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emperature difference between the woman and the man RAW novel - chapter 68
“여기 산 지 오래됐어요?”
“아뇨, 저 여기 안 살아요.”
“그럼 놀러 온 거예요?”
“그건 아니고 그냥 짐 가져다주러 온 거예요.”
“여기 아는 사람 살아요?”
불편한 기색을 보여도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꼬치꼬치 캐물었다. 엘리베이터가 마침내 20층에 도착하고 여자가 내리자 초원은 숨을 크게 내쉬었다.
익숙한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간 그녀는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존재를 향해 쓴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요, 승아 씨.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오빠를 위하는 길이에요.”
초원은 승준의 물건을 제자리에 놓고 자신의 짐을 다시 캐리어에 채워 넣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듯, 승아는 그러는 내내 뒤를 따라다녔다. 그런다 한들 능력이 이것밖에 안 되는 초원은 알아들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욕실에서 잊은 것이 없는지 둘러보던 초원의 손이 컵에 나란히 꽂힌 칫솔로 향했다.
‘또 버리면 안 사 줄 거니까 그땐 손가락으로 양치해요.’
여기서 처음 주말을 보냈을 때 초원이 칫솔을 버리고 간 게 섭섭했던 모양이었다. 다시 왔을 때 새 칫솔을 사 주면서 따끔하게 잔소리를 하던 그였다. 그 말이 생각나 피식 웃던 초원의 눈가에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누구보다 뜨거우면서 늘 찬 바람 부는 쌀쌀맞은 말투로 그걸 감추던 남자였다. 한참을 멍하니 서 있던 그녀는 칫솔을 주머니에 넣고 욕실 밖으로 나갔다.
침대 옆 협탁에 덩그러니 놓인 민트색 상자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벌써 허전했다. 처음에는 없던 것이 생겨 어색하더니 이제는 있던 것이 없어져서 어색했다. 하지만 지금의 어색함도 늘 그랬듯 잊혀질 거다. 목걸이도, 남자도.
***
“팀장님, 내일 뵙겠습니다.”
“네, 잘 들어가세요.”
6시를 조금 넘긴 시각. 팀원들이 하나둘씩 사무실을 빠져나가며 인사를 해 오고, 승준도 집에 갈 채비를 하며 코트를 집어 들었다. 긴 하루였다. 얼른 집에 가서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핸드폰이 울리자 그는 은근한 미소를 띠며 책상 위에 놓인 폰을 집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초원이었다.
‘먹고 싶은 거 생겼나?’
웃으며 채팅앱을 열던 승준의 표정이 돌처럼 굳었다.
[미안해요. 나도 이기적인 인간이라 더는 못 하겠어요. 승준 씨 집으로 가요. 다신 여기 오지 말고.]“하아⋯. 이 여자, 진짜.”
어젯밤 다 이야기하고 끝난 일인 줄 알았다. 그걸 하루 종일 조용하다 퇴근 시간이 되어서야 이렇게 갑자기 꺼내다니,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듯 멍했다. 승준은 망설임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삐 소리 후 음성⋯.]‘하긴 받을 리가 없지.’
코트를 걸친 그는 밖으로 나가 팀장실 문을 거칠게 닫았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3층까지 올라와 비밀번호를 눌렀다.
삐빅.
도어락이 오류 음을 냈다.
“하아⋯.”
다시 비밀번호를 눌러보았지만 똑같은 소리만 날 뿐 문은 열리지 않았다.
“행동력 한번 끝내주네.”
그새 비밀번호를 바꿨든지 안에서 잠갔든지 둘 중 하나였다. 역시나 문을 두드려도 대답은 없었다. 핸드폰을 꺼내 또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안에서 울리는 소리가 뻔히 나는데도 받질 않았다.
“문 열어요. 셋 셀 동안 안 열면 119 부를 거니까. 하나.”
문에 귀를 대고 안쪽에서 나는 소음에 귀를 기울였지만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둘. 나 한다면 하는 거 알죠? 내일이면 온 동네 사람은 물론이고 회사 사람들까지 초원 씨가 자살 기도 했다고 수군댈 거니까 각오해요.”
“셋.”
잠시 뜸을 들인 그는 그래도 반응이 없자 조용히 목을 가다듬었다.
“네, 소방서죠? 여기 한강로 1가⋯.”
“집에 가요.”
명연기가 통했는지 문 너머에서 드디어 초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집에 왔는데 문을 안 열어 주잖아.”
“그만해요. 우리 끝났어요.”
“누구 맘대로 끝내?”
“제발 나 힘들게 하지 마요.”
힘들게 하지 말라는 말에 승준은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힘들게 하는 거야? 초원 씨 그 지독한 고집이 힘들게 하는 거지.”
듣고는 있는 건지, 초원은 대답이 없었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얼른 열어요.”
승준은 열리지 않을 문고리를 돌리며 다시 문을 쾅쾅 두드렸다.
“어서 열라니까?”
“어, 저기⋯.”
등 뒤에서 느닷없이 남자 목소리가 들리자 승준은 고개를 돌렸다. 초원의 앞집에 사는 남자가 문틈으로 눈만 빼꼼히 내밀고 내다보고 있었다.
“너무 시끄러운데⋯.”
“죄송합니다.”
이 방음 안 되고 좁은 곳에서 이러고 있는 건 변명의 여지없는 민폐였다. 승준은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골목길에서 창문을 올려다보며 전화를 걸고 또 걸었지만 그 고집 센 여자는 받을 리가 없었다.
‘혼자 있을 시간을 주지, 뭐.’
마음이 힘들어 저러는 것이니 저번처럼 며칠 혼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면 그에게 돌아올 것이다. 며칠도 그에게는 긴 시간이지만.
수면 부족도 모자라 하루 종일 격무에 시달린 터라 계속 이러고 있을 기력이 없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손에는 회와 소주가 든 봉투를 든 채로 승준은 아파트 지하 주차장을 가로질러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한숨을 쉬며 숫자가 바뀌는 모습만 바라보는데 엘리베이터가 1층에서 멈추더니 문이 열렸다.
“안녕하세요.”
날씨에 안 맞는 차림을 한 젊은 여자가 들어오며 인사를 하고, 승준은 대충 고개만 끄덕였다. 숫자 20이 써진 버튼을 누른 여자는 그를 바라보며 눈웃음을 쳤지만 말 섞을 기분이 아니었던 그는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여기 오래 사셨어요?”
타인에게 쓸데없는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대체 왜 그런 걸까? 승준은 한숨을 내쉬며 엘리베이터 디스플레이를 응시했다. 계속해서 얼굴에 꽂히는 시선이 불편해진 그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네.”
“저는 새로 이사 왔는데.”
“⋯⋯.”
“혼자 사세요?”
“아뇨.”
“몇 명이서 사세요? 21층은 펜트하우스 아니에요? 되게 클 텐데.”
“네.”
“저 펜트하우스는 한 번도 못 봐서⋯.”
여자는 승준을 향해 몸을 돌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여자가 실실 흘리는 눈웃음에 그는 머리카락 달린 벌레라도 본 듯 인상을 쓰며 고개를 돌렸다.
“⋯구경 한 번 시켜 주시면 안 될까요?”
“안 됩니다.”
별 정신 나간 여자가 다 있구나 싶었다. 집을 보고 싶으면 인터넷에서 검색만 해 봐도 사진 수두룩하게 나올 것을, 요즘 같은 세상에 생판 모르는 남자한테 집을 구경시켜 달라니.
드디어 20층에서 문이 열리고, 여자는 밖으로 나가서도 요염하게 웃는 낯으로 손을 흔들었다. 승준은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닫힘 버튼을 거칠게 눌렀다.
문이 다시 닫히는 순간 여자가 낮게 속삭였다.
“하, 씨발. 저 새끼 호모인가?”
여자의 눈에서 섬뜩한 살기가 번뜩였다.
승준은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소파 위로 던지고 그 옆에 풀썩 주저앉았다.
‘피곤하다, 피곤해.’
손에 든 봉투를 커피 테이블에 놓은 그는 TV를 켜 볼륨을 견딜 수 있는 최대치까지 올렸다.
와이셔츠의 단추를 두어 개 풀고 소매도 걷어 올렸지만 여전히 갑갑했다. 갑갑한 건 몸이 아니라 마음이었으니.
포장해 온 회를 대충 꺼내 펼치고 핸드폰을 들어 사진을 찍었다.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뭐든 통하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초원에게 사진을 보낸 그는 핸드폰 화면 위로 손가락을 놀렸다.
[맛있겠죠?] [초원 씨가 회 먹고 싶다고 그랬잖아.] [후회하지 말고 당장 와요.] [안 오면 나 혼자 다 먹을 거예요.]승준은 채팅방을 화면에 띄운 채로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소주잔 두 개와 접시 하나를 가지러 주방에 갔다 와서 다시 화면을 확인해 봤지만 메시지 옆에 뜬 1은 하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하⋯, 이 여자 진짜.”
핸드폰을 줄기차게 노려보고 있는다고 답이 올 것 같지도 않았다. 화면을 끈 승준은 회를 잔뜩 뜬 다음 접시에 올려 테이블 반대편에 놓았다.
“승아야, 거기 있지? 저녁 먹어.”
그는 소주로 잔 두 개를 채워 하나는 승아의 접시 옆에 놓고 다른 하나는 곧장 입으로 가져갔다. 열불 난 속에 알코올을 들이부으니 속이 더 끓어올랐다.
‘이렇게 뒤통수를 칠 줄이야.’
아프다길래 종일 걱정했더니 그건 다 그를 쫓아내려고 한 연기였나 싶었다.
‘내일 회사에서 가만두나 봐라.’
승준은 빈 잔 위로 다시 소주병을 기울였다.
흰 플라스틱 접시가 점점 모습을 드러내고 소주병은 거의 비어 가는데도 핸드폰이 울리지도, 현관에서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리지도 않았다.
“여자들은 왜 그러냐?”
승준은 죄 없는 동생을 붙잡고 술주정을 하기 시작했다.
“진짜 이해가 안 되네. 뭐가 그렇게 복잡해? 좋으면 만나는 거고 아니면 헤어지는 거지.”
좋으니까 헤어지자니. 그딴 말 같지도 않은 소리가 어처구니없었다.
“내가 죽을죄를 진 것도 아닌데 왜 쫓겨나야 해?”
멋모르고 초원을 들들 볶은 건 잘못이었지만, 그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예전이랑 똑같았는데⋯.’
별것 아닌 일로 울고 짜증 내는 그 감정 기복 하며 부쩍 많아진 잠까지, 예전에 임신했을 때 그대로였던지라 승준은 초원이 아이를 가졌다고 철석같이 믿을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이나 해 주든가⋯.”
그랬더라면 죽는 날까지 아이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을 거다.
“약속도 하나도 안 지키고⋯.”
정작 당사자는 여기 있지도 않은데 승준은 그간 섭섭했던 걸 다 쏟아 내려는 모양이었다.
“다 잊어도 나랑 사랑에 빠져준다 할 땐 언제고 딴 놈 꽁무니나 쫓아다니질 않나.”
술이 될 대로 된 그는 승아는 전혀 모르는 일까지 푸념하기 시작했다.
“집에 돌아와서도 나랑 결혼해 준다고 약속해 놓고는⋯. 진짜 치사해서⋯.”
따지자면 그 약속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초원을 탓할 일도 아니었다. 그 자신만 해도 입술을 다시 맞대기 전까진 까맣게 잊고 있었지 않은가.
정말 ‘어느 날 갑자기’였다. 전날까지만 해도 그냥 ‘부하 직원 6’에 불과했던 여자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초원만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면서도 아려 왔다. 그걸 도저히 머리론 이해할 수 없어 억누르려고 몇 년을 애썼던 그였다.
“하⋯, 몸에서 사리 나오겠네.”
차라리 그곳에서 살던 때가 좋았다. 초원이 그토록 바랐던 것처럼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던 걸까. 죽는 한이 있더라도⋯.
소주잔을 기울이던 승준은 문득 손을 멈추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냥 기억을 찾아 줄까?’
그렇게 두 사람이 어떻게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는지 떠올려 주고 싶었다. 그러면 더는 헤어지자는 잔인한 소리를 안 하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고개를 들었지만, 이내 쓰디쓴 소주와 함께 삼켜 버렸다.
기억을 찾은 초원이 과연 그를 용서할까?
‘나 다시 돌려보내 줘요, 제발.’
좁은 관찰실에 메아리치던 그 애끓는 절규가 묻힌 기억의 틈을 비집고 나와 이젠 그의 머릿속에서 메아리치고 있었다. 다신 되살리고 싶지 않았던 그 악몽 같은 기억에 질끈 감은 그의 눈가가 젖어 있었다.
‘이기적인 것도 정도가 있지.’
아이를 못 가진다는 지금의 그녀에게 이젠 다시 볼 수 없는 아이들의 기억을 되살려 주는 건 악마도 울고 갈 잔인한 짓이었다. 이제야 왜 초원이 돌아오지 않으려 갖은 애를 썼는지 깨닫게 된 그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수면 부족과 사랑싸움과 소주는 피곤한 조합이었다.
남은 음식을 냉장고에 넣은 승준은 2층으로 올라갔다. 욕실로 들어가 씻으려던 그의 발걸음이 침대 옆에서 우뚝 멈췄다.
여기 있지 말아야 할 민트색 상자가 얌전히 협탁 위에 놓여 있었다. 내키지 않는 손으로 상자를 열어 본 그는 지친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예전처럼 며칠 혼자 있을 시간을 주면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가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하아⋯.”
이렇게 잔인해야 하는 걸까? 침대에 무너지듯 주저앉아 받지 않을 전화를 걸고 또 거는 그의 손에 매달린 목걸이가 초조하게 흔들렸다.
독하고도 약한 여자
스르륵 마찰음을 내며 옷은 하나둘씩 차디찬 바닥으로 떨어졌다.
살 스치는 소리가 거칠어지는 숨소리에 묻히기 시작하고 어느새 뜨거운 열기와 땀 내음이 서늘한 공기 속으로 스며들었다.
어두운 방 안으로 불빛이 춤추듯 어른거리고 두 사람의 그림자 또한 흔들리고 있었다.
“오늘 밤은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사람을 흔들어 놓고도 여전히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한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 사무적인 말투에 초원은 울컥했다.
“저 좀 사랑해 주세요.”
제발 팀장의 가면은 집어치우고 조승준이라는 남자의 얼굴로 자신을 안아 줬으면 했다.
“그건 늘 하고 있는데.”
초원의 눈가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왜 아직도 이런 꿈을 꾸는 거야?’
새삼 커져 버린 침대에 홀로 누워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새벽빛에 푸르게 물든 천장 벽지 무늬가 흐려지고 또 흐려졌다.
***
벌써 삼 주째였다.
승준은 회의실 테이블 저 멀리 앉은 초원에게 막막한 시선을 던졌다. 봐줄 리 없다는 건 그도 알고 있었다. 공적으로 꼭 필요할 때가 아니고서는 그에게 눈 한 번 맞춰 주지 않는 여자였다.
‘독한 여자.’
고집이 센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독할 줄은 몰랐다.
“토마토 주스, 초원 주임님 거 맞죠?”
“네!”
테이크아웃 음료를 들고 들어온 아름이 주스를 넘겨주고, 초원은 빨대를 쭉 빨더니 살 것 같다는 미소를 지었다.
“홍 주임, 케첩을 왜 마시고 그래?”
라테 뚜껑을 열던 병훈이 인상을 찌푸렸다.
“케첩이라뇨. 이게 얼마나 상큼한데.”
“홍 주임도 전에 그러지 않았어요? 케첩을 왜 마시는지 모르겠다고.”
잘 마시고 있는데 병훈도 모자라 현우까지 초를 치자 초원은 눈을 흘겼다.
“근데 땡기면 먹어 줘야지 어쩌겠어요.”
새침하게 웃는 얼굴에 힘들어 보이는 구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신났네. 누군 지금 죽을 맛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