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emperature difference between the woman and the man RAW novel - chapter 60
“작년 하반기 근무평정 결과 나왔습니다.”
‘헉, 드디어 올 게 왔구나.’
승준이 먼저 아름의 책상 쪽으로 다가가 종이 한 장을 내밀고, 모두들 수능 성적표를 나눠 주는 담임 선생님을 보는 눈으로 그를 좇았다. 평정 등급에 따라 통장에 성과급이 얼마나 꽂힐지가 정해지다 보니 다들 목을 빼고 이것만 기다리던 참이었다.
‘이번엔 탁월 등급 있으려나?’
등급은 탁월, 우수, 보통, 미흡, 불량 이렇게 총 다섯 등급이었다. 팀 인원이 적어 등급에 정해진 비율은 없는 절대 평가였지만 다만, 탁월 등급만은 1명이라는 상한선이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승준은 정말 가뭄에 콩 나듯 주었다.
“홍 주임.”
드디어 초원의 차례였다. 기대에 찬 눈을 반짝이며 올려다보았지만 승준은 눈을 피하더니 평정서만 넘겨주고 도망치듯 희경의 자리로 가 버렸다.
‘뭐야? 등급 깎기라도 한 거야?’
승준이 뒤집어서 준 평정서를 급하게 돌려보았다.
‘흠⋯, 똑같잖아.’
작년 상반기와 다를 바 없이 ‘우수’ 등급이었다.
‘칫, 진짜 냉정하네.’
그렇게 최고 등급 염불을 외웠는데. 아무리 내기에 졌더라도 선심 써서 주면 초원의 통장도 배부르고 그 돈으로 맛있는 거 쏠 테니 승준도 배부를 텐데. 칼같이 우수 등급을 준 저 남자가 야속했다.
‘근데 그간의 하극상을 생각하면 안 깎은 게 어디야.’
나쁘지 않다고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등급 아래의 의견란을 읽기 시작하던 초원의 낯빛이 확 변했다.
의견은 칭찬 일색이었다. 적어도 겉보기에는⋯.
[자신의 이익과 안녕보다는 파트너를 먼저 생각하는 희생정신과 동료애가 매우 강함.]‘이거 비꼬는 건가?’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오기도 전에 솔선수범 먼저 나서는 자기 주도적이며 적극적인 면모가 아주 인상적임.]‘비꼬는 거 맞네.’
[대쪽 같은 성격으로 한 번 마음먹은 것은 끝까지 관철시키고야 마는 뚝심과 상대를 가리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열정적으로 피력하는 담대함이 돋보임.]‘이거 지금 나보고 고집불통에 위아래를 모른다는 거지?’
[상관의 조언과 지시를 잘 새겨듣는 것 같아 보이나 실제로 그것을 따르는 모습은 보기 힘들므로 이 부분을 개선한다면 더욱 발전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함.]‘와, 오늘 방바닥에서 자라고 해야지. 보일러도 안 틀어 줄 거야.’
“홍 주임, 뭐 받았어?”
“아, 전 저번이랑 똑같아요.”
초원은 평정서를 엎어 서랍에 집어넣었다.
“우수? 우리랑 똑같네? 크으, 우리 둘 다 우수 받았잖아.”
으뜸과 칸막이 너머로 하이파이브를 하던 병훈은 사무실 저편에 앉은 희경과 눈이 마주치자 흠칫했다. 병훈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더니 키보드 위로 손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박병훈: 안 모 씨 표정 왜 저래? 아, 홍차는 돌아보지 마!] [홍초원: 왜요? 그러니까 더 돌아보고 싶네.] [박병훈: 그, 절에 가면 천왕문 안에 사천왕 있지? 그중에 얼굴 시뻘겋고 험상궂은 왕이랑 닮았어.] [차현우: 등급 떨어졌나 보네요.] [박병훈: 아, 졸 궁금하다. 누구 총대 메고 가 볼 사람?]뒤에서 휙, 의자 밀리는 소리가 들리자 초원은 황급히 메신저 창을 내렸다.
비장한 기세로 걸어가는 희경을 팀원들은 조마조마한 눈으로 좇았다. 팀장실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는 희경은 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나저나 차 주임은 뭐 받았어?”
“저요? 우수요.”
초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상반기에는 보통을 줘 놓고 이번에는 우수라니. 그러고 보니 여기 모여 앉은 넷은 작년 하반기에 승준이 바쁘게 뒷수습하고 다니고 윗선에서 깨지게 만든 장본인들인데 전부 우수 등급이었다.
‘뭐지? 이 남자 알 수가 없네.’
3팀 사람들은 숨죽여 팀장실의 동태를 살폈다. 한 5분쯤 되었을까 조용하던 팀장실 문이 벌컥 열렸다. 씩씩거리며 걸어 나오는 희경의 눈가가 벌겋게 익어 있었다. 팀원들이 숨죽이고 눈치를 보는 사이, 희경은 손에 든 종이를 아름의 옆에 있는 파쇄기에 밀어 넣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다들 얼음처럼 굳어 서로 눈치만 보는 와중에 병훈이 벌떡 일어서더니 한참 돌아가던 파쇄기를 껐다.
“앗, 박 주임님 뭐 하시는 거예요?”
아름이 곤란하다는 듯 속삭여도 소용없었다. 병훈은 뚜껑을 열어 들고 파쇄기에 갈리다 만 평정서를 눈으로 읽기 시작했다.
“허⋯.”
입을 쩍 벌리고 놀라는 반응에 다들 사무실 입구 쪽을 흘깃거리며 병훈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불량] [팀장 부재 시 팀장을 대신해 팀을 이끌어야 하는 상급자로서 후배들의 귀감이 되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음.]“헐⋯.”
“누가 가서 위로 좀 해 줘 봐.”
병훈이 초원과 아름에게 번갈아 눈짓을 했다.
“이런 일은 애교 많고 사근사근한 아름 씨가 제격이죠.”
초원은 아름의 등을 불여시 굴로 떠밀었다.
탕비실에서 홀로 커피를 뽑으며 간식을 챙기던 초원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팀장이랑 사귀는 것도 나쁘지 않네.’
최악의 등급을 받은 희경이 안 됐다 싶으면서도 그간 한 짓을 생각하면 솔직히 고소하기 그지없었다.
탕비실 문이 열리자 초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탕비실로 갈 때마다 따라오는 스토커가 또 나타났다.
“우리 귀염둥이 뭐 해요?”
“한번 먹고 싶은 건 끝까지 먹고야 마는 뚝심으로 간식 먹으려고요.”
평가를 비꼬며 삐진 티를 팍팍 내는 초원이 귀여워 피식 웃던 승준은 갑자기 팔짱을 끼더니 근엄한 목소리를 냈다.
“흠, 홍 주임. 회사에 티를 입고 오면 어떡합니까?”
“네?”
눈이 어떻게 됐냐는 듯 초원은 입고 있는 흰 블라우스 옷깃을 흔들었다.
“프리티.”
“헐⋯.”
못 들을 걸 들었다는 썩은 표정으로 간식과 머그잔을 챙겨 나가려는 초원을 승준은 급하게 붙잡았다.
“잠깐, 얼굴에 풀 묻었는데?”
“네?”
아침에 영수증을 붙이다 묻히기라도 한 걸까? 초원은 그 말에 뺨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뷰티풀.”
소름 돋는 아재 개그를 던져 놓고 저 혼자 뿌듯하게 웃으며 볼을 꼬집어 대는 남자를 초원은 변태 상사라도 보듯 싸늘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왜? 재미없나?”
“팀장님, 개그는 벌써 부장님 급이시네요.”
비꼬려고 한 말인데 승준은 재미있었는지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다고 내가 기분 풀 것 같아요? 오늘 방바닥에서 자요.”
“그럼 허리 아픈데.”
“내 알 바예요?”
“내가 허리 못 쓰면 아쉬운 게 누군데.”
“아쉽긴요. 우리 서방님이 계신데.”
초원은 서랍 속 깊은 곳에 숨겨 뒀다 얼마 전 들켜 버린 핑크빛 기둥서방 이야기를 꺼내며 얄밉게 입꼬리를 올렸다.
“서방님 같은 소리 하네. 한 뼘도 안 되는 놈.”
“일곱 가지 색다른 재주가 있으시단 말이에요.”
“일곱, 아니 수백 가지면 뭐 하나? 부르르 떨기밖에 못 하는데.”
승준은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었다.
“오늘 밤에 누가 진짜 서방인지 보여 줘야겠네.”
언제든 누구나 들어올 수 있다는 것도 잊고 초원의 허리로 손을 불쑥 내밀었다. 엉덩이를 휙 빼며 가볍게 피한 그녀는 하지 말라는 듯 눈을 흘겼다.
“흥. 오늘 밤에 각오하세요, 조 팀장님. 끝나고 평가 있을 예정이니까.”
“굳이. 난 항상 평가자가 그만 됐다고 외칠 때까지 만족시켜 주는 탁월 등급인데.”
반박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초원은 입술만 비죽 내밀며 탕비실 문을 휙 열고 사라졌다.
온몸으로 막고 있던 절정의 물결이 그를 무너뜨리고 덮쳐오는 순간, 승준은 밭은 숨을 뱉어 내는 초원의 열에 달뜬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절정에 이를 때 눈을 맞추는 걸 좋아하는 그였다.
인간의 가장 사적이고도 나약한 순간, 서로의 영혼을 깊이 들여다보다 보면 몸도 마음도 하나가 된 걸 느낄 수 있었다.
떨림이 서서히 잦아들고 두 사람은 땀에 미끈하게 젖은 몸을 부둥켜안았다.
“또 해 줘요.”
승준의 간절한 눈빛에 초원은 부끄러운 듯 볼을 붉혔다.
“한 지 1분도 안 됐잖아요.”
“난 초원 씨 얼굴 볼 때마다 하고 싶은데. 섭섭하네⋯.”
초원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더니 그의 입술을 살짝 머금다 눈을 애틋하게 바라보았다.
“사랑해요.”
“나도 사랑해.”
요란스러운 알람이 울리자 초원은 부루퉁한 얼굴로 마지못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힝, 일요일인데 진짜⋯. 우리 팀장님 짜증 나.”
그녀의 맨 어깨에 입술을 맞추던 승준이 피식 웃고, 초원은 간지러움을 참지 못해 몸을 비틀며 침대 밖으로 빠져나갔다.
“반찬 뭐 해 줘요?”
초원의 자취방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던 그는 알몸으로 욕실을 향해 걷는 여자에게 물었다.
“계란말이요.”
캔 참치에 마요네즈와 다진 양파를 넣고 섞자 고소한 냄새가 폴폴 풍기기 시작했다.
끓어오르는 된장국 냄비의 불을 낮춘 승준은 적당히 달궈진 팬에 계란 물을 얇게 부어 넣었다.
계란이 반쯤 익자 잘 섞어 둔 참치를 잔뜩 얹고 계란을 말기 시작했다. 계란 물을 조금 부어가며 말기를 반복하다 이제 한 번만 더 말면 되겠다 싶었을 때, 초원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침대로 다가가 핸드폰 화면을 내려다보던 승준은 아무렇지 않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차 주임. 무슨 일이죠?”
다시 가스레인지 앞에 선 그는 남은 계란 물을 팬에 붓고 된장국의 가스 불을 껐다.
“초원 씨 지금 씻는 중인데.”
승준은 핸드폰을 어깨와 귀 사이에 끼더니 조심스레 계란말이를 뒤집었다.
“아, 차 주임도 차 실장님도 상심이 크겠네요. 어디 안 좋으셨습니까?”
안타까운 소식에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었다.
“아⋯, 할머님 좋은 곳으로 가시길 진심으로 빕니다. 빈소는? 정해지면 꼭 알려 주세요.”
가스 불을 끈 그는 계란말이를 들어 올려 접시 위에 내려놓았다.
“어, 여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 마세요.”
“헐, 그거 내 폰이잖아요. 받으면 어떡해요!”
전화를 끊는 순간 욕실에서 타월 차림으로 나오던 초원이 놀라 소리쳤다.
“차 주임인데?”
“아⋯, 왜요?”
초원의 얼굴이 순식간에 평온을 되찾았다.
“차 주임 할머님이 돌아가셨다네. 그래서 오늘 일하러 못 갈 것 같다고.”
“어떡해. 마음 아프겠다.”
초원은 승준이 쥐고 있던 핸드폰을 뺏어 들더니 현우에게 메시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 옷이나 좀 입고 해요. 발가벗고⋯.”
“타월 안 보여요? 그리고 문자 치는 데 무슨 정장 차려입고 무릎 꿇고 해야 하나.”
승준은 더 말해 뭐하겠냐는 듯 한숨을 쉬며 아침상을 차렸다.
“오, 참치 마요 계란말이!”
대충 옷을 입고와 식탁 앞에 앉은 초원이 신난 듯 외쳤다.
“이건 아무리 봐도 사랑인데.”
“당연한 소릴⋯.”
승준은 피식 웃으며 국그릇을 식탁에 놓고 자리에 앉았다.
“근데 그럼 보살님한테는 나 혼자 가야 하나⋯. 박 주임님한테라도 전화해 볼까요?”
“그럴 거 있나? 초원 씨가 짜증 난다던 팀장님이 같이 가 준다는데.”
승준은 잘됐다는 듯 씨익 웃었다.
상가 건물로 들어서던 그는 두꺼운 패딩 아래로 허리춤에 찬 권총을 만지작거렸다.
연구소에서 그 사건이 있은 후 혹시 몰라 지급받았는데, 또 이렇게 현장에 나올 일이 있는 걸 보니 역시 받아 두길 잘한 모양이었다.
계단을 올라 점집 이름이 궁서체로 쓰여 있는 문 옆의 초인종을 눌렀다. 옆에 선 초원은 4층까지 올라오느라 숨이 찼는지 헉헉대고 있었다.
“운동 좀 해야겠어, 응?”
“아침부터 운동이 과해서 이런 거거든요?”
두 사람이 마주 보고 피식 웃는 순간, 철문이 벌컥 열렸다.
“아이고, 들어와요. 난 또 안 오는 줄 알았어.”
“저희가 좀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승준은 사과를 하며 초원을 먼저 안으로 들여보냈다.
“아니, 근디 팀장님 아녀? 아이고, 팀장님까지 이 늙은 할매를 지키러 이렇게 와 주시고⋯.”
말단 요원이 아닌 팀장이 이곳까지 행차하게 된 진상을 모르는 명옥 보살은 감동한 듯 승준의 손을 두 손으로 부여잡았다.
“내가 진짜 고마워서 워쪄⋯.”
“아, 아닙니다.”
연신 고마움을 표하는 명옥에게 붙들려 어쩔 줄 몰라 하는 승준의 모습에 초원은 볼을 부풀리며 웃음을 참았다.
“여 보일러 따듯하게 틀어 놨으니께 이불 깔고⋯.”
명옥은 법당 옆의 작은 방으로 두 사람을 데려갔다. 방구석에 쌓아 둔 두꺼운 요를 들어 올리려 하자 승준이 냉큼 다가와 요를 받아 들었다.
“아니, 거기 말고. 여기가 따셔. 응, 그려. 거따가.”
아무리 무서운 팀장이라도 70대 할머니의 눈에는 새파란 애였다. 초원은 명옥 보살이 시키는 대로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있는 승준을 재미있다는 듯 구경했다.
“아이구, 근데 심심해서 어쩐댜.”
“아, 괜찮습⋯.”
승준의 말은 들은 체도 않고 명옥은 홀로 중얼거리며 밖으로 훌쩍 나가 버렸다. 그 쩔쩔매는 모습이 웃겼던 초원은 방구석에 서서 키득키득 웃었다.
“입이라도 덜 심심해야지.”
명옥이 들고 들어온 쟁반에는 사과와 배 두 개, 과일칼과 오렌지 주스 병이 담겨 있었다. 그걸 승준이 받아 바닥에 내려놓는 순간 밖에서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아이고, 손님 왔네. 졸지들 말고 내가 소리 지르면 퍼뜩 나와야 혀.”
“얼굴 기억하지 않으세요? 범인 문 열고 들어올 때 미리 말씀해 주시지.”
초원의 말에 명옥은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꿈이라 가물가물혀. 그래도 보믄 알긋제.”
명옥이 틈을 조금 남긴 채로 문을 닫고 나가자 두 사람은 겉옷을 벗고 이불 위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