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emperature difference between the woman and the man RAW novel - chapter 65
초원이 느끼기에 원한이 있는 건 아니라 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이승을 떠돌고 있는 걸까?
암흑 속을 한없이 응시하며 망설이던 그는 결심한 듯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죽은 사람의 한은 못 풀어도 혼자 살아남은 자신의 한은 풀고 싶었다.
승준은 식탁 앞에 앉아 맞은편에 놓아둔 딸기 케이크 한 조각에 시선을 고정했다. 손에 든 위스키 잔은 벌써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승아야, 맛있니? 초원 씨는 이 집 케이크가 제일 맛있다고 하더라.”
자신을 따라다니는 귀신이 승아라는 건 보지 못해도 알 수 있었다. 부모님은 기름진 음식을 싫어하셨으니 새우튀김 옆을 서성일 리가 없었다.
“너도 딸기 좋아했잖아. 오빠 이제 딸기 사 줄 돈은 많은데 네가 없네.”
쓰디쓴 입에서 긴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퇴근할 때 즈음이면 올 때 야식 사 오라는 동생의 문자가 와 있었다. 그때는 그게 왜 그렇게 귀찮았는지, 사다 주면서도 군소리를 했던 게 이젠 평생 후회할 일이 됐다.
“미안하다. 그깟 일이 뭐라고⋯. 그날 내가 집에 일찍 왔으면⋯.”
어쩐지 그날만은 동생의 문자가 와 있지 않았다.
“⋯내가 아니었던 거 이젠 다들 알지?”
긴 세월 매일같이 그를 괴롭혔던 질문을 어렵사리 꺼냈지만 답을 들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범인은 잡았지만 만천하에 공개해 심판대에 세울 순 없었다. 그 탓에 그 사건은 공식적으로는 장기 미제 사건으로 남았고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그가 범인이라고 믿었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살인마라고 손가락질하는 건 상관없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가족들이 그렇게 오해하고 떠난 건 죽어도 풀리지 않을 한이었다.
자신을 보고 공포에 새하얗게 질리던 승아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때 내가 널 안 깨웠더라면 살 수 있었을까? 그냥 편히 보내 줄 걸 괜히 깨워서⋯.”
승준은 그 끔찍한 기억을 떨쳐 버리려 고개를 흔들다 잔에 남은 위스키를 비웠다.
“난 너 살리지도 못했는데⋯.”
뱀파이어 사건 때 살아남은 게 다 승아의 덕이었다니 미안함에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눈앞의 의자가 사실은 텅 빈 게 아니길 바라며 그는 중얼거렸다.
“그래도 내가 정말 혼자는 아니었구나. 고맙다.”
주말은 어김없이 다시 찾아오고 초원은 오늘도 소파에 누워 팝콘을 먹으며 밀린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띵동, 초인종이 울렸지만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집주인의 발소리가 현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잠시 웅얼거리는 말소리에 이어 문 닫히는 소리가 나더니 승준이 제법 무거워 보이는 박스 하나를 들고 거실로 들어왔다.
“뭐 샀어요?”
박스에 찍힌 온라인 서점 로고가 눈에 들어왔다.
“만화책.”
“만화책?”
저렇게 인문학책같이 생긴 얼굴로 만화책이라니. 초원은 보던 드라마를 멈추고 몸을 일으켰다.
별다른 설명 없이 다시 거실 밖으로 사라졌던 승준이 색이 바랜 만화책을 한 아름 안고 돌아왔다.
“초원 씨 오늘 할 일 없죠?”
“할 일 없는 게 오늘 할 일인데요.”
커피 테이블 위에 책을 내려놓고 박스를 뜯던 승준이 피식 웃었다.
“그러지 말고 승아랑 만화책 좀 같이 봐줘요.”
말도 안 통하는 귀신과 같이 만화책을 보라니. 다른 사람 부탁이었다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거절했을 거다. 하지만 이 남자가 누군가? 오늘 저녁에 스테이크 구워 주기로 한 남자 아닌가. 초원은 군말 없이 승준이 건네주는 1권을 받아 들었다.
어느새 소파는 승준의 차지가 됐다. 누워서 책을 읽던 그는 깔깔대는 웃음소리에 책에서 시선을 뗐다. 바닥에 앉은 초원의 어깨가 들썩였다. 처음에는 “다 봤어요? 다 봤어요?”하고 승아에게 물으며 책장을 천천히 넘기더니 이제는 저도 빠져들었는지 숨넘어가게 웃고 있었다.
“아우, 답답해. 말을 해, 그냥.”
이제는 만화책 속 인물에게 훈수까지 두고 있었다.
초원의 앞, 커피 테이블에는 상큼한 향을 풍기는 딸기 두 접시가 놓여 있었지만 바닥을 듬성듬성 보이는 건 하나뿐이었다.
딸기를 포크로 찍어 들던 초원은 승준이 아닌 누군가에게 말을 걸었다.
“아, 진짜 고구마 장난 아니다. 그쵸?”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허공에 대고 얼굴을 찡그리는 초원이 미쳤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보는 승준의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가 번졌다.
행안부 산하 특이현상관리청의 위엄
“누굴까나⋯.”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남자는 누가 들을세라 입을 막았다. 이 작은 방 안에 사람처럼 생긴 것이라곤 까까머리를 하고 있는 이 남자 하나뿐이었지만, 이곳은 말 그대로 벽에도 눈과 귀가 있는 곳이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남자의 손이 가려운 데를 긁기라도 하는 듯 흰 상의 아래에서 천천히 움직였다. 그 움직임에 KAC-C-002944가 새겨진 명찰이 들썩였다.
먹구름이 걷힌 듯 작은 창을 통해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남자는 햇빛이 방바닥에 그린 바둑판무늬를 향해 혀를 찼다. 바깥세상을 느낄 수 있는 통로라고는 저 작은 창 하나뿐인데 그마저도 손바닥 하나 지나갈 정도의 창살로 가로막혀 있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어제는 운수 좋은 날이었다. 점심에 제법 먹을 만한 게 나왔다 싶었더니 선물까지 같이 딸려왔다.
남자는 밥 속에서 몰래 건져 올려 둔 긴 머리카락 하나를 옷 속에 숨긴 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누구의 머리카락일까? 당장 이걸로 변신해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징계를 당한 지 이제 겨우 며칠이었다. 또 그 창문 없는 코딱지만 한 방으로 끌려가는 건 끔찍했다.
남들 없는 능력 있다고 이렇게 사람을 가둬두고 실험실 쥐 취급하며 괴롭히다니.
‘21세기 민주국가에서 이런 인권 유린이 있나.’
온몸이 근질근질했다. 이건 손톱 아래에 피가 맺히도록 긁어 봤자 시원해질 수 없는 가려움이었다.
‘아니지, 남의 피가 맺히면 시원하지.’
남자는 문득 첫 경험의 희열을 떠올려 보았다.
항상 착실하고 믿음직스럽다는 소리가 따라다니던 형, 그리고 늘 ‘너는 형의 반만큼이라도 해라’라는 소리를 귀가 따갑도록 들으며 괴물 취급을 당하던 그.
그렇게 착실하고 믿음직스럽던 아들이자 오빠가 자신의 숨통을 끊는 순간 아버지와 누나의 얼굴이 참으로 볼만했다. 충격과 배신감과 절망이 영원히 박제되어 버린 얼굴들이라니.
‘영근아! 너 영근이지?’
“하⋯, 씨발.”
형의 얼굴을 한 자신을 유일하게 알아봤던 어머니의 절규가 다시 귓전에 울리자 그는 거칠게 귀를 후볐다.
“아, 썅!”
그 바람에 쥐고 있던 머리카락이 어딘가로 떨어져 사라졌다. 이리저리 둘러봐도 못 찾은 그가 미친놈처럼 침대 위를 손으로 훑어대는 순간, 밖에서 사이렌이 울렸다.
“아니야, 그런 거 아니라고!”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무장한 군인들이 우르르 들어와 그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그 뒤로 흰 방호복을 입은 자들이 청소기를 들고 들어오더니 때아닌 대청소를 시작했다.
이불을 털던 사람이 긴 머리카락을 발견하곤 남자를 붙잡고 있는 군인들에게 눈짓을 했다. 이윽고 철저한 수색을 받으러 끌려 나가는 남자의 절규가 긴 복도에 메아리쳤다.
‘씨발, 내가 그놈만 제대로 끝냈어도⋯.’
늦은 밤, 침대에 웅크려 누운 남자는 미완으로 남은 의식을 곱씹어 보았다. 이건 놈을 향한 복수심이 아니었다. 그저 아쉬웠다. 생각하면 할수록 이 가려움이 지독해졌다.
몇 달이나 공들여 준비한 의식이었는데 하필이면⋯.
셋은 계획대로 깔끔하게 끝냈다. 이제 남은 한 놈이 집에 올 때를 기다려 자살로 위장해 죽이고 죄를 뒤집어씌우면 되는 일이었다. 그가 제 형에게 그랬듯이.
이번에는 매달아서? 아니면 욕조가 나으려나? 어차피 밤늦게나 돌아올 놈이었다. 방법을 고민하며 한가롭게 샤워를 하고 나왔더니, 하필이면 그날은 그놈이 일찍 올 게 뭔가.
썩을. 그 한 번의 실수가 이 꼴로 이어질 줄이야.
남자는 운 나쁘게 잡힌 후 자신을 괴물 보듯 응시하던 놈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렸다.
그래도 오늘은 운이 나쁘지 않았다. 그 머리카락만 뺏기고 말았으니 말이다.
귀를 후벼파던 남자의 손끝에 노란 털이 딸려 나왔다. 자신을 수색했던 군인의 옷자락에서 훔친 털이었다. 아무리 봐도 사람은 아니고 그 군인이 고양이라도 키우는 모양이었다.
“될까나?”
남자는 창살 사이의 틈을 눈으로 가늠해 보며 씨익 웃었다.
***
시곗바늘이 6시 5분을 가리키고 초원을 제외한 팀원들이 자리에서 일어서기 시작했다. 코트를 걸치던 병훈은 여전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초원을 딱하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시간 되는 사람들끼리 병훈이 자주 가는 횟집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그런데 초원은 느닷없이 팀장이 회의 준비를 도와달라며 야근을 시키는 바람에 사무실에 발이 묶인 신세가 됐다.
“쩝, 팀장의 총애를 받는 게 결코 좋은 게 아니라니까? 나처럼 길고 가늘게, 응?”
“가늘다 못해 끊어질 것 같네요.”
초원은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여튼, 수고해. 팀장님한테 대신 맛있는 거 사 달라고 아양이라도 떨어 봐.”
아양이라는 말에 초원은 눈살을 찌푸렸다.
‘팀장이 맛있는 거 사 주겠다고 아양을 떨어도 모자랄 판국에⋯.’
팀원들이 다 퇴근해 버리자 기다렸다는 듯 승준이 팀장실 밖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왔다.
“밥부터 먹고 할까요?”
“헐, 진짜 야근시킬 생각이에요?”
야근은 그저 초원이 회식에 못 따라가게 하려고 급조한 핑계인 줄 알았다.
“아니, 뭐 초원 씨는 놀아도 되는데⋯. 도와주면 더 고맙고.”
모르는 사람이 봤더라면 쩔쩔매며 멋쩍게 웃는 남자가 주임이고 못마땅한 얼굴로 팔짱을 낀 여자가 팀장인 줄 알았을 것이다.
“꽃등심 먹으러 갈래요?”
마법의 단어였다. 순식간에 딴 사람이 된 초원이 싱글벙글 웃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래도 나 회 진짜 먹고 싶었는데⋯.”
초원은 지글지글 익어 가는 꽃등심을 홀린 듯 바라보다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회는 안 돼. 우리 애기한테 안 좋아.”
“무슨 있지도 않은 애기 타령이에요.”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아?”
승준을 멀뚱히 바라보며 눈을 깜빡이던 초원은 이내 한숨을 쉬더니 양파절임만 뒤적이기 시작했다. 초원의 젓가락질에 마구잡이로 뒤섞이던 양파 위로 육즙이 뚝뚝 떨어지는 소고기 조각이 잔뜩 얹혀졌다.
“여튼, 회가 아니더라도 회식 따라가지 마요. 초원 씨 분위기에 휩쓸려서 술 마실 것 같아. 그리고 박 주임 취하면 담배도 피우는데⋯.”
부담스럽다 못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요즘 내내 이런 소리뿐이었다. 대체 이런 건 어디서 알아 오는 건지 초원도 잘 모르는 임신 상식을 읊으며 잔소리를 쏟아 내고 있었다. 이골이 난 그녀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꽃등심만 날름날름 입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나저나 그날 올 때 지나지 않았나?”
“아뇨.”
사실 이미 지났다. 하지만 이 정도 늦는 건 스트레스가 심하면 흔히 있는 일이었다. 이번에도 그런 것일 게 뻔했다. 이렇게 매일 옆에서 압박을 주고 있으니 스트레스를 안 받는 게 이상했다.
멋모르고 싱글벙글 웃으며 고기를 구워 주는 남자를 보고 있자니 소주가 절실했다.
저녁을 먹고 돌아온 초원은 노트북을 들고 와 승준의 책상에 내려놓았다. 벌써 승준이 그의 자리 옆에 의자를 가져다 두었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노트북 전원 버튼을 눌렀다. 부팅이 끝나길 기다리던 초원의 눈이 그녀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던 남자의 눈과 마주쳤다.
“이렇게 나란히 앉아서 야근하는 것도 낭만적이지 않나?”
“헐⋯, 낭만 다 죽었네.”
승준은 투덜대기 시작하는 초원을 두 팔로 휘감아 끌어당겼다. 귀찮은 듯 몸부림치는 그녀의 정수리와 이마에 쪽쪽 입술이 닿았다.
“상사랑 사귀면 덕 좀 볼 줄 알았더니⋯.”
이내 몸부림은 잠잠해졌지만 입은 여전히 투덜대고 있었다.
“이젠 막내도 아닌데 이런 건 막내 시켜야죠.”
“그럼 지금까지 막내라서 시킨 줄 안 건가?”
사귀기 전에도 이렇게 감사니 회의 준비니 하며 초원에게 야근을 시킬 때가 있었다. 그건 사실 단둘이 남아 시간을 보내려는 꼼수에 가까웠던 걸 그녀는 몰랐던 모양이다.
“헐, 대체 언제부터 나한테 흑심 품었던 거예요?”
“흑심이라니, 순정인데.”
초원은 슬슬 딴짓의 시동을 거는 승준을 밀어내고 노트북 마우스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내 승준이 검토해 달라고 보낸 스프레드시트 파일을 열어 본 그녀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거 아름 씨가 하는 거 아니에요?”
“어, 아름 씨가 한 거예요. 근데 못 믿겠어서.”
초원이 또 한숨을 내쉬더니 거칠게 마우스 휠을 내렸다. 요즘 짜증이 부쩍 많아진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승준의 입가에 은근한 미소가 감돌았다.
‘임신한 것 같은데⋯.’
정적을 이따금 딸깍, 드르륵 하는 마우스 소리만이 흔들고 있었다. 들여다보던 모니터에서 눈을 뗀 승준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씨익 웃었다. 화면을 응시하고 있는 초원의 눈꺼풀이 무거워 보였다.
“졸려요?”
그 말에 초원은 두 손으로 얼굴을 비비기 시작했다.
“흐음, 커피라도 마셔야 할까 봐요.”
“커피 안 돼요.”
“하, 진짜! 커피도 안 돼, 술도 안 돼, 회도 안 돼! 대체 뭔데 멋대로 다 안 된다고 그래요?”
조용하다 갑자기 분통을 터트리는 그녀의 눈가로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미안, 미안. 내가 잘못했어요.”
승준은 아이처럼 서럽게 우는 초원을 끌어안고 달랬다.
“그럼 내가 버블티 사다 주는 건 어때요? 아님 핫초코로 사다 줄까? 휘핑크림 잔뜩 얹어서.”
울음이 잦아들었다. 이내 초원은 코를 훌쩍이며 들릴락 말락 중얼거렸다.
“⋯둘 다 사 줘요.”
승준이 나가고 훌쩍대며 티슈 갑에서 티슈를 뽑던 초원은 멍하니 그의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시선을 사로잡은 건 승준의 계정으로 로그인된 특관청 데이터베이스 화면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다 승준의 의자로 옮겨 앉은 그녀는 검색창에 자신의 직원 ID를 넣었다. 돋보기 모양 버튼을 누르자 예상대로 파일 하나가 나타났다.
초원의 계정으로는 열 수 없는 파일이었다. 본인의 기억 억제 보고서는 열람 금지이니 말이다. 하지만 본인도 아니고 보안 2등급인 승준의 계정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보고 후회하지 않을까?’
망설였지만 이럴 시간이 없었다. 초원은 눈을 질끈 감고 마우스 버튼을 눌렀다.
[관련자 열람 불가]“뭐?”
초원의 기억 억제 보고서인데 어째서 승준이 관련자인 걸까?
‘설마 직속 상사도 관련자인가?’
믿었던 승준의 계정으로도 열람이 안 되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파일 제목에 있는 사건 번호를 검색해 보았다.
검색 결과에 파일이 두 개 더 나타나자 초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새로 나타난 사건 보고서도, 누군가의 기억 억제 보고서도 전부 [관련자 열람 불가] 메시지를 띄울 뿐이었다. 초원은 허무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이건 누구지?’
초원은 다른 사람의 기억 억제 보고서에 적힌 직원 ID를 검색창에 쳐 넣었다. 사건 번호가 같다는 말은 그녀와 같은 사건에 휘말려 같이 기억 억제를 받았다는 뜻이었다. 이 사람을 찾으면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엔터 키를 누르려던 손가락이 얼어붙은 듯 공중에서 멈췄다.
‘ID가 같아.’
검색창에 직접 친 ID가 그 옆에 표시된 접속자 ID와 똑같았다.
‘이게 무슨⋯.’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리자 초원은 뒤로 가기 버튼을 미친 듯이 누르고 또 눌렀다. 잽싸게 다른 의자로 몸을 옮기는 순간, 문이 열리며 손에 음료 캐리어와 케이크 포장을 든 승준이 들어왔다.
“자, 공주님. 마음껏 골라 드시죠.”
“공주는 무슨⋯.”
초원은 버블티를 입속 가득 빨아들이며 승준을 곁눈질했다. 어느새 일에 무섭게 집중하고 있는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머릿속은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엉켜 있었다.
‘대체 무슨 사건이었길래? 그걸 이 남자랑 겪었다고? 그것도 하필 잊고 싶을 정도로 괴로운 일을? 혹시 이 남자, 알고 있을까? 물어보고 싶어. 하, 근데 물어봤는데 모르고 있으면 어떡해? 괜히 잘 사는 사람 혼란스럽게.’
초원은 빨대를 잘근잘근 씹기 시작했다. 이 실타래를 어떻게 풀어야 좋을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
요즘 제4격리소 격리팀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다.
하긴, 위험 등급 살인마가 감쪽같이 격리소에서 탈출했는데 분위기가 잔칫집이면 더 말이 안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