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emperature difference between the woman and the man RAW novel - chapter 58
“안 돼, 차 주임!”
승준은 생기가 사라진 초원의 두 눈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필사적으로 외쳤다. 대체 뭘 하려고 총을 뽑는 걸까? 현우가 그 거리에서 정확히 맞출 수 있는 건 초원뿐이었다. 아무리 급소를 피한다고 해도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쏠 생각을 할 수 있는 걸까?
“쏘면 안 돼!”
승준의 지시를 어기며 홀스터에서 총을 뽑아 든 현우는 난처해졌다. 초원이 다치지 않길 바라는 건 그도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맞았다. 자신이 초원을 쏘면 둘 다 살 가능성이 있지만 초원이 승준의 머리를 영점 거리에서 쏘는 순간 승준의 목숨은 거기서 끝이었다.
“팀장님, 생명에는 지장 없게 쏠 테니⋯.”
“안 된다고 했지 않나!”
승준은 이미 괴물의 꼭두각시가 되어 버린 초원의 두 눈을 들여다보았다. 저기 어딘가에서 그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제 목숨보다도 아끼는 여자의 흔적이 나타나 주길 간절한 눈빛으로 애원했다.
둘 다 살리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뱀파이어를 죽이는 것. 하지만 현우가 이 거리에서 승준을 맞추지 않고 녀석을 쏘는 건 말 그대로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지금 녀석을 처치할 수 있는 건 승준뿐이었지만 현장 요원이 아닌 그에게 무기가 있을 리 없었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 현우는 바짝 말라 가는 입술을 깨물며 총구를 바닥을 향해 내렸다.
‘왜 하필⋯.’
현우는 어젯밤, 승준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자랑을 늘어놓으며 볼을 붉히던 초원을 떠올렸다. 늘 무심하고 초연해 보이던 여자가 사랑에 달뜬 소녀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때 현우가 느낀 아픔은 연주가 떠났을 때 못지않았다. 하지만 그건 저 방아쇠를 당긴 후 초원이 죽는 날까지 느껴야 할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팀장님 이렇게 가시면 초원 씨 평생 죄책감에 시달릴 겁니다.”
그 순간, 승준은 보았다. 굳게 다물려 있던 초원의 입술이 달싹였다.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분명 “안 돼.”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여전히 영혼 없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차가운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넘쳐흘렀다.
초원은 여전히 거기 있었다. 몸과 사고를 잠식한 괴물과 눈에 보이지 않는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何をしてる? 早く撃て!” (뭐 하는 거야? 얼른 쏴!)
하지만 인간의 정신력으로 뱀파이어의 정신 조정을 이겨 내는 건 무리였다. 살짝 아래로 처졌던 총구가 다시 번쩍 위로 들렸다.
“차 주임.”
“네.”
“초원 씨가 방아쇠 당기고 나면⋯.”
끔찍한 소리에 현우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자신의 죽음을 덤덤하게 입에 올리는 남자는 그를 죽이려는 여자를 여전히 애틋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신경과학팀으로 데려가 주세요.”
기억을 억제시키면 초원은 이 모든 걸 잊고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초원 씨 잘못 아니야.”
승준은 물기가 말라 가는 싸늘한 눈을 깊이 응시하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알아들었으면 했다. 이렇게 떠나더라도 초원을 원망하지 않는다는 걸.
“그때나 지금이나 같이 있어서 행복했어.”
“お前、誰のものだと思うんだ? 撃て!” (너, 누구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쏴!)
“사랑⋯.”
고막을 찢는 총성과 함께 승준의 눈앞에서 권총이 불꽃을 뿜었다.
첫발이 머리를 관통하는 순간, 승준의 몸이 튀어 오르며 옆으로 쓰러졌다.
탕!
두 번째는 정확히 심장을 관통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일렀듯이.
이미 오래전 죽은 시체였던 몸뚱어리는 그 괴기한 원동력을 잃는 순간 말라비틀어지더니 순식간에 재가 되어 바스러졌다.
툭, 손에서 미끄러진 권총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승준은 잽싸게 일어나 초원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의 목숨을 건 사투 끝에 힘이 빠져 무너져 내리던 몸이 승준의 품속에 무사히 안겼다.
“잘했어. 초원 씨, 잘했어.”
숨죽인 흐느낌이 새어 나오며 초원의 등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승준은 그 떨리는 몸을 단단히 끌어안고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나도⋯.”
현우의 뒤로 몰려오기 시작하는 격리부대원들을 돌아보던 승준은 들릴 듯 말 듯한 속삭임에 다시 초원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응?”
“나도 사랑해요.”
“살짝 따끔할 거예요.”
날카로운 바늘이 팔꿈치 안쪽의 여린 살을 파고들어 오는 순간, 초원은 한쪽 눈을 찡그렸다.
나비처럼 생긴 바늘의 끄트머리에 검붉은 액체가 맺히기 시작하는 걸 보고 눈에 띄게 안도하자 채혈을 하던 당직 간호사는 미소를 지었다.
그것도 잠시, 트레이에 튜브가 두 개나 더 남은 걸 본 초원의 입가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어렵사리 진정시켰던 손이 다시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샘플이 이렇게 많이 필요한가요?”
“절차가 이래서요.”
간호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난처한 눈웃음을 지었다. 초원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 뒤로 흘러내리는 담요를 위로 끌어당겼다.
‘그냥 최면만 당한 건데⋯.’
그나마 주말이라 다행이었다. 평일이었다면 연구실에 끌고 가 뇌 영상까지 찍으려 했을지도 몰랐다.
놈이 만진 적도 없고 뭘 받아먹은 것도 아니니 피검사까진 필요 없다고 해도 승준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저 얼른 집에 가서 침대에 눕고 싶은 마음뿐이었던 초원은 한마디 더 하려다 그의 미간에 깊게 팬 주름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승준은 입씨름을 받아 줄 여유가 전혀 없었다.
굳게 닫힌 의무실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굵은 목소리에 초원과 간호사는 어색한 미소를 주고받았다.
바늘이 빠져나간 자리를 솜으로 꾹 누르던 초원에게 간호사가 알약 하나와 물잔을 내밀었다.
“신경 안정제예요.”
초원은 필요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아직도 심장 소리가 귓속을 쿵쿵 울리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지만 약까지 먹을 일은 아니었다.
“저기 상사분이 꼭 드리라고 하시던데요.”
간호사의 난처한 낯빛을 본 그녀는 마지못해 약을 받아 삼켰다.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차 주임을 믿고 맡긴 내 잘못이지!”
간호사가 혈액 샘플을 들고 밖으로 나가는 순간, 잠시 열렸다 닫힌 문틈으로 분노에 찬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아이고⋯, 내 잘못인데⋯.’
초원은 어깨에 두른 담요를 걷어 내고 침대 아래로 내려가 빨간 하이힐 속에 발을 집어넣었다.
“아!”
다리에 힘이 풀렸을 때 삔 건지 왼쪽 발목이 아릿했다. 결국 구두를 신는 걸 포기하고 한 손에 든 채로 스타킹만 신은 발로 문을 향해 걸었다.
“⋯말라고 했는데 왜 지시를 어깁니까?”
“죄송합니다.”
문을 살짝 열고 빼꼼히 고개를 내민 초원은 승준에게 가루가 되도록 까이고 있는 현우와 눈이 마주쳤다. 미안함 가득한 눈빛을 현우와 주고받던 그녀는 문을 열고 의무실 로비로 나왔다.
“내 말이 그렇게 듣기 싫으면 다른 팀으로 가세요.”
화가 머리끝까지 나 소리치는 승준의 뒤로 살금살금 다가간 초원은 잠시 머뭇거렸다. 지금 이 상황에선 조 팀장의 홍 주임이어야 할지 승준의 애인이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팀장님.”
부르는 소리에 불쑥 뒤로 돌아보는 남자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패어 있었다.
“왜 나왔어요? 신발은 왜 그러고 들고 있어요?”
“저, 다 제 잘못인데요. 차 주임님은 팀장님 말씀 때문에 안 가려 했는데 제가 괜찮다고 다녀오라고 한 거라서요. 죄송합⋯.”
“홍 주임은 끼어들지 말고 얌전히 혼날 차례나 기다리세요.”
차가운 말투에 초원은 몸을 움찔했다. 아무래도 쉽게 풀릴 화가 아닌 모양이었다. 승준이 몸을 돌려 다가오더니 다시 들어가라는 듯 그녀의 어깨를 감싸 의무실 쪽으로 밀었다.
“앗⋯.”
약 기운에 취해 몽롱해진 몸이 휘청거렸다.
“괜찮아요?”
어느새 목소리에 평소의 따스함이 돌아와 있었다.
간호사가 돌아오다 보면 소문이 날 수도 있었지만 알 게 뭔가? 초원은 약 기운을 탓하며 승준의 품에 그대로 몸을 기댔다.
살아 있는 남자의 몸. 초원의 손바닥을 그의 심장이 쿵쿵 두드리고 맞닿은 곳마다 따스한 온기가 스며들어왔다. 그녀는 손을 들어 올려 까칠한 턱선을 매만졌다.
“우리 집에 가면 안 돼요? 떡볶이 해 주기로 했잖아요.”
“그래요, 먹고 싶다면 해 줘야지.”
화가 나다가도 이렇게 안겨드니 노여움이 눈 녹듯 녹았다. 승준은 초원을 꼬옥 끌어안으며 그의 샴푸 향이 진한 머리카락에 입술을 묻었다.
“초원 씨 짐 가져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려요.”
초원을 의무실 로비 소파에 앉힌 그는 몸을 일으켜 돌아섰다.
“차 주임, 내가 올 때까지 초원 씨 옆 지켜 주세요. 이것마저 제대로 못 하면 자를 겁니다.”
조금 전보다는 화가 누그러졌지만 여전히 서슬 퍼런 말투였다.
승준이 복도로 사라지자 의무실에 남은 두 사람 사이에 어정쩡한 적막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또 한 번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패배한 기분을 현우는 느끼고 있었다. 어디에도 없다고 자부했던 둘만의 끈끈함보다 더한 무언가가 초원과 승준의 사이에 있었다. 그 무언가의 이름은 당연히 사랑이겠지. 하지만 그것이 몇 달이라는 짧은 시간 속에서 이렇게 깊어질 수 있는 것인가? 4년을 함께 했어도 안전선 안에 머무르며 제자리걸음만 했던 자신이 한심하게, 그리고 초원은 멀게만 느껴졌다.
“⋯미안해요. 다 내 잘못인데⋯.”
침묵을 먼저 깬 초원이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아니에요. 내가 미안하죠. 제대로 파악 못 한 내 탓도 있으니까.”
“그건 내 탓이기도 하죠.”
각자의 생각에 잠긴 두 사람 사이로 다시 길고 긴 침묵이 이어졌다.
‘잠이 안 와.’
사랑하는 남자를 사랑한다는 말 한 번 해 주지 못하고 죽이기 직전까지 갔는데 잠이 오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저녁때 먹은 신경 안정제도 모자라 승준이 먹던 수면제까지 먹었는데도 말짱한 정신이 괴로워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정말⋯.’
곧바로 눈을 번쩍 떴다. 눈을 감을 때마다 승준의 하얗게 질린 얼굴과 죽음의 공포로 떨리던 눈동자가 떠올랐다.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초원의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리더니 베개 위로 떨어졌다.
죽음이 안 두려운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렇게 두려웠으면서도 꾹꾹 억눌러가며 애써 담담한 척하던 남자였다.
‘쏘지 말라니⋯. 죽느니 그게 낫잖아.’
누군가 와서 자신을 막아 주길 바라던 찰나에 승준이 현우를 부르자 속으로 힘겨운 싸움을 벌이던 초원은 안도했었다. 곧 끝나겠다고 기뻐했는데 쏘지 말라니.
‘초원 씨가 방아쇠 당기고 나면 신경과학팀으로 데려가 주세요.’
그 절명의 순간에도 이 미련한 남자는 자신을 죽이려는 여자를 걱정하고 있었다. 초원은 아랫배에 얹힌 커다란 손을 그녀의 작은 손으로 부드럽게 감쌌다.
인간의 정신력으로 뱀파이어의 초능력과 싸우는 건 한계가 있었다. 초원이 할 수 있는 건 방아쇠를 당기려 구부러지는 손가락을 온 힘을 다해 다시 펴는 것뿐이었다.
‘여긴 왜?’
몸을 마음대로 쓸 수 있었다면 그 순간 눈이 두 배는 커졌을 거다. 현우에게 뒷일을 부탁하는 승준의 주변으로 그의 집에 사는 지박령이 맴돌기 시작했다. 설마 그를 데려가려고 온 걸까?
‘안 돼! 데려가지 마!’
악귀는 아니라고 믿었던 초원은 절규했다.
“너, 누구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쏴!”
놈이 외치는 순간 귀신이 놈의 몸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찰나 초원을 조종하던 섬뜩한 안개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녀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총구를 내려 그대로 놈의 머리를 쏘았다.
‘영혼 없는 뱀파이어에 빙의하는 건 그냥 지하철 빈자리에 앉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혼이 있는 자에게 들어가는 건 심령관리팀의 손에 저승으로 끌려갈 일이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머리가 비상한 귀신 덕에 초원은 오늘 밤도 이 포근한 숨소리와 심장 박동에 폭 파묻혀 잠들 수 있었다.
“정말 고마워요.”
초원은 침대 옆 창가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귀신을 향해 속삭였다.
[박병훈: 홍 주임 무슨 드라마 여주인공이야?] [홍초원: -_-]‘내가 여주인공이면 이딴 걸 쓴 작가의 멱살을 잡아야지.’
초원은 사내 메신저 창을 내리고 보고서를 쓰기 시작했지만 정신 사납게 깜빡이는 메신저 아이콘이 거슬려 다시 열 수밖에 없었다.
[박병훈: 아니 왜 자꾸 대형 사건을 몰고 다녀?] [홍초원: 그 자리에 나만 있었던 것도 아니잖아요.] [박병훈: 홍 주임이 연구소랑 합이 안 맞나?] [홍초원: -_-] [박병훈: 몇 년 전에 가스 누출 사고도 그렇고]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일산 연구소 가스 누출 사고 이야기가 나오자 초원은 눈살을 찌푸렸다.
[박병훈: 와 씨 역시 홍 주임이 몰고 다니네. 나 홍 주임 연구소에 있을 때 절대 안 가야지.]이번 일은 그렇다 쳐도 그 사고는 초원이 저지른 일도 아니라 울컥했다.
[홍초원: 왜 내가 원흉이에요? 그때도 팀장님이랑 현우 선배도 있었거든요?] [박병훈: 와 소름 ㄷㄷㄷ 나 이제 무서워서 연구소 못 갈듯. 홍 주임은 안 무섭냐? 누출 사고만 해도 그때 현충원에 묻힌 사람이 몇 명이야 ㄷㄷㄷ] [홍초원: 기억 하나도 안 나는데]기억 나는 거라곤 그 당시 하늘 같았던 팀장님과 함께 서 있는 관찰실 공기가 참으로 어색했다는 것. 그리고 격리실 안에서 연구원과 대화를 나누는 파트너가 얼른 돌아와 그 어색한 분위기를 깨 주길 바랐다는 것뿐.
그다음 기억은 연구소 어딘가의 간이 병상에 누운 채로 눈을 떴다가 취한 듯 비몽사몽 집으로 돌아왔던 것이었다.
따르릉. 갑작스러운 벨 소리에 초원은 반사적으로 전화기로 손을 가져가다 멈췄다. 소리는 옆 칸에서 나고 있었다.
“네, 팀장님. 네.”
수화기를 내려놓은 현우는 곧바로 일어서서 팀장실로 향했다.
‘뭐지? 또 혼내려는 건가?’
초원은 마음이 불편해졌다. 제 잘못이 큰데 욕은 현우 혼자 먹고 있었다.
일요일 내내 승준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말이 없었다. 그 무거운 침묵이 무서웠던 초원은 귀찮을 정도로 옆에 딱 붙어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귀여운 척까지 해 보았지만 그는 어렴풋이 웃기만 할 뿐, 다시 침묵 속에 잠겼다.
[박병훈: 다음은 홍 주임 차례겠네. 명복을 빈다]차라리 불려가서 된통 욕을 먹고 혼이 나면 시원할 것 같았다. 승준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 가늠해 보려 팀장실 쪽으로 귀를 기울였지만 의외로 잠잠했다.
[박병훈: 세상에 팀장님한테 총질이라니 하극상 끝판왕이네.]그 자리에 있던 셋이서만 알고 묻어 두자고 한 일인데 세 사람의 대치 장면을 CCTV로 목격한 생물1팀 박 팀장이 주말 내내 나불대고 다녔나 보다. 월요일 아침부터 그 사건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아니, 그걸 봤으면 격리부대나 잽싸게 보내 줄 것이지.’
팀장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어? 빨리 끝났네?’
혼내려고 부른 게 아니었던 건가 싶었지만 돌아와 앉는 현우의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뭐라셔?”
칸막이 너머로 눈을 빼꼼 내밀고 묻는 병훈에게 현우는 쓴웃음만 지었다.
“홍 주임 들어오란 소린 안 하셔?”
현우가 고개를 젓자 병훈은 ‘하긴 그러면 그렇지.’라는 표정을 짓다 고개를 숙였다.
“차 주임도 예쁜 여자로 태어났어야 하는데.”
칸막이 너머로 들려오는 비아냥에 초원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탕비실 테이블에 현우와 마주 보고 앉은 초원은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그동안 툭하면 지방으로 보낸다고 염불처럼 외긴 했지만 정말 보낼 줄은 몰랐다.
‘부산지청이라니⋯.’
깡시골도 아니고 대도시니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보여 주기식 좌천 같겠지만 초원이 보기엔 달랐다. 하필 장산범이 있는 지방이라니. ‘너는 내려가서 그렇게 좋아하던 장산범이나 쫓아라.’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게 분명했다.
“이건 좀 아니잖아요.”
“어쩔 수 없죠, 뭐.”
현우는 따뜻한 머그잔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쓰게 웃었다.
“이번 일 아니었어도 난 다른 일로 지방으로 쫓겨났을 거예요.”
“그건 또 모르죠.”
“팀장님, 내가 사고 치기만 기다리고 계셨을 텐데⋯.”
그 말에 초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건 정말 아니었다. 어떻게든 여기저기서 이번 조치를 두고 말이 나오는 걸 막아야 했다.
“아직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 얘기 안 했죠?”
현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안도의 한숨을 내 쉰 초원은 손을 내밀어 그의 손등을 두드렸다.
“내가 어떻게 해 볼 테니까 다른 사람, 아 절대로 집에는 아직 얘기하지 말아요.”
그 순간 탕비실 문이 벌컥 열렸다. 문을 연 사람의 얼굴이 돌처럼 굳는 걸 본 현우는 손을 잽싸게 뒤로 뺐다. 승준이 아무런 말도 없이 피곤하다는 표정으로 나가 버리고, 거칠게 닫힌 탕비실 문이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