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emperature difference between the woman and the man RAW novel - chapter 62
무릎 위에 앉히길래 여느 때와 같은 두근두근 연애질 타임인 줄 알았더니 진짜 일을 시킬 생각이었나 보다.
“또 물체1팀 정 팀장, 병이 도져서.”
“아⋯.”
특이물체관리1팀의 정 팀장은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접수 건을 다른 팀에 떠맡기려 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승준은 오늘도 그런 이메일을 정 팀장에게서 막 받은 차였다.
“이거 좀 봐요. 스마트폰 바이러스인데 바이러스라고 생물팀보고 맡으라네.”
“네? 아, 문과가 또⋯.”
“문과 망신이야, 정말.”
“근데 뭐 하는 바이러스길래 특관청에서 맡아요?”
정 팀장의 이메일을 읽던 초원이 현상 이름을 보고는 헛웃음을 흘렸다.
“흑역사 제조기, 하하.”
하지만 사례를 읽어 내려갈수록 초원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새벽 2시에 전 남친에게 ‘자니?’, ‘보고 싶어.’ 같은 문자 보내기. 전 남친의 현 여친 SNS에 좋아요 누르기. 새벽 감성 넘치거나 술 냄새 나는 글을 SNS에 올리기 등, 읽을수록 등골이 서늘해지는 사례뿐이었다.
“다 읽었죠?”
승준이 수화기를 들더니 정 팀장의 번호를 눌렀다.
“정 팀장님, 접니다. 네, 메일 보내 주신 거 잘 봤습니다. 그런데 이거 우리 쪽에 보내실 게 아닌데요.”
수화기 너머로 빠르게 웅얼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승준은 초원을 향해 피곤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알 만하다 싶었던 초원은 웃으며 그의 뺨을 달래듯 쓰다듬었다.
“하하, 근데 그게 그 바이러스가 아니잖습니까? 우리 팀 홍 주임이 전문가니까 얘길 들어 보시죠.”
승준이 통화를 스피커폰 모드로 돌리고, 초원은 눈살을 찌푸렸다. 기껏 해 봐야 임상 경험 없는 일반의일 뿐인데 전문가라는 말은 지나치지 않나.
“어, 안녕하세요, 정 팀장님.”
[예, 홍 주임.]“그게 컴퓨터 바이러스가 바이러스라고 불리는 건 생물학에서 말하는 바이러스에서 이름을 따 온 것뿐입니다. 감기 바이러스가 인체에 감염을 일으키듯이 코드가 컴퓨터를 감염시키니까 바이러스라고 부르는 거죠.”
[그럼 살아 있는 생물처럼 막 여기저기 옮겨 가며 감염을 시킨다는 거 아닙니까? 그럼 생물팀에서 맡는 게 맞지 않나?]이젠 승준뿐이 아니라 초원도 ‘이 양반 진짜 말 안 통한다.’라는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애초에 생물학에서 말하는 바이러스도 생물이 아닌데요.”
[응?]“바이러스는 그냥 분자의 조합일 뿐이고 세포도 없고 자가생식도 못 하고 에너지도 못 만들어내기 때문에 생물로 분류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그리고 컴퓨터 바이러스는 그냥 코드와 연산으로 이뤄진 컴퓨터 프로그램인데 그걸 생물 취급하진 않습니다만.”
“정 팀장님, 비슷한 사례도 있지 않습니까?”
과학적 근거에 따른 반박은 이쯤 하면 충분하다 싶었던 승준이 끼어들었다. 기존에 접수된 건을 사례로 들려 했던 그는 머뭇거리며 초원의 눈치를 조심스레 살폈다.
“그, 소설 빙의 바이러스는 현상팀에서 맡았었고 맞춤 성인 동영상 USB 메모리는 정 팀장님 쪽에서 맡으신 거 아닙니까?”
초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는 걸 보니 묻고 싶은 게 있는 얼굴이었다. 승준은 모르는 척 눈을 피했다.
[⋯쩝, 그럼 현상1팀에 연락해 봐야겠네. 하여간에 고맙습니다.]“네, 감사합니다.”
승준은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참았던 한숨을 내쉬었다.
“감사는 무슨 감사⋯.”
“뭐예요?”
“응?”
승준은 의문을 잔뜩 품은 눈빛 앞에서 태연하려 애썼다. 직원도 기억 억제 기록이 남느냐고 초원이 물은 그날부터 혹시 억제가 풀려 가는 건 아닌가, 무언가 기억해 낸 건 아닌가 초조하던 차였다. 그런데 괜히 트리거가 될 법한 말을 한 게 아닌가 싶었다.
“맞춤 성인 동영상?”
승준은 참았던 숨을 웃음을 가장해 터트렸다. 그쪽이었다니 천만다행이었다.
“구해서 볼 생각 마요. 그걸로 직원 여럿 폐인 됐으니까.”
무슨 소리냐며 눈살을 찌푸리는 초원을 끌어안고 승준은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
“그나저나 우리 홍 주임 너무 멋있어. 남자들이 자꾸 반할까 봐 걱정이네?”
초원은 승준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은 채로 가볍게 웃기만 했다.
“근데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보이지?”
그 말에 초원은 울컥했다. 티 안 내려고 일부러 웃고 있었는데 이 남자의 눈에는 다 보이는 모양이었다.
‘진짜 이 남자 너무 따뜻해.’
고개를 든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왜 울어요? 아까 구미호 때문에 그래요?”
눈가로 배어 나오는 물기를 손으로 닦아 주는 승준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패었다.
“아니에요.”
성질 같아서는 이르고 싶었지만 그랬다가 승준이 구미호에게 한마디라도 하러 간다면 큰일이었다. 그 영악한 여우는 신이 나서 비밀을 나불댈 게 불 보듯 뻔했으니까.
“아니긴⋯. 그 망할 할망구가 또 무슨 사악한 소릴 했길래?”
남자들이라면 홀려 정신을 못 차리는 본업 구미호, 현업 아이돌을 승준이 할망구라고 부르자 초원은 속이 시원한 듯 웃음을 터트렸다.
“가서 따지면 안 돼요.”
“알았으니까 말해 봐요.”
초원은 코를 훌쩍이다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나보고 새파랗게 어린년이라고 부르면서 어깨 막 이렇게 세게 비틀어 잡고 우리 비밀 여기서 다 털어놓는다고 협박했어요.”
마지막은 ‘우리 비밀’이 아니라 ‘내 비밀’이었지만 초원은 그 정도의 ‘단어 선정’은 스스로 너그럽게 봐주기로 했다.
초원의 3단 고자질을 듣는 승준의 얼굴이 3단으로 굳어져 갔다.
“어디? 여기?”
승준이 오른쪽 어깨를 가리키자 초원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앗, 하지 마요.”
말려도 소용없었다. 승준은 블라우스 단추를 몇 개 풀더니 옷자락을 어깨 아래로 끌어 내렸다.
“자국은 안 남았네.”
초원이 조마조마한 얼굴로 사무실 쪽을 살피며 드러난 속살을 손으로 가리는 동안, 승준은 어깨를 어루만지다 보드라운 피부에 다정하게 입술을 맞췄다.
“근데 가서 따지고 그러지 마요.”
“걱정 마요. 대신에 다음엔 1점만 받아도 바로 격리소 가게 벌점 채워 둘게요.”
그렇다는 건 최소 90일 격리였다. 초원은 슬슬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진정시키며 옷깃을 어깨 위로 올렸다.
“아, 오늘 삼신할머니 오신다고 그랬는데.”
비밀을 아는 또 다른 존재가 온다는 소리에 흠칫 놀란 초원의 손이 허공에서 멈추고, 승준이 대신 블라우스 단추를 채우기 시작했다.
“구미호가 꼼짝을 못 하거든. 내가 할머니 오시면 혼쭐을 내 달라고 할게요.”
‘아, 좀 얌전히 팀장실에 붙어 있을 것이지.’
초원은 어깨 뒤를 힐끔거리며 투덜댔다.
남자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던 승준은 문 근처 복사기 앞에 서 있는 초원을 보고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3팀 사무실 바로 옆에 복사기가 있는데 여기까지 와서 이러고 있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홍 주임,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종일 팀장 스토킹이네?”
“복사기 고장 나서⋯.”
“고장은 무슨, 아까 아름 씨가 잘 쓰고 있던데.”
그때 저 멀리서 들리는 교태 넘치는 웃음소리에 초원의 눈썹이 움찔했다.
“그렇게 불안하면 날 얼른 품절시켜 주든가.”
“쳇, 그런다고 구미호가 안 꼬여요?”
“하, 진짜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거야?”
“우리 이모가 그러는데 사계절은 만나 보고 결정하는 거래요.”
복도를 지나가는 직원에게 아무렇지 않게 눈인사를 한 승준은 직원이 지나가자마자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하, 내년까지 기다리면 애는 언제 가지려고? 그 보살님 말 기억 안 나요? 올해 가지랬는데?”
초원은 대꾸도 하지 않고 갓 찍어 낸 따끈따끈한 이면지를 트레이에서 꺼내 들었다.
“돌다리 안전한데 왜 자꾸 두드리고 있어?”
여전히 대꾸 없이 초원은 사무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자꾸 그러면 나도 방법이 있어요.”
이번엔 제법 목소리가 컸지만 그녀는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모퉁이를 지나 사라졌다.
삼삼오오 복도를 지나가며 잡담을 하는 남자들의 목소리가 3팀 사무실까지 새어 들어오자 초원은 고개를 들어 사무실 입구를 기웃거렸다.
같은 회의에 들어간 다른 사람들은 이미 다 나왔는데 승준만 아직 무소식이었다. 그 불여우는 아직도 사무실 안을 쏘다니고 있으니 방심할 수 없었다. 초원은 일어나 복도로 나갔다.
“⋯해 주실 수 있는지⋯.”
회의실로 이어지는 모퉁이를 돌려는 차에 익숙한 중저음이 들려왔다.
‘혹시 그 여우 년이랑?’
모퉁이 너머로 고개를 살짝 내밀어 본 초원은 안도했다.
‘아, 삼신할매잖아. 헐, 잠깐!’
안도할 때가 아니었다.
‘할머니가 말하면 안 되는데⋯.’
초원은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모퉁이 뒤에 숨어 승준과 삼신할매의 대화를 엿듣기 시작했다.
“마, 그기야 내가 못 들어줄 것도 읍제. 이랬으믄 좋겠다 카고 바라는 기라도 있나?”
‘아, 구미호 혼낸다더니 그 얘긴가?’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건강하고 저희 곁 안 떠나기만 하면⋯.”
“그래, 그기 중요한 기라. 참말로 잘 생각했데이. 내가 우리 팀장님은 특별히 신경 써 주꾸마.”
“감사합니다.”
잠자코 듣던 초원의 얼굴에서 서서히 핏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어? 너 여기서 뭐 해?”
초원은 앙칼진 목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느새 다가온 구미호가 코앞에서 깔보듯 입속의 구슬을 굴리고 있었다.
모퉁이 너머로 고개를 쏙 내밀던 구미호는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잘 봐.”
사고가 멈춰 망부석처럼 굳어 있는 초원의 귓가에 여우가 속삭였다.
“어머, 자기야! 여깄었구나?”
모퉁이를 돌아 폴짝폴짝 뛰어가던 구미호는 승준의 앞에 서 있던 노인이 뒤돌아보자 교태 넘치게 뛰던 그 자세 그대로 굳었다.
“옴마나⋯.”
순간, 초원의 눈앞으로 무언가가 바람 가르는 소리를 내며 지나가더니 복도 저 끝으로 사라졌다.
“야야, 여시야 일로 온나. 니 내랑 이바구 좀 하자.”
삼신할매가 구미호를 쫓아 가 버리고, 사무실로 돌아가려던 승준은 복도에 기대어 서 있는 초원을 발견하자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꾸욱 눌러 내렸다.
“홍 주임, 또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자꾸 이러면 신고할 겁니다, 혼인신고.”
머릿속이 시끄러웠던 초원은 눈만 살짝 흘기고 사무실을 향해 멍하니 발을 옮겼다.
‘할머니는 왜 점지 못 한다는 말 안 하신 거지? 나한텐 능력 밖이라고 하셨잖아. 나 말하는 줄 몰랐나? 아님 알면서도 예의상 모른 척해 준 건가?’
***
띠링, 누군가의 핸드폰이 짧게 울리고 단잠에서 깬 초원은 얼굴을 찡그리며 몸을 웅크렸다.
‘발 시려⋯.’
어젯밤 자취방 침대에 누워 TV를 보다 저도 모르게 곯아떨어지는 바람에 양말을 신고 자는 걸 깜빡했다.
그래도 이번 겨울은 난로를 장만해 둬서 다행이었다. 초원은 발을 슬며시 ‘난로’의 다리 사이로 끼워 넣었다. 수족냉증이 심해 다 껴입고 자는 초원과는 달리, 열이 많아 팬티 한 장만 입고 자는 승준은 딴 계절을 사는 사람 같았다. 얼음장 같은 발이 닿자 잠이 깨어 버렸는지 승준이 눈살을 찌푸렸다.
“으음, 양말은⋯?”
“까먹어서⋯.”
승준은 손을 뻗어 차가운 발을 문지르며 서랍으로는 다른 손을 뻗었다. 그 따스한 온기에 초원은 기분이 좋아져 단단한 품으로 파고들었다.
한참 서랍 속을 더듬던 그는 빨간 수면 양말을 찾아 손수 신겨 주었다. 338개월짜리 아기가 된 기분이 이럴까? 초원은 그 다정한 손길을 만끽하며 넓은 가슴에 팔을 휘감았다.
서랍을 닫으려던 승준의 손이 멈칫하더니 다시 서랍 속으로 들어갔다. 밖으로 나온 손에는 네이비색 남자 손수건이 들려 있었다. 또 근거 없는 질투심에 사로잡히려나 싶어 초원은 묻기도 전에 대답했다.
“그거 누구 건지 나도 몰라요.”
승준은 잠시 초원을 물끄러미 보더니 다시 손에 쥔 손수건을 응시했다. 질투가 이글이글 타오른다 할 수 없는, 먹구름이 짙게 낀 얼굴이었다.
“그, 연구소 가스 누출 사고 때 집에 왔더니 주머니에 있었어요.”
“나는 누구 건지 아는데⋯.”
그의 낮은 목소리가 깊이 잠겨 있었다. 초원의 의아한 눈빛에 승준의 서글픈 눈빛이 겹쳐졌다.
“⋯내 거거든.”
어쩌다 그의 손수건이 축축이 젖은 채로 자신의 주머니에서 발견됐는지 물으려던 초원은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의 서글픈 눈빛에 물기가 번지고 있었다.
“초원 씨⋯.”
“네?”
“우리, 아기 만들까?”
‘나도 그러고 싶지만 안 될 거예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이는 초원의 몸 위로 승준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올라왔다.
“그냥 해서 생기면 낳는 거예요. 알았죠?”
초원은 묻고 싶은 게 많았다. 그의 손수건이 왜 자신에게 있었는지, 승준은 왜 손수건을 보고 이렇게 슬퍼하는 건지, 그리고 왜 저걸 보고 갑자기 아이 이야기를 꺼내는 건지.
하지만 지금껏 본 적 없는 짙은 슬픔에 젖은 눈빛을 보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멍하니 고개만 끄덕였다.
“사랑해.”
초원의 이마에 뜨거운 입술이 와 닿고, 승준의 코끝이 초원의 콧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내려갔다.
“응?”
대답을 재촉하는 눈빛에 초원은 입술을 달싹이다 어렵게 첫 마디를 뱉어 냈다.
“아기가 안 생기면⋯.”
그 쓰디쓴 말에 입속이 바짝 타들어 갔다.
“⋯안 생겨도, 그래도 나 사랑할 거예요?”
초원은 눈을 깜빡이며 차오르려는 눈물을 꾸역꾸역 뒤로 삼켰다. 승준은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를 어리둥절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당연하지. 초원 씨 사랑하니까 아이를 갖고 싶은 거지, 아이가 갖고 싶어서 초원 씨 사랑하는 거 아니잖아.”
애써 억누르고 있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일그러지는 얼굴을 가리려 올라오던 초원의 손이 채 닿기도 전에 커다란 손이 뺨을 감싸더니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쳤다.
“왜 이렇게 날 못 믿지? 혹시 내가 불안하게 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불안할 것이 없는 지금이었다. 초원이 자꾸만 그의 사랑을 의심하고 무너지길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 두드려 대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시절 그림자처럼 두 사람을 따라다니던 불안이 습관이 되어 잠재의식 속에 새겨지기라도 한 걸까?
“아니,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내가⋯ 흑.”
서러움과 미안함, 고마움이 한데 뒤섞인 흐느낌이 터져 나오며 입술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초원을 끌어안고 아이를 어르듯 토닥이던 승준은 눈을 감았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얼굴들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우리 애들도 사랑하지만⋯.’
“난 언제나 초원 씨가 제일 중요해. 내 인생의 파트너잖아. 초원 씨한테는 안 그래요?”
묻자마자 초원은 눈물 젖은 얼굴을 들더니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그 울먹이는 얼굴도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던 승준은 흐뭇한 미소를 띤 얼굴로 그녀의 이마에 길게 입을 맞췄다.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초원 씨 안 떠나니까 걱정 마요.”
모든 걸 까맣게 잊고 살던 때에도 그의 마음이 초원을 떠난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모든 걸 기억하는 지금, 모든 걸 잊은 여자의 마음을 되찾아 오기 위해 갖은 애를 썼던 그가 초원을 떠날 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