고 믿은 건 자신뿐이었는지 몰래 비밀을 키워 온 초원에게 배신감마저 느껴졌다.
이젠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도 잊은 건지 마주 보고 둘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연인을 응시하며 현우는 쓰디쓴 소주를 입속으로 털어 넣었다.
초원은 거울에 서린 김을 닦으며 칫솔을 바쁘게 움직였다. 거울을 보며 혀를 길게 뺀 그녀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칫솔을 혀 위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마늘 냄새 제발 좀 사라져라.’
입을 헹구고 새 타월을 집어 샤워 부스에서 나오는 승준에게 내밀었다. 온몸의 물기를 닦은 그는 빨래 바구니에 타월을 던져 넣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초원에게 다가갔다.
허리를 서서히 찔러오는 물건에 슬슬 반응이 올 법도 한데, 이 여자는 얼굴에 무언가를 열심히 찍어 바르는 데 여념이 없었다. 뒤에서 끌어안고 한참을 구경하던 그는 들으라는 듯 한숨을 크게 내쉬곤 초원의 머리를 감은 타월을 풀어 젖은 머리를 말려 주기 시작했다.
“아, 그 말을 안 했네.”
“응?”
“소문내지 말란 말요. 선배가 소문내면 어떡해요?”
승준은 타월로 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며 피식 웃었다.
“걱정 마요. 절대 소문 안 낼 거니까.”
“그걸 어떻게 알아요?”
“소문나면 우리는 잃는 것도, 얻는 것도 있지만 그놈은 잃는 것뿐이거든.”
“어째서요?”
“초원 씨 딴 팀 가니까 파트너 잃지. 우리는 그 김에 대놓고 사귈 거고 사람들 다 아는데 그놈이 초원 씨 뺏어가려 할 수 있겠어요?”
예전이라면 현우가 자신을 돌 보듯 하는데 헛소리를 한다고 핀잔을 줬겠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진짜, 뒤늦게 왜 저래?’
멋모르고 두 사람의 사이에 껴 치이고 있던 건 알고 보니 초원이었다.
***
인적이 드문 산길,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바스락 소리에 놀란 다람쥐가 손에 든 도토리를 입속에 쏙 집어넣더니 재빠르게 나무 위로 사라졌다.
이내 산길 아래쪽에서 검은 패딩 후드를 뒤집어쓰고 검은 마스크까지 낀 남자가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살피며 성큼성큼 뛰어 올라왔다.
낡은 은색 봉고차 한 대가 서 있는 작은 공터가 가까워지자 남자는 속도를 늦추고 발소리를 죽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지나가는 등산객인 양, 차 뒤를 어슬렁어슬렁 걸어 지나치던 남자는 차 안이 빈 걸 확인하더니 다시 걸음을 돌려 다가왔다.
남자는 주변을 급히 둘러보더니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잽싸게 차 옆에 쪼그려 앉았다. 줄곧 주머니 속에 박혀 있다 나온 오른손에는 성냥갑만 한 검은 물체가 들려 있었다. 남자가 가운데에 달린 버튼을 누르자 가장자리에 초록불이 반짝였다.
남자는 그 손을 차 아래로 불쑥 집어넣으며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잠시 후 다시 모습을 드러낸 손은 비어 있었다.
짤랑 소리에 초원은 고개를 식당 입구로 돌렸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오는 현우는 뛰어왔는지 허연 입김을 가쁘게 내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