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emperature difference between the woman and the man RAW novel - chapter 69
승준은 활활 타오르는 속으로 차디찬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이부었다.
집으로 찾아가 열어 줄 때까지 문 앞에서 버티는 작전은 더는 쓸 수가 없었다. 누가 신고라도 했는지 경찰이 오는 바람에 곤란해질 뻔했다.
‘이거 앞집 놈이 그랬어, 분명.’
작전을 바꿔 칼퇴근을 한 다음 뒤늦게 집에 오는 초원을 붙잡기도 하고 오죽하면 일부러 야근도 시켜 봤다. 외로워 봐야 정신을 차릴까 싶어 한 며칠 발길을 뚝 끊고 내버려 두기도 했지만, 외로운 건 그라 결국 못 참고 다시 매달리는 꼴이 됐다. 이렇게 온갖 수를 다 써서 애걸해도 이 여자는 앵무새처럼 끝났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지루한 발표가 이어지고 승준은 가끔 스크린에서 시선을 떼고 테이블 끝에 앉은 여자를 응시했다.
목이 그대로 굳어 버리기라도 했나 보다. 이쪽으로 고개 한 번 안 돌려 주고 스크린만 쳐다보고 있는 것이 얄미웠다.
‘언제부터 저렇게 열심히 들었다고⋯.’
책상 위에 머물러 있던 그녀의 손이 스르륵 위로 올라가더니 목 주변을 더듬기 시작했다. 습관처럼 목걸이를 만지려다 민망해진 손가락이 갈 곳을 잃고 옷깃만 덧없이 매만지는 걸 승준은 놓치지 않았다.
‘거봐⋯.’
마침내 발견한 아쉬움의 흔적에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똑똑.
“네.”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승준은 팀장실 문을 두드리는 누군가에게 대답했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그 누군가의 얼굴이 보이자 그는 끓어오르는 기대감을 애써 억눌렀다.
“팀장님, 바쁘세요?”
“아뇨, 들어와요.”
초원은 문을 닫고 들어와 책상 앞 의자에 앉을 때까지 내내 바닥만 보고 있었다. 야속하고 얄미웠다. 그래도 한 공간에 단둘이 있는 건 흔치 않은 기회였다.
“무슨 일로?”
여전히 시선을 아래로 고정한 채로 입술을 달싹이던 초원이 손에 쥐고 있던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그걸 받아 든 승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경기지청?’
하루아침에 쫓아낸 것도 모자라 이젠 완전히 그의 곁을 떠나겠다는 신청서에 서명을 해 달라니. 이 여자 어디까지 잔인해지려는 걸까.
‘장난하나.’
승준은 신청서를 북북 찢어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팀장님.”
그제야 초원이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원망 가득한 눈빛이었다. 정작 원망해야 하는 사람은 그가 아니던가. 울컥한 승준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초원에게로 다가갔다.
“왜 이러, 읍⋯.”
두 팔을 쥐고 그대로 끌어 올려 입술을 집어삼켰다. 초원은 고개를 돌려 거부했지만 이내 목덜미를 강하게 붙든 손에 이끌려 다시 입술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가슴팍을 밀어내던 손이 주먹이 되어 그를 때리고 있었지만, 멍이 들고 뼈가 부러진다 한들 승준은 놓을 생각이 없었다.
거친 키스 끝에 초원의 몸부림이 잦아들었다. 입술이 떨어지는 순간, 휘청이는 몸을 그는 그대로 단단히 끌어안았다.
“또 이딴 짓 해 봐. 다음엔 저 문 열어 놓고 할 거니까.”
으름장을 놓은 그는 힘없이 처진 초원의 고개를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 두 손으로 입을 단단히 틀어막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창백했다.
현우는 마우스 커서를 아래로 내려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10시를 넘긴 시각이었다.
“이만하고 집에 가요.”
현우의 말에 칸막이 너머의 초원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초원은 30분 전부터 침대로 직행하고픈 생각이 굴뚝같았다. 물론 직행하는 길에 잠시 냉장고를 경유할 생각이었지만.
노트북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선 그녀는 외투를 걸치고 핸드폰을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사무실 밖으로 나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현우가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지 자꾸 물끄러미 바라보는 게 거슬렸다.
“왜요? 할 말 있어요?”
역시나였는지 현우는 들켰다는 듯 웃었다.
“싸웠어요?”
“네?”
“팀장님이랑.”
늦게 퇴근할 땐 늘 핸드폰으로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내던 초원이었다. 그 누구가 누군지는 안 물어도 뻔했다. 그러던 여자가 요즘은 핸드폰을 방치해 두고 있었다.
“아⋯.”
초원은 잠시 발끝을 바라보더니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헤어졌어요.”
“왜?”
진심으로 놀란 현우의 목소리가 11층 홀을 쩌렁쩌렁 울렸다. 아무리 남녀 관계는 모르는 일이라지만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 듯했던 두 사람이 이렇게 순식간에 헤어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냥요.”
더는 묻지 말라는 듯 초원은 팔짱을 낀 채 마침 열린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그나저나 오늘은 왜 혼난 거예요?”
낮에 초원이 팀장실에 들어간 후 화가 머리끝까지 난 듯한 팀장의 외침이 들리고, 이내 밖으로 나온 초원은 도망치듯 화장실로 향했다.
“뭐, 그냥⋯.”
다들 크게 혼이 나고 운 줄 알았지만 초원은 그저 속이 안 좋았던 것뿐이었다.
“경기지청으로 전보 신청했거든요.”
“아⋯, 혼날 만하네.”
현우가 어울리지 않게 승준의 편을 들자 초원은 쓴 미소를 지었다.
“와, 근데 진짜 너무하다. 나한테 얘기도 안 하고.”
“선배한테 얘기하면 뭐 해요?”
“와, 파트넌데 당연히 얘긴 해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러면 따라오려고 할 거면서⋯.’
그렇게 되면 승준이 오해할 게 뻔했다.
초원이 피식 웃기만 하고 현우는 엘리베이터 문에 비치는 쓸쓸해 보이는 얼굴을 조용히 관찰했다. 초원이 떠나겠다고 하고 팀장이 화를 냈다니 이유는 몰라도 누가 헤어지자고 한 건지는 알 것 같았다. 꽃을 피우던 사랑이 단번에 시들어 버릴 정도의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궁금해한들 누구도 말해 주지 않을 건 잘 알고 있었다.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초원은 원룸 건물 앞에 서서 어렴풋한 미소를 지었다. 알고 나서 자세히 보니 현우의 눈에는 그 미소가 한층 더 그늘져 보였다. 속 시원히 이야기라도 하면 나을 텐데. 초원의 일이라면 기꺼이 지갑을 털려 가며 들어줄 수 있는데 말이다.
“불금인데 요 앞에 맥주집 가서 한잔할래요?”
현우의 제안에 그녀는 얼굴을 찡그렸다.
“요즘 나 속 안 좋아서 금주하는 거 알잖아요.”
“보통 실연은 술로 극복하는 거 아니었어요?”
“누가 실연을 했는데?”
느닷없이 끼어든 굵은 목소리가 늦은 밤 골목길을 쩌렁쩌렁 울렸다. 골목 입구에서 이쪽으로 걸어오는 남자를 본 초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회식이라도 끝나고 오는 듯 손에 들린 흰 비닐봉지가 흔들렸다. 승준이 다가와 그녀의 어깨에 떡하니 팔을 휘감고, 술 냄새가 코를 찌르자 초원은 손으로 코를 막았다.
“차 주임, 우리 초원 씨 데려다준 건 고마운데 이제 가 보세요.”
“팀장님, 많이 취하신 것 같은데 집에 가시죠.”
“하, 네가 뭔데? 차 주임, 자꾸 선 넘지 말고 처신 똑바로 하세요.”
“그럼 헤어진 사람 집에 술 취해서 찾아오는 건 괜찮은 겁니까?”
“누가 헤어졌다고 그래?”
점점 두 남자의 언성이 높아졌다. 이러다 곤란한 일이 터지겠다 싶었던 초원은 원룸 입구를 향해 승준의 가슴팍을 밀었다.
“선배, 주말 잘 보내고 월요일에 봐요.”
“진짜 괜찮겠어요?”
승준이 그녀에게 무슨 위험인물이라도 되는 줄 아는 건가? 현우가 걱정 어린 눈으로 괜찮냐고 묻자 승준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야! 내가, 흡⋯.”
술에 취해 목소리를 높이는 그의 입을 틀어막고 초원은 제발 좀 가라며 현우에게 손을 내저었다.
걱정스러운 시선을 끝까지 이쪽으로 향하던 현우가 마침내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고, 초원은 승준의 입을 막았던 손을 뗐다.
“팀장님도 집에 가세요.”
“나도 집에 가고 싶어. 좀 들여보내 줘.”
버럭버럭할 때는 언제고 어느새 불쌍함으로 모드를 바꿨나 보다. 초원은 눈을 피하며 그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가요.”
매정하게 밀어내고 원룸 입구로 향하는 여자에게 승준은 손에 든 봉지를 흔들었다.
“배 안 고파요? 생각나서 곱창 사 왔는데.”
사실 아까부터 솔솔 풍기는 고소한 숯불 냄새에 초원의 위장이 요동치고 있던 중이었다.
“내가 회식 끝나고 이거 사 오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고 그랬잖아요.”
눈앞에서 자꾸 저 맛있는 걸 흔들어 대니 초원은 미칠 것 같았다.
‘나 진짜 제정신 아닌가 봐.’
아무리 먹는 거 좋아해도 이렇게 환장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지금 저 곱창을 먹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절박함마저 들었다.
“먹고 싶죠?”
봉지를 휙 낚아채려는 작은 손을 승준은 잽싸게 피했다.
“초원 씨 먹는 거만 보고 가게 해 주면 줄게요. 응?”
“아, 좋다.”
승준은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는 초원을 뒤에서 감싸 안고 매달렸다. 집에 들여보내 주는 것도 좋고 이렇게 끌어안고 있는 것도 좋고, 무엇보다도 이 김에 바뀐 비밀번호를 알아낸 것도 좋았다.
“무거워요.”
“언젠 무거워서 좋다며.”
“좀 떨어져요. 술 냄새나요.”
“누구 때문에 마신 건데.”
문이 열리자 그는 활짝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날 후로 지금처럼 기분 좋았던 적이 없었다.
식탁 위에 흰 봉지를 털썩 내려놓은 그는 냉큼 침대로 다가갔다.
“아, 살 것 같네.”
코트를 벗어 걸던 초원은 침대 삐걱이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뭐 하긴, 침대에 누워 있지.”
“아니, 내가 그걸 몰라서 물은 게 아니잖아요.”
능청스럽게 대자로 뻗어 누운 남자를 일으켜 세울 생각으로 다가간 초원은 곧바로 후회했다. 손목이 붙들렸다. 휙 끌어 당겨져 순식간에 승준의 품에 안긴 꼴이 됐다.
“놔요, 이거.”
“잠깐만, 잠깐만 이러고 있어요.”
승준은 몸부림치는 작은 몸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팔다리로 단단히 휘감았다.
“먹는 것만 보고 간다면서요.”
“곱창값은? 설마 공짠 줄 안 건 아니죠?”
“놔 줘야 돈을 주든가 하죠.”
“누가 돈으로 달래?”
쭈욱 내민 입술이 점점 다가오고 몸 사이에 낀 손을 쓸 수 없었던 초원은 고개를 푹 숙였다.
“하아, 뽀뽀 좀 해 주면 뭐 닳나? 죽기라도 하나?”
“아까 낮에 했잖아요. 그것도 억지로 해 놓고 미안하지도 않아요?”
“내가 그렇게까지 돌게 만든 건 안 미안하고?”
또다시 원망 가득한 눈빛이 두 사람의 사이에서 뒤엉켰다. 이내 눈을 피한 초원은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미안한데 그냥⋯.”
“식기 전에 곱창부터 먹어요.”
승준은 초원의 입에서 가라는 소리가 나오기 전에 벌떡 일어나 앉았다.
“옷부터 갈아입지?”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식탁 앞에 앉은 초원은 여전히 블라우스에 정장 치마 차림이었다.
‘내가 바본 줄 아나?’
옷을 벗기 시작하면 그대로 침대로 끌고 갈 게 뻔했다. 곱창의 유혹에 넘어가는 바보짓을 저질렀지만 그 이상의 바보짓을 할 정도로 이성이 마비된 건 아니었다.
“팀장님은 안 먹어요?”
초원이 나무젓가락을 쪼개는 모습을 승준은 맞은편에 앉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아니, 난 배불러서.”
그러고 보니 선을 긋듯 또 팀장님 소리를 하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거 팀장님이 아니라 초원 씨 남친이 사다 준 건데.”
“저 남친 없는데요.”
“참 나, 내가 사 주는 거 먹으면서 못된 소릴 잘도 하네.”
“됐으니까 가져가세요.”
초원은 젓가락을 놓더니 포장 용기 뚜껑을 집어 들었다.
“미안, 먹어요. 응?”
억울해도 매달리는 사람이 납작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승준은 젓가락을 집어 초원의 손에 단단히 쥐여 주었다. 이내 젓가락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트롤보다 무서운 우리 마눌님⋯.”
승준이 손을 뻗으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머리를 애정 어린 손길이 쓰다듬고, 초원은 치우라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얼마나 마신 거야?’
단단히 취한 모양이었다. 저 말에 제대로 된 단어가 하나도 없었다. 초원은 이 남자의 마눌님이 아닐뿐더러 뜬금없이 튀어나온 트롤도 말이 안 됐다.
“술은 안 마셔요?”
“지금 팀장님 술 냄새만 맡아도 토할 것 같거든요.”
승준은 저도 모르게 쩝 소리를 내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저 철옹성 같은 고집을 술로 흐물흐물 녹여 와르르 무너뜨리고 그 속에 숨어 있는, 그를 사랑해 마지않던 여자를 되찾아 오고 싶었지만 오늘은 안 될 모양이었다.
그래도 좋았다. 이렇게 마음껏 볼 수 있어서. 초원은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지만 턱을 괴고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는 승준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한참 말 없던 그가 피식 웃었다. 승준은 손을 뻗어 그녀의 입가에 묻은 주먹밥의 밥풀을 떼어 내밀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걸 날름 받아먹은 초원은 이내 실수를 깨닫고 눈살을 찌푸렸다. 선을 그어야 하는데 이게 뭐 하는 짓일까?
“요즘 슬슬 벚꽃 피던데.”
“⋯⋯.”
“내일 벚꽃 보러 갈까?”
초원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이럴 줄 몰랐던 것도 아니면서 섭섭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입은 먹을 줄만 알고 말은 못 하나 보네.”
그제야 고개를 살짝 들고 흘겨보는 여자를 뒤로하고 승준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려는 건가 싶었던 것도 잠시, 그는 침대로 털썩 몸을 던졌다.
“뭐 하는 거예요?”
“피곤해서⋯.”
“피곤하면 집에 가요.”
“초원 씨 아직 덜 먹었잖아.”
의미 없는 입씨름 더 해 뭐 하겠냐는 듯 한숨을 쉰 초원이 다시 젓가락을 움직이고, 승준은 턱을 괴고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해 봐요.”
갑작스레 정적이 깨지자 초원은 줄곧 아래를 향하던 시선을 저도 모르게 들어 올렸다.
“헤어지자고 한 거 후회되죠?”
“아뇨.”
“거짓말.”
피식 새어 나오는 그의 웃음소리에 초원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머리카락이 흘러내렸지만 이렇게라도 시선을 가린 게 그나마 마음이 편했다.
“잘 때 이불 차면 덮어 주는 사람도 없고⋯.”